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7:32:39

낙태죄/존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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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쟁점
2.1.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의 대립
2.1.1. 존치론2.1.2. 폐지론
2.2. 경제적 사정에 의한 낙태
2.2.1. 존치론2.2.2. 폐지론
2.3. 산모가 위독한 경우2.4. 낙태 음성화
2.4.1. 존치론2.4.2. 폐지론
2.5. 여성에게만 독박 씌우는 처벌?
2.5.1. 존치론2.5.2. 폐지론
2.6. 피임했음에도 임신한 경우
2.6.1. 존치론2.6.2. 폐지론
2.7. 낙태에 따른 여성에게 미치는 부작용
2.7.1. 존치론2.7.2. 폐지론
2.8. 특정 성별만 낳고 싶은 경우
2.8.1. 존치론2.8.2. 폐지론
2.9. 산모가 미성년자인 경우
2.9.1. 존치론2.9.2. 폐지론
2.10. 태아가 기형아, 유전적 이상이 있는 경우
2.10.1. 존치론2.10.2. 폐지론
2.11. 특별한 사유없이 낙태하려는 경우(낙태 자유주의)
2.11.1. 존치론2.11.2. 폐지론
2.12.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
2.12.1. 낙태 반대론2.12.2. 낙태 허용론2.12.3. 기타
2.13. 강간에 의한 경우
2.13.1. 국내2.13.2. 국외
3. 낙태 금지론과 반박
3.1. 그 어떤 수단으로도 살인은 허용할 수 없다3.2. 생명경시 풍조3.3. 낙태가 안 되면 피임을 하고, 피임이 불안하면 안 하면 되지3.4. 본인의 행동에 책임져야3.5. 기타 논란 거리3.6. 낙태허용이 정말로 여성인권을 위한 길인가?3.7. 반박
4. 낙태 허용론과 반박
4.1. 자기결정권의 우선4.2. 사회적 편견 및 불합리4.3. 남성책임론의 한계4.4. 임신부와 태아는 별도의 생명체4.5. 낙태 금지가 정말 아이를 위한 길일까?4.6. 반박
5. 결론
5.1.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5.2. 21대 국회의 입법부작위로 인한 2021년 낙태죄 조항 효력 상실

1. 개요

낙태죄 폐지론과 유지론의 논지를 정리해놓은 문서.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낙태죄 존폐 논란'과 '낙태 허용 여부 논란'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낙태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지 여부와 낙태죄가 법리에 맞는지 여부는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낙태에 대해 찬성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허용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찬성이라는 단어가 갖는 어감 때문일 것이다. 찬성은 적극적으로 권장할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데, 애초에 피임하는 것이 맞지만 이미 임신해버린 이상 낙태를 강제로 막는 것은 안 된다는 주장이 다수이다. 피임이 쉬워진 현대 사회에서 굳이 임신한 후 낙태를 하라고 권장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진다.[1]

반면, 낙태를 비도덕적 죄악으로 취급하는 시각이 있는데, (특히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그렇다. 또한 출생주의와도 연관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상극일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의 대립'항의 폐지론 등을 참조.

보통 낙태죄에 대한 논의는 일정 기간 성장한 후의 태아의 경우를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정 기한 전에는 다른 선제 조건(강간, 근친, 유전질환, 장애 등)을 따지지 않는 낙태의 자유 자체에 대한 인정 여부를 다룬다. 2022년 폐지되어 미국을 떠들석하게 만든 Roe v. Wade 판결에서는 출산예정일로부터 3개월 전까지의 태아는 모체 밖으로 나와도 생존 가능한 인간으로 판단되기에 태아가 모체에 종속된 나머지 시기 태아에 대한 논의와 분리되며, 모체에 종속된 시기의 태아 낙태 허용에 대한 논의는 조건이 붙지 않는다.위키백과(영문)

2. 쟁점

논쟁에 앞서 주지해야 할 점이 있다. 생명과 인간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세포는 생명이지만 세포가 곧 인간은 아니다. 태아는 생명임이 분명하지만, 인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그 정의가 불분명하고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생명권 역시 반드시 인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동식물 같은 생명체나 극단적으로는 암세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태아는 낙태하지 않으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잠정적 존재라는 점에서 생명권이 부여되고, 낙태죄도 이에 기반한다. 즉, 인간이 될 수 있는 '생명'임은 확실하나 아직 '인간'은 아니라는 전제가 이미 낙태죄의 성립에서부터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낙태죄는 살인죄에 포함되지 않으며 태아가 인구 통계에 포함되거나 사산아가 사망 신고 대상에 포함되지는 않는 것이다.

낙태죄에서 생명의 정의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낙태는 생명이 있는 태아를 제거하는 행위를 말한다. 생명이 없는 존재를 없애는 행위는 낙태가 아닌 피임으로 정의되며 이는 애초에 낙태죄의 존폐를 다룰 때 고려되지 않는 사항이다. 언제부터 생명인가의 문제는 사안이 피임이냐 낙태냐를 다룰 때 고려되어야 하는 부분이며, 이미 생명이 있다는 전제에서 진행되는 낙태죄에 대한 논의에서는 무용하다.

생명의 기준을 정하려는 시도는 임신부의 의사와 관계없이 타자가 태아를 합법적으로 제거하는 논리로 악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는 120일 이전의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120일 이전의 임신 중절은 낙태가 아닌 피임 행위로 정의된다. 이때 태아에게는 생명권이 없기 때문에 타인이 임신부의 의사를 무시하고 태아를 강제로 임신 중절시키더라도 피해 여성은 이를 부동의 낙태죄(낙태죄와 달리 부동의 낙태죄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없다)로 고소할 수 없게 되어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한다.

낙태죄 존폐 논란에서 핵심 쟁점은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의 다툼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문서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낙태죄가 합헌인 시점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장들이 찬반을 논함에 있어서 생명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결정권에 앞선다는 전제 하에 쓰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쓰인 서술은 낙태죄 폐지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이에 반대되는 관점도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 정보를 얻으려는 때에는 해당 내용이 현재 시점에서도 유효한가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2.1.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의 대립

2.1.1. 존치론

아래 폐지론에서는 번식 목적 외의 성행위는 모두 처벌받는다고 하였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만약 번식 외의 목적으로 성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임신하지 않았다면 그 때에도 처벌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뿐만 아니라 번식 외의 목적으로 성행위를 하였으나 임신을 하고 잘 출산해서 태아를 죽이지 않는다면 처벌하지 않는다. 따라서 목적이 아니라 행위라는 결과에 대해서 처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폐지론에서는 피임이 불안하면 안 하면 된다는 논리가 부적절하다고 비판하였으나, 그 논리야말로 잘못된 논리이다. 목적이 무엇이었든 낙태를 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고, 낙태를 하면 처벌하는 것이다.
번식 목적 외의 성행위 → 임신→ 출산 → 처벌 x
번식 목적 외의 성행위 → 임신→ 낙태 → 처벌 o
존치론에서는 위와 같이 성행위의 목적이 번식이 아니었어도, 낙태를 하지 않으면 전혀 처벌하지 않고, 낙태를 하면 처벌하자는 논리를 주장하는 중이다. 그런데 폐지론에서는 전혀 엉뚱하게도 '번식 목적 외의 성행위=낙태'라는 말도 안 되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생명권을 선택의 자유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이며, 그렇기에 공민들의 선택할 자유[2]일부 제약해서라도 공민들에게 경찰 및 사회보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종교 등의 주관적인 신념을 배제하고 생각하더라도 생명은 한없이 존엄한 것이며 이보다 우선될 것은 없다.

2.1.2. 폐지론

낙태죄가 존재하면서도 원천적인 피임 수단을 활용하지 않은채 이루어지는 번식 목적 외의 모든 성행위를 허용하는 사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피임 방법은 여성이 임신 할 확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이 아니더라도 임신을 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이때 분명히 그들은 번식 목적으로 성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개인은 낙태죄에 의해 출산이 강제되게 된다. 다른 목적의 성행위를 허용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 선택이 침해되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낙태죄가 있는 나라에서 모든 성관계는 번식의 목적을 위한 것으로 강제되며 피임에 성공한 경우는 양육의 의무를 운좋게 피한 것일 뿐인 상태가 된다. 이렇게 명백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함에도 국가가 낙태만 안하면 된다는 식의 입장을 가지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결과론적인 운에 맡기는 것으로서 명백하게 국가가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이며 국가는 개인을 위해 확실한 입장을 정할 의무가 있다.

이때 낙태죄를 인정한다면 국가의 논리란 낙태에서 거슬러올라 번식 외의 목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성행위가 잘못된 행동으로 정의되고 지양될 때에 완성됨을 알 수 있다. 번식 외 목적의 성행위가 필연적으로 낙태를 수반할 수 밖에 없는 현대 사회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번식 외 목적의 성행위부터 낙태 전까지의 모든 과정이 잠재적인 범죄에 해당해야한다. 그리고 국가는 그 이후 가장 직접적으로 생명을 제거하는 낙태죄를 일단 처벌하는 것이 낙태죄를 유지하는 나라의 상황인 것이다(이때 당연히 낙태와 성관계의 경중은 동일하지 않다.). 생명의 보호를 중시하는 낙태 금지론의 입장에서는 아래 금지론에 적힌 피임이 불안하면 안하면 되지 같은 논리도 부적절한 논리인데,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가 기본적으로 번식 목적 외의 성행위를 막았어야 하는 것이지 일단 번식 외의 성행위를 그런식으로 방치하면서 낙태만 금지하는 것은 생명권을 지킬 더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것이 된다. 예컨데 유소년에게 성교육을 할 때 혼전순결 외의 다른 성관계는 잘못된 성관계라고 알리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는 존치론에서 말하는 처벌 같은 극단적인 조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교육 의료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의 전반적인 활동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낙태를 금지하는 대다수의 국가는 종교적 권능이나 실증법으로서 번식 목적 외의 성행위를 제약한다. 대부분의 독실한 기독교권 국가는 정교분리가 이루어져 성관계 단계에서는 만회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실증법으로 처벌까지 하지는 않지만 십계명의 간음하지 말라는 규율로서 신의 벌이라는 종교적 권능으로 이를 대체한다. 그러니까 번식 목적 외의 성행위를 한 것 자체는 나중에 태아가 생겨도 양육하는 하는 방식으로 만회할 수 있으니 실정법으로 처벌하진 못하지만 남녀는 이미 대죄를 쌓은 것이고, 이후 감당까지 못한다면 그때는 실증법을 더해서 처벌을 하는 식으로 본 것이다.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샤리아에 의해 정말로 성행위 시점부터 직접적으로 처벌하는 방식으로 이를 제약한다. 전세계적으로도 낙태죄 존치를 원하면서도 번식 외 목적의 성관계를 자유로운 행위라고 주장하는 집단은 굉장히 드물며 한국에서 자주 보이는 이러한 주장은 굉장히 특이한 주장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성관계에 사생활 혹은 자기결정권의 자유가 있다고 보면서도 낙태죄를 유지하는 국가에서 낙태죄는 사회적 갈등이 된다. 낙태죄의 존폐란 궁극적으로 이러한 두 권리의 충돌이며, 국가가 처벌의 시점을 낙태한 때로 잡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총체적인 자기결정권을 보유하게되는 해당 여성을 통해 두 권리가 충돌하는 것이다.

낙태 문제에 있어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대립이 존재하는데, 언뜻 보면 '생명권'이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결코 태아의 '생명권'을 이기지 못한다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의 상식도 그렇지만 특히 법률상으로 '태아'는 엄연히 '사람'과 구별되며 낮은 권리를 갖는 것이 현실이다. 왜 '낙태죄'가 '살인죄'와 별도로 존재하며, 형량이 대체로 낮은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태아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과 달리 '비교형량할 수 있는 법익'이라는 법률적 견해와[3], "태아의 생명은 인간의 생명과 동일 수준에서 볼 수 없음은 물론일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는 출생시키지 않음이 출생시키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때가 있다."는 견해[4] 또한 존재하며, 헌법재판소의 판결 또한 "동일한 생명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동일한 법적 효과를 부여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생명의 발전과정은 일정한 단계들로 구분되고 각각 다른 법적 효과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5] 따라서 태아의 생명권이라도 여성의 자기결정권보다 항상 무조건적으로 우선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낙태죄로 인해 낙태되지 않은 태아가 태어나면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하거나 다른 가족들보다 좋지 못한 대우를 받거나 가난 같은 좋지 못한 집안 사정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좋지 못한 대접을 받느니 차라리 빨리 생명을 마감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지적이 존재한다. 반출생주의와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낙태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하고, 그 이유들은 아래에 서술되어 있다. 이 이유들은 대부분 태아에게 있어서도 좋지 않은 이유들이다.

2.2. 경제적 사정에 의한 낙태

2.2.1. 존치론

물론 사회경제적인 낙태를 허용하는 나라도 많기는 하다. 하지만 이 나라들도 원칙이 하나 있는데 귀찮아서 낙태하고 나중에 부작용이 생겨도 사회는 그 책임을 질 생각이 전혀 없고, 법적으로는 모른척하지만 도덕적으로 별의별 소리를 들어도, 심지어 낙태 경력이 알려져서 나중에 결혼 취소를 당해도 이는 개인의 전적인 책임으로 국가가 알 바 아니라는 것이다. 허용론자의 주장들을 하나씩 반박해보자면, 미성년자의 임신의 경우 대부분 낙태의 원인은 강간이 아니라 피임을 실수로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실수로 인해 낙태를 하고픈 사람들이 계속 생기는 원인을 생각해보면 그건 성교육의 부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럴 때에는 성교육의 비중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가야지, 낙태를 합법화하는 것은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본인이 성욕을 감당할 자신이 없고 아이를 키울 능력이 안 되면 영구불임술을 택하는 방법도 있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낙태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 갑자기 임신을 하자마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경우가 아닌 한, 자기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임이라는 대비책을 챙기지 않았다는 것은 콘돔, 피임약 등 피임기구의 가격이 싸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격보다는 역시 피임에 대해 충분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낙태허용론자들이 제시하는 문제들 대부분은 성교육의 활성화 및 성관계를 혼전에 왜 하면 안 되는가에 대한 교육만 철저히 이루어진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또한 차별적 시선들도 이런 성교육으로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교육 체계는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이유로 해결에 미온적인 태도를 유지할 경우 이러한 문제는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6]

아래 폐지론에서는 경제적 사정이 갑자기 바뀔 수도 있다고 반박하였으나, 그러한 경우는 극소수다. 실제로 소득, 재산이 거덜나거나 풍비박산나는 경우가 얼마나 된단 말인가. 낙태를 하는 사람 중 그들의 비율이 얼마나 소수인데 그 말도 안 될 정도로 적은 비율로 가능할 수 있으니 다른 모든 낙태하는 사람들도 경제적 사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단 말인가. 더욱이 경제적 형편이 어려우니 태아를 살해해도 되는 것이냐는 원론적인 물음은 끝끝내 교묘히 회피해가고만 있다. 차라리 강간에 의한 경우라면, 자신의 의도가 전혀 없었던 임신이라고 반박할 수 있겠으나 경제적 사정에 의한 것이라면 언제든 또 경제적 상황이 안 좋아지면 태아를 얼마든지 살해하겠다고 공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주장이다.

아래 폐지론에서는 낙태에 대한 논의는 이미 일(임신)이 일어난 이후의 일이라며, 예방 운운 이전에 일단 임신한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할것이냐고 반문하였는데, 그럼 아직 임신하지 않은 사람이 미래에 임신하면 낙태를 허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한다. 비유하자면 살인을 저지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는데 왜 살인을 했냐며 예방교육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는 상황이다. 살인범을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지 말지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살인범을 만들게 된 사회 탓이라고 물타기하며 살인범을 처벌하지 말자고 하면 그 누가 납득하겠는가.

사실 경제적 사정에 의한 낙태는 대부분 (상술한 것처럼 갑자기 집안이 망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미 경제 사정을 알고 있기에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한 것이 많다. 따라서 이 경우는 원치 않은 임신의 존치론 항목을 그대로 옮겨와서 같은 논리로 비판할 수 있다. 자신의 경제적 형편이 어렵고, 키우기가 힘들다는 점이 태아를 살해하여도 좋다는 권리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또한, 일단 출산을 하고 정 본인이 키울 자신이 없다면 입양을 보내거나 고아원에 보내는 방법도 있는데 죄 없는 태아를 죽일 생각을 한다면 이는 본인만 편하자고 생명을 경시하는 꼴이다.

2.2.2. 폐지론

형법학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낙태가 이루어지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경제적 사정 때문인데 현행법이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한다. 실제로 통계에 따르면 미혼 여성의 낙태 비율보다 기혼 여성이 경제적 사정을 이유로 낙태하는 경우가 더 많다. 2011년 기준 한국에서 아이를 낳아 대학까지 졸업시키려면 자녀 1명당 2억 6천만 원 정도가 든다. 취업 문제로 교육열이 해가 갈수록 더 높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돈이 필요한 형국이며 대학 등록비 또한 만만치 않다. 자기 집안의 경제사정은 이미 알고 있지 않냐는 반문도 잘못되었다. 갑작스러운 경제 상황의 변동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를테면 미혼모의 경우 직장이 있었더라도 직장의 유지가 거의 불가능하고, 대부분의 경우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여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게 된다.

