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0:02

구로다 히로키/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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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히로시마 도요 카프
3.1. 첫번째 FA, 그리고 잔류3.2.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
4.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4.1. 2008 시즌4.2. 2009 시즌4.3. 2010 시즌4.4. 2011 시즌
5. 뉴욕 양키스
5.1. 2012 시즌5.2. 2013 시즌5.3. 2014 시즌
6. 친정팀 복귀
6.1. 2015 시즌6.2. 2016 시즌
7.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경력8.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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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다 히로키의 선수 경력

2. 아마추어 시절

난카이 호크스, 타카하시/다이에이 유니온즈 출신의 前 프로야구 선수였던 아버지 쿠로다 카즈히로(1924~2007)는 은퇴 후 오사카에서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면서 아들들을 야구선수로 키우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2명의 아들 중 차남인 히로키가 투수로서 재능이 있다고 판단한 카즈히로는 본인이 직접 리틀야구 팀을 만들고 감독을 맡으면서 아들을 가르치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극진히 뒷바라지를 하였다. 여기에 투포환 선수 출신이었던 어머니 쿠로다 야스코도 아들을 엄하게 교육했다고 한다.

일화로 고교 야구부 여름합숙 시절엔 쉬지도, 먹지도 못 하면서 낮밤 가리지 않고 계속 운동장을 달려야 했는데 나흘째 되던 날 밤에 선배의 부모님이 운동장에 몰래 오셔서 "아침 일찍 돌아와서 다시 러닝 시작하면 괜찮지 않니?"하시며 그때까지 계속 달리고 있던 아들과 쿠로다를 집으로 데려가 그들이 훈련 내내 못 하던 식사와 목욕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쿠로다의 집에도 연락을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쿠로다의 어머니는 "감사하지만 저희 아들이라도 지금 학교로 다시 보내서 뛰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실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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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 나온 고등학교 시절 사진.
"3년간 후보"란 자막에서 나오듯 고등학교 시절엔 무명의 투수에 불과했다.

오사카의 야구 명문 우에노미야 고등학교[1]에 진학했지만, 재학시에는 주전에도 들지 못하는 무명선수였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등판도 패전처리 투수로 나설 때뿐이었다. 코시엔 대회에도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다.[2] 이 때문인지 쿠로다 본인은 고등학교를 마지막으로 야구를 포기할 생각이었다고 하며, 2013년 방송 촬영차 모교를 방문했지만 야구부 고문 선생님은 고등학교 시절의 쿠로다가 거의 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 쿠로다가 대학 진학 후 직구 구속이 140km/h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 쿠로다? 이름을 잘못 안 거 아냐?"라고 말했던 건 기억에 남아 있다고 증언했다.
제작진: (쿠로다 히로키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야구부 부장 : 제 기억에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힘이 없었어요. 쿠로다가 센슈대학에서 140km/h의 공을 던진다고 했을 때, 그 쿠로다? 이름을 잘못 안 거 아냐? 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지금 돌이켜보면 이 무명의 학창시절은 쿠로다가 별다른 부상 없이 메이저리그 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만든 기반이었다. 코시엔 대회를 평정하며 최고의 유망주로 각광받았던 마쓰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다나카 마사히로 등은 메이저리그에서의 커리어와는 별개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당한 혹사로 메이저 경력 3년을 못 넘기고 부상을 당한 반면, 쿠로다는 타구에 머리를 맞았던 2009년을 제외하면 큰 부상을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메이저리거 생활을 하였다.

선수생활을 그만두려는 아들을 설득해 대학때까지 야구를 하기로 만든 아버지 카즈히로는 도쿄의 센슈대학에 진학하기를 권했다. 센슈대학은 과거에는 소속 리그였던 토토 대학 야구연맹에서 현재까지도 1부 리그 최다 기록인 32회 우승을 차지했던 강호였지만 1990년대 이후론 점차 팀이 약체화되면서[3] 1~2부 리그를 오가던 그저 그런 팀이 되었다. 그 덕에 무명인 쿠로다가 등판할 기회가 많았던 점도 있고, 연습구장이 대학야구의 성지 메이지진구 야구장이라서 스카우트들의 눈의 띄기도 쉬웠기 때문이었다고. 대학에 진학한 쿠로다는 많은 기회를 부여받으며 3학년때부터 에이스로 각성하기 시작했다. 힘이 붙어 구속도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4학년이 되었을 때는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 150km/h의 구속을 기록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 결과 그 해 봄부터 동도쿄대학리그에서 하부리그를 전전하던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1996년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재정적으로 탄탄하고 순위도 높은 팀을 마다하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역지명[4]하여 입단하였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고교시절 무명으로 대학 1, 2년때 스카우터들은 아무도 쿠로다를 눈여겨 보지 않았는데 오직 히로시마의 소노다 토시히코 스카우터만 쿠로다의 재능를 눈여겨 보고 꾸준히 가나가와현의 촌구석에 있던 센슈대학의 연습장까지 찾아와서 지켜봐 주었다고 한다. 히로시마의 관심이 있었기에 본인이 성장하여 자신이 드래프트에 지명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 쿠로다는 역지명으로 카프에 입단한 것.

3. 히로시마 도요 카프

데뷔 첫해인 1997년 4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도쿄돔 선발전에 등판해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기록하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역사상 4번째로 신인 데뷔전 완투승을 기록[5]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경기 이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는데, 많은 이닝을 먹지도 못하고 4점대 중반의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팀 입단 동기였던 사와자키 도시카즈[6]에게 신인왕도 내주고 말았다.

2년차부터는 중간계투로 돌기도 하는 등 입지가 불안했고 6점대 ERA라는 좋지 않은 성적도 찍곤 했지만, 1999년 대륙간컵에 출전하여 한국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만전을 완봉으로 막는등 좋은 인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체 선수 정도의 성적을 찍던 쿠로다는 2001년부터 10승을 거두고 3점대 ERA를 찍어주는 리그 상위권의 좋은 선발투수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2004년에 7승으로 잠시 주춤한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많은 이닝을 던져주는 이닝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대신 2004년에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여 동메달에 기여했다. 이어 2005년에는 11완투를 기록하고 15승 12패 ERA 3.17, 2006년에는 13승 6패 7완투 1.85라는 어마무시한 괴력을 선보였다. 2006년 오프시즌에 팔꿈치 수술을 받아 구속이 약간 하락했지만, 2007년에도 7완투 12승 8패 3.56이라는 평균 자책점을 찍으며 분전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보낸 11시즌 통산 103승 3.69의 성적. 더구나 이것은 카프의 홈구장인 히로시마 시민구장이 일본에서 가장 작은 사이즈[7]의 타격 친화 구장임에도 기록한 성적이란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비슷하게 투수들에겐 '헬 오브 지옥'이라는 AL 동부에서 현존 최강의 에이스로 군림한 로이 할러데이와 비견하여 일본의 할러데이라고 평하는 스카우트들도 있었다. 물론 할러데이의 싱킹 무브먼트 섞인 패스트볼 등 레퍼토리에서 여러 공통점이 보였던 것이 더 크지만.

