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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요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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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요리2. 에도 시대 이후 지배층의 요리3. 일본 요리와 쵸닌(町人), 그리고 일본패스트푸드4. 일본 요리와 개화기 이후5. 일식의 세계화

1.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요리

조몬 시대에는 도토리를 주식으로 먹는 경우가 많았으며 수시로 채집이나 사냥을 통해서 과일, 채소류나 고기 등을 먹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조몬 시대 후기 들면서 한반도와의 교역으로 상당수 잡곡을 도입하면서 부분적인 농경이 시작되었고, 야요이 시대에 들어 보다 선진적인 농법이 전파되었다.

기원전 5세기 무렵에서부터 서기 7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반도와 중국 남부로부터 이민자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농경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또한 이 시기에 많은 연맹국가들이 형성되었고 개중에서 야마토가 백제와 많은 교류를 했었기 때문에 한국 요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던 것으로 보이며, 중국 남부 지역의 요리로부터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반도와 중국 남부의 요리가 전통 일본 요리와 혼합하면서 요리 기법이 발달해 왔던것으로 보인다.

675년에 덴무 덴노에 의해서 육식금지령이 시행되면서 한국 요리나 중국 요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요리의 발달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후로부터 일본인들은 고위층이라 할지라도 해산물과 채소 위주로 된 식사를 했고 평범한 사람들도 잡곡과 국, 채소, 해산물을 먹었다. 다만, 지역적으로 육식 금지령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류큐 왕국, 도호쿠와 홋카이도 일대의 아이누족들은 목축과 수렵으로 육류를 섭취했고, 직업적으로는 사냥꾼들이 들짐승을 약용으로 먹었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오리는 새, 토끼는 원래 물고기였다는 이유를 들어가며 고기를 취했다. 이랬기 때문에 육식 금지령으로 일본이 완전한 채식주의 사회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무사들이 일본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면서 육식 금지령도 점차 약화되어 갔다. 실질강건을 중시하고 활동량이 엄청난 무사들이 채식만으로 열량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육식도 허용되기 시작하고 사냥 문화도 다시 부활했다.

헤이안 시대 이후로 선종이 유입되면서 사찰 요리도 널리 전파되었다. 일본의 사찰 요리는 두부, 차, 점심, 과자 등 다양한 음식과 식문화에 영향을 미쳤고, 중국을 통해서 유입된 국수 요리는 우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전국 시대에 서양과의 교류가 활성화된 뒤부터는 서양의 육류 요리와 카스테라, 사탕이 유입되어 일본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전국 시대에는 이전보다 육류 섭취량이 좀 더 많은 편이었다.

2. 에도 시대 이후 지배층의 요리

에도 막부 시대의 지배층[1]의 식문화는 육식금지령과 맞물려 현재의 가이세키 요리의 모체가 된 혼젠 요리를 중심으로 점차 형식화, 화석화되었다. 교토의 공가나 쇼군가의 경우는 화려한 테이블 세팅 및 장식으로 꾸며진 여러 코스에 걸쳐서 나오는 요리를 먹었으며, 이는 실제 맛을 보기 위한 용도가 아닌 형식적으로 정해진 코스의(일즙이채, 이즙오채 등의 형식) 가짓 수를 채우기 위한 것으로, 실제 식사가 나오기 전의 요리는 한두 젓가락만 먹고 버리는 것이 관례였고 실제 식사는 지금의 가이세키 요리 후반에 나오는 밥과 츠케모노 몇 개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교토의 천황 및 공가들과 쇼군과 그 가족들의 식탁은 형식적인 혼젠 요리의 형식으로 마련되었다. 한 예로, 쇼군의 정실인 미다이도코로의 상차림에는 설탕과 식초로 절인 백합근과 같이 화려함을 강조하기 위해 색을 들이는 등 손은 많이 가지만 실제로 먹기 위한 것이 아닌 메뉴가 자주 상에 오르는 것을 넘어서 이러한 메뉴가 주가 되었다. 가이세키 요리가 눈으로 먹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화려한 상차림을 자랑하는 것은 이와 같은 혼젠 요리의 기교에 치중한 형식적인 상차림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2][3]

따라서 메이지 유신 이전 구 지배층의 요리는 혼젠 요리의 기교와 형식을 일부 차용한 가이세키 요리를 제외하면 거의 현대 일본인의 식문화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4]

3. 일본 요리와 쵸닌(町人), 그리고 일본패스트푸드

그러나 무사 계층 이하 서민층은 이와 달랐다. 에도 막부 시대가 열리자 쇼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영주(다이묘)들을 강제로 일정기간 에도(도쿄)로 소환하는 법인 참근교대제(산킨고타이)를 만들었다. 그런데 거의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던 초기의 에도에 살기 위해선 수많은 인력을 끌어다 모을 필요가 있었고, 풀옵션 다이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에도는 메이레키 대화재 같은 화재나 지진이 잦아 건설공사 수요가 늘 많았다.

