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3:41:33

이종환(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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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종환(李種煥)
출생 1937년 12월 7일
충청남도 아산군
사망 2013년 5월 30일 (향년 75세)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아파트 자택
본관 덕수 이씨[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13대조 이순신
가족 부인 성성례, 슬하 1남 3녀
학력 경복고등학교 (졸업 / 31회)
중앙대학교 대학원 (법학 / 중퇴)

1. 개요2. 생애
2.1. 1980년대까지2.2. 1990년대 이후
3. 평가4. 흑역사
4.1. 라디오 방송 중 물의4.2.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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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방송인.

충청남도 아산군(現 아산시) 태생. 본관은 덕수(德水)이다.[2] 여성시대, 지금은 라디오 시대,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의 디스크쇼, 음악살롱, 밤으로의 초대 등을 진행하면서 라디오계의 왕별로서 주가를 높였으며, 김기덕과 함께 MBC 라디오 골든마우스의 최초 수상자였다. 반면에 "대한민국 문화계의 큰 어둠 중 하나"라는 평가도 있다.

2. 생애

2.1. 1980년대까지

1937년 12월 7일 충청남도 아산군(현 아산시)에서 아버지 이순영(李順永, 1917. 6. 20~?)과 어머니 하음 봉씨 봉정임(奉貞任, 1917.11.29~)[3]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이관영(李寬永, 1914.11. 6~1954.6.12)에 입양되었다.

경복고등학교(31회)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후, 음악감상실 "디쉐네"의 DJ로 활동하다가 1964년MBC 라디오 PD로 입사했다.

당시는 레코드나 테이프조차 구하기 어려웠는데, 음악감상실이 그나마 팝음악이나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방과 결합된 형태였으며, 고객이 신청곡을 내면 DJ가 구라를 떨면서 틀어주는 방식. 현재의 라디오 프로그램과 형식이 비슷하다. 영화 위험한 상견례품행제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요는 그래도 국내에서 음반이 나왔지만, 팝이나 클래식은 라이센스반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수입원판은 제대로 된 국내 유통경로도 없고 가격도 비싸 구하기가 어려웠고, 미8군 등을 통해서 나오는 음반으로 신보를 접했다. 전축, 즉 오디오의 보급율도 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중퇴이긴 하였어도 당시 대학 물 먹은 사람이 DJ로 활동한다는 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래서 꽤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1950년대는 대학 진학률이 5%도 채 안 되 었던 시절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고졸조차도 흔치 않았다.

1950년대엔 연예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저학력인 사회인지라 고학력 연예인이 드물었다. 오죽하면 대학 나온 사람을 따로 부르는 "학사 가수"란 명칭이 있었겠는가? 대졸자 정도면 방송국 실세들과 어느 정도 대화가 통했기 때문에 특별한 취급을 받으면서 자신의 계통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쉬웠다.

DJ를 연예인이 아닌 방송인으로 본다고 해도 당시의 방송사 직원의 위상 역시 달랐다. 지금이야 이른바 언론고시라 불릴 만큼 방송사 직원의 직업적 위상이 높지만, 1980년대 초반 컬러TV 시대 이전까지는 기자 직종을 제외하면 그렇게 인기 직종은 아니었다. 이종환과 동시대에 DJ로 활약한 황인용이 어느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물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1970년대까지는 방송사 월급도 높지 않았다고 한다.[4]

이종환은 이후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나 프로듀서로 활동했고, 가끔은 동시에 DJ와 PD를 겸임하기도 했다. 당시 팝송을 소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기에 이종환의 팝송 전문 방송이 빛을 발했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자 그가 얼마나 되도 않고 쓸데없는 구라를 떨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악평이 늘어났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얕은 팝송 실력을 가지고 마치 전문가인 양 코스프레를 실컷 했다는 것. 정보원이 미 8군에서 나오는 미국 잡지가 전부였던 시절이니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지만, 그 시절 해외 언론을 접할 수 있는 방송국에 있었기 때문에 귄위자 행세를 하려면 좀 더 전문적인 공부가 필요했던 건 사실이다.

