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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보르지기트 붐부타이 (博爾濟吉特 布木布泰)[1] |
출생 | 1613년 3월 28일 |
사망 | 1688년 1월 27일 (향년 74세) |
청 베이징 자금성 자녕궁 | |
재위 | 청 황태후 |
1651년 ~ 1662년 | |
청 태황태후 | |
1662년 ~ 1688년 | |
배우자 | 청태종 숭덕제 홍타이지 |
능묘 | 소서릉(昭西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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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유일한 태황태후[2]이자 중국 역사상 마지막 태황태후.[3]홍타이지의 비로서[4] 청 최초의 황태후이며 순치제의 생모, 강희제의 조모이다. 후술되어있듯 몽골족 출신으로 청나라 초기 역사를 관통한 여인이었다.
2. 생애
2.1. 출생부터 장비 시절까지
1613년, 몽골의 호르친(Khorchin, 科爾沁, 과이심) 부족의 버일러(beile, 貝勒)[5]이자 호쇼이(hošo-i, 和碩) 충친왕(忠親王)이었던 보르지기트 자이상(borjigit jaisang, 博爾濟吉特 寨桑)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니까 만주족이 아닌 몽골족 출신. 성씨인 보르지기트는 몽골어로는 보르지긴이라고 하는데, 이는 몽골 제국의 황성(皇姓)으로, 그녀는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후손이다.그녀의 이름인 붐부타이(布木布泰), 즉 하늘이 내린 귀인이라는 뜻의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그녀가 태어났을 때 티베트 불교 승려가 "이 아이는 장차 천자의 어머니로 군림할 것"이라 예언했다는 야사가 있다. 그러나 몽고어로 붐부타이는 병(甁)이라는 뜻으로 밝혀졌다.
1625년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지의 복진이 되었고, 1632년에 서궁복진으로 봉해진다. 1636년 홍타이지가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황제가 되자 서영복궁측복진, 영복궁 장비(永福宮 莊妃)에 봉해졌다.
참고로 홍타이지의 정실 부인이자 황후인 효단문황후 보르지기트씨(孝端文皇后 博爾濟吉特氏)는 그녀의 고모이고, 홍타이지의 비(妃)이자 홍타이지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려진 민혜공화원비 보르지기트씨(敏惠恭和元妃 博爾濟吉特氏)는 그녀의 친언니이다. 즉, 홍타이지는 붐부타이의 고모부이자 형부이자 남편이 된다.
영복궁 장비 시절 |
홍타이지의 복진이 된 후에 한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그녀의 부족이 그녀의 언니 하이란주를 홍타이지에게 복진으로 보냈다. 하이란주가 복진이 된 후 총애를 뺏기게 되고 홍타이지가 황제가 되자 자신은 비 중에 가장 서열이 낮은 후궁[6]이 되고 해란주는 관저궁 신비(關雎宮 宸妃)로 봉해져[7] 황후를 제외하고 가장 서열이 높은 후궁이 되었다.
붐부타이를 비롯한 사궁복진들은 청대 후궁들 중에서도 매우 우대 받았다. 후궁시절 초상화가 남아있고[8], 책례를 치르면서 공주와 왕비, 대신들의 부인에게 절을 받은 후궁은 정말 적다.[9] 또한, 이들이 낳은 공주들은 전원 고륜공주에 책봉됐다. 사궁복진들은 황후는 아니었으나 집안 경조사가 있을 때 황제 부처와 함께 절을 받는 등, 정실 혹은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여럿 있다. 아직 일부다처제 풍습이 강하게 남아있던 탓이다.
훗날 푸린(福臨)을 낳았는데, 생모인 붐부타이가 영복궁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홍타이지가 하이란주의 아들에게만 신경을 써서 푸린의 이름을 대충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만주족의 작명 풍습을 잘 몰라서 나온 이야기다. 동시대 만주족 이름은 일반 명사로 짓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며, 영복궁에서 태어난 아이 또는 복이 강림한다는 이름 정도면 대충 지었다고 보기 어렵다.
