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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35b38><colcolor=#fff> 정수장학회 正修奬學會 | |
설립자 | 박정희 |
이사장 | 허원제,/ 제11대, |
링크 | 공식 홈페이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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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수장학회는 김지태가 자신의 재산을 출연해 만든 부일장학회를 토대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설립한 단체이다.5.16 군사정변 후 김지태는 범죄 혐의로 구금되어 형사처벌에 처해질 위기에 몰렸고, 부일장학회를 비롯한 재산 등을 당시 정부에 기부하였다. 이에 집권 정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김지태가 납부한 재산에 기부금을 더해 장학회를 새로 만들어 정부기관으로 운영하였다.
현재의 공직유관단체, 준정부기관과 같이 운영되어 대통령이 이사장을 임명하고 정부에서 관리하였으나, 전두환이 집권한 후 절반 이상의 자금을 국가가 가져간 후 나머지를 박정희 유가족에게 양도해 사설 단체가 되었다.
2. 상세
2.1. 설립 배경
1958년 부산일보 산하에 부일장학회가 설립되고 몇년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부정부패의 척결을 내걸고 주요 기업가 15명을 구속하고 "부정축재처리법"을 제정하여 부정으로 축재한 기업가 27명에게 거액의 벌금을 부과하였는데 여기에 구속된 사람 중 한 사람이 김지태였다. 1962년 어느 날 3.1 운동 유공자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가 26만환을 박정희에게 전달하면서 장학회를 운영해 달라 부탁했다. 1962년 5월, 혁명[2] 1주기를 맞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5.16을 계기로 나타난 국가재건과 인간개조의 혁명정신이 세대를 이어가며 청소년들 사이에서 전해흐르게 하는 장학사업을 범국민적이며 거족적으로 추진하는 중심기구[3]를 만들어 유능한 인재들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5.16장학회'를 설치했다. 이때 두 달 정도 구금생활을 하다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등의 운영권 포기각서를 쓴 며칠 뒤 공소취하로 풀려났고, 이후 5.16 장학회로 바뀌었다.박정희 스스로가 기부금을 내자 수많은 공무원 공직자들이 동참했고, 하와이를 위시하여 국내외에서 기부금이 몰려들었다. 이병철과 박흥식 등 기업인들도 기부금을 냈다. 김지태는 전처와 이혼(?)하고 재혼하였는데, 새 부인에게 7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밀수하여 선물했고, 이에 화가 난 전처의 처남이 부정축재로 고발을 했다고 한다. 1962년 5월 24일 검찰은 그에게 7년을 구형했고, 이에 겁을 먹은 김지태는 그가 소유한 땅 10만평을 국방부에 기증했다. 하지만 오씨 성을 가진 담당검사는 돈과 처벌을 맞바꿀 수 없다며 그의 석방을 거절했다. 그러자 김지태는 이 땅을 ‘5.16장학회’에 다시 기부했다. 2중 헌납을 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 10만평을 국방부로 넘겨주었다.
설립자인 김지태가 재산해외도피 혐의 등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두 달 정도 구금생활을 하다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등의 운영권 포기각서를 쓴 며칠 뒤 공소취하로 풀려났고, 부산MBC+서울MBC+부산일보+일부의 토지들을 모태로 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장학재단’을 만들고 여기에 박정희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서 자금을 눈덩이처럼 불렸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김지태가 내놓은 장학재단 자금이 100%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김지태가 내놓은 MBC 및 부산일보 지분은 15%에 불과하고 85%가 새로 불어난 기부금이 차지한다. 이후 10.26 사건 후 언론통폐합에 의해 (주)문화방송-경향신문 지분 70%를 국가에 넘기고 1982년에 명칭이 정수장학회로 바뀌었다. 박정희의 '정', 육영수의 '수'에서 따온 이름이다.[4]
현재 문화방송 지분 30%와 부산일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5]
