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00:22

나주 공방전

나주 전투에서 넘어옴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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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공방전
羅州 攻防戰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903년 (궁예 3년) ~ 935년 (태조 18년)
장소

나주 일대
원인 견훤과 나주 호족들의 갈등으로 인한 나주 호족들과 궁예의 동맹
교전국 <rowcolor=black> 태봉
(공세)
후백제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태봉|
]] 궁예 (태봉 국왕)
[[태봉|
]] 왕건 (고려 태조)
지휘관

파일:백제 군기.svg 견훤 (후백제 국왕)
파일:백제 군기.svg 지훤
참가자

[[태봉|
]] 유금필
[[태봉|
]] 왕만세
[[태봉|
]] 김언
[[태봉|
]] 종희
[[태봉|
]] 오희
[[태봉|
]] 나총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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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선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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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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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공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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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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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제 군기.svg 구도
파일:백제 군기.svg 구단서
파일:백제 군기.svg 상귀
파일:백제 군기.svg 상애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려의 승리
영향 고려의 나주 편입 (935년)

1. 개요2. 전개
2.1. 후백제의 탈환2.2. 재탈환
3. 평가
3.1. 나주 정벌이 가능했던 이유
4. 대중매체에서의 묘사
4.1. 제1차 나주 공방전4.2. 제2차 나주 공방전4.3. 이후

[clearfix]

1. 개요

903년, 909 ~ 914년 나주(羅州)[1]를 둘러싸고 태봉후백제 사이에서 벌어진 후삼국시대 전투.

2. 전개

당시 금성군이라고 불렸던 나주는 곡창 지대 역할 뿐 아니라 중요한 대중국 무역 거점이었다. 이 점을 노린 궁예왕건을 파견해 인근 호족들과 연합하여 진도와 나주를 공격,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현대의 인식으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전투로 그 이유는 후술하겠다.

903년의 나주 정벌은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903년에 나주가 이미 고려 땅이었다면 909년 이후에야 벌어진 나주 공방전에 대한 설명을 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학자에 따라 903년에는 기습으로 확실히 점령했고 909년에 이르러 나주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다시 투입된 거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이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나주를 공략한 건 909년이라는 의견, 공략은 했으되 성 단위 점령이 아닌 주변 섬들에 영향력을 심은 정도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 그 시기에 왕건의 수군이 그 지역에 머물면서 오월로 보내는 후백제의 선박을 나포하기도 했고, 903년에 양주(현재의 양산) 지역의 호족 김인훈이 구원을 청하자 뱃길로 가서 구원하기도 했다는 걸 보면 아예 거짓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고 북쪽으로도 계속 공격을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견훤도 이 지역을 탈환할 계획을 쉽게 세우지 못했을 듯하다.

태봉의 수군이 주둔한 곳은 현 경기도 개풍군인 정주로 왕건은 태봉의 수군을 책임지는 총 대장으로서 알찬 종희와 김언을 부장으로 2500명의 병력으로 진도를 함락, 곧이어 고이도에 상륙하였다. 견훤은 이에 맞서 덕진포로 나아갔고 여기서 두 영웅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면서 공격을 명령하였고, 백제는 이 기세에 밀려 일시 퇴각, 왕건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화공을 벌였다. 이 때 백제군의 전사자는 500여명에 달했고, 견훤은 작은 선박을 타고 황급히 몸만 빠져나갔다고 한다.(덕진포 전투)[2]

하지만 이때 제대로 된 포상이 없었는지 부하 및 병사들의 사기가 꽤 떨어져 있었다. 특히 나주에 계속 주둔한 김언 등은 더 했던 듯. 결국 견훤이 나주를 탈환할 움직임을 보이자 다시 내려가게 되는데 이때 첩자를 풀어 그 유명한 수달을 생포하게 된다. 수달은 그때[3] 매복해서 왕건을 잡으려 했는데 왕건의 계책에 의해 되려 사로잡히고 궁예에게 끌려갔다. 이때 궁예가 신나게 가지고 놀다가 죽인 걸로 봐서는 태조 왕건에서의 묘사된 것처럼 실제론 견훤의 부하였든가 이래저래 태봉을 많이 괴롭힌 듯. 일단 기록상으론 백제와 별개 해상세력이었다.

