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18:41:38

카나다 요시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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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다 요시노리에 대해서 다룬 영상[1]

1. 소개2. 생애3. 작풍4. 평가5. 인맥
5.1. 제자5.2. 추종자
6. 기타7. 작품 목록8. 제작 오프닝

1. 소개

金田伊功[2]
1952년 2월 5일 ~2009년 7월 21일 (향년 57세)

일본의 애니메이터, 게임 개발자. 나라현 출생. 기존의 일본 아니메의 표현기법을 벗어난 신선한 충격을 준 작화로, 일본에서는 아니메계의 혁명아, 아니메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는 카나다 요시노리 이전과 카나다 요시노리 이후로 나뉘어진다고 할 정도이다. 카나다처럼 그리는 법을 카나다 류(流)라고 하는데 일본 애니메이션 교재에는 이 카나다 류가 기본으로 들어가있으며 애니메이션 학원에서도 기본 작법으로 가르친다. 애니메이터 아라이 준은 '카나다 류라는 표현은 잘못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기법의 대부분이 카나다에서 파생되었는데 그걸 따로 분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하기도 했다.

40년간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토모나가 카즈히데는 말하길, 그는 직인(장인) + 크리에이터. "요구된 그림 콘티를 제대로 재현하는 것이 기존의 애니메이터의 일이었지만, 그는 요구된 것을 재구성해서 보는 이들에게 임팩트를 주는 궁리를 했다."
필명으로는 카나다 이스케(金田伊助), 토가쿠시 사부로(戸隠三郎)가 있다. 카나다 이스케 명의에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겟타로보와 겟타로보G의 엔드 크레딧에 카나다 이스케로 오기되어 나간 이후 카나다의 스승 중 한 명이었던 코마츠바라 카즈오가 애칭으로 카나다를 이스케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자들을 잘 챙겼다고 한다. 본인이 해외 여행을 다닐 때는 꼭 제자들을 데리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2. 생애

NHK에서 제작 방송한 카나다 요시노리 추모 1주기 방송

1969년, 극장용 만화영화 하늘을 나는 유령선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작화(거대 로봇 괴물 고렘이 빌딩을 때려 부시고, 전투기 콕핏 안의 파일럿 시점에서 고렘을 향해 공격해 가는 장면, 탱크가 폭주하는 장면)에 충격을 받고, 애니메이션 업계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키무라 케이이치로어택 넘버 원도 좋아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노트에는 어택 넘버원의 일러스트가 다수 그려져 있고, 이때부터 뛰어난 그림 실력을 엿볼 수 있다. 훗날 보여지는 그의 특유의 액션 연출 기법은 키무라 케이이치로의 영향이 크게 느껴진다.

애니메이터 통신교육을 받은 후, 197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토에이에 계약사원으로 입사한다. 이때 겟타로보에 참여하면서 애니메이터 노다 타쿠오를 만나 그림을 전수받는다. 노다 타쿠오 외에 자신의 스승으로 거론 하는 인물로는 아라키 신고, 코마츠바라 카즈오가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기술, 구도, 연출법을 전수받은 것이며 자신의 화풍은 키무라 케이이치로코바야시 오사무(1945)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70년대 중반부터는 프리랜서 원화맨으로 활동하면서 개성있는 표현으로 아니메 팬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겟타로보 시리즈나 대공마룡 가이킹, 무적초인 점보트3, 무적강인 다이탄3 등의 로봇 애니메이션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이후 은하철도 999, 우주전함 야마토, 환마대전 극장판 같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서 메카작화와 특수효과 장면 등에서 활약했다. 특히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에는 완결편까지 대부분의 작품에 참여한 간판 애니메이터였으며 본인도 시리즈에 애정이 컸다고 한다.