3.1. 첫번째 FA, 그리고 잔류

2006년 시즌을 마치고 FA자격을 얻었을 때 다른 FA처럼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상 이적을 예고했었다. 히로시마가 저예산 구단이라는 재무구조의 한계로 구단 역사상 단 한번도 FA를 잡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팬들은 프랜차이즈 스타가 같은 리그만 안 갔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고, 2006년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하면 포스팅 시스템으로 가는 거라 히로시마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줄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당시 언론들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등 일본 구단들과 LA 다저스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구단들로 진출할 것이 우세하다고 전망했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남을 것이라는 전망은 단 한줄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그러던 중 히로시마 도요 카프 측에서 10월 15일날 쿠로다 히로키와 만나 4년에 10억엔+은퇴 후 차기 감독직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까지 안 가도 요미우리 자이언츠4년 30억엔이라는 거금을 제시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남지 말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고, 팬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구단측에서는 "FA 제도 도입 후 우리 구단이 10억엔을 제시한 건 우리 구단 역사상 쿠로다가 처음이다."라며 팬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낮은 액수의 금액과 함께 옵션으로 추가된 차기 감독직이라는 말도 언제 실현될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옵션[8]을 집어 넣은 성의없는 구단측에 대해 팬들의 반발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리고 다음날인 2006년 10월 16일 쿠로다의 마지막 등판일 날[9], 팬들은 ‘우리는 함께 싸워왔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미래에 빛나는 그 날까지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대의 눈물이 되어주리 Carp의 에이스 쿠로다 히로키.’라는 문구를 외야에 걸고 육성으로 외치며 뜨거운 작별인사를 보냈다.
이 팬들이 보낸 눈물의 고별사가 쿠로다의 마음을 움직였고, 당시 아버지의 병환[10] 때문에 쿠로다는 결국 1년 더 히로시마에서 뛰기로 결정했다. FA 신청 없이 4년간 12억엔+"메이저리그 진출시에는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할수 있다"라는 옵션으로 히로시마에 남았다.그리고 히로시마 팬들에겐 영구 까임방지권을 얻었다.

시즌 후 기자회견을 열고 FA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른 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팬, 카프 선수를 상대로 공을 던진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를 여기까지 키워준 것은 카프. 그 팀을 상대로 내가 힘껏 공을 던질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솔직히 없었다.
僕が他球団のユニフォームを着て、広島市民球場でカープのファン、カープの選手を相手にボールを投げるのが自分の中で想像がつかなかった。僕をここまでの投手に育ててくれたのはカープ。そのチームを相手に僕が目一杯ボールを投げる自信が正直なかった

3.2.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

그렇게 2007년 시즌까지 히로시마에서 뛴 쿠로다는 해외 FA 자격[11]을 얻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선언한다.

이 당시엔 마츠자카 다이스케, 이가와 케이사와무라 상을 수상한 괴수들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쿠로다는 상대적으로 일본에선 저평가받는 편이었다.

메이저 스카우트들의 평가는 커맨드가 좋고[12] 구종의 모션이 동일한 점을 들어 3~4선발급 성적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스카우팅 리포트

전통적으로 일본 선수들에 큰 관심을 보여온 시애틀 매리너스를 비롯해 필라델피아 필리스, 텍사스 레인저스, 시카고 컵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같은 타격친화 구장 사용 팀들도 그에게 많이 달려들었다. 당해 FA 중 선발투수 자원이 딱히 풍족하지 않았던 영향도 있다. 특히 많은 스카우트들은 쿠로다가 서부에서 뛰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매리너스 행을 점쳤지만, 정작 행선지는 노모 히데오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LA 다저스. 날씨도 좋고 내셔널리그라 투수를 상대한다는 점, 타자보다는 투수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평가받는 다저 스타디움의 환경, 플레이오프 출전이 가능한 서부지구 강팀이라는 요소가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로다가 뛰던 카프는 그가 입단한 첫 해인 1997년을 제외하고 B클래스에 쭉 있었고 A클래스던 1997년에도 지금과 같은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없었기 때문에,(추가된 건 2007년부터[13]) 쿠로다는 일본프로야구 시절 가을야구 진출 경험이 없었다.

쿠로다가 메이저리그에 있었던 기간동안 히로시마 카프의 15번은 쿠로다 히로키의 이름으로 준영구 결번으로 지정됐다. 팀에서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던 아이콘이었던지라 쿠로다의 등번호가 준영구 결번이 된 것은 당연한 얘기. 쿠로다가 히로시마로 돌아오면 자신의 등번호를 다시 쓸 수 있도록 해둔것인데 실제로 2015년 히로시마로 돌아와서 15번을 다시 쓰게 되었다.

4.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4.1. 2008 시즌

3년 총액 $35.3M 계약[14]으로 입단한 LA 다저스에서 첫 해에는 180이닝을 던져주며 3.73을 찍는 등 3선발급으로 평가받았던 스카우트들의 예상에 맞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노모 히데오 이후 첫 한시즌 3완봉 다저스 투수가 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토록 바라던 포스트시즌 출전에서도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2009 NLCS 필라델피아 필리스전에선 패전)

4.2. 200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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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9년에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원정에서 러스티 라이얼의 타구에 머리를 맞는 불의의 사고를 겪었다. 영상으로 보면 맞는 소리가 살벌하게 크게 들리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데, 다행히 의식을 유지했고 정밀검사 결과 큰 이상을 보이지는 않았다.[15] 뇌진탕으로 마이너리그 싱글A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리햅경기로 3경기 13.2이닝을 던지고 무사히 복귀했으나 시즌 21경기 출전에 그쳤고 NLCS 필라델피아 필리스전에 출전해서도 얻어맞으며 패전했다. 뇌진탕 후유증으로 컨디션이 안좋으면 머리와 목 주변이 뻣뻣해지는 증상을 겪게돼서, 쿠로다는 경기 전 트레이너에게 반드시 목과 어깨에 마사지를 받고 등판을 하게되었다.

4.3. 2010 시즌

2010년부터는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투심 패스트볼/싱커의 비중과 구속을 끌어올리며 오히려 포심 패스트볼보다 더 많은 비중으로 구사했고 변화구 역시 기존의 슬라이더 중심 레퍼토리에다 (원래부터 일본인 투수의 기본 소양으로서 던지던) 스플리터(포크볼)와 함께 커브볼도 간간히 던지며[16] 메이저리그 진출 3년만에 첫 10승 달성에 성공했다. 이후 계약이 만료되며 일본 복귀설이 있었지만 쿠로다는 메이저리그에 계속 도전하겠다는 의욕을 나타내며 다저스와 재계약했다. 메이저리그에 늦은 나이에 진출해서도 매년 향상되는 지표와 기교파 투수로서도 늘 발전하는 모습에 다저스 팬들 역시 그와 재계약하기를 원했고 팬들 사이에서도 호평받았다.