아무튼 910년에 견훤은 직접 보기 삼천을 이끌고 나주성을 포위하지만 왕건이 파견되어 수군으로 백제 진영을 기습, 물러나게 만들었으며 이듬해인 911년에는 무진주를 공격하는 등 꽤 기세가 커졌다. 이때 무진주의 성주였던 지훤은 성을 굳게 방어하여 태봉군이 물러나게 하였다.

912년[4]과 914년에도 다시 나주로 가서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즈음에는 확실히 나주와 서남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한 것으로 보이며 후에 대야성이나 강주 등에 병력을 보낸[5] 기록 등을 보면 두고두고 잘 이용해 먹은 것 같다. 사실상 한반도 주변 바다를 완전히 지배한 것.

2.1. 후백제의 탈환

물론 견훤은 후에 대반격을 준비하여 나주 공격에서 꽤 성과를 거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견훤이 다시 나주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보여지는 때는 무려 20년 후인 929년으로, 철저한 준비와 노력 끝에 다시 해군력을 양성하여 나주를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6] 정말 근성있는 공방전이었다.

그 후 후백제의 나주 탈환 성과는 좋아서 나주를 빼앗아 주변 제해권을 확보한 후인 932년 9월, 여세를 몰아 장수 상귀를 예성강 유역으로 보내 고려 군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고려가 정성들여 키운 군마 300필도 빼앗는다. 심지어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려 왕궁을 포위공격[7]하는 등(예성강 전투) 고려를 크게 위협하였고 바로 다음 달인 932년 10월에는 장수 상애를 보내 고려의 대우도와 저산도 등을 불바다로 만든다. 이에 고려 측은 수군 총사령관인 왕만세를 출진시키지만 상애의 백제 수군에 패퇴당한다.

2.2. 재탈환

그러나 훗날 유금필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나주를 도로 빼앗았고, 이렇게 수복한 나주는 훗날 견훤이 고려로 망명하는 루트로서도 사용되게 된다.[8] 다만 이 대목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신라 기병 10정 군단 중 하나인 검은 깃발 현웅정(=미다부리정)의 치소인 남평읍만은 아예 892년 이래로 내내 견훤 세력 및 후백제의 일부였음이다. 물론 후백제는 나주를, 고려는 광주를 집요하게 노리다보니 사실 남평읍을 비롯한 나주 동부는 후백제가 주로 점유했고 광주는 견훤 입장에서는 참으로 자존심 상하게도 오늘날 광주광역시 서쪽 절반 가까이를 빼앗기고 있었으나, 여하튼 남평읍 일대만은 다른 나주 일대와는 달리 내내 견훤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견훤과 신라 정규군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 평가

태조가 수군을 이끌고 금성(나주)을 점령하니, 주변 여러 섬의 이익이 모두 들어와, 그 재력으로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였다.
고려사
사실상 우리가 아는 태조 왕건을 만들어준 왕건의 최대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왕건이 직접 갔든 부하만 보냈든 한 두번의 정벌이 아니라 계속 수군을 투입하여 서남해와 각 섬들을 점령하면서 꾸준히 백제를 괴롭히고 이곳을 기점으로 남해에도 병력을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일차적으로 나주 평야와 그 부속도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로 인해 나주 평야의 출중한 농업 생산력을 상실하고, 영산강 수운과 서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빼앗기면서 이를 통한 교통과 상업 손을 크게 보았다. 또한 당시 소금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것을 잃은 손실도 제법 되었을 듯. 이후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백제가 승승장구할 때까지 백제 수군은 없다시피 하였다.

왕건의 첫째 부인이 수군이 주둔했던 정주 출신 류씨고, 둘째 부인이 나주 출신 오씨라는 걸 생각하면 왕건 스스로에게 이 작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느낄 수 있다. 여러모로 후삼국시대 중반 최고의 사건.

이후 백제가 승승장구할 때 나주를 재점령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유금필이 재탈환한 이후 견훤이 고려로 망명할 때 나주를 이용해서 탈출할 수 있었다. 정말 여러모로 나주는 고려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것. 고려에서 국가에서 주관하는 산신제를 지내는 사당 5곳이 있는 산은 고려 수도 개성 송악산과 나주 금성산뿐이였다.

