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9:36:20

유인촌/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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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역
2.1. 초기 생애2.2. 연기 활동2.3. 정치 활동

1. 개요

배우 유인촌의 생애 전반을 다룬 문서.

2. 내역

2.1. 초기 생애

1951년 3월 20일,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면(현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봉동읍) 성덕리에서 아버지 유탁(柳倬)의 4남 2녀 중 넷째[1]태어났다. 아버지 유탁은 본래 충청남도 서산군(현 서산시) 출신인데, 6.25 전쟁 때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면 성덕리로 피난 와 이곳에서 유인촌을 얻은 것이다.

이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마포구 아현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그는 무서운 두 형들 때문에 누가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할 정도로 내성적이었는데 그나마 그를 귀여워해 준 이는 그의 누나였다.

서울미동국민학교(56회)와 한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1968년 3월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69년 우연히 떠맡은 연극 무대 연출/연기의 경험 이후로 연극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는 접어두고 명동극장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관극하러 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장래희망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연극 연출을 하던 큰형 유길촌(柳吉村), 미8군에서 트롬본을 연주하던 작은형 유영촌에 이어 이젠 셋째까지 딴따라의 길을 걷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70년 2월 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해에는 큰형이 나온 고려대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렀다가 낙방했고, 1년 동안 학원을 다니며 재수한 끝에 결국 1971년 3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71학번)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연극 경험이 없어서 기초 지식이 전무했음에도 교내 실습작인 《북위 38도》에 주연으로 발탁되었고, 1973년 MBC 공채 6기 탤런트로 합격하여 일일연속극 《강남가족》에서 유승근(최불암 분)의 고등학생 아들 역으로 데뷔했고, 1974년 《복녀》에서 주연을 처음 맡았다.

1975년 3월 15일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제2훈련소[2] 문화선전대에서 정훈병으로 복무했다. 이때 매일 방송 프로그램을 하루 5회씩 맡아서 진행했다고 하며, 1977년 12월 6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이후 복직하여 《옥녀》, 《알뜰가족》, 《미소》, 《안국동 아씨》 등지에서 주연을 연속으로 맡아 점차 인기 탤런트가 되었다.

2.2. 연기 활동

MBC 전속 탤런트 시절에는 표재순 PD의 드라마에 많이 나왔고, 커리어 초기에는 의외로 반항아적인 역할도 꽤 했다. 1980년대 모 드라마에서는 사회 잉여였다가 삼청교육대에 간 후 착한 성격을 갖게 되는 역할을 맡았었고 1980년엔 전상국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8.15 특집극 《아베의 가족》에서는 한국에서 동네 날건달들과 미성년자 성추행 등을 일삼다가 우연찮게 미국으로 이민가서 날라리로 살다가 입대하여 주한미군으로 귀국하여 모친의 과거와 이복형의 존재를 찾는 역할도 했는데 그에게는 이 작품이 인생작이었다. 《알뜰가족》에선 스튜디오 촬영에 적응되는 데 도움을 받았고 《여인열전》 '장희빈'에선 숙종 역으로 더 각성했으나 장희빈을 편애하는 연기 탓에 시청자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사실 《전원일기》의 이미지가 박혀서 그렇지 주로 한 역할은 지식인이나 개혁가였으며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3]에서 조광조[4]와 인조[5], 《역사는 흐른다》의 이규직 연기가 대표적이다.

특히 연극 《햄릿》은 총 6번을 연기한 그의 대표작으로 2016년 이해랑 탄생 100주년 기념공연 《햄릿》[6]에서 다시 햄릿 역을 맡았다.[7] 또한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는 연산군 역을 맡아서 무대에 섰는데 이 연기는 1988년 임권택 감독 영화 《연산일기》에서도 잘 표현되었다.[8] 뛰어난 가창력과 현대무용 실력을 바탕으로 뮤지컬에도 다수 출연했는데 특히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빌라도 역은 1980년 초연 이래 무려 십수년간 계속 맡았다. 무용 자체는 현대무용가 김복희와 김화숙에게 배웠으며, 공연 종료 후에도 무용연습실에 계속 나와 실력을 더 다듬어 서울모던댄스그룹의 정회원까지 된 적도 있다.

