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 요제프 프리츨 친딸 감금 강간 사건 Fritzl case | |
발생일 | 1984년 8월 28일 ~ 2008년 4월 26일/(총 8,516일) |
사건 발각 | 2008년 4월 26일 |
발생 위치 |
니더외스터라이히 암슈테텐 입슈스트라쎄 40번지 |
범죄 항목 | 약취유인(납치, 유괴) 감금 성폭행(강간) 폭행 과실치사 사체유기 |
가해자 | 요제프 프리츨(당시 49세) [주범, 단독범행] |
피해자 | 엘리자베트 프리츨과 감금 이후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들/(감금당시 18세) |
판결 | 요제프 프리츨(종신형)[1] |
1. 개요
이 사건의 가해자인 요제프 프리츨(Josef Fritzl)이 연행되는 모습.
2008년에 전 세계를 경악시킨 오스트리아의 근친, 납치, 감금 및 강간 사건. 영화 <룸>과 <걸 인 더 베이스먼트>의 모티브가 되었다.
2. 피해자 엘리자베트 프리츨의 삶
#왼쪽 원은 어머니 로즈마리 프리츨, 오른쪽 원은 엘리자베트. 엘리자베트 왼쪽은 남동생 요제프 주니어[2]
엘리자베트의 어린시절과 1984년 감금 당시 49세의 요제프 프리츨.[3]
15세에 학교에서 찍은 단체사진이며 엘리자베트는 밑에서 두번째 가운데에 있다.
감금 직전에 비밀 남자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사진이라고 한다.#
감금 이전의 엘리자베트.
엘리자베트는 1966년 4월 6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11살때부터 아버지 요제프에게 수시로 강간을 당했다.
엘리자베트는 15세에 오스트리아 동부, 스트렝베르크 근처의 A1 고속도로에 있는 로젠베르거 휴게소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그녀와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른 소녀들은 주방 아래 기숙사에서 잤다. 수년간의 학대 끝에 그녀는 처음으로 아버지로부터 해방감을 느꼈고, 그의 탐욕과 음탕함으로부터 안전함을 느꼈다.
엘리자베트는 17세인 1983년 1월 28일에 성폭행을 피해 가출하여 직장에서 나온 다른 소녀와 함께 집에서 123km 거리의 수도 빈에서 3주간 숨으며 살아간 적이 있었지만 경찰이 발견한 뒤 집으로 돌려보내졌다.[4]
그녀는 1년 반만 더 버티고 훈련 프로그램을 마치고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티기로 결심했고 1984년 늦여름에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에서 62km 떨어진 오스트리아 북부의 린츠라는 도시에서 취업할 전망을 얻었다. 그녀가 마침내 요제프에게서 벗어나려고 할 때, 요제프는 엘리자베트에게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을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1984년 8월 28일이었고, 그녀는 24년 동안 다시는 하늘을 볼 수 없었다.#
2.1. 엘리자베트의 형제자매의 삶
- 언니 울리케와 언니 로즈마리 주니어[5]: 여동생 엘리자베트와 달리 성적 학대나 감금을 당하지 않았고,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기도 했을 정도로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았다.
- 여동생 가브리엘:
- 남동생 요제프 주니어:
- 여동생 도리스:
- 남동생 하랄드: 누나 엘리자베트의 탈출 이후 인구 1700명의 미테르키르헨에 그녀가 살 집을 마련해주었다.
3. 경과
오스트리아 동부 암스테텐에 살던 요제프 프리츨은 유능한 전기 수리공이고 부동산 업자였으며 부인 로즈마리와 2남 5녀를 둔 겉으로는 친절한 이웃이었지만 실제로는 집안의 독재자이자 근친상간을 즐기는 성도착증 환자였다.[6] 그는 셋째 딸 엘리자베트가 11세였던 1977년부터 그녀를 지속적으로 성폭행해 왔다. 요제프는 딸을 감금하여 지속적으로 성폭행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하는 한편 자신의 범죄를 영구적으로 은폐할 계획을 세웠다.엘리자베트가 갇힌 지하실의 구조도[7].
니더외스터라이히 경찰이 2008년 4월 28일에 공개한 현장 감식 사진이다.# 언론에 공개된 감식 사진은 이 3장이 전부이다.
요제프는 1981년~1982년에 걸쳐 지하실을 토굴 감옥으로 개조했는데 그곳은 원래 방공호 용도로 쓰이는 곳이라 의심하기 힘들었다. 이중문을 설치했는데 첫 번째 문은 1m 두께의 책장 뒤에 숨겨져 있었으며 두 개의 문 모두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 수 있는 전동식 철문이었다. 더군다나 문 두 개 외에도 비밀문까지 합쳐 총 8개의 문이 있었고 방음처리가 꼼꼼하며 각 문이나 통로는 아주 좁아서 탈출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내부는 오스트리아 경찰이 공개한 사진상 겉보기엔 사람이 살 만하게 보이나, 엘리자베트의 탈출 이후 12일간 이 공간을 조사하던 40명의 경찰관들은 심리상담을 받아야했다. 이곳을 조사하는 동안 신체와 정신의 허용 한계를 넘어섰다고 한다. 위생시설은 곰팡이로 뒤덮혀 있었고 변기는 형편없었다. 환기구가 달린 환풍기는 하나뿐이었다.# , 24년간 갇혀있던 55평방미터의 습한 벙커를 조사하던 20명의 전문가들은 산소 부족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휴식을 취해야 했다.#.
1984년 8월 28일, 요제프는 학교에서 다녀온 엘리자베트에게 지하실 정리를 도와 달라고 부탁하여 차고로 끌어들인 후 에테르에 적신 수건으로 기절시키고 감금하고 강간해 버렸다. 이후 태연하게 딸의 실종 신고를 하고 지하실에 갇힌 딸을 침대 기둥에 50cm 길이의 쇠사슬로 묶고 협박해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출했으니 자신을 찾지 말라는 편지를 쓰게 했는데 그렇게 딸이 가출한 것처럼 꾸미고 여태 살아 왔다.