여담으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그 시작부터 자세히 묘사하며 왕건의 전략전술을 보여주며 그가 궁예 치하에서 어떻게 잘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로 내세운다.[9] 한편 나주는 이성계의 동북면처럼 왕건의 영지가 되어 궁예에게 의심 등 압박을 받을 때마다 백제의 위협을 핑계로 나주로 향하는 걸로 묘사된다.

3.1. 나주 정벌이 가능했던 이유

이러한 월경지 정복을 이룰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왕건의 출중한 능력 이외에도 여타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후백제는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를 기반으로 코 앞인 무주(광주)를 점령해 세워진 나라인데 이후 도읍이 완산주(전주)로 옮겨가면서 중심지에서 멀어진 나주 호족들의 박탈감이 심해졌다. 또한 전남 동부 호족(순천의 박영규와 김총, 광주의 지훤 등으로 일부는 견훤과 인척이 된다.)들과 이해관계가 더 가까운 견훤에 반감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10] 그리고 후백제의 왕 견훤이 901년에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대야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 견훤은 신라 본토로 들어가기를 단념하고 군사를 돌려 금성(훗날의 지명은 나주) 남쪽으로 옮겨 연해변의 부락을 습격해 약탈하고 돌아왔는데 아직은 나주 일대가 후백제의 세력권이 아니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상실해 후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 듯하다. 그러나 '약탈'이라는 표현을 봤을 때 매우 거친 처우가 있었을테고 나주 일대 호족들은 본격적으로 견훤을 적대하기 시작했다.[11]

학계 일각에서는 왕건의 집안이 경기만 일대의 고구려계 해양 호족인 점으로 볼 때 영산강 일대 해양 호족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당시 서남해 일대는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중심지인 청해진의 근거지일 정도로 해상세력이 융성했던 지역이다. 이후에도 왕건은 2대 혜종을 낳은 장화왕후의 고장인 나주에 특별기구인 나주도대행대를 설치하고 시중(국무총리급)을 파견할 정도로 중시했으며, 현종은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하던 국제행사인 팔관회를 나주에서도 개최하게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대결 구도가 확립되기 이전 목지국이 마한의 맹주였을 시절부터 진행되던 전남 서부 VS 전남 동부 & 남해안과의 대립과 갈등 양상이 정확히 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원삼국-삼국 시대의 대립은 백제의 협박과 회유를 통해 해소되었지만, 후삼국 시기에 이르러 견훤과 왕건을 끌어들인 군사적 대립으로 촉발된 것이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호남 지역이 6세기 중엽까지도 백제의 통치력이 닿지 않는, 독자세력으로 존재했다는 인식인데 이는 내막을 보면 꽤나 잘못된 인식이다.[12][13]

우선 백제는 한번도 마한과 별개로 존속한 적이 없았다. 마한이 하나의 국가도 아니고,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것도 아니다. 전기 마한을 주도했던 목지국이 멸망하고 마한의 한 소국으로 시작한 백제가 후기 마한의 영도국이 되었을 뿐이다.[14] 호남 역시 삼국 통일 이전까지 단일 세력권이 자리잡은 적이 없었고, 늘 별개의 고고학적 세력이 서로 견제하며 존재했음을 모르는 나머지 생긴 편견이다. 따라서 호남 전체가 백제와 마한으로서 늘 항쟁했다는 건 심각하게 잘못 알려진 설이다.[15] 다만 마한 지역이 넓고, 백제가 고구려와도 쟁패해야 했으니 통합이 늦어지다 직접 지배로 편재해서 지배한 게 전남 동부 및 남해안은 150년 정도, 전남 서부는 120년인데, 직접 지배 시기만 영역이었다고 해석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인데다 직접 지배 시기도 120~150년이면 결코 짧지 않다.

