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08:31:10

문순득

표해시말(漂海始末)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
2.1. 1차 표류2.2. 2차 표류2.3. 이후
3. 기타4. 매체에서

1. 개요

文順得[1]

조선 후기 신안군 우이도(牛耳島)에 살면서 일대에서 홍어를 거래한 어물 장수. 본관은 남평(南平)[2], 호는 천초(天初), 대초(大初).

2. 생애

1777년(정조 원년) 전라도 진도군 흑산면에 소속된 우이도(현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3]에서 아버지 문덕겸(文德謙, 1739 ~ 1796)과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 黃氏) 사이의 6형제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문덕겸은 그가 생환한 뒤 1811년(순조 11) 조정으로부터 종2품 가선대부의 품계를 하사받았다.[4]

우이도 일대에서 홍어 장사를 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던 그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 석 자를 남긴 이유는 그가 표류하면서 벌어진 파란만장한 여정 때문이었다. 아시아판 하멜 표류기라고 봐도 좋다.

2.1. 1차 표류

1801년 12월 24살의 청년이었던 그는 작은아버지 문호겸(文好謙)[5]과 마을 주민 4명[6]을 따라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났다. 바다에서 표류하던 이들은 기적처럼 살아 1802년 1월 류큐 왕국의 '대도(大島)'[7]라는 곳에 표착했다. 다행히 현지인들은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문순득 일행은 그곳에서 매일 쌀과 채소를 받고 하루 넘어 돼지고기를 제공받았으며 병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해 주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8개월 동안 류큐에서 생활한 문순득 일행은 류큐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으로 가는 류큐국의 조공선에 탑승해서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02년 10월 그들은 류큐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실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들의 계획은 완벽했고 다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으나

2.2. 2차 표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났으며[8] 이번에는 류큐 왕국보다 더 남쪽으로 떠내려가 스페인 제국 필리핀 도독령이던 루손 섬에 표착했다. 선단은 진공선 2척과 호송선 1척 등 세 척이었는데 진공선 중 한 척과 호송선은 실종되어 버리고 그가 탄 진공선만 표착에 성공했다. 당시 루손은 조선이나 유구와는 왕래가 없는 섬이라서 루손 섬에서는 유구에서만큼의 대우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실제로 루손 섬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배에 탔던 중국인 15명이 물을 길러 나갔다가 6명이 현지인들에게 첩자로 의심되어 잡혀 갔다. 당시 필리핀 도독령남중국해 및 여러 곳에서 창궐한 해적들로 인해 해안가와 지방항구는 모두 닫고 마닐라 및 정해진 항구로만 무역선들을 받았는데 해안가에 십수 명의 수상한 외국 사람들이 있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외국인인 그가 필리핀 산 담배를 피우고 럼주를 마시는 일상을 보내는 사례만 봐도 필리핀 인심이 야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현지인들이 말이 안 통하는 동아시아인계 외국인을 보자 혹시나 해서 차이나타운에 데려다 준 것만 봐도 이기주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알맞게 조선으로 귀환한 것을 보면 전혀 외국인에게 야박했다고 하기 어렵다. 한참 만에 푸젠성 출신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화교 마을에 도착했다. 그제야 배에서 내린 문순득 일행은 9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마을 곳곳을 구경했는데 그 때 스페인인들이 만든 신묘(神廟, 파블로 대성당)를 방문하기도 했다.
신묘는 30~40칸의 긴 집으로 비할 곳 없이 크고 아름다웠으며 이로써 신을 모시는 대중을 대접하였다. 신상을 모셔 놓았다. 신묘 한쪽 꼭대기 앞에 탑을 세우고 탑 꼭대기에 금계(金鷄)를 세워 바람에 따라 머리가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스스로 돌게 하였다.탑 꼭대기 아래 벽의 밖으로 크기가 같지 않은 종 4~5개를 걸어 제사와 기도 등 일에 따라서 다른 종을 친다.