이후 무려 24년에 걸쳐 요제프는 태평하게 부인 로즈마리와 엘리자베트의 형제자매와 살면서 3일에 한번 꼴로 지하실을 찾아 엘리자베트를 지속적으로 강간하고 음식을 줬으며 이 과정에서 7명이나 되는 아이가 태어났다. 그 중 세 명의 아이는 입양하고 나머지 세 명은 그대로 지하실에 감금했으며 한 명은 사망했다. 입양한 아이들은 나이가 많거나 울음소리가 컸기 때문에 입양한 것이었다.
엘리자베트가 처음으로 임신한 것은 1986년이지만 당시에는 임신 10주 만인 11월에 유산되었다.[8] 1989년 첫째 케르스틴, 1990년 둘째 슈테판, 1992년 셋째 리사가 태어났다. 1993년 5월 요제프는 리사가 생후 5개월 때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출했다는 엘리자베트가 상자에 넣고 집 앞에 버리고 간 것으로 위장하여 리사를 양녀로 입양했다. 1994년 2월 넷째 모니카가 태어났는데 12월에 리사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베트가 유모차에 버리고 갔다는 것으로 위장하고 입양했다. 1996년 5월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그 중 한 아이인 미카엘은 사흘만에 병으로 죽자 지하실 보일러에 집어넣어 대충 화장했다. 다른 아이 알렉산더는 1997년 8월 입양했다. 2002년 12월 일곱째 필릭스가 태어나자 입양하려고 했으나 부인 로즈마리가 돌보기 힘들다고 하자 지하실에 그대로 감금했다.
3.1. 엘리자베트가 겪은 일
감금 직후 5년간은 요제프와 말을 섞지 않고 혼자서 외롭게 지내야 했다. 9년 동안은 지하실에 방이 35제곱미터의 한 칸뿐이어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이 이루어졌으며# 1994년 엘리자베트가 지속적으로 확장을 요구하면서 요제프는 10여 년간 은밀하게 지하실을 조금씩 증축해서 방 4개를 더했는데 엘리자베트와 아이들은 맨손으로 땅을 파면서 거들어야 했다.8번 사건사고 문단에서 후술할 당시 기레기들의 행패로 인해 엘리자베트는 변호사를 통해 TV 인터뷰의 계획은 없다고 전했고#, 오스트리아 경찰과 법원의 보호 아래 지하실에서 겪은 일들이 거의 외부에 유출되지 못했다10년후:프리츨 사건의 대 침묵. 나타샤 캄푸쉬가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했을 때, 판사는 그녀가 언론 인터뷰까지 마친 공인이기 때문에 사생활 보호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24년간의 지하실 생활을 폭로하면 500만 파운드[9]를 제공하겠다는 각종 국제 언론사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사생활을 보호받기로 한 것이다.# 그렇기에 보통의 사건사고 문서와 달리 엘리자베트가 겪은 일이 사람에 따라 다른 사건들에 비해 덜 잔인해 보일 수 있다만, 유출된 내용이 이 정도라서 그렇지 사건의 중심지인 암슈테텐이 속한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주도 장크트푈텐의 법원에서는 엘리자베트의 11시간짜리 증언영상의 내용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한번에 2시간 이상 볼 수 없게 했다. 실제로 요제프의 재판에서는 이 증언영상을 발췌하여 일주일에 걸쳐 틀어주면서 진행했다.
그리고 증언 출처의 사실관계가 다른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에 당시 언론의 증언 유출본을 무조건 맹신해서도 안된다.#
[이하모든증언출처]
- 요제프가 감금 내내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처우가 더 나빠질 것이고 어차피 지하실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듭 위협했다.
- 요제프는 반복적으로 엘리자베트를 때리고 발로 찼다. 또한 폭력적인 포르노 영화의 장면을 재연하도록 강요하는 등 굴욕적인 성적 학대를 가했다. 그 학대로 인해 그녀는 심각하고 지속적인 신체적 상해와 정신적 손상을 입었다.
- 12년동안 출산은 모두 의학적 도움 없이 이루어졌다. 요제프는 엘리자베스의 출산을 위해 아스피린, 담요, 소독제 한병, 기저귀, 더럽고 녹슨 가위, 1960년대 의학 서적만을 주고 35제곱미터(1993년부터는 55제곱미터)의 지하실에서 혼자서 낳게 했다.[11] 엘리자베트는 출산할때 녹슨 가위로 직접 탯줄을 잘랐고, 첫째 케르스틴을 출산하고 열흘이 지나서야 요제프가 그들을 보러 왔다.
- 종종 엘리자베트와 그녀의 아이들을 위협하면서 탈출을 시도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소장에는 "그는 문을 열려고 하면 전기 충격을 주고, 탈출하려고 하면 독극물이 지하실로 흘러 들어가 그들 모두를 즉사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설치했다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 요제프는 며칠 동안 지하실의 모든 전원을 차단하여 완전히 어둠 속에 홀로 남겨주어 그녀를 벌주곤 했다. 엘리자베트는 요제프가 휴가를 떠나는 동안 음식을 비축하기 위해 설치한 냉동고가 이미 끔찍하게 젖은 지하실 바닥에 해동되어 내용물이 새어나가자 울었다.