4.4. 2011 시즌

2011년에는 피홈런이 많아지고 피안타율이 높아지는 문제도 있긴 했지만, 주자 있을 때마다 몰려맞던 기존의 모습을 벗어나 득점권 주자 있을 때마다 집중력 있는 투구를 선보이며 사이영 상급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에 이어 사실상의 2선발 노릇을 했다. 그러나 팀이 맥코트 구단주 이혼소송 문제로 인해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득점지원도 맷 켐프안드레 이디어 외에는 전부 잉여가 된 타선 때문에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저스의 상황이 개판이 되면서 7월 말 트레이드 데드라인이 되자 라파엘 퍼칼 등 주축 고액연봉 선수들의 트레이드가 이어지며 $12m 수령자 쿠로다도 예외 없이 트레이드 물망에 올랐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보스턴 레드삭스, 뉴욕 양키스 등 쟁쟁한 아메리칸리그 팀들이나 같은 지구에서 뜬금없이 플레이오프 레이스를 벌이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여러 유망주들이 그 물망에 올랐지만 트레이드 거부권을 갖고 있었던 쿠로다의 트레이드에는 어려움이 있었다.[17] 가족들은 캘리포니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쿠로다는 동부로의 이적을 꺼렸고, 결국 이반 노바, 헤수스 몬테로 등의 큰 이름이 오고 갔던 뉴욕 양키스로의 트레이드[18]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저스 팬들은 이에 대해 큰 아쉬움을 토로하며 쿠로다에게 서운한 감정을 많이 드러내기도 했다.#[19]

결과적으로 성적은 ERA 3.07(리그 9위)을 기록하며 커리어 최저를 갱신했다. 13승을 기록하며 나름 다승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팀 사정 때문에 16패를 기록하며 다패 커리어하이(…)까지 갱신하며 리그 다패 2위를 기록했다. 그 외에도 탈삼진(161개), 이닝수, 출장경기수, 피홈런(…), 폭투(…)까지 커리어 최다를 기록했다.

5. 뉴욕 양키스

5.1. 2012 시즌

2011년 종료 후 FA가 되었는데 다저스 측에서 보다 몸값이 저렴한 선수들로 로테이션을 구성할 것을 시사하며 사실상 결별을 선언했다. 대체로 일본 복귀보다는 미국에서 더 던질 것이란 예측이 많았고 디백스, 양키스 등이 행선지로 거론되고 있던 가운데 좀더 기다렸다가 다르빗슈 유를 영입하는 팀으로 갈 것이란 예측도 나왔다. 하지만 결국 가족들이 있는 서부[20]를 떠나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의 뉴욕 양키스와 1년 $10M의 계약에 합의하였다. 당시 소속된 내셔널 리그가 아닌 아메리칸 리그를 택한 것은 같은 팀이었던 다져스의 타자를 상대로 공을 던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이유도 있었다고.

2012시즌 4월 24일엔 다르빗슈 유와 맞대결을 펼쳤다. 텍사스의 강타선을 6⅔이닝 동안 2실점으로 잘 막았지만 8⅓이닝 무실점 역투를 펼친 다르빗슈가 승리를 가져갔다.

8월 14일에는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2피안타 2볼넷 완봉승을 거두었다. 보고 있나 다르빗슈

2012년을 16승 11패 3.32로 마쳤다. 소화이닝도 무려 219⅔이닝으로 AL 4위. 9월에는 3승 1패 5.22로 부진했지만 시즌을 전체적으로 놓고 볼때 양키스 선발투수 중에서 제일 안정적인 모습을 유지했다.[21]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ALDS 3차전에서 8⅓이닝 2실점을 하고도 패전 위기를 맞이했으나 라울 이바녜즈의 원맨쇼로 ND를 기록.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의 ALCS 2차전에서는 거지같은 일정 때문에 커리어 첫 3일 휴식 후 등판이었음에도 시작하자마자 9명 중 7명을 삼진으로 잡더니 5회까지 퍼펙트로 무시무시한 피칭을 선보였지만 타선의 삽질과 수비의 아쉬움, 심판의 장님모드, 불펜의 분식질 등 악재가 겹치면서 7⅔이닝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양키스가 스윕패를 당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등판 기회 없이 2012년 시즌을 마쳤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 기사 참조.

양키스 팬들은 2013년에도 쿠로다와 함께 가야될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분 동의했다. 자신의 실력에 따라 매년마다 알맞은 대우를 받으며 팀에 민폐가 되지 않게끔 단년계약을 선호하는 쿠로다의 프로의식이라든가, 뉴욕 생활에 잘 적응한 쿠로다의 모습 등을 감안하면 구단 측에서도 페이롤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양측에서 윈-윈이라 할 수 있는 계약이 나올 수 있다는 예상이 있었다. 양키스가 제시한 $13.3M의 퀄리파잉 오퍼를 거절하고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뛰고 싶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다저스와 에인절스가 강력히 연계되어 양키스 팬들을 불안에 떨게 했지만 결국 양키스와 1년 $15M의 계약을 맺으며 뉴욕에 잔류하는 것을 선택했다.

5.2.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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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국 명문구단들카프랑 별반 다를게 없는거 같아.

2013시즌 뉴욕 양키스의 개막전 선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CC 사바시아가 2012시즌이 마무리 된 후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기 때문. 그렇게 될 경우 박찬호[22]와 노모 히데오[23]에 이어 3번째로 메이저리그 양대리그 개막전에 선발등판하는 아시아 투수가 되는 것이었는데 결국엔 사바시아가 개막전에 등판하게 되었다.

4월 14일 홈에서 볼티모어천웨이인과의 대결에서 9이닝 5탈삼진 무실점 완봉승을 하였다. 천웨이인은 6이닝 2탈삼진 3실점. 이 경기는 양키스에서의 4번째 완투이자 3번째 완봉승이다.

이후로는 양키스의 진정한 에이스 투수다운 모습을 보여줬는데, 25일의 토론토 홈 경기에서는 6이닝 3실점 (6안타 1볼넷)을 했으나 타선이 5점을 뽑으며 승리투수가 되었고 30일의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홈 경기에서는 7이닝 무실점 승리를 챙겼다. 5월 7일의 콜로라도 로키스 원정 경기에서는 타선의 침묵으로 패를 적립했으나 캔자스시티 원정과 토론토 홈 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

6월에는 양키스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인터리그 경기가 잡혀서 이 시리즈에서 19일 경기에 등판할 예정이라 18일 등판 예정인 류현진과의 대결은 무산되는가 했지만 18일 경기가 뉴욕에 내린 비 때문에 다음 날 더블헤더 일정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쿠로다가 밤 경기가 아닌 낮 경기에 등판할 의사를 보임에 따라[24] 다저스 측의 낮 경기 선발로 발표된 류현진과의 한일 메이저리그 선발 맞대결이 성사되었다. 결국 쿠로다가 내려가기 직전 좀 털리긴 했지만 류현진에 비해 오래 버티고 실점을 적게 하는등 낮경기를 일부러 골라 등판한 값을 했다.

7월 12일 미네소타와의 홈경기에서 비가 오는 와중에도 꾸역꾸역 5이닝 동안 무실점 피칭을 해내고 승리를 따내면서 전반기를 8승 6패 2.65로 마무리했다. 6월 들어서 싱커가 제구가 안 되면서 장타 허용 횟수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아쉬운 점이라면 양키스 팀블론 4개 중 3개가 쿠로다의 승리를 날려먹었다는 것 정도.[25]

8월 1일 메이저리그 진출 당시의 소속팀이었던 다저스 원정경기에서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와 맞붙었다. 경기 전부터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들끼리의 맞대결이라는 점에서 전미의 관심이 집중된 경기였는데, 쿠로다는 7이닝 5피안타 1볼넷 8탈삼진 무실점, 커쇼는 8이닝 5피안타 무사사구 5탈삼진을 기록하는 명불허전 투수전이 이뤄졌다. 경기는 9회 초 대타 오버베이의 결승 적시타와 다저스의 결정적 실책으로 양키스가 승리했다. 이 경기 이후 쿠로다는 시즌 평균자책점을 2.38로 낮췄다.