무엇보다 "피임을 왜 안 했냐" 라는 것은 지극히 결과론적인 얘기다. 과거에 일어난 잘못을 가지고 현재에 와서 이러이러한 피임법이 있다고 구구절절 나열하는 것이 이미 임신한 산모에게 대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피임은 예방이고 낙태는 일이 일어난 이후의 이야기이다.

또한 피임을 했더라도 피임법이 실패할 수도 있고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성교육의 활성화와 성관계 교육만 철저하게 행한다고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교육 만능주의다. 그런 식이면 모든 학교는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데 세상에 범죄가 왜 일어난단 말인가. 올바른 피임법과 성교육은 당연히 이루어지되, 만약 부모가 도저히 경제적으로 아이를 부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경우 그 아이가 그러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올바른가를 논하는 문제이지 "왜 경제사정이 어려운데 피임을 안 했냐, 아무튼 임신했으니 책임져라" 라는 것은 태어날 아이에게도 재앙이다. 그리고 또 '피임을 하지 않았으니 벌로 아이를 낳아라'는 것은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환경에서 아이가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자라지 못하는 아이는 무슨 죄인가? 연좌제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가르친다고 능사가 아닌 것이 피임은 절대적으로 100%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방식을 중복적으로 적용해도 복권 당첨율보다 훨씬 높은 실패율을 나타낸다. 소숫점 다섯자리수 확률의 로또 2등 당첨이 한 주에 많게는 당첨자가 90명까지 나온 적도 있으니, 피임을 성실하게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는 임신으로 생겨버린 아이들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외과수술적 피임은 실패확률의 문제는 거의 없으나 이 또한 공짜가 아니다. 경제적 사정에 의한 낙태를 현행 제도처럼 원천봉쇄하려면 적어도 저소득층과 차상위계층에게 외과수술적 피임시술에 대한 비용지원 정도는 해주든가 해야 정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7][8]

또한 아이를 낳아서 보육원이나 고아원에 보내면 되지 않냐는 의견도 있는데, 보육원이나 고아원에 보낸다 해도 지원이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존치론에서는 일관되게 태아의 권리는 출산 이후의 인간과 모든 면에서 동등하다는 생명권 논거를 들이대는데, 태아가 어떤 의지를 가질 만큼 생명의 조건의 부합하는 지의 논의는 별개로 치더라도[9] 그런 논리대로라면 보육원이나 고아원에 가는 것을 원하는 태아가 있을까? 존치론의 논리를 유지한다면 보육원도 태아의 의지와 맞지 않는 곳이니 성인의 자기결정권을 동등하게 적용하여 부모가 아예 사라진 경우를 제외하면 어떤 유아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까지 보육원에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성립된다. 하지만 애초에 낙태를 결정할 만큼 태아를 출산하고 키우는 데 여력이 없는 부모가 양육을 제대로 할 리가 없다. 이러면 산모와 유아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뿐이고 심하면 출산을 하더라도 전근대처럼 유아가 출산 즉시 유기, 살해되는 최악의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다.

결국 존치론에 따르면 이상적인 것은 아이를 국가가 책임져서 평범한 가정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훌륭한 환경에서 키워내는 것인데, 모순적이게도 이걸 주장하는 존치론자는 아무도 없고 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주장도 아니다. 아무도 출산하기를 원치 않는 태아를 낙태하지 말고 키울 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무 대책없는 타인의 감정적이고 무책임한 도덕적 비난에 불과할 뿐이다.

2.3. 산모가 위독한 경우

산모가 위독한 경우는 현행 형법에서도 낙태를 허용하고 있고, 거의 모든 존치론자들도 이 경우는 수긍하는 편이다. 이 경우는 종교적 입장, 그 중에서도 가톨릭 정도만 제외하면 반대론이 거의 없다. 사실 낙태반대론 자체가 종교빼면 대다수 이성 간의 자유로운 성관계 후 무책임한 낙태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천주교가 국교수준인 국가에서도, 정말 산모가 위독한 경우엔 교황청의 허가로 낙태를 하는 경우도 있긴하다.

산모가 위독할 경우, 더들리와 스티븐스 재판과 유사한 위법성조각사유의 성립 여부의 논쟁이 벌어진다.[10] 대한민국 기준, 비록 태아는 산모의 진통 전까지는 인격체의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지만, 윤리적인 관점에서의 핵심 논쟁은 산모의 생명권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태아의 (윤리적 측면의) 생명권을 침해해도 되는가의 양성을 띄고 있다. 자발적인 임신이 생명의 존치 여부를 위협하지 않는 경우, 산모의 생명권이 자발적인 원인으로 인하여 침해당하지 않는 점에서 명백히 위법성조각사유가 성립되지 않는다. 강간으로 임신한 경우, 신체의 자유등의 권리들이 비자발적인 요인으로 침해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의 강간으로 인한 인권 침해 + 비자발성 > 타인의 생명권이라는 우선순위 부등식의 성립 여부의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아예 국가들 중엔 산모가 위독한 경우에만 낙태를 인정하는 국가들도 존재한다.

당연히 낙태를 시켜줘야 한다. 몸이 약한 여성은 임신 단계에 접어들자마자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관지 환자나 고혈압, 당뇨가 있는 여성은 고위험군에 속한다. 임신단계에 접어들면 체력이 떨어지면서 잠잠했던 지병의 증상이 극심한 수준으로 재발하기 때문이다. 극도로 악화될 경우에는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고 태아도 위험한 지경까지도 간다. 그래도 어느정도 자란 뒤면 산모가 위독해도 제왕절개로 태아를 살린다는 선택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산모가 죽으면 태아도 그대로 끝 혹은 그래도 살려보겠다고 제왕절개를 시도해도 당연하겠지만 빨리 태어날수록 생존률은 더 팍팍 떨어진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산모라도 살리는게 낫다. 좀 과격하게 말해보자면 낙태를 해도 너무 많이 하지 않는 이상은 아이는 또 가질 수 있겠지만 산모가 죽으면 산모는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 차라리 산모가 낙태한 후 언젠가 건강이 회복되었을 때라든가 그게 아니더라도 어쨌든 임신을 할 수 있고 현재 상태로 출산까지 갈 수 있다는 보장이 섰을때 다시 임신을 해서 출산을 기대하는게 낫다.권토중래? 어쨌든 아예 죽어서 아이를 다시는 가지지 못해 결과적으로는 다시는 낳을 수 없는 것보단 다시 기회를 노릴 수 있는게 나으니까[11]

임신 중 나타나기 쉬운 가장 대표적인 질환으로는 고혈압 환자에게 나타나는 임신중독증(pre-eclampsia)이 있다. 이 질환은 낙태를 하거나, 분만을 마쳐야만 치유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간혹 산모와 태아의 목숨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이 나오는데 현실에서도 그리 드문 게 아니다.

한 예시로 자녀 3명이 있는 24살의 임신한 여성이 갑상선 암 3기로 의심되었는데, 정밀 검사를 위해선 조영제를 먹어야 하나 유산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남편의 동의서를 받지 못하면 불가능하다고 한다. 현 남편은 사기사건 수배자라서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치료시기를 놓칠 경우 최대 3년 밖에 못 산다고 한다. 이렇게 된다면 4명의 자녀들은 고아가 되어 고아원이나 입양 등을 통해 가족들과 이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출저: 무엇이든 물어보살 94회)

2.4. 낙태 음성화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다해도 어차피 모든 낙태가 다 대한민국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합법화 되었을 때에 비해 음지에서 비위생적이고, 의사 면허가 없는 이들을 통해서 위험한 방법으로 낙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견해.

2.4.1. 존치론

일단 낙태가 범죄로 규정이 되면, 모든 낙태를 예방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낙태 비율은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효과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기존에 임신한 산모가 낙태를 하는 비율도 합법일 때에 비해 적을 것은 명백하며, 낙태가 범죄라면 임신 자체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쓸 것이 분명하므로 원치 않는 임신 자체가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원치 않는 임신도 줄어들고, 혹 임신하게 되더라도 낙태의 비율도 줄어들게 되므로 예방으로서의 효과가 있다.

또한 낙태하러 병원을 알아보는 행위도 처벌을 하게 되면[12] 음성적인 낙태 경로를 알아볼 수도 없게 되니까 음성낙태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2.4.2. 폐지론

낙태가 불법이면 음성화가 되어 비위생적 낙태로 인해 여성이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의사 면허가 없는 사람에게 시술을 받아서 산모에게 안전한 의료 처치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낙태가 불법이 되어버린다면, 당연히 음지에서 몰래 알음알음 접선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므로, 낙태 시술을 해준다며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 납치/유괴 등 어떤 불법적인 일을 행할지 모른다.

이는 사례는 다르지만, 성매매합법화 논의와 유사하다. 합법화함으로써 정부의 공인 아래에 안전하고, 위생적으로, 떳떳하게 할 수 있게 되기 때문.

2.5. 여성에게만 독박 씌우는 처벌?

형법
제30조(공동정범) 2인 이상이 공동하여 죄를 범한 때에는 각자를 그 죄의 정범으로 처벌한다.
제31조(교사범) ①타인을 교사하여 죄를 범하게 한 자는 죄를 실행한 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한다.
제32조(종범) ①타인의 범죄를 방조한 자는 종범으로 처벌한다.
아기는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낙태를 하면 남성은 책임을 지지 않고 여성만 처벌을 받는다는 오해가 있다. 만약 남성이 여성과 함께 낙태를 공모하였다면 해당 여성과 함께 낙태죄의 공동정범으로 처벌받는다. 또한 남성이 낙태를 종용하였다면 남성도 낙태죄의 교사범으로 동일한 형으로 처벌받는다.

2.5.1. 존치론

낙태죄 폐지 의견 중 대다수는 같이 성관계를 맺었으나 임신 소식을 알게 될 경우,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잠적하는 남성에 대한 반발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낙태를 종용하고 여성이 거부할 경우 책임지지 않고 도망가는 남성이 있다면 그 남성도 찾아내서 어떻게든 같이 처벌하려고 해야지, 남성이 도망가서 아직 못 잡았으니 여성도 함께 낙태죄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논리이다. 타인이 잘못하면, 나도 잘못해도 된다는 논리가 되어버린다. 애초에 이런 문제로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어불성설인 것이 성차별을 없애는 것이 아닌 낙태죄의 합법화로 이런 독박 씌우기가 사라진다면 그것이 사회의 정의 실현이라 하기에도 어렵다.

또한 남성이 여성에게 낙태를 종용하여 여성이 낙태를 한경우 형법 제31조(교사범) '①타인을 교사하여 죄를 범하게 한 자는 죄를 실행한 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한다.' 에 의해 남성도 같은 처벌을 받게 된다. 따라서 낙태를 하였다 하여 무조건 여성만이 처벌받는다는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아래 폐지론에서는 애를 배게 된 것에는 남성의 책임도 있는데, 왜 여성만 처벌하냐며 반발하는데 무책임하게 도망가거나 낙태를 종용한 경우라면 몰라도 '남성은 임신 가능성에 대해서 인지하고, 출산 후 양육 의무를 이행할 의사가 있었는데 여성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낙태를 했다면' 여성만 처벌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낙태는 아이를 죽이는 살해 행위이다. 남편이 낙태를 종용하거나 낙태에 가담또는 방조한 경우가 아니라면 산모 혼자서만 아이를 죽이는 행위를 하였는데 왜 남성까지 함께 처벌받아야 한단 말인가?

2.5.2. 폐지론

만약 남성이 낙태를 공모하지도, 종용하지 않았음에도 여성이 혼자서 양육하기가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낙태를 한다면, 애초에 애를 배게 된 것에는 남성의 의사도 있음에도 낙태를 한 경우 남성은 상대적으로 여성에 비해 처벌받지 않고, 여성은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처벌받는 경우가 많다. 이를 이용해 남성이 여성을 협박하는 사례도 있다.# 남성이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가버려 여성이 낙태를 결정하면, 낙태할 경우 신고하겠다고 겁박해 돈을 뜯어내거나, 이별을 원하는 여성에게 신고를 빌미로 관계 유지를 강요하거나 하는 것. 그러나 여성은 약점이 잡혀 있기에 신고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계속 당하기만 하는 사례가 있다. 남성이 교묘하게 증거를 없앤 뒤, 자기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저 '엿먹이기 위해' 여성을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모두 여성 단체에서 낸 사례집에 나오는 실화다. 좋아서 해놓고 상대 남자를 고소하며 성폭력 무고죄를 저지르는 꽃뱀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법률상으로는 남성도 교사범이라는 게 꼬리가 잡히면 처벌한다지만, 남성이 낙태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남자가 처벌받는 사례는 실제로 거의 없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낙태에 동의했다는 게 입증되어야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소까지 이뤄졌으나 여성과 수술해준 의사만 벌금형을 받고, 남성은 무죄판결로 빠져나간 경우도 있다.임신하자 잠적한 남자 무죄, 혼자 낙태한 여자는 유죄 5년간의 판결을 분석한 기사다. 남자가 낙태에 동의했는데 낙태 수술 후 여성을 낙태죄로 고소하더니, 자신은 마음을 바꿔 낙태에 반대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자 끝내 무죄가 선고되어 여성만 처벌받았다.

2.6. 피임했음에도 임신한 경우

2.6.1. 존치론

상관없이 일관되게 처벌되어야 한다. 이유는 피임 여부와 무관하게 성관계를 시작한 시점에서 (폭력 상황을 제외하고) 서로가 합의하에 맺은 관계이며, 처음부터 성관계로 인해 낮은 확률이더라도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서 한 성행위이기 때문이다.애초에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면 이성과 같이 눕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침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사고가 났을 때 아무리 운전자가 사고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해도 그것이 면책의 이유가 될 수는 없으며, 그것이 두렵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방법이다.

가임기가 아니어도, 피임 도구를 썼어도 언제든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상식이며, 학생들의 성교육 시간에도 언제든 여성은 임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즉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성교육을 실시하여, 거의 모든 10대 이상의 사람은 자신이/의 성행위로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성행위는 좋지만, 임신은 싫다는 것은 책임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100% 안전한 피임방법은 없다는 것은 임신 불능 진단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미 상식적으로도 매우 당연시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이러한 가능성을 감수하고 관계를 한 것은 철저히 해당 커플의 책임이다. 피임을 철처하게 한다 해도 만에 하나 임신이 되면 어떻게 책임질지 간단하게나마 합의하고 관계하자. 아기를 무슨일이 있어도 절대로 낳고 싶지 않다면 그냥 관계를 안 하면 된다. 아무도 하라고 강요한 적 없다.[13]

아래 폐지론에서는 성교를 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욕정을 이길 수 없어서 강간을 하였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신의 인내력 부족으로 타인/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까지 기술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관계, 정확하게는 번식 목적 이외의 성관계를 주식 투자에 빗대어 생각해 보자. 성관계와 주식 투자는 모두 담보(자신 혹은 이성의 몸/투자금)을 바탕으로 위험(임신/금전적 손실)을 각오하고 하는 행위이다. 양쪽 모두 성공한다면 이득(성적 쾌락/차익에서 오는 금전적 이득)을 얻을 수 있으나 실패한다면 전술된 위험을 감수하여야 한다. 또한, 양쪽 모두 해당 행위를 하면서 위험을 최소화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주식 투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기업이나 급락이 심하지 않은 종목의 주식을 사는 것이 이에 해당되고,[14] 번식 목적 이외의 성관계의 경우 현존하는 다양한 피임법들(수술적, 비수술적 포함)이 이에 대응된다.

그런데, 주식 투자가 잘못되어 누군가가 돈을 잃었다고 한들, 단지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는 선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손실을 다른 이가 회복하거나 배상해주지는 않으며, 그리하여야 할 이유는 없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지만, 주식 투자를 한 본인이 애초에 위험을 감내하고서라도 이득을 위해 행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번식 목적의 성관계 역시 성관계를 맺은 당사자들이 임신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성적 쾌락과 만족을 위해 행한 행위이므로, 그에 손실(임신)에 대한 회복(낙태)을 허용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낙태 허용론자들의 주장은 마치 무리한 주식 투자로 전 재산을 날린 사람들이 자신들이 투자한 기업에 손실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리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폐지론에서 주장하는 "성관계를 참는 것이 불가능"이라는 것 또한 심각하게 엇나간 주장이다. 물론 성적 쾌락과 행복추구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성적 쾌락을 추구하고 것은 성관계, 정확하게는 임신의 위험이 있는 삽입 성교 외의 방법으로도(비삽입 성교, 자위행위) 충분히, 아무런 문제 없이 가능하다는 것이 문제다. 다시금 주식 투자에 비유하자면, 주식 투자 외의 방법으로 위험부담이 없는 금전적 이득은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면서 급여를 받으면 되니까. 즉, 정리하자면 주식 투자와 성관계 모두, 다른 방식으로도 전혀 문제없이 획득할 수 있는 이득을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획득하려는 행동에 가깝다.

또한, 현실적인 부분에서도 낙태를 원하는 사람이 정말 피임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은 매우 적다. 관계가 잦은 커플들 중 피임을 하다 안하다 했다면 그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어렵다. 즉 증거로서의 역할이 사실상 전무하다. 실질적으로 피임을 한 경우를 증명할수 있는 경우는 수술과 임플라논 밖에 없고 이 경우는 그수도 매우 적으며 피임율도 압도적으로 높으며 낙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혼자는 더더욱 하지 않는 수술이다. 따라서 낙태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증명할수 있는 피임법을 사용하는 사람을 위해 피임법 자체를 사용한 사람에게 면죄부를 줄수는 없다.