하이란주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병약해지고 몇년 후 사망하자 홍타이지 역시 건강이 악화되어 그녀가 죽은 후 2년만에 후계를 정하지 못한 채 급사한다.
다음 황위를 이을 후계자를 정하는 의정왕대신회의가 시작되기 전, 황기[10] 무장 이백여명들이 홍타이지의 황자가 황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황기 장병들을 이끌고 숭정전을 둘러쌌다. 친왕들의 친위 세력들은 이들을 이길 수가 없었으므로 이런 살벌할 분위기 속에서 의정왕대신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누르하치의 14남 도르곤의 동복 형제들[11]은 도르곤의 황위 계승을 지지했으나 도르곤이 황기 무장들의 눈치를 봐서 머뭇거렸고, 황기 무장들은 홍타의지의 서장자 호오거를 황제로, 홍타이지의 정실인 숭덕오궁의 황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푸린을 태자로 밀었다.[12] 후계자 갈등을 조절하고자 했던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도 호오거가 이를 받아들이기 바랐으나 호오거는 황기 무장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회의 중간에 나가버렸다. 회의가 진행될수록 친왕들이 황기 무장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퇴장했고, 도르곤, 그의 친동생 도도, 지르갈랑만이 회의장에 남았다. 홍타이지의 황자가 황위를 잇지 못하면 황기 대신들이 전부 죽일 기세였기에 도르곤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고 순치제를 보좌하기로 맹세하며 지르갈랑과 함께 섭정왕이 된다.[13]
2.2. 황태후 시절
이후 아들 푸린이 즉위하여 순치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후비제도가 완비되지 않아서 황태후로 책립되지 못했다.도르곤이 죽고 순치제는 친정을 시작하였고, 드디어 자신의 생모를 성모황태후로 책봉한다.청조실록에는 순치제 등극 직후 붐부타이가 황태후가 된 듯이 기술되어 있으나 붐부타이가 소성황태후의 존호를 받은 것은 도르곤이 죽은 직후다. 효단문황후는 원본 기록에서도 태후가 되었다는 말이 없다. 즉, 청나라의 첫번째 황태후이자 순치제의 황태후는 소성황태후 뿐이다. 이때 효종대 승정원일기에도 순치제가 생모를 황태후로 책봉하자 공물에 대해 논하는 기사가 실려있다.
황태후가 된 효장문황후는 자신의 조카를 순치제의 황후에 앉혔으나[14] 순치제는 도르곤이 정한 혼사라며 이를 반기지 않았다. 순치제 친정 직후 호르친에서 황후를 보낼 때부터 순치제는 황후를 냉대했고, 혼인 후에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다며 측궁에서 거주했다. 이 첫번째 황후도 태후인 효장문황후가 몇번이나 주의를 줄 정도로 질투가 너무 심하고 사치스러웠다고 한다. 결국 이를 트집잡혀 효장문황후도 어쩔 수없이 조카의 폐위에 찬성했고, 의정회의에서도 순치제의 결정에 동의했다. 순치제의 새 황후는 효장태후의 조카손녀였으나 순치제는 이 계후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15] 효강장황후나 효헌단경황후(동악비)는 자식이 있지만,(강희제, 화석영친왕) 이들은 사망 당시는 모두 후궁 신분이었다. 이후 순치제는 후궁인 동악비를 총애하는 등, 모후인 효장문황후와 대립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 모자는 여러모로 맞지 않았다. 효장태후는한족 풍습을 매우 혐오한 반면 순치제는 한시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효장태후는 순치제의 황권 강화와 중앙집권체제 정책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자세한 것은 순치제 항목 참조. 이로 인해 모자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순치제는 총애하던 동악비가 죽자 상심하고 이어 천연두에 걸려 붕어했다. 순치제는 효장태후와 대신들의 간언을 듣지 못했다며 자책하는 유조 14문을 남겼는데, 대부분 순치제의 한인 포용 정책과 환관 등용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효장태후가 주도한 것으로 모자간 정치적 대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야사와 미디어에서 소옥아라고 불리는 도르곤의 복진이자 경효의황후의 시호를 받았던 보르지기트씨는 효장문황후의 동생으로 알려졌으나 효단문황후의 이부동생이다.
