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27:06

윤한봉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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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생활 당시 귀국 후
이름윤한봉(尹漢琫[1])
출생1948년 2월 1일[2]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
사망2007년 6월 27일 (향년 59세)
가족아버지 윤옥현[3], 어머니 김병순[4]
4남 2녀 중 3남
합수(合水)
본관해평 윤씨 참봉공파
학력칠량국민학교(現 칠량초등학교)
조선대학교 부속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5]
"합수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세상을 쉽게 산 사람들입니다." 유홍준[6]
"이런 사람들이 걸은 적이 있었기에 이 행성은 아름답다." 홍희담[7]
순결하여 하얀 별과 같고 따뜻하여 봄 햇살과도 같아 우리는 그를 삶의 나침반이자 소외된 이들의 벗이라 일컬었으나 그는 다만 자신을 합수(合水)라 불리기를 바랐다.[8]

1. 개요2. 약력3. 생애
3.1. 학생운동가 시절3.2. 전남지역 운동권 주도3.3. 5.18 민주화운동과 미국 망명3.4. 미국에서의 활동3.5. 귀국 후 활동
4. 여담5. 관련 서적6. 외부 링크7.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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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사회운동가. 본관은 해남(海南)[9], 호는 합수(合水).

1948년 2월 1일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 674번지에서 아버지 윤옥현(尹玉鉉, 1916. 6. 2 ~ 1975. 2. 6)과 어머니 청주 김씨 김병순(1916. 5. 29 ~ 2014. 4. 4)[10]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후 병역을 마치고 늦은 나이에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직후 학생운동에 투신했고, 특유의 리더십으로 1970년대 광주 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이로인해 1970년대에만 3차례 옥고를 치렀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핵심 주동자로 지목되어 현상수배되었다. 1970년대 광주 지역 운동권 총책으로 알려져있었기 때문에 체포될 경우 수괴로 몰려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1981년 4월 29일자로 40여 일간 화물선 레오파드호를 타고 미국으로 밀항, 미국의 한국인 정치망명자 1호가 되었다.

미국에서 민족학교, 재미 한국청년연합을 결성하여 한인동포사회를 주도했으며 1989년 임수경의 평양 방문 당시 방북과 판문점을 통한 귀한을 기획, 배후 지원했다.

1993년 수배해제 조치 직후 12년간의 망명생활을 정리하고 귀국, 5.18 기념재단들불열사기념사업회 설립을 주도했다. 그가 직접 작성한 5.18 기념재단 창립선언문은 현재까지도 천하명문으로 명성이 자자하다.[11]

1995년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으로 활동했다.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에는 광주시지부 후원회장을 맡아 광주지역 진보정당의 태동을 지원했으며, 민주노동당 고문을 역임했다.

2007년 민주노동당 고문직을 내려놓은 후 오랜 지병인 폐기종으로 고생하다가, 2007년 6월 27일 폐이식 수술 중 영면했다.

2. 약력

  • 1948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 674번지 출생
  • 1971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축산과 입학
  • 1974 민청학련 사건 호남권 총책으로 지목, 징역 15년 선고, 전남대학교 제적
  • 1976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징역 1년 6개월 선고
  • 1979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집행유예형 선고
  • 1980 5.18 민주화운동 관련 전국 지명수배
  • 1981 미국으로 밀항탈출, 정치망명 신청
  • 1982 광주수난자돕기회 설립
  • 1983 민족학교 설립
  • 1984 재미 한국청년연합 설립
  • 1987 정치망명 허가, 미국의 한국인 정치망명자 1호
  • 1987 한겨레운동재미동포연합 설립
  • 1989 임수경 평양 방문 기획, 배후 지원
  • 1993 수배해제 직후 귀국
  • 1994 5.18 기념재단 설립 주도
  • 1995 민족미래연구소 설립, 소장으로 활동
  • 2000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 후원회장
  • 2003 박정희 기념관 건립반대 국민회의 공동대표
  • 2004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설립, 초대 이사장 역임
  • 2005 민주노동당 고문
  • 2007 폐이식 수술 후유증으로 영면
  • 2007 국민훈장 동백장 추서
  • 2017 전남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2호관 205호에 합수 윤한봉 기념강의실 조성

3. 생애

3.1. 학생운동가 시절

1948년 2월 1일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 674번지[12]에서 아버지 윤옥현(尹玉鉉, 1916. 6. 2 ~ 1975. 2. 6)과 어머니 청주 김씨(1916. 5. 29 ~ 2014. 4. 4)[13] 사이에서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옥현은 강진군 지역의 유지로 1952년 5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제7대 칠량면장, 1954년부터 1958년 3월까지 제9·10대 칠량면장 등 3대에 걸쳐 칠량면장을 역임하고 칠량면 청년단장 및 소방대장 등을 지냈다.