- 요제프가 엘리자베트의 자녀들에게 가한, 모든 뺨을 때리거나 위협하거나 구타한 날짜와 시간을 일기장에 기록
- 죽어가는 미카엘[12]을 품에 안고 호흡 곤란으로 파랗게 변한 아이를 어떻게 안았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적어도 그는 지금 더 나은 세상에 있다"고 일기장에 썼다.[13]
- 엘리자베트는 벙커에 햇빛이 부족한 것에 요제프가 해결하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요제프는 엘리자베트의 압력을 받아 지하 감옥에 비타민 D 제품과 자외선 램프를 가져왔다.
- 맨손으로 쥐를 잡는 방법을 일기장에 기록
- 엘리자베트가 낳은 아이들이 거울이나 욕실 저울과 같은 일상적인 물건에 얼마나 매료되었는지를 일기장에 기록. 아이들은 무언가를 먹은 다음 체중계에 서서 체중이 변했는지 확인하곤 했다.
- 1991년 3월 2일, "우유와 그 밖의 식료품들은 이제 거의 다 사라졌다"고 암울하게 기록.
- 요제프가 어떻게 반복적으로 자신을 강간하고 위협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를 물리치려고 했는지 일기장에 기록
- 살아남은 여섯 명의 자녀들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져서 세 명은 프리츨과 그의 아내 로즈마리와 함께 위층에서 살고, 세 명은 엘리자베트와 지하실에서 함께 묻혀 살았는지 일기장에 기록. 요제프가 정원이나 수영장에서 윗층 아이들을 찍은 사진으로 지하실에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조롱했는지 일기장에 기록. 요제프는 특별한 날이 있을때마다 윗층에 사는 아이들을 지하실에 데려왔다. 지하실의 아이들은 윗층에 살게된 동생들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점점 더 괴로워하면서 윗층 아이들과의 상봉은 엘리자베트의 요청으로 끝났다.
- 여름에는 치솟는 기온으로 감방 굴뚝이 벽을 타고 응결이 쏟아지는 오븐으로 변하면서 지하 생활이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여름이 끝나면 우리는 항상 더 행복하다"라고 일기장에 기록.
- 음식 공급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14].
- 벽 아래로 쏟아지는 결로를 막기 위해 수건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일기장에 기록
- 난방, 온수 없음
- 요제프는 화가 나면 전기를 차단하고 음식 공급을 중단하고 열흘간 휴가를 떠나버리는 바람에 그녀와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다.
- 요제프는 엘리자베스를 감금하고 침대 기둥에 쇠사슬로 묶었고, 쇠사슬이 너무 짧아서(가디언지 2009년 3월 19일자에 따르면 50cm정도#)처음 며칠 동안은 화장실조차 갈 수 없었다. 어머니 로즈마리에게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출한다는 가짜 편지를 적고 나서야 쇠사슬에서 풀려남[15] 도망치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당함
- 요제프가 생필품을 가져올 때 쇼핑백 바닥에 남겨진 영수증에 대한 일기를 씀
- 엘리자베트는 지하실에서 아이들에게 읽기를 가르치고[16] 벽에 꽃과 햇빛 사진을 걸었다.
- 위층 가족이 휴가를 떠날 때, 지하실 가족들은 한 번에 10일 동안 거의 음식도 없이 버려지곤 했다
- 반항을 하면 지하실에 가스를 주입하여 질식하게 만들겠다고 협박을 당함[17]
- 탈출 1년 전인 2007년에, 요제프에 의해 강제로 '사이비 종교에서 나와 집에 돌아가고 싶지만 아직 불가능하다'는 편지를 씀
- 요제프가 태국이나 다른 곳에서 친구들과 휴가를 보냈을 때, 몇 주 동안 지하감옥에 쓰레기가 쌓였다고 한다. 따라서 엘리자베트와 그녀의 지하실 아이들은 곰팡이 질병을 앓았다.
3.2. 엘리자베트의 아이들의 삶
지하실에서 생활한 아이들은 볼드 처리.- 첫째 딸 케르스틴:
- 둘째 아들 슈테판:
- 셋째 딸 리사:
- 넷째 딸 모니카:
- 다섯째 아들 알렉스:
- ✞여섯째 아들 미카엘: 1996년 4월 28일 쌍둥이 알렉스와 출생, 요제프가 의학적 도움을 일절 거절했기에 미카엘은 태어난지 66시간만에 지하실의 산소부족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요제프는 미카엘의 시신을 소각로에 넣어 화장했다.
- 일곱째 아들 필릭스:
3.3. 세입자의 증언
오스트리아 경찰은 엘리자베트가 감금된 1984년부터 2008년까지 24년간 프리츨 하우스에서 살던 100여명의 이전/현재 세입자들에게 증언을 호소했다#.- 엘리자베트가 감금된 지하실의 바로 윗층인 1층에서 1995년부터 12년간 살던 알프레드 두바노브스키는 가끔 두드리는 소리, 쾅쾅거리는 소리와 물체가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요제프는 아파트의 모든 주민들에게 지하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그 지역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했고 이 합의를 어기는 사람들을 퇴거시키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한번은 그에게 윗층의 더 큰 집으로 바꾸고 싶은지 물었지만 거절했다#
- 1990년대 초에 1층의 원룸을 임대했던 셉 라이트너는 일 때문에 몇 주씩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음에도 1/4분기의 전기요금이 5000실링(400유로)이상으로 치솟고 모든 전기가 꺼져있어도 전기미터기는 계속 작동해서 요제프와의 논쟁 끝에 전기기술자를 불러 높은 전력 소모의 원인을 찾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개를 키웠는데, 개가 한밤중에도 깜짝 놀라면서 자주 깨어났다고 한다. 그는 자신과 다른 세입자들의 부엌에서 음식이 자주 없어졌다고 하며, 요제프가 늦은 밤에 차에서 쇼핑백을 꺼내 정원으로 가져오곤 했다고 회상했다.##
4. 발각, 그리고 탈출 이후의 엘리자베트
요제프 일가의 가계도. 빨간색이 감금당한 아이들이며 연두색이 입양 형식으로 키워진 아이들이다.