2.3. 태황태후 시절
순치제가 죽고 효장태후의 친손자인 히오완예이가 즉위하여 강희제가 되면서 태황태후에 책봉되었다. 효장태황태후는 순치제가 급서하자 재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고 황궁을 굳게 닫았는데, 이때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보위를 둘러싸고 황궁에서 쟁탈전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히오완예이를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어 청의 혼란을 막은 공이 크다는 평을 받는다.[16]효장태황태후가 네 보정대신과 함께 정국을 주도하면서 순치제가 진행하던 정책이 무산되었다. 순치제는 외번 몽골과 티베트 관리하는 이번원을 예부에 예속시켜 육부와 내각의 강화를 하고자 했으나 효장태후와 보정대신들이 이번원을 다시 독립시켰고, 이번원의 권한 더욱 막강해졌다. 그리고 순치제의 내십삼아문을 폐지했으나 환관들은 계속 궁에서 사무를 맡았다.
그녀는 강희 연간 여러 차례에 걸쳐 존호를 받으며 소성태황태후(昭聖太皇太后)로 불렸다.
순치 연간에 한인 등용 정책과 한족 문화에 거부감을 보였던 것과 반대로 강희 연간에선 한인에 대해 점차 포용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강희 7년에 만한관계를 개선한 순치제의 공로를 칭송하는 효릉신공성덕비를 세웠을 때도 효장태황태후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또한 궁중에서 한인 부인들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고 후궁을 들일 때 한족 풍습을 일부 차용해서 진행하기도 했다.
1667년 강희제의 장남이 태어나자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1688년(강희 27년)에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시호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로 추존되었다. 효장문황후는 죽기 전 강희제에게 순치제의 효릉 근처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1723년(옹정 원년)에는 증손자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언에 따라 그녀를 소릉(昭陵)에 묻지 않고 새로운 능인 소서릉(昭西陵)에 안장하였으며 지덕(至德)이라는 시호를 가상하였다. 그 후 고손자 건륭제는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순휘(純徽)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생전에는 노조종(老祖宗)으로 불렸다.
3. 평가
조모 태황태후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위업은 없었을 것이다. - 강희제
순치제가 예수회 선교사의 조언에 따라 자금성의 천연두 대유행 때 천연두에서 안 죽고 살아남은 히오완예이를 후계로 삼으라 유지를 남겼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개국공신 친왕들이 건재한 상황에서 황제가 어린아이를 후계자로 남기고 요절하였으니 황권은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였다.그런 위기에서 효장문황후는 중심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사태를 수습하며 황실의 수장으로서 강희제를 보호했다. 그 후로 효장문황후는 보정대신들에게 정치 실무를 맡기고 어린 황제의 교육을 맡아 강희제가 빠른 시간에 제왕학을 패스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얼추 성장한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하며 오만한 보정대신 구왈기야 오보이를 처분함으로서 강력한 황권을 얻어놓고도, 삼번의 난으로 다시 갈팡질팡하자 강희제를 굳게 잡아주며 손자의 멘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청나라의 세력을 크게 일군 황제의 부인이며, 청 최초로 중원 진출에 성공한 황제의 어머니였고,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룬 황제의 조모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청나라 때 궁녀들은 화려한 치장을 할 수 없었고 옷, 신발, 화장법, 머리 장식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고 까다로운 제한을 받았는데, 이것도 바로 효장문황후가 직접 정한 규범이었다. 궁궐에 소박하고 검소한 풍토가 자리잡게 하고, 궁궐 사람들 간의 쓸데없는 말썽을 막으며, 궁녀가 모시는 주인에게 예의를 다하도록 기풍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청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 중 가장 검소한 기풍을 유지했다. 건륭제부터 사치스러워진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강희제와 옹정제에 비해서일뿐 이전 왕조보다는 검소했다. 그러나 서태후의 사치는 심각해서 훗날 서태후의 섭정기 이전이 배경인 청나라 사극에서 서태후 섭정기의 화려한 청나라 의상이 나오는 고증 오류가 생기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때문에 호사가들은 청나라 역사에서는 2명의 여인이 있는데, 한명은 청의 발전에 기여한 '흥국' 태후, 한명은 청을 끝장낸 '망국' 태후 서태후가 있다는 말까지 떠돌 정도다.