강진 칠량국민학교와 조선대학교 부속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에 주둔하던 제12보병사단 제52보병연대에서 병역을 마쳤다. 1.21 사태로 복무 기간이 6개월 연장되어 총 3년 6개월간 복무했다.

1971년 3월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주제일고등학교 출신 전남대 학생들이 설립한 이념서클 민족사회연구소가 주도한 학원병영화 반대 시위를 우연히 목격하였다. 이들은 윤한봉과 같은 71학번으로 광주제일고등학교 이념서클 '광랑' 출신들이었다. 해당 시위를 주도했던 정상용, 이양현 등은 시위 직후 강제징집되었지만 윤한봉은 이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72년 10월 유신이 발표된 직후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윤한봉은 특유의 리더십을 통해 빠르게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을 장악해나갔다. 특히 신뢰하던 지인 민상홍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하여 당선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사회연구소의 후신 교양독서회와 농과대학 학생회를 통해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74년, 윤한봉은 자신을 찾아온 광주제일고등학교 출신 나병식[14]의 설득으로 전국 동시다발 시위를 준비하던 민청학련에 합류했다. 이후 민청학련 호남권 총책을 맡았으며 전남대학교 활동가 김정길, 이강, 김상윤 등과 함께 반유신 시위를 준비했다. 민청학련은 반유신 시위를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의조직으로, 강령을 비롯한 조직의 틀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하면서 "민청학련이 공산불법단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의 조종을 받아,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 국가주요기관을 점거,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고 주장했다.[15] 긴급조치 4호 발표로 조직이 노출되자, 윤한봉은 광주지역 학생운동가들을 집결시킨 후 "박정희가 권고한 자수기간이 지나는 4월 9일 자로 시위를 감행하자"고 주장했고, 4월 9일 전남대학교에서 반유신 시위를 주동하던 중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당시 전남대학교 재학생 18명이 체포되었으며, 윤한봉, 이강, 김정길, 김상윤은 육군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3.2. 전남지역 운동권 주도

1975년 2월 15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윤한봉은 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광주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윤한봉은 지역의 자원을 손쉽게 동원하였고, 이는 그가 사회운동을 함에 있어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1976년 4월, 전남대학교 기독교학생회에서 활동하던 김영종이 4.19 혁명 16주년을 맞아 학내에서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윤한봉은 해당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검거되어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20개월간 수형생활을 했다. 두번째 구속이었다. #

1978년 윤한봉은 두번째 출소 직후 발생한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함평 농민들과 농민운동가들을 지원했다. 함평 농민들이 북동성당에서 단식을 진행하자 문병란 시인의 집에서 솜이불과 생필품을 공수하여 단식자들에게 전달하였다. 이어 단식중인 농민들을 지지하는 집회를 기획하였는데, 광주 YWCA를 출발하여 단식이 진행되던 북동성당까지 행진하는 연대집회를 진행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 시위는 유신시기에는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1979년 10월 17일, 전남대학교 활동가 고희숙과 박유순이 전남대 상담지도관실을 방화했다. 상담지도관실은 중앙정보부와 정보과 형사들이 학생운동가들을 감시하던 학내 거점이었다. 1979년 10월 23일, 윤한봉은 해당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었고, 전남도경 대공분실에서 각종 고문을 당했다. 5일째 되는 날 아침, 형사들이 느닷없이 수갑을 풀어주며 "나라 걱정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제?"라고 이야기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고 곧 방송에서 "유고, 계엄령"이라는 단어를 들려왔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2개월 후 윤한봉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이처럼 윤한봉은 1970년대에만 3차례 옥고를 치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마찬가지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는데, 세건의 사건은 모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1970년대 광주지역 운동권의 자세한 흐름은 해당 문서 참조.