24년 동안 벌어진 요제프의 근친상간과 감금, 4남 3녀 출산 사실을 부인이나 다른 가족들은 물론 집에 세들어 살던 사람도 전혀 알지 못했다. 권위적인 가장이었던 요제프는 부인이나 다른 사람들을 절대 지하실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검거도 정말 우연히 이루어졌다.
2008년 4월 18일 밤, 지하실에 갇힌 3명의 아이 중 하나인 19살이었던 첫째 케르스틴이 신장에 문제가 생겨 경련이 일어나고 입술을 물어뜯다가 피가 나는 등 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혼수상태에 빠지자 엘리자베트의 간곡한 호소로 요제프는 다음날인 4월 19일 이른 아침에 엘리자베트에게 케르스틴을 자신의 차에 데려가라고 지시했고 엘리자베트를 곧바로 지하실에 돌려보낸 뒤, 케르스틴과 함께 병원에 갔다. 원인은 태어난 뒤 19년 동안 평생에 걸쳐 산소 결핍과 영양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이때 엘리자베트는 24년 만에, 케르스틴은 태어난 후 19년만에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나왔다. [18] 그런데 오스트리아에는 주민 등록이 안 되어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 진료를 받으면 그 즉시 누군지를 알 수 있는데 한두 살도 아니고 19세나 된 소녀가 등록되지 않은 것이 의심을 샀다.
특히 케르스틴의 옷에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딸인 케르스틴이 긴급히 의료 지원이 필요하다고 쓴 편지가 있었는데 그렇게 사랑하는 엄마가 왜 애를 이 지경[19]으로 만들었는지 수상하게 여긴 의사가 경찰에 신고했다. 오전 10시 37분, 경찰은 모스트피어텔-암슈테텐 주립병원으로부터 수상한 여성이 입원했다는 신고를 받았다. 가능한 한 빨리 케르스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에게서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경찰은 엘리자베트 실종사건을 다시 수사하게 되었다.
경찰은 광범위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요제프는 엘리자베트가 빠졌다는 사이비 종파에 대한 옛날 이야기를 반복한 다음, 평소의 수법을 꺼냈다. 그것은 엘리자베트가 2008년 1월자로 쓴, 자신과 아이들이 곧 돌아올 수도 있다는 편지였다. 이 편지는 암슈테텐에서 약 70km(43마일) 떨어진 케마텐안데르크렘스라는 마을의 우편 소인이 찍혀 있었다.[20] 이로 인해 조사관들은 잘못된 마을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으나, 당연히 케마텐 마을 근처에서 그들이 심문한 의사들 중 누구도 케르스틴이라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했고 경찰은 점점 더 당황하게 되었다.
4월 21일 월요일 아침,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주도 장크트푈텐 교구의 종파 담당관인 만프레트 볼파르트는 즉시 암슈테텐 경찰 본부로 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경찰은 그에게 엘리자베스의 첫 번째 편지와 케르스틴이 옮겨졌다는 메모를 보여주었다. 볼파르트는 서예처럼 보이는 필체로 쓰인 파란색 글자를 살펴보았는데, 그 글자들이 이상하게 매끄럽고, 구성이 좋고, 그다지 진정성이 없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볼파르트는 편지가 받아써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결론은 사이비 종파의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 결론은 엘리자베트에게는 24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요제프의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언론은 이 사건을 보도했다.# 4월 22일, 사건이 장기화됨에 따라 경찰은 솅겐지역으로까지 수사범위를 확대했다.# 그때까지 요제프는 꾸준히 "절망적인 아버지"로 묘사되어 왔지만, 지하감옥에 있는 엘리자베트도 "의사들이 케르스틴의 어머니를 수색하고 있고, 이것은 그 소녀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보도하는 뉴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자베트는 요제프에게 자신을 병원으로 갈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4월 26일 토요일, 요제프는 그의 아내 로즈마리와 다른 아이들이 집을 비운 사이, 엘리자베트, 슈테판, 펠릭스를 지하 감옥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날 저녁 경찰은 병원에서 의심스러운 사람이 케르스틴을 방문했다는 신고를 받았다. 경찰은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 두 사람 모두 경찰 본부로 압송되어 일단 구속한 뒤 각각 격리한 채로 추궁한 끝에 엘리자베트로부터 요제프를 다시는 만나지 않게 해 줄 것과 자신과 아이들이 보호받을 것을 조건으로 요제프가 친딸을 감금하고 무려 31년간이나 성폭행을 저질러 왔다는 증언을 받아냈다. 엘리자베트는 단 2시간 만에 24년간의 포로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전 12시 15분, 경찰이 3페이지 분량의 심문록을 다 작성했을 때, 그들은 이 사건이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요제프는 아내에게 24년 만에 딸이 돌아왔다고 되도 않는 구라를 쳤지만 이미 수사에 들어간 경찰이 집에 들이닥쳤다. 경찰은 요제프의 집을 꼼꼼히 수색하여 지하실을 발견했다. 이 공간에 대해 요제프는 당연히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결국 지하실 아이들의 유전자 검사 결과 요제프와 딸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임이 밝혀졌다. 근친상간임이 확실했고 이에 따라 경찰은 다시 요제프에게 이 사실을 근거로 강하게 추궁했으며 요제프가 결국 모든 걸 자백하여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학창시절 사진과 목격담으로 재구성된 탈출 직후의 모습이다. 엘리자베트는 24년간 햇빛을 못 보고 지냈기 때문에 피부가 창백했고 백발에 밀랍인형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22] 엘리자베트의 생애 8,516일 동안 해가 뜸과 짐은 인공 조명을 켜고 끄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창문이 없으니 하루를 다음 날이나 전날이나 구분할 수 없었고, 시간의 흐름은 아이들이 나이가 들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는 일시적인 삶의 특성에 의해서만 알아볼 수 있었다. 해방 당일, 그녀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하얗게 변해있었다.[23] 그리고 엘리자베트의 입에는 썩은 치아 3개만 남았다고 한다.#
요제프가 엘리자베트에게서 얻은 6명의 자식 중 중 요제프의 양자로 위장되어 밖에서 길러진 리사, 모니카, 알렉산더는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평범하게 성장하여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감금당하기 전에 이미 18세였기 때문에 바깥 세상에 대한 기억이 있어 풀려난 후 곧 사회에 적응했다.