2.6.2. 폐지론

임신을 할 수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에 관계를 맺은 게 원치 않는 임신하는 데도 동의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당연히 그런 원치 않는 결과를 막기 위해 피임을 하는 것이다. 본인이 택한 행위가 좋지 않은 결과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슨 결과가 오든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가? 가령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켜진 상황에서 건널 때에도,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을 텐데, 사고를 겪는다면 온전히 본인의 탓인가? 절대 아니다.

아이를 낳을 각오가 없으면 성교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말은 국가의 도움이 거의 없이 세상살이도 팍팍한 요즘 시대엔 지키기가 어려운 이야기에 가깝기도 하다. 1997년에 사람들에게 성관계를 하는 이유에 대해 묻는 문항 8개의 설문조사를 진행했었는데 '아이를 낳기 위해서' 가 8위로 가장 낮은 선택률을 보였다. 차라리 영구피임 수술을 하라고 하는 쪽이 현실성이 높다. 합의된 성관계는 이미 아이를 만드는 일보다는 쾌락 위주의 이유로 빈번히 행해지며, 심각한 위협이 없는 한 보통 행복추구를 보장해야 하니 이를 제지하긴 힘들다.다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성적 쾌락 및 행복추구는 임신의 위험이 있는 삽입 성교 이외의 방법으로도 충분히 달성될 수 있다는 맹점이 존재하긴 한다.

피임을 했는데 실패하는 경우, 얼마 후에 혼인 관계나 연인 관계가 여러 가지 이유로 파탄이 나는 경우도 있다. 혹은 결혼한 후에도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피임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피임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임신이 되는 경우가 있다.[15] 이 경우 낙태를 하느냐 마느냐는 부모 본인의 인생에 결부되는 문제이다.[16] 이런 데도 불구하고, 피임이 실패해 임신한 경우에는 낙태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며 출산 지원이 부실한 대한민국의 실태는 어물쩍 넘어가 지적하지 않는 것은 출산 이후 빈곤층으로 내몰리는 것을 사람이 받아야 할 정당한 처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할 수도 있다.

2.7. 낙태에 따른 여성에게 미치는 부작용

2.7.1. 존치론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로 주장하는 것이 바로 부작용 문제다. 밑에도 써 있지만, 과학이 많이 발전했다고 해도 인공적인 유산이다 보니, 부작용을 없앨래야 없앨 수가 없다. 수술방법이 마구 긁어내는 식이라 자궁에 상처가 안날 수가 없고, 실제로 낙태한 여성 중 10%가 골반염증성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낙태를 자주 할수록 유산, 불임 확률이 증가하고 부작용도 높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서라도 낙태를 금지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중절 수술의 후유증 및 부작용

또한 정서적인 후유증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데, 자진하여 낙태를 한 여성들도 40%가 정서적으로 죄책감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강제적인 낙태는 정서적으로 큰 피해를 주며, 심하면 자살까지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정신적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게다가 이혼 사유에 해당하는 법적 부작용도 있다. 낙태 자체가 이혼 사유가 되지는 않지만, 낙태 주변에 이혼 사유가 하나라도 성립되는 경우가 많아 낙태 자체가 이혼 사유나 거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2.7.2. 폐지론

부작용 문제는 낙태 금지론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근거이기는 하지만 낙태 허용론자들은 딱히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다. 개인의 선택에 의한 낙태가 허용된다면 그 결과로 돌아오는 건강상의 부작용은 그 선택을 한 개인이 책임져야 할 영역이라고 보기 때문. 즉, 누군가가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낙태를 선택했다면 그 선택은 시술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부담을 감안하고 이루어진 것이어야 하며, 부작용을 감수하고 낙태를 선택했다는 것은 그 부작용보다 출산의 곤란함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개인의 가치판단에 사회가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태아의 생명권과 같은 문제는 사회적 윤리에 따라 판단해야 할 문제지만, 개인의 건강 문제는 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고, '개인의 건강에 해악을 끼치기 때문에' 낙태를 금지하자는 주장은 술, 담배, 밤샘 작업이나 놀이, 과격한 스포츠를 금지하자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 이런 특성 때문에 부작용 문제는 낙태 금지/허용에 대한 논쟁보다는 개인대 개인의 관계에서 낙태를 하려는 사람을 만류하는 데 더 적절한 근거이다.

2.8. 특정 성별만 낳고 싶은 경우

자세한 내용은 성별 선택 낙태 문서 참조. 주로 남아선호사상에 기반해 남아를 낳기 위해 여아를 임신했을 때에 낙태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하며, 1980~90년대에 흔하게 일어났다. 물론 많지는 않지만, 반대로 여아를 낳기 위해 남아를 낙태하는 경우도 본 항목에 해당한다.
연도 0-4세 성비[17]
1925 103.35
1930 102.52
1935 103.14
1940 102.63
1944 101.87
1955 106.67
1960 105.27
1966 107.23
1970 106.77
1975 107.44
1980 107.28
1985 108.03
1990 111.20
1995 113.40
2000 110.21
2005 108.06
2010 106.10

2.8.1. 존치론

이건 낙태의 이유 중에서도 가장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경우 중 하나. 다행히 전 세계에서 윤리의식이 강화되면서 이런 부류들은 지속적으로 줄고 있고, 그에 따라 이 현상도 약해지고 있다. 현재는 남아선호사상이 많이 사라졌으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여아를 원하는 경향이 좀 더 짙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중노년, 즉 할아버지 할머니 나이에 해당하는 집안의 어른들은 압도적으로 남아를 선호하며, 아들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를 구박하고 여아 낙태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80, 90년대에는 이 사상이 극에 달해, 남녀 성 비율이 무너지고 불법적인 낙태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80-90년대의 여아낙태 문제를 참고. 다만 아직 태아의 성 때문에 낙태를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요즘은 반대로 남아란 이유로 낙태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전처럼 호락호락하게 일을 벌일 수 있지는 않고, 아직 어른들의 남아선호사상이 건재하기 때문에,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반대로 여아선호도 있기 때문에, 합법이라면 남아란 이유로 낙태를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

아직도 여아란 이유만으로 낙태를 하는 사례가 있다면, 고리타분함을 넘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들과 그들에게 세뇌, 강요당한 사람들의 업적으로, 한국 특유의 악습인 부모의 과다한 간섭+하필이면 그 부모가 질 나쁜 부류인데다 전 세대의 잘못이 잘못인지 모름 + 시대의 변화를 모른 채 지독한 남아선호사상을 유지함으로 인해 하릴없이 여아 낙태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여아 낙태는 정말이지 말로 다 표현하기가 힘든 윗세대의 희대의 삽질로, 지금까지 이것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쉽게 고쳐지기가 힘들어졌다. 남초 문제와 이로 인한 국제결혼의 문제점들, 그리고 극심했던 여아낙태로 줄어든 여성의 수와 이로 인해 직결되는 출생아 수 저하 등, 고쳐나가야 할 점이 한둘이 아니다. 당시 수많은 젊은 엄마들이 가족들의 압박과 시류 때문에 별 생각없이 낙태를 했다가 수십년 뒤 후회하는 사례가 많다. 이런 것이 합법화된다면 산모가 오히려 낙태와 죄의식을 강요받는 사례가 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남아선호사상 등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가 성비불균형 분명 출산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던 시기의 어른들은 '그래도 대를 이어야 하니 아들을 낳아야지...?' 라는 생각에 여아는 낙태를 하거나 태어나도 버렸지만 그 결과 자기 대는 끊기지 않게 되었지만 아들 세대에서 결국 집안 대가 끊길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여자가 적어져서, 아들과 맺어질 며느리 인재풀(?)도 그만큼 적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 특이하게도 인도는 출산을 억제하지도 않았는데 요런 일이 벌어졌는데 이쪽은 남아선호사상 하나만으로도 한국, 중국을 훨씬 뛰어넘는 부작용이 생겼다.

2.8.2. 폐지론

여성 또는 그 가족이 성별 선택 낙태를 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선호보다도 사회적인 여성차별에 있다. 따라서 낙태를 금지해서 그들을 범죄자로 만들 것이 아니라 훨씬 본질적인 문제인 성평등 수준을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실제로 현재는 첫째는 물론이고 셋째 아이의 성비까지 균형이 맞고 있다.

문화적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라면 이미 태어나서 살아가는, 존재하는 사람의 자유를 우선시되어야 하므로 이 때도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정 막고 싶다면 15주 미만의 태아는 성별확인이 불가능하며 15주가 넘어 갈시 산모에게 낙태에 의한 위험이 대폭적으로 증가해 일부 국가들이 15주 미만의 태아에게만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데 낙태 가능 주수를 최소 15주 미만으로 엄격하게 지키면 성별에 의한 낙태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2.9. 산모가 미성년자인 경우

2.9.1. 존치론

산모가 미성년자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 아니고서야 스스로의 의지로 행한 성행위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임신은 오로지 성행위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산모 역시 알고 있었을 테고, 태아를 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산모가 미성년자라고 해서 달라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만약 학업을 수행중이거나 형편이 어렵거나 해서 정상적인 육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면 성행위를 안 했으면 될 일인데, 섹스는 하고 싶고 임신은 하기 싫다는 것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누릴 건 다 누리면서 그 책임은 지기 싫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피임법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서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무책임함의 극치이다. 강간이었거나 남자가 성행위 중 콘돔을 몰래 빼서 사정을 한 상황이 아닌 이상 쌍방의 합의가 된 상황인데 당연히 당사자의 잘못이 아닐 수가 없다. 한쪽이 콘돔 사용을 거부한다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한다. 강간이 아닌 이상 생삽입을 허용을 한 시점에서 이미 아웃이다. 더욱이 성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 한국은 잘 몰라도, 북미의 경우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성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키며,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콘돔을 나눠주기까지 한다. 나라와 학교에서 이렇게까지 교육을 시키며 피임을 강조하는데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2.9.2. 폐지론

미혼모가 된 사례는 성인보다는 미성년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연령은 대학생 이상의 성인이 많지만 중고등학생도 간혹 존재하며, 순전히 임신 당사자의 잘못으로 임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단 산모부터가 학업을 끝내지도 못할 만큼 어린 데다 이 경우 가족이 해체된 경우도 많아서 혼자 힘으로 직장에 다니며 아이를 기르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미혼모사생아에 대한 좋지 않은 사회적 인식과 제도 때문에 낙태를 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미혼모의 경우 어리고 교육 받지 못한 경우가 많으므로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래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낙태하는 경우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대한민국은 최악의 성교육으로 악명을 떨친 나라다. 아직 보수적인 세대가 남아있는 한국에선 제대로 된 피임방법, 임신의 원리 등 아직 낯 뜨겁다는 이유로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거나 아예 안 알려주는 학교도 적지 않다. 임신의 원리를 학교보다 인터넷으로 더 빨리 배울 정도. 심지어 음란물에선 분위기상의 이유로 거의 피임 없는 질내사정하는 내용물이 많다. 임신의 원리를 아는 성인들을 위한 작품이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미성년자도 쉽게 음란물을 접하니 피임도 모르는 채 섹스만을 배우는 최악의 결과가 발생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지사. 심지어 피임방법은 둘째치고 산모가 아닌 이상 제대로 된 아기의 양육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미성년자들에게 '피임도 모르면서 섹스했어? 그러면 생긴 아이는 무조건 네 탓이야!'라고 무작정 원망하는 건 조금 너무한 얘기가 아닐까.

2.10. 태아가 기형아, 유전적 이상이 있는 경우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부모에게 유전병, 전염병이 있는 경우 제한적으로 허용하나 태아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낙태할 수는 없다.

2.10.1. 존치론

아기가 장애인이니까 죽일 권리를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그렇게 치면 이미 태어나서 살아가는 장애아에게도 똑같이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하는데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논리인지는 누구나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아가 부모 입장에서 키우기도 힘들고,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억장이 무너질 수 있으므로 죽일 권리를 달라는 것은 낳기 전에는 몰랐으나 낳고 보니 심각한 장애아일 때에도, 이미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살해할 권리를 달라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논리이다. 이것이 과연 본질적으로 과거 독일이 저질렀던 T4 "작전" 과 크게 구별되는 일일까? [18]

차라리 모든 태아에 대해 낙태를 요구하는 주장이라면 그 논리의 일관성이 있지만, 장애아여서 죽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은 이미 출생한 아이라도 장애아라면 똑같이 죽일 수 있게 해달라는 것과 같으므로 실질적으로 낙태가 아니라 살인의 권리를 달라는 것과도 같다.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힘들테니 미리 죽여줄게라는 것도 그 사람이 살고 싶을지 아닐지 판단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상대방(태아)에게 일방적으로 피해만을 주는 불합리한 판단이다.

기형아나 유전적 이상을 이유로 낙태를 하는 경우는 낙태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개선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물론 장애아 스스로가 힘들기 때문에 낙태가 그 아기를 위해서 더 좋을 것이란 의견도 있지만 아기도 그 생각과 같다고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이건 마치 장애인보고 "살기 힘들 것 같으니 죽여드릴게요."라고 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장애인이나 자기와 이질적인 존재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 사상을 뜯어 고쳐야지, 장애인보고 이 사회에서 살아봐야 희망 없으니 죽으라고 하는 사회는 이미 막장 테크를 탈 만큼 탔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나치의 T-4 프로그램이 반인륜 범죄로 규정되었고, 이를 주도한 칼 브란트 등이 그 희생자 대부분이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범죄자로 규정되어 처형된 것은 이러한 문제 해결은 장애아 배제가 아닌 사회 인식 개선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상식과 개념을 가진 대부분의 인류가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아래 폐지론에서는 기형아니까 무조건 죽이자는 게 아니라 죽일 수도, 안 죽일 수도 있도록 선택권을 달라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하였으나 장애인에 대해 살해의 권리를 허락하자는 사상부터가 차별적인 사상이다. 장애인은 죽일지 말지 선택의 대상으로서 죽여도 되는 살해의 허용 대상이고, 다른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생명이 보호되어야 한다면 이것이 차별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특히 다운 증후군 같은 경우는 일상생활에 크게 차질을 빚으며 생김새도 장애인인 것이 티가 나서 부모나 아이나 고생을 하는데다 수명이 짧아 죽음이 일찍 오는 것에 대해 부모들의 심적 고통이 클 테니 그보다 낙태를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다운증후군의 문제도 있지만 결국 사람들의 시선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다. 수명이 짧은 것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며 그 죽음을 일찍 맞는 것이 더 불행이 크다는 정의도 없는 상태다. 또한 다운 증후군이라고 해도 장수를 한 경우도 없지 않다. 또한 키우기 불편하고 겉으로 티가 나는 장애는 참으로 많다. 오토다케 히로타다나 닉 부이치치도 사지가 없는 상태니 티가 안 날 수 없을 것이며 생활도 불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행복했을까? 그건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독일에서 자행된 T4 "작전" 또한 장애인을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명목" 하에 자행된 일이다.

낙태의 기준이라는 그 '태아의 행복'을 판단하는 것은 결국 산모지 태아가 아니다. "기형아를 잉태한 산모에게 산모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한 채, 타인(낙태 반대자)의 윤리관을 적용하여 불행하게 하는 것은 원인이 무엇이건 안 될 일이며, 이런 저런 강요를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렇게 주장하는 본인부터가 태아의 의사는 일단 무시한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발언이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관을 타인에게 강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낙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고 상호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대체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서 다른 해결 방법을 지속적으로 찾고 있다.

장애아들이 불운한 결말을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현대 사회의 암적인 면일 뿐이며 그러한 암적인 면을 없애기 위해서 사회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지 낙태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대부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사하거나 병사, 심지어 노예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은 오히려 낙태하는 것이 옳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대부분 아프리카를 위해 구호활동을 하고 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현재 장애아와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물론 부모의 괴로움도 이해할 만하나 그것은 사회체계의 개선을 통해 적극 지원해주어야 할 개선 요망 부분일 뿐, 낙태 사유로 쓰기는 힘들다.

불분명한 아이의 행복때문에 부모가 희생되어선 안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 그건 모든 아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물론 장애아가 키우기 더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상적인 아이도 멀쩡하게, 쉽게 클 것이라는 단정은 힘들다. 애초에 부모의 희생을 막기위해 낙태를 한다는 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부모가 행복하기 위해서 아이를 희생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누구의 생명이 더 중한가를 사람이 함부로 결정할 일은 아니다. 거기다 굳이 아무도 생명을 잃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고통때문에 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부모를 희생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의 편하게 살고싶다는 이기심에 불과하다. 만약 아이를 키우는 것이 불편하다면 사회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이지, 낙태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장애아가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쉽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 책임은 엄연히 국가와 사회에 있는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장애아를 범죄의 표적으로 삼은 장본인에게 있다. 그것이 장애아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도둑질을 당하면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았던 피해자의 잘못인가, 아니면 돈을 훔친 도둑의 잘못인가? 그리고 애초에 범죄는 일반인들에게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 수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범죄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범죄가 많다고 낙태를 한다면 부자들도 도둑질을 막기 위해 돈을 벌지 말아야 하며 극단적으로 가면 범죄를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아래 폐지론에서는 사회와 인권 문제를 개선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국민 세금이나 낭비하며 철없는 이상주의에 기대는 것일 뿐이라고 몰아세우지만, 애초에 세금은 저소득 시민들과 장애인들 구제하려고 걷는 것이다. 이들에게 들어가는 예산이 납세자들과 합의하지 않은 부적절한 예산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면,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는 정당성을 잃어야 하며, 개인에게 제공되는 모든 서비스는 스스로 또는 스스로 번 돈으로 충당해야 한다. 비단 사회보장 뿐 아니라 경찰과 국방을 포함한 모든 서비스는 공짜 점심따위가 아니며, 또 다른 누군가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물건들이다.