3.3. 5.18 민주화운동과 미국 망명

윤한봉은 광주에서 군부독재와 시민들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음을 사전에 예견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물론 5.18의 구체적인 전개를 예상한 것은 아니었으나, 광주에서 군부독재와 시민들의 충돌이 일어나 많은 시민들이 희생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그 근거로 5월 21일로 예정되어 있던 '임시국회 개원'을 들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각 정당들이 5월 21일 자로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계엄령을 해제하기로 합의했다. 상관살해, 초병살해, 내란목적살인 등 창군 이래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신군부가 정국의 주도권을 순순히 국회에 넘겨줄 리가 없었다.

윤한봉은 신군부의 군사행동을 예견했다. 1980년 당시엔 유신시기인 1974년에 있었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대구, 경북 지역의 사회운동 세력은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으며, 부마항쟁으로 부산 경남 지역 운동권도 회복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윤한봉은 이에 따라 학생운동을 비롯한 각 부문의 운동역량이 고조되어 있던 광주에서 신군부와 시민의 결정적인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그 시점을 5월 21일 이후로 예상했다.

그는 5월 5일에 있었던 민주가족야유회에서 정상용을 비롯한 활동가들에게 자신의 예상을 설명했지만, 이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동의하지는 않았던 윤상원, 이양현, 김영철, 박용준, 정상용은 모두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 남았으며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중책을 맡았다. 윤상원과 박용준은 계엄군이 발포한 M-16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

윤한봉의 예상과 달리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점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되어 있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주요 인사들을 예비검속 명목으로 체포했다. 김상윤, 정동년을 비롯한 광주지역 활동가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윤한봉은 문병란 시인 집에서 예비검속 소식을 접했다. 전남대학교에서 함께 활동했던 매제 박형선, 녹두서점의 김상윤 등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예비검속을 피했지만, 이승용 부총학생회장 등 간부 4명이 체포되었고, 조선대학교 총학생회에 해당하는 민주투쟁위원회 양희승, 유재도, 김운기 등도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윤한봉은 광주 내외를 오가며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윤한봉은 이로인해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못했고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서울로 올라가 한동안 당시에는 소설가였던 이철용의 집에 머물렀다.

1980년 10월, 5.18로 인해 재판에 회부된 이들 중 5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전히 도피 중이었던 윤한봉은 1970년대 광주 지역 운동권 총책으로 체포될 경우 수괴로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을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권유받고 여러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1981년 4월 29일자로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오른다.

그는 40일간의 항해 끝에 미국에 도착했으며, 한미관계를 고려한 레이건 행정부의 뒤늦은 일처리로 1987년에야 미 국무부로부터 정치망명을 허가받고 미국의 한국인 정치망명자 1호가 된다.
광주 MBC 다큐멘터리 윤한봉의 밀항탈출 1부
광주 MBC 다큐멘터리 윤한봉의 밀항탈출 2부

3.4. 미국에서의 활동

1981년 6월 3일, 윤한봉이 타고있던 밀항선이 펌데일 부두에 당도했다. 그는 태연하게 배에서 내려 시애틀 중심가로 이동했다. 35일간 밀항을 도와준 선원 두사람이 제공한 8차례의 식사를 제외하고는 잣 3알, 멸치 1개, 마른 새우 1개로 버텼다. 게다가 그가 숨어있던 장소는 철체상자에 가까운 곳으로 생명을 앗아갈 것 같은 열기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한편, 윤한봉의 밀항을 지원했던 후배 활동가 정용화는 강신석 목사와 YWCA 조아라 장로를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다. 두 사람은 광주에 와있던 선교사 헌트리 목사를 통해 미국에 편지를 전달했다.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 살고있던 김용성과 이학인이 편지를 받았다. 두 사람은 워싱턴 D.C에 있던 북미한국인권위원회에 연락했다.

해당 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페리스 하비 목사는 급히 시애틀의 김동건, 김진숙 부부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연락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윤한봉을 보호하기 위해 즉시 이민국에 압력을 행사했고, 이민국 직원 3명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무장한 상태로 밀항선에 승선하기도 했다. 윤한봉은 시애틀에 당도한 후 한동안 김동건, 김진숙 부부의 집에 머물렀다. 6월 12일, 이민국이 출석을 요청하여 변호사와 함께 출석했다. 이민국은 곧 노동허가서를 발급해주었다.