한편 오프닝 전담으로 만들어낸 오프닝도 여럿 있으며, 그런 오프닝들은 카나다 요시노리다움이 한껏 묻어난다. 당시의 애니메이션 전문잡지에서는 카나다 요시노리를 자주 다루었고, 애니메이터로써는 이례의 팬클럽까지 결성되는 스타 애니메이터였다. 업계에서도 그는 매우 유명해서 데뷔가 5년도 지나지 않았던 20대 초반의 신인 애니메이터였던 그에게 팬들이 몰려와서 제자로 삼아달라고 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원안과 각본, 디자인, 실질적으로 감독직까지 맡은 OVA용 작품 BIRTH는 실패하고, 애니메이터로는 일급이지만 그 외의 재능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연출가로서도 재능은 매우 뛰어났다. 크레딧만 안 되었지 그가 직접 콘티까지 그린 경우가 꽤 많았다고 한다. 연출력이 없던 게 아니다. 그러나 짧은 장면, 단편 에피소드 위주로 활동을 해서 장편 작품 전체를 연출하는데는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부 장면만 맡거나, 아이캐치 기준으로 A파트 B파트를 나눠 클리아막스인 B파트를 주로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장편 연출 실력이 크게 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슬럼프로 방황하다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때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참여하여 많은 명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작품 내용상 비행 장면을 넣은 건 미야자키 하야오였지만 그 비행장면들을 감탄 나오게 그려낸 건 카나다 요시노리였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은 1997년의 모노노케 히메까지 원화맨으로 참여했다. 이 무렵 타카하타 이사오로부터 원화 카시라(頭)라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직책명을 부여받고, 이 후 '카시라'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운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정식으로 지브리 작품에 손을 대기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카나다가 토에이 제작의 1982년작 FUTURE WAR 198X年의 메카 디자인 겸 메카 작화감독의 의뢰를 받았는데, 느닷없이 지금까지 일절 면식도 없었던 미야자키 하야오한테 "좀 제대로 된 일을 맡아라"[3]고 충고 전화가 온 것. 카나다는 당시 작품에 참여하긴 했지만, 스탭롤에는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지 않았다.

90년대에는 TVA 제작 현장에도 복귀했지만, 우츠노미야 사토루, 이소 미츠오 등의 영향으로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제작 현장의 환경은 바뀌져 있었다.(우츠노미야 사토루조상님 만만세, AKIRA, 이소 미츠오기동전사 건담 0080: 주머니 속의 전쟁으로 유명해진 애니메이터로 불필요한 동화(動畵)를 줄이고[4] 리얼한 묘사를 중시했는데, 이는 카나다 요시노리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는 TV에서 방영하고 한번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디오 판매와 렌탈을 염두에 두어서, 작화현장은 그림의 통일감과 리얼함을 중시해서 카나다처럼 개성있고 자유로운 착상의 원화는 수정당하기 일쑤였다.

지브리 작품 참여 이후로는, 3D CG에 매력을 느껴, CG에서의 새로운 표현영역에 도전한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극장판으로 스퀘어와 인연이 닿은 이후 애니메이션 쪽을 떠나 스퀘어에닉스의 게임 쪽에서 활동했다. 예로 파이널 판타지 13의 경우에도 카나다가 직접 3D 레이아웃을 잡아주었다.

그러다 2009년 7월 21일, 57세의 아직 이른 나이에 그 전날까지 일을 했는데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주변인들은 카나다는 술을 매우 좋아했으며 그래서 건강을 해친 것 같다고 증언한다. 같은 해 8월 20일, '카나다 요시노리를 송별하는 모임'에는 애니메이션업계 관계자 800명과 일반인 팬 300여명이 참석했다. 노다 타쿠오, 안노 히데아키, 린 타로가 조사(弔辞)를 낭독했다. 그의 죽음을 기리며 이마이시 히로유키, 아메미야 아키라, 요시나리 요우 3명의 애니메이터들이 추도 동인지를 내기도 했다. 제목은 카나다 요시노리여 영원히. 이후 동년 12월 제13회 문화청 미디어예술제 특별공로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는 도쿄 애니메이션 어워드 페스티벌 애니메이션 2014의 공로 부문에 선출되기도 했다.