반면 엘리자베트와 감금되었던 케르스틴, 슈테판, 필릭스 세 아이는 바깥 세상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으며 그저 지하실에 설치되었던 텔레비전, 비디오 등으로만 세상을 접해 왔던 슈테판과 필릭스는 처음 보는 바깥 세상과 햇빛에 감동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언어 능력으로 자신들끼리 신이 나서 대화를 나누었고 필릭스는 '바깥에 나와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2009년 요제프가 재판을 받고 수감된 뒤 엘리자베트와 여섯 명의 아이들은 오스트리아 북부 인구 1700명의 미테르키르헨[24]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함께 살게 되었으며 프리츨이 기른 아이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것이 거짓말이고 자신들의 아버지는 바로 할아버지이기도 한 요제프며 어머니와 지하에 감금되어 있었던 다른 형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비극적인 점은 모든 아이들이 오랜 감금 생활로 치아 상실, 산소부족, 비타민D 결핍으로 인해 지적장애 등의 다양한 신체,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25] 평생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던 아이들은 더했는데 치과를 비롯한 병원에는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보니 맏이인 커스틴은 발견 시점에 이미 치아 대부분을 잃은 상태였고 지하실의 천장이 낮았기 때문에 세 아이들은 자세도 심하게 굽어 버렸으며 스테판은 시력과 청력의 손상 가능성도 제기됐다.
거기다 이들은 TV를 통해서만 바깥 세상을 접해 왔던 탓에 현실 적응 능력이 크게 떨어졌다. 필릭스는 바깥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 정도였으며 아이들의 어휘력도 동년배에 비해 현저히 모자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머니 엘리자베트가 읽기와 쓰기를 조금 가르치기는 했지만 책 한 권 없는 지하실에서 나고 자랐으며 엘리자베트 자신이 11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데다 18세 때부터는 아예 지하실에 갇혀 지냈기 때문에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세 아이 모두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 효과가 크게 떨어졌다.
5. 범인 요제프 프리츨의 삶
왼쪽이 부인 로즈마리, 오른쪽이 요제프 본인.
빨간 원 안의 인물이 1956년 6월 당시 16세의 요제프 프리츨##[26]
요제프 프리츨은 어린 시절부터 이혼한 홀어머니의 갖은 학대에 시달렸으며[27] 이 과정에서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성욕과 결합된 형태의 성도착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단, 상술했다시피 페도필리아는 아니었다.
성폭행 피해자는 어린 시절의 친딸을 빼면 모두 성인이고 그 친딸은 성인이 된 뒤에도 성폭행을 당했으며 주변 사람들도 프리츨이 여자에게 관심이 많다고는 했지만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증언은 하지 않았다.
또 이러한 성도착증을 내면에 지닌 그는 징역 1년 6개월을 복역한 강간 전과가 있었으나 오스트리아에서는 15년 이하의 징역형 전과는 삭제하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프리츨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사업을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친딸이 낳은 자식들을 입양할 만큼의 정당성까지도 확보할 수 있었다. 성범죄 전과가 있는 사람에게 입양을 허가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일이지만 전과가 삭제되어 확인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범죄자의 제2의 인생을 생각해서 전과 기록은 삭제하더라도 오스트리아 사회는 최소한 프리츨이 성범죄를 저지른 뒤 재범하지 않도록 정신적인 치료 및 관리를 했어야 했다. 이런 사건에 대한 대중의 경계가 심각해지자 세계 각국은 성범죄자의 신상을 장기간 공개하고 거주지 제한, 전자발찌 착용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이러한 사건의 전말과 발단에 대한 일화는 어린시절의 학대가 얼마나 끔찍한 가해자가 된 피해자를 낳는지 보여준다.
6. 24년간 범행을 지속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
요제프는 딸을 감금하기 위해 굉장히 치밀한 계획을 짰는데 당시 냉전기 방공호 제작이 유행했던 탓에 사람들이 요제프가 인부를 불러 집에 몇달씩 지하감옥을 만드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전기 기술자로서의 지식을 활용하여 토굴을 만들고 출입구를 자신 외에는 드나들 수 없도록 개조했다. 따라서 가족들은 물론 이웃들도 요제프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으며 그의 연기가 너무나 철저하여 경찰조차도 꼬리를 잡기 어려울 지경이었다.물론 이웃들이 아예 아무 의심조차 없이 요제프의 폭력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진 않았다. 요제프는 평소에도 가족들에게 가혹했고, 혹독한 구타와 학대, 협박에 사실상 노예화된 가족들은 요제프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다. 결국 엘리자베트와 다른 가족들의 차이는 강간을 당했다와 당하지 않았다의 정도 였을 뿐, 가족들 역시 요제프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었고, 이웃들도 그의 성질을 잘 알았기에 '또 폭행하는구나' 라는 식으로 생각해서 무시했다. 한마디로 아무리 남이라지만 허구헌날 폭행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경찰에 신고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은 이웃들 역시도 비난을 면치 못할 일이다.