4. 미디어
강산풍우정을 비롯해 효장비사, 대청풍운, 대옥아전기, 녹정기 등 명청교체기와 순치, 강희 연간을 배경으로 하는 중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연, 조연급으로 많이 등장한다. 특히 청조의 입관 이전을 그리는 사극에서는 정사와는 별개로 야사 속 도르곤과의 열애설, 재혼설도 적극 활용하여 도르곤과의 로맨스가 많이 묘사되기에 젊은 미녀 배우들이 많이 섭외되어 금단의 사랑(!)과 정치적 풍파 속에서 어린 아들을 지키려는 절실한 모성애를 많이 그려낸다. 중국 사극의 단골 로맨스 중 하나.한편 아들 순치 연간에는 아들 여친을 못마땅해하며 아들과도 사이가 멀어지는 시어머니로도 묘사된다.(...) 손자 강희 연간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 강희제가 고민에 빠질 때마다 찾아오면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 자애로운 할머니이자 스승의 면모와 동시에 오만한 송고투나 밍주 등의 만주족 공신들도 벌벌 떨 정도로 부패한 권신들을 따끔하게 훈계하는 근엄한 어른으로도 묘사된다. 이렇듯 청나라 사극에서 가장 존재감 넘치는 여성 캐릭터 중 한명이였지만, 2010년대부터의 청나라 사극은 옹정황제의 여인이나 연희공략 등
- 게임 Europa Universalis IV
DLC 중 천명 DLC의 모델로도 등장하였다.
- 《일대황후 대옥아(一代皇后大玉儿)》 배우: 반영자(潘迎紫) <아역> 지친(季芹)
- 《회옥공주(怀玉公主)》 배우: 유설화(刘雪华)
- 《강희왕조(康熙王朝)》 배우:스킨고바(斯琴高娃)
- 《효장비사(孝庄秘史)》 배우:닝징(宁静)
- 《소년강희(孝庄秘史)》 배우:반홍(潘虹)
- 《연화삼월(烟花三月)》 배우:귀아뢰(归亚蕾)
- 《대청풍운(大清风云)》 배우:허청(许晴)
- 《강산풍우정(江山风雨情)》 배우:우리(牛莉)
- 《강희비사(康熙秘史)》 배우:우천천(邬倩倩)
- 《경성절연(倾城绝恋)》 배우:반영자(潘迎紫)
여주인공 미리를 같은 고향인 코로친 출신의 사람이라서 많이 아끼고 총애한다. 미리가 강희제 사촌동생인 정헌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알지만 둘의 혼인을 쉽게 허락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미리의 아버지가 우연의 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대신 미리를 맡아주기로 한다. 하지만 그 총애가 너무 하늘을 찔러서인지 미리에게는 독이 되어버렸다. 미리가 우여곡절 끝에 정헌과 혼인을 하지만 겨우겨우 측복진이 되었다. 하지만 미리를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자, 미리가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고자 태후에게 자신을 적복진으로 올려달라 청하지만 태후는 미리의 욕심이라며 단정하고 거절한다. 결국 참다 못한 미리는 아들을 위해 자살을 하고, 태후는 미리가 남긴 유서를 읽으며 그동안 미리가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태후는 '설마 내가 미리를 너무 총애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하며 자책했다.
