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4:39:54

쳇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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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0B1BA><colcolor=#000> 쳇 베이커
Chet Baker
파일:쳇 베이커.jpg
본명 체스니 헨리 베이커
Chesney Henry Baker
출생 1929년 12월 23일
미국 오클라호마 주 예일
사망 1988년 5월 13일 (향년 58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가수, 트럼펫 연주자
서명 파일:쳇 베이커 싸인.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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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0B1BA><colcolor=#000> 묘소 미국 캘리포니아 주 잉글우드
잉글우드 파크 묘지
부모님 체스니 H. 베이커 시니어 (1906-1967)
베라 베이커 (1910-2002)
배우자 샬레인 사우더 (1950, 이혼)
할레마 알리 (1956-1959, 이혼)
캐롤 앤 잭슨 (1964-)
자녀 슬하 3남 1녀
체스니 아프타브 베이커
미시 베이커
딘 베이커
폴 베이커
학력 엘 카미노 대학
신체 불명
별명 Prince of Cool
활동 1949년 ~ 1988년
사용 악기 보컬, 트럼펫, 플루겔혼, 피아노
장르 재즈, 쿨 재즈, 비밥, 웨스트 코스트 재즈
레이블 Pacific Jazz Records·
파일:RCA 레코드 로고(1987-2015).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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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에픽 레코드 전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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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iverside-390.pn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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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유년기2.2. 군 복무와 뉴비 시절2.3. 제리 멀리건의 쿼텟에서2.4. 솔로 활동과 리즈시절2.5. 몰락의 시작2.6. 유럽 활동기2.7. 귀국 후2.8. 다시 고향으로2.9. 그리고 또 동부로2.10. 방랑 생활2.11. 말년2.12. 죽음
3. 사후의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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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쳇 베이커 트럼펫 들고있는 사진.jpg

미국재즈 트럼펫 연주자 겸 가수. 느슨하고 낭만적이면서도 울적한 분위기의 트럼펫 연주와 중성적 음색의 노래, 그리고 그와는 상반되는 막장스럽고 방탕한 인생사로 유명하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명인이자 쿨 재즈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음악가 중 한 명이다. 대표작은 Chet Baker SingsChet.

2. 생애

2.1. 출생과 유년기

오클라호마 주의 예일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체스니 베이커는 밴조기타를 연주하는 프로 뮤지션이었지만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음악을 포기하고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체스니는 평생 음악인들에게 열폭했고, 종종 그 분노를 쳇과 아내 베라에게 폭력과 욕설을 가하는 식으로 풀었다.

1940년에 체스니가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글렌데일에 있던 록히드의 부품 검사원으로 취직하면서 가족 모두가 그 곳으로 이주했고, 베라도 오클라호마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백화점에서 일하며 맞벌이 부부로 생활했다. 쳇은 당시 학교 성적이 우수해서 월반까지 했을 정도였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훨씬 어려 보이는 외모 탓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스포츠에 몰두했다.

스포츠 외에도 쳇은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 아직 상당히 앳되고 서투르기는 했지만, 당시 유행한 대중가요를 몇 번 듣고 따라부를 정도로 음악 쪽에서도 나름대로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체스니는 아들에게 트롬본을 사주었는데, 다만 아직 쳇의 체구는 저 악기를 감당할 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곧 트럼펫으로 바꿔왔다.

하지만 쳇은 트럼펫을 그냥 독학으로만 익혔기 때문에 아직 실력은 변변찮은 수준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길거리에서 놀다가 누군가가 던진 돌에 앞니 하나가 부러지는 바람에 이것도 핸디캡이 되었다. 글렌데일 중학교 시절에는 트럼펫 기초 연주 과정에 등록해서 계속 음악을 익혔는데, 이론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었고 악보 보는 법도 몰랐다고 한다.

그럼에도 무슨 음악이든 라디오음반으로 몇 번 듣고 나면 곧바로 따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은 충분했고, 당시 빅 밴드를 이끌며 미남형 외모로 영화에도 출연하며 인기를 끌던 트럼페터 해리 제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내 사춘기가 찾아오자 쳇은 어머니 베라의 과보호와 아들에 대한 욕심에 반발하며 학업을 멀리하기 시작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거나 자동차 휘발유를 몰래 빼내 팔아먹기도 했다. 심지어 아직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나이가 아님에도 아버지의 차로 위험천만한 질주를 할 정도로 운전에도 상당한 흥미와 소질을 보여주었다.

2.2. 군 복무와 뉴비 시절

쳇은 뭔가 많이 억눌려 있던 집안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었는지 1946년에 미군 육군에 자원 입대했고, 주독미군(제7군)에 배치되어 서베를린에서 군 생활을 했다. 원래 보직은 행정병이었지만, 이내 무미건조한 업무에 싫증을 내고 군 빅 밴드의 트럼페터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음악병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복잡한 편곡으로 유명했던 빅 밴드 리더 스탄 켄튼과 비밥의 선구자로 온갖 찬사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디지 길레스피의 연주를 단파방송으로 듣고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1948년에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은 뒤 의병 제대해야 했고, 쳇은 고향으로 돌아와 리돈도 유니언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 했다. 고교 시절에도 쳇은 학교 밴드에서 계속 연주 활동을 벌였고, 이어 2년제 대학이었던 엘 카미노 주니어 칼리지에서도 응원단 밴드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론 공부나 독보법, 화성학 등을 익히는 것에는 무관심했고, 여전히 귀로 듣고 따서 연주하는 식이었다.

밴드 활동 외에는 글렌데일 인근의 컬버에 살고 있던 재즈 피아니스트 지미 라울스에게 새로운 곡을 듣고 익히는 개인 교습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울스의 친구 음악인들과 잼 세션까지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에 마일스 데이비스가 동부에서 노넷(9중주단)을 이끌고 녹음한 '쿨의 탄생(Birth of the Cool)' 을 듣고 비밥과는 다른 쿨 재즈라는 영역에 눈뜨게 되었고, 결국 자신에게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 학업을 포기하고 밴드에 취직하거나 이곳저곳에서 잼 세션을 하면서 계속 음악에 몰입했다.

쳇은 결국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집에서 나와 친구들과 셋방살이를 하며 잼 세션을 계속 했다. 대학 시절부터 손대기 시작한 대마초도 거의 골초 수준으로 피워댔고, 이런저런 여성들과 성관계도 하는 등 이후 그의 이력에 계속 오점으로 남게 되는 방탕한 행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9년 말에 경찰의 검문에서 차에 숨겨둔 대마초가 발각되자 재판에서 징벌성 재징집을 당했고, 샌프란시스코의 군 밴드에서 음악병으로 근무하면서 사귀기 시작한 샬레인 수더와 첫 결혼을 했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저지르다시피 한 이 결혼 생활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고, 쳇 자신도 밴드 행정관이 기습적으로 행한 악보 초견 시험에서 불합격하자 다른 부대로 징계성 전출 조치를 받았다. 결국 군 생활에 질린 쳇은 정신 감정에서 군 복무 부적격자 진단을 받고 다시 의병 제대했다.