그리고 애당초 현실만을 내세우면 사회적 부조리는 결코 개선될 수 없다. 이는 인종차별을 개선하는 것이 비현실적 발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은근 슬쩍 백인우월주의를 정당화하는 서구권 극우주의자들의 태도와 다를 것이 없다. 또한 순환논법을 내세워 출산을 강요하는 것이야 말로 나치짓이란 식으로 반박을 하지만 애당초 나치는 우생학을 강조하여 '우수한 종자'들만의 출산을 원했고, '열등한 종자'들은 모두 죽여버리자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말이 안되는 소리이다. 실제로 우생학적 낙태에 적극적이었던 나라들은 이미 태어난 장애인들을 불임으로 만들어버리거나 강제 수용시설에 넣고 학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또한 폐지론에서는 장애아 자신도 태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럼 반대로 죽기를 바랐다는 보장 역시 없다는 점에서 결국 자기모순적인 논리로 반박 가능하다. 태아가 자신이 태어나고 싶을지 아닐지 선택도 판단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 판단을 타인이 해버리고 생명권을 거둘 생각을 한다는 것은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타인의 강제적 침해에 해당한다. 장애아라 할 지라도 모두가 "차라리 태어나기 전에 낙태해주지"라고 생각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닉 부이치치, 오토다케 히로타다 모두 사지가 없는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죽을걸 그랬다고 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걸"이라는 이유로 낙태를 허용해야한다는 논리에는 한가지 반박할 점이 더 있는데,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똑같이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극도로 가난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자랄 것이 틀림없는 빈민가의 아이라면 비록 장애아가 아니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나중에 후회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낙태를 허용해도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즉 폐지론에서의 논리의 허점은 어떤 특정한 사람은 죽여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생명의 가치를 일관되게 보존할 생각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특정한 조건 하에서라면 죽어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조건에서도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는 논리라는 뜻이다. 즉 인종차별이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즘, 파시즘, 계급 의식 등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선민사상까지 결합된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물론 피임에 쓰인 약물의 부작용으로 인해 극심한 손상이 예측된다면, 낳지 말게 하자는 이야기도 간혹 나오곤 한다. 다만 정말로, 진실로 아이를 만들기 싫었다면 피임으로는 부족하고, 물리적으로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최상일 것이다.

2.10.2. 폐지론

일단 현재 대한민국의 낙태법은 태아 검사 기술이 개발, 발달되기 전에 제정된 것이어서 태아의 유전적인 문제가 아닌 부모의 유전적인 문제를 기준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태아에게 문제가 없을 때 다른 배경과 관련 없이 부모의 유전적인 문제만을 이유로 낙태를 한다는 게 말이 안되기 때문에 개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다운증후군 같은 경우 부모로서 괴로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허용하자 등 여러 입장에서 허용하자는 주장이 많다. 사실 태아 진단 기술이 없던 상황에서 부모를 기준으로 몇몇 유전병의 낙태를 허용한 것도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런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는 상당 부분 금지된 상태.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출산 과정에서 산모의 건강에 치명적이지 않은 이상 낙태시킬 이유가 없고, 또한 태아 검사 기술이 개발, 발달된 것이 크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낙태를 단순히 "생명을 해쳐선 안된다."라는 1차원적인 논리를 적용해선 안된다. 정상적인 가정을 꿈꿨던 부부는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가 기형이라는걸 안 순간 억장이 무너질것이다.

무엇보다도 장애/기형을 갖고 태어난 사람 자신이 무조건 자신이 태어나기를 바랐다는 보장 역시 전혀 없다. 선천적인 장애/기형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고통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게중에는 그래도 열심히 살아보자고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장애인 본인이 너무 불편하고 힘든 삶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사람에게 존치론의 근거를 들어 그렇다해도 태어나야 했다고 강요하는 것은 애초에 태어날지 아닐지 선택도 불가능한 아이에게 평생 그렇게 불편하고 힘들게 살아라라고 강제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입장도 있다. 기형인 몸을 타고났기에 공을 가지고 놀 수조차 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허망함은 누가 책임져 주는가. 혼자서는 밥조차 먹지 못해 설령 눈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해도 바라보기만 할 뿐, 배고프다 울부짖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슬픔은 누가 책임져주는가. 만약 그 아이가 자라서 "왜 나를 장애인으로 낳았어?!"라며 부모에게 저주를 퍼붓는다면, 그 증오심은 누가 책임을 져주는가.[19] 아무도 책임을 져주지 않는다. 책임을 져줄수도 없다.

그리고 이런 기형아들을 일단 낳아버리면 무책임하게 버려버리거나 함부로 방임, 학대하지 않는 한 어쨌든 부모가 책임지고 돌봐야 할텐데, 거기서 오는 시간적,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경제적 부담은 거의 부모 몫이다. 날 때부터 기형인 신체 때문에 병을 달고 사는 기형아를 자신이나 아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책임지고 살아야 하는 부모가 치를 부담들은 어느 측면으로 봐도 막대하다. 설령 부모가 인생 끝까지 기형아를 책임진다고 해도 만약 그 부모가 사망한 뒤에는 누가 그 아이를 책임질 것인가? 형제? 친척? 시설?

게다가 세상이 기형아를 보는 시각은 엄청나게 이중적이다. 즉 대중매체에 노출된 기형아들을 보는 사람들은 그들을 안쓰럽게 여기고 후원하지만, 정작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람들 중에서는 얼마든지 우리와 다르다라는 이유로 멸시하고 혐오하는 사람들도 많다. 같은 반에 장애인인 학우가 있었다면 그 아이에 대한 시선이 어떠했는지는 스스로도 알 것이다. 기형아 자체에 대한 시각 외에도 기형아를 데리고 다니는 부모나 가족들에 대한 시선도 전혀 좋지 않다. 연민의 시선일 수도 있지만, 혐오나 경멸의 시선도 많을 것이다. 또한 부모 스스로도 기형아를 기르면서 느낄 수밖에 없는 힘든 점들로 인해 본인들에게 큰 자괴감을 느끼거나, 심하면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며, 기형아에게 스트레스와 분노를 돌려 아이를 학대하는 위험한 사단도 날 수 있다. 장애인 가정에서 살해 후 자살이라는 비극이 잊을 만하면 터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다. 모든 가정이 "처음엔 힘들었지만, 아이의 웃음 덕분에 이겨낼수 있었어요."라고 말할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형아도 무조건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겨낼 수 있었어요."라고 말할 수 없다.[20][21]

미담은 아름답기에 미담이고, 희생은 감수했기에 희생이며, 기적은 일어날리 없기에 기적이다. 그것은 단지 '운명'이기 때문에 헤쳐나가기를 강요하기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원하지 않았던 책임을 불행하고 싶지 않은 희생양에게 강제로 묻는 것은 죄이다.

존치론에서는 기형아를 낙태하는 것보다 기형아를 차별하는 사회 인권을 개선하는 것이 먼저라고 쓰여져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에 빠진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문화는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바뀌는데 시간이 걸리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그 부모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무엇보다 사회적 시선이 바뀌는 것은 어디나 외부적 요인이 바뀌는 것일 뿐, 기형아로 태어나 살아가야하는 본인에게는 여전히 심각한 불편함이 남는다는것은 변함없다. 위에서 기형아나 장애인의 사례를 빈민이나 유색인종 등에 비유한 게 잘못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인종은 그 자체로는 문제될 게 없고 빈민은 제대로 구제하고 사회 인식과 제도를 고친다면 확실하게 나아질 수 있는 반면, 장애는 분명 그 자체로 불편하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형아의 낙태를 나치 독일T4 프로그램에 비교했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비교이다. T4프로그램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살해했으니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기형아에 대한 낙태를 허용하자는 것이지 기형아라고 무조건 낙태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기본적인 선택권도 주지 않고, 기형아여도 무조건 낳아야 한다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강요하는 것은 또다른 파시즘일 뿐이다.

보통 일반 대중은 TV프로에서 아름답게 미화된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만 보아서 잘 모르지만, 장애인 가족을 감당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게 힘든 일이다. 복지가 완비되어 있건 말건 상관 없이. 실제로 보험사들은 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의 50대 이상 생존률을 비장애인 자녀만 둔 어머니의 생존률보다 낮게 보는데, 이는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받는 정신적, 육체적인 스트레스가 막대하고 그로 인해서 암과 같은 질병에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즉 장애인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수명을 담보로 키워야 할 정도로 힘든 일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폐지론을 지지하는 장애인단체 역시 존재한다. # 다만 해당 선언을 주도한 단체의 의견이 장애계 여론을 대변한다고 보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으므로, 나머지 장애인 관련 단체들이나 당사자들에 따라 세부적인 각론단위에서 차이가 있음은 유의할것.

그 외에 존치론에서 말한 이미 태어나 살아가는 장애인을 죽이는 것에 비유했는데, 이 경우 태아를 윤리적으로 법적으로 같은 사람으로 볼지/또는 언제부터 사람으로 보느냐에 따라 갈리는 문제로 이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자세한 건 아래 '그 어떤 수단으로도 살인은 허용할 수 없다' 항목 참조.

2.11. 특별한 사유없이 낙태하려는 경우(낙태 자유주의)

2.11.1. 존치론

낙태 반대론자와 낙태죄 존치 찬성론자에게 있어 가장 낙태 찬성론자와 낙태죄 폐지론자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 피임 및 임신에 대한 책임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서 경제적인 이유나 유전적인 이유 등의 최소한의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이유나 변명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단순히 자기만 편하자고 낙태를 하려는 아주 무책임한 태도라고 여긴다.

아래 낙태 허용론 측에서는 행복하게 키워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마음대로 살해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행복하게 키워준다는 100%의 확신을 부여해줄 수 없다면 사람이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단 말인가? 아이를 죽여도 된다는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태어나게 해준 존재라는 것만으로 죽여도 된다는 권리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아래 허용론 측에서는 살인죄를 주장할 것이지, 굳이 낙태죄만 남기자고 하는 것은 모순된 주장이라고 항변하고 있으나 처벌론 측에서는 당연히 살인죄로 처벌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인죄로 절대 처벌하지 않고, 처벌하더라도 낙태죄로 처벌한다면 그런 경우에 한해 낙태죄로라도 처벌하라는 뜻이다. 실제로 낙태죄가 폐지된 국가 중에서 낙태죄 대신 살인죄로 처벌하지는 않지 않은가. 안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 최소한의 죄의 대가라도 치르게 하라는 것에 대해 왜 일관성 없이 더 무거운 죄를 주장하지 않냐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2.11.2. 폐지론

낙태 자유는 낙태죄 폐지론자들의 주된 입장이며 낙태죄의 폐지를 주장하면서도 조건을 두어 낙태를 제약하는 것은 자기결정권의 확대를 지향하는 총론과 충돌하는 점이 있는 특수한 주장에 속한다.

자유로운 낙태는 미국 연방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채택한 주장이며, 자료를 검색해보면 한국에서도 예전부터 낙태 관련 시위가 있을 때 주요 여성 단체들이 자유로운 낙태를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에게 있어 임신은 자신의 신체에도 출산 전과는 확연히 다른 변화를 일으킬 뿐만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도 큰 영향, 아직까지는 현실적으로 학업/경력의 중단 등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다. 이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보다는 현재 인간으로서 사고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며 이 사회에서 살고있는 여성의 생존권, 행복추구권 등 권리를 더 존중해야하며, 그들의 신체적 자기 결정권에 제한을 둘 수 없으므로 자유로운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낙태 자유주의 입장에서 민법에서 태아의 형성 시기가 어떻고 형법에서 고의면 살인이고 하는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논쟁이다. 낙태 자유주의 입장에서 어떤 세부적 논의든 결론은 그래서 낙태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마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2.12.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현행 법 체계에서도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 낙태가 법적으로 허용된다.

2.12.1. 낙태 반대론

사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존치론은 현행 법률을 유지하자는 것이라, 현행 법률로도 근친상간으로 인한 태아는 낙태가 허용되기에 존치론이 아닌 낙태 반대론에 입각해서 서술한다.

태아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친족 관계라고 해서 그것이 아이를 죽여도 된다는 권리를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2.12.2. 낙태 허용론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폐지론은 현행 법률을 폐지하자는 것이라 폐지론이 아닌 낙태 허용론에 입각해서 서술한다.

법률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결론적으로 친부모를 국가에서 부모로 인정받지 못한다. 모든 법 체계와 시스템 상으로 부모가 없는 처우를 받는다. 설령 부모 중 한 쪽이 키운다고 할 지라도, 최소한 부모 중 나머지 한 명까지 완전히 법적 부모로 인정받지는 못하기에 살아가면서 행정적, 법률적으로 여러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만일 근친상간으로 아이를 태어나게 하도록 하자면 일단 근친상간으로 인한 불이익을 규정한 법부터 없애야 할 판이다. 보통 대다수 사람이라면 이것보다는[22] 근친상간으로 인해 생긴 태아를 낙태하는쪽을 선택할 것이다.

2.12.3. 기타

여담으로 한국의 혈족은 매우 광범위한 범위를 포함하고 있어서, 이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8촌끼리 서로 모두 알고 지낼 확률은 높지 않으며, 이에 따라 결혼하기 전에 서로가 8촌인지도 모르고 우연히 만나서 사랑하다가 나중에 알고보니 8촌 사이이거나 7촌 등인 경우, 혼인이 불가능해서 한국의 법률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한편 외국의 경우, 상당수의 국가가 사촌간 혼인을 허용[23]하고 있어 일본의 간 나오토처럼 사촌과 결혼한 국가원수도 있을 정도이며, 미국도 주에 따라 법이 다르지만 한국 정도로 엄격한 주는 찾아보기 힘들다.

2.13. 강간에 의한 경우

2.13.1. 국내

모자보건법
시행 1973. 5. 10. 법률 제2514호, 1973. 2. 8., 제정
보건복지부(출산정책과), 044-202-3399

제1조 (목적) 이 법은 모성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보건향상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8조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의사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되는 경우에 한하여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자를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얻어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②제1항의 배우자의 동의에 있어서 배우자가 사망ㆍ실종ㆍ행방불명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동의를 받을 수 없는 경우에는 본인의 동의만으로 그 수술을 행할 수 있다.

③제1항의 경우에 본인 또는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때에는 그 친권자 또는 후견인의 동의로서, 친권자 또는 후견인이 없는 때에는 부양의무자의 동의로서 그 동의에 갈음할 수 있다.

한국에선 이미 10월 유신부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임신은 법적으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허용했다. 한국에선 낙태죄에 대한 존폐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2.13.2. 국외

미국 오하이오주 하원의원이 "만약 13세 소녀가 강간을 당해 임신했어도 낳으라는 건가?"라는 질문에 "잉태한 생명을 어떻게하면 생산적인 인간으로 키울지 다짐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라고 답변하여 논란이 되었다. #

3. 낙태 금지론과 반박

자신의 경험과 낙태 과정을 설명하는 의사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

3.1. 그 어떤 수단으로도 살인은 허용할 수 없다

가장 강력하고 대표적이고 대부분의 낙태반대론자들이 말하는 주장. 사람이 살다 보면 온갖 경제적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삶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낙태 역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견해. 태아를 어느 시점부터 생명으로 보는가는 많은 논란이 있는 주제이지만[24] 우리나라에서 나이가 태어나자마자 1살부터 시작하는 것 (=뱃속에 있는 기간도 나이로 친다)처럼 출산의 순간을 생명 탄생의 순간으로 보지 않고 수정 순간을 인간으로서의 시작으로 생각한다면, 살아 있는 생명인 태아를 낙태하는 것은 살인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생후 n주된 태아부터 생명이라면, n-1주가 된 태아를 낙태하는 것은 가능하지?"라는 다소 타협적인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수정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생명이다'라는 견해를 주장하게 될 경우, 낙태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허용할 수 없는 살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수정되는 순간부터 생명'이라는 견해는 가톨릭이 지지하는 견해이며,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과학자, 비종교인들 중 꽤 많은 수도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는 비종교인들도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떡밥에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또한 수정란이 생명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그렇게 따지면 정자난자도 생명이냐는 반박이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낙태 반대론자들도 이러한 관점을 가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25] 심지어 낙태를 금지하고 생명계에 대해 엄격한 카톨릭 같은 종교들도 정자와 난자는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정자와 난자는 시간이 지나봤자 절대 혼자서는 저절로 장성한 인간이 될 수 없으니, 최적의 조건에 있으면 장성한 인간으로 자라는 수정란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운동성을 근거로 정자를 생명이라고 한다면, 역시 운동성을 가지고 있는 백혈구 역시도 생명이 된다. 애초에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수정란에게, 정자와 난자와 같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낙태 금지론자뿐만 아니라 허용론자들 사이에서도 거의 없다.[26]

3.2. 생명경시 풍조

위의 의견과 연관된 문제이다. 낙태가 합법이 되면 여성들이 임신에 대해 가벼운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아이를 키울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낙태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 태아를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로 인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낙태율은 세계적으로 꽤 높은 축에 속한다.[27]

대부분의 여성들은 낙태의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을 뽑았는데 싱글맘의 경제적 수준의 통계를 보면 알수 있다. 엄연히 피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낙태율이 높다는 것은 성관계 당사자들의 안이한 판단과 성개념 부족뿐만이 아니라 여성이 성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갖추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무지가 팽배해 있을 경우엔 당연히 성관계로 인한 임신이 늘어나고, 임신이 되었을 경우에 선택이 결혼/미혼모/고아원or입양/낙태로 나뉘는 가운데 가장 부담이 되지 않는 선택이 낙태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기혼자, 그러니까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가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가졌을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서 선택지가 더 줄어든다. 낙태/유기/어쩔 수 없이 키우기 정도. 흔히 낙태를 '결혼도 안 한 것들이 몸을 함부로 굴린 끝에 남자가 책임 안 지고 도망가서 어쩌구저쩌구' 같은 편견 어린 이미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기혼 여성이 낙태하는 일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이 무게있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분위기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지일 뿐 실제 겪는 인간의 인생에 있어서는 중요도를 잃어버릴 정도로 생명에 대해서 충분히 혹은 감히 논의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사단이 난 것으로 보인다. 기억하자. 합의하고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 임신에 대해서도 논의해야지만 진정한 합의라는 것을.