3. 작풍




카나다 요시노리 작화 모음

로봇아니메 등에서는 완급을 이어가며 춤추듯이 움직이는 아크로배틱한 표현이나, '카나다 파스(perspective,원근법)'[5] 라고 불리우는 가까운 물체는 대담하게 크게 그려 원근감을 강조하는 구도로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박력감을 주는 묘사와 실사영화의 카메라 렌즈에서만 일어나는 역광(逆光)을 집어넣어 화려함을 주는 표현, 광각렌즈와 어안렌즈로 찍은 듯한 표현, 빛과 연기, 폭발에서의 새로운 표현기법을 개척, 배경과 인물이 같이 질주하는 표현을 통한 강렬한 속도감[6],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제한된 동화 매수 안에서 만들어내는 절묘한 움직임 등등, 남들이 하지 못하는 걸 해낸 애니메이터이자 남들이 하는 건 더 잘 해낸 애니메이터. 일본 아니메의 표현기법의 영역을 넓힌 그야말로 천재. 특히 예를들면, 이전까지의 애니메이션에서는 레이저 광선을 쏘면 그냥 선으로 찍 그어놓고 빛줄기 하나로 끝내던 것을 마치 번개가 요동치는 움직임으로 다이나믹하게 표현하는 그의 독특한 섬광 표현은 '카나다 섬광'(金田光り)이라고 불리우며, 이타노 서커스급의 용어로 쓰인다.

카나다 류의 핵심은 동화를 많이 쓰지 않아도 움직임이 풍부하게 보이고 속도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속도감을 내기 위해선 동화(프레임)를 많이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동화를 많이 쓰지 않은 TV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이 적고 상당히 템포가 느렸다. 카나다는 여기서 인물과 배경 카메라 앵글의 동시 이동, 효과선 및 이펙트 사용,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 넣는 과장된 찌그러진 원동화로 일으키는 착시효과 등 온갖 기법을 감각적으로 도입해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카나다 류 기법이 널리 퍼지면서 동화를 많이 쓰지 않은 저예산 일본 애니메이션이 액션으로도 미국 애니메이션에 뒤지지 않게 되었다.

카나다는 움직임 사이에 순간 지나가서 잘 보이지도 않을 그림에 찌그러진 그림, 생략된 그림, 섬광 그림, 잘 그린 그림 같은 걸 넣어서 움직임을 풍부하게 만들었는데 카나다와 자주 일하던 린 타로에 따르면 카나다의 이런 기법은 서브리미널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다른 애니메이터는 순간 지나갈 그림은 어차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무시하고 이어 그리기만 했지만[7] 카나다는 순간 지나가는 그림도 무의미하지 않고 사람의 무의식에 인상을 남길 것이라 생각해 대충 그리지 않고 설계를 했다고 한다. 비록 보는 사람이 인식은 못 하더라도 이러한 순간의 그림이 인상에 남아서 카나다의 작화를 보면 잘 그렸다, 멋지다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평론가 히카와 류스케는 카나다 요시노리가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같은 컷을 2프레임 넣는 것과 1프레임을 넣는 것을 교대로 섞음으로서 특유의 박진감이 느껴지는 연출을 창시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그 이전엔 이런 연출이 없었다는 점에서 창시자라 할만하다. 또한 은하선풍 브라이거로 대표되는 동화를 쓰지 않고 원화만 넣어서 뚝뚝 끊어지는 것을 일종의 박력으로 연출하는 작법도 시도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카나다 식 고의적인 연출법을 보고 프레임이 부족하다. 성의가 없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연출의 일종임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리고 카나다는 프레임이 부족한 연출만 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카나다 파트를 보면 많은 동화와 원화를 넣어서 부드러운 움직임을 연출하고 있으며 오히려 TV판에선 스케쥴과 예산 때문에 스스로에게 컷수를 줄이는 리미터를 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토에이 동화 재직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원화와 비교해서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 스타일을 계승,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애니메이터들 사이에선 자, 모형자를 대고 그리는 건 동화맨들이나 하는 아마추어 짓이라고 여겼는데 카나다는 "빠르고 잘 그리면 장땡이 아닌가"라면서 프로 원화맨이 된 뒤로도 자, 모형자 같은 도구를 적극 활용했다고 한다. 코즈마 신사쿠이웃집 토토로의 카나다가 그린 목욕 작화가 대단해서 "저 그리기 어려운 걸 어떻게 그리셨습니까?" 라고 물어보니 카나다가 "안 어려워. 자 대고 그리면 돼." 라고 했다고 한다.

