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2-12 09:08:09

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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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관료
찬덕 | 讚德
이름 찬덕(讚德)
출신 신라 서라벌 모량부(牟梁部)
사망 612년 (향년 불명)
가잠성(椵岑城)
신분 5두품(추정)[1]
직위 가잠성(椵岑城) 현령(縣令)
가족 아들 해론(奚論)
국가 신라

1. 개요2. 생애3. 가잠성 전투와 결사항전4. 최후5. 사후

1. 개요

"의리 없이 사는 것보다는, 의리를 지켜 죽는 것이 낫다."
삼국사기》 <해론 열전>

삼국시대 신라 진평왕 시대의 관료이자 무신.

신라의 대표적인 충신 중 한 명으로, 아들 해론과 함께 2대에 걸쳐 가잠성을 지키다 전사한 인물이다. 신라 화랑세속오계 중 하나인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극한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자결함으로써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2. 생애

서라벌의 모량부(牟梁部)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용감한 의지와 뛰어난 절개를 가지고 있어 당시 이름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명성을 바탕으로 610년(진평왕 27년), 진평왕에 의해 발탁되어 신라와 백제의 국경 분쟁 지역인 가잠성(椵岑城)[2]의 현령(縣令)으로 부임하게 된다. 가잠성은 당시 양국의 최전방 요충지였기에, 왕이 그를 이곳에 보낸 것은 그의 능력을 크게 신뢰했음을 보여준다.

3. 가잠성 전투와 결사항전

찬덕이 부임한 지 1년 만인 611년 10월, 백제무왕이 대군을 일으켜 가잠성을 포위 공격했다.

진평왕은 급히 상주(上州), 하주(下州), 신주(新州) 3주의 병력을 동원해 구원군을 보냈으나, 백제군의 기세에 눌려 패퇴하고 말았다. 구원군마저 물러가고 성이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자, 찬덕은 병사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 주(州)의 장수들이 적이 강한 것을 보고 진격하지 않고, 성이 위급한데도 구원하지 않으니 이는 의리가 없는 것이다. 의리 없이 사는 것보다는 의리를 지켜 죽는 것이 낫다!"
삼국사기》 <해론 열전>

찬덕의 결의에 감복한 병사들은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백제군의 포위는 100일 넘게 지속되었고, 성안의 양식과 물은 완전히 바닥났다. 기록에 따르면 찬덕과 병사들은 시신을 뜯어먹고 오줌을 받아 마시며(食屍飮尿) 버티는 지옥 같은 공성전을 치르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4. 최후

612년 정월, 병사들은 모두 지치고 성벽은 무너져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 패배가 확정적이자 찬덕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부르짖었다.
"우리 임금이 나에게 하나의 성을 맡겼으나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게 되니, 원컨대 죽어서 큰 귀신이 되어 백제인을 다 물어 죽이고 이 성을 되찾겠다!"
삼국사기》 <해론 열전>

이 유언과도 같은 저주를 남긴 뒤, 찬덕은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뜬 채 적진이 아닌 성안의 느티나무에 달려가 머리를 부딪혀 자결했다. 지휘관이 자결하자 가잠성은 함락되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백제군에 항복하였다.

5. 사후

찬덕의 장렬한 죽음은 당시 신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비록 성은 빼앗겼으나 그의 충절은 높이 평가받았고, 그 공로로 인해 아들 해론은 20세의 젊은 나이에 5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대나마(大奈麻)에 오르게 된다.[3]

그러나 618년, 아들 해론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가잠성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가, 성을 탈환한 직후 백제군의 역습을 받아 아버지와 같은 장소에서 전사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찬덕의 "귀신이 되어 성을 되찾겠다"는 유언은, 아들 해론의 목숨을 바친 돌격으로 잠시나마 이루어졌던 셈이다.


[1] 아들 해론의 최종 관등이 5두품의 한계선인 대나마였으므로, 아버지인 찬덕 역시 5두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학계에서 논란이 있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죽주산성설, 충청북도 괴산군설 등이 있다.[3] 당시 신라는 장수들이 용맹하게 싸우도록 장려하기 위해, 전사자의 유족에게 파격적인 보상을 내리는 제도가 있었다. 소나, 야이차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