제대 후에도 쳇은 계속 이런저런 밴드와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과 잼 세션에 참가했는데, 1952년 5월 말 로스앤젤레스에 온 비밥의 대명사였던 알토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와 협연할 귀중한 기회를 얻었다. 비록 파커의 연주력 때문에 쳇은 공기가 되었지만, 덕분에 비밥의 레전설과 협연한 촉망받는 신인 트럼페터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2.3. 제리 멀리건의 쿼텟에서

1951년에 원래 뉴욕에서 활동하던 바리톤색소포니스트이자 작/편곡자였고, 마일스 데이비스와 '쿨의 탄생' 을 녹음했던 제리 멀리건이 미국 서부로 활동지를 옮겼다. 다소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던 멀리건은 그 당시 이미 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재즈신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확실히 다지고 있던 뮤지션이었지만, 대마초와 헤로인에 너무 중독된 나머지 빈털터리가 되었고 이런 막장 생활은 안되겠다 싶어서 약쟁이 생활을 청산하고자 이주해온 것이었다.

멀리건은 로스앤젤레스의 소규모 클럽인 헤이그에 자리를 잡고 새 밴드를 만들기 위해 서부의 역량 있는 뮤지션들을 섭외하고 있었는데, 뉴욕 시절에 시도했던 색소폰, 트럼펫, 베이스, 드럼 만으로 꾸려지는 쿼텟(4중주단)을 만들려고 했다. 쳇도 자신의 친구인 베이시스트 밥 위틀락의 주선으로 멀리건을 만나러 갔지만, 첫 만남은 의외로 좋지 않아 서로 욕설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후 쳇이 파커와 협연하면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고, 쳇 자신도 파커류의 비밥이 뿜어내는 엄청난 열기와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다시 멀리건과 접촉했다. 멀리건도 생각을 고쳐먹고 쳇을 공식 영입했고, 여기에 드러머 치코 해밀턴과 베이시스트 카슨 스미스가 더해져 피아노가 빠진 피아노리스 쿼텟이 만들어졌다.

멀리건의 새 쿼텟은 1952년 9월 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초청 공연을 가졌는데, 이 때 멀리건보다 먼저 서부 재즈의 쿨 열풍을 불러일으킨 데이브 브루벡 쿼텟이 소속되어 있던 판타지 레코드에서 음반 취입 제의를 받아 첫 녹음을 제작했다. 이 때 녹음된 네 곡 중 리처드 로저스뮤지컬 'Babes in Arms' 에 삽입된 노래 My Funny Valentine은 이후 쳇의 아이콘 격으로 자주 공연되는 곡이 되었다.

이 앨범이 인기를 얻으면서 멀리건의 쿼텟은 브루벡에 버금가는 서부 재즈의 유명 악단이 되었고, 경쟁적이고 전투적으로 격렬한 솔로를 주고받던 동부의 비밥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정돈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리즈시절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에 쿨하고 차분해 보이던 이들의 연주 활동 한켠에는 여전히 대마초를 비롯한 마약이 자리하고 있었고, 쳇도 1952년 12월에 차에서 위틀락과 대마초를 피우다 걸려서 체포된 뒤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멀리건도 약쟁이 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헤로인에 본능적으로 손을 대던 버릇을 버리지 못해 연주 활동 이외의 시간에는 다시 약에 취해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금단 현상과 원래 갖고 있던 결벽증적인 성격 때문에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는 해고와 영입이 반복되었고, 급기야 음악적으로는 찰떡궁합으로 보이던 쳇과의 관계도 날이 갈 수록 소원해지고 있었다.

결국 멀리건은 '나는 편곡 작업까지 하느라 바쁜데, 쳇은 그냥 그거 받아서 연주하는 수준인데도 나보다 더 인기가 많다' 는 식으로 열폭했고, 쳇도 이에 맞서 '멀리건은 나를 비롯한 멤버들을 하인 취급하듯이 깔아내린다' 고 디스했다. 설상가상으로 1953년 4월에 마약 근절을 목표로 무자비한 수사를 벌이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경찰의 마약 담당관 존 오그레이디가 쳇과 멀리건이 헤이그에서 연주하는 동안 이들의 집을 급습했고, 가택 수색에서 대마초가 발견되자 쳇 부부와 멀리건 부부를 즉시 체포하면서 로스앤젤레스 언론에 구제불능 약쟁이로 소개되는 굴욕을 당했다.

2.4. 솔로 활동과 리즈시절

그나마 멀리건이 대마초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죄를 뒤집어 쓰면서 쳇은 풀려날 수 있었지만, 덕분에 멀리건 쿼텟은 리더가 1953년 9월에 징역 6개월을 선고받으면서 붕 뜬 꼴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판타지 레코드의 프로듀서 딕 복은 수감된 멀리건 대신 여전히 인기가 있던 쳇에게 새로운 쿼텟을 결성해 음반 작업을 할 수 있겠냐고 떠보기 시작했다. 쳇은 처음에는 너무 부담스럽다며 주저했지만, 이내 그 동안 자신과 친해진 피아니스트 러스 프리먼과 함께 그 제의를 받아들여 쿼텟을 만들고 리더로서 첫 음반 녹음과 클럽 공연을 시작했다.

쳇의 쿼텟이 취입한 녹음은 멀리건이 수감되어 있었던 그 해 가을에 LP로 발매되었고, 다운비트를 비롯한 유력 재즈 잡지들이 호평을 하면서 쳇도 루이 암스트롱, 디지 길레스피와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한 본좌 재즈 트럼페터의 대열에 들기 시작했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쳇은 잭 몬트로스가 편곡한 곡들을 셉텟(7중주단) 체제로 녹음한 후속작 'Chet Baker Ensemble' 을 추가 취입했고, 이어 메이저 음반사인 콜럼비아의 힘을 빌어 당시 유행한 스트링 앙상블을 대동한 발라드 위주로 제작한 앨범인 'Chet Baker & Strings' 가 뜻하지 않게 대박을 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3개월의 형기를 채운 뒤 가석방된 멀리건과 쳇 사이의 거리감과 시기심은 예전보다 더 심해져 있었고, 결국 이들은 결별하게 되었다. 멀리건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고, 쳇은 루이 암스트롱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공연 프로모터 조 글레이저의 기획으로 1954년 3월에 전미 순회 공연까지 진행했다.

그 직전이었던 1954년 초에는 처음으로 트럼페터가 아닌 보컬리스트로 취입한 'Chet Baker Sings' 가 퍼시픽 재즈 레코드에서 출반되었는데, 다소 어눌한 오클라호마 사투리 억양과 느슨하면서 '남성적이지 못한' 앳된 목소리가 호불호를 심하게 갈라놓았다. 하지만 스트링 앙상블과 협연한 앨범처럼 커버에 인쇄된 쳇 자신의 잘생긴 얼굴 덕분에 여성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었고 일개 마이너 음반사에 두둑한 매상을 안겨줬다.

순회 공연으로 재미를 본 글레이저는 1954년 5월에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인 버드랜드에서 쳇의 밴드를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와 공동 출연시켜 각각 2부와 1부 공연을 맡도록 했다. 하지만 서부 재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백인 뉴비가 이쁘장하게만 연주하는 유약한 재즈' 를 거부하던 흑인 재즈 뮤지션들과 친 비밥 성향의 비평가들은 마일스 밴드의 연주를 높이 평가하고 쳇 밴드의 연주는 혹평하는 등 상당히 냉랭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 흑인 재즈맨 대부분이 자신의 연주를 달갑잖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확실히 인식시켜준 이 공연 덕에 쳇은 이후 평생 동안 아버지 체스니가 가졌던 것과 비슷하게 흑인 재즈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 또 아이러니하게 이 시기에 자신의 성공에 중요한 밑밥을 깔아준 찰리 파커가 쳇에게 마약 살 돈을 빌리러 오는 등 약과 관련된 유혹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쳇이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역으로 첫 아내 샬레인과의 부부관계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샬레인은 남편이 잘해주지도 않는데다 순회 공연마다 여성 팬들에게 둘러싸였던 쳇을 정말 싫어하여 일부러 쳇의 친구들과 검열삭제를 했고 그것을 알게된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만다. 그러다 쳇이 뉴욕에서 프랑스 여성 릴리앵 퀴키에와 동거하며 염문을 뿌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폭발하여 쳇이 호신용으로 준 권총을 들고 버드랜드로 찾아가 릴리앙을 쏴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지경까지 갔다. 결국 2년 뒤 쳇과 샬레인은 이혼하고 말았다.