MBC 전속 탤런트 신분이던 1988년에는 MBC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김신영의 진행으로 방송중인 MBC-FM 정오의 희망곡의 진행을 1988년 10월 24일부터 1989년 4월까지 맡은 바가 있다. 유인촌이 정오의 희망곡에서 하차한 뒤 후임으로 진행을 맡은 DJ가 바로 손석희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부분.##

연기 커리어 도중 1980년 10월에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1984년 3월 중앙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해 1986년 8월 연극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에 극단 '성좌' 대표를 맡다가 1995년 극단 '유인촌레파토리(극단 유)'를 창단했다. 1999년 소극장 '유시어터'도 세웠다. 1990년부터 2년간 제2~3대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위원장을 맡았고, 2000년 환경부 환경홍보사절과 2002년 산림청 산림홍보대사를 맡았으며 1996년 KBS1 《역사추리》를 시초로 역사 다큐멘터리 MC로 변신을 시도하여 이듬해 《TV 조선왕조실록》을 거쳐 1998년 10월부터 역사스페셜 MC를 5년간 맡으며 대중들에게 친숙해졌다. 그 외에 KBS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이명박을 모델로 한 박형섭, SBS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는 김대중 역으로도 출연한 적이 있다. 특히 드라마 중 이명박을 모델로 한 인물의 역할을 두 번 맡은 적이 있다. 정치인이 된 이후 행보를 보면 꽤나 괴리감이 크게 느껴질 수 있지만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유인촌은 딱히 정치 성향 여부로 평가되는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역사스페셜 진행자로서 공정한 이미지가 컸다. 2003년 역사스페셜 폐지로 한창 시끄러워질 당시에는 정치적인 확대해석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후속작인 《인물현대사》에 대해선 "현대사를 다룬 프로 자체가 이념 문제가 개입될 여지가 있어서 출연 요청이 와도 안 받아들일 것"이라고도 했다.

학계에서도 활동했는데, 1993년부터 서울시립대학교,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시간강사를 맡다가 1997년 9월부터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전임강사로 재직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연극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재직 도중 1999년 중앙대학교 극장장, 2000년 중앙대학교 멀티미디어센터 소장을 겸임하였다. 2004년부터 3년간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직을 수행하며 교편을 놓았다가, 2007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교수로 복귀했다.

이랬던 유인촌에 대한 이미지가 추락하게 된 계기는 그가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 지지를 본격화하고, 이후 장관으로 입각한 2000년대 후반부터의 일이다. 장관 시절의 '찍지마' 사건 등이 꽤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진 대부분 중도·진보층에서도 지적이고 예의바른 이미지가 매우 컸는데, 이 사건으로 중도·진보층에서 이미지가 산산조각이나 버렸다. 일각에서는 정계 진출만 안 했어도 지금도 존경받는 배우로 남을 수 있었는데 하필 정계로 진출해서 좋던 이미지를 다 버린 게 안타깝게 됐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계에 갔다 본업으로 복귀한 이주일이나 이순재, 최불암, 강부자의 사례도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유인촌도 네 사례에서처럼 연기 활동에 방송 출연보다는 특히 연극계에서의 활동에 전념하면서 이미지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9]

2014년 초, 홀스또메르를 통해 연극계로 복귀했으며 변함없는 연기 내공을 선보였다. 특히 2015년에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올라간 셰익스피어의 연극 페리클레스에서 메인 무대에 복귀했는데 이때 아들인 연극배우 남윤호[10]와 페리클래스 역을 나눠 출연하여[11]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방송 복귀에는 뜻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22년 7월, 연극 《햄릿》으로 활동을 재개했으며 같은 달 5일에는 강필석과 함께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했다. 관련 영상.

2.3. 정치 활동

2002년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당선인 인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 2004년부터 서울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를 역임하였으며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문화예술정책위원장 대행을 맡아 당선을 도왔다. 또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까지 맡았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에서 제44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 임명되어 3년간 재임하였다. 2011년 장관 퇴임 이후에는 대통령실 문화특별보좌관으로 위촉되어 2013년까지 근무했고, 2012년 2월부터 9월까지는 예술의 전당 이사장도 지냈다.

이명박이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자주 만났으며, 2018년 3월 14일과 동년 3월 22일, 이명박의 구속이 확정됐을 때와 형이 확정돼서 교도소로 가게 된 2020년 11월 2일에도 다른 친이계 의원들과 함께 이명박에게 마중을 갔었다. 더불어서 이명박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2023년 봄에는 유인촌의 연극을 관람하였다.
2023년 7월 5일, 윤석열 정부의 문화체육특별보좌관으로 내정되었음이 발표됐다. 특별보좌관은 청문회를 거칠 필요가 없기 때문에 7월 7일 바로 임명되었다. 윤석열 대통령과는 별 인연이 없고, 그를 추천한 건 이명박 정부문화체육관광부장관 재임 당시 그의 휘하에서 제2차관을 맡았던 前대통령비서실장김대기라고 한다. 이로써 2013년 문화특보 퇴임 후 10년 만의 공직 복귀를 같은 보직을 통해 하게 되었으며, 윤 대통령 기용 덕에 요직으로 컴백한 수많은 MB정부 인사 중 한 명이 되었다. #

2023년 9월, 윤석열 대통령의 부분 개각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재입각이 유력하다는 보도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실제로 2023년 9월 13일 제54대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고, 인사청문회와 임명 절차가 마무리되면 2011년 문체부장관 퇴임 후 12년 만에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명박 정부에서 이미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을 맡았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을 맡은 이주호와 같은 사례이다.

