최근 수정 시각 : 2023-12-15 15:45:29

귄터 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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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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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귄터 빌헬름 그라스
Günter Wilhelm Graß
출생 1927년 10월 16일 
단치히 자유시[1]
사망 2015년 4월 13일 (향년 87세)
슐레스비히홀슈타인뤼베크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직업 소설가, 시인, 극작가, 조각가, 그래픽 디자이너
서명
파일:귄터 그라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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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colbgcolor=#fff,#1f2023>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라우엔버그 구 벨렌도르프
학력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조각∙그래픽 / 졸업)
베를린예술대학 (조각 / 졸업)
활동기간 1956년 - 2013년
언어 독일어
종교 가톨릭
배우자 안나 마가레타 슈바르츠 (1954-1978; 이혼)
우테 그루너트 (1979년 결혼)
자녀 프란츠 그라스 (1957년)
라울 그라스 (1957년)
로라 그라스 (1961년)
브루노 그라스 (196)
잉그리드 크루거 그라스 (1979년)
넬레 그라스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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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과거사 논란4. 이스라엘 비판5.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소설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소설 '양철북(Die Blechtrommel)'으로 유명하다. 양철북은 훗날 세일즈맨의 죽음을 영화화한 감독인 폴커 슐뢴도르프에 의해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2. 설명

독일 사민당 지지자로 상당히 진보적 인사며, 독일의 과거 청산을 주장했던 작가라서 극우파에게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또한 국내 문제뿐 아니라 해외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이는 작가로, 한국 군사정권에 비판적인 해외 지식인으로 자주 언론에 오르내렸다. 오적 필화 사건으로 잡혀들어간 김지하나 내란 음모 혐의로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김대중에 대한 석방을 촉구한건 유명한 일. 때문에 당연히 한국에서는 꽤 오랫동안 제한된 작가였다. 심지어 원작이 아닌 영화판 양철북도 한국엔 늦게 수입되었다.

파일:external/www.bookstation.hu/106096.jpg

2002년에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사고를 다룬 소설 "게걸음으로 가다(Im Krebsgang)"를 발매했다. 국내판 번역으로는 민음사에서 2002년에 '게걸음으로 가다'라는 제목으로 발행했으며, 2015년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게걸음으로'라는 제목으로도 발행했다.

3. 과거사 논란

그런데 그가 나치의 무장친위대(Waffen-SS)에서 복무했었다는 사실이 2006년에 그를 다룬 전기에서 밝혀졌다. 1946년까지 미국 수용소에 포로로 갇힌 경력이 있을 정도. 그리고 결국 본인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복무사실을 인정했다. SS는 지원제였기 때문에 자원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2]

다만 전쟁 말기에 들어서면 국방군이 징집한 병력이 친위대사단으로 군적을 옮겨 훈련받거나 제국노동대(Reichsarbeitsdienst)에 동원된 유소년 및 노인 노동인력이 전투원으로 재편되는 일은 꽤 있었다. 심지어 정예부대 중 하나로 알려진 9 SS 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은 인원 대부분을 제국 노동대에서 충원받았을 정도. 귄터 그라스는 후자에 속한다. 스스로의 인터뷰에 의하면, 아직 어린 나이에(당시 17세) 제국 노동대에 있기싫어서 일단 지원을 했는데 지원해서 드레스덴에 오고나서야 자신이 지원한 곳이 친위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 친위대(SS)가 아닌 무장친위대(Waffen-SS)경력은 상황에 따라 어느정도 참작될 수 있다. 2차대전 시작 전부터 나치당은 친위대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 친위대 입대자의 군대 영장을 면제해주었기 때문에 단순히 입대영장을 피해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3]

그리고 처음엔 무장친위대 지원자격을 까다롭게 제한했었지만, 전쟁이 격화되고 무장친위대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나중엔 비 게르만계 백인은 물론 아프리카나 아시아계 인종들까지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였었다. 이렇듯 전쟁 후반기 무장친위대란 말그대로 '개나소나 다 들어가는 곳'이었다. 때문에 홀로코스트 등의 범죄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었거나 옛날부터 유명한 골수 나치당원이 아닌 다음에야 그저 무장친위대 소속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상기에 언급했듯 어린 나이에 강제로 동원되어 제한된 보기 중에서 친위대를 그나마 나은 곳이라 여겨 선택한 것 뿐이었다. 더욱이 친위대 활동 중에 홀로코스트나 양민학살에 가담한 혐의도 없다. 심지어 그가 복무한 부대인 10 SS 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는 전범 집단인 무장 친위대 내에서도 전쟁범죄와 거리를 둔 부대라는 명성을 쌓아올린 부대였다. 친위대 이력을 제외하면 딱히 그가 골수 나치당원이었단 다른 증거는 없는지라 사실 그라스가 골수 나치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일단 그의 친위대 전력이 드러나자 독일 사회는 충공깽. 전후 수십년에 걸쳐 반나치 노선을 걸으며 독일인들의 도덕성을 논하던 그가 정작 자신의 친위대 복무 사실은 오랫동안 숨겼다는 점 때문에 그가 위선적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복무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기보단, 귄터 그라스 자신이 오랫동안 비난해왔던 체제에 복무했다는 비밀을 커밍아웃하지 않고 숨기고 있었다는 점이 욕을 먹은 것.