하지만 쳇은 사실 릴리앵과도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고, 밴드를 이끌면서 금전 문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멤버들에게 연주료를 제 때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러스 프리먼이 쳇 대신 재정 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는데, 1954년 10월에 쳇이 다른 멤버들의 연주료를 삥땅쳐 자동차를 구입한 것이 발각되자 프리먼은 결국 이에 분노하여 탈퇴하고 말았다.

퍼시픽 재즈 레코드는 쳇의 금전 감각이나 밴드 리더로서의 역량, 사생활 같은 골치아픈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계속 쳇을 여성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뮤지션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5년에는 스트링 앙상블 협연 앨범과 보컬 앨범의 컨셉을 몽땅 뒤섞은 'Chet Baker Sings and Plays'가 출반되었다. 여전히 재즈 비평가들은 쳇의 앨범을 혹평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심지어 '지옥의 수평선' 이라는 B급 영화에서 영화배우로 데뷰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높아가는 인기와 별개로, 쳇의 밴드에는 구제불능의 마약중독자들이 계속 영입되었다. 드러머인 피터 리트먼은 아직 10대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 차례의 약물 중독으로 입원한 경력이 있던 문제아였고, 피아니스트인 딕 트워드직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동시에 심각한 중증 헤로인 중독자였다. 여기에 퍼커셔니스트이자 엔지니어였던 빌 러프버러는 쿠키에 대마초를 넣고 구울 정도로 심각한 대마초 중독자였다.

1955년 9월에는 처음으로 유럽 순회 공연을 했는데, 유럽의 청중들은 쳇의 트럼펫 연주는 호평했지만 그의 보컬 실력에 대해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공연 중에 전위적인 음악을 좋아하던 트워드직이 동료이자 마찬가지로 전위적인 작곡가 밥 지프의 곡을 가져왔고, 쳇은 이 곡들을 프랑스의 마이너 음반사 바클레이에 녹음해 자신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보기 드물게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곡을 연주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미국보다 비교적 마약에 관대했던 유럽, 특히 네덜란드프랑스의 풍토 덕에 베이시스트 지미 본드를 제외한 모든 밴드 멤버들이 그야말로 약에 취해 공연장과 클럽을 전전하는 등, 전체적인 일정은 완전히 개판이었다. 그 와중에 트워드직이 순회 공연 중이던 10월 21일에 묵고 있던 호텔에서 마약 중독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쳇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은 충격에 빠진 채 공연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쳇은 혼자 유럽에 남아 이런저런 연주자들로 벼락치기 밴드를 만들어 남은 일정을 소화했다. 하지만 급하게 긁어모은 연주자들의 수준이 들쑥날쑥해 합주력은 시망이었고, 쳇도 트워드직의 죽음으로 인한 멘탈붕괴 때문에 솔로에서 갈피를 못잡거나 심한 삑사리를 내는 등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어진 공연들도 대부분 혹평을 받거나 얼마 안되는 청중만이 온 가운데 치러졌고, 쳇 자신도 공연 보다는 마약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일상사가 되어 있었다.

2.5. 몰락의 시작

1956년 4월에 쳇은 릴리앙과도 결별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디트로이트에서 만난 헬레마 앨리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는다. 하지만 이제 쳇의 인기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서부 재즈는 상업적인 가치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쳇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메이저 음반사 콜럼비아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고, 동시에 프레스티지에 자신의 하드밥 시기 최대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in' 시리즈 네 장을 연속 취입하면서 쳇을 듣보잡으로 만들 만큼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아직 쳇과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던 퍼시픽 재즈는 쳇에게 좀 더 '뜨겁고 격렬한' 음악을 녹음할 것을 주문했고, 쳇은 곧 그 해 7월에 'Chet Baker & Crew' 라는 앨범으로 이 주문에 답했다. 덕분에 쳇은 그 동안의 유약하고 섬세한 이미지를 일신시켜 다시 재즈 비평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비롯해 많은 밴드 멤버들이 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약을 안하고 버티고 있던 지미 본드, 대마초빠이기는 했지만 다른 약은 안하고 있던 빌 러프보로가 이런 막장 분위기를 못이겨 밴드에서 탈퇴했다. 그 해 가을에는 쳇과 마찬가지로 약쟁이였다가 수감된 뒤 약을 끊고 있었던 알토색소포니스트 아트 페퍼와 협연한 'Playboys', 여전히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러스 프리먼과 협연한 'Quartet: Russ Freeman and Chet Baker' 를 취입했다.

1957년 2월에는 플레이보이즈 올스타 재즈 어워드에서 재즈 트럼펫 부문 2위에 올랐고, 수상 기념으로 쟁쟁한 선배 뮤지션들과 4개월 일정의 대규모 순회 공연을 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연을 시작한 지 불과 1주일 뒤 필라델피아에서 대마초가 발각되는 바람에 밴드 멤버였던 테너색소포니스트 필 어소와 함께 체포되었다. 쳇과 어소는 프로모터였던 조 글레이저가 보석금을 내줘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결국 남은 일정 동안 쳇의 밴드는 공연 기회를 모두 박탈당했다.

쳇은 약쟁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다가 빡쳐서 나가버린 드러머 앨버트 히스 대신 마일스 데이비스의 퍼스트 퀸텟에서 드러머로 활동했던 필리 조 존스를 영입했는데, 필리 역시 엄청난 약쟁이였고 쳇과 함께 틈만 나면 약을 해댔다. 하지만 필리가 자기 돈을 떼먹으면서 몰래 약을 산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바로 해고했고, 이후 드러머 없이 공연을 해야 하는 개막장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이런 불안정한 공연 일정도 여름에 끝났는데, 할리우드의 재즈 클럽 피콕 레인에서 연주하던 중 몇 년 전 멀리건에게 콩밥을 먹이는 데 일조한 약쟁이 사냥꾼 오그레이디와 맞닥뜨리면서 도망치듯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가야 했다. 여기서 다시 뉴욕으로 가 일거리를 찾았지만, 이미 뉴욕은 쳇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게다가 얼마 안되는 돈도 모두 마약 사는 데 탕진했고, 같이 데려온 헬레마가 이런 모습을 견디지 못해 아들 체스니 아프타브와 함께 디트로이트의 친정 집으로 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쳇은 하는 수 없이 뉴욕 주변의 고만고만한 클럽에서 가끔 들어오는 연주 제의를 소화하며 근근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퍼시픽 재즈에서 옛 동료 멀리건과 재결합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돈이 급했던 쳇은 이 제안도 받아들였지만, 이미 서로를 불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기는 힘들었다. 이어 버브 레코드에서도 소속 아티스트인 테너색소포니스트 스탄 게츠와 듀엣 앨범을 제안했는데, 쳇은 이것도 수락했지만 남은 것은 결국 자신 뿐 아니라 게츠의 이력에도 흑역사로 남을 졸작 뿐이었다.