루손에 머물던 문순득 일행은 조공선을 지휘하던 류큐 왕국 관리와 중국인 상인들간의 갈등[9]으로 인해 4명이 먼저 중국으로 출항하고 그와 김옥문은 루손 섬에 남게 되었다.[10] 그가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일로카노어[11]와 루손 섬의 풍속을 빠르게 익혔다. 유구국에서는 식량과 의료를 지원받으면서 나름대로 편하게 지냈던 반면 루손에서는 약간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온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했는데 그는 끈을 꼬아 파는 것과 쑤저우(蘇州) 상인들의 쌀 거래를 돕는 것으로 생계와 용돈(술과 담배)을 해결했다고 한다.[12]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한 것은 아니고 그곳을 돌아다니며 풍속을 보고 관광도 하고 살았는데 당시 인기 있던 투계를 구경하거나 현지 성당을 방문하는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1803년 8월 루손에서 마카오 상선을 얻어타고 중국의 마카오로 이동했다. 그가 광둥성의 상선이 왔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표해시말에 나오지 않지만 마카오 당국이 심문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3월 16일에 '여송국왕'을 만났다고 한다. 다만 그가 상세한 사정을 알지 못해 왕이라고 지칭한 것이고 실제로는 당시 필리핀 도독령의 총독이던 라파엘 마리아 데 아길라르 이 폰세 데 레온을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13] 그가 '왕'이라고 묘사한 그 인물은 긍하 중국인 표류민 일행을 심문하고 그들이 필리핀에 표류한 정황을 물은 후 그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그렇게 송환 결정이 내려지고도 두 달이 지나고 마침내 5월 1일 그 광둥성 상선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바람의 때를 맞추기 위해 다시 3달 동안 기다린 후에 배는 1803년 8월 28일 비간의 항구를 출발했다.[14] 이후 육로를 통해 난징베이징을 거쳐 1804년 12월 조선한양에 도착하고 마침내 집을 떠난 지 3년 2개월 만인 1805년 1월에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왔다.

2.3. 이후

그는 글을 많이 배우지 못한 장사치였으나[15] 총명하고 입담이 좋았다.[16] 그의 표류 이야기는 곧 주변 사람들을 통해 퍼져나갔다. 전 세계가 중국, 일본이나, 여진족·몽골족 같은 북방 유목제국들 같은 동북아시아 국가나 인도 정도라고 생각했던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비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고향에 돌아와 다시 본업인 어부로 돌아간 그는 어느 날 다시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는데 이때 흑산도에 유배 온 정약전을 만났다. 그는 정약전에게 풍랑을 만나 표류하며 보고 들은 바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그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쓴다.[17] 그의 표류기는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에게도 전해졌으며 필리핀 도독령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용함을 전해들은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 개혁안을 제안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제자인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그를 만나게 하였고 『운곡선설(雲谷船說)』[18]을 집필하게 했다. 알게 모르게 조선 후기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그는 정약전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고[19]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을 때는 극진하게 장례도 치러주었다. 정약용도 형 정약전을 통해 그의 친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아들을 낳았을 때 아들 이름도 지어주고 정약전이 사망한 후 그가 장례를 잘 치러 준 것을 감사하는 편지도 보냈다.

참고로 '표해시말'의 말미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류큐어(81개)와 일로카노어(54개)로 싣고 있어서 언어학적으로 가치가 높아 일본에서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이완역되었으며 한국에서도 2005년에 완역본을 발간하였다.

그 사이 1801년(순조 1년) 8월[20]에 5명의 외국인이 제주도표착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북경으로 보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지만 청나라에서도 이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여 되돌려 보냈고 그 사이에 1명이 병이 들어 죽었다. 그러다 조선에 표착한 유구국 사람 궁평(宮平)이 이들과 대화한 끝에 루손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21] 이에 제주관청에서 표류인들을 궁평과 같이 보내려고 했는데 곧바로 그가 고국으로 되돌아가면서 그대로 무산되어 잊혀졌다.