8월 6일 시카고 화이트삭스 원정에서 크리스 세일과 맞붙어 7이닝 3실점 패전을 안았지만, 8월 12일 양키 스타디움으로 돌아와 LA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8이닝 3피안타 1볼넷 7탈삼진 무실점 완벽투를 선보이면서 시즌 11승째를 따냈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2.33. 이 경기를 통해 쿠로다는 맷 하비를 제치고 후반기 평균자책점 1위로 올라섰고, 본격적으로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후보군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8월 말에 접어들며 아무래도 좀 지친 모양새로, 세 경기 연속 부진하며 사이영 상 경쟁에서도 한 발 물러났다. 매 해 쿠로다는 나이로 인한 체력 저하 때문에 시즌 말미에 들어서 부진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2013년에도 어김없이 그 법칙이 적용되는 중. 8월 17일 보스턴 전에는 5.2이닝 3실점으로 '쿠로다 치고는 부진했다' 정도의 느낌이었지만 8월 22일 탬파베이 전에서는 4 홈런을 얻어 맞으며 6이닝 7실점, 8월 27일 토론토 전에서는 5이닝 5실점으로 부진했다. 사실 쿠로다의 나이를 감안해 봤을 때 후반기도 강철처럼 던진다면 약물을 의심해 봐야 할 (…) 일이긴 하다.

5.3. 2014 시즌

2013 시즌이 끝난 후에는 여러 팀과 계약 루머가 돌았다. 양키스에 1년 남는 게 가장 유력하지만 수준급 선발을 원하는 다저스와의 루머도 끊임없이 나기도 했다.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는 아닌 게 쿠로다의 가족은 LA에 머물고 있기 때문. 심지어 2013시즌 20여년만에 가을야구를 경험한 친정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도 러브콜을 보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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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년 $16M 규모의 재계약에 합의했다. 쿠로다가 일본방송국의 다큐멘터리에서 밝힌 바로는 더 좋은 계약조건도 있었고,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었으며, LA에 있는 가족 생각도 들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데릭 지터가 다음 시즌에도 양키스에서 같이 뛰었으면 좋겠다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쿠로다는 지터의 이메일을 읽고 양키스와 재계약하기로 결심했다고.

하지만 평균자책점이 5점대로 올라가기도 하는 등 5월 12일 현재 2승 3패 4.62를 기록하면서 전반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가 전반기에 벌어놓고 후반에 부진했던 걸 생각하면 드디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게 된 듯.

...한 줄 알았는데 6월 이후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면서 6월 20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홈경기에서 6.2이닝 3피안타 2볼넷 6탈삼진 무자책을 기록하며 ERA를 3.88로 끌어내렸다. 어느새 200이닝-10승-3점대 평균자책점을 또 다시 기록할 수 있는 페이스. 정말 그야말로 노송이다. 하지만 또다시 그의 승리는 불펜이 날려버리고 말았다. (….)

2014시즌을 출발했을 때는 1선발이 아니었지만 나머지 4명 투수이 시즌도중 낙마하면서 졸지에 또다시 1선발이 되었다.(…)

8월 23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홈경기에서 6이닝 5피안타 2볼넷 6탈삼진 2실점으로 팀의 5-3 승리를 이끌며 시즌 9승과 함께 미일통산 180승을 달성했다.(일/103승 + 미/77승) 평균자책점도 3.94로 내려갔다. 만약 잔여경기에서 1승만 더 추가할 경우 5년 연속 10승을 달성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MLB 동양인 투수 가운데 5번 이상의 10승의 시즌을 만들어낸 투수는 노모 히데오(7번)와 박찬호(6번), 다나카 마사히로, 다르빗슈 유 뿐이다.

8월 28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원정경기에서 7이닝 4피안타 1볼넷 4탈삼진 2실점으로 쾌투를 펼쳤으나 팀 타선이 신예 랍스타인의 공을 공략하지 못해 승패없이 물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9월 3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홈 라이벌전에서 7이닝 4피안타 8탈삼진 1실점의 위력적인 피칭을 보여주며 시즌 10승을 기록, 5번의 10승을 기록한 3번째 MLB 동양인 투수가 되었다. 평균자책점 또한 3.78까지 끌어내렸다.

대체로 작년과는 다르게 후반기로 접어들수록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4년 연속 200이닝, 7년 연속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할 수 있는 페이스이다. 이 양반 나이가 올해로 39이다.(…)

하지만 9일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홈 경기에서는 4회를 채우지 못하고 9피안타 5실점을 허용하며 다시금 평균자책점이 3.91까지 치솟았다. 후반기에 계속 좋은 흐름을 유지하다가 한번 호되게 무너지면서 졸지에 3점대, 200이닝이 모두 어려워 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14일 볼티모어 오리올스 원정경기에서 다시 7이닝 6피안타 무사사구 5탈삼진 1실점의 호투를 펼치면서 평균자책점을 3.81로 끌어내렸다. 정규 시즌 등판이 2~3경기 남짓 남은 시점에서 7시즌 연속 3점대 평균자책점 달성은 거의 확실시된 상황이다. 하지만 역시나 승리를 챙기지는 못했다. 크라이 쿠로다

20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홈경기에 선발등판, 6⅔이닝 7피안타(1피홈런) 무사사구 3실점(2자책) 역투를 펼치며 양키스의 5-3 승리를 이끌며 시즌 11승을 달성했다. 이로서 시즌 평균자책점은 3.77로 내려갔다. 커리어 최악의 시즌이 되는가 했으나 결국 다저스에서 보낸 1,2년차 성적보다 더 좋은 성적으로 시즌을 마칠 분위기.(…)

26일(한국시간) 오리올스와의 홈경기에서는 8이닝 3피안타(2피홈런) 무사사구 9탈삼진 2실점 역투를 펼쳤으나 9회 마무리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3실점하며 블론을 범해 시즌 12승 도전이 물거품됐다.올시즌 블론으로날린게 이로서 6승 타점지원이 아니라 불펜이 날린것만 6승이다 쿠로다 지못미

최종성적 32경기 11승 9패 199.0이닝 3.71 ERA로 75년생 노장으로는 믿기 어려운 대단한 성적을 남겼다. 단 1이닝 차이로 200이닝을 놓쳤으나 5년 연속 190이닝 달성에는 성공했고 무엇보다 2008년 MLB 입성이래 매시즌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또한 다나카와 다르빗슈보다 스포트라이트는 덜 받았지만 시즌 기간 내내 좋은 성적과 건강함을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있는 시즌이었다.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잔류요청을 받았다고.

하지만 정작 양키스에서 퀄리파잉 오퍼는 걸질 않아서 쿠로다를 잡으려는 의지 자체는 2013년 오프 시즌에 비해 떨어지는 것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양키스가 퀄리파잉 오퍼를 걸었다면 다른 팀에서 쿠로다와 계약을 하면 양키스에게 드래프트 순번 하나를 넘겨야 하기 때문에 타 팀의 쿠로다 영입을 방해할 수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양키스는 이미 쿠로다에게 퀄리파잉 오퍼 금액 이상을 투자하는 걸 꺼린다고 받아들여도 무방. 이로써 쓸만한 3~5 선발을 찾는 구단들은 쿠로다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중. 다저스의 파르한 자이디 단장은 노골적으로 쿠로다를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선수 생활 마지막을 친정팀에서 보내고 싶다는 선수 본인의 의지가 워낙 확고했던 나머지 거액을 제시하는 메이저 구단이 있었음에도 친정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의 복귀를 선언, 메이저리그 커리어의 막을 내렸다.