- 《산하련(美人无泪)》 배우:원산산(袁姗姗)[19][20]
처음에 고모의 혼인식에서 홍타이지를 보고 첫눈에 반해 도르곤이 아닌 그에게 시집간다고 했다. 누르하치의 임종을 혼자서 보게 되는데 다음 보위를 누가 이을지 적혀있지도 않았고, 누르하치가 말하려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하지만 버일러들이 모여 대옥아에게 추궁을 하게 되는데 이때 거짓으로 홍타이지에게 보위를 물려준다고 말한다. 그러자 홍타이지가 정말 맞냐고 맹세할 수 있냐고 하자 본인이 "하늘과 돌아가신 칸께 맹세해요. 제 말이 거짓이라면 평생 남편의 사랑도 못 받고 불효자식을 낳을 것이며 쓸쓸하게 늙어갈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홍타이지를 황제로 만들고 그에게 시집을 간다. 총애를 잠깐 받기는 했으나 해란주의 등장으로 총애를 잃게 된다. 해란주가 총애를 받으며 행복하는 모습을 보며 도르곤을 떠올리면서 "도르곤에게 시집갈 걸 그랬다."며 후회를 한다. 하지만 둘은 이미 정신적으로 불륜을 저지르며 애꿎은 도르곤의 부인 소옥아[21]을 죽게 만들었다. 아들 복림이 황제가 되자 갈등을 많이 겪게 되는데 이와 중에 첫번째 황후가 사망하자 "다시는 황후가 되지 말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홍타이지에게 모욕과 냉대를 받았지만 복림의 아들 현엽이 보위에 오르니 중국 역사상 가장 좋은 황제로 꼽히는 강희제이니 오욕으로 점철된 대옥아의 인생이 꼭 헛된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옥아가 맹세했던 저 말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으나 본인 스스로 돌아보았을 때는 다시 이런 선택이 주어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하며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우정식 사극은 개연성같은 것을 따지면 안된다.
- 《다정강산(多情江山)》 배우:원영의(袁咏仪)
순치제가 동소완을 후궁으로 책봉하는 것부터 큰 반대를 했다. 며느리로 조차 인정하지 않으며 황후를 가장 총애를 했다. 동소완을 반대하는 이유는 몽골족인 아닌 한족이라는 점이 더 컸다. 순치제가 막무가내로 동소완을 후궁책봉을 하자 태후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드라마가 끝나가는 후반부가 돼서도 동소완을 힘들게 하지만 종영 직전에서야 동소완의 마음을 알게되며 며느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 《대옥아전기(多情江山)》 배우:경첨(景甜)
홍타이지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도르곤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상태지만, 역사대로 홍타이지에게 시집을 간다. 입궁하면서 고모와 친하게 지내기도 하고, 홍타이지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지만, 아직도 마음속엔 도르곤이 있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홍타이지에게 도움과 조언을 주어 부인으로서 자리를 지키지고, 도르곤에게는 위기와 기회를 알려주면서 두 남자 사이에 서게 된다. 자신의 이복언니 해란주를 에제이한테서 구출해와 따뜻하게 신경을 써준다. 해란주가 처음에 롱거에게 시집을 간다고 했을 때 그 말을 이루어지기 위해서 롱거를 찾아갔더니 거절한다고 해서 이번에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르곤에게 보내려고했다. 홍타이지가 언니를 마음에 두었다는 것을 알게되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조언하는 등 자신보다 약한 언니를 챙기는 모습으로 나온다. 홍타이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데 도르곤의 꿈을 꾸는 탓에 자기도 모르게 도르곤을 부르는 바람에 총애를 잃어버린다. 냉궁으로 보내졌을 때도 애원하기 보단 꿋꿋히 지내는 모습을 보여 홍타이지는 그 점에서 자신 보다 뛰어나 언제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 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몰려오게 되었다. 시녀 소말이 해란주에 대해 나쁘게 말해도 "언니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며 해란주의 심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복림이 낳았을 때도 8황자는 자신의 아이가 되어야 마땅했지만 홍타이지가 억지를 쓰며 해란주의 아들이 8황자라고 하는 바람에 9황자가 되었는데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냥 건강하게 태어난 것 만으로도 다행이지."라고 했다. 해란주가 죽음을 옆에서 지켜주며 끝까지 언니를 믿고 보살펴 주었다. 자신이 동궁을 받지 못한 것은 도르곤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에 홍타이지에게 미안함을 가져 해란주에게 양보했다. 홍타이지가 죽고 자신의 아들이 복림이 황제로 즉위하니 이제 도르곤과 재혼 할 수 있으려나 했지만 홍타이지는 이 점을 우려하여 유언으로 재혼을 불가한다는 것을 남긴다. 복림의 방해와 도르곤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상황이 최악으로 몰리면서 대옥아가 도르곤을 죽이게 되는 상황까지 되었다. 그 유명한 복림과 동악비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어졌다.
