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03:57:39

가이 포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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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가이 포크스
Guy Fawkes
파일:E2Ej_M6X0AYkTFR.jfif.jpg
출생 1570년[1]
잉글랜드 왕국 요크
사망 1606년 1월 31일 (향년 35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종교 개신교가톨릭

1. 개요2. 생애3. 혁명과 저항의 상징

[clearfix]

1. 개요

영국의 가톨릭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오늘날 혁명저항, 그리고 아나키즘의 상징으로 잘못 알려진 인물이다.

2. 생애

잉글랜드의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모친은 남편이 죽자 가톨릭 남성과 재혼했고 그 영향으로 가이 포크스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당시의 가톨릭계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길 바랐지만 성공회가 가톨릭 탄압을 중지하였어도 제임스 1세는 여전히 성공회를 잉글랜드의 국교로 복원하려는 우대 정책을 펼쳤다.[2]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 로버트 캐츠비[3]는 제임스 1세를 암살할 생각을 가지게 된다. 가이 포크스는 그런 로버트의 눈에 띄인 절호의 인재였고, 이에 따라서 상원의회의 지하에 대량의 폭약(흑색화약)을 설치하고 터뜨려 몰살시킨다는 계획[4]을 실행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암살 모의에 참여했던 인물 중 하나가 변심하여 제임스 1세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결국 암살은 실행 전 단계에서 발각되었고 11월 5일 가이 포크스는 긴급체포되었다. 당초에는 함구했던 가이 포크스지만 결국에는 고문을 당하여 입을 열고 말아[5] 제임스 1세 암살 계획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암살에 관련된 자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 #

국왕을 암살하려고 한 만큼 당연히 관련자 전원에게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가이 포크스를 비롯한 주동자급은 모두 교수척장분지형(絞首剔臟分肢刑)을 선고받았다. 1월 31일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미 고문으로 몸이 많이 상한 상태였던 가이 포크스는 형이 끝까지 집행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일설에 따르면 맨 앞의 "교수" 단계에서 사형집행인이 발판을 치우기 전에 먼저 목에 밧줄이 묶인 채로 뛰어내려 목이 부러져 숨을 거두었다고도 한다.

다행인 것은 이 사건의 여파가 연루자들이 사형되는 선에서 그치고[6] 튜더 왕조 시대와 같은 대대적인 가톨릭 탄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7] 제임스 1세가 비록 가톨릭에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잉글랜드에서 종파 간의 갈등에 의한 피바람이 부는 것을 원치도 않았다. 왕은 주동자를 처형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짓길 원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을 아예 뿌리뽑기를 원했던 청교도스튜어트 왕조에 실망하게 되어 점차 반항적으로 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떠났다.

3. 혁명과 저항의 상징

아나키즘, 사회주의 등의 사상을 주장하는 일부 사회운동가는 가이 포크스를 혁명과 저항의 상징으로 삼기도 하지만 실제로 가이 포크스는 정부의 압제를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로[8], 가톨릭 근본주의자였다. 포크스 본인부터가 그랬고[9] 의회 폭발 공모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10] 교파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고 반목하던 당시에 제임스 1세와 국교회[11]가 꾀했던 공존과 관용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가톨릭에 의한 압제를 부르짖던 자들을 현재의 우리는 자유와 해방의 투사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가톨릭 극단주의 무장 단체로써 개신교, 성공회는 물론이고 가톨릭 내 온건파까지도 적으로 돌린 테러 단체였다.

가이 포크스 일당이 원했던 것은 정부를 전복시켜 당시 9세였던 엘리자베스 공주[12] 괴뢰 국왕으로 옹립시킨 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제국의 힘을 빌려 자신들이 실권을 장악하여 잉글랜드를 엄격한 가톨릭 종교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근본주의자가 내란으로 정부를 전복시킨 후 외환을 유치해 집권하려한 매국노였다. 만약 가톨릭 극단주의자였던 가이 포크스가 이 테러를 성공시켜 정권을 잡았다면 잉글랜드는 당시 유럽 대륙을 피로 물들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나 30년 전쟁같은 끔찍한 종교 갈등을 겪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영국 가톨릭 신자들도 극단주의적 성향을 지니지 않은 이상 가이 포크스를 본받자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이 포크스가 가톨릭을 위해 왕(제임스 1세)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은 잊혀지고 단지 정부에 대항해 싸웠다는 이미지만 기억되어 잉글랜드에게 감정이 있던 스코틀랜드인/미국인/프랑스인에게는 자유와 혁명을 상징하는 인물로 와전되기에 이른다.