한편 엘리자베트는 탈출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 요제프가 출입구를 철저히 통제한 데다 평소 전기를 끊거나 식료품을 갖다주지 않는 일이 허다했으며 수시로 구타를 일삼았고 더욱이 그녀가 낳은 자식들의 생명줄을 들고 협박을 일삼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완전히 아버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엘리자베트가 아이들을 출산했으니 그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혼자가 아니게 된 후에는 함께 저항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이들 모두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질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28]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지하실에서 살아 온 세 아이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도 미성숙했다. 안타깝게도 요제프의 양자로 처리되어 정상적인 사회에서 살아 온 나머지 세 아이도 상태가 좋다고 보기 힘들었다.
요제프의 부인 로즈마리는 딸이 감금되기 전인 11살 때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요제프의 협박으로 엘리자베트는 어머니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엘리자베트는 어머니 로즈마리가 어린시절부터 지속된 요제프의 학대에 대해 수동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 윗층에서 살던 아이들에게 자신을 할머니가 아닌 엄마라고 부르게 한것 때문에 그녀와 사이가 멀어졌다.# 그러나 로즈마리가 기른 3명의 아이들이 린츠의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살게 된 그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면접교섭을 허락했다.
7. 결과
이 사건이 알려지자 당연히 오스트리아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물론 이전에도 비슷한 범죄가 잊을 만하면 벌어졌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성욕에 눈이 멀어 사람이기를 포기한 정도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친딸을 성노예화하고 24년간 사육한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고 요제프는 다음과 같이 강간치사 혐의가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29] 정신과 치료감호소로 보내져 계속 복역 중이다.- 아동 성범죄
- 학대
- 과실치사 - 요제프는 태어난 직후 죽은 아이에 대해 관리 소홀로 죽었다고 주장했고 이를 반박할 확실한 증거가 없어 과실치사만 적용되었다. 엘리자베트의 증언도 이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요제프의 변호사 루돌프 마이어는 "그래도 크리스마스엔 트리를 함께 만들었다", "요제프는 괴물이 아니며 만약 괴물이면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뒀을 것이고 그는 지하실의 아이들을 돌보며 교과서를 가져다주고 명절과 생일을 함께 축하했다. 그는 단지 지하실에 제2의 가족을 만들고 싶어했다#"등의 궤변을 내세우면서 요제프가 감옥에 가선 안 된다고 그를 변호하였다.
안 그래도 당시 나타샤 캄푸쉬 감금사건 등 납치, 감금 사건이 연달아 발생해 '감금의 나라'로 찍힌 상황에서 경악할 만한 사건이 또 드러나면서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국가 이미지가 망가졌다고 한탄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오스트리아인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요제프 프리츨이 선정되기도 했다. 2011년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오스트리아에서 또 일어나기도 했다.
8. 사건이 일어난 건물과 요제프의 근황
8.1. 프리츨 호러 하우스
1890년에 건설되어 1959년에 요제프 프리츨이 이 집을 구매했다.2008년 8월 21일, 세입자들이 모두 떠나고 사건이 일어난 집은 텅텅 비어버렸다.#
2011년 2월 15일, 겨울에는 이 집의 8개의 지하실이 비행청소년들의 파티현장이 된다는 소문이 떠돌고 영국의 황색언론 데일리 메일에서 그것이 진실이라는 보도를 내었지만 현지 경찰서 관계자와 요제프의 파산 관리인은 터무니없는 소리로 일축했다.#
그런데 다음날, 이에 대한 보고서가 공개되어 암슈테텐 경찰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파티현장의 사진도 공개되었다.#
이후 이 집은 지하실 문을 용접해서 접근을 막아버렸고 2013년 6월에 외부에서 지하실 천장을 뚫어 콘크리트를 주입하여 영구적으로 봉쇄하기 전까지 반달리즘의 대상이 되었다.1층 현관이 그래피티로 얼룩지고 유리가 깨진 모습, 1층 현관을 봉쇄한 모습, 콘크리트 주입 현장 사진
2017년 4월 15일, 이 집은 부동산 처분업자로부터 지역의 사업가 부부가 16만 유로에 구입하여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사건 10년 후인 2018년, 리모델링하여 아파트먼트로 개조된 후의 모습과 세입자들의 사진#
8.2. 요제프 프리츨
요제프는 엘리자베트의 탈출 당시 계획되어 있었던 부동산 프로젝트의 미지급 채무# 등 350만 유로의 빚을 갚기 위해 경찰 심문 기록을 영국의 황색언론에 판매하려다 실패했다#.요제프 프리츨은 과거 수도원이었던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에 있는 가르스텐 교도소의 정신질환 범죄자를 위한 특별 구역에서 지내고 있다. 2012년에는 면회를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55년간 함께 살았던 아내 로즈마리와 이혼하여 그녀가 연금을 수령할 권리를 박탈했다. 로즈마리는 남편의 노예나 다름없었지만 딸에게 저질러진 만행까지는 참지 않아 남편과 연을 끊어버린 것이다.#
2019년 3월 오스트리아 국영 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고령의 나이[30]에 오랜 수감 생활로 요제프의 건강 상태가 심히 나빠지고 있으며 치매에 걸려 정신도 오락가락 하다고 한다. 교도소 측에서는 그를 하루종일 자신의 호실 안에서만 지내도록 조치했다고 하는데, 당연히 이런 죄수는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범죄를 저질러서 전 세계적인 사회적 매장감이 되었고 공격에 대한 죄책감을 일절 가질 필요가 없어 다른 죄수의 학대 1순위 타겟이 되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치매가 심해져 교도소 내 요양병원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023년이 되어 수감된 지 15년을 넘기자 오스트리아 법에 따라 가석방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24년 1월이 되자마자 요제프 프리츨의 변호인이 이미 사회에 해를 끼칠 수 없는 치매 환자가 된 프리츨이 요양병원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며 가석방을 신청하였다.