김지태의 유족들은 박정희가 5.16 이후 거사자금으로 500만환을 김지태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재산을 빼앗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김지태는 1976년 '나의 이력서'라는 자서전을 냈는데, 여기엔 박정희와 휘하들이 거사자금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없다. 진실화해위와 국정원의 과거사위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하여간 김지태는 총 5,456만 3,000환의 환수금을 내야 했다. 1962년 3월 김지태를 부정축재처리법 위반혐의 등으로 입건했다. 그의 부인은 외환관리법 위반혐의와 밀수 등으로 구속되어 부부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동년 5월 군 검찰이 김지태에게 징역 7년을 구형하자, 그는 부산일보 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언론 3사의 재산 환원을 결심했다. 언론 3사를 정부에 헌납한 후 그는 바로 석방됐다. 그가 헌납한 기본 재산을 토대로 하여 5.16 장학회가 1962년 7월 14일에 발족하였다. 이 헌납이 정수장학회=장물 이란 논리의 근거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법원에서 ‘완전한 강탈’은 아니라고 공식 결론이 나면서 억울하다는 일부 의견은 상당 부분 희석되었다. 부산에서 진행된 소송에서 1·2심 재판부는 모두 "김 씨가 강박으로 인해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토지를 헌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증여의 의사표시는 강박을 이유로 취소할 수 있지만 김씨가 주식을 증여한 1962년 6월 20일부터 10년이 경과할 때까지 증여 행위를 취소했다고 볼 증거가 없으므로 취소권은 이미 소멸했다"고 밝혔다. (사건번호: 2010가합56697)
군사정부 시절 이루어진 김지태의 개인 재산 기부는 (박정희 정부 및 중앙정보부의 ‘강압’이 일부 있었다 할지언정) '완전한 강탈'은 아니며, 본인이 구속상태를 면하기 위해서 군사정부와 협상을 벌인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사법처리를 받게 된 대기업 회장들이 수천억 원을 사회에 헌납하고 풀려난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2.2. 청오회와 상청회
장학금을 현재 받고 있는 재학생들의 모임을 '청오회'라고 하며, 졸업생들의 모임을 '상청회'라고 한다. 정관계[6]-학계[7]-법조계[8]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상청회를 구성하고 지탱하고 있다.상청회 회원들 중 젊은 회원들은 따로 '청여울'이라는 친목 모임을 추가로 만들어 운영한다.
'음수사원(飮水思原)'이란 사자성어를 중요한 신조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1967년 당시 청오회 소식지 창간호에 박정희가 특별히 하사한 휘호이며, 따라서 지금도 중요시되고 있다.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이며, 본디 중국의 고사[9] 에서 나온 성어이기는 하나, 그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장학금을 내려주는 은인을 잊지말고 충성을 하자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정수장학회 지원은 학생 개인이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하는 방식이 아닌, 장학회 측에서 선정한 대학들에 장학생 후보추천 공문을 내려보낸 후, 대학 측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추천되어 다시금 각 지역별로(서울-경기, 광주-전라, 대전-충청, 대구-경북, 부산-경남, 강원, 제주) 해당 지역의 담당 면접관[10]과의 최종면접 and 1박 2일의 오리엔테이션을 거쳐서 선발된다. 높은 성적 기준을 충족시킨 후보자들이므로 어지간한 결격행동이 없는 한 모두 통과된다고 보면 된다.
장학증서 수여식을 매년 5월에 가지는데, 수여식 장소는 전국의 유수 대학 중 랜덤으로 돌아가면서 열린다. 상기 언급된 문화방송과 부산일보 지분으로 인해 매년 MBC사장이 축사를 하는 것이 관례이며, MBC와 부산일보 측에서 장학회측에 장학기금을 전달하는 전달식도 간단하게 열린다. 대표적으로 엄기영[11], 김재철과 같은 역대 MBC사장들이 축사를 남겼다. 이후 수여식 내빈인사에 의한 강연이 이어지는데[12], 이 강연이 종종 정치색을 많이 띄는 경우[13]가 있었던지라 대선이 있던 2012년에는 이것을 두고 당시 야권에서 신랄하게 비난하였는데, '장학회의 정치적 목적화'를 애써 부인하려 했던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적극 부인하기도 했다.
장학생들 간의 교류를 중시하기에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대학생 장학회 중에서 가장 장학생 모임의 빈도가 높다. 지역모임, 혹은 전국모임이 거의 매 달마다 일정으로 잡혀 있으며 이를 통해서 단결력을 과시하며 은연중에 '친박 헤게모니'를 젊은 층에 전파하는 간접적 효과도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모임은 다음과 같다.
2월: 장학생 후보자[14] 지역별 면접 및 오리엔테이션
4월: (대구-경북지회 한정으로) 박정희 생가방문행사 → 장학증서 수여식-하계 전국 수련회 다음으로 중요시되는 행사다. 구미에 위치한 생가[15]를 방문하여 박정희-육영수의 영정 앞에서 잠시 묵념하며 추도한다. 이후 근처의 금오산 등반행사가 이어진다.