이렇게 삐걱대던 음악 활동 외에도 검문에서 헤로인이 걸리는 등 이곳저곳에서 위기가 닥쳐왔고, 재판을 피하려고 마약 중독 치료를 신청해 가까스로 징역살이는 면했다. 여전히 마약 살 돈이 필요했던 쳇은 리버사이드 레코드에서 제안한 계약을 받아들였고, 쳇은 여기서 보컬 앨범인 'Chet Baker Sings-It Could Happen to You' 와 'Chet Baker in New York', 보컬리스트 자니 페이스와 협연한 'Chet Baker Introduces Johnny Pace' 를 연이어 발표했다. 하지만 평단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고, 매상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나마 리버사이드 레코드에서 1958년 연말에 네 번째로 취입한 'Chet' 은 음악적으로는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전성기인 1950년대 중반 만큼의 판매량 달성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쳇은 여느 약쟁이 뮤지션들과 마찬가지로 약값을 벌기 위해 음반사에 끊임없이 선불 개런티를 요구해 음반사들과 심한 갈등을 빚는다. 심지어 음반사 창고를 털어 음반을 훔쳐가 팔거나 수표를 위조하는 등의 범죄 행위까지 서슴치 않아 음반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한다.

결국 1959년 3월에 쳇은 마약 거래 현장을 급습한 경찰에 의해 또 체포되었고, 마침내 1953년에 멀리건이 그랬던 것처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뉴욕의 악명 높은 교도소인 라이커스 아일랜드에 수감되었다. 이후 형기를 두 달 남겨두고 가석방되었고, 리버사이드와 맺은 계약을 끝내기 위해 'Chet Baker Plays the Best of Lerner & Loewe' 라는 앨범을 하나 더 내놓았다.

2.6. 유럽 활동기

미국 활동에 염증을 느낀 쳇은 헬레마와 아들을 데리고 1959년 여름에 이탈리아벨기에를 중심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유럽 관객들은 미국보다 쳇을 더 환대하기는 했지만, 쳇은 여기서 연주력도 좀 떨어지고 말도 잘 안통하는 유럽의 뉴비 연주자들과 협연해야 했고 마약 금단 증상에 시달리며 자주 삐걱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쳇에게 벨기에 공연 때 만난 플루티스트이자 알토 색소포니스트 자크 펠저가 접근했다. 펠저는 부업으로 약사 일도 하고 있어서 마약류 의약품 유통의 맹점을 잘 알고 있었고, 헤로인과 유사한 효과가 있는 마약성 진통제인 팔피움을 쳇에게 권했다. 팔피움은 그 당시 막 중독성이 문제가 되어 유럽 각국에서 판매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나마 서독의 경우 아직 별다른 제한 없이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을 통해 계속 들여올 수 있었다.

약기운이 다시 돌자, 쳇은 유럽 무대 복귀 후 첫 앨범인 'Chet Baker in Milan' 을 재즈랜드라는 마이너 음반사에 취입했다. 이어 과거 스트링 앙상블과 협연한 발라드 앨범의 계보를 잇는 'Chet Baker and Fifty Italian Strings' 를 발표했고, 이 앨범은 유럽 비평계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미국에서는 정반대로 무시당하거나 매우 짠 점수를 받았다.

유럽 청중들의 반응이 좀 더 호의적이었다고는 해도, 아직 재즈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이탈리아에서 공연 일정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쳇은 옛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4남인 피아니스트 로마노 무솔리니와 협연하는 가십성 공연까지 치러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팔피움이 떨어지면서 쳇은 계속 약을 갈구했고, 파리에 머물고 있던 아내 헬레마에게 서독에서 팔피움을 계속 구해달라고 했다.

결국 보다 못한 헬레마는 1959년 12월에 쳇을 밀라노의 병원에 입원시켜 마약 중독 치료를 받게 했고, 이듬해 1월 말에 건강을 회복하자 퇴원해 연주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쳇은 밀라노의 어느 극장에서 무용수로 일하고 있던 영국 출신의 캐럴 잭슨이라는 여성과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손을 놓았나 싶었던 약도 다시 시작했다. 헬레마는 쳇과 캐럴의 밀회를 담은 파파라치들의 사진이 황색신문에 게재되는 꼴을 보다 못해 이사를 가버렸고, 쳇은 진료 경험이 일천한 개업의들을 찾아다니며 꾀병을 부리고 팔피움을 구할 수 있는 특수 처방전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도 오그레이디와 마찬가지로 약쟁이를 잡아들이는 데 몰두하던 파비오 로미티라는 검사가 쳇의 동태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고, 요 근래 팔피움 처방이 부쩍 늘어난 병원을 찾아다니며 조사를 시작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덜미가 잡힌 쳇은 1960년 8월 말 벨기에 연주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체포되었고, 이어 아내 헬레마와 독일에서 약을 구해다 준 미국 출신 드러머, 처방전에 이름을 도용당한 변호사, 쳇에게 팔피움을 가장 많이 처방한 의사 세 명, 펜션 관리인 등이 줄줄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법정에서 쳇은 횡설수설하며 자신은 억울하다고 혐의를 부인했고, 최대한 자신을 순진하고 불쌍하게 보이려고 온갖 연기를 했다. 덕분에 쳇을 동정하는 여론이 확산되었고, 판사들은 의사들 중 쳇에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로베르토 베첼리와 쳇을 제외한 피고인들에게 증거 불충분 등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베첼리는 징역 3년과 벌금, 의사 면허 취소 판결을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고, 쳇도 징역 1년 7개월과 벌금을 선고받았지만 이전에 뉴욕에서 그랬던 것처럼 감형을 받고 1961년 12월 중순에 풀려났다.

이렇게 그럭저럭 덜한 처벌을 받고 석방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쳇과 캐럴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음이 드러나자 헬레마도 폭발하여 쳇과 이혼하여 아들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 평생 쳇을 다시 만나지 않았다. 쳇은 이에 개의치 않고 캐럴과 동거하며 연주 활동을 재개했고, 동시에 수감 중 작곡한 멜로디 네 곡을 가지고 엔니오 모리코네와 피노 마페이에게 각각 편곡/지휘와 작사를 의뢰해 RCA 이탈리아 지사에서 녹음했다.

하지만 이 녹음들은 일단 발매가 보류되었고, 이후 따로 결성한 섹스텟(6중주단)과 1962년 1월에 로마에서 녹음한 것이 'Chet is Back!' 이라는 타이틀의 복귀 앨범으로 나왔다.[1] 이 앨범에서는 수감 생활로 어쩔 수 없이 약을 끊고 건강을 회복한 덕인지 어느 정도 활력이 담긴 연주를 선보였지만, 이내 그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그의 팬을 자처한 약쟁이들이 약을 권해오면서(...) 또 약과 함께 하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6월에 쳇은 서독 뮌헨에서 공연 의뢰를 받았는데,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그 직후 팔피움을 구하려고 처방전을 위조해 약국에 갔다가 또 덜미를 잡혔다. 어느 의사의 도움으로 재판 전까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재판 결과 국외 추방령이 내려지면서 스위스로 쫓겨나고 말았다. 하지만 스위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처방전을 위조해 팔피움을 구하려다가 또 체포되었고(...), 스위스 정부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쳇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쳇은 이탈리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서독과 스위스에서 저지른 진상짓이 알려진 이상 이탈리아 정부도 그를 받아줄 수는 없었다. 결국 쳇은 캐럴을 시켜 이탈리아의 지인들에게 돈을 꿔오게 한 뒤 캐럴의 고향인 영국으로 갔다. 영국에서 쳇과 캐럴은 이후 적장자가 될 아들 딘을 보았지만, 여기서도 쳇은 계속 약을 하고 있었고 외국 연주자들에게 빡빡한 규정 때문에 공연 일을 잡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되자 쳇은 자신의 마약 남용 역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겠다며 어느 가십 잡지에 장문의 구술 회고록을 돈을 받고 팔았고, 자기 변명과 미화, 허세로 가득한 이 회고록이 든 잡지는 날개돋힌 듯 팔렸다. 원하던 돈을 받은 쳇은 약을 구하러 돌아다녔고, 결국 여기서도 또 체포되어 1963년 2월 중순에 추방령을 선고받았다.