6. 친정팀 복귀

今の僕があるのはカープのおかげ。いずれは帰り、恩返ししたい気持ちはある。日本に帰るならカープしかない。帰るなら、バリバリやっている時に帰りたい。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카프 덕택이다. 언젠가는 돌아가서 보답하고 싶다. 일본에 돌아간다면 카프밖에 없다. 돌아간다면 힘이 있을 때 돌아가고 싶다.
2007년 LA 다저스로 진출할 당시 인터뷰 중에서.
그가 미국으로 떠날 채비를 할 때, 일본에서는 그가 얼마 못 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고,
그가 일본으로 떠날 채비를 할 때, 미국에서는 그가 정말 돌아갈 것이라 믿지 않았다.
결국 몇 년이 걸려도 그가 돌아올 것을 믿은 것은 쿠로다 히로키 자신과 히로시마 도요 카프 뿐이었다. 히로시마는 돌아올 쿠로다를 위하여 7년 동안 그의 15번을 비워놓고 있었다.
이제 그는 다시 15번을 달고 히로시마에서 뛸 것이다.
아마도 공을 던질 힘이 남아 있는 한 영원히.
출처

한국 시각 2014년 12월 27일, 쿠로다의 히로시마 복귀가 확정되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메이저리그 데뷔 친정팀 LA 다저스 등 상당수의 구단에서 2000만 달러에 근접한 연봉을 제시했지만, 일본으로 복귀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고 한다. 계약 조건은 1년 4억엔. 한국 기준 환율로 환산하면 '200억+메이저리그 풀타임 선발(그것도 PO컨텐더팀!)' 자릴 포기하고 36억에 히로시마와 계약한 것이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복귀한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4년 16억엔임을 감안하면 거의 보살급 헐값계약. 히로시마는 뉴욕 양키스 에이스급 투수를 거의 거저로 얻은 셈.[26] 당연히 히로시마 팬들은 아침부터 감동의 눈물을 쏟았다... 이로서 히로시마는 마에다 켄타 - 쿠로다 히로키 - 오세라 다이치로 이어지는 막강 선발진을 구축하여 내년 시즌 우승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등번호는 예전에 달던 번호 그대로 15번.

그의 복귀 선언이 있고난 후 사상 처음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연간회원권 8,300장이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히로시마 시민들이 그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

여담으로 그가 히로시마로 돌아가는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해 간다"라고 했는데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메이저리그가 아닌 일본프로야구로 가는 것이 꿈이라고요?"라고 질문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대인배 포스가 철철 넘치는 글로 대답했다.
私の娘たちは、野球が大好きです。私の試合が終わった後は、いつも「かっこいいパパ、がんばってください」と言ってくれます。ヤンキースの試合を娘たちはよく見ていました。平凡な私が娘たちに大きいい影響を与えていました。
제 딸들은 야구를 아주 좋아합니다. 제 경기가 끝나고 나면 항상 「멋진 아빠 힘내세요」라고 말하죠. 딸들은 양키스 경기를 즐겨 보곤 했습니다. 평범한 제가 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죠.

このようにスポーツ選手は子供の精神や考え方に対して大きな影響を与えています。それは、正々堂々と戦う、努力を積み重ねる、正直に生きる等、人生の基本を伝える役割があると思います。
이처럼 스포츠 선수는 아이의 정신과 사고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꾸준히 노력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 등 인생의 기본을 전해주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이글을 보고 반성해야 할 선수들이 한트럭은 될거다.

長嶋茂雄さんは、野球で子供たちに夢を与えようと、常に意識していたそうです。これがプロスポーツ選手の姿でしょう。スポーツ選手は、子供たちに「夢を与える存在なんだ」ということを自覚して、子供たちの模範になるような姿を示していただきたいと思います。私がこんなに多い年俸を受け取るのも子供たちとファンのおかげだからです。
나가시마 시게오 씨는 야구로서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겠다고 항상 의식하며 행동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프로 체육인의 모습이지요. 스포츠 선수는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아이들의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연봉을 받는 것도 어린이와 팬들의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後で私の人生を振り返って見たとき家族に恥ずかしくない姿を見せたい、それが私の夢です。
훗날 내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것이 나의 꿈입니다.

黒田博樹
쿠로다 히로키

이 외에도 히로시마가 다 뒤집힐만한 임팩트를 불러왔고 훈훈한 에피소드가 많다.

그가 돌아온다는 이유로 히로시마 시내에서는 광고효과가 아닌 순수하게 환영하고자 하는 의미의 현수막을 여기저기서 현수막 제작의뢰자의 자비 털어서 제작해서 내걸고 있는데, 현수막 제작 업체들은 연말연시 장기 휴업기간인데도 불구하고 그게 쿠로다를 환영하는 현수막이라는 오로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연말연시 반납하고 철야로 작업했을 정도로, 히로시마 전체에서 그가 가지는 위상은 매우 크다.

6.1.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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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 첫경기엿던 3월 29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홈경기에서 7이닝 동안 5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며 히로시마의 2:1 승리를 이끌어 냈다. 이때 히로시마현 내 최고 시청률이 39.7%에 달했고 후반 시청 점유율은 65.8%에 달했는데 이는 TV시청 가구중 3분의 2는 히로시마 경기를 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시즌 초 6경기 성적은 3승 2패 방어율 3.46으로 예상보다 저조했고 심판들의 판정이 쿠로다에게 유리하다는 논란도 나왔다.(일명 쿠로다존) 설상가상으로 5월 1일 야쿠르트전에서 6이닝 5피안타 5실점으로 시즌 2패를 기록한 이후, 5월 4일 복사뼈 힘줄의 염증으로 메이저에도 안가던 DL행이 발표되었다. 일주일만에 DL에서 복귀한 5월 11일 DeNA와 경기에서 패배를 기록하진 않았으나 6이닝 5실점 6피안타로 부진, 쿠로다도 이제 나이를 속일 수 없나 싶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5월 후반부터 귀신같이 부활했다.

5월 22일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야쿠르트전에서 7이닝 9피안타 3탈삼진을 1실점으로 꾸역꾸역 막더니, 교류전에서 5월 29일 오릭스전 6과 1/3이닝 6피안타 5탈삼진 2실점, 6월 5일 라쿠텐전 7이닝 4피안타 4탈삼진 무실점, 6월 12일 소프트뱅크전 8이닝 6피안타 4탈삼진 무실점으로 3연승을 거두었다. 교류전이 끝나고 시즌 성적도 6승 2패 방어율 2.61로 좋아진 상태. 6월 30일, 8회까지 무실점을 기록하며 완봉하나 했는데..9회 끝내기로 2점을 내주며 8과 2/3이닝 2실점 패. 타자들 반성해라

2015 NPB 올스타전 투표에서 센트럴리그 선발투수 1위에 올랐다. 원래 팬투표 1위는 1차전 선발이지만 2차전이 히로시마의 홈구장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에서 열리기 때문에 본인은 2차전 선발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7월 8일 오른쪽 어깨의 염증으로 등록말소가 되었다. 5월 오른발 염증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복귀해 공을 던진 것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한 원인이라고. 14일 불펜투구를 시작하였고 올스타전 등판 이후 하반기부터 로테이션을 소화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본인의 희망대로 18일 올스타전 2차전 선발로 출장해서 2이닝 3탈삼진 3피안타 무실점으로 8년만의 올스타전 출장이자 복귀피칭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반기 7월 28일 야쿠르트전부터 로테이션에 합류할 예정이다.