- 《황제의 봄(寂寞空庭春欲晚)》 배우:미설(米雪)
- 《용주전기 무간도 (龙珠传奇之无间道)》 배우:스킨고바(斯琴高娃)
- 《독보천하(独步天下)》 배우:조몽격(曹梦格)
홍타이지의 측복진으로, 질투가 많은 여인이다. 원래는 4패륵부로 시집간 고모와 지내다가 불평불만한 편지를 몽골에 보내다가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에게 걸려,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게 하기 위해 누르하치는 붐부타이를 홍타이지의 측복진으로 맞이하게 한다. 그러다가 고모부였던 홍타이지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홍타이지 마음을 얻지 못한다. 서복진이었던 부유란과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해란주가 된 부유란을 부유란이라고 알아보지 못한다.[22] 부유란이 죽으면서 분량이 엄청 줄어들었고, 이후 홍타이지가 황제가 되면서 서궁 영복궁 장비[23]가 되었다. - 《소말아전기(苏茉儿传奇)》 배우:유천함(刘芊含)
- 《화락궁정착유년(花落宫廷错流年)》 배우:왕려운(王丽云)
[1] Borjigit Bumbutai, 하늘이 내린 귀인이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병(甁)이라는 뜻이다. 야사에 전해지는 대옥아(大玉兒)라는 이름은 옥 같은 외모 때문에 불리는 것이라고 한다.[2] 누르하치가 사망할 당시 대복진이었던 효열무황후는 도르곤 삼형제를 견제하려는 홍타이지 등에 의해 석연찮은 유서를 근거로 순장되어 사실상 숙청당했고 홍타이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던 터라 누르하치의 부인들 중에는 태후로 존숭받을 사람이 없었다.[3] 동태후와 서태후의 경우 광서제가 함풍제의 양자이자 동치제의 동생 자격으로 제위를 계승한 터라 태황태후로 존숭되지 않았다. 그리고 광서제 사후 서태후는 다음 황제를 지명하여 옹립해놓고 다음날 숨져 정식 태황태후로 존숭받지 못했다.[4] 홍타이지의 정비인 효단문황후의 조카이며, 해란주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개족보.[5] 족장 혹은 군주에 상응하는 직책.[6] 어디까지나 정실인 적복진과 측복진내에서 낮은 것이지 홍타이지의 여자들 전체에서가 아니다. 홍타이지의 비들은 황제가 된 이후에 지정된 정궁 황후 저르저르, 관저궁 신비 하이란주, 인지궁 귀비 나무츠(娜木鍾)차하르부 링단칸의 대복진, 연경궁 숙비 바트마조(巴特瑪璪)차하르부 링단칸의 복진, 영복궁 장비 붐부타이만을 지칭하며, 심양고궁을 가봤으면 알겠지만 고궁 중앙쯤에 별도로 높게 쌓은 구역에서 홍타이지의 거처를 둘러쌓은 5건물들이 이들 5복진들의 거처이다. 이들 5복진들은 모두 보르지기트씨들이다.[7] 관저(關雎)는 시경의 관저편에서 따온 이름인데, 이는 군자가 숙녀를 배필로 얻어 함께 즐겁게 사랑할 것을 노래한 시였다. 또 신(宸)은 황제의 시호에만 쓸 수 있는 글자다. 다만 만주어원문은 그 정도로 대단한 의미는 아니며, 만주어를 한어로 번역하면서 생긴 해프닝에 가깝다. 당시 만주족이 한문 학식이 깊지 않은데다 당연히 자기네 말인 만주어 기록을 더욱 중시하기에 청사 연구자들은 한어 기록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당대만 해도 조선에선 그나마 홍타이지가 한문에 유식하고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고 평했다 관저궁에 해당하는 부분은 hūwaliyasun doronggo인데 온화하고 예의가 있다는 의미이며, 신비에 해당하는 부분은 hanciki amba fujin으로 가까이 있는 대복진이라는 의미이다. 