물론 대한민국은 당시 모든 면이 그랬다. 방송계도 그랬지만 학계는 훨씬 더 심했다. 이런 면이 개선된 것은 역시 2000년대 들어와서이니 당시 시대의 한계로서 조금 실드는 쳐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단 이종환 뿐만 아니라 당시 팝 전문가 행세를 했던 DJ들, 예를 들어 김광한, 김기덕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방송을 듣고 자랐던 옛날 1960~70년대생들은 인터넷 시대가 펼쳐지고 해외 유학으로 정보 접근 과정도 다양해지면서 이들이 당시에 전혀 전문가라고 볼 수 없는 얄팍한 지식으로 전문가 행세를 했음을 깨닫게 됐다.[5] 그나마 예외적인 인물이 황인용이었다. 원래는 뉴스, 시사교양, 예능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던 아나운서 출신이지만, 라디오 팝 음악 방송 DJ를 맡으면서 해외 팝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아 공부하였고, 자신의 틀린 점을 지적하는 청취자가 있으면 바로 인정하고 수정하여 말하곤 하였다. 오디오 기기에서도 꾸준히 내공을 쌓아서 전문가 경지에 올라 은퇴 한참 후인 현재에도 음악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이 때부터 그는 '연예계 밤의 대통령' 노릇을 했는데, 여러 연예인의 생사여탈권을 쥔 채 키워주거나 죽이거나 했다. 소위 "이종환 사단"이라고 하는 연예인들이 이 무렵에 등장했다. "쎄시봉 트리오"로 불리는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이 사단 멤버였다. 게다가 '쉘부르'라는 음악 다방을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명동에서 명품 구두가게를 하던 시절에는 자신들의 사단을 동원하여 홍보 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거의 강압적이었고 무보수였다는 괴담도 많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후 잠시 로스앤젤레스이민을 가서 사단의 일원인 이장희와 함께 교포대상 라디오 방송국을 세웠으나 대차게 말아먹고 1980년대 중반에 귀국한 후 MBC에서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와 여성시대를 진행했다.

이때도 잘못된 팝 정보는 여전했지만, 워낙에 그를 추종하던 팬들이 많았던지라 밤의 디스크 쇼의 청취율은 꽤 높았다. 당시 밤 10시~12시 프라임 타임은 MBC FM 이종환, MBC 표준FM 이문세(별이 빛나는 밤에), KBS 김미숙/김희애로 삼분되었는데, 10대 소녀층에서는 별밤이 가장 인기였으나, 남성이나 2~30대 이상은 이종환이나 김미숙을 많이 들었다. 일요일 밤의 공개방송은 별밤과 디스크쇼가 막상막하였는데[6], 많은 청소년들이 둘 중 하나를 본방 청취하고, 다른 하나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고는 했다.[7] 이렇게 이문세, 이수만, 유열 등과 함께 MBC 라디오 프로그램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공개방송에서 나이(당시 50대)에 걸맞지 않게 저속한 표현을 여러 번 써서 구설수를 만들기도 했다.

이때도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 노릇은 여전해서 그의 휘하에서 대박난 가수들이 여럿 존재했다. 최성수, 도시의 아이들[8] 등이 이종환 사단이었다. 물론 미국에서 돌아와 방송하던 1980년대의 이종환의 위상은 팝의 제왕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그의 공백기 동안 MBC의 김기덕, 2시의 데이트와 KBS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등이 주간 타임 팝 전문 DJ를 양분하고 있었고, 저녁 8시~10시 사이에는 KBS 황인용의 영팝스가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동타임에 MBC의 왕년의 인기스타 백형두가 진행하는 팝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음악세계 등 음악잡지에 실린 FM 음악 프로그램 인기순위에서 황인용이 부동의 1위였다. 심야에 전영혁이 진행하는 1시의 데이트(25시의 데이트)는 일반적인 팝이라기보단 록음악 중에서도 프로그레시브 등을 많이 다루었기에 대중적인 인기와 인지도는 낮았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1980년대까지는 한국 FM라디오 프로그램 편성에서 팝음악이 가요 프로그램보다 많았다. 비율로 65:35 정도. 그러다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가요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FM에서 팝의 비중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21세기 이래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홀로 고군분투, 독야청청하는 가운데 그나마 있던 팝음악 프로그램들도 중노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골든팝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2.2. 1990년대 이후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자 이미 환갑이 넘어서 그런지 10~20대들이 주로 듣는 방송은 당연히 그와 스타일이 잘 안 맞았다. 1990년에 미국에 건너가서 2년여간 미주한인방송(이장희가 진행하던 라디오코리아와는 다른 곳)에서 활동하다가 1992년 말에 귀국하여 MBC 표준FM 저녁 8시~9시 슬롯에 단독으로 밤으로의 초대를 진행하였으나 6개월 만에 심야시간인 자정~2시로 바뀌었다. 저녁 8시~10시 슬롯은 전통적으로 하교하는 중고생이나 퇴근하는 직장인이 주 청취층인데, 결국 이들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청취율에서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은 "원래 내 시간대는 심야다"라면서 의욕적으로 방송에 임했으나, 결국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하차하게 된다.