변호인은 일반 구치소로의 전환과 요양원 배치를 요청했으나, 2024년 3월, 비엔나 고등법원(OLG)은 요제프 프리츨의 가석방을 기각했다. 조건부 전환 심리에 공인된 치매 진단서 등의 정신과 보고서가 제출됐으나, 추가적인 의료 문서가 필요하다는 사유로 가석방이 기각됐다. 변호사 아스트리드 바그너(Astrid Wagner)는 88세의 프리츨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no longer dangerous)다며, 기각에 대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전해졌다. 또한 다음 가석방 심리에 대해 변호사는 "프리츨 씨는 기다릴 수 있고, 100% 석방될 것이다."(Mr. Fritzl can wait. He is one hundred percent released from prison.)라고 자신했다.#
9. 사건사고
2008년 당시 이 사건에 대해 토론하는 포럼 사이트가 만들어졌는데, 독일 베스터발트 아스바흐에 거주하는 한 장애인 남성이 이 포럼에 자신도 요제프 프리츨처럼 납치감금을 하겠다고 예고글을 썼다고 한다. 연방 경찰은 당일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컴퓨터를 압수했다고 한다.#2008년 당시 인터넷 언론 기사를 찾아보면 알겠지만, 의사와 오스트리아 경찰이 제발 그들의 사생활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기자와 파파라치들이 탈출 직후 정신병원의 안전가옥에 묵고 있는 엘리자베트 가족의 사진[31]을 찍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색언론의 기자들이 병원에 침입해 접근시도를 한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자, 대테러부대가 병원 보안을 위해 투입되었다. 결국 그녀의 변호사는 언론의 기대와 다르게 그녀의 TV 인터뷰 계획은 없다고 전했다.#.[32] 이 기레기들의 행패로 인해 엘리자베트의 마음의 문이 닫히고, 피해자 보호를 위해 24년간 지하실 안에서 있었던 자세한 일들이 거의 유출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33]. 영국의 황색언론 더 선의 파파라치가 2009년 2월 9일에 그녀가 살고있는 마을X[34]에 잠입하여 그녀와 딸 리사를 촬영#[35]하고 그녀의 집 부엌에 쳐들어가 엘리자베트에게 공황발작을 일으키게 하고[36] 다시 정신병원에 가게 만든 이후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엘리자베트의 모습은 언론에 공개되어있지 않다.[37]
엘리자베트와 아이들이 암슈테텐 마우어 클리닉에 있는 동안, 같은 시기에 해당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하인리히 슈마츠가 몰래 그들의 사진 1051장을 찍어서 언론에 판매하려고 했다.####[38]
2009년 요제프 프리츨의 재판을 앞두고 프리츨 슈니첼을 판매한 장크트푈텐[39]의 식당이 벌금 5천유로를 내야 한다고 판결이 내려졌다.#
이어 2013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프리츨의 지하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려던 펍이 여론에 굴복하고 이름을 바꾸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10. 기타
- 4chan 유저들이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가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2008년에 요제프 프리츨로 밈을 만들기도 했다. 배경음악은 호주를 상징하는 노래 월칭 마틸다다.
- Encyclopedia Dramatica의 요제프 프리츨 문서. 아카이브되어있기 때문에 광고나 혐짤이 나오지 않는다. 위의 4chan 유저들이 2008년 당시에 만들었던 그의 밈이 나열되어있다.
11. 대중매체
- 영화 걸 인 더 베이스먼트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 영화 룸(영화)도 이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my eyes deceive라는 게임도 있다.
12. 유사한 사건
- 나타샤 캄푸쉬 감금사건: 프리츨 사건과 동일한 오스트리아에서 2006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탈출 2주만에 언론에서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바람에 사생활 침해를 당해도 오스트리아 법원에서 공인으로 인정받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초기에 나타샤보다 더 많은 돈을 주겠다는 언론의 요청을 거절하고 사생활 보호에 힘쓴 엘리자베스 측과 달리 나타샤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한국어로 검색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유튜브에서 최근까지 언론 인터뷰를 하는 영상을 볼 수 있다. 언론 대응 용으로 2007년에 자신의 인터넷 웹사이트도 개설했고, 자서전 3096일도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어 있으며, 감금 생활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제이시 두가드 감금사건
- 니가타 소녀 감금사건
- 한국에서 1985년도부터 딸을 강간하여 태어난 손녀도 강간한 70대 남성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1] 15년 후에 가석방이 주어지는 종신형이었다. 오스트리아에는 사형이 없다.[2] 이 가족관계도에서 보다시피 남동생은 아버지와 이름이 같았다.