워낙 카나다류가 일본 애니 업계에 침투되고 보편화하여 지금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밑의 오프닝 영상만이라도 같은 해에 나온 다른 작품들의 오프닝들과 비교해서 보면, 얼마나 세련되고 참신하고 획기적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또한 엄밀히 말해선 카나다의 프레임 활용법, 파스만이 전수되었을 뿐 아직까지도 카나다 식 화염과 폭발 묘사를 제대로 구사하는 애니메이터는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80% 정도까지 유사하게 따라하는 건 가능해도 예술인의 기술과 감성을 100% 따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카나다 작화법은 안노 히데아키도 따라해봤지만[8] 완벽하게 카나다 처럼은 안 된다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카나다 요시노리 스타일의 작화를 모아놓은 영상.


카나다 요시노리가 그린 게임 오프닝. 카나다 요시노리답게 일단 달리고 본다.

그리고 명성에 비해선 사람 얼굴은 못그리는 편. 자칫 작붕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카나다의 스승인 노다 타쿠오는 카나다가 다른 사람의 그림체를 못 따라 그리는 걸 알아서 얘는 가만히 두면 그림체 다르게 그린다고 욕을 먹을 텐데 그만두라고 할까?도 생각했으나 움직임을 묘사하는 재능이 뛰어나서 논란을 각오하고 무수정으로 방송에 그대로 내보냈다고 한다. 본인도 알기 때문에 로봇 애니메이션 위주로 활동했던 것이고 작화감독을 따로 두고 캐릭터 얼굴을 고치게하는 경우가 많았다. 토미자와 카즈오가 대표적. 그래서 그림체와 얼굴묘사가 중요한 작화감독으로서의 경력은 별로 없고 주로 원화나 액션 연출 감수로 주로 활동했다.

현직 애니메이터들은 작화를 공부할 거면 카나다계가 아닌 이소 미츠오계 리얼식 작화를 배우라고 권한다. 카나다식 작화에 익숙해지면 그 작화와 맞는 작풍의 작품만 그릴 수 있게 되고 이와 반대되는 작품에서는 잘 그릴 수 없게 되기 때문. 원화를 그릴 수 있을 정도의 애니메이터가 되면 하청까지 포함해서 한 달에 몇십 개의 일감이 들어오는데 자신과 잘 맞는 작품만 골라서 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카나다식 작화는 한눈에 보면 딱 "카나다를 따라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걸 남용한다면 자신만의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서 실력 없어 보이기 딱 좋다. 유명해지기도 어려운데, 대표적으로 니시무라 히로유키가 있다.

4. 평가

카나다 요시노리가 그려낸 애니메이션에 충격을 받은 애니메이터들은 그가 그려낸 장면들을 분석 연구했고[9] 그것을 통해 전체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 스타일이 변화하고 한 단계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카나다 요시노리가 등장한 이후 특히 메카닉이나 액션을 그리는 애니메이터들 중에서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카나다 요시노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내로라하는 1980년대 작화 전문 애니메이터들인 모리 카즈아키, 요시다 토오루, 오키우라 히로유키, 오사카 히로시 같은 사람들도 카나다의 작화의 매력과 거기로부터 받은 영향을 밝힌 적도 있으니 말 다했다. 또한 작화나 특유의 표현 기법 면에서 영향을 받지는 않았어도 카나다를 동경하고 업계에 들어온 사람들도 꽤 있다. 대표적으로 하시모토 타카시가 있다.

카나다 스타일은 1990년대에 이소 미츠오, 우츠노미야 사토루 식 리얼계 작화가 유행하면서 애니메이션 팬 사이에선 구식 연출로 여겨져 배척당했으며 10년 넘는 세월 동안 이런 연출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고 카나다도 게임으로 활동의 장을 옮겨야 했다. 그러나 이마이시 히로유키를 필두로 다시 카나다 연출이 시도되면서 2010년대에는 오히려 카나다 식 연출법이 많은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카나다의 파스 기법은 애니메이션 뿐만이 아닌 만화계에도 큰 파장을 일으켜서 자신의 작품에 카나다 파스를 집어넣는 만화가들도 생겨났다. 예로 시마모토 카즈히코가 있다.