이때 수많은 직공들이 에도 거리로 몰려들며 에도[5]는 삽시간에 인구 50만에 달하는 초고밀도 인구의 도시가 되었고, 그러다보니 밥을 해먹을 공간조차 마련할 수 없게 되었다. 이유인 즉, 일본의 주택은 현대인 지금조차도 비좁기로 유명한 목조(木造)건물인데, 당장 마실 물도 모자랄 판에 만일 불이라도 났다간...[6] 그리고 대부분 가족을 동반하지 않고 단신으로 에도에 왔으므로 에도에는 홀아비나 미혼 총각이 넘치게 되었고 이들은 집에서 스스로 밥을 해먹기 보다는 거리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음식만 전문으로 만드는 조닌(에도거리의 직공)의 등장이었고, 즉석 포장마차야타이(屋台)가 차려져 사람들에게 빠르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니하치소바(메밀국수의 일종)와 니기리즈시(초밥[7]), 덴뿌라(쿠시카츠), 카바야키(장어구이), 야키토리(닭꼬치)도 이때 등장한 음식이었고, 우동과 오니기리(주먹밥), 당고(경단)도 인기있는 음식이었다. 이것이 일본의 거리음식이 발달하고 일본식 패스트푸드의 기원이다.

참고로 이 내용은 KB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누들로드에서도 언급되었다.

농민들의 경우에는 잡곡밥과 채소, 국 위주로 먹는 전통적인 식생활을 유지했다. 다만 조선보다 평균적인 식량생산량은 높았지만 농민들에게 걷는 세금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8] 그렇게 별로 풍족하게 먹지는 못했다.

4. 일본 요리와 개화기 이후

불교를 적극 수용하게 되는 헤이안 시대부터 이어진 육식금지령[9][10]이 떨어져 레시피가 대부분 사장당하는 바람에 육식문화는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메이지 유신의 개방 이후에서야 외국에서 각종 레시피가 유입되었고, 일본 특유의 토착화를 통해 스키야키와 같은 육류 요리가 등장했다. 또한 지금은 일본의 일상식이 된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해시라이스, 돈가스, 햄버그 스테이크, 고로케메이지 시대부터 발달한 것이다. 일본이 근대에 들어서 독자적으로 유럽식 요리를 받아들이면서 발달한 요리로, 유럽에서 유래되었지만 일식(和食)으로 분류된다. 한국에서는 이 음식들의 유래가 양식이기는 한데다가 한창 들여왔을 시기가 일제강점기라 아직 이들 요리가 어레인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이라서 양식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 덕택에 오랫동안 일식집이 아닌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취급했지만 2000년대 들어오면서는 일본식 돈가스와 카레라이스, 고로케 등이 대중화되면서[11] 둘이 공존하는 다소 미묘한 상황이다.

하지만 너무 오랜 기간 지속된 금육 생활에, 이미 (네발 짐승) 고기는 혐오식품이 된 지 오래였다. 심지어는 1872년 10명의 자객들이 궁궐을 습격해서 육식을 허용한 것에 대한 보복 테러를 시도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돈가스나 쇠고기 스키야키[12]가 사실상 개화기의 상징이 되어, 이것을 먹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비문명인이라는 얘기도 메이지 시대때 심심찮게 돌았었다.

더불어 의 위대함(?)[13]에 놀란 사람들이 오븐도, 효모도 없는 무(無)의 조건에서 빵을 만들어내려는 고된 수행(...)을 겪기도 했다. 단팥빵을 비롯한 일본의 신묘하고 기묘한 빵들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양식뿐 아니라 중국 요리한국 요리를 일본식으로 어레인지한 일본식 중화 요리일본식 한국 요리도 대중화되었다. 짬뽕, 라멘, 야키니쿠, 호르몬(소나 돼지의 내장요리) 등. 예의 짬뽕과 라면의 경우 일본 버전을 다시 한국에서 받아들여 또 어레인지했으니, 중국식도 일본식도 아닌 뭔가 애매모호한 정체성의 요리가 된 셈이다.

여하튼 일본식으로 개량된 서양 요리군대를 통해 보급되면서 식생활이 서구화되었고, 일본식 중화 요리일본식 한국 요리가 등장하는 변화가 있었지만 이런 요리가 가격이 싼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서 아직까지는 대다수 서민들에게 이런 요리는 어쩌다 한번 먹는 음식이었고 대다수는 여전히 채소 위주로 먹는 전통적인 식습관을 지녔으며 1940년대 전반기에는 대규모 전비 지출의 영향으로 식생활이 크게 피폐해져갔다. 전후에는 미국의 식량원조로 밀가루 음식이 보편화되었고 1950년 6.25 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이 고도경제성장을 거둠에 따라 외식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냉동식품도 보급되어갔다. 또한 고기의 섭취량이 크게 늘고 채소와 쌀밥의 섭취량이 조금씩 주는 식단의 서구화가 진행되었다.[14] 특히 1980년대 거품경제기에 고급화의 절정을 달렸고 이 당시 막걸리와 비슷한 토속주들이 사장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거품경제 붕괴로 인해 외식산업도 침체되어갔고, 그 영향으로 가성비를 따지는 경향이 늘며 일본 외식업계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5. 일식의 세계화

1964 도쿄 올림픽 때문에 날생선이나 먹는 나라라고 까인 적이 있다. 이후 일본 정부에서 나서서 무려 50년에 걸쳐서 세계진출에 나선 결과 현재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게 되었다.