하반기 복귀전인 28일 야쿠르트전에 선발 등판하여 7이닝 1실점 7피안타 무사사구 4탈삼진을 기록했다. 그러나 팀은 하반기 내내 4위자리에 고정되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야말로 200억+메이저리그 컨텐더 팀의 로테이션 투수 보직까지 포기하고 돌아온 의미가 무색해질 정도로 히로시마의 답없는 빠따는 7년만에 돌아온 에이스를 미국시절과 똑같은 10승10패 정도 하는 투수로 만들어버렸다. 당연히 시즌 전 24년만의 우승을 호언 장담하던 팀은 우승은 고사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조차 가물가물한 절망적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9월 하순 들어서 기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9월 들어올 때까지 1위를 달리고 있던 한신 타이거스예년처럼 9월달 들어와서 급추락하면서 마침내 리그 우승은 물건너 갔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는 손에 닿을 수 있는 희망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0월 3일 경기가 종료된 시점에서 한신은 1경기, 히로시마는 2경기가 남은 가운데 3위 한신과 4위 히로시마의 차이는 1.0게임차. 그리고 한신의 시즌 마지막 경기는 바로 히로시마와의 맞대결이다! 다시 말하면 1.0게임이 뒤져있지만 히로시마가 남은 두 경기를 다 이기면 극적으로 한신을 제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의 막차를 탈 수 있는, 즉 스스로의 운명을 컨트롤할 수 있는 상황까지 끌고 왔다. 그리고 맞이한 10월 4일,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몰려든 오사카 아재들로 가득찬 적지에서 상대팀 에이스인 후지나미 신타로와의 맞대결 상대로 팀의 명운을 걸고 선발등판했다. 4월 맞대결에서 후지나미는 번트 자세를 취하던 쿠로다에게 몸쪽 위협구를 던지면서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오사카 아재들이 뿜어내는 험악한 분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생결단의 각오로 역투, 8⅓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면서 5이닝 4실점으로 털린 후지나미에게 완승을 거두고 왜 200억원을 포기하면서 히로시마로 복귀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덕분에 히로시마가 시즌 최종전에서 승리하면 기적적인 역전극을 연출하면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까지 끌고가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지만, 시즌 최종전에서 마에다 켄타가 7이닝 무실점으로 역투했지만, 불펜의 방화 + 답이 없는 물빠따까지 겹치면서(겨우 1안타) 결국 한신이 천신만고 끝에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게 되고, 40이 넘은 노장의 온몸을 불사른 역투도, 히로시마 카프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시즌 성적은 26경기 11승 8패 평균자책점 2.55. 나이를 무색케하는 빼어난 활약을 펼치면서 마에다 켄타, 크리스 존슨과 함께 카프 투수진을 이끌었다. 하지만 쿠로다 본인은 현역 연장 여부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는데, 이대로 은퇴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당연히 구단이나 카프 팬들은 쿠로다가 내년에도 뛰어주길 원하고 있는데, 미일 통산 200승까지 고작 7승만을 남겨둔 상황이기도 하거니와, 당장 에이스인 마에다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쿠로다마저 은퇴해버리면 선발진이 순식간에 암울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6.2. 2016 시즌

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수도 있다는 예상도 있었으나, 2015년 12월 17일 현역 생활을 1년 연장하기로 결심하고 연봉 6억엔(약 57억8000만원)에 히로시마와 도장을 찍었다. 이로써 50%의 연봉 인상과 함께 NPB 최고 연봉자에 등극했다.[27]

그리고 인터뷰에서 "상상 이상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구단에 보탬이 되도록 열심히 하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나이 문제도 있어서 내년에 얼마나 잘 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3월 28일 경기에서 첫 승을 거뒀다. 200승까지 남은 승수는 6승.

4월 2일 요미우리와의 홈 경기에서 탈삼진 4개를 뽑아내며 9이닝 무실점 완봉투를 펼쳤다. 팀도 3:0으로 이기면서 200승까지 단 5승 남았다.

6월 10일 교류전 라쿠텐과의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등판,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면서 시즌 5승째를 따냈다. 이제 200승까지 남은 승수는 2승.

6월 29일 야쿠르트와의 리그 경기에서 선발등판, 7이닝을 1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시즌 6승째를 따냈다. 이 경기에서 쿠로다는 6회 만루찬스에서 9번 타자로 등장[28], 3타점 2루타를 기록하며 포수 거르고 투수 경기를 통틀어 팀내 최다 타점 타자가 되었다. 쿠로다의 시즌 첫 안타였다. 계투가 답답하니까 내가 친다 이제 200승에 1승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7월 23일 한신전에 드디어 200승을 걸고 등판한다. 본인은 7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펼치고 타선도 적절히 터져 7:0 완승. 드디어 미일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여담으로 양키스 시절 동료였던 스즈키 이치로는 '미일 합산이라니 난 인정할수 없다.축하한다'는 개드립을 날리기도

올해 히로시마가 2위 요미우리와의 승차를 크게 벌린 채 전반기를 마감하여 우승에 대한 전망이 밝아지고 있으나, 쿠로다는 이번 시즌 히로시마가 우승하게 된다면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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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25년 만의 리그 우승 확정 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헹가래를 받는 쿠로다.

그리고 9월 1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도쿄 돔 원정경기에서 초반 2실점으로 부진했지만, 이후 점수를 좀처럼 내주지 않았고 타선도 6득점으로 대폭발하면서 역전하여, 6-4로 승리. 카프의 25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지었다!

우승 다음날 9월 11일 1군 말소되었다. 시즌 중 로테이션를 몇번 거를 정도로 몸상태가 완벽하지 않았기에,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대비하여 컨디션을 조절한다고 한다.

1군으로 복귀하여 9월 25일 야쿠르트 전에서 2/3이닝 투구하여 점검을 하였다. 10월 1일 야쿠르트 전에 시즌 마지막 선발등판을 하여 7이닝 1실점 1자책으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2016 시즌 성적은 24경기 10승 8패 151 2/3이닝 평균자책점 3.09.

그리고 2016년 일본시리즈 시작을 며칠 앞두고, 일본시리즈 종료 후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쿠로다 본인 입장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예로운 은퇴.#

2016년 일본시리즈에서 3차전에 등판했다. 기록은 5.2이닝 1실점. 그런데 팀은 언제나 그랬듯이 불펜이 8회에 역전당하면서 가뿐하게 승리투수로서의 권리를 날려주고, 10회에는 그 분한테 끝내기를 맞았다. 그 와중에 쿠로다가 마운드에 있을 때는 지지리도 안터지던 빠따는 9회초에 쓸데 없이 동점을 만들어서는 희망고문만 했다. 7차전까지 간다면 7차전 선발은 쿠로다라고 미리 다 홍보를 하고 다녔지만, 팀이 닛폰햄한테 2승을 먼저 거두고 내리 4연패를 하면서 6차전에서 일본시리즈 우승을 내줬다.[29] 오가타 개객끼!!!결국 쿠로다는 일본시리즈에서 역투하는 모습을 고락을 같이 했던 홈팬들에게는 보여주지도 못한채 현역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쿠로다의 현역 마지막 경기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2016년 일본시리즈 3차전이 되었고, 그것도 생소한 삿포로 돔 원정경기였다. 그래도 그 마지막 등판에서 5⅔이닝 1실점으로 최선을 다했다. 이때 쿠로다가 부상으로 강판될때 삿포로돔에 있는 관중 전원이 기립 박수를 쳤다. 해설자도 "지금 삿포로돔에는 닛폰햄팬도, 카프팬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닛폰햄 팬들의 매너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말하기도 하였다.