5. 인맥

5.1. 제자

5.2. 추종자


애니메이션 제작사 중 트리거, 밀팡세는 카나다 계 애니메이터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회사이다.

6. 기타

스즈키 토시오의 회상에 의하면[10], 카나다 요시노리를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소개하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제작진에 합류시킨 것은 스즈키 토시오였다.[11] 이미 그 시절 젊은 애니메이터의 선망의 대상인 스타 애니메이터였고, 여하튼 액션과 폭발 씬이 굉장하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흉내내지 못하는) 로봇이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연출로 유명했다. 그래서 카나다 요시노리가 그린 원화는 미야자키 하야오도 고칠 엄두를 못내고 그냥 통과시켰다고[12], 다만 인물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서툴러서 나우시카의 얼굴 부분만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시 그렸다고 한다. 심지어는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그림 콘티에도 없는 장면을 원화로 그렸는데 미야자키 하야오도 인정하고 그대로 영화 장면이 된 에피소드도 있다. 카나다는 나중에 "미야자키 감독이 요구하는 레벨이 높아서 고생했다. 하지만 완성된 필름을 보면 납득이 되니까."라고 지브리 작품에 참가한 이유를 밝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원화 체크에 대해서 엄청 엄격해서 마음에 안드는 원화는 "이건 안돼!"라고 쏘아붙이고는 그 이유도 설명 안해주는 스타일이었는데[13], 카나다 요시노리가 이건 이래서 안 좋다고 설명해주고 다독이며 애니메이터들을 이끌어가는 형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도 카나다 요시노리는 높이 평가하고 '카시라'라고 불렀다.[14]

제3차 슈퍼로봇대전 알파의 미사용 데이터중 카나다 요시노리를 거론하는 용어사전(43:20)이 존재한다. 슈퍼로봇대전의 연출도 결국은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이고, 로봇 애니메이션에도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 정중한 문장으로 적혀있다.

카나다의 추종자들은 스퀘어 에닉스를 매우 증오한다. 카나다를 게임 회사로 데려가서 애니메이션을 못 만들게 했다는게 그 이유. 그렇지만 카나다가 담당한 파이널 판타지의 연출도 꽤 뛰어나니 관심을 가져도 좋다.

지브리 시절 같이 작업하던 감독 카타부치 스나오는 자신의 작품 '마이마이신코 이야기'의 배경을 철저히 묘사하기 위해 당시 동네 주민들에게 수소문을 해가며 1960년대의 동네를 재현했는데 그 동네에 한때 카나다 요시노리가 살고있었고 심지어 주인공과 같은 반이었다고 한다. 감독도 이 사실을 모르고 만들었으며 이 영화는 카나다가 사망한 뒤에 개봉하였다. 이를 통해 운명같은 걸 느꼈다고 한다. 이 영화에는 카나다가 나오지 않지만 이 동네와 교실 어딘가에 카나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주면 좋겠다고 한다.#

환마대전에서 그렸던 불꽃이 용처럼 움직이는 작화는 '카나다 드래곤'이라 하며 여러 작품에서 쓰인다. 대표적으로 코즈마 신사쿠유유백서 때 따라해서 쓰기도 했다.

1980년대 초중반 카나다에게 영향을 받은 애니메이터들을 카나다 모도키[15](金田もどき)라고 불렀다. 코즈마 신사쿠야마시타 마사히토가 대표적이다. 이 시기는 이런 애니메이터들이 잘 나갔었다고 한다.

포니테일 캐릭터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림 공부할 때 노트에 그리던 '어택 넘버원'의 주인공 코즈에도 포니테일을 한 캐릭터였고 자신이 하는 작품에서 포니테일 캐릭터만 나오면 유독 공들여 그리곤 했다. 직접 기획한 작품 BIRTH에도 포니테일 캐릭터가 히로인이다. 카나다 사망 뒤 추모하는 모임에서 카나다의 아내가 이 사실을 말하기도 했다.

7. 작품 목록

카나다 요시노리 작화 컷 모음 작화보루 제공

굵은 글씨는 참여비중이 높은 대표작.
논크레딧 참가 작품이 많다. 단순 추정은 아니고 히카와 류스케오치 카즈히로 같은 매니아 팬들이 업계인을 수소문하고 기록을 연구해서 꽤 정확한 정보이다.