그렇게 이 표류인들은 9년이나 제주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또 1명이 죽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이들에게 데려다줬는데 그가 일로카노어로 말을 걸자 그들이 "드디어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고향인 루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순조실록에 기록되어 전해진다.[22]
여송국(呂宋國)의 표류인(漂流人)을 성경(盛京)에 이자(移咨)하여 본국(本國)으로 송환(送還)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신유년(1801년)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막가외(莫可外)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관(移咨官)을 딸려서 성경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1802년)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 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에 머무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를 지급하고 양찬(粮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무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乙卯/命呂宋國漂人, 移咨盛京, 送還本國。 先是, 辛酉秋, 異國人五名, 漂到濟州, 而鴂舌聱牙, 莫辨魚魯。 寫其國名, 只稱莫可外, 未知爲何國人。 移咨入送于盛京, 壬戌夏, 自盛京禮部, 亦未能確指何國, 回咨還送。 而一名在塗病故矣。 命姑留該牧, 給公廨, 繼糧饌, 使之習風土, 通言語, 其中一人又故, 只餘三名。 至是羅州 黑山島人文順得, 漂入呂宋國, 見該國人形貌衣冠, 其方言, 亦有所錄來者。 而漂留人容服, 大略相似, 試以呂宋國方言問答, 則節節脗合。 而如狂如痴, 或泣或叫之狀, 甚可矜惻。 漂留已爲九年, 而始知爲呂宋國人, 所謂莫可外, 亦該國之官音也。 全羅監司李冕膺、濟州牧使李顯宅, 具由以聞, 有是命。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6월 26일 을묘 1번째 기사

따라서 그는 한국사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인 셈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1835년(헌종 원년) 그의 공을 치하하여 가선대부 종2품 공명첩을 하사했다고 한다.[23] 참고로 조선시대 관직체계에서 정1품부터 정3품 상계[24]까지는 당상관이라고 해서 고위직으로 분류되었다. 즉, 비록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고위직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얻었다. 그야말로 인생살이 새옹지마. 이후에도 천수를 누리다가 1847년(헌종 13) 4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여러 일화를 볼 때 그는 비범한 기억력과 외국어 습득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자를 익힐 기회가 적고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조선 시대의 평민이 그랬다는 것이 더 놀라운 점이다. 박연의 사례나 하멜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지만 보통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뚝 떨어진 외국인들은 그 나라의 말을 익히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며 이는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술한 일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제주도에 표류한 필리핀인들은 장장 9년 동안 자신들의 국적도 해명하지 못 하는 상태였지만 그는 고작 3년 만에 류큐어일로카노어를 능숙하게 배워서 귀국하였고 귀국한 후에도 일로카노어 통역을 할 정도로 숙달된 실력이었다는 걸 보면 가히 외국어 마스터 달인으로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표류국에서 언어와 생계수단을 빠르게 배워 적응하며 살았던 것을 보면 굉장히 강한 생활력을 가지고 매우 강한 강철 멘탈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며 연고도 없는 외지에서 생판 모르는 외국인에게 말을 걸고 언어를 배웠을 테니 대단히 외향적이고 친화적이며 붙임성이 좋았을 법한 성격도 짐작할 수 있다.[25]

그는 19세기 초에 필리핀마카오를 최초로 여행한 조선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표류는 개인적으로는 불운이었지만 그 덕분에 많은 이가 필리핀서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특히 정약용정약전, 이강회 등 실학자들의 세계관 확대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3. 기타