동년 10월 5일, 유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진행되었는데 과거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나 욕설 사건 등을 대놓고 부인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한편 함께 지명된 신원식 국방부장관 후보자, 김행 여가부장관 후보자와 달리 인사청문회 다음날 적격·부적격 의견이 병기되어 인사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되었다.

2023년 10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안을 재가하며 12년 만에 문체부장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동년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상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AI 기술과 관련된 딥페이크 관련 범죄 피해가 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김광석의 사진에 유인촌의 얼굴을 합성하고 그의 음성을 학습시켜 그가 서른 즈음에를 부르는 영상을 공개한 적이 있다.

게임 전문 웹진인 게임메카가 유인촌 체제 문체부에 대해 "복합적"이라고 평했다. 이전 장관들보다 더욱 게임산업에 진심이라는 점이 느껴질 정도라는 건 고평가했으나, 모 유저의 "게임관련 정책 많이 낸 건 좋은데, 왠지 민심잡기 용으로 마구 내뱉은 느낌"이라는 의견을 인용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2024년 6월 20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배구협회·여자배구 국가대표 은퇴선수 간담회'에 자리했다.

파리 올림픽 전후로 축구 국가대표 감독 선임, 안세영의 대한배드민턴협회 부조리 폭로 사건으로 체육계에 상당한 문제와 논란들이 대중에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대한체육회대한축구협회에 고강도로 압박을 가하고 있다. 파리 올림픽 이전부터 자신의 3선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을 향해선 연임조항 폐지를 절대로 승인하지 않을 것을 선포하고 예산을 삭감하는 강경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으며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에 대해서도 "명예롭게 물러나시라"라는 발언까지 하는 등 압박 수위를 더욱 높이는 중이다. # #[12] 유인촌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대한체육회의 뻔뻔한 행보와 대한축구협회의 무능력과 무책임함에 혀를 내두르며 유인촌 장관과 문화체육관광부를 지지하고 있다.[13]
2024년 12월 10일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형식상 정부 대변인을 맡아왔던 것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1] 위로 형 둘, 누나 하나가 있었다.[2]육군훈련소[3] 배우들을 계속 돌려막기 했는데 최수종철종사도세자를 했고 김무생의 경우 이성계이순신을 했으며, 신충식이 담당한 사람만 원균과 미우라 고로 등을 포함해 총 6명이다.[4] 조선왕조 5백년 - 풍란[5] 조선왕조 5백년 - 남한산성[6] <햄릿> Spot.[7] 정동환, 전무송, 박정자, 손숙 등 연극계의 레전드들이 모여서 한 연극으로 이해랑 연극상을 수상한 배우들만 출연했다.[8] 유인촌의 연기 변신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한국영화평론가상,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였고 본인이 대표작 중 하나로 뽑았다.[9] 그렇지만 이것도 이주일이순재, 최불암 등의 경우와도 좀 차이가 있는데 그들은 그래도 국회의원 시절에는 구설에 오르지는 않았기에 연예계 복귀 이후에도 여전히 긍정적 이미지가 남을 수 있었는데 유인촌은 욕설 사건 외에도 다른 구설수들이 워낙 스케일이 컸던 게 있어서이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남아서 여전히 유인촌 관련 유튜브 영상들이나 인터넷 뉴스 기사를 보면 선플보다 악플을 찾는 게 더 빠르다. 하지만 그마저도 찍지마 사건과 관련된 인성 언급 정도만 있고, 연기력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히 베테랑 연기파 배우라며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햄릿 리딩.[10] 예명이고, 본명은 유대식이다. 성을 바꾼 후 데뷔해서 수 년째 극단 여행자 소속으로 활동 중인 연극배우인데 워낙 숨기다 보니 남윤호가 유인촌 아들인 걸 연극계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던 연출자가 남윤호를 한참 설득하고 나서야 이 연극에 부자가 같이 출연하게 되었고 그 결과 부자관계가 연극계에 뒤늦게 알려졌다. 심지어 같은 극단에서도 대부분이 그때 다들 처음 알았다고 한다.[11] 아들은 젊은 페리클레스, 아버지는 해설자+나이든 후의 페리클레스.[12] 사실, 유인촌이 정몽규와 이기흥의 연임을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한데, 이제 와서 입장을 번복하고 저 두사람의 무능한 실책을 계속 놔뒀다간 문체부가 혼자서 모든 책임을 전부 뒤집어쓰는 꼴이 되고 정치적으로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13] 오죽하면 내가 살다살다 유인촌을 지지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라고 표현하는 여론도 있을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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