그래서 어릴 때 그의 방송을 들었던 30~50대 여성들이 자주 듣는 방송으로 옮겨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밤의 디스크쇼 진행 당시 여성시대 진행을 병행한 바 있었다. 그렇게 연기자 최유라와 진행한 MBC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1997년 12월 30일 97 MBC 연기대상에서 지금은 라디오 시대로 방송인 최유라와 함께 라디오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라디오 시대를 진행하면서 숱한 구설수를 만들어내며 뻑하면 입방아에 올랐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사이에 LA 한인방송국과 전화연결로 대한민국 상황을 정기적으로 이야기해주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나이대가 나이대인지라 지극히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내세워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결국 2003년 이후 MBC FM4U에서 아침 9시~11시 슬롯에 방송한 이종환의 음악살롱에서 다시 한 번 문제를 일으킨 바람에 하차하면서 결국 MBC 라디오와는 연이 영구히 끊겼다.

이후 자숙의 시간을 갖다 2005년 4월 25일TBS로 복귀해 밤 프로그램인 이종환의 마이웨이를 맡았다. 방송 시간은 초창기엔 밤 12~2시였고 2007년 10월 15일부터는 밤 10시~12시로 고정되었다. 그런데 간간히 욕설 방송을 해서 경고를 먹은 적도 있었다. 결국 2011년 11월 13일에 가수 이상우에게 DJ 자리를 넘겨주고 마이웨이에서 하차하였다. 사실 그 전부터 지병인 폐암이 악화된 상태여서 생방송 중 수시로 기침을 하는 모습이 그대로 방송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개편 시기까지는 마치고 하차했다.[9] 폐암 투병 기사는 2012년 11월에 나왔다.

2013년 5월 30일노원구 하계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5세. 평소 상당한 골초였다고 한다.

3. 평가

구수한 중저음으로 사연을 읽어 줄 때는 영락없이 맘씨 좋은 아저씨 같았기에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올드팬들이 많다. 중장년층에서도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서 보였던 최유라와의 절륜의 호흡을 기억하는 팬들이 있다.

상술했듯 1980년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독보적인 위치 때문에 "팝송 하면 이종환"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1990년대 초 자신이 단독으로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실패했음에도 청취대상을 30~50대로 잡아 전환해 성공한 것을 보면 그 때까지만 해도 이종환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향적이고 권위적이며 성찰이 부족한 언행을 보이며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잦아지고 또한 숨겨졌던 어두운 면도 샅샅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중장년층들 사이에서도 안티가 상당히 많아졌다. 지라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최유라는 처음 진행할 때 그의 기세에 눌려서 거의 울 뻔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후 최유라는 방송 중에 조영남도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드세고 할 말은 꼬박꼬박 하는 당찬 아주머니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지만, 라디오 시대를 처음 진행하던 1990년대 중반엔 20대 후반이었던 최유라가 환갑을 바라보는 시아버지 같은 이종환한테 기가 눌린 건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1990년대 이후 들어 밑천이 얕은 팝 지식도 들통나며 명 DJ로서도 권위와 입지도 잃은 지 오래였다.