  • 그의 표류 과정을 연구한 목포대학교 사학과 최성환 교수에 따르면 그가 표착한 곳은 현 일본 가고시마현의 오시마섬, 오키나와현의 오키나와섬, 필리핀비간, 마카오 산마로 일대다. 최성환 교수는 2012년 표해시말에 대한 자세한 연구 결과를 수록한 '문순득 표류 연구'[26]라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 표해시말은 우이도에 있는 그의 6대손인 문채옥(1920~2011)의 집에서 최덕원 교수에 의해 발굴 소개된 것이다. 그의 <표해록>은 내용상 '출범-표류-귀환-후기'의 4단계 구조로 되어 있고 전반부는 일기체, 후반부는 풍토기로 구성되어 있다. 기록은 류큐 왕국루손 섬에서 견문한 사실을 풍속, 궁실, 의복, 해선, 토산, 언어 등 여섯 항목으로 나누어 싣고 있다. 특히 후반 내용은 유구와 루손의 남방문화를 자세히 소개한다. 유구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입으로 빨아 먹는데 젓가락을 입에 넣는 것은 더러운 것으로 이를 싫어한다거나 루손에서 가슴이 답답하면 빗물을 마시어 설사를 하게 한다는 사실 등의 특징적 정보를 제공한다.
  • 아쉽게도 정약전이 집필한 『표해시말』의 원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우이도에 전해온 『유암총서(柳菴叢書)』라는 책에 그 원문이 필사되어 있어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암총서』는 정약용의 제자였던 이강회(李綱會)가 1818년~1819년 사이 우이도에 머물면서 집필한 문집이다. 1권 1책으로 48장 분량이며 크기는 가로 15.5㎝, 세로 24cm이다. 문집에는 정약전이 저술한 『표해시말』이 서두에 실려 있고 이강회의 저술로 선박 제조에 관한 한국 최초의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는 「운곡선설(雲谷船說)」과 이용후생의 정신에 입각하여 수레를 만들어 보급할 것을 주장한 「차설답객난(車說答客難)」, 「제차설(諸車說)」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유암총서』는 우이도 남평 문씨 문중에 전해오다가 신안군에 원본이 기증되었다.
  • 이강회는 "문순득과 함께 표류하였던 사람을 모두 만나보았으나, 이국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유독 문순득만이 두루 살펴본 바를 자세하게 구술하여 글로 남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가 상인이면서도 일정 수준의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27]
  • 그가 익혔던 언어는 상술했듯이 류큐어일로카노어였다. 거기에 당시 그가 표류했던 루손 섬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스페인령 필리핀의 일부여서 스페인어도 익혔었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를 제외하면 개화기 이전에 유럽 제어를 익힌 몇 안 되는 한국인이다.[28]
  • 우이도에는 지금도 문순득 생가가 있으며[29] 진리 선착장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파일:IE001867513_STD.jpg
  • 2019학년도 9월 모의평가 동아시아사에 사료로 등장했다.
  • 일본의 다이코쿠야 코다유와 공통점이 있는데 활동 시기도 거의 겹치고[30] 직업이 상인이었다. 또한 항해 중에 외국에 표류했으나 적응에 성공했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해외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 비슷하다.