그 뒤 히로시마에서 열린 우승 퍼레이드에 참가한 이후,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에서 열린 우승보고회에서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빛나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파일:external/www.nikkei.com/96958A9E9381969AE2E79AE1998DE2E7E3E3E0E2E3E48787E0E2E2E2-DSXMZO0920162005112016UU2002-PB1-7.jpg
안녕. 카프의 영원한 에이스.

7.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경력

7.1. 2004 아테네 올림픽

파일: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워드마크.svg
<rowcolor=#d9bb46>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피홈런 실점 자책점 볼넷 탈삼진
3 0 9 0.00 2 0 1 0 3 0 0 0 3 13

유일한 국가대표 참가대회였던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활약하며 공헌했지만 팀은 준결승에서 패퇴하여 동메달에 만족해야만 했다. 지역 예선에서도 대만한국전 2경기 1⅔이닝 1홀드 무실점, 본선에서도 네덜란드전에 구원 등판하여 5이닝 무실점 승리, 대만전 1이닝 무실점 승리, 준준결승에서 캐나다 상대로 3이닝 무실점 홀드를 기록했다.

8. 연도별 주요 성적

보이는 바와 같이, 승운이 정말 없는 투수이다. 만년 B클래스 카프 시절은 그렇다 하더라도, 빅리그 진출 후 뛴 팀이 양대리그에서 각각 최고의 빅마켓인 LA 다저스뉴욕 양키스임에도 불구하고 투구 내용에 비해 승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 아이러니.[30] 시즌 최다패가 LA의 마지막 시즌에서의 16패인데 그 때 성적이 202이닝에 평자 3.07, 161k로 이것만 보면 16승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성적이다. 2001년부터 꾸준히 미-일 리그 정상급 선발 투수로 활동했지만 미-일 통산 200승은 은퇴시즌인 2016년에 와서야 간신히 도달했다.

레전드로 추앙받는 것에 비해 방어율(평균자책점)이 그저그런 것처럼 보이지만...한국에서 일본야구에 대한 인상인 투고타저가 아니라, 그의 커리어는 일명 '래빗볼(ラビットボール)'[31]이라 불리던 공의 반발계수가 매우 높던 시절과 정확히 일치하여 타고투저였던 시절이다. 게다가 홈구장 히로시마 시민 구장양익 91m(!)에 정중앙이 115m, 좌·우중간이 109.7m, 펜스 높이도 2.55m에 불과한 악명높은 탁구장이었기 때문에(...)[32] 래빗볼 시절에 저런 환경에서 저만한 성적과 완투를 밥먹듯이 기록하여 오히려 고평가 받았다.

그래도 몇 가지 대기록을 세웠다. 일본인 투수 사상 처음으로 NPB/MLB의 선발 승리만으로 200승#을 달성했으며, 대졸 프로선수 사상 처음으로 선발 승리만으로 200승에 달성한 투수이다.[33]

8.1. NPB

파일:NPB 로고.svg NPB 통산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 경기 완투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탈삼진 WHIP WAR
1997
23 4(1) 135 6 9 0 - .400 4.40 147 17 63 64 1.56 0.1
1998 18 0 45 1 4 0 - .200 6.60 53 5 24 25 1.71 -0.2
1999 21 2(1) 87⅔ 5 8 0 - .385 6.78 106 20 39 55 1.65 -0.6
2000 29 7(1) 144 9 6 0 - .600 4.31 147 21 61 116 1.44 1.0
2001 27 13(3) 190 12 8 0 - .600 3.03 175 19 45 146 1.16 3.8
2002 23 8(2) 164⅓ 10 10 0 - .500 3.67 166 16 34 144 1.22 3.6
2003 28 8(1) 205⅔ 13 9 0 - .591 3.11 197 18 45 137 1.18 4.2
2004 21 7(1) 147 7 9 0 - .438 4.65 187 17 29 138 1.47 4.2
2005 29 11(1) 212⅔ 15 12 0 0 .556 3.17 183 17 42 165 1.06 5.3
2006 26 7(2) 189⅓ 13 6 1 0 .684 1.85 169 12 21 144 1.00 5.2
2007 26 7(1) 179⅔ 12 8 0 0 .600 3.56 176 20 42 123 1.21 2.7
2015 26 1 169⅔ 11 8 0 0 .579 2.55 158 8 29 106 1.10 4.4
2016 24 1(1) 151⅔ 10 8 0 0 .556 3.09 152 14 30 98 1.20 3.9
NPB 통산
(13시즌)
321 76 2021⅔ 124 105 1 0 .541 3.55 2016 204 504 1461 1.25 37.7
  • 볼드체는 리그 1위.
  • 완투 항목의 괄호 안의 숫자는 완봉 횟수.