이 지역은 한성백제가 처참하게 무너진 시기에 잠깐 다른 길을 찾아보면서 신라, 가야, 왜 등과 제휴했지만 이런 외도는 불과 20~30년을 넘기지 못했고 그동안에도 백제에게 군사적 도전이나 대결을 시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같은 시기에 가야는 거꾸로 백제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 하면서 신라를 견제했으니, 애초에 영산강 세력의 외도는 성공할리가 없었다.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제된 것도 어디까지나 백제와의 적절한 타협과 회유로 이루어져서[16][17], 그 시대 이후로도 전남 서부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퇴락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통합 과정에서 예전의 부하 나라 백제국에게 격렬히 저항한 천안 목지국 세력이 백제의 적극적 견제를 받아 크게 쇠락해버린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의미가 큰 차이였다.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오히려 주로 충청도 동부에서 백제에게 저항하다 그 주도력을 잃어버린 채 백제에 의한 인위적인 세력 개편이 의심되는 양상이 고고학적으로 꽤 관찰되는 양상이다. 목지국의 저항이 생각보다 만만찮았던 반증이다. 반면 영산강 일대는 근초고왕 시기로 추정되는 때에 영산강에서 가장 강했던 소국이 완전 해체되어 타멸되어버린 후론 그런 모습이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그러다 삼국 통일 이후에 이러한 구도에 큰 변화가 생기는데, 통일신라가 전남 동부와 남해안에 의도적으로 원신라인들을 대거 사민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백제가 영산강 유역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키운 거점인 무진주, 호남 동부 내륙 세력이 크게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 호남 동부 세력은 영산강 세력과 대립 관계에 들어가 후삼국 시기까지 이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호남 동부를 중심으로 백제를 재건하겠다는 신라 군인 견훤의 주장이 영산강 세력에게 전혀 먹히지 않은 건 당연했다.

후기 백제의 중심지였던 충청도와 후기 백제의 제2수도권이었던 전주-익산 지역이 견훤의 손을 들어주고 지지를 보낸 점을 감안하면 견훤의 명분 자체가 약했던 건 아니지만,[18] 호남 동부와 오랜 대립관계였던 영산강 세력이 보기엔 전혀 매력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영산강 세력은 마진-태봉-고려의 해상 세력과 제휴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더군다나 서해안 지역, 특히 전남 해안 일대는 과거 청해진이 위치할 정도로 동아시아 물류의 거점으로도 통했는데 이들이 쥐고 있는 막강한 경제력을 감안하면 제휴하면 했지 굳이 누구를 왕으로 모실 필요성이 없었을 수 있다.

이점은 929년 견훤이 나주를 탈환한 뒤에 보여준 태도에서도 엿보이는데 그는 매곡성주 공직이 투항하자 공직의 아들딸을 붙잡아 불구로 만드는 등 투항자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성격이 결코 아니었음에도 오다련, 최흔 등 왕건에 협력한 지방세력의 잔당에 해코지한 정황은 없다. 후삼국 시대 지방세력들의 잦은 줄타기를 감안하더라도 견훤과 이들 사이에 수직적 주종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이처럼 나주공방전은 원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온갖 정치공학적 방정식이 응집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의 묘사

후삼국시대를 다룬 대표적인 사극인 태조 왕건에서 몇 차례에 걸쳐 나왔다.


4.1. 제1차 나주 공방전

지금의 나주시 일대는 당시에는 '금성(錦城)'이라고 불리면서 무진주 내 군사적 요충지인 '미다부리정'이 있었는데, 드라마 초반 각간 위홍의 죽음으로 그 휘하 부장으로 있던 견훤이 이 곳의 책임자로 불리면서 당시 해적 출신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수달[19]과 종례, 오다련 등을 포섭하고 인심을 얻어 무진주(광주)를 거쳐 완산주(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열었다.