8. 제작 오프닝

초전자머신 볼테스 V OP
콘티 및 연출 토미노 요시유키 / 작화감독 카나야마 아키히로
원화 카나다 요시노리, 사사카도 노부요시, 우치야마 마사유키(内山正幸)
합체 신이 사사카도, 마지막 장면이 우치야마, 그 이외에는 대부분 카나다. [19]
무적강인 다이탄3 OP
콘티 및 연출 토미노 요시유키
작화감독 토미자와 카즈오 / 원화 카나다 요시노리
사이보그 009 (타카하시 료스케 판) OP (0:00 ~ 1:20)
콘티 타카하시 료스케 [20] / 연출 히로카와 카즈유키(広川和之)
작화감독 아시다 토요오 [21] / 원화 전부 카나다 요시노리[22]
은하선풍 브라이거 OP
1인 원화 카나다 요시노리[23][24]
마경전설 아크로번치 OP
콘티 카나다 요시노리
원화 카나다 요시노리, 나베시마 오사무, 오치 카즈히로
기갑창세기 모스피다 OP
제작 (콘티, 작화) 카나다 요시노리[25][26]
학원특수 히카루온 OP
1인 원화 카나다 요시노리 / 작화감독 오치 카즈히로
떴다! 럭키맨 OP2
작화 일부 나베시마 오사무가 도운 부분 외에는 전부 카나다 요시노리
환상게임 OP
작화 카나다 요시노리, 쿠스모토 유코(楠本祐子), 타나카 히로토
주작이 날아가는 장면과 액션 신이 카나다.
CLAMP 학원 탐정단 OP
원화 카나다 요시노리
동화를 많이 쓴 타입.
무사시전2 OP
콘티 카나다 요시노리 / 1인 원화 이마이시 히로유키