그러나 해당 허가서에는 '입국경위 : 밀항'이라고 적혀있었다. 1980년, 베트남 전쟁 직후 미국으로 망명한 이들을 위해 망명법이 제정되었다. 윤한봉 역시 해당 법률에 부합하였고, 미국 변호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법률상 특A급으로 재판이 열리면 즉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민국은 차일피일 재판을 미루더니, 6년 후인 1987년에야 재판을 열어 윤한봉을 망명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이 열리지 않았을 뿐, 망명재판 계류중이었기 때문에 윤한봉의 미국 체류는 합법적인 행위였다.

윤한봉은 망명생활에 있어, 세가지 원칙을 수립했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허리띠를 풀지 않고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절대 내 것을 갖지 않는다. 그는 곧 L.A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커뮤니티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82년 6월, 윤한봉은 그동안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광주수난자돕기회'를 만들었다. 5.18의 진상을 미주사회에 널리 알리고, 모금을 통해 5.18 유가족과 부상자들에게 생활비와 치료비를 보냈다. 1988년 6월 해산시까지 매년 3만 달러를 광주로 송금했으니, 실로 대단한 저력이었다.

1982년 6월, 경찰이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군산 제일고 국어교사 이광웅을 비롯한 교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그들은 이광웅을 고문하던 중 그가 도피중이던 윤한봉을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미 5.18 관련자들의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이후였으나, 경찰들은 총책 '윤한봉'을 통해 수사를 재개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곧 정용화, 최권행, 김은경, 홍희담, 윤경자 등을 비롯한 20여명이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여동생 윤경자가 "오빠는 미국에 망명했다"라고 털어놓았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보좌관이 광주에 와서 신분을 확인해갔다는 사실까지 확인하자, 경찰들은 아연실색했다.

깜짝놀란 노태우 내무부장관이 청와대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관련자들은 "윤한봉이 미국에 정치망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한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풀려났다. 격노한 한 경찰 고위관계자는 "대한민국 경찰 최대의 실수!"라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광웅을 비롯한 교사들을 '군산 제일고 교사 고정간첩단'으로 조작해 사건화했다. 1982년 12월, 경찰은 "이광웅 등 9명이 윤한봉으로부터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교사받아 이적단체 '오송회'를 결성, 암약 중 일망타진되었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이것이 일명 오송회 사건의 전말이다.

1983년 2월 윤한봉은 해외운동 10년 계획을 수립한 후 거점이 될 청년공동체 설립을 기획했다. 그는 곧 "민족학교"를 만들고 미주 지역의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끌어모아 한국의 민주화운동 지원을 시도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와있던 김상돈 전 서울특별시장이 윤한봉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다. 민족학교는 창립 직후부터 현재까지 연방정부가 인정한 영구비과세 단체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018년 기준 자산총액은 3,892,962$로 한화로 약 45억원이며, 홈페이지를 통해 재정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1983년 5월, 윤한봉이 로스앤젤레스 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 밀입국 배경과 정치망명 신청 사실을 소상히 공개했다. 공안당국이 윤한봉의 망명을 파악한 직후의 일이었다. 윤한봉은 5.18 민주화운동 3주년 강연도 열었다. 그는 초창기에는 김일민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이 시점에는 김상원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켰던 윤상원 열사를 잊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윤한봉은 1982년 10월, 박관현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단식투쟁 중 옥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친우봉사회' 사무실에서 10여 일간 항의의 의미를 담은 단식농성을 했다.

1984년 1월 1일, 윤한봉은 재미 한국청년연합을 설립, 미국 전역에 해외동포운동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했다. 한청련은 미국의 한인 풀뿌리 커뮤니티 조직의 모태로, 이를 기반으로 각 지역에 마당집이 설립되었다. 일리노이주 시카고 한인교육문화마당집, 뉴욕 청년학교,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민족교육봉사원, 필라델피아 청년마당집, 토론토 민족교육문화원, 호주 시드니 문족교육문화원 등의 마당집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캐나다, 호주, 독일 등에도 한청련 지부가 설립되어 해외동포운동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민족학교, 청년학교, 민족교육봉사원을 중심으로 탈춤 강습을 하고 민중가요 테이프 '조국의 노래'를 보급했다. 윤한봉은 한국에서 판화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판화를 대량으로 공수해 판매하기도 했다. 판화를 액자에 끼워 100달러에서 300달러 사이에 판매했다. 홍성담 화백이 5.18을 주제로 그린 판화의 도안도 공수받았기 때문에 상당한 수익을 만들 수 있었고, 판매수익은 고스란히 조직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윤한봉은 1986년 워싱턴 D.C에 한겨레 미주홍보원을 설립했으며 1987년에는 재미한겨례동포연합을 설립했다. 1988년에는 미주 한겨레신문 발간준비위원회를 결성했고 전두환, 노태우 방미 규탄시위를 진행했다.