더불어 자신의 아이를 죽여버려도 정신적으로 상처받을 일도 없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해지며 성별을 막론하고 살인이라는 행동을 가볍게 여기는 세상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해지고 낙태가 만연해지는 세상이 되면 사람에게 복수한답시고 죽여도 "태어나기 전 애기는 죽여도 되는데 태어난 사람은 안 된다는 법 있어?"같이 극단적으로 살인에 무감각해지는 세태로 변할 수도 있다. "사람을 죽여도 죄책감을 느끼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노미 현상이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살아있는 생명도 아닌 시체에 대해서도 존엄성을 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제네바 협정은 전시 적군의 사체 훼손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도 사체등손괴·유기·은닉·영득죄 같은 죄가 있다.[28] 이는 이미 문화적인 관점으로 유지되고 있다. 많은 문화권에서 시체 훼손은 그 당사자에 대한 극심한 증오심을 품지 않은 한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엄격한 금기행위로 여겨져 왔다. 심지어 오자서굴묘편시처럼 복수심에 기반한 시체 훼손도 금기시하기도 한다. 또한 장례법의 차이로 오해가 발생하여 서로가 좋지 않은 감정을 품기도 한다. 예를 들어 조장이나, 줄루족의 장례법 등이 그것이다.

3.3. 낙태가 안 되면 피임을 하고, 피임이 불안하면 안 하면 되지

하지만 대한민국의 피임률은 낮은 편이다. 질외사정피임 성공률이 극히 낮다. 명심하자. 유화책에 가까운데 낙태를 금지하는 대신, 피임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피임에 실패한 사람들에 한해 허락하면 되지 않겠냐는 주장이다. 문제점은 피임 실패한 사람과 그냥 낙태하고픈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이 아직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에도 낙태보단 피임이 권장되며, 방법도 훨씬 쉽기 때문에 피임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사실 피임실패자를 제외하고는 낙태VS피임 중에서 피임을 피할 이유는 별로 없다.

다만 여기서 아예 논외로 쳐야 할 대상이 있는데 바로 강간 피해자다. 성관계 자체가 애초부터 스스로의 선택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언제 강간당하고 임신할지 모르니까, 가임기 여성들은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늘 피임 대책을 강구하고 사세요!' 이러는 것도 미친 소리다. 애시당초 강간 피해로 임신한 사람의 낙태까지 금지하자는 의견은 극히 희소하다.

피임 방법인 콘돔이 자극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강제로 금지하는 남성들도 있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없고 책임의식도 없는 짓이므로 하면 안 된다. 애초에 이런 경우도 강간에 성립된다. 강제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피임을 요구하는데도 폭행/협박으로 여성을 굴복시켜 무피임으로 성관계를 했다면 강간죄가 성립된다. 국내법에서 강간의 기준은 폭행/협박이다.

현대 피임 기술은 매우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피임약 + 콘돔을 시행한다면 임신 가능성이 현저하게 하락한다. 하지만 아직 피임약에 대한 인식의 문제 때문에 대부분 콘돔에 피임 방법을 의존한다.[29] 콘돔의 피임률은 96%. 실패할 확률도 있다는 뜻이다. 관계시에 콘돔이 찢어지거나 벗겨지는 등의 경우다. 하지만 당연히 이런 것을 예견하긴 힘들며 이런 경우에 피임 실패가 발생하게 된다. 이런 콘돔을 사용했을 때 실패한다면 사후피임약이라는 대체재가 있긴 하지만 경구피임약의 배 이상인 호르몬 폭탄이라 부작용도 매우 크며, 빨리 먹어야 할수록 효과가 있기 때문에 성공률도 높진 않다. 결과적으로 여성쪽에서 귀찮음을 감안하고, 미리 경구피임약을 먹는게 안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피임약에 대해 부작용/거부감이 있는 여성에게 강요하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여러모로 피임약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하루이틀 걸리는 일은 아니겠지만. 피임약의 자세한 부작용이나 제대로 된 콘돔 착용방법은 피임참고.

또한, 많은 낙태 옹호론자들은 콘돔이나 여타 피임방법 역시 100% 피임을 시켜주지는 않기 때문에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것 역시 낙태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이는 #s-2.6번 문단과도 일맥상통하는데, 당신이 강간 피해자가 아닌 이상은 아무도 당신에게 피임도구를 사용하더라도 피임실패 확률이 있다는 사실을 꽁꽁 숨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아무도 당신에게 의무적으로 성교를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시당초 피임 기술이 완벽하지 않은 이상 성교는 반드시 임신할 가능성이 존재하며, 되도록이면 임신을 피하고 싶지만 만약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의 계획도 있는 사람이 피임기구를 사용해 성교를 하는 것이지, 무슨 일이 있어도 임신을 하기 싫은 사람은 성교[30]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

강간과 같은 정말로 불가항력한 임신 혹은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낙태 허용 주장 대다수는 결국은 섹스를 즐길 자유와 태아의 생명을 저울질하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애시당초 아기를 만들기 위해 하는 행위인데 그 확률을 1할 이하로 줄이고도 불안할 정도로 아기를 절대로 만들기 싫으면 대체 왜 그렇게까지 못 해서 안달인 것인가? 애인끼리 서로 사랑하고 싶은 욕구는 당연한 것이고 개인의 자유가 맞지만, 현대 대다수의 국가들에서는 비삽입성교나 유사성행위[31]가 금기시되지 않는다. 질내삽입이 없어도 애인끼리 만족스럽게 성욕을 해소하고 육체적으로 교감할 다른 안전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콘돔도 완벽하지 않다는 등의 소리들은 결국은 핑계인 것이다.

3.4. 본인의 행동에 책임져야

본인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낙태의 대부분의 이유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책임감 결여이거나 무지 때문으로, 합의된 성관계 시 당사자들이 성관계를 맺을 경우 임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서 한 것이므로 본인들의 행동에 책임이 크다는 의견이다.

이 분야의 유명한 예시로는, 상단 "피임했음에도 임신한 경우"에 나온 주식 투자와 (번식 목적 외의) 성관계에 관한 비유가 있다. 위에서 이미 한 차례 서술된 관계로 간략하게 표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주식 투자 번식 목적 외의 성관계
담보 초기 투자금 본인/상대의 신체[32]
위험 주가 하락으로 인한 금전적 손실 임신
책임 금전적 손실의 감내 출산
이득 차익 및 금전적 이득 성적 쾌락
근본적 목적 이득을 위해 위험을 감수 이득을 위해 위험을 감수
안전 장치 변동이 낮고 안정적인 종목에 투자, 펀드매니저 고용 등 콘돔, 정관 수술, 피임약 등
책임의 주체 본인(본인의 의지로 주식에 투자했으니) 본인(본인의 의지로 성관계에 동의했으니[33])
필수 여부 X[34] X[35]

이렇듯 주식 투자와 성관계, 아니 모든 종류의 투자와 성관계는 상당한 유사점을 가졌다. 그런데, 본인의 의지로 한 투자에서 손실을 봤다고 해도 누가 그것을 회복해주지는 않는다. 손실은 본인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관계 시 임신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본인의 의지로 한 성관계였다면, 이를 바탕으로 낙태하는 것은 그저 본인의 책임을 그저 미래에 태어날 태아에게 떠넘기는 것 외에는 없다.

3.5. 기타 논란 거리

극단적인 케이스이긴 하지만, 연인이 사이코패스 살인자임을 임신 상태에서 알았을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태어날 아기가 연인의 나쁜 피를 이어받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우려하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사이코패스가 생기는 원인이 완전히 밝혀지는 상황에서 단지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낙태를 하는 것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더구나 부모가 사이코패스라 하여 자식도 반드시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주는 사례도 있다. 메리 플로라 벨이 낳은 딸은 비교적 멀쩡하게 성장했기 때문.

다만, 연인의 정체를 안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강간을 당한 듯한 모욕감을 느낄 수 있고, 태어난 아이에게 정서적 학대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제가 된다.[36]

연인이 사이코패스인 경우는 아주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폭력적이거나 게임이나 도박에 중독되는 등 자신과 아이를 책임지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임신 후에 알게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경우 역시 드물기야 하겠지만, 폭력성을 임신 후에 알게되거나 임신한 아내를 폭력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임신 후에 게임이나 도박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연인이 폭력적인 경우, 자신와 더불어 아이에게도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위의 경우에서 이혼하고 아이는 키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부모가정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아이와 부모의 성별이 다를 경우의 어려움도 있지만, 맞벌이 가정처럼 어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극히 적다는 점 등 많은 어려움이 있다.[37] 그리고 혼자서 아이를 책임지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 역시 좋지 않다. 이혼가정에 대한 시선도 아직 개선이 필요하다. 더불어 아직까지도 여성이 혼자 아이를 책임질 때 "집에 남자가 있어야지..."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리고 나라가 정말 미래가 없이 막장인 경우에도 아이를 낳아야 하느냐가 논란이 될 수 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거나, 인신매매를 당하는 정말 고통스러운 나라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 국제 구호단체에서 나서고는 있지만, 정치 상황이 막장인 경우엔 정말로 답이 없다.

낙태허용론자의 진짜 문제는 좀더 근본적이고 복잡한 사회문제를 낙태 허용 하나로 등치시키려고 하는것이다. 낙태허용론자들이 주장하는 미혼모/미혼부의 경제, 사회적 인식 문제, 장애 아동문제, 강간 문제는 관련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매우 복잡하고 근본적인 사회의 문제들이다. 그런데도 낙태허용론자들은 이런 근본적인 사회문제는 내버려 둔 채, 낙태문제만 허용하면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낙태허용론자들의 임시조치식 낙태허용은 사회문제를 근본부터 악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38] 하지만 이건 애매한게, 그렇다고 해서 낙태반대론자 측에서도 위의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도우려는 모습은 아니다. 심지어 극단적인 남초사이트 이용자들은 '여자는 뱃속의 아이를 마음대로 죽일 권리가 있으니 남자도 마음대로 강간, 살인 할 권리가 있다.'라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한 커플이 '낙태하지 마세요! 그 아이는 우리가 입양해 키울게요!'라는 팻말을 들고 있지만, 실상 40만명이 넘는 아동이 위탁보호가정을 떠돌고 있는 미국

3.6. 낙태허용이 정말로 여성인권을 위한 길인가?

낙태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언뜻 생각해보면, 여성해방이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대로 여성인권을 탄압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당장 낙태수술을 예로 들어도 그 수술, 남자가 받는가? 결국 임신하는 것은 여성이고, 여성의 몸에 칼을 대는 일이다. 일부 여성우월주의자들이 "자궁이 없으면 말하지 말라"라고 말하지만, 낙태 역시 자궁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안 그래도 이미 임신 사실을 알렸더니 돌아온 말이 축하가 아닌 해고 통보였다는 경험담이 부지기수라 각종 언론에서도 상당한 문제를 제기한 바가 있는데, 낙태가 합법이 되면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이는 미혼은 물론 기혼 임산부도 해당되는 문제다. 특히 최저임금이 표준임금이 되고 최대노동시간이 기본노동시간이 되는 대한민국에서는 낙태합법화=낙태의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가적으로도 낙태허용을 대안으로 내새우며 임산부 복지정책을 폐기하는 걸 몰라도, 적어도 신설하는 것은 더 어렵게 만들것이다. 실제 산아제한을 하던 유신정부에서 낙태를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출산지원을 억제했던 전적이 있다. 낙태론자들은 자칭 여성의 인권 때문에 낙태를 허용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처럼 낙태허용이 역으로 임산부와 아동의 권리를 더 박탈하는 꼴을 초래할 수 있다.

당장 낙태허용측은 아래에 종교적 이유를 이슬람을 들며 반박했는데 자기들은 부정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메이저 종교를 믿는 지역들 중 여성인권이 가장 심각하게 유린되고 있는 곳은 바로 이슬람교 근본주의인 지역이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허용이 진실로 여성인권을 위한 수단인지 의문이 든다.

3.7. 반박

성행위 시에 수정을 하려고 하는, 생명을 발아시키려고 하는 정자나 난자가 수정란과 뭐가 다르냐는 의문이 극단적인 논리라면 수정 후 몇개월 된 태아를 죽이는 것이나 수정이 된 직후의 수정란을 죽이는 것은, 결국 생명이라는 연장선상에서 똑같이 살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극단적인 논리가 아닌가? 이 경우 정말로 질내 사정 이외에는 허가하지 말아야할 판이다. 더불어 유전자 복제 역시 비슷한 도마위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대체로 이보다 지키기 쉽거나 통제하기 쉬운 규제같은 것들도 밀어붙이다가 유명무실하게 끝나거나 파탄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로는 태아가 보통 사람의 생명과 동급이라고 볼 경우, 선택이 불가능한 약자인 아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자에 속하는 산모의 목숨을 위해서 낙태를 하는 것도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이와 산모 둘다 죽는 경우만 아니라면 산모의 죽음을 각오하고 낳게 해야한다는 주장도 불가능하진 않다. 그러나 이 논리로는 '넌 아이를 낳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몸을 지닌 여성이니까, 넌 평생 성교를 하면 안돼! 피임한다고? 어떤 피임이던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구!'라는 억지도 가능하다. 이 주장은 신체나 사회조건을 이유로 인권침해(생존권이나 성적 자기결정권의 박탈)를 정당화하는 주장이므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장애아의 낙태가 부모 혼자의 개인적인 결정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낙태를 결심할 정도의 장애아의 경우 그 전체 인생의 상당 부분을 부모에게 기대는 것 또 한 사실이다. "그들이 행복한데 왜 죽이려고 하느냐?"는 주장은 반대로 그들의 행복을 위해 부모의 인생을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사회의 도움을 크게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가족 중 중증 질환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가족 중 누군가 혹은 가족 전체가 큰 고통을 받는 건 어느 나라이건 간에 현실이다. 정신이 멀쩡한 중풍환자의 경우에도 제대로 된 생활을 위해서는 식사, 대소변 받이, 목욕 등을 담당하는 누군가가 필요하며 이런 일을 전담할 시, 다른 개인적인 용무나 사회 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요인은 개인 차원에서의 문제뿐 아니라 경제적인 수입 면에서도 확실한 불이익을 불러오는 데, 여기에 주기적인 치료나 수술이 뒷받침 되어야 할 시,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하며 결국은 모두 다 불행해지는 결과를 나을 수 있다.

육체가 건강하고 정신에만 문제가 있는 경우도 한국에서 장애아와 장애아 가정의 삶은 팍팍하다. 여성 장애인의 경우, 인지 능력의 모자람을 이용하여 성추행,폭행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심각한 사건으로는 경미한 정신 장애를 가진 여성을 마을 단위로 성폭행 한 일도 있었다. 남성의 경우, 신체가 발달함에 따라 더 이상 부모가 장애아를 컨트롤 할 수 없어지고 그로 인해 문제가 왕왕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39] 특히 여성 혼자서, 혹은 주로 여성이 남성 장애아를 돌 볼 경우 이 문제가 심각해 지는 데, 이미 '성인 남성의 육체'를 가진 장애아를 여성 혼자 제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장애의 정도가 육체,정신 중 일부에서 극히 미미하게 발현된 게 아니라면, 장애인의 자립과 사회 진출은 대부분 불가능하며 위의 문제들로 인해 부모가 상시 보호해야 그나마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의 대한 사회 각계의 보조는 경미하고, 인식은 철저히 차가우며, 장애인의 정상적인 행복을 위해 부모의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런 상태가 평생 계속된다는 점을 직시한다면 장애아의 낙태를 선택하는 부모를 단순히 '이기적' 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성교육으로 피임법을 알려 낙태율을 줄이자는 의견은 겉으로 보면 참으로 이상적이기 그지없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옳게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무리 교육해도 이 세상 어딘가의 철부지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싸지르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고 그런 철부지들을 구제할 가장 쉬운 방법이 낙태니 줄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낙태를 허락하는 국가들 중에서 성교육을 시키지 않는 나라가 있긴 한 걸까? 물론 성교육의 질적 차이는 구분지을 수 있겠지만 사실 사람들이 모두 이상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한 변수는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변수를 어떻게 처리하나에 대해서 국가들이 고심하는 것이지 성교육을 시키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점에서는 반대 측의 지적 포인트가 어긋났다고 볼 수 있다.