불과 8개월 동안 무려 네 개 국가에서 추방당한 쳇은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택했는데, 프랑스에서는 쳇의 음악을 별로 반기지 않았던 탓에 억지로 비밥 레퍼토리를 골라 연주해야 했다. 그럼에도 쳇의 퇴폐적으로 변한 분위기를 즐기러 오는 이들은 여전히 있었고, 또 그를 상대로 약을 팔러 접근하는 마약상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쳇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처방전을 위조해 대량의 팔피움을 구하려고 했고, 분단 상황에서 아직 연방법의 효력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던 서베를린으로 가서 똑같은 짓을 했다가 또 걸려서 체포되었다. 결국 프랑스 정부도 쳇에게 추방령을 내렸고, 서독 법원은 아예 구체적으로 쳇을 고국인 미국으로 추방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유럽 활동에도 강제로 종지부가 찍혔다.

2.7. 귀국 후

1964년 3월에 억지로 미국에 돌아온 쳇은 유럽에서 벌인 화려한 진상짓 때문에 음악인으로서는 물론이고, 존재 자체도 여전히 쓰레기 혹은 골칫덩이로 여겨지고 있었다. 뉴욕 시청은 쳇이 그 동안 벌인 범죄 행각에 이골이 났는지, 클럽 공연에 반드시 필요한 연주자 증명서의 발급을 거부했다. 게다가 약쟁이 소탕에 여념이 없던 경찰과 검찰은 어떻게든 쳇을 또 잡아넣으려고 내사에 착수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쳇은 연주 보다 약을 구하러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신과 비슷한 약쟁이면서 골수암으로 죽어가던 태드 다메론의 집에서 얹혀살며 같이 헤로인을 했다. 하지만 다메론은 쳇에게 음반 활동이라도 재개해 보라면서 시카고 출신의 프로모터 리처드 카펜터를 소개해 줬다.

하지만 카펜터는 한물 갔거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흑인 뮤지션들에게 교묘한 위장 계약서를 내밀어 개런티와 저작권을 뜯어가는 것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2] 카펜터는 일단 쳇을 환대하고 숙소와 식비, 심지어는 마약 구입비까지 지원해줬다. 하지만 쳇도 카펜터에게 걸려든 다른 뮤지션들과 마찬가지로 헐값에 자신의 개런티와 저작권을 넘겨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고, 이를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어쨌든 쳇은 콜픽스 레코드라는 소규모 음반사에서 'Chet Baker-The Most Important Jazz Album of 1964/65' 라는 허세 쩌는 타이틀의 복귀 앨범을 냈지만, 이 앨범은 나오자마자 당시의 조류인 프리 재즈보사노바 등과 비교당하며 구닥다리 취급을 받았다. 그러자 카펜터는 쳇에게 실험적인 음악을 해보라며 머큐리 레코드 산하의 재즈 레이블 라임라이트에 'Baby Breeze' 를 취입하게 했는데, 이 앨범에서 쳇은 마일스 데이비스빌 에반스 등이 선보인 선법 기반의 모달 재즈와 존 콜트레인류의 프리 재즈 성향으로 쓰여진 최신 성향의 곡들을 골랐다.

그나마 저 앨범은 예술적인 성과를 어느 정도 인정받았지만, 판매량이 시망인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카펜터는 쳇에게 다시 상업성을 고려한 빌리 홀리데이 트리뷰트 앨범 'Baker's Holiday'를 내도록 했다. 하지만 이 앨범 역시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했고, 쳇은 그나마 연주자 증명서 없이도 연주할 수 있는 클럽을 찾아다니며 미국 이곳 저곳을 전전했다. 비록 이 와중에 헬레마와 법적인 부부 관계도 청산하고 캐럴과 세 번째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쳇은 자기 자식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여전히 쩔어주는 약쟁이로 마약상을 더 자주 만나는 막장 모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순회 공연도 별 성과가 없게 되자, 카펜터는 물량빨로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마일스 데이비스의 퍼스트 퀸텟이 프레스티지에서 계약 만료를 위해 단 이틀 동안 네 장 분량의 녹음을 해치운 '~in' 시리즈를 모방한 기획을 내놓았다. 1965년 8월에 쳇은 뉴욕의 한 스튜디오에서 작/편곡자로 고용된 지미 먼디와 세션 연주자들인 테너색소포니스트 조지 콜먼, 피아니스트 커크 라이트시, 베이시스트 허먼 라이트, 드러머 로이 브룩스를 대동하고 나흘 동안 LP 다섯 장 분량의 녹음을 했고, 이 녹음들은 이후 마일스 퀸텟의 '~in' 시리즈를 내놓았던 프레스티지에서 Smokin', Groovin', Boppin', Cool Burnin', Comin' On이라는 타이틀로 한꺼번에 출반되었다.

이 앨범들에서 쳇은 비밥 스타일의 빠르고 화려한 연주와 원래 장기였던 감성적인 발라드 연주를 동시에 선보였지만, 노골적으로 마일스를 따라한 것이 되레 비평가들로부터 짝퉁 비슷한 인식을 심어주었고 판매량도 별로 좋지 않았다. 카펜터는 이제 쳇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 계약을 해지했고, 쳇은 결국 1965년 말 쫓겨나듯이 부모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2.8. 다시 고향으로

이미 30대 중반이 된 아들이 방탕한 약쟁이가 되어 돌아오자 쳇의 부모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쳇도 개심은 커녕 마약상을 만나려다가 체포되어 법정에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 무던히 부모 속을 썩이고 있었다. 그러자 활동 초기에 자신의 리더작을 많이 출판한 퍼시픽 재즈에서 비틀즈의 히트 넘버나 멕시코 마리아치 음악 등을 이지 리스닝으로 편곡한 앨범 작업을 제안했는데, 쳇은 이런 '유사 재즈' 계통 앨범에서도 추락한 연주력을 보여주며 사방팔방으로 까였다.

설상가상으로 세 번째 아내가 된 캐럴까지 남편의 영향을 받아 헤로인 중독자가 되었고, 더 많은 약을 필요로 한 쳇은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만만해 보이는 의사에게 찾아가 꾀병을 부리거나 처방전을 위조하는 짓을 또 하기 시작했다. 물론 경찰이 이런 막장짓을 가만히 지켜볼 리 없었고, 쳇은 처방전 위조와 마약 투약, 절도, 교통사고 등의 죄목으로 수 차례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하지만 쳇은 체포될 때마다 자신과 같이 약을 했던 이들의 이름을 부는 조건으로 훈방되었고, 이제 쳇은 동료들에게조차 약쟁이보다 더 심한 밀고자라는 욕을 듣는 지경이 되었다.

그 와중이었던 1966년 8월에 쳇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개발살난 채로 발견되었고, 쳇은 흑인 마약상들이 자신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집단 구타를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쳇은 그들의 신상도 제대로 몰랐고, 여러 언론에 했던 인터뷰도 별로 일관성이 없었다. 심지어 지인들은 쳇이 일부러 마약상에게 어그로를 끌어 폭행을 유도했다며 주작질일 거라고 유추하기도 했다. 정황상 그가 밀고한 마약상들에게 보복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실이야 어떻든 쳇은 이 사건으로 너무 얻어맞아 성한 치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강 상태가 개판이 되었고, 이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대고 연주해야 하는 금관악기 주자들에게 치명적인 문제였다.