1988년 윤한봉은 '국제평화대행진단'을 조직하여 백두산에서 판문점에 이르는 거리를 도보로 행진했다. 이를 바탕으로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 임수경의 평양 방문 및 판문점을 통한 도보 귀환을 기획, 배후 지원했다. 2020년 현재까지도 그가 조직한 단체들이 미국 전역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해외동포운동의 한 축을 구성하여 한인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1993년 수배해제 직후 귀국시까지 12년간 해당 활동을 통해 한인사회를 주도했다.

윤한봉은 1992년 LA 폭동을 경험하기도 했다. 민족학교 바로 앞에 주유소가 있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물을 여러 통에 나누어 담아두고 민족학교를 지켰다. 다행히 민족학교는 공격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한인사회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가담자들은 한인가게를 포위하고 들어둔 보험이 있는지 물어본 후 없다고 대답하면, 거액을 요구했다. 이에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가게를 방화하였다. 윤한봉은 이들의 당당한 약탈과 방화를 보고 새삼 5.18의 위대함과 항쟁참여자들, 그중에서도 가난한 시민들의 고결한 도덕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3.5. 귀국 후 활동

윤한봉은 1993년 5월 19일 수배해제 직후 전격 귀국했다. 5.18 주간인 만큼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는 귀국 직후 특유의 동원능력 및 조직능력을 총동원하여 5.18 기념재단 창립을 주도했다. 당시 지역사회에 형성된 여러 이해관계를 돌파했고 설립과정에서 있었던 고민을 고스란히 창립선언문에 담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재단에서 그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다. 윤한봉이 직접 작성한 5.18 기념재단 창립선언문은 현재도 광주지역 활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윤한봉은 광주에 돌아온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지들을 만났다. 어느날 윤한봉은 그와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시인 김남주의 집을 찾아갔다. 김남주는 윤한봉이 누구인지 묻는 자신의 부인에게 "윤한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순결한 사람이야. 백 프로 순결한 사람, 추호의 거짓이나 허황됨이 없는 철저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김남주 시인은 1994년 2월, 췌장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후 윤한봉은 '김남주 기념사업회' 설립을 추진했다. 그는 광주 중외공원에 김남주 시비를 세우기 위한 모금을 진행했다. 곧 광주 중외공원에 김남주 시비가 세워졌다.