그러나 이후 처음의 본 뜻을 잃고, 완산주 궁궐 공사나 건국 이후 전쟁 준비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금성을 비롯한 서남해 지역의 호족들에게 강요하면서 지역 호족들은 견훤 정권과 그에게 포섭되어 수족으로 일하는 수달(능창)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던 중, 순행 이후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던 고려는 당시 조금씩 명성을 얻고 있던 청년 장군 왕건으로 하여금 이 일대를 평정하려는 비밀 작전을 기획한다. 왕건은 그의 집안 사람들은 물론 집안 대대로 교류를 가졌던 송악 인근 정주의 대호족 유천궁, 순행에서 만났던 금강 주변의 전의성주 이치[20]와 함께 이 작전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금성 인근 목포의 대 호족인 오다련의 딸 오도영의 도움[21]으로 오다련과 종례를 포섭하는 데 성공하고 기습 상륙에 성공하고 금성과 그 주변을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전령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궁예는 기뻐하면서 '금성'이란 이름은 신라가 지어준 이름이니 '나주(羅州)'를 정벌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나주'라는 새 이름을 지어 보냈고, 동시에 왕건과 고려군을 가장 많이 도와줬던 오다련과 종례에게 나주를 본관으로 한 성씨를 하사하고 왕건은 오다련의 딸 도영과 혼인을 하게 한다. 그리고 나주는 같이 종군했던 장수 김언과 종회[22]가 태수로 부임한 오대련과 함께 맡기고 다른 이들은 송악으로 돌아갔다. 이때가 904년의 일이다.

4.2. 제2차 나주 공방전

이후 후고구려가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꾸고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혼란을 거듭하고 이 와중에 낙동강 부근으로 진출했다가 왕건에게 덜미가 잡힌 후백제는 금성[23]을 탈환하기 위해서 많은 군대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압해도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왕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진은 내부 혼란의 와중에서도 어렵게 얻은 전선을 잃지 않기 위해 상주 전투에서 돌아온 왕건을 다시 나주로 보내 치르도록 했다.

왕건을 비롯한 마진군은 후백제군보다 열세에다가 날씨조차 도와주지 못한 상황에서 이무렵 왕건의 책사로 일하던 태평의 계략대로 남동풍을 이용한 화공에 의해 기다리고 잇던 견훤의 대함대를 무찔렸다.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육지에 도착해 겨우 도망쳤는데, 이와중에 능산의 기습으로 인해 맹장 방희가 전사하고 수달은 사로잡혔다. 사로잡힌 수달은 식음을 전폐하고 이듬해 마진의 수도 철원으로 끌려가 모욕을 받고 자신에게 절을 하면 살려주겠다는 궁예의 현혹을 뿌리치고 스스로 장작 더미로 들어가 불타 죽는다. 그의 최후를 전령을 통해 접한 견훤은 분노해 최승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금성산성에서 몇 차례 공성전과 여러 지상전을 감행했지만 마진군의 완강한 방어 태세로 낭패만 본 후 철군했다.[24] 이때가 909년에서 910년의 일이다.

4.3. 이후

나레이션에 따르면, '왕건과 견훤은 이 나주를 두고 여러번 싸웠으나, 견훤이 1번 이긴 것을 제외하면 왕건이 모두 이겼다.'라고 언급했으며, 2차 나주 공방전 이후 양 군은 소강상태에 머물면서 군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왕건은 이후 며칠 더 나주에 머무르다가 철원으로 올라가 시중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점점 넓히게 되었으나 종간과 궁예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나주로 내려가 머물기도 하였다.

그리고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의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건국하고 나서, 역사상으로는 공산 전투 이후 2년 뒤 후백제가 일시적으로 나주를 빼앗으나 극에서는 그런 모습은 안 나오며, 그 후 한동안 잊혀졌다가 신검의 반란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아끼던 아들 금강까지 잃은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해서 고려로 망명할 때 이곳 나주를 거쳐간다.