결국 트럼펫마저 제대로 불지 못하게 되자, 쳇은 약 1년 동안 주 정부에서 빈민들에게 내주는 쥐꼬리 만한 복지 수당과 잡일로 번 푼돈으로 연명해야 했다. 1967년 7월에는 아버지 체스니가 61세로 사망했다. 하지만 쳇은 여전히 인생에서 갈피를 못잡고 폭력과 마약 행위 등으로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는 등 계속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하지만 트럼펫을 놓기는 싫었는지, 틀니를 맞추고 계속 연습을 거듭해 1967년 말에 조심스럽게 연주 활동을 재개했다. 1968년 여름에는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개그맨, TV 토크쇼 진행자였던 스티브 앨런의 곡을 받아 'Albert's House' 라는 앨범을 발표했지만, 약에 절고 연주력도 아직 형편없던 상태에서 취입한 탓에 불쏘시개 수준이었다.

쳇의 부진은 이듬해까지도 계속 되었다. 연주 의뢰가 더 뜸해지자 페인트공과 식당 종업원 등을 전전하며 돈을 벌어야 했고, 그 돈마저 마약을 사는데 낭비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8월 말에는 처방전 위조 혐의로 또 체포된 뒤 세 번째로 징역살이를 할 뻔했는데, 운좋게 판사의 동정을 얻어 강제 재활 치료 90일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퇴원 후에는 다시 어머니의 집에 얹혀 살았지만, 어머니는 약쟁이인 쳇 뿐 아니라 그의 아내 캐럴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해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결국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쳇은 예전에 자기 밴드에서 퍼커셔니스트로 활동했던 빌 러프버러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러프버러의 동거녀인 샌디 러브와 어울리며 약에 취하는 것이 일상처럼 되었다.

약과 얼마 안되는 연주 기회 속에서 근근이 살고 있었던 쳇은 산호세의 피자 레스토랑에서 잼 세션을 하러 들어갔다가 여성 드러머 다이앤 바브라를 만났고, 다이앤도 쳇의 마성에 이끌리며 동거녀가 되었다. 다이앤은 쳇의 마약 습관을 두려워하면서도 그와 어울렸고, 심지어 당시로서는 최신 마약이었던 LSD를 주기까지 했다.

클럽에서도 무시당하고 얼마 안되는 녹음 세션에서도 그야말로 네똥기 취급을 받게 되자, 쳇은 다시 뉴욕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때마침 캐럴이 남편과 다이앤의 불륜을 눈치채고 쳇과 매일같이 심각한 부부싸움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곧 다이앤을 데리고 동부로 떠났다.

뉴욕에 가던 중 쳇은 덴버에서 옛 밴드 동료였고 마약을 끊은 후 음악 교사로 일하고 있던 필 어소를 다시 만났고, 어소는 마침 그 곳의 클럽에서 연주하고 있던 디지 길레스피를 쳇에게 소개해줬다. 길레스피는 쳇이 복귀하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뉴욕의 재즈 클럽 하프 노트에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줄을 대줬다.

2.9. 그리고 또 동부로

1973년 여름의 뉴욕 재즈 신은 록과 팝 음악의 대공세로 유례없는 침체기를 맞고 있었다. 특히 일부러 복고풍 컨셉을 잡고 운영하던 하프 노트는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한 고급 클럽이었지만, 실제로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쳇이 뉴욕에서 재기하려고 한다는 소식은 재즈 자체보다는 '과거에 촉망받던 미남 트럼페터가 사고뭉치 약쟁이로 몰락해버린 비참한 모습' 을 보려는 호사가들을 자극했다.

물론 이 클럽에서도 쳇은 외모든 연주든 왕년의 그것에 한참 못미치는 어설픔을 감추지 못했지만, 음악을 들으러 오는 재즈팬 대신 쳇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클럽을 가득 채워줬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재즈 보컬을 꿈꾸던 루스 영이라는 여인이 있었고, 루스는 이내 쳇의 일생에서 중요하면서도 또 휘둘리던 여성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쳇의 주위에는 여전히 마약상들이 들끓었고, 가뜩이나 경영난에 허덕이던 클럽들은 이 퇴물에게 일거리를 더욱 주려고 하지 않았다. 쳇은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황색언론에 횡설수설한 자신의 마약 일대기 인터뷰를 조건으로 돈을 받아냈는데, 병원에서 메타돈 처방을 받아 헤로인을 끊으려고 하면서도 여전히 대마초와 코카인은 끊지 못하는 모순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쳇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캐럴과 아이들을 뉴욕으로 오라고 해서 재결합을 시도했다.

캐럴과 루스라는 두 여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쳇은 예전처럼 트럼펫 실력이 잘 회복되지 않자 보컬 연습에 몰두했고, 1974년에 어렵사리 CTI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보컬 위주로 된 컴백 앨범 'She Was Too Good to Me' 를 내놓았다. 이 앨범도 평론가들에게 그다지 좋은 평은 못받았고 매상도 그저 그랬지만, 이 때부터 쳇의 후기 스타일인 조용하면서도 독특한 회한의 감정을 노래하는 호소력이 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약쟁이 습관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정말 재기하고 싶었는지 쳇은 장소나 분위기가 어떻든 닥치는 대로 기회가 주어지면 연주하고 노래했다. 덕분에 바가지를 긁던 캐럴과 자식들에게 간소한 집 한 채를 마련해줄 수 있는 수준은 됐지만, 쳇은 루스와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았고 가족들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1974년 11월에는 오랜만에 제리 멀리건과 다시 만나 카네기홀에서 합동 공연을 가졌고, 이 실황은 CTI에서 두 장의 LP로 출반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멀리건과 쳇 사이의 앙금은 가라앉지 않았고, 서로를 수전노, 퇴물 취급하며 못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럼에도 이 공연의 라이브 앨범에는 쳇의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로운 장기인 서정성이 꽤 효과적으로 발휘되어 있었고, 1950년대의 리즈시절을 회상하는 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다. 이렇게 재기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음에도 쳇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약쟁이+범죄자라는 식으로 나락이었고, 지역 주민들도 쳇과 같이 사는 것을 거부해 억지로 이사를 가야 할 정도였다.

2.10. 방랑 생활

다시 전반적인 미국 활동에 염증을 느낀 쳇은 1975년 여름 이탈리아 프로모터 알베르토 알베르티가 제안한 이탈리아와 프랑스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미국을 떠났다. 여기서 쳇은 미국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환대를 받았지만, 그 성질을 이기지 못해 미국의 동료 뮤지션들과 함께 한 페스티벌 무대에서는 끊임없이 다툼이 벌어졌고 루스까지 마약을 못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쳇의 폭행에 시달려야 했다.