[1] 설명하는 사람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특촬 평론가 히카와 류스케. 자막에선 히카와 류세이라고 나오는데 일본어 자막으로 류스케라고 제대로 뜬 걸 보면 말더듬 때문에 발음을 제대로 못한 걸 자막 제작자가 류세이로 들은 모양. 정말 류세이라고 들리기도 한다.[2] 伊功는 한자의 음독으로 읽어서 주로 친한 사람들한테는 '이코우'라고도 불린다. 본인도 사인을 할 때 IKO라고 쓰기도 했다.[3] 냉전중이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제3차 세계대전을 그려낸 작품이었는데, 제작준비 단계에서 플롯이 유출되면서 애니메이터 노동조합이 제작을 거부하거나 학부형들이 제작을 반대하는 등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유는 전쟁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리얼하단 이유로 이것이 자칫 '전쟁이란 것이 멋있고 재미있는 것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 전쟁영화가 난무하는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내용 자체는 딱히 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일본이 세계최고의 반전국가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완성된 작품은 수정된 각본이었고, 처음 예정된 각본은 우익의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무렵 한 애니메이션 잡지에서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이에 관련된 글을 기고한 적도 있었다.[4] 심지어 이소 미츠오는 원화만으로 애니메이팅을 하였다. 그런데 알고보면, 원화만으로 작화를 하는 것은 카나다 요시노리가 먼저다. 은하선풍 브라이거의 오프닝은 나카누키 원화(동화를 집어넣지 않은)의 선구적인 시도로 기존의 원화 사이시에 동화를 끼워넣야 한다는 개념을 파괴한 연출이었다.[5] 퍼스라고 해야되겠지만 한국에서도 일본어 발음 그대로 건너와서 업계용어로 파스라고 한다.[6] 이런 기법을 배경 동화라고 한다.[7] 카나다가 활동하던 초기는 녹화해서 볼 수 있는 기계도 없던 시절로 TV 본방에서 순간 0.몇 초 지나가면 그 작화를 다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평론가 히카와 류스케는 카나다 작화가 대단하다고 예전부터 생각은 했지만 카나다가 숨겨놓은 그림의 대단함을 깨달은 건 베타맥스가 나온 뒤였다고 한다.[8] 무적초인 점보트3의 한 장면.[9] 카나다 요시노리가 참여한 신작이 공개되면 다음날에는 모든 애니메이터가 그것을 흉내내서 따라하고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정도였다.[10] 출전 :鈴木敏夫のジブリ汗まみれ第98回目『伝説のアニメーターの死を悼む』 http://www.youtube.com/watch?v=vUcWvoWXXtc[11] 스즈키는 아니메쥬 편집자 시절부터 알고 지낸, 함께 술 마시며 어울렸던 사이이기도 했고, 평소에 존경하던 타카하타 이사오의 집 근처에 살고 있었던 인연도 있어서 스즈키가 타카하타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아 가서 부탁할 때 거절할 수가 없었다.[12]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제작 시기 심각한 인력부족과 제작기간이 촉박해서 미야자키 하야오도 일일이 원화를 다 다시 그리지는 못해서, 원화가의 버릇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카나다가 그린 원화 파트는 카나다 특유의 버릇을 볼 수 있다.[13] 모노노케 히메 메이킹 영상을 보면 이 무렵에는 미야자키도 성격이 느긋해졌는지 까마득한 후배 원화맨들에게 친절하게 이건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해주는 모습이 보인다. 카메라 앞이라서 그 날만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는 불명하지만[14] 야쿠자 세계에서 '오야붕' 밑의 2인자를 '카시라'라고 부른다.[15] 비슷하게 만드는 것, 모조품 등의 뜻이 있다.[16] 마지막화 원화 담당[17] 한국판 제목 썬더볼 로빈.[18] 논 크레딧 참여. 엘리오스가 페가수스로 변하는 장면을 그렸다고 한다. #[19] # 카나다의 제자 오치 카즈히로 증언.[20] #[21] 체크는 했지만 크게 고친 건 없다고 한다.[22] 시마모토 카즈히코의 만화 아오이 호노오에서 이 오프닝을 절찬한다. 각 캐릭터의 보여줘야 할 곳을 잘 보여주고 있다. 003은 귀가 잘 들리는 것이 특기지만, 그딴 것 필요없고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고, 006은 자세히 보면 입(입술)에서 바로 불을 뿜는 것이 아니라, 입 앞 몇 센치 앞에서 발화가 되는 것으로 체내의 에네지를 기체화해서 입김으로 내뿜고, 거기서 발화된다는 설정이다. 고지라가 내뿜는 불과 같은 원리인데, 원작자인 이시노모리 쇼타로도 포착하지 못한 점을 그리고 있다. 005가 바위를 들어 올리는 장면도 단순무식하게 나 힘쎄니까 이런 것 쯤이야 라고 들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힘들게 들어올리는 표정을 보여준다. 이런 장면은 (미래소년 코난(78)에서 먼저 선보였지만) 이전까지의 일본 아니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리얼한 표현이다. 주인공 캐릭터 009가 오프닝 영상에서 눈물을 흘리는 거라든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다 보면, 얼마나 섬세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23] 과장된 포즈로 화면 앞에서 안쪽으로 크게 이동하는 카나다 점프, 요란하게 빗발치는 카나다 섬광, 캐릭터의 멀찍이에서 코앞까지 카메라가 종횡무진하는 카나다 패스 등 그야말로 카나다 요시노리 스타일의 집대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상. 당시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오타쿠들의 교과서와도 같은 오프닝 영상이었다. 평론가 히카와 류스케는 이것을 마법이라고 평하면서 수백 번을 돌려봤다고 한다.[24] 다만 전설적 퀄리티의 오프닝에 비해 본편의 작화 퀄리티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어서(...) 오프닝에 낚여서 본편을 본 사람들이 실망하는 케이스가 많다. 아오이 호노오에서도 주인공 호노오 모유루가 브라이거의 오프닝을 언급할 때 "이 오프닝을 보고 싶어서 매주 TV 앞에 앉아있지만.. 본편은 뭐, 안봐도 되겠구만!"라고 뼈를 때린다.[25] 애니메이터 김세준이 어린 시절 자신에게 큰 충격을 준 영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26] 카나다의 뛰어난 센스때문에 알기 힘들지만 사실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오프닝이다. 유심히 보면 캐릭터들이나 기체 자체가 복잡한 움직임을 하지 않고 단순히 위치 이동만으로 때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그림이 그냥 설정화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