견훤을 호송한 박영규의 심복들은 나주로 개명된 줄 몰랐던 견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며 백제인들도 어느 틈에 금성을 나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알려주며[25], 이때까지 고령으로 살아있던 오다련과 나주 태수[26]의 배웅을 받자 오다련과 많은 인연이 있었다면서 과거 군관으로 들어온 옛날을 회상한다. 이후 상귀의 백제 함대가 견훤을 태운 유금필의 고려 함대를 막자 견훤이 직접 호통을 치며 백제 함대들이 스스로 길을 비키게 만드는 위엄을 과시하며 일리천 전투의 결과를 암시하게 된다.
[1]전라남도 나주시[2] 삼국지를 자주 오마주했던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이 전투에 참가했던 태평을 학창의에 부채를 들은 제갈량으로 묘사하기도 했다.[3] 태조 왕건에서도 거의 본명으로 안 나오지만 본명은 능창이다.[4] 선각대사비에 나오는 대왕의 해석에 따라 궁예가 직접 친정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5] 나주를 통하여 남해, 진주를 거치는 수로를 이용했다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개성에서 육로를 통해 경남 합천으로 대규모 부대를 보내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충북 보은, 영동 일대는 주로 후백제의 세력권이었다. 해당 지역들은 주로 후백제가 경북 방향으로 진출하는 루트였다.[6] 구체적인 전투 기록은 없다. 다만 고려사 열전 유금필전에 서기 935년에 해당하는 해에 왕건이 6년 전에 후백제에 나주를 잃었다는 기사가 있어 역산하면 929년에 후백제가 나주를 탈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7] 박수경이 사력을 다 하며 왕건을 구출한다.[8] 고려사에서는 명백하게 '유금필이 나주에 이르러 경략하고 돌아왔다(黔弼至羅州, 經略而還)'라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나주 경략 이후 왕건이 예성강으로 몸소 행차하여 유금필을 크게 맞이하고, 또 견훤이 나주로 탈출해오는 정황을 보면 이때 고려가 명백히 나주를 탈환했다 보아야 한다.[9] 아예 이 작전을 위해 왕건을 잠시 파직시키며 백제의 내부에 고려의 깃발을 세운다는 게 크게 묘사된다.[10] 다만 이 대목에서 영산강 유역 호족이 고대부터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견훤이 해적을 일본으로 보냈다 운운은 잘못된 해석이다. 오히려 후백제 같이 강력한 정권이 들어서면 해적질을 일삼던 부류들은 중앙의 긴밀한 감시, 견제, 병력 동원을 당하기에 일본으로의 해적질 원정은 나가지 못하게 되며, 영산강 유역 호족이 커넥션이 있던 일본의 실체란 건 야마토 중앙정권이 아니라 큐슈 호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영산강 일대가 자치권을 완전 박탈당한 게 이미 5세기 말 경이었고 그 이후에 행하는 교역이란 건 철저히 백제 왕실의 감독과 이득을 위해 이뤄졌기에 영산강 일대가 일본과 다른 어떤 국가적 친밀도가 있었을 개연성은 거의 없다. 10세기 일본이 후백제를 돕지 않은 건 일본 천황 가문의 상황이 몹시 어려워 한가하게 후백제를 도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11] 훗날 견훤은 이를 상회하는 실수를 다시 한번 저지르고 말았는데 신라가 고려와의 연합으로 압박하여 후백제가 위험에 처하자 견훤은 나라의 존망을 건 도박으로 927년에 서라벌 기습을 실시하여 신라의 왕인 경애왕을 자살을 빙자한 방법으로 반강제적으로 시해하고 이어진 공산 전투에서 고려에게 승리를 거둬 신라를 속국화 및 경상도의 신라 호족들을 강제적으로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동시에 신라 호족들에게 원한을 사고 말았고 결국 930년에 벌어진 고창 전투에서 신라 호족들의 배신으로 고려에게 대패를 하여 상주 일대 및 신라 호족들의 세력권을 고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12] 이런 주장은 21세기 들어 전남쪽 지자체에서 은근슬쩍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지자체들이 옛 왕조를 내세워 현 시대에 자기 지역이 가진 권위를 강조하고, 행정구역 재편이나 사업 유치 등에 이익을 도모하는 일은 20세기부터 흔했고, 21세기 들어 향토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더해졌다. 역사학자들은 옛 역사를 지금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치인과 대중들은 지금 지도 보면서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하여튼 그런 상황에서 경주는 천년 내내 신라 수도라서 이의 제기할 구석도 없고, 가야 제국들이 위치한 곳은 금관국(김해), 반파국(고령), 다라국(합천), 안라국(함안), 고자국(고성) 등 각 구성국 소재지에서 부각시키며 역사상의 권위와 지역 부흥 컨텐츠를 확보하고자 한다. 