요즘의 외국인들, 특히 미주/유럽인들에게 일본 요리는 대략 3개의 키워드로 완성된다. 간장, (날)생선과 해초, 자포니카 쌀. 아마도 초밥이 이런 이미지를 만든 것 같다 어떻게든 생선을 구해다가 간장을 써서 만들고 쌀과 함께 먹으면 일본 요리라는 듯. 그러다보니 간장맛이 나면 죄다 일본 요리라 치부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1] 교토천황 이하 공가(公家)나 쇼군 가 등[2] 그러나 진짜 보는 용도에 그치던 장식용 요리에 불과한 혼젠 요리와는 달리 가이세키 요리는 모든 코스가 실제로 즐길 수 있는 음식들로 준비된다. 당장 일본 료칸에 가서 먹는 그 음식이 가이세키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3] 현대의 혼젠 요리는 결혼식 만찬에서나 구경할 수 있고, 실용적인 부분이 곁들여져 옛날처럼 형식적인 요리에서는 벗어났다.[4] 출처: 에도의 패스트푸드(청어람, 2004년)의 제3장 '덴뿌라를 먹지 않았던 쇼군'의 내용을 요약 및 각색[5] 에도시대의 에도는 대체로 지금 도쿄의 지요다구에 해당한다. 한국으로 치면 종로구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지역이다.[6] 정반대로 한국중국의 경우 흙벽돌이나 벽돌등 불연성 재료로 집을 짓는 경우가 흔하므로 불 사용이 굉장히 자유로웠으며 특유의 대륙성 기후와 결합하여 굉장히 뜨거운 음식을 선호하는 문화를 낳게 되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일본보다 격식을 차려 먹는 것을 선호하며 길거리 음식을 천시하는 문화가 나오게 되었다.[7] 원래 스시는 발효음식이었고, 손으로 쥐어서 내는 게 아니라 틀로 찍어내는 것이었다. 패스트푸드화로 빨리빨리 만들어 내야 하다보니 발효도 하지 않고 '신선한 재료'를 이용해 손으로 쥐어서 내기 시작한 것이다.[8] 에도 막부의 세율이 동시대 조선이나 중국보다 훨씬 가혹했다는 것은 학계에서 대체로 일치하는 견해이다. 일본은 기본적인 세율인 혼넨구의 세율이 50%에 달했는데 이는 조선과 중국의 세율보다도 5배~15배 이상 높은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따지면 약간 복잡한데, 조선의 경우, 대동법 기준 기본 세율은 1결=300두 당 12두로 4%에 불과한 낮은 세율을 메겼지만 운송비, 비품비, 세곡창 이용비, 관리 수고비, 세납 및 운송 중 손실분 등 국가가 지출할 부분까지 백성들의 세곡에 추가시켰기 때문에 실부담은 훨씬 높았다. 이런 일본의 농민 착취 경향은 산업화 직전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일 정도다.[9] 해산물·토끼고기·고래고기 등은 논외 대상이었다. 다만 이는 형식적인 법령이었고, 지배층과 일부 지역은 소·돼지와 같은 육식을 공공연히 즐겨 먹었다. 일본 역사에서 용맹한 사무라이가 많은 곳으로 유명했던 사쓰마 번, 즉 오늘날의 가고시마는 예로부터 돼지가 많이 생산되었는데, 이 때문에 돼지고기를 풍족히 먹었던 사쓰마 번 무사들이 다른 지역보다 더 강건했던 이유도 있다. 오늘날에도 가고시마산 흑돼지는 일본 내에서 고급 돼지고기 생산지역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10] 오키나와홋카이도는 한참이나 나중에 합병되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육식금지에 해당하지 않았다.[11] 엄밀히 말하자면 돈가스와 카레라이스, 고로케 등은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각자 개량을 거친 과정을 거쳤기에 음식의 형태가 다소 달라졌다.[12] 원래 스키야키는 고래고기나 생선을 쓰는 음식이었다. 지금은 소고기를 쓰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만.[13] 당시 일본인들의 주식이었던 쌀밥만 먹으면 비타민 B의 부족으로 각기병에 걸리기 쉬운데, 밀가루에는 비타민 B가 들어 있어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걸 몰랐을 일본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상상한 대로.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소설에는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간간히 나온다.[14] 한국의 경우에는 이러한 과정이 1970년대~1990년대에 걸쳐 진행되었고 중국의 경우에는 1990년대~2010년대에 걸쳐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