[3] 원본사진
[4] 엘리자베트가 탈출하던 2008년과는 달리 1980년대 오스트리아는 가정의 일은 가정에서 해결해야된다는 분위기였다.[5] 남동생 요제프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로즈마리와 이름이 같다[6] 그의 시누이 크리스틴 R은 요제프는 '검은색을 10배 희게 만들어도 무조건 그것은 검은색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성격이 꽉 막혔다고 전했다.[7] 현장감식영상까지 있는 나타샤 캄푸쉬 감금사건의 범인의 집과는 달리 엘리자베트의 지하실은 엘리자베트의 지하실로 향하는 1미터 높이의 흰색 작은 문, 화장실, 침대방이 보이는 좁은 통로의 사진 총 3장이 오스트리아 경찰이 공개한 전부다. 그래서 언론사에서 공개한 구조도마다 방의 형태가 모두 다르다.다큐에 따르면, 위 구조도에서 화장실이 있는 방으로 가기 전에 있는 좁은 통로에 냉장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8] 이때 엘리자베트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영혼이 산산조각 났다고 하며, 처음으로 자살충동에 시달렸다.#[9] 2009년 3월 당시 환율이 1파운드에 2200원이니, 약 110억원이다. 기사의 출처가 영국언론이라 단위가 유로가 아니다[이하모든증언출처] Josef Fritzl trial: 'She spent the first five years entirely alone. He hardly ever spoke to her', Fritzl's daughter's diary reveals her hell, Fritzl trial puts spotlight on Austria but grisly case leaves long shadow, My Life in the Dungeon, Austrian man threatened to gas family, Daughter tells of Fritzl first sexual advances at age 11, Fritzl planned to free his cellar family - and assumed they would keep the details of their captivity secret, new book claims, Fritzl began plans for dungeon in 1978, Neue Verhöre im Inzestfall von Amstetten[11] 엘리자베트에게 지하실에서의 출산은 공포였지만 이는 감금 직후 5년간 자살을 고민하던 그녀에게 살아갈 목적을 제공했다.[12] 1996년 4월 28일 쌍둥이 알렉스와 출생, 미카엘은 태어난지 3일이 채 되지 못하고 지하실의 산소부족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13] 엘리자베트의 탈출 이후 경찰은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여덟 개의 전자 문을 뚫고 들어가야 했는데, 지하실에 산소가 너무 부족해서 수사 중에 산소 탱크를 사용해야 했다.[14] 특히 요제프가 휴가를 가버렸을때 음식 공급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15] 처음 몇달간은 허리에 쇠사슬을 묶이고 강간당했지만, 나중에 요제프가 성관계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풀어주었다.#[16] 엘리자베트는 18세에 감금되었기 때문에 독일어를 할 줄 알지만, 그녀의 아이들은 동물처럼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법을 배웠다.#[17] 현장조사결과, 실제로 가스주입 기구는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18] 엘리자베트는 4월 26일에 완전히 탈출하기까지 일주일간 지하실에서 24년만에 햇빛을 보게 된 것에 관한 일기를 썼다.[19] 요제프는 엘리자베트와 3명의 아이들이 아프면 아스피린으로만 해결했기 때문에 발견당시 케르스틴의 치아는 거의 없어져있었다.[20] 요제프는 엘리자베트에게 거짓 편지를 받아쓰게 하고, 아내 로즈마리에게 이 편지를 부치기 위해 차를 타고 수 킬로미터를 운전하곤 했다.#[21] 왼쪽은 15살에 학교 단체사진에 찍힌 것이다.
[22] 그녀의 정신과 의사 하이디 카스트너영상가 그녀의 모습이라고 떠도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23] 다만 TV가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송출되는 뉴스나 일기예보로 오늘 날짜와 바깥 세상을 볼 수 있었다.[24] 원래는 남동생 하랄드 프리츨이 남에게 세를 주기 위해 비워둔 집이었다.[25] 근친상간으로 인해 일어난 문제라는 말도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근친상간으로 인한 유전적 변형 및 문제 등은 단 한 세대만에 이루어지진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걱턱은 근친으로 인한 세대가 대를 이어갈수록 심해진 것이지 단 한 세대만에 심해지지는 않았다. 참고 기사 친족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서 유전적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기정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피해자인 아이들에 대한 2차 가해다. 아이들은 장시간 빛을 보지 못하고 사회화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제외하면 유전적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타임즈 기사에서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상황을 우려할 뿐 현재는 이상이 없음을 밝혔다.[26] 단체사진이 포함된 welt의 기사에서는 엘리자베트가 (2008년) 5월 26일에 언론 인터뷰를 할 예정이라고 했지만, 변호사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전했다.[27] 어머니는 (문서 속 사건 4년 전인) 1980년 사망했는데, 요제프는 어머니가 늙고 힘이 없어지자 그녀를 창문을 벽돌로 막은 다락방에 최대 20년간 가둬 죽을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뒀다고 한다. #[28] 사실 근친상간으로 인한 유전질환이 아니냐는 루머가 있었으나 근거가 없는 얘기다. 근친상간으로 인한 유전적 변형 및 문제 등은 단 한 세대만에 이루어지진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걱턱은 근친혼이 몇 세대에 걸쳐 거듭되면서 대를 이어갈수록 심해진 것이지 단 한 세대만에 심해지지는 않았다. 즉 실제로는 앞서 언급된 커스틴처럼 영양실조와 열악한 환경이 문제였다. 참고 연구 자료(워싱턴대학 연구팀이 유전자상담저널에 게재한 논문. 미국 유전상담가학회, 보건성 후원), 참고 기사[29] 사형이 없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법정최고형이다.[30] 2019년 3월 기준으로 83세였다.[31] 황색언론에서 100만유로를 제안했다고 한다[32] 역시 오스트리아에서, 2년 전인 2006년에 탈출한 나타샤 캄푸쉬도 같은 일을 겪었다. 그녀는 인터뷰 요청을 받아주면 괜찮아지리라 생각하고 탈출 2주만에 인터뷰를 받아주었지만 언론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2007년에 자신의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각종 풍문에 대응하고 3096일이라는 자서전까지 내야 했다.[33] 마찬가지로 엘리자베트의 11시간 동안 녹화된 법정 증언(아버지를 다시는 만나지 않는 조건으로 증언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요제프는 엘리자베트의 증언 영상을 보면서 재판에 임했다.#)과 지하실 일기도 언론에 매우 조금 흘려졌을 뿐이다.[34] 인구 약 1700명의 미테르키르헨이라는 작은 마을이다.#남동생 하랄드 프리츨의 현지 축구단 정보[35]
[36] 현지 경찰이 그들을 찾아나섰지만 이미 영국으로 떠난 후였다.[37] 2024년의 취재에 따르면, 인구 5천명의 마우트하우젠의 인근 마을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38] 그는 사기 전과가 있으므로 1천장 넘게 찍었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39] 요제프가 재판을 받은 법원이 위치해 있는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주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