고구려, 고려는 수도가 이북에 있어 논외. 문제는 백제인데 최초 중심지였던 서울은 중세~근대 조선 500년 도읍으로서 가지는 위상이 워낙 커 고대 백제 위례성의 그것을 압도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한성백제가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도 상당할 정도로 큰 관심이 없다.[13] 결국 충청과 전라의 대결인데 20세기에는 전라도=백제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후기 백제 수도 2곳(공주, 부여)이 모두 충청도에 위치해 있는데다(정확하겐 충남충북 지못미) 무령왕릉 등 백제의 기억을 강조할 유적, 유물이 풍부한 충청도가 공주-부여를 내세워 2010년대 이후 백제 종주권에서 앞서가기 시작했다. 전북 또한 아쉬울건 없는게 백제로 따져도 백제 제2수도 기능을 한 익산이나 견훤이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삼은 점을 강조해 충청도에 비벼볼 여지가 있고, 그 외에도 백제를 대신할만한 역사적 상징을 이미 가지고 있다. 고고학적 성과로 고조선과도 연결되는 익산시 일대 건마국이 재조명된데다, 특히 한국에서 2번째로 많은 성씨이자 조선의 국성이었던 전주 이씨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가장 자신있게 내세우는 관광지 역시 후백제 유적이 아니라 조선 가옥을 재현한 전주한옥마을이고, 이런 전주한옥마을에 정통성을 더해주는 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이다. 전주의 역사문화벨트도 경기전 중심으로 묶여있다. 허나 전남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백제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선 백제를 대신할, 백제보다 더 오래된 권위를 발굴해야 했고 그게 마한이란 것. 2010년대 마한 문화제 등을 개최하다가 2020년 5월 국회 통과한 역사문화특별법에 영산강 유역을 마한역사문화권으로 포함시켜 나주시 중심으로 대대적인 발굴사업과 학술조사에 들어갔다.[14] 외국 역사로 따지면 목지국에 에트루리아, 백제에 로마, 마한에 라틴 연합 내지는 라틴ㆍ이탈리아계 도시국가들을 대입하면 얼추 맞아떨어진다. 로마가 라틴 연합과 국가 대 국가로 맞서싸운 적이 없었고, 유이민과 토착민이 융합하여 반도의 중부 요지에 자리잡고 나서는 그 일대의 기존 맹주에 일단은 숙이고 지내다가 힘을 길러 마침내 타도하고 새로운 맹주가 되어 영향권을 넓히다가 마침내 영토국가가 된 것.[15]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 신공(神功)49年, 왜가 한반도를 정벌했다는 기록에서 물론 기록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크고, 신공황후(神功皇后) 실존 여부 자체가 논란이므로 신공49년에 대한 시기도 의문이지만 아무튼 여기서 왜가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록에서 비록 추측이기는 하지만 신공(神功)49년을 서기369년으로 해석하고, 왜를 백제로 바꾸어 해석해서 서기369년 백제왕이면 즉 근초고왕이 전라남도 해남에 비정되는 침미다례를 '도륙' 했다는 묘사는, 여전히 백제의 주도적 위치에 동의하지 않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주도 소국을 무력으로 완전 해체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그 시기에 해남 신월리에서 번영하던 마한 소국이 갑자기 증발하는 걸로 나타난다. 실제로 고고학적으로도 4세기 중후반 경부터 영산강 유역에서 어떤 주도적인 세력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주도한 바 없이 백제의 일정한 견제를 받아 성장이 저해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성 함락 이후에야 이 속박이 약간 풀리지만 오래가진 못했다.[16] 5세기 말~6세기 초부터 이 지역 분묘는 그 규모가 크게 줄긴 했어도, 직접 지배로 편제되었다고 추정되는 시기 즈음부터 오히려 백제 중앙 조정에서 하사한 위신재가 더욱 많이 발굴되는 상황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금동관은 백제가 영산강 유역 세력과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는 강력한 반증이 아니다. 주로 강력한 직접 지배 관계 관철이나, 금동관까진 줄 필요가 없는 군소 세력에게 주는 위신재로 드러나는 칼이 아니라고 해서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는 해석은 근거가 없다. 