5월: 장학증서 수여식 및 정수가족 한마당 → 축사 및 수여행사 및 축하공연[16] 등이 이어진다. 그리고... 각 지역별로 신규 장학생들이 펼치는 단체 장기자랑[17](?) 및 장기자랑 시상식이 하이라이트다. 참석시 각자 받은 번호표를 추첨해서 수여식 말미에 상품수여를 하기도 한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유명 아이돌 그룹들도 초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
7월: 전국 하계 수련회 →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로써, 특별한 사유없이 불참시 장학생 신분이 박탈당할 수 있다. 2박 3일의 일정으로 전국의 장학생들이 한데 모여 친분을 맺는자리.
2010년대 중반 들어서는, 장학증서 수여식과 전국 하계 수련회를 동시에 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불참하면 안 될 것이다.
이외에도 매달 지역모임[18], 지역 체육대회(여름에 한 번 정도), 가을(보통 9월경)의 장학생 학술회[19], 연말의 졸업생 환송모임 및 송년회 등이 있다. 이외에 비교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도 있는데, 8월 달의 육영수여사 추도식같은 경우이다. 행사진행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학생들이 모여 자발적인 도우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청오회 내부의 조직이 잘 짜여져 있는데, 각 지역[20]마다 지회장-부지회장-총무로 이루어진 임원단이 존재한다. 서울-경기지회의 임원단은 '중앙임원단'이라 불리는데, 별도로 '인터넷팀', '(청오)회지[21]팀', '영상팀' 등도 중앙지회(서울-경기)에 속해있다. 임원단은 보통 장학금 수여 2년차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수장학회는 장학금의 중복 수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즉 기존에 해당 대학으로부터 전액이든 부분액이든 학내 장학금을 받고 있던 상황이라면 학내 장학금을 포기하던지, 정수장학회 추천을 포기하던지 취사선택을 해야한다는 것. 중복수혜가 허용된 장학재단들도 다소 있는 현실이기에 당사자들로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나, 기회의 균등이라는 취지에 비추어 본다면 전액 장학금 2명분을 한 명이 가져간다는 것도 그렇게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매달 열리는 모임에 불참 횟수가 너무 많아진다거나, 특별한 사유없이 상기한 몇 개의 중요행사에 참석하지 않을 시에는 일종의 경고가 들어오며 계속될 시에는 장학생 신분이 박탈된다. 해당학기 성적이 기준치에 미달할 경우 역시, 한 번에 한하여 경고가 들어오며 성적미달이 계속될 시 박탈당한다.
소정의 연간회비[22]가 있다. 모임이 많은 장학회이기에 지회 모임 등에서 사용되는 경비, 뒤풀이 회식 비용 등을 위해서 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립대 재학생의 경우는 비싼 학비로 인해서 당연히 수혜금액이 크므로 별 지장이 없겠으나 국립대 재학생, 그중에서도 특히 학비가 상대적으로 적은 계열의 학생들은 수혜금액도 그만큼 적기에 이 연간회비도 크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각종 개별지회모임 참석에 필요한 개인 교통비 등등 추가비용들을 일일이 따지면, 그냥 가능하다면 학교 전액 장학금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물론 학교 전액 장학금을 받는 일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지만, 정수장학회 장학금을 수여받을 정도 성적의 학생이라면, 학교 전액 장학금을 이미 받고 있는 상황일 가능성도 있기에[23], 학교 장학금과 정수장학회 중 하나를 필연적으로 취사 선택해야 한다면 학교 장학금 쪽이 금전적으로 조금이나마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의 달마다 있는 모임들에 관심이 없다면 역시 학교 장학금에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 정수장학회 장학금 수여자로서의 나름 '자부심'과 전국 장학생들과의 교류 및 폭넓은 사회적 인맥 등도 분명 메리트기 때문에 이를 중요시한다면 정수장학회 쪽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좋을 수도 있다.
참고로 장학생 선정시 성적기준은 해당학과 상위 5% 안쪽의 성적이다.
청오회에 속했던 장학생들이 졸업을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상청회에 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몇 번 연락이 가지만, 상청회 활동을 하지 않으면 사실상 없던 일이 된다.
각 해마다 해당기수가 있다. 2023년 신규 수여자들은 청오 58기이다.