낙태 허용론 반박 부분을 살펴보면 "성교육을 제대로 하면 문제가 상당 수 해결될 것이다"라는 논조이다. 분명 그러한 면은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성교육을 할 시 성관계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꺼리는 편이고, 이로 인해 제대로 된 성교육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아진다. 또 혼전 성관계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인 묘사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신체적인 자유를 제한하자는 태도이며,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개인의 가치 판단이 충분히 이뤄진 상황에서 타인이 그 결정에 영향을 주려는 행위는 강요나 다름없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남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지막 문단, 마지막 줄의 경우, 책임을 도입한다면 부작용 또한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며, 윤리적인 면에서 "좋지 않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강제적으로 투영하려는 행위는 해당 부분에서 "태아의 행복을 산모가 결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과 모순된다.

낙태반대론에서 생명이 1순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제적 문제를 마치 사회적 인신과 제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당장 사회적 편견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미혼모와 미혼부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다. 그리고 낙태 이야기를 할때 경제적 혹은 피임 문제를 넘기는 것은 또 다른 무책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장자가 돈이 없어 친구에게 돈을 부탁하러 갔는데 친구가 주기 싫으니 다음에 돈이 들어온다며 핑계를 되자 장자가 물고기 이야기[40][41]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실수 안 하면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왜 중국 같은 나라에서 강제로 인구를 조정하겠는가. 애당초 그게 조절이 된다면 불륜이나 사생아가 발생이 왜 되겠는가. 그리고 피임의 책임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 대다수 있다. 질내사정을 하는 쪽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이다. 일단 남자가 물리적으로 힘이 세기에 여성이 거부해도 질내사정을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성폭행이 되지만 서로 관계를 맺다 흥분한 남성이 사정을 자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게 쉬우면 콘돔이 왜 있겠는가?

영화 《굿바이 싱글》이 이런 미혼모의 사정을 잘 이야기 해준다. 낙태가 나쁘다고 말하는 주인공에게 미혼모는 '그럼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일침을 가하고 이에 대해서 대답하지 못한다. 즉 경제적 문제는[42] 낙태 문제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생명은 굉장히 소중하다. 하지만 사회적 이면에는 돈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과 돈이 없어 병의 시달리다 죽는 사람 등 금전과 생명은 연결되어있다.[43] 가난은 사람을 비참하고 동시에 폭력적으로 만든다. 미혼모와 미혼부가 처음에는 본성으로 아이를 키우겠지만 동시에 가난에 지친다면 그 폭력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한 문제다.

하지만 위 주장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녀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44] 반론으로 낙태는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라고 반박할 순 있겠지만 그 선택권이 곧 (위에서 내리 주장했던 사회적 압박이라는 요소로 인해) 의무가 되는 것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찬성론자들이 말하는 경제적 문제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낙태의 현실적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으로 낙태를 원하지 않는 경제적 약자와 장애인 부모를 위한 길이다. 낙태가 길이 아니라 낙태를 하려는 사람들의 사정과 이를 완충해줄 길을 만들자는 것이지 절대로 무조건 낙태 찬성이 아니다. 낙태를 한 후 이를 사후 관리할 시스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낙태를 찬성 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약 실행된다면 낙태 이후 당사자에게 향할 비난을 막아주고 의학적으로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거나 적어도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게 만들 체계적인 관리는 필요하다. 단순히 찬성과 반대가 아니다. 애당초 찬반 논쟁을 하는 이유도 낙태 혹은 낙태 금지가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지 절대로 우생학적 혹은 도덕적 논리를 강제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고 아래 문단에 나와 있듯 미국같은 경우 우리나라 보다 낙태율이 낮다고 하고, 처음 비영리 낙태를 시술해주던 병원들도 문을 닫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낙태 문제의 올바른 접근 법이다. 당장 네이버에 미프진을 검색해 보면 이에 대한 질문이 넘치고 심지어 미프진 판매를 한다고 네이버 광고에 뜨고 있다. 우리나라는 낙태가 불법인데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낙태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개중 거짓말도 있긴 하겠지만, 낙태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것 자체가 마음놓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적 안정망의 구조나 피임에 대한 구체적 상식이 제 구실을 못하거나 아예 없다는 이야기다. 미국, 프랑스, 독일의 예만 보더라도 홀부모 수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진출은 비교적 용이하다.

그리고 아일랜드 같은 경우 영국으로 낙태 원정이라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진다. * 낙태와 찬성과 반대 모두 사후 관리와 예방에 힘써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낙태율은 줄어들 것 이다. 그렇지만 찬성과 반대 모두 자기 주장에만 힘을 싣고자 한다면 서로 다를 바 없이 사회에 내몰린 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또다른 자들일 뿐이다. 반대론자 역시 낙태 찬성론이 힘을 잃도록 적절한 예방과 사후 관리 그리고 혹여나 강간 때문에 임신하더라도 확실히 낙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도록 돕고, 낙태 찬성론자들도 예방, 사후 관리 그리고 낙태 이후 여성이 가질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단순 윤리 혹은 하나의 사례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바로 아무런 편견 없이 미혼모 혹은 미혼부을 도와주는 종교인들이다. 비록 종교를 좋게 보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종교계는 낙태를 반대하는 동시에 단순히 생명의 소중함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미혼모 혹은 미혼부를 도와주고 만약 그들이 키울 수 없다면 고아원과 베이비박스를 만들어 그 생명을 지켜준다.[45] 굿바이 싱글에서 미혼모가 결국에 도움을 받는 곳은 기독계 계열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센터다. 필요한 여러 가지[46]를 도와주며 입양도 돕는다. 누군가는 위선이라고 욕할 수 있겠으나 이에 반대하면서 경제적 문제를 돕고 있다. 실제로 미혼모들이 생물학적 아버지들에게 양육비를 청구해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미혼모 문서 참고.

이는 낙태 찬성론자들도 본받아야 한다. 찬성론자들이 경제적 이유를 들어 낙태를 허용하자는 것은 생명을 1순위로 두어야 하는 사회 윤리에 어긋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비록 자기 결정이라고 해도 미혼모[47]가 낙태로 가질 죄책감과 혹시 낙태로 인한 후에 임신 불가 등 여러 문제가 산재한다. 그리고 낙태는 절대로 공짜가 아니며 병원 입원과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 즉 낙태 찬성자들은 낙태 반대론자 못지 않게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낙태 문제는 찬성과 반대 어느 쪽의 손도 들어줄 수 없지만, 올바른 행동은 존재한다. 둘 다 미혼모와 미혼부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사회적 안전망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낙태를 한다면 이를 단순히 비난하지 말고[48] 설득과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낙태의 비율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하겠다면 낙태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도와줌으로써 후에 생활의 지장 없게 해주어야 한다.

결국 낙태는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범죄 혹은 건강의 문제가 아닌 임신을 낙태하려 했을 때 사회안전망이 최대한 발휘되어야 낙태 문제는 성립된다. 여기에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그럴싸한 현실적인 이야기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혼모와 미혼부란 말과 함께 이들이 비판받는 것은 정식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무책임 이전에 터부시하는 시선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이 미혼모와 미혼부는 경제적 약자가 대다수라는 점이다. 만약 미혼부와 미혼모가 경제적 지위가 높다면 과연 터부시당할 것인가. 결국 낙태의 문제 보다는 사회적 지위에서 오는 차별과 시선이다.

4. 낙태 허용론과 반박

친절한청와대 : 낙태죄 폐지 청원에 답하다_조국 수석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

4.1. 자기결정권의 우선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은 낙태 허용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며, 낙태가 허용되는 국가들에서 낙태의 주요 근거가 되는 주장이다. 임신 중의 상당 기간 동안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일어나는 피해가 생명권의 침해로 일어나는 피해보다 심각하기 때문에 임신 중절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자기결정권이 생명권보다 우선시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낙태죄에 있어 자기결정권의 범위는 상당히 방대하며 가볍지 않다. 태아의 생명권을 절대적으로 우선하는 상황이란 직접적인 낙태의 결정을 금지하는 상황 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낙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행하는 선택을 모두 금지하는 상황을 뜻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는 정관 수술 등 원천적인 피임 수단을 활용하지 않은채 이루어지는 생식 목적 외의 모든 성행위에 해당한다.

낙태죄가 존재하면서도 원천적인 피임 수단을 활용하지 않은채 이루어지는 생식 목적 외의 모든 성행위를 허용하는 사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피임 방법은 여성이 임신 할 확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이 아니더라도 임신을 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이때 분명히 그들은 생식 목적으로 성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개인은 낙태죄에 의해 출산이 강제되게 된다. 다른 목적의 성행위를 허용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 선택이 침해되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낙태죄가 있는 나라에서 모든 성관계는 생식의 목적을 위한 것으로 강제되며 피임에 성공한 경우 양육의 의무를 운좋게 피한 것일 뿐인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수정란이라도 희생되지 않기를 원해서 낙태죄를 유지하는 입장이란, 생명권 침해의 여지를 만드는 한 정관 수술 등 원천적인 피임 수단을 활용하지 않은채 이루어지는 생식 목적 외의 모든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되게 된다. 만약 생식 목적 외의 성행위를 인정한다면 확률적으로 발생하는 임신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지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게 허용이 되어야만 진정 개인의 선택을 허용하는 사회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낙태죄는 단순히 생명의 기준이 어디까지 인가를 다루는 것 뿐 만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이 자유롭게 성행위를 할 자유를 인정하는가를 다루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국가는 개인의 성행위를 제한할 권리가 있는가? 이때 한국과 미국 등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는 국가에서는 국가가 특정 상황이 아닌 포괄적인 범위에서 이러한 개인의 권리를 제한할 권리가 없다고 보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 하다고 본다. 그리고 제한 할 수 없다면 자기선택을 지키기 위한 범위의 낙태를 허락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에서 낙태죄에 대한 논의는 자기결정권을 가장 기본으로 둔 상태에서 태아가 일정 상태 이상 성장했을 때에 생명권이 결정권보다 클 수 있다고 예외를 두고 거기에 또 강간 등 특수한 상황에서의 임신 중절을 허용하는 이중 예외를 두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에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국가들로는 이슬람권과 가톨릭권의 국가들이 있다. 이 국가들은 종교적인 교리로서 성행위는 생식을 전제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보기 때문에 낙태금지에 대한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특정 종교를 국교로 두지 않는 한국의 입장에서 이들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기결정권은 낙태죄 문제에서 태아의 생명권과 대비되는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다. 그럼에도 현재 나무위키의 현 문서는 생명권에 관련한 서술에만 집중되어 있어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는 입장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은 서술이 많다. 예를 들어 자기결정권의 관점에서 낙태를 판단하는 경우 본 항목 초반부의 다양한 쟁점에 대한 내용은 생명권이 자기결정권을 초월하는 특정 시점 이후에도 임신 중절을 허용할만큼 다른 기본권을 침해하는 예외가 있는가를 구분하는 각론적인 내용에 불과하며, 낙태의 허용 유무를 다루는 근본적인 쟁점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들이다. 따라서 이 항목에서 정보를 얻으려는 사람은 이 점을 감안하여 정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4.2. 사회적 편견 및 불합리

여성이 아이를 키우며 직장 생활 등의 활동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을 슈퍼맘(super mom)이라고 부르는 건 이에 기반한 것. 이러니 아이를 가진 여성이 주부 학교나 사이버 학교 이외의 학교에 다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아이양육해줄 사람이 없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학교는 그 여성에게만 퇴학을 먹이고[49] 사회는 화냥년으로 보는 게 일차적인 문제이다. 현재 학업을 다시 시작하는 중년 여성이 상대적으로 중년 남성보다 많은 원인 중 하나가 임신으로 인해 피치 못하게 결혼을 하고 학업중단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편견이 미성년 미혼모가 임신을 하는 순간 계속 학교에 다닐 수가 없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출산 여성이 직장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당하거나 직장과 양육을 병행하기 어려운 직장 문화도 한 몫 한다. 이 경우 대부분 직장을 다니기 위해 아이를 포기하거나 보다 후일로 미룬 경우에 계획에 어긋나는 아이를 임신하게 될 경우 낙태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요즘은 고물가, 생활고 등으로 여성이 맞벌이에 대해 선택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더욱 할 수 밖에 없다.

4.3. 남성책임론의 한계

낙태에 대한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 "남성 책임론"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낙태허용론, 낙태반대론에서 모두 나타나는 것이지만, 낙태 문제에 있어서는 남성책임론으로 낙태 논쟁을 매듭지으려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매우 많다. 그러나 남성책임론은 명백히 한계가 있는 주장이며 낙태문제에 있어서는 이상론에 불과하다.

물론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다고 해도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면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있으며, 이러한 인생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해결책'이 모든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는 책임론으로 해결이 가능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려는 경우" 역시 100% 모두가 만족(여성, 남성, 태어날 아이)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결혼으로 책임을 지도록 한다. →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이 성관계를 하고 임신을 했다고 해도 100% 상대 남성과의 결혼을 바란다고 볼 수 없다. 또한 이처럼 원치않는 임신이 원치않는 결혼까지 이어진다고 해도 여성의 인생이나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가족의 미래가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잘 사는 사람도 있지만, 이러한 '해결책'이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올 뿐일 수도 있다. 가정 불화, 준비되지 않은 데서 오는 많은 충돌, 심지어는 '그때 네가 생기지만 않았다면!' 하는 식으로 애꿎은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는 등 아동학대 문제까지 벌어질 수 있다.[50] 실제로 남성이 적극적으로 결혼을 하고 싶어하나 여성이 그렇지 않은 경우 이런 식으로 임신을 시켜 버린 뒤 반강제로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출산만 여성이 하고, 육아는 남성 측에서 담당하도록 한다. → 여성의 입장에서, 어떤 이유가 되었건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앞으로 보지 않을 타인에게 양육된다는 상황이 썩 좋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른 가정에서 길러지는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는 것이 앞으로의 인생에 어떤 장애가 될지 알 수 없다.
  • 양육비를 부담하도록 한다. → 당연하지만 돈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는 없다.
  • 출산의 문제. → 책임론에서는 어쨌건 남자가 책임진다고 하면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은 1년 동안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무조건 아이를 품고 있어야 한다. 금전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이유로 1년간 신체의 자율권을 침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원하지 않는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해야 한다는 것에 괴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임신출산이 여성의 몸에 미치는 부담은 엄청나다. 원하는 아이라면 기꺼이 참고 받아들이지만, 원하지 않는 아이였다면?

남성 측에서 최대한으로 책임을 진다고 해도, 금전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신체 자율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책임론의 한계이다.

그리고, 이 해결책(?)들은 대부분 미혼 남녀 사이에서 생긴 아이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 낙태는 미혼보다는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더 많은데도 말이다! 정식 부부 사이이지만 원하지 않은 아이가 생겨 낙태를 원하고 있을 때, 이 방법들은 이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또, 만약 불륜 관계에서 생긴 아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결혼으로 해결할 경우, 그저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가정을 산산조각내 가며 불륜 상대와 결혼해야만 하고 원래 배우자는(설령 그 사이에서 이미 아이가 있다 해도) 버림받아야 하는가? 육아나 양육비 지원의 경우, 남성의 본래 아내는 다른 여자가 자기 남편의 아이를 낳는 것을 기다려주어야 하고 남편이 바람을 피워 생긴 결과를 자신의 집에서 키우거나[51] 자기 살기에도 빠듯한 돈을 쪼개 남편의 범죄 결과물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복장터질 상황이 되는데 과연 마찰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일까?

4.4. 임신부와 태아는 별도의 생명체

낙태 찬성론자인 탐슨(Thomson, 1971)은 태아가 어머니의 몸을 사용할 권리가 없으므로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그가 제시한 사고실험이다.
아침에 눈을 뜬 당신은 의식을 잃은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와 등을 맞대고 한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치명적인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 그 바이올리니스트의 동호회 회원들이 가능한 모든 의료기록을 입수하여 면밀히 검토한 결과, 오직 당신만이 그를 도울 수 있는 혈액형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어젯밤 당신은 그들에게 납치되었고, 당신의 신장은 혈액의 독소를 제거할 수 있도록 바이올리니스트의 혈관과 플러그로 연결되어 있다. 병원 관계자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이 이런 짓을 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며 만약 사전에 알았다면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일을 저질러 플러그가 당신의 혈관에 꽂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당신으로부터 제거한다는 것은 곧 바이올리니스트를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9개월만 참으면 되니 그리 심려 마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환자의 상태가 호전될 것이며 플러그도 제거할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탐슨의 요점은 위 상황에서 당신이 플러그를 제거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낙태를 하는 것도 부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탐슨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해보자면, 일단 해당 상황에서 플러그 제거가 부당하지 않다는 것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인되는게 탐슨 개인의 가치관이 들어간 부분이다. 타인의 생명권과 본인의 자유권 중 어느것이 앞서냐는 논란이 많은 주제이며, 많은 경우 생명권에 손을 들어주는 사례가 많다.[52] 저 경우 플러그를 뗐을때 도덕적으로 본인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았다라는 비난이 불가능하지 않다.