물론 칼에 비해선 해당 세력의 수장이 세력이 만만찮아 다소 협력 관계가 두드러질 수 있다고 쳐도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 발견되는 금동관은 큐슈나 진한 일대 같은 무역로상 호족들에게 주는 선물과는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위신재 금동관이 상하 관계가 아니라는 설은 다름아닌 웅진백제의 수도가 될 정도로 백제 왕실과 관계가 깊었던 공주 수촌리 세력이 한성백제 시절에도 금동관을 사여받은 사실, 그리고 백제국이 마한의 원수장국이었던 익산 건마국을 해체하기 위해 준왕 계열의 잔여 세력인 입점리, 웅포리 세력들에게 금동관을 사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제는 논파된 지 오래인 설이다.[17] 금동관 하사는 백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증거일 뿐 그것이 곧 영산강 세력의 독자성을 뜻하진 않는다. 그렇게 독자성이 강했다면 영산강 세력이 적어도 전남 동부 진출에서 가야보다도 심한 제약을 백제에게 당하게 되는 견제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백제와의 관계에 따라 널을 뛰면서 백제와 척을 지면 어김없이 쇠락을 면치 못했던 침미다례 주도 세력들(해남 군곡리, 해남 신월리, 영암 시종면, 나주 반남면, 나주 복암리)의 부침도 마찬가지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되는 금동관들은 백제 금동관과 제작기법이나 형식면에서 차이가 커서 하사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들도 있으나, 이는 한성 공함 직후 예외적인 상황을 반영함에 불과하다.[18] 그렇다고 쉽게 되지도 않았다. 견훤의 거병 시기에 대한 학설은 889년과 892년으로 나뉘는데 삼국사절요, 징효대사탑비 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889년 내지는 892년에 거병한 견훤이 전남과 전북을 아우르고 전주에 입성한건 900년이 되어서였다.[19] 본명은 능창이라고 하나, 물에 능통해 '수달(水達)'이라고 불렸다. 극에서도 본명보다는 '수달'이라는 별명으로 자주 부른다.[20] 드라마 후반에 다시 등장해 운주성 전투에서 유금필과 함께 공을 세우고 전의 이씨의 시조로 봉해지면서 왕건으로부터 '이도(李棹)'라는 이름을 받는다.[21] 왕건은 이치와 사촌 동생인 왕식렴, 무예 사부인 변사부로 하여금 백계산 옥룡사를 통해 나주의 오다련을 포섭하려고 했지만, 처음에 오대련은 당황하면서 이들을 별채에 가두었다. 하지만, 이후 알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이들의 목적을 눈치챈 딸 도영의 설득으로 마음을 다잡고, 수달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태수 종례와 함께 왕건 측에 내응하기로 했다.[22] 이 전투 이후 몇 번 나오다가 소리소문없이 하차했다.[23] 후백제는 '나주'라는 이름 대신 예전 명칭인 금성을 그대로 불렸다. 견훤 본인은 드라마 후반까지 '금성'이라고 줄곳 불렸다. 금산사에서 탈출해 나주로 올 때까지.[24] 당시 왕건은 전공을 세운 태평과 능산, 포로인 수달과 함께 철원으로 올라갔으며, 금성에는 현지 도독 김언과 홍유, 배현경, 염상이 금성산성에서 견훤군을 어렵게 막고 있었다. 이후 상주에 있던 유금필과 부장으로 있던 윤신달, 전이갑과 함께 나주로 왔으며, 왕건이 다시 돌아오면서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다.[25] 다시 말하면 후백제인들도 어느덧 적국에서 마음대로 붙인 이름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니,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완전히 고려에게 넘어갔음을. 적어도 나주는 이제 확실히 고려의 영토가 되었음을 상기시키는 장치로 볼 수도 있다.[26] 종례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배우가 종례를 맡았던 서상익일 뿐 자막에는 "나주 태수" 라고만 되어 있을 뿐이다. 오다련과 나종례는 서로 존대하는 관계였는데, 오다련이 이 "나주 태수" 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말을 낮추지 않는다 뿐이지 아랫사람 대하듯 한다. 결정적으로 견훤으로서는 오다련보다 나종례를 훨씬 먼저 만났던 만큼(극중의 종례는 맨 처음에 수달의 조언자 겸 동지 같은 위치였으며, 극에서 오다련을 견훤에게 소개하는 인물도 나종례다), 종례가 맞다면 나주를 떠나는 견훤이 오다련만 집어서 언급하는 것도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