박근혜 前 대통령이 운영에 관여하기도 했고,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이사장직을 맡았다. 김지태의 유족들은 강탈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박근혜 측은 헌납된 것이라 전혀 하자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외 내용은 김지태 문서를 참고하고, 더 자세하게 알려면 한홍구 교수의 2012년 저서 《장물바구니》를 봐야 한다.
3. 역대 이사장
- 초대 이관구 (1962~1965)
- 2대 엄민영 (1965~1968)
- 3대 김현철 (1968~1979)
- 4대 최석채 (1979~1980)
- 5대 조태호[24] (1980~1988)
- 6대 김창환[25] (1988~1992)
- 7대 김귀곤[26] (1992~1995)
- 8대 박근혜 (1995~2005)
- 9대 최필립 (2005~2013)
- 10대 김삼천 (2013~2024)
- 제11대 허원제 (2024~)
4. 기타
- 5.16장학회 제1회 수여자 중의 한 명이 김기춘이며, 그는 훗날 장학회 졸업생들의 모임인 상청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본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의 장학생이었다.
-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순직한 서석준 前 경제부총리는 정수장학회(당시 5.16 장학회) 출신이었다.
-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당시 주심 재판관을 맡았던 주선회 헌법재판관은 정수장학회(당시 5.16 장학회) 출신이었는데, 박근혜가 미소를 지으며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던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을 기각하는 역사적 현장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이 참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주선회 재판관은 탄핵 기각에 표를 던졌다고 알려져 있다.
- 정수장학회 출신들은 사회 각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장학생 출신 중에는 양정숙 의원과 축구해설가 신문선, 아나운서 정은아, 前 LG트윈스 감독 양상문과 같은 유명인들도 있다.
- 나비 넥타이로 유명한 보수인사 김동길 교수가 생전 장학증서 수여식에 단골로 참석하여 축사를 해왔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한창 벌어질때, 문화방송이 해당 사건의 보도에서 박근혜를 감싸는 행동과, 위의 문제를 가진 정수장학회가 문화방송을 소유하다는 까닭으로, 문화방송의 나쁜 점과 몰락을 정수장학회가 주도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정수장학회는 MBC의 지분 30%만 차지하며, 남은 대다수의 70%를 가진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가 실질적인 경영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27], 문화방송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일부만 가져가고, 경영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MBC와 부산일보의 논조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의 논조와 다른 것이기도 하다. 이미 1980년대 후반 즈음에 소재제한이 어느정도 풀리고나서 부터는 각종 다큐멘터리, 시사,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서 MBC는 독재정권에 의해 벌어진 각종 치부들을 고발하는 방송사로 이름을 날렸었고, 특히 1990년대 후반 이득렬 사장 재임기 이후로 논조가 진보화 된 이후 한나라당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서, 한나라당과 대립각을 세웠던 문화방송은 보복을 당하게 되었는데[28], 이명박 정권이 방문진 이사회 구성을 한나라당에 유리하게 바꾼 후, 김재철을 사장으로 임명하면서 진보 언론인들은 대거 쫓겨났다. 이후 논조가 보수화되었으며 2017년 박근혜가 탄핵되기 전에 김장겸 보도본부장을 사장으로 임명하였지만, MBC 블랙리스트 사태가 터지며 2017년 공영방송 총파업까지 이어지게 된다.
- 장학회 사무실이 경향신문사 빌딩 11층에 위치하고 있다. 친박진영의 상징과, 진보언론인 경향신문사가 같은 지붕아래 둥지를 트고 있는 것이 흥미거리. 물론 둥지만... 사실 경향신문사 부지가 정수장학회 소유이긴 하다.[29]
- 2020년 청오 55기 때는 코로나19 때문에 아무런 행사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학증서 수여식조차 취소되고 주소로 장학증서를 보내주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5. 계열사 목록
- 현존
- 부산일보
- 부일IS
- 부일인쇄
- 비솜
- 과거
- 문화방송: 1962년 소유권을 사실상 강탈당하는 형태로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로 넘어갔다. 그러다가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신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언론통폐합 조치로 지분의 70%인 민간기업 몫을 KBS가 인수하게 되면서 MBC는 정수장학회가 아닌 국가가 운영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1988년부터 방송문화진흥회로 소유권 매각.
- 김해뉴스: 2020년 Good개발로 매각됨.
- BS투데이: 2020년 청산됨.