엉망진창 속에서 페스티벌 일정을 마친 쳇은 옛 친구 자크 펠저의 집에 한 동안 머물렀고, 펠저는 1950년대 말에 그랬던 것처럼 쳇에게 코데인모르핀을 제공했다. 동시에 쳇은 펠저의 딸이었던 드러머 미셸린과도 급속히 가까워졌고, 이들은 약쟁이 그룹을 이루어 음악과 사생활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쳇의 음반이 나오는 족족 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자 레코드 업계들이 점점 더 그를 멀리했는데, 1977년 2월에 CTI 레코드에서 마지막으로 준 기회를 활용한 'You Can't Go Home Again' 도 매상이 영 좋지 않았다. 결국 음반사는 계약을 파기하고 프로듀서를 해고해 버렸다. 하지만 이 때 같이 짤린 프로듀서 존 스나이더는 쳇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이 막 설립한 마이너 음반사인 아티스츠 하우스에서 퀸텟 앨범 'Once Upon a Summertime' 을 취입하게 해줬고, 심지어 쳇의 가족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쳇의 가족들은 집세마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쳇은 그 해 여름에 또 아무 전망도 대책도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벨기에로 가 펠저의 집에서 잠시 얹혀살았다. 그러고는 10월 초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던 북미 순회 공연을 위해 가족들을 내버려둔 채 루스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고, 펠저도 쳇의 가족들을 껄끄러워 하자 캐럴은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영국으로 가버렸다.

어렵사리 시작된 미국 순회 공연은 예전처럼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루스와 사귀느라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돼버린 다이앤과 잠시 만나기도 했지만, 결국 헤어졌다. 그리고 루스와 함께 뉴욕 근교 플러싱에 집을 마련해 영국에서 아이들을 데려왔지만, 쳇도 루스도 하도 불안정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자란 탓에 폭력적이고 비관적으로 변해 버린 아이들을 제대로 다독일 수 없었다.

결국 쳇이 1978년 가을 서독 정부의 입국 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 유럽 순회 공연을 떠나게 되자, 아이들은 다시 영국의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서독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등지를 돌며 공연하던 쳇은 이내 마약을 하지 못해 신경이 곤두서면서 이동할 때마다 자신의 장기(...)인 난폭운전을 선보였고, 급성 담석증에 걸려 쓰러지기도 했다. 그나마 공연을 다니면서 자제했던 마약도 11월에 네덜란드에 가면서 또 흥청망청 해대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 해의 마지막을 장식한 프랑스 공연 일정은 헤로인에 쩐 채 계속 느려지고 늘어지는 음악으로 점철되었고, 그 와중에도 프랑스의 소노프레스에서 'Broken Wing' 이라는 앨범을 취입했다. 쳇은 새해를 잠시 뉴욕에서 보낸 뒤 또 서독으로 갔고, 이어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 각지에서 순회 공연을 했다. 여전히 유럽 청중들은 미국보다 쳇을 환대하고 있었고, 쳇도 이에 고무되어 그 해 동안 이런저런 유럽의 마이너 음반사들에서 'The Touch of Your Lips' 'No Problem' 를 비롯한 여러 장의 음반을 만들어냈다.

여전히 마약과 가족 문제가 골칫거리로 남아 있었지만, 쳇은 특히 이탈리아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1980년 4월에는 이탈리아 사회민주당으로부터 그 동안의 음악 활동에 대한 공로로 감사패까지 받았다. 이런저런 인디 영화 제작자들은 쳇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했고, 유럽 각지의 소규모 음반사들이 난입해 수많은 음반을 내고 심지어 클럽 공연 실황을 무단 녹취한 해적판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들 앨범은 너무 벼락치기로 제작되어 음악적으로든 음질이든 대부분 돌아볼 가치가 없었고, 쳇 자신도 너무 많은 곡을 하룻밤에 연주하려고 하면서 실수를 연발하고 있었다. 마약 습관은 다시 심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공연 스케줄을 빼먹거나 연주자들에게 연주료를 제 때 지급하지 않아 다툼이 벌어지는 등 다시금 막장이 되기 시작했다. 1981년 여름에는 다시 미국 순회 공연을 했지만, 미국 청중들과 비평가들은 여전히 쳇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2.11. 말년

설상가상으로 쳇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과 연주했던 동료들과 친구들, 마약상들이 하나 둘 마약 과용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점점 더 염세적으로 변해갔다. 루스와도 관계가 계속 틀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둘은 1982년 9월에 결별했다. 쳇은 이제 예전에 한 번 차버린 적이 있던 다이앤과 재회했고, 다이앤은 다시금 쳇의 마성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83년 초에는 이후 쳇의 말년 활동을 책임지게 되는 네덜란드인 프로모터 빔 비흐트의 제안으로 스탄 게츠와 함께 북유럽과 중동 순회 공연에 들어갔는데, 이미 예전에 공동 작업을 했다가 망쳐버린 전적이 있던 만큼 둘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3] 게츠는 무대에서도 쳇이 솔로를 연주하는 동안 똥씹은 표정을 지었고, 중동으로 가기 직전에 쳇이 마약을 갖고 가야겠다는 소리를 해대자 게츠는 쳇을 내버려둔 채 혼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버렸다.

결국 쳇은 다시 유럽에서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고, 지나치게 다망한 연주와 마약 중독 때문에 이미 신체적인 건강도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하도 오랫동안 약쟁이로 살다 보니 혈관이 수축되어 약을 주사할 부위를 찾느라 고생할 정도였고, 네덜란드에서는 약을 너무 심하게 해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1985년에 폴 블레이와 함께 녹음한 'Diane' 같은 나름대로 괜찮은 앨범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 해 여름에 처음으로 시도한 브라질 공연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는 등 전체적으로 실망스러웠다.

1986년 3월에는 생애 첫 아시아 공연을 일본에서 가졌는데, 이 때는 일본의 마약 관련 법이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메타돈만 조금 가져갔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뒤 영국에서 엘비스 코스텔로와 협연했을 때는 다시 약쟁이가 되었고, 미국 서부에 정착하려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 해 말에 쳇은 유명 사진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였던 브루스 웨버를 만났고, 웨버는 쳇을 모델로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고 쳇도 동의해 몇 장의 사진이 촬영되었다. 웨버는 곧 쳇의 삶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도 제작해 보자고 졸랐고, 승낙을 얻은 뒤 쳇을 비롯해 그의 주변인들을 섭외하고 이런저런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쳇은 약에 절어 협조적인 모습을 그다지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

1987년 6월에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일본 공연을 했는데, 도쿄 공연의 실황은 녹화/녹음되었고 훗날 'Four' 와 'Memories' 두 장의 라이브 앨범과 DVD로 출반되었다. 쳇은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일정 동안 약간의 메타돈을 제외하면 일체 약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보기 드문 명연을 들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쳇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고, 일본 공연 후 고향으로 돌아가 오랜만에 캐럴과 가족들을 만났다.

하지만 다시 공연을 위해 유럽으로 간 뒤, 쳇은 헤로인과 코카인을 섞은 스피드볼로 계속 자신의 건강을 망치고 있었다. 오랜 투약의 부작용으로 몸은 종기 투성이가 되어 고름과 피가 흐르고 있었고, 약을 더 심하게 하면서 밴드 멤버들 뿐 아니라 다이앤과 미셸린에게까지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등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1988년에도 쳇은 계속 유럽 각지를 떠돌며 공연을 했고, 이런저런 인터뷰와 방송 출연 요청에도 순순히 응했다. 비록 이들 기회에서 쳇은 여전히 자기 연민과 아집에 빠진 모습을 감추지 못했지만, 쳇의 생애 마지막 육성들을 담은 귀중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2월 말에서 3월 초까지는 이탈리아에서 공연하면서 마이너 음반사 필롤로지에서 'Little Girl Blue' 와 'The Heart of the Ballad' 두 앨범을 녹음했는데, 이 앨범들은 결국 쳇이 남긴 마지막 스튜디오 음반이 되었다.