또한 저 사고실험이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이미 내부적으로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데, 만약 사전에 알았다면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는 부분은 일반적인 낙태상황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플러그가 연결될 사실(아기가 생길수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모르기는커녕 피임을 안 하고 섹스를 하면 아기가 생겨버린다는 것은,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남녀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해당 담론은 잘못되었다.
아침에 눈을 뜬 당신은 의식을 잃은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와 등을 맞대고 한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젯밤 당신은 그들에게 납치되었고, 당신의 신장은 혈액의 독소를 제거할 수 있도록 바이올리니스트의 혈관과 플러그로 연결되어 있다.
이 부분은 자의적이 아니고 강제적으로 임신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경우에나 성립하는 말인데, 이는 강간과 같이 아주 일부에서나 성립하는 상황일 뿐이다. 실제 대부분의 낙태는 본인의 부주의로 일어난다. 탐슨의 예시에 맞아떨어지는 강간과 성폭행의 경우 많은 나라에서 낙태를 허용하고 있고, 이는 탐슨의 모국에서도 마찬가지이므로 그의 주장에 전혀 맞지 않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탐슨이 옹호하고자 하는 모든 형태의 낙태를 비유하려는 의도로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드는 사람도 있다.
당신은 운전을 하다가 한 아이를 차로 치었다. 당신은 사고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를 냈고, 결국 과다출혈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알고보니 그 아이는 매우 희귀한 혈액형을 가졌으며 우연히도 당신의 혈액형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병원 관계자는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의 실수로 이 아이는 당신이 생명을 유지시키지 않으면 살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골수를 다쳐 당신과 9개월동안 플러그로 피를 교환하지 않으면 이 아이는 죽게 됩니다. 단지 9개월만 참으면 이 아이는 호전되며, 그때는 플러그를 제거 할 것입니다. 다만 그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때까지 보살필 의무가 당신에게는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거절한다면 이 아이는 죽게 되겠죠.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탐슨의 사고실험에 더불어 본인의 의지와 그로 인한 책임감이 들어갔다. 물론 강간 등 본인의 의지가 아닌 낙태의 경우 탐슨의 사고실험이 성립하지만, 다른 이유로 인한 낙태, 특히 피임의 부주의로 인한 임신의 경우 이 사례가 성립한다고 보는것이 적절하다. 이 경우 수혈을 거부한 당신이 과연 도덕적인 비난을 피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또한 이 아이를 살려야할 의무를 가해자의 자유에 맡겨 부과하지 말아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게다가 이 예시 역시 사실은 낙태 옹호론자들의 입장을 굉장히 미화해 준 예시라는 것을 인지하도록 하자. 위 예시의 운전자는 사고에 대한 책임이 무려 9개월을 허비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사고를 내고 나서야 알았고, 교통사고 역시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는 편이지만, 실제 문제가 되는 부주의한 성교를 하는 남녀는 당연히 임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며, 설령 피임을 하더라도 임신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충분히 숙지하고 있음에도 당장 눈앞의 본인들의 쾌락을 위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성교를 한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보면 선량한 운전자가 아닌 음주운전자에 더 가깝다. 물론 음주운전의 경우 상대를 즉사시켜버릴 수도 있는 살인행위임에 비해 임신은 관점에 따라서는 축복받을 만한 일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는 않지만, 이는 낙태를 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53]에게나 해당한다. 당사자들이 여차할 경우 태아를 죽여서 본인들이 불러들인 위기를 해결할 생각이라면 이게 음주운전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애초에 저 경우 아이가 사망한다면 운전자는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처벌된다.[54] 만약 음주운전 중이었다면 교통사고 특례법으로 더 엄히 처벌될 것이다. 이는 낙태죄와 같은 맥락으로서, 9개월의 플러그 삽입을 강제하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낙태죄 존치의 좋은 근거가 된다. 애초에 9개월보다 많은 형량이 부과되면 누구나 플러그 삽입을 할테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낙태죄 폐지의 논거가 아니라, 낙태죄는 과실치사죄나 임신기간인 9개월보다도 극히 낮은 형량을 부과하고 있어 효과가 없는 것이며 형량을 늘려야한다는 점의 근거로 사용이 가능하다.

4.5. 낙태 금지가 정말 아이를 위한 길일까?

낙태 찬반 논란은 종교나 여성주의 논리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태어날 아이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출산이 그로 인해 태어난 아이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임신해놓고 낙태하려는 남녀를 비난하고 책임을 물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아이를 이용해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낙태 금지론자들은 출산 전 태아에게만은 높은 관심을 보이나 출산 후 태아 단계보다 몇십 배나 긴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그저 낳았으니 네가 책임질 일이고 나는 알 바 아니라고만 말한다. 하지만 분명 책임을 제대로 못(안) 지는 부모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아이는 도대체 무슨 죄인가? 이것은 왕따 피해자를 가해자와 같이 불러 사이 좋게 지내라고 원론적인 훈계만 하고 마는 것, 학대 부모에게 학대하지 말라고 말로만 훈계하고 학대 피해 아동을 집에 돌려보내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실상을 무시하고 도덕주의만을 앞세운 위선적인 자기만족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자신은 담당 공무원이 아니니 더 이상 신경 쓸 의무가 없다고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출산의 의무 역시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과학적으로 아직 지각이 없는 단계의 태아는 여타 세포 집합과 다르지 않으며, 임신을 중단한다고 해서 아직 지각 없는 태아 자신에게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낙태를 생각하던 부모한테서 태어나 고통을 지각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로병사를 감내하게 강요하는 것이 더 문제일 수 있다. 어찌 보면 가족에 의한 뇌사자의 연명 치료 중단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맹목적인 생명 활동의 강요만이 생명 존중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지각 능력 여부와 상관 없이 어떤 존재가 태어날 가능성을 막는 것 자체가 문제라면, 우리는 피임조차 하면 안 되고 정자를 낭비하는 자위도 안 되며 끊임 없이 임신하고 임신시켜 누군가 태어날 가능성을 항상 보장해야 한다.[55] 당연히 이는 현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보통 아이에게 장애 등의 악조건이 예상될 때 그것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한 후에 임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태어나지 않는 게, 낳지 않는 게 나은 경우가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비동일성 문제와도 일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4.6. 반박

원하지 않는 임신이라고 하면 보통 강간으로 인한 것이나 사생아를 가진 경우를 떠올리는데, 사실 절대 그렇지만은 않다. 부부인데다, 서로 원해서 성관계를 했으며, 피임을 자기들이 하지않아 놓고, 임신하자 아이가 있으면 귀찮다고 양쪽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지우자'고 쉽게 결론내려버리는 사람들 또한 분명 존재한다. 이 경우는 정말 순전히 피임이라는 안전장치도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낙태를 하겠다는 뜻이 된다.[56] 그리고 현재의 한국에서 벌어지는 낙태는 특히, 낙태폐지론자의 주장들과 달리 미혼남녀이거나 강간에 의한 타의적인 임신에 의한 낙태보다는 법적 부부관계에서의 낙태가 더 많은게 현실이다.

태아의 생명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에서도 말이 꽤나 많은 편인데 기본적으로는 인간이 될 가능성을 기준으로 잡는다. 그렇게 되면 난자나 정자는 생명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이 기준을 가장 많이 따른다. 피임을 정당화할 수도 있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모두 이런 기준을 잡는 것은 아니고 일부 극단적인 종교계에서는 정자나 난자도 생명으로 취급해서 피임도 금하는 경우도 있다.[57]

여전히 한국과 같이 보수적인 국가에서는 이런 성교육의 개선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데 성교육의 질이 한 국가의 낙태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만큼 좀 더 적극적으로 성교육 개선 의지를 통해 낙태율을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성교육을 낙태 허용 국가에서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질적인 차이도 고려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가르침에도 과오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본인이 감내해야 할 일이지 윤리적인 면이나 부작용 면에서도 좋지않은 낙태의 합법화는 반대론자들에겐 여전히 반대할 사안.

낙태 금지론의 반박 부분에 성교육을 해도 낙태할 사람은 하기 때문에 이상적인 주장일 뿐이라는 말은 잘못된 부분이 있다. 법으로 막지 못한다고 허용한다면 살인이나 도둑질도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가르쳐도 못알아먹는 사람들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잘못된 말로, 성교육을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가르칠지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다.

낙태 금지론자들은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고 부모의 개인적인 이유만으로 그 권리를 박탈시켜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세우고 있는 것일 뿐이고 혼전 성관계를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런 상황에서 생겨난 아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에 관해서 낙태 허용론자들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며 혼전 성관계에 대한 시각 자체는 낙태 관련 논쟁과는 상관이 없다. 개인의 가치판단 존중같은 경우도 아이의 생명권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낙태 금지론자들에게 주장하기에는 잘못된 말. 애초에 아이의 가치를 부모가 평가한다는 부분에서 굉장히 불쾌감을 드러낼 것이다.

피임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넘겨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있지만 피임 문제를 국가가 법적으로 간섭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결국 개인이 피임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하고 스스로 피임을 하게 하는 것, 즉 올바른 성교육이 가장 현실적인 부분이다.[58] 그렇게 되면 낙태로 인해 발생할 경제적 문제도 미리 예방할 수 있게된다. 만약 피임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제적 여건을 걱정하는 것은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무책임함을 책망해야하는 부분이다. 물론 그 사람들을 외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부분은 국가에서 경제적 지원을 통해서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고[59] 사회적으로도 인식 개선을 거치면 상황이 나아질 수 있는 것일텐데 단순히 이를 뜬구름 잡는 소리로 폄하할 수는 없다.[60]

오히려 다른 방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데도 낙태를 합법화함으로써 편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야 말로 더욱 무책임한 행동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물론 지금 당장은 낙태가 편한 방법일 수도 있다.[61] 이런 차별적 시선은 나아지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낙태를 허용하면 미래에도 미혼모에 대한 인식이 지지부진해질 수 있다. 낙태를 함으로써 미혼모란 짐을 덜어내면 더 이상 미혼모에 대한 인식 개선을 생각하지 않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왕따였던 아이가 왕따에서 벗어나 3자의 입장이 되면 다시 그 입장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왕따에 적극적으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낙태를 무릅쓰고 출산을 결정한 사람들이 더 많은 차별적 시선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미혼모에 대한 기존의 나쁜 인식때문에 낙태가 늘어나고 이를 개선해서 낙태를 줄여야 한다는 것으로 낙태로 인해 미혼모에 대한 시선이 안좋아진다는 것이 아니다. 짧게 줄이면 '미혼모를 향한 부정적 시선 → 미혼모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낙태 → 즉 미혼모의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자'를 말하는 것이지 '낙태 → 그로 인한 미혼모의 부정적 시선 → 고로 낙태법을 유지해야 한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낙태금지법이 태아의 생명권에 차별을 두므로 낙태를 허용해야 된다는 논리는 부분적으로 반박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모자보건법에서 정하는 낙태의 경우[62] 그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다. 아이가 장애아인 경우, 유전병이나 수직 감염병이 태아의 생명에 큰 위협이 될 정도여야 하고, 부모의 유전자 검사를 거친 이후 태아의 유전자 검사를 거치도록 되어 있으므로 참조 태아의 정상적인 출산이 거의 불가능할 경우에 한정된다. 태아의 생명권자체가 인정되느냐가 모호한 범위에 있으므로 위의 허용론에 나온 것처럼 특정 태아의 생명권<다른 태아의 생명권이어 낙태가 허용된다는 논리는 적절치 않다.

게다가 법의 경우 일부 예외가 있더라도 보호하는 권리가 있다. 이러한 특별한 사례의 경우 일부 생명의 생명권이 다른 생명의 생명권보다 우선될 수 있으며, 이것은 분명 형평성 면에서 문제가 있으나 현실적으로 인정된다. 예를들어 정당방위가 그것인데, 방어자의 생명권을 공격자의 생명권보다 우선시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정당방위법이 특정 생명권을 무시하니 모든 생명은 가치가 없으므로 살인죄는 폐지되어야 마땅하다는 논리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와같이 낙태법에 일부 형평성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토대로 법의 폐지를 주장하는것은 특정 생명권을 보호하지 못하니 모든 생명권을 보호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하므로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문제는 강간에 의한 낙태의 경우 위와 같은 논리로 비호하기 어렵다는 것. 그 이유는 단순히 강간 피해를 입는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한다고 태아의 생명권보다 모체의 자유권 일반이 더 크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법의 허용범위의 취지를 잘못 해석한 결과이기 때문. 강간당해 태아를 임신하는 경우, 임신자체가 일종의 성폭력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으로 모체가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을 비교하는 것이다. 따라서 피임소홀로 임신한 태아를 낙태할 권리에 비해 태아의 생명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더 우선이라고 생각하면 일관성을 해치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낙태 반대론자들의 의견을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태아의 낙태와 대비해 옹호되는 산모의 권리가 생명권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로 부터 자유로울 권리라는 것. 산모가 성폭력 피해로 부터 자유롭고자 피해자 본인이 아닌 제 3자(태아)를 희생시켜도 좋다고 법적으로 허용한 꼴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법적으로 정당화하기 무척 어려운 부분인 것이 사실이며, 낙태 반대론의 주요한 맹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만 강간의 경우 합의성교로 인한 임신에 비하면 산모 본인의 책임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차별성 자체는 확실하다.

또한 한국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표현이 있듯이 아무리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도 삶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며, 이러한 사람들은 지금 역경이 존재한다고 해서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기를 바라냐고 물으면 손서래를 친다. 같은 용액을 묻히면 같은 변화를 일으키는 리트머스 용지처럼 같은 환경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난다면 답을 내기 쉬웠겠지만, 아쉽게도 인간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태아인 단계에서는 당사자가 미래에 자기 삶을 어찌 바라보고 어찌하기를 희망할 것인지 절대로 알 수 없다. 아이의 행복을 추구한다고 낙태를 허용하자는 주장은 삶을 갈구하고 투쟁할 사람들에게서까지 목숨을 빼앗는다는 태생적인 모순과 한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낙태는 분명 임신과 피임에 대한 올바른 인식개선이나 유아, 고아들에 대한 사회 전체의 책임 강화 등의 근본적인 해결책에 비해 간편하고 확실하다. 그러나 그 간편함의 대가로 살고 싶었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목숨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하며, 그 이상의 발전이 있을 수 없는 방법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5. 결론

여러 모로 복잡한 문제이다. 일단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에 임신 지속이 치명적일 경우에 낙태하는 것은, 산모의 생명과 태아의 생명 중 하나를 택하거나 둘 중 그나마 구할 수 있는 산모를 택하는 것이기에 절대다수가 인정하는 편이다. 강간에 따른 임신의 경우도 산모의 정신적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산모의 책임이 전혀 없기 때문에 찬성 여론이 다수를 차지한다. 반면 사회경제적 문제에 따른 낙태, 특히 사고 치고 책임지지 않는 방식의 낙태는 현재 다수의 국가가 처벌규정을 두고 있다.

일단 낙태 문제는 사람이 따라야 하는 도덕이라는게 정말로 실재하는지(도덕실재론), 있다면 그것이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가치인지(도덕 상대주의),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가치인지(도덕 절대주의) 등의 논의와도 연관되어있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낙태 반대론자나 낙태 허용론자 모두 이 문제가 한쪽이 맞고 다른쪽이 틀린 사실판단 문제가 아니라 가치판단에 관한 문제임을 알고 양쪽을 잘 조율하여 결론을 도출해내야 한다. 특히, 임신 몇 주부터 생명으로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데, 특히 이 문제는 자연과학,응용과학, 사회과학의 힘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인문학의 범위까지 끌어들여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낙태 허용/금지 논란과는 별개[63]로,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해야하는 경우나 낙태로 인해 입는 피해를 경우를 줄이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어야 할것이다. 일례로 낙태에 반대하는 종교계는 오랫동안 고아나 미혼모, 미혼부를 위한 지원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심지어 아이를 기르지 못하면 베이비박스 같은 시설을 운영해 책임지고 있다. 설사 낙태가 허용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낙태하는 상황이나 여러 부작용을 막기 위한 대책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5.1.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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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에서 임신 초기에는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을 내리면서 재판관별 판단요지를 살펴보면 9명 중 4명이 헌법불합치, 3명이 단순위헌으로 판단했으며 '자기낙태죄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규정'이라면서 또한 동의낙태죄도 위헌이라고 설명했다.

단순위헌과 헌법불합치를 피력한 재판관간의 견해차는 다수견해인 헌법불합치로 판단한 재판관의 견해와 동일하면서, 위 낙태조항을 폐지되어도 법적 혼란이 크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단순위헌 해야한다면서 추가적으로 임신 14주까지는 아무런 제한없이 낙태가 가능하도록 해야한다는 의견을 냈다.

합헌으로 판단한 소수의견을 피력한 재판관의 견해는 태아가 모체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임신한 여성에게 그 태아의 생명의 내재가치를 소멸할 권리까지는 인정할수 없다면서 국가의 생명보호의무는 마땅히 임신한 여성의 태아에 대한 침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의사낙태죄 조항에 관하여도 위 처벌 조항에 선고유예 혹은 집행유예 선고의 길이 열려 있어 책임과 형벌 간 비례원칙에 위배되지 않고,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업무를 종사하면서 태아의 생명을 박탈하는 시술을 한다는 점에서 위헌이라고 볼수 없다고도 했다.

헌법불합치의 경우 위헌과 달라 기존에 낙태죄로 처벌을 받았던 사람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단을 받을 수는 없다. 만약, 헌재가 위헌 판단을 내렸을 경우 2012년 합헌 결정 이후 새롭게 낙태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들은 재심을 통해 무죄 판단을 받을 수 있을 전망이었지만 무산됐다. 이는 2012년 받은 합헌 결정[64] 이후 7년만에 뒤집어진 결과다.