8.2. MLB

파일:MLB 로고.svg MLB 통산 기록
<rowcolor=#FFF> 연도 소속 G W L S HLD IP ERA ERA+ H HR BB SO WHIP fWAR bWAR
2008 LAD 31 9 10 0 0 183⅓ 3.73 112 181 13 42 116 1.216 3.3 2.7
2009 21 8 7 0 0 117⅓ 3.76 106 110 12 24 87 1.142 2.2 0.6
2010 31 11 13 0 0 196⅓ 3.39 114 180 15 48 159 1.161 4.2 3.6
2011 32 13 16 0 0 202 3.07 120 196 24 49 161 1.213 2.9 3.4
<rowcolor=#c4ced4> 연도 소속 G W L S HLD IP ERA ERA+ H HR BB SO WHIP fWAR bWAR
2012 NYY 33 16 11 0 0 219⅔ 3.32 127 205 25 51 167 1.165 3.4 5.3
2013 32 11 13 0 0 201⅓ 3.31 121 191 20 43 150 1.162 3.3 4.0
2014 32 11 9 0 0 199 3.71 103 191 20 35 146 1.136 3.1 2.1
MLB 통산
(7시즌)
212 79 79 0 0 1319 3.45 115 1254 129 292 986 1.172 22.4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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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 선배로 모토키 다이스케 등이 있다.[2]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혹사가 심한 일본 고교야구에서 혹사를 별로 당하지 않아서 40대 이후까지 부상 없이 꾸준히 롱런할 수 있었다는 야구 관계자들의 주장도 있다.[3] 1989년 춘계리그 이후의 1부리그 우승 경력은 2015년 춘계리그 우승이 전부이며, 이후에도 다시 강팀의 자리를 되찾지 못한 채 1~2부 리그를 오가고 있다.[4] 과거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에 있던 제도. 에가와 스구루 사건 이후 '프로야구 선수에게도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1993년 드래프트부터 도입되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같은 명문 구단들이 대형 유망주를 선점해버려 전력격차를 심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약소 구단을 택한 쿠로다의 선택이 더욱 이례적인 이유. 이 제도는 '자유 획득 범위' '희망 획득 범위' 등의 이름으로 유지되다가 2007년의 탬퍼링 논란 이후 완전 폐지되었다.[5] 1951년 스기우라 유타로, 1952년 오오타카 기요시, 1990년 사사오카 신지, 1997년 쿠로다 히로키.[6] 뇌종양으로 요절한 비운의 선수이자, 히로시마 카프 팬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는 불꽃의 스토퍼 츠다 츠네미의 14번을 계승한 선수였다. 첫 해에는 12승을 달성하며 신인왕을 차지하는 등 등번호에 걸맞은 활약을 하지만, 이후 부상에 시달리면서 별다른 커리어를 쌓지 못한 채 2005년 은퇴. 은퇴 후 지금까지 계속 카프의 코치를 맡고 있다.[7] 좌우 91.4m-좌우중간 109.7m-중간 115.8m. 그리고 펜스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2.55m). 펜스 중간에는 펜스 위에 철망을 덧댄 턱이 있는데, 외야수들이 이곳을 밟고 올라가 종종 펜스플레이를 펼치기도 했다. 2009년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 개장 전까지 사용했다.[8] 이 당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는 17년째 카프 유니폼만 입고 있던 마에다 토모노리가 있었기 때문. 카프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진출이었던 1991년 당시의 멤버이자 1990년대 강타선의 주축으로 선수단 내 영향력이나 구단 내 영향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마에다는 언제 은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2013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그가 감독 수업을 받는 기간까지 합친다면 쿠로다가 은퇴 후 다른 팀에서 감독을 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는 전망도 있었다.[9] 시즌 최종전 9회 2아웃 2점차 리드 상황에 등판하여 삼진으로 마무리하였다. 팀에서도 쿠로다를 잡을 능력이 안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10년간 팀에 헌신한 에이스에게 팬들이 고별인사를 하는 의미의 등판이었다.[10] 암투병을 하다가 2007년 작고했다. 쿠로다의 어머니도 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쿠로다는 지금까지도 히로시마의 암환자 단체에 꾸준히 많은 기부를 해오고 있다.[11] 같은 해 팀의 4번 타자이던 아라이 타카히로도 국내 FA권을 얻어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는데, 쿠로다의 사례와 비교된데다 본인의 실언으로 인해 카프 팬들에게 어마어마하게 까였다. 공교롭게도 쿠로다와 아라이는 2015년 카프에서 팀메이트로 재회했고, 2016년 센트럴리그 우승을 합작해내는 쾌거를 이룬다.[12] 커맨드는 투수 자신이 의도한 곳으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 그러니까 원하는 구질을 원하는 위치에 원하는 무브먼트로 꽂아 넣는 능력이 좋다는 뜻이다. 참고로 메이저리그에서는 제구를 커맨드, 컨트롤, 로케이션으로 나누는데 컨트롤은 스트라이크 존안에 꽂아 넣는 능력을 말하고, 로케이션은 컨트롤의 상위 개념으로 스트라이크 존에 넣으면서 타자가 치기 어려운 지점으로 공을 던지는 능력을 말한다.[13] 그리고 카프는 당연히 B클래스니 진출 불가(...)[14] 물론 일본프로야구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긴 하지만 메이저리그 초년차 30대 투수에게 안겨준 비싼 계약이었기 때문에 다저스 팬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불만이 많았다.#.[15] 라이얼에게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야구를 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과 편지를 받고는 '내가 야구를 그만둘 때, 라이얼이라는 명선수에게 공을 맞았다고 가슴을 펼 수 있는 선수가 되길 바란다.'를 답했다고 한다. 정말 여담의 여담으로 라이얼은 그렇게 큰 선수는 못 되었고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용병으로 갔다가 잘리고 이른 나이에 커리어를 마감한다.[16] 대신 득점권에서 매번 얻어맞아 WHIP에 비해 ERA가 꽤 높은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다소 어설픈 체인지업을 포기하였다.[17] 일본이나 한국이나 트레이드는 팀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연봉 감축 등의 비즈니스적인 요인이나 유망주 수집, 포스트시즌 대비 차원에서 잦은 트레이드가 벌어지는 미국과는 다른 문화적 차이라 해야 할듯. 다저스 프런트가 쿠로다에게 트레이드 가능성을 논의했을 때에도 본인은 잘하는데 왜 내보내야 하느냐는 투로 굉장히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18]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대신 시애틀 패왕 덕 피스터를 데려왔다.[19] 그래도 팬포럼에서는 문화적인 차이로 받아들이면서 그냥 응원해주자는 반응이 많았다. 내년에 연봉 많이 깎으라는 말도 있긴 했지만…[20] 자녀들이 이미 캘리포니아에 있는 학교에 진학한 상황이었다.[21] CC 사바시아 역시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두번이나 부상자명단에 등재되는 등 침체를 겪었음을 감안할 때 사실상 쿠로다가 에이스 노릇을 했다고 볼 수 있다.[22] LA 다저스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달성.[23] LA 다저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달성.[24]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로 낮경기에서 굉장히 강한 모습을 보여왔다.[25] 마리아노 리베라가 블론세이브를 두개를 범한 것이 모두 1-0 리드를 날린 것이었는데 하필 그게 모두 쿠로다 등판 경기였다. 다른 한 개는 8회 3점 리드 상황에서 쿠로다가 주자를 내보내게 되자 로버트슨이 이닝 중간에 등판했지만 쿠로다에게 자책점까지 안겨주고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26]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2015년에 납부해야 할 소득세만 9억엔이다. 2015년에는 의리 하나로 45억원을 지불하면서까지 시합을 뛰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27] 당연히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 역사상 최대 연봉. 구단은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예우와 더불어 쿠로다 복귀로 인한 흥행 및 주목 효과가 막대하다고 판단했다고. 실제로 2015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시즌권 완판과 더불어 역대 최다 관중 및 역대 최다 평균관중을 기록했으며 구단 매출 상승폭도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28] 2아웃 2,3루 상태에서 타율이 1할대였던 포수 8번 타자를 거르고 투수인 9번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찬스였다.[29] '차라리 7차전까지 갔어야만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닛폰햄은 7차전 선발로 그 분이 등판한다고 홍보하고 다녔다. TV 방송사들 입장에서도, 야구팬들 입장에서도, 쿠로다 vs 오타니+쿠로다의 현역 마지막 경기+일본시리즈 7차전이라는 중요한 경기를 놓쳤던 셈. 이로써 오타니와 쿠로다는 투수로서의 맞대결은 없게 되었다. 타자로는 오타니가 3타수 2안타 2루타 2개로 쿠로다를 두들겼다. 참고로 오타니의 등번호는 1+1=2, 2안타, 2루타, 그것도 2개[30] 특히 2011년은 아예 다패왕 경쟁을 했으며, 2013시즌에도 3.31라는 준수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음에도 불펜 방화, 빈약한 타선 지원으로 11승 13패로 패배가 더 많은 시즌을 보냈다.[31] 공이 토끼처럼 폴짝폴짝 뛴다고 붙여진 이름이다.[32] 당장 현재 KBO 리그 최고의 탁구장으로 꼽히는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가 좌·우중간(107m)만 약간 짧을 뿐, 양익 99.5m, 센터 122.5m, 펜스 높이(철조망 포함) 3.6m인 점을 생각하면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얼마나 타자 친화적인 지는 충분히 가늠이 갈 것이다.[33] 지금까지 일본 야구 사상 대졸 200승 투수는 4명이었지만, 모두 선발투수 승리와 구원투수 승리의 합산으로 200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