만일 위르겐 기르겐존(Jürgen Girgensohn)[4]처럼 차라리 SS 복무경험을 처음부터 솔직히 털어놨다면 되려 덜 까였을 거란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라 볼 수 있다.

참고로 같은 독일 출신의 다스 시디어스 베네딕토 16세 역시 비슷한 이유로 과거사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여담으로 공군 보조병 시절에는 88mm 대공포 사수였고, 3호 전차4호 전차로 훈련을 받다가 야크트판터의 탄약수로 복무했고 소련군과 전투를 몇 번 치렀다고 한다.

4. 이스라엘 비판

2012년 4월에 '서구의 위선이 질렸다'며 독일인은 이스라엘을 비판해선 안 된다는 불문율을 깨고 이스라엘의 호전적인 대외정책을 마구 까는 시를 써서 이스라엘에 입국금지 당했다.

정확히는, "핵무기 보유국인 이스라엘[5]이 이란에 공격을 감행하려 하며, 때문에 이스라엘은 세계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나라"라고 했다고...

사실 이스라엘이 그동안 저지른 어마어마한 만행들을 생각하면 욕하고 싶을 만도 하다. 실제로 본인의 이력 때문에 스스로도 나름 고민했던 모양이지만, 결국 '내일 말하면 너무 늦을까봐' 우려하며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

결국 (본인도 어느정도 예상했듯) 이 시를 발표하자마자 당장 독일 안밖에서 난리가 났다. 독일에선 무려 정치권 단위에서 반감을 표했다. 일단 여야 모두 '역사적 금기를 깬' 것 그 자체에 대해 비판했다. 그의 지원 유세를 받아오던 독일 사민당에서는 그의 지원유세를 앞으로 거부하겠다고 밝혔고, 외무장관은 '평화를 위협하는 나라는 이란'이라고 반박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스라엘 정부에선 당장 '기피인물'로 지정하여 입국금지시키고 총리가 나서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고 이스라엘을 말살하려는 이란과 이스라엘을 비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코멘트했다.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국민에 대한 증오감을 부추긴다. 그라스에게 수여된 노벨문학상은 취소되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욱이 유대인 사이에선 '원래 친위대 출신이니 그동안 말을 안해서 그렇지 원래부터 반유대주의자였던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다고...

반면에 당연히도 이란에선 말그대로 대환영.

또한 독일 내 극우단체들은 이때다 싶어 '이제 홀로코스트의 원죄의식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고.

그래도 독일에선 나름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맞는 말 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도 '어쨌든 입국 금지까지 때리는건 시리아가 하는 짓과 똑같다'며 내용과는 상관 없이 일단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조치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의 '히스테리적 과민반응'이라는 얘기도 있고...

일이 너무 커진 탓도 있겠고, 극우단체가 설치는 등 별로 결과가 신통치 않았는지 대충 '이스라엘 국민이 아닌 네타냐후 정부를 겨냥한 것'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어쨌든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진 않았다.

더욱이 같은 해 9월에 이스라엘 핵무장을 까는 시를 또 썼다.

5. 여담

  • 친위대 경력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귄터 그라스는 폴란드 집권당으로부터 그의 출생지인 그단스크[6]시(市)의 명예시민증을 부여받았다. 그가 60년에 걸쳐 제3제국의 광기를 비난하고 반성해온 보답인 셈. 다만 그단스크 시민들로부터는 환영받지 못한 결정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나치에 침략당했던 나라의 국민들은 나치에 대해 아직도 꽤나 치를 떨고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
  • 가난 때문에 15세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전후에는 광산에서 일하며 석공 기술을 배우고(1947-48년) 이후에는 예술대학에서 조각을 배웠다.(1948-56) 그러다 보니 양철북과 같은 그의 초기작들은 노벨상 작가라곤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맞춤법 오류도 많으며, 문장이 굉장히 지저분하고 난잡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초기작들의 한국어 번역은 번역자를 크게 타는 편이다. 예를 들어 양철북의 경우 박환덕 번역본(범우사)가 현존하는 한국어본 중 가장 질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난삽한 문장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독자가 지치지 않게 제대로 전달하려면 독일어 못지않게 한국어 능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에선 간혹가다 '귄터'(위)를 '권터'(워)로 잘못 보는 경우가 있다.
  • 2015년 4월 13일 별세했다.


[1]폴란드 포모르스키에 주 그단스크[2] 엄밀히 말해 무장친위대는 나치당의 사조직이지 독일 국방군과 같은 정식 국가조직이 아니었기 때문.[3] 이 때문에 당시 독일 정규군인 국방군은 이런 초법적인 사태(아무런 법적근거가 없는 일개 사조직이 병역법을 무력화시킨 초유의 상황이다.)에 대해 히틀러에게 항의했고 히틀러는 무장친위대의 규모를 일정규모로 제한하겠다며 국방군의 항의를 무마했다. 이러한 제한이 풀린건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이 후퇴하자 열받은 히틀러에 의해서였다.[4] 슈츠슈타펠 항목에서 "도대체 우리들은 전쟁 내내 뭘 한거였습니까?"며 복무 경험을 후회했던 그 사람이다. 이분은 진심으로 SS 비킹사단 병장으로 있었던 흑역사를 뉘우치며 전후 사민당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5] 이스라엘은 비공식적 핵 보유국이다. 자국인이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를 폭로했지만 어쨌든 이스라엘 정부는 '노코멘트' 중.[6] 과거 독일 제국 단치히. 따라서 실향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