국회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태아가 모체 밖으로 나와도 치료를 통해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임신 22주 이전의 범위[65][66][67] 내에서 낙태는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 행사에 시간을 보장하는 의미에서 국가가 생명보호의 수단 및 정도를 달리하여 법률에 따라 낙태를 허용할수 있다는 취지로 '자기낙태죄' 및 '의사낙태죄'를 개정하여야 하며, 이 시한까지 관련법의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위 조항은 전면적으로 그 효력을 상실한다. (2020년 12월 31일 혹은 그 이전에 국회에서 낙태죄 개정의 형법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이전에는 현행 조항이 유지된다)

형법 제269조 및 제270조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된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도 위 취지에 맞게 개정해야만 한다. 헌법재판소에서 임신 22주 범위 내에서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해줘야한다고 판시했는데, 위 낙태죄 처벌의 예외사유를 규정한 모자보건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예시로 형법에는 임신 22주 이후 낙태를 처벌한다고 했으면서 모자보건법에서는 임신주수 불문하고 현재의 제한적인 규정에 따라서만 처벌하지 않는다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강보험 적용 여부도 문제인데, 경제적 어려움도 많은 경우 낙태의 원인이기에 이것도 쟁점이 될 전망이다. 당연하지만 여성계는 건강보험 역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2주 이내 낙태 허용은 어디까지나 헌법불합치 4명이 만든 헌재의 권고안일 뿐이며, 특히 천주교, 개신교등의 낙태를 극심하게 반대하는 종교계와 낙태범위를 늘리려는 여성계의 입김중에서, 22주에서 확 줄어들 수도 있다.

5.2. 21대 국회의 입법부작위로 인한 2021년 낙태죄 조항 효력 상실

[헌법불합치, 2017헌바127, 2019. 4. 11. 형법(1995. 12. 29. 법률 제5057호로 개정된 것) 제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은 모두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 위 조항들은 2020. 12. 31.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된다]

결국 21대 국회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대체법안을 의결하지 아니하였고, 이에 자동적으로 2021년 1월 1일부터 부녀 및 타인에 의한 낙태죄 조항은 효력이 상실되었다.

의도되지 않은 법률조항의 효력 상실이기 때문에 대체할 여성의 임신중절에 관한 법령도 따로 없어 붕 뜬 상태이다.

[1] 관련 논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선 재산 분할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낙태를 권장했고, 근대에는 맬서스의 인구론의 영향을 받아 나온 산아 제한 정책에 따라 낙태를 권장하기도 했다. 특히 '둘도 많다'라는 표어까지 만들 정도로 산아 제한 정책이 강경했던 1970년대 한국에서 두드러졌다. 이외에 남아 선호 사상 등도 있다. 그러다 인권 의식이 확대되면서 사그라들었다. 현대에 와서는 일부 극단적인 여성주의자가 남아 낙태 운동을 주장한다. 반출생주의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태어나는 것보다 나으므로 출산보다 임신 초기 낙태가 낫다고 말한다.[2] 시장경제의 대표격인 구호 중 하나가 '선택할 자유' 이다. 즉, 자신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 지는 개인의 자유라는 것. 하지만 무정부사회 또는 자발적 과세 체제라면 몰라도 시장경제 체제라고 해서 사회보장을 위한 세금을 안 걷을 수는 없지 않는가?[3] 출처: 박찬걸, “낙태죄의 합리화 정책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법학연구소, 법학논총, 제27권 제1호(2010), 210면.[4] 출처: 유기천, 전정신판 형법학(각론강의 상)(1982), 75-76면.[5] 출처: 헌법재판소 2008. 7. 31. 선고 2004헌바81 전원재판부 결정.[6] 애초에 피임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위에서 제시된 사회의 차별적 시선 역시 없어지는 것이다.[7] 산아 제한 정책을 실시하던 과거에는 정말 그랬다. 한 동네 아저씨들이 예비군 훈련 갔다가, 이후 며칠간의 동원 훈련을 면제해 준다는 말에 수백 명씩 정관수술 하고 오는 일도 있었다.[8] 산아 제한 정책을 펴던 때엔 무료였으나 정책이 폐지된 이후 정관 수술은 의료 보험이 안 되며, 2018년 현재 수술 비용이 70만 원이 넘는다.[9] 특히 뇌가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은 초기배아.[10] 고살자(식인/낙태 가담원들)들의 생명이 비자발적인 사유로 인해 위독할 경우, 본인의 생명권을 보존하기 위해 타인(리처드 파커/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정당한 위법성조각사유로 성립하는지에 관한 논쟁. 해당 판례의 경우, 식인에 적극 가담한 선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배심원들은 해당 선원들에게 전원 무죄를 선고했고 법정은 수감 6개월 후 석방을 선고했다.[11] 어차피 건강이 나빠질 때에 낙태를 고민하는 산모는 높은 확률로 아이를 얻고 싶어서 임신한 산모들일 것이다.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데 이 상황에 몸까지 안좋다든가[12] 낙태죄에 대해 예비·음모죄를 신설해 범죄를 계획하는 것도 처벌하는 등[13]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법학자들은 성행위를 함으로써 성적 자기결정권을 이미 행사하였고, 낙태를 하는 자기결정권을 다시 행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정철. (2013). 헌법재판소의 낙태결정(2010헌바402)에 대한 헌법적 검토. 헌법학연구, 19(2), p. 325. 및 허영. (1977). 인공임신중절과 헌법. 공법연구, 5, pp. 84-85.를 참조[14] 비단 주식 투자가 아니라 투자라는 정의 자체로 넓혀서 보자면, 미국 등 안정도가 매우 높은 국가의 채권(국채)를 사는 것 등이 포함될 수도 있다.[15] 루프의 피임 실패률은 0.2-0.8%다. 이 확률을 뚫고 임신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는 나팔관에 아이가 착상되어 루프를 빼도 출산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유산된다.[16] 가령 아이가 이미 많이 있는 상황에서 임신을 또 하게 된다면? 엄청난 부자가 아닌 이상 더 이상의 자식은 곤란할 것이다.[17] 여성 100명 대비 남성 인구[18] 일각에서는 T4 '작전' 은 강제적이었고, 중절은 선택이기에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기저에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는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기에 그럴 바엔 미리 편하게 해주는 게 낫다' 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은 다르지 않다. 아이가 장애 또는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면, 보호자에게 해당 아이를 살상하는 것이 합법이어야 하는가?[19] 실제로 선천적 장애인이 있는 가정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광경이다.1 2 3 4[20] 이것만큼 무책임한 소리가 없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들고 고통이 만연한데, 이 말이 씨알이 먹힐 것 같은가. 몇몇 사례를 일반화 하여 사회가 어떠한 책임을 분담하지 않겠다는 선동에 불과하다.[21] 아버지가 극단적으로 쓰레기지만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해 묵묵히 살아온 가정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그 가족이 아버지를 존경할 것 같은가, 원망하고 증오할 뿐이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 중 제일 만만하고 약한 자에게 비판과 폭력이 행해진다. 이게 극단적인 현실에 놓인 사람들의 심리다. 그런데 사회적 편견, 내몰림 당한 여성들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22] 이쪽은 말이 필요없다. 사실상 근친상간을 허용하겠다는 말이니까[23] 물론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24] 이는 법학에서도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형법상으로는 언제부터 사람이냐에 따라 살인죄의 적용여부가 달라지고, 민법상으로는 권리능력을 가지는지의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일단 현재 대법원 판례와 통설에 따르면 형법상으로는 규칙적인 진통을 동반하면서 태아가 태반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 때(진통설)이며, 민법상으로는 출산의 완료되고 태아가 모체와 완전히 분리된 때이다(전부노출설).[25] 물론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한다. 당장 한국의 인터넷 기사 댓글창에만봐도 남자들의 자위조차 살인행위라고 비난하는 여성들이 있으며, 폴란드의 검은 시위를 본떠서 시위한 한국여성들 중에도 정말 자위가 살인이라고 비난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런 논리라면 여자는 매달 살인을 하는 셈이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대다수 사림들에게는 그저 헛소리로 치부되며 비웃음거리만 된다.[26] 혹시 미래에 체세포를 가지고도 완전한 인간을 만들어낼수 있는 기술이 나온다면, 더 구분이 어렵게 된다는 문제점은 남는다. 발생을 시키기 위해 본체에서 분리한 시기인지, 인공 자궁 또는 대리모 자궁에 넣는 시점으로 보아야 할지, 세포 분열을 시작한 때로 보아야 할지...[27] 다만 세계 1위는 아니다. 미국, 일본보다는 높은 수준. 사실 일본이 더 높았으나 복지 향상과 고령화로 인해 줄었다.#[28] 사실 이 쪽은 존엄성 보다는 범죄사실을 숨기는 것에 대한 대응 가깝다.[29] 대표적인 거부 예시로 호르몬에 대한 부작용, 주기적으로 먹어야 하는 귀찮음, 적지 않은 가격이 있다.[30] 당연히 여기서의 성교는 임신 가능성이 있는 성교만을 말한다.[31] 구강성교나 애무 등을 말한다.[32] 여성일 시 본인, 남성일 시 상대의 신체.[33] 동의하지 않은 경우에는 성폭행이 되며, 이 경우에는 성폭행에 의한 임신이라는 완전히 다른 담론으로 주제가 넘어간다.[34] 주식 투자 등 위험을 앉지 않고 말고 금전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그냥 직장에서 받는 급여로 생활하는 것이 있고, 이외의 예시는 너무 많아서 여기 서술하지는 않는다.[35] 비록 성욕이 인간의 3대 욕구에 들어가고 성적 쾌락 등 행복추구권은 보장되어야 하나, 성욕 해소라는 목표는 성관계 이외에도 비삽입 성교, 자위행위 등 임신을 위험에 두지 않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36] 사이코패스의 배우자가 학대를 저지를 수도 있지만, 사이코패스가 직/간접적 학대를 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37] 친정에 맡길 수야 있지만, 친정과 시가에 모두 맡길 수 있는 사람과 친정에만 맡길 수 있는건 엄연히 다르다.[38] 이렇게 근본적인 사회 문제와 관계되어 있다는 점은 허용론자, 금지론자 모두 고려하며 논의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양측 모두 현재보다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고 줄어들은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기에 하는 논의라는 점에서, 전반적인 사회 문제 해결책 없이 낙태죄만을 폐지하거나 계속 유지한다는 가정 하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런 사회적 노력과, 낙태죄 폐지/존치가 병행되었을 때, 어느 쪽이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39] 당장 부산 영아 투기 살인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해당 문서 참조.[40] 한 물고기가 장자에게 살려달라고 물이 필요하다 하니 장자가 귀찮아서 계곡에 가는 길이니 그 때 맑은 물을 가져오겠다고 하자 물고기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그 맑은 물이 무슨 소용이라면서 비꼬는 이야기다.[41] 한 예로 그렇다면 종교계에서 왜 돈을 받고 이를 축적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단순 기부라면 모르겠지만, 십일조 등이 있다. 물론 종교계에서는 이를 자선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를 악용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대표적으로 이를 악용한 모습에 분노해 이들을 벌한 예수님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즉 절대로 금전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애당초 금전적인 문제를 빼놓는다면 이는 무책임하거나 그냥 허공의 되고 하는 소리의 불과할 것 이다. 성선설에서 조차 가난하고 배고프면 짐승이 되기에 이를 배불리 먹이고 안전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한다.[42] 한 아이를 키우는데 드는 비용은 억대에 가까우며, 아직 아이를 맡길 보육 제도가 허술하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아이를 홀로 둘 수 없어 같이 다니거나,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모습 등 정작 눈 앞에 보이는 첨담한 현실에 뭐라 하기 힘들다.[43]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사망한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이 대표적이다. 가난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하지만 현실은 비참하다. 가난 앞에 비극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가난한 자들에 대한 편견은 굳건하다. 만약 미혼모들이 사회적 활동이 왕성하고 사회적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다면 편견을 당할 일은 적을 것이다. 이는 미국의 버니 샌더스가 유색인종이 차별받는 것에 대한 이유로 경제적 약자라는 점을 지적한다.[44] 실제로 한국에서 헬조선 담론이 퍼지면서, 이런 주장이 유행하기도 했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녀를 낳아봐야 그게 유전되니까, 낳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45] 일부 베이비박스가 자식을 버리는 행위를 늘어나게 한다고 하지만, 종교계는 생명을 소중함을 들어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애초에,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버리고 가는 자들은 그게 없었다면 십중팔구 낙태를 하거나 낳자마자 죽이기, 혹은 아무데나 버리고 나몰라라 했을 확률이 높다.[46] 미혼모가 생활 할 수 있는 안전망과 생활 할 수 있는 방 등 여러 가지로 돈이 많이 필요한 일을 한다.[47] 자기도 모르게 낙태를 했다는 소식을 접한 미혼부도 있을 것이나, 생물학적 구조로 낙태로 인한 피해는 여성이 받는다.[48] 비난과 비판은 다르며 단순히 비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게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하면 그 비난과 비판은 범죄다.[49] 혹시 이것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 교육 당국자가 있다면, 당신들이 라는 훌륭한 기관을 달고 있는 것이 맞다면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기 바란다. 대체 왜? 또한 학생을 가르친다는 자들이 그토록 반대하던 학생인권조례에도 학생의 임신 등을 사유로 퇴학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임신 상태에서는 같이 수업을 하기 많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수업이 어려운 장애인들도 학교를 다니는데 임산부라고 못할 리가 없다. 임신부는 분만하면 문제가 없어지지만, 장애인들은 평생 1년 365일 몸이 불편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학교를 다닌다.[50] 아동학대 사건 중에는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아이를 가졌다가 너무 미숙한 부모가 아이에게 짜증을 내다 일을 저지르게 된 경우가 많다. 그 중 가장 참혹하고 극단적인 형태가 부천 초등학생 토막살인 사건. 이 사건의 부모는 형편이 넉넉치 않은데다 자신들의 부모에게서 별다른 사랑을 못 받는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났고, 인간관계가 상당히 고립적이라 도움을 받을 지인조차 없었다. 거기다 또다시 준비되지 않은 채로 둘째가 태어나자 더욱 형편은 어려워졌다. 이 사건의 아버지는 전과자인지라 아무 일도 할 수 없이 집에만 있으면서 육아를 떠맡았는데, 분노조절장애까지 있었다. 그러다 모든 화풀이가 첫째에게로 갔고, 그러다 결국 도를 넘어버린 것.[51] 이 경우 아동학대 위험성이 대단히 높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아동학대의 극단적인 결과인 아동 살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이 절대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52] 대표적인 것으로 방조죄가 성립하는 경우가 있다.[53] 즉 반드시 임신하고 싶은것이 아니기에 피임도구를 쓰지만 만약의 경우 임신을 하더라도 낳을 각오을 가지고 있었기에 관계를 가진 사람들[54] 사망하지 않는다면 보험이나 합의 여부에 따라 처벌되지 않을 수 있다.[55] 이조차도 누군가 태어날 기회를 얻는 바람에 누군가는 기회를 잃거나, 역으로 누군가 기회를 잃은 결과 누군가 태어날 기회를 획득하는 등 역설적인 상황에 빠진다.[56] 이런 사례의 경우, 낙태는 언제든지 자기맘대로 할 수 있어야한다는 낙태자유주의의 극한에 해당한다.[57] 사실 천주교의 경우 혼전 성관계만큼 피임을 싫어한다. 배란 주기법만 인정한다.[58] 성교육이 발달한 네덜란드나 핀란드에서 미성년자 임신이 낮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59] 이 지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도 일종의 복지인데 아직까지 이의 대한 복지 논의 조차 되지 않고 있다. 애당초 복지라는 것이 공동구매이기에 소수인 위드맘(미혼모)에게 돌아오기 힘든 점도 있다. 이것은 정치계가 해결해야 하는 숙제.[60] 인식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꾸준한 교육과 매체의 전달이 필요하다. 아니면 끔찍한 범죄가 발생해야 하는 비극이 자리잡고 있다.[61] 낙태도 사실 절대로 편한 방법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는 부담이 덜하니 선택하는 것.[62] 극히 제한적이지만,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 정하는 사유에 해당하면 낙태를 할 수 있긴 있다. 그 사유로는,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 장애나 신체 질환(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 참조)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모자보건법 시해령 제15조 참조)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이다. 이때에도 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에 따라 임신 24주 이내인 사람만이 할 수 있다.[63] 물론 이렇게 낙태 자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게 안되기 때문에 낙태 금지/허용 논란이 있는 것이다. 종교계에서 모든 미혼모, 고아를 감당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논란 자체와는 별개로 취급해야 맞을 것이다.[64] 당시엔 재판관들이 위헌 4명, 합헌 4명으로 의견이 갈렸고 '태아는 모체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므로 생명권이 인정된다'며 낙태죄를 합헌이라고 보았다.[65] 실제 임신 22주 내외 태아가 출생했을 때 생존률에 대해 다룬 문헌이 존재한다.[66] 헌재는 이를 (낙태) 결정 가능 기간이라 표현한다. 국회는 이 22주 전까지의 기간내에서 하나를 정해 법 개정을 해야 한다. 다만 22주까지 하라고한 것은 헌재의 권고안이라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67] 낙태 허용 기간은 각 나라마다 천차만별이다. 스위스는 10주, 프랑스나 독일는 12주, 호주는 20주, 영국은 의사 2명의 동의하에 2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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