이어 윤한봉은 5.18을 전후로 세상을 떠난 7명의 들불야학 열사들을 기념하는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설립에 착수했다. 들불야학은 1978년, 박기순의 주도로 만들어졌으며 윤상원, 박용준, 김영철, 박효선, 신영일, 박관현 등이 교사에 해당하는 강학으로 활동했다. 노동자들과 함께 공부하는 노동야학이었다. 이중 박기순과 윤상원이 바로 그 유명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이다. 윤한봉은 들불야학 7열사의 정신을 계승, 발전 시키기 위한 기념사업회를 구상했다.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중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로 세상을 떠난 들불 7열사는 다음과 같다.
  • 박기순 (1954 ~ 1978.12.26) 은 들불야학을 설립을 주도한 후 1978년 12월 26일 불의의 연탄가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윤상원 (1950.08.19 ~ 1980.05.27) 은 들불야학에서 일반사회를 가르쳤고, 5.18 당시 학생수습대책위 대변인을 맡아 활동했으며, 계엄군이 발포한 M16 총탄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 박용준 (1956.07.09 ~ 1980.05.27) 은 고아 출신으로 고아원에 해당하는 영신원에서 성장하였으며, YWCA에서 간사로 일하던 중 YWCA 신협에서 간사를 맡고 있던 김영철과 의형제의 연을 맺고 그의 집에서 함께 기거했다. 1980년 5월 27일 박용준은 YWCA를 지키던 중 계엄군이 발포한 총탄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 김영철 (1948 ~ 1998.08.16) 은 박용준과 함께 광천동시민아파트에서 기거하던 중 광천동 천주교회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들불야학과 인연을 맺고 특별강학이 되었으며 윤상원과 함께 도청을 지키던 중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상무대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 이로인해 심각한 정신병을 앓게되어 정신병원을 전전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 신영일 (1958.10.08 ~ 1988.05.09) 은 박기순과 함께 들불야학 초창기 맴버였고 이후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에 관여했으며 1981년 5.18 진상규명을 요구한 전남대학교 9.29 사건으로 체포되어 박관현과 함께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박관현과 함께 감옥에서 40여일간 단식투쟁을 진행했으며 출소 이후에도 사회운동을 지속하던 중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 박관현 (1953.06 ~ 1982.10.12) 은 전남대학교 법대생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 들불야학 활동가들이 기획한 광주공단 노동자실태조사팀에 합류했다. 실태조사 이후 윤상원의 제안으로 들불야학 강학이 되었으며 1980년 4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재건을 주도하여 총학생회장이 되었다. 그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직후 군부의 예비검속을 피해 여수로 몸을 피했으며 그 사이에 5.18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박관현은 도피생활 끝에 체포되어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0여일간 단식투쟁 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 박효선 (1954.10 ~ 1998.09.10) 은 들불야학 문화강학으로 활동했으며, 5.18 당시 학생수습대책위 홍보부장을 맡아 활동했으나 도청에 남지 못했다. 그는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4명이 있었다. 두명은 죽었고 (윤상원, 박용준), 한명은 미쳤고 (김영철), 한명은 도망쳤다 (박효선)"는 이야기를 자주했다. 그는 5.18 이후 금희의 오월 등 5.18과 관련된 연극 연출 등의 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과로로 쓰러진 후 간암 판정을 받고 운명했다.

윤한봉은 곧 일곱명의 들불야학 활동가들의 삶과 정신을 계승, 발전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한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창립할 수 있었다. 직책을 잘 맡지 않던 그였지만, 기념사업을 주도하기 위해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광주 서구 치평동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에 들불 7열사 기념비를 설치했다. 이어 들불상을 제정했다. 들불상은 매년 1회 수상하며, 해당 년도에 부합하는 열사의 상징에 맞추어 수상자를 선정한다. 7년 주기로 돌아가는 셈이다. 윤한봉은 들불상을 제대로된 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금도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매년 1천만원의 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했다. 들불상 각 열사들의 상징은 다음과 같다.

박기순 모범적인 여성 운동가
윤상원 모범적인 남성 운동가
박용준 모범적인 소년소녀 가장
박관현 모범적인 인권 운동가
신영일 모범적인 소수자 인권운동가
김영철 모범적인 빈민운동가
박효선 모범적인 문화운동가

2018년에는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였던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추천으로 서지현 검사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2019년에는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 김미숙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들불상은 들불야학 일곱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 및 5.18의 역사성 등을 고려할 때, 향후 대한민국 사회운동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상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높다. 윤한봉이 주도한 기념비 건립과 들불상 제정은 기념사업적 측면에서 상당히 대단한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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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은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여 지역에서의 활동을 재개했다. 윤한봉은 정치를 변화시키기 위한 강력한 진보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진보정당 건설에 앞장섰다. 그는 1992년 민중당의 실패 이후 결성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진정추)를 통해 진보정당 추진 운동에 뛰어들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출범하자 직접 광주시지부 후원회장을 맡았다. (민주노동당 초기 지역 당부 명칭 광주시지부 → 광주시당) 그는 평생에 걸쳐 수십억원이 넘는 돈을 모아 여러 단체를 설립했다. 그러나 본인의 삶에 있어서는 평생 무소유로 일관했다.

윤한봉은 2003년 박정희 기념관 건립반대 국민모임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이어 민주노동당 고문을 맡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당내 정파갈등으로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를 만들었던 사람들과 군자산의 약속 이후 집단입당한 NL계열 활동가들 사이의 갈등으로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 역시 큰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여성위원장 선거와 지역위원회 부위원장 선거에 나선 진정추 측 활동가들이 찬반투표에서 반대표 몰표를 받고 낙선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은 특정세력의 독선적인 운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윤한봉은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결국 윤한봉은 민주노동당 고문직을 내려놓고 요양에 집중했다.