쳇은 2월 중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다이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고, 다이앤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결국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쳇은 남은 몇 개월 동안 다이앤 대신 자신에게 계속 이런저런 약을 대주던 미셸린과 약을 하며 보냈다. 1988년 4월 말에는 북부독일방송(NDR)에서 쳇의 단독 콘서트를 기획했는데, 쳇에게 방송국 소속 빅 밴드와 북독일 방송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붙여주는 대규모 공연이었다. 쳇이 한 번도 리허설에 나오지 않아 무산될 뻔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28일 하노버 지국 대강당에서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쳇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게 준비된 이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 공연의 실황이 쳇이 남긴 최후의 녹음이 되었다.[4] 하지만 공연 뒤 쳇은 바로 인근 네덜란드로 차를 몰고 가 약을 구하러 다녔고, 광기는 점점 더 심해져 자해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다. 다음 달에도 파리와 암스테르담의 클럽에서 공연을 계속 했지만, 이미 쳇은 의욕을 잃고 피곤한 모습으로 약간의 연주만을 들려줄 뿐이었다. 그리고 5월 10일에 로테르담의 재즈카페 디지에 들어가 벌인 즉흥 잼 세션이 쳇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2.12. 죽음

로테르담에서 예정에 없던 잼 세션을 한 뒤에도 쳇의 공연 스케줄은 여전히 빡빡하게 잡혀 있었다. 당장 이틀 뒤인 12일에 네덜란드 방송국의 생중계가 예정된 중요한 공연이 있었지만, 쳇은 리허설 때도 공연 때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모터이자 매니저 빔 비흐트 뿐 아니라 쳇의 밴드 멤버들도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쳇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암스테르담의 싸구려 호텔인 프린스 헨드리크의 3층 방에 투숙하고 있었다. 쳇은 12일 오후 체크인을 한 뒤 다시는 호텔 방문을 열지 않았고, 다음 날 새벽 세 시 쯤 한 행인이 호텔 앞에서 누군가가 피칠갑이 되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시체의 얼굴이 심하게 손상되었고 호텔 방의 창문을 지탱하고 있던 빗장이 같이 떨어져 있던 것으로 볼 때, 투숙객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결국 아침에 쳇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던 이들은 트럼펫을 소지하고 있던 남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시체 공시소로 가서 신원을 확인했다. 하지만 쳇으로 판명된 이 남자가 실수로 떨어져 죽은 것인지, 아니면 자살한 것인지, 또는 누군가가 고의로 떨어뜨려 살해한 것인지를 놓고 수많은 음모론이 나왔다. 하지만 타인의 침입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경찰은 마약에 취한 쳇이 실수로 실족사했거나 혹은 자살한 것 같다고 브리핑을 마쳤다. 그래서 쳇은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쳇의 시신은 18일에 간단한 송별회를 가진 뒤 다음 날 비행기로 미국에 보내졌고, 잉글우드 파크 묘지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매장되었다.

3. 사후의 평가

이미 쳇의 사후에 개봉된 브루스 웨버의 다큐멘터리 'Let's Get Lost'에서부터 수많은 논쟁이 벌어진 것처럼, 지금도 쳇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다. 호평하는 이들은 그가 보여준 특유의 부드럽고 정갈하면서 비극적인 아우라를 들며 빌리 홀리데이와 동급으로까지 치켜세우지만, 비판하는 쪽에서는 쳇이 연주력 보다는 이미지로 먹고 살았으며 그와 가장 많이 비교되었던 마일스 데이비스 같이 음악사에 수많은 변혁을 가져온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음악적으로 보면 쳇 베이커는 쿨 재즈의 흥망성쇠와 함께하는 이미지가 크다. 자기 관리 실패로 후술할 실험적인 시도가 제대로 꽃피지 못했고, 하락세 이후로는 전성기 추억팔이로 먹고 살았기 때문. 비슷하게 인성이 개판이라고 까였던 스탄 게츠가 연주와 실험 면에서는 혁신가까지는 아니더라도 탄탄한 기본기 위에 쿨 재즈에서 시작해 보사노바 같은 장르 확장에 성공했던것과 대조적이다.

실제로 음악에 관해서만 썰을 풀어도 한이 없는 마일스와 달리, 쳇의 삶은 음악보다는 오히려 방탕한 인생 역정과 그로 인해 빚어진 수많은 갈등, 증오, 범죄 경력에 촛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5] 항상 촉망받는 재능의 신인들을 찾아내는 데 주력해 그들과 함께 레전설이 된 마일스와 달리, 쳇은 1960년대 이후 (마일스와 비교하면) 클래스가 좀 떨어지는 이런저런 뮤지션들과 협연했고 그마저도 진득하게 눌러앉은 인물이 드물었기 때문에 더더욱 음악적인 저평가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재즈북'을 집필한 독일 비평가 요아힘 베렌트는 쳇이 비록 마일스 같은 선구자적인 면모는 없었지만, 음을 아끼면서 감성적인 면을 극대화하는 재능은 누구도 쉽게 따라가지 못한 독자적인 것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실제로 쳇의 들쭉날쭉한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잘 살펴보면 나름대로 건질 만한 음반들이 여럿 있고[6], 그 중에는 일반적인 쳇의 이미지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격렬하거나 실험적인 시도를 담은 것들도 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음악 교육도 받지 않은 채 자신만의 개성을 구축한 것도 타고 난 재능이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쳇의 인생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일종의 반면교사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록 쳇이 불안정안 환경에서 자랐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의 결점을 개선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저버리고 마약에 끝없이 탐닉하면서 시간과 재능을 모두 썩혀버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느낄 수록 주변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상처를 입혔고, 쳇의 주변인들 중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한 이는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여러 면에서 문제적인 인간이었다.

이 때문에 쳇 베이커는 주로 흑인들이 주연으로 기록되던 재즈사에서 보기 드물게 자신의 존재감을 새긴 백인 뮤지션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고, 계속 논란을 부를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4. 기타

  • 쳇 베이커의 일대기를 다룬 본 투 비 블루라는 2015년작 영화가 있다.
  • 진영이 좋아한다고 인터뷰서 밝힌 적이 있다. #


[1] 발매가 보류된 네 곡은 이후 Chet is Back!이 CD로 재발매되었을 때 보너스 트랙으로 실렸다.[2] 덕분에 음악 이론도 제대로 모르던 카펜터는 재즈 스탠더드로 유명한 Walkin' 을 비롯해 남들이 작곡한 수백 곡을 자신의 작품으로 등록했고, 지금도 카펜터의 저작권은 유효한 상태다.[3] 게츠도 연주자로서는 명성이 높지만, 인성 면에서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이다.[4] 북부독일방송이 녹음한 이 실황은 쳇 사후 독일 음반사 엔야에서 두 장의 앨범으로 출반되었고, 한국에서도 굿 인터내셔널이 라이선스 제작한 길쭉한 패키지에 담긴 CD 세트로 팔리고 있다.[5] 당장 이 문서만 봐도 그의 인생에는 마약 관련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쳇 베이커는 공연 일정을 잡으면 항상 연주료를 현금으로 받았는데,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였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공연이 끝난 직후 바로 마약을 사러 가기 위해서였다. 아내를 포함해서 그와 함께 지낸 수 많은 사람들을 마약의 늪에 빠지게 만들기도 했는데, 이중 많은 사람이 마약으로 인생을 끝냈다. 정작 쳇 베이커는 평생토록 그렇게나 마약에 찌들어 살았음에도 59세까지 비교적 별탈없이 살다갔고 그가 죽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체에서 마약을 투입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6] 1954년 발매한 'Chet Baker Sings'는 지금까지도 그를 대표하는 보컬 재즈 명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