4. 흑역사

나무위키의 여느 문서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사실 아래의 내용들도 100% 신뢰할 것들이 되지는 않는다. 특히 한참 전의 일들이 세월이 흘러 잘못 서술된 것들도 꽤 있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기본적인 사실 관계가 틀린 것들도 꽤 있다. 아래의 내용 중 카더라성 내용이나 "그랬다고 하더라~", "빙산의 일각" 등의 표현을 사용한 풍문성 내용도 많기 때문에 걸러 읽어야 한다. 특히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내용들은 충분히 명백한 거짓일 가능성도 다분하며 이종환이 이미 고인이 된 이상 그의 삶과 행적이 지나치게 미화되었다면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필요할 수 있으나, 단순한 악의에 의해 퍼진 소문을 사실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사자명예훼손죄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하여간 이종환이 당대 음악방송으로 대중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컸다. 인터넷 시대 이전에 팝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면 이종환, 김광한, 김기덕 등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이종환이 기여한 당대의 대중문화는 여전히 노년층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맹목적인 추앙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의도적인 깎아내리기 역시 옳지 못하다.

4.1. 라디오 방송 중 물의

방송 내외적으로 흑역사참으로 많은 인물이다.

방송 중에 보수적인 주장이나 독선적인 의견을 상대가 받아 들이도록 강요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기도 했다. 고민 상담 코너에서 여성 청취자와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전후 사정도 잘 듣지 않고 대뜸 타박을 하며 훈계조로 짓누르는 걸 상대가 마뜩잖게 여기자 점점 큰 소리로 윽박지르기 시작했고 이에 놀란 여성이 울먹이면서 전화를 끊은 일이 있었다.

2001년에는 음주운전으로 욕을 바가지로 듬뿍 떠 먹었고, 바로 이듬해인 2002년에는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를 디스하는 발언을 하는 것에 청취자들의 비판이 계속되던 중, 자신을 비판한 글을 올린 사람의 개인정보를 빼내 전화를 걸고 개새끼라고 쌍욕을 퍼부은 일이 드러나면서 방송을 잠시 그만두기도 했지만 금방 다시 복귀했다.

2003년 7월에는 이종환의 음악살롱이란 프로그램을 술에 취한 채 진행했다. 혀가 꼬부라진 건 둘째 치고, 말을 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청취자들의 분노를 사며 하차했다. 불과 두 달 가량 지난 9월 말에 슬그머니 복귀 움직임이 있었지만 극심한 반대 여론에 부딪혀 실패했다. 하지만 2005년에 누군가 리셋 버튼을 눌러 줬다. 이렇게 물의를 하도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방송계에서 영구 퇴출을 시키라는 청취자들의 요구는 오래 전부터 계속 됐었다.

4.2.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

위에서 여러 번 언급됐지만, 이종환은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10]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연예계의 실세에 해당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게 이문세에게는 긍정적 의미인 반면 이종환에게는 부정적 의미다. 실상 1970년대 쎄시봉 시절부터 그가 데뷔시켜 스타가 된 인물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종환은 단순한 DJ가 아니라 연예계에 막강한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영향력이 절정이던 1970~80년대에는 갖가지 흉흉한 연예계 비리의 주인공으로 회자되었으나, 연예계에서 매장당할 것을 우려한 당사자들이 일부러 함구하는 일이 다반사였는 통에 겉으로 드러난 일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많다.

이종환에게 밉보인 연예인들은 거의 몰락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타짜로도 유명했던 피터 야마구치라는 한일혼혈 미국인 가수는 1988년에 음반을 냈으나[11], 이 양반한테 모종의 이유로 밉보여서 수억원을 방송가에 뿌렸는데도 방송에 나올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연예계를 떠났다. 그래도 카지노(갬블러) 관련 일로 성공했으니 다행인 사례이다.