4. 매체에서



[1] 조선왕조실록에만 이렇게 기록되어 있고 표해시말과 남평문씨인터넷대동보, 하술할 공명첩에는 모두 文得으로 기록되어 있다.[2] 순질공파-경숙공-옹-강진-월파공파 27세 순(淳) 항렬. 문재인 대통령의 6대조뻘이다.[3] 4선 국회의원을 지낸 한화갑도 우이도 출신이다. 1640년(인조 18) 남평 문씨 문일장(文日章, 1637 ~ 1678)이 도초도에서 우이도로 옮겨와 살게 된 뒤로부터 우이도에 남평 문씨들이 세거하기 시작했다. 문순득은 문일장의 증손자다.[4] 당시 받은 공명첩이 현재도 6대손 문채옥 집안에 남아 있다.[5] 표해시말 기준. 다만 남평 문씨 인터넷대동보에 따르면 문순득의 작은아버지로는 문성겸(文成謙)·문현겸(文顯謙)이 있으며 문호겸(文謙)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작은아버지가 아닌 5촌 당숙으로 등재되어 있다.[6] 표해시말에 따르면 같이 간 마을 주민은 이백근(李白根), 박무청(朴無碃), 이중원(李中原), 김옥문(金玉紋)이었는데 이 중 김옥문은 나무를 하는 어린 아이였다.[7]가고시마현 아마미오섬(奄美大島)이다. 1802년 당시에는 일본 사쓰마 번이 점령해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나 형식상으로는 류큐 왕국 영토로 남겨두었다.[8] 간단한 추측을 하자면 이 일대는 여름과 가을에 태풍이 자주 발생하거나 북상하는 곳이다. 19세기와는 기후가 크게 다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운이 지독하게 나쁘게도 출항하고 태풍을 두 번이나 만난 걸로 생각된다.[9] 류큐국 관리는 체류비 일체를 부담해야 하고 정부간의 일을 처리해야 하므로 출항을 원했고 중국인 상인들은 바람이 잦아드는 계절까지 기다리기를 원했다.[10] 이 4명도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청나라 예부에서 이 4명과 후에 도착한 문순득 일행을 조사한 문서가 아직도 남아 있다.[11] 루손 섬 북부 지역에서 쓰이는 언어였으며 필리핀에서는 나름대로 꽤 쓰이는 언어다.[12] 비간의 역사학자 안토니오 플로렌티노는 문순득이 중국인들과 함께 건축 현장에서 나무 다듬는 일을 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당시 비간에서는 큰 주택들이 건설 중이었기 때문에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들은 일감이 많았고 비간 사람들은 목공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은 외국인들이 맡았다고 한다.[13] 본래 식민지총독들은 자국의 군주의 권한을 대행하는 인물이라서, 현지에서는 거의 왕이나 다를 바 없는 절대권력을 행사했는데, 당연히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왕으로 오해할 만도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만 해도 역대 조선 총독들은 한반도를 철권통치했고, 창씨개명이 실시될 때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郎)를 보고 지방에 살던 어떤 남(南)씨 성을 가진 남자가, '종씨가 보위에 오르셨다'면서 문안인사를 드린답시고 경성부까지 온 사례도 있었던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14] 뱃삯으로 대은화 12개를 지급했으며 식사도 각자 해결해야 했다.[15] 청나라에서 조사하였을 때 본인이 써가지고 있던 문서가 있었다는 내용이 있는 걸 보아 아예 문맹은 아니었다. 어쨌든 자기 이름 석 자는 쓸 수 있지만 책을 집필할 정도까진 아니었던 듯 하다.[16] 이강회는 "비록 문자에는 능한 것은 아니나 사람됨이 총명함과 재능이 있다"는 평을 하였다.[17]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天初)'라는 별호도 지어주었다. '(이런 경험을 한 것은) 조선 땅에서 네가 처음'이라는 뜻이다. 정약전이 문순득의 체험담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남평 문씨 족보를 보면 문순득의 자가 대초(大初)인데 아마 이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18] 문순득이 견문한 류큐 왕국, 마카오, 중국, 필리핀 등에서 얻은 선박 제조법을 위주로 하고 표류한 서양 선박의 제도까지 첨부하였다. 특히 저들의 선박과 조선의 선박을 비교하여 서술함으로써 그 우열을 드러나도록 하여 조선 선박의 특징까지 부각되어 보인다. 중간 중간 친구인 이청의 견문과 견해를 소개하기도 하면서 조선 선박의 취약성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저술인데 선박 제조법에 관해 조선시대에 쓰인 전문적인 저술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바 없기 때문이다.[19] 정약전이 19살 연상으로, 거의 아버지뻘이었다.[20] 양력 9월. 문순득이 물고기를 사기 위해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끝에 유구국에 표착하기 3개월 전이다.[21] 이때 궁평이 1802년에 중국인 32명과 조선인 6명이 자기 나라로 표류해 온 일이나 이들이 중국 복건성으로 가는 배를 탔다가 또 풍랑을 만나 루손 섬으로 표류한 일을 언급하는데 날짜와 표류 장소를 따져 볼 때 바로 문순득 일행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22] 비슷한 일화로 얀 야너스 벨테브레헨드릭 하멜 일행을 처음으로 만난 후 숙소로 돌아와서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23] 현재도 당시 하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명첩이 6대손 문채옥의 집에 남아 있다.#[24] 정3품 하계는 당하관으로 분류되었다.[25] 류큐 왕국에 1차 표류했을 때 류큐와 조선에는 표류민을 본국으로 송환해 주는 상호 조약이 이미 있었다. 다만 당시 류큐는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중국을 거쳐서 송환해주었다고 한다. 어찌 됐든 류큐어를 그렇게 절박하게 익히지 않았어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출처: 역사 스페셜). 거기다 현지에 조선어 통역사까지 있었다고 하니 간절해서 류큐어를 익혔다기보단 문순득 본인이 소통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26] 출판사 민속원, ISBN 978-89-285-0285-1[27] '19세기 초 문순득의 표류경험과 그 영향', 최성환[28] 문순득이 최초의 사례는 아닌데, 효종 시기에 전라 좌수사를 지낸 이도빈이 당시 조선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헨드릭 하멜 일행들에게서 네덜란드어를 배운 것이 한국인유럽 제어를 익힌 최초의 사례다.[29] 물론 워낙 낡고 오래되었다 보니 현대식 구조물로 벽과 지붕을 무너지지 않게 감싸 두었다.[30] 문순득이 어렸을 때 코다유가 러시아로 표류했고 코다유가 일본으로 귀국한 뒤 10여년 후에 문순득이 필리핀으로 표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