물론 본국인 잉글랜드에서는 오랫동안 정신줄 놓은 반역자로 취급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 특히 잉글랜드에서도 권력에 대항한 자라는 이미지가 심어졌다. 예로 유명 보수주의 블로거 Guido Fawkes(기도 포크스)[13]는 이 사람의 본명인 Guido Fawkes에서 그대로 따 왔다.

즉, 가이 포크스가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건 가이 포크스가 압력적인 정부에 대항한 것 때문이지 자유주의 사상을 가져서가 아니다.

파일:attachment/가이 포크스 가면/gf_mask1.jpg

영국에서는 가이 포크스의 사후 북아일랜드 지방을 제외한 지역에서 가이 포크스의 테러를 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벌어지고 그의 얼굴을 본뜬 가면이 퍼져나갔다. 자세한 건 가이 포크스 데이[14] / 가이 포크스 가면 문서 참조.

영어에서 그 녀석 또는 그 사람을 뜻하는 단어 Guy는 가이 포크스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이 포크스 데이에 불태우는 커다란 인형을 "Guy"라고 부른 것이 먼저고 거기서 남성을 불특정적으로 지칭하는 단어인 "guy"가 생겨났다고 한다.

한편 이 암살 기도 사건이 벌어진 후 제임스 1세는 당연히 의사당의 경비를 강화해서 의회 개회식 때 국왕이 참석하기 전 의사당 지하를 근위병이 샅샅이 수색하는 작업을 정기적으로 행하게 했다. 이게 후대에는 하나의 의식으로 남게 되어서 영국 의회 개회식 때 왕실 근위대 병사가 의회 지하실을 수색하는 행사를 치른다. 물론 실질적인 의회 경비는 영국 정부에서 따로 행하므로 이 수색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 둘러보는 수준이다.


[1] 세례일이 4월 16일인데 보통 태어난 지 3일 후에 세례를 해 주었으므로 4월 13일경(율리우스력)이 출생일로 추정된다. 그레고리력으로 바꾸면 4월 23일경이 된다.[2] 제임스 1세는 애초에 그의 어머니와 달리 장로회 신자였고 스코틀랜드에서 모셔온 왕이라서 잉글랜드 국민들에게 최대한 우호의 제스처를 보여야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명군이라 칭송받는 엘리자베스 1세의 법령을 유지하는 것이니 도리어 국교회가 가톨릭 탄압을 중지한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치적 위험을 부담한 셈이다.[3] 1572년 출생, 1605년 사망.[4] 후대에 이 계획에 '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이라는 이름이 붙었다.[5] 당시 고문은 중대범죄를 저질렀다는 확신이 서는 자들에게 자백받는 게 유일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말이 고문이지 사실상 사람 잡는 수준으로 고문받다가 갑자기 죽어도 별 상관없는 수준으로 행해졌다. 게다가 가이 포크스는 그냥 중죄인도 아니고 국왕 암살을 시도한 자였으니까 고문의 수위가 어땠을지는 짐작 가능하다.[6] 서양권에서는 반역자의 가족들까지 같이 처형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고 처벌한다고 해도 직계가족에 한해 성을 바꾸거나 국외로 추방시키는 비교적 가벼운 수준에 그쳤다.[7] 연루자들은 가톨릭 내에서도 초강경파들이었기 때문에 굳이 숙청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없기는 했다.[8] 즉, 가톨릭을 국교로 하는 정부를 세워서 성공회를 위시한 개신교에게 압제를 가하겠다는 말이다.[9] 포크스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간의 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다. 물론 독립을 원하는 네덜란드 쪽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스페인 제국군의 일원으로 싸웠다.[10] 음모에 가담한 사람 역시 부당한 권력의 투쟁이라는 개념보다는 본인이 갖고 있던 신분적 신앙적 기득권의 상실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11] 현재 성공회의 전신(前身)을 말하는 것이다.[12] 제임스 1세의 장녀이자 조지 1세의 외할머니.[13] 매우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블로그다. 정치인도 한 번씩은 언급하고 전 수상인 데이비드 캐머런이 직접 기도 포크스 블로그 10주년 축하 동영상을 보내기도 했다.[14] 심지어 가이 포크스 데이는 가이 포크스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가이 포크스의 테러가 무산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