2007년, 이미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육교를 올라가는 것도 힘이 들었다. 1981년, 망명을 떠나며 레오파드호에 숨어있던 시절에 쉴새없이 피웠던 담배가 주요한 원인이었다. 결국 그는 폐기종 악화로 폐이식 수술을 받기로 했다. 2007년 6월 29일, 윤한봉은 폐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다시 눈뜨지 못하고 영면했다.


민족의 지도자, 민중의 벗 합수 윤한봉 선생 장례 비디오

4. 여담

  • 아버지 윤옥현은 3대에 걸쳐 칠량면장을 지낸 지방공무원 출신으로, 칠량면 청년단장, 칠량면 소방대장 등을 지낸 친정부 인사였으나, 슬하 4남 2녀 중 윤한봉을 비롯한 4명의 아들이 모두 사회운동에 참여해 투옥된 전력이 있다.
  • 들불야학 박기순 열사는 박형선의 여동생이었다. 그러나 박기순 본인은 76학번으로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오빠가 유명한 운동권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박형선의 친구가 그 이유를 묻자, 박기순은 "어떤 일을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지 누군가의 동생이라는 걸로 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들불열사기념사업회와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는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필문대로 205번길 10-1, 1층에 위치한다. 두 단체는 사무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오월의 숲'이라는 이름의 마을 도서관을 조성하여 열린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 '오월의 숲' 3층에는 청년세대별 노동조합인 광주청년유니온과 광주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 사무실이 위치한다. 두 단체는 이곳을 통해 지역 청년 활동가들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있으며, 광주청년유니온 활동가들은 들불열사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는 1박 2일 5.18 청소년캠프에 진행자로 참여하고 있다.

5. 관련 서적

  • 운동화와 똥가방 - 윤한봉 - 최근 민족학교 활동가들이 인터넷 공간에 아카이빙한 윤한봉 회고록이다.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있는데, 책이 출판된 시점이 1996년이라 책을 소유하지 않은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접근성이 떨어져 아쉬움이 있었는데, 해당 작업으로 쉽게 접근하여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 망명 - 윤한봉 회고록 (한마당)
  • 합수 윤한봉 선생 추모문집 - 문규현
  • 임을 위한 행진 - 황광우
  • 윤한봉 평전 - 안재성(작가)

6. 외부 링크

7. 논란

그의 증언을 근거로 5.18이 사전기획되었다는 잘못된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있다. 윤한봉은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서울의 봄 기간 동안 신군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광주에서 신군부와 시민들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주변 활동가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5월 21일 이후에 군부가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여 기습적인 5.17 비상계엄 확대에 당황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관련 문서 참고.


[1] 5.18 수배자 명단[2] 음력 1947년 12월 22일.[3] 1916~1975.[4] 1916~2014. 김의석의 딸이다.[5] 1980년 수배된 그는 1993년에야 수배자 생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6] #[7] #[8] 윤한봉의 아호로 그의 별명 합수(合水)란 두 줄기 물이 합쳐진다는 뜻으로, 호남 지방에서는 재래식 화장실의 똥과 오줌이 합쳐진 똥거름을 말한다. 역사와 민중을 위해 인생을 바쳤노라고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명예도 직위도 돈도 모두 마다하고 스스로 퇴비가 된 이는 드물다. 윤한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주변사람들은 '그(윤한봉)가 가는 곳에 항상 사람이 모여든다'고 여겼다고 한다.#[9] #. 참봉공파(參奉公派) 29세 태(泰) 영(泳)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큰형 윤태선(尹泰善, 1934. 12. 10 ~ 2012. 3. 1)과 남동생 윤영배(尹泳培, 1951. 11. 21 ~ )는 항렬자를 썼다.[10] 김의석(金義錫)의 딸이다.[11] 5.18 기념재단 창립선언문#[12]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 윤한봉의 조부 윤재철(尹在喆, 1891. 2. 16 ~ 1943. 2. 12)의 소유였다.[13] 김의석(金義錫)의 딸이다.[14] 첫 집단적 반유신 시위였던 1973년 10.2 시위의 주동자였다. 훗날 풀빛출판사를 설립하였고,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담은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출판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15] 대학생들이 각 학교에서 동시에 시위를 일으키는 정도로 어떻게 정권을 인수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의문이다.[16] 이명 윤중곤(尹重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