한어로 원비로 고쳐질 때도 만주어로 가까이 있는 대복진이라는 봉호는 바뀌지 않았다. 홍타이지가 하이란주가 대단히 총애했음은 부정할 여지가 없으나 하이란주의 지위와 봉호는 과대포장된 것이다. 인지궁도 시경에서 따온 구절로 번역해서 그런 번역이 나온 건데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8] 비록 인지궁 귀비와 연경궁 숙비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으나 영복궁 장비와 관저궁 신비의 초상화는 현존하고 있다.[9] 돈숙황귀비, 혜현황귀비 같은 초봉귀비와 계후 호이파나라씨 같은 섭육궁사황귀비 정도를 제외하면 황귀비들도 이 명부 인사를 못받았다.[10] 홍타이지의 직속 기인 양황기와 정황기[11] 누르하치의 12남 아이신기오로 아지거와 누르하치의 14남 아이신기오로 도도.[12] 장비가 자기 아들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황기 무장들과 결탁했다는 추측이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13] 이 황기 무장들은 도르곤이 죽은 직후 도르관의 백기들을 압도하고 도르곤을 역적으로 몰았다.[14] 효장태후가 자기 친정의 이익을 추구한 걸로 보일진 몰라도 당시 남명잔당이나 삼번의 반란에 대비한 후방의 안전과 몽골의 칸위보장+군사력이 필요해서 한 정략결혼이다. 급사하여 혼인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도르곤 역시 이 방침에는 이의가 없었다.[15] 이런 탓인지 효혜장황후는 효장문황후와 달리 모후황태후로서 적통성 및 정통성은 약간 더 앞섰으나 실질적인 권위나 권력은 효장문황후가 가지게 되었다. 이는 효혜장왕후가 효장문황후의 조카손녀라서 그런것도 클 것이다.[16] 앞서 홍타이지 사망 직후 팔기들과 황제 친위세력간의 내전을 막후에서 조정하던 사람이였으며, 순치제 사망쯤 다음 후계자로 강희제를 세우는데 사실상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였으니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17] 궁쇄심옥,견환전,신 황제의 딸등으로 우리에 알려진 배우다.[18] 중국에서 태후 전문 배우로 불리기도 한다.[19] 우정(작가)의 페르소나였을 만큼 이때 이 작가의 작품에 다수 출연하였다. 지금은 작가의 작품에 출연하지 않는다.[20]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최고지만, 원산산의 어색한 울 것 같은 표정 연기도 감내해야 한다.[21] 대옥아의 사촌동생[22] 이것도 모순인게, 미운정 고운정 다 든 사람인데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첫 번째 의문이고, 보자마자 바로 자기 언니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면서 왜 부유란으로 보지 못하는 지 그게 2번째 의문이다.[23] 해란주는 동궁 관저궁 신비인데, 서궁은 동궁보다 서열이 아래였다. 홍타이지가 해란주를 엄청 사랑한다는 대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