스캔들로 촉망 받던 젊은 여가수의 앞길을 망친 단초를 제공한 일도 있다. 표면적으로는 이 여가수가 자해를 했다고 알려졌지만, 강력 범죄급의 테러로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게 바로 이수미 면도칼 자해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의 추악한 일면을 제대로 드러낸 스캔들은 바로 '박성원 자살 사건'이다. 이종환이 프로듀서 겸 DJ로 일하던 1974년 11월 당시 귀여운 뚱보 컨셉[12]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그 때 연예계에선 상당히 드물었던 현역 대학생(경희대학교 사학과)이었던 개그맨 박성원이 몰래 이종환의 호박씨를 깐 게 들통나서 자신이 운영하던 음악감상실에 감금하고 집단 폭행한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일이다. 피해자 박성원은 그때의 충격으로 우울증이 발병하여 모든 방송 활동을 접었고, 이듬해인 1975년 3월에 자택에서 자살하며 향년 2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3] 월간조선에서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위에 나와 있는 여러 사건들을 꼼꼼히 물었는데, 이에 대한 이종환의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 일품. 이를테면 박성원도 그냥 자기가 무서워서 갑자기 자살했다는 식으로 썰을 풀었다.

그런데 대표 진보주의 가수 신형원은 1980년대 이종환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에 나와서 "개똥벌레"를 불러서 유명해졌다. 이종환의 정치적 성향을 고려하면 참으로 이해가 안 가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갈등이 그다지 심한 때가 아니었다. 군부의 독재가 너무 심하다 보니 오히려 보수 지지자들까지 민주화를 열망했던 시기였던지라 가능한 얘기였다. 또한 1993년 3월 28일 방송된 이종환의 밤으로의 초대에서는 방송에 잘 안 나오는 김민기가 출연했다.[14]

그렇게 숱한 흑역사들을 여럿 양산해 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예계에서 이종환을 존경하는 이들이 꽤 된다. MBC 라디오에서 이종환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던 가수 이문세는 이종환을 이영훈과 더불어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이종환이 자신을 방송에서 고정으로 써 줘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게다가 장례식에 조문을 온 조용필이 "이종환 씨가 들려 주는 음악을 통해 꿈을 키우고 무대를 그릴 수 있었다. 나에겐 영웅이었다. 방송국에서 뵐 때마다 저나 동료,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아직도 고인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이종환 씨는 196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분같다. 좋은 음악들을 많이 들려 주셨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며, Y스타에 따르면 이수만도 다녀갔다고 한다.


[1] 충무공파 25세 종(種) 항렬.[2] 출생지를 보면 알겠지만, 한국사 최고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3대손이다. 출처.[3] 봉영운(奉永雲)의 딸이다.[4] 대신 요즘 비리 기자들처럼 몰래 뒷돈을 받거나 투잡/쓰리잡으로 수입을 올리는 일이 많았다.[5] 해외 여행 자유화와 해외 유학파의 급증,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 국제 교류 활성화 등으로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 부류의 방송인, PD, DJ, 음악평론가들은 199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서서히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밀려나게 된다.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임진모였다. 연령대로 보면 임진모는 이종환, 김기덕 바로 다음 세대다.[6] 별이 빛나는 밤에는 본 방송은 수도권에만 나가고 지역 MBC가 자체방송을 하던 때였다. 예외적으로 공개방송만 전국에 송출됐다.[7] 1988년부터 별이 빛나는 밤은 일요일에 방송하던 공개방송을 디스크쇼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토요일로 바꾸기도 했다.[8] "선녀와 나무꾼"으로 유명했던 가수 김창남이 이 그룹 출신이다.[9] 참고 기사.[10] 가수 이문세도 이 별명이 있었다.[11] 타이틀곡 '리버 까페'는 라디오에서 꾸준히 전파를 탔다. 그러나 이 노래는 유튜브에서도 검색이 안 될 정도로 현재는 거진 잊힌 노래가 되었다.[12] 1980년대 초반 유머 1번지젊음의 행진 등에서 보였던 김형곤의 캐릭터와 비슷했다. 그렇지만 박성원은 비대한 체구에 비해 제법 곱상한 외모라서 예쁜 돼지라는 별명으로도 통했다.[13] 이 사건으로 당시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그의 대학 동창은 충격을 받아 꿈을 접고 공부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 경희대 교수를 거쳐 이찬진과 함께 한글과컴퓨터/드림위즈 부사장을 지냈고, 2000년대 초 대한민국 인라인 스케이팅의 붐을 이끌었던 Dr. Spark's column(박순백 칼럼) 운영자인 박순백이 바로 그 동창이다.[14] 기사 참고할 것. 이 부분은 2024년 7월 26일 배철수의 음악캠프 3~4부 시간대에 재방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