6. 관련 문서
[1] 로그인은 청오회-상청회 회원 및 관계자들만 가능하다.[2] 당시 정변 주도 세력은 5.16 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치켜세웠다.[3] 출처#[4]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 생가 인근에도 '정수초등학교'란 초등학교가 있는데, 위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같은 유래의 이름이다. 단, 해당 학교는 구미시 공립 초등학교로, 정수장학회와는 무관하다.[5] 사실 이는 미디어법 위반 사항이다. 원래는 한 언론사를 가지고 있는 경우, 다른 언론사의 주식을 취득하는 데에 있어서 지분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부산일보만 정성껏 운영하고, 문화방송 쪽에는 아예 일절 간섭하지 않고 있다 보니 그냥 방통위에서도 굳이그분과 엮여있으니 건들지는 않고 있는 듯.[6] 국회의원, 경제부총리(서석준), 교육부총리(안병영), 고위관료 배출 등등 화려하다.[7] 2010년 기준 상청회 출신 대학교수만도 400명을 넘은 것으로 보고있다.[8] 검찰총장(신승남), 헌법재판관(주선회) 등 이 역시 화려하다.[9] 중국 위진 남북조시대의 양나라가 549년 후경의 난으로 인해 치명적 타격을 입었을 때, 양무제의 아들인 소역이란 자가 건강에서 강릉으로 도읍을 옮겨 양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간다. 이 소역 밑에서 일하던 '유신'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적국인 서위에 사신으로 간 사이, 서위의 군대에 의해 555년 강릉이 함락되어 소역정권이 붕괴되고 그는 그대로 서위에 머물면서 타향생활을 하게된다. 유신은 항상 조국 양나라를 그리워했는데, 이 일화에서 나온 말이 바로 음수사원이다.[10] 각 지역에 속한 현직 대학교수들(상청회 회원들)이 맡고있다.[11] 2008~2009년. 당시 엄기영에 대한 사회적인 이미지는 '불의와 맞서 싸우는 투사'처럼 여겨져 상당히 좋았으며, 실제로 수여식 축사 당시에 장학생들이 보냈던 환호역시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 대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이후 이명박과의 자리에서 보인 기대와는 전혀 달랐던 모습과 관련된 논란(反이명박 투쟁 포지션일 거라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달리 親이명박적 모습을 보임), 그리고 2010년, 강원도지사 자리를 두고 벌인 최문순과의 대결과정에서의 토론회 실언 등, 온갖 무리수로 스스로 침몰함으로써 일장춘몽이 되어버린다.[12] 당연한 일이겠지만 보수인사들, 박정희-박근혜와 인연이 있는 인사들이다.[13] 박정희 정신강조 및 추앙[14] 대학교 2학년(즉 3학기 째로 접어드는 자), 3학년(즉 5학기 째로 접어드는 자)을 대상으로 한다.[15] 박근혜 탄핵정국 와중에 방화로 추모관이 전소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었다.[16] 장학회 출신 성악전공자의 무대 및 전문 치어리더 공연단의 무대 등[17] 이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별도로 시간을 내서 지역 모임을 여러 번 가져야 한다.[18] 해당 지역의 특정대학 강의실을 빌려서 모임, 그리고 뒤풀이 회식,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19]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프리젠테이션하거나 토론이 오가는 형식[20] 서울-경기, 광주-전라, 충청-대전, 대구-경북, 부산-경남, 강원[21] 장학회 회지명이 '청오'이다.[22] 10만원~20만원 정도, 각 지회별로 걷는다.[23] 실제로도 그런 케이스들이 있다.[24] 육영수의 여동생 육예수의 남편으로, 박정희의 동서이자 박근혜에겐 이모부다.[25] 서예가이자 전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관장. 최태민의 사촌이기도 하다.[26] 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조경학과 교수, 제1회 5.16 장학금 수령자.[27] 이사회를 열어 사장을 임명하고 해임하거나, 혹은 문화방송에 대한 전반적인 감사를 할 자격이 있다.[28] 사실 방송재편 계획 자체는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 강동순이 우리가 정권을 되찾아오면 방송계는 하얀백지에다 새로 그려야 한다라는 발언을 한것이 2007년도인데, 이것이 2008~2010년도에 걸쳐서 차근차근 시행된것을 볼때 이미 2007년도에 계획이 짜여있다는 애기가 되었다.[29]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경향신문사에게 임대료를 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