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18 16:49:06

당의

1. 한복의 종류
1.1. 명칭과 유래1.2. 형태의 변천1.3. 착용 제도1.4. 여담
2. 糖衣

1. 한복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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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왕비당의 앞면.jpg
파일:전왕비당의 뒷면.jpg
국가민속문화재 제103호 전 왕비 당의(傳 王妃 唐衣)
唐衣

조선시대 여성의 예복용 저고리. 당의(唐衣)는 보통의 저고리보다 길이가 길고 도련이 둥글고 양 옆선이 깊이 트여 있는 것이 특징이며, 소매 끝에는 흰색 거들지가 달려있다. 거들지는 본래 손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으나, 소맷부리가 더러워지는 것을 막아주기도 하여 거들지만 바꿔서 계속 입을 수 있었다. 예복용이므로 당의를 입을 때는 안에 겹겹이 저고리를 입고 위에 당의를 덧입었다.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주조연 배우들이 당의 안에 저고리를 입지 않는 것처럼 2010년대 이후 한국 사극에서는 이러한 점이 반영 안 되는 편이다.

궁중에서는 당의를 평상복처럼 착용하였고, 계절과 의례에 따라 옷감과 색상, 장식을 다르게 하였는데, 색상은 주로 초록색을 사용하였다. 또한, 신분에 따라 보(補)나 흉배(胸背)를 달아 구분하기도 하였다.

현대에도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여자아이의 돌복이나 신부 한복으로도 많이 입기 때문에 대중의 인지도가 매우 높다.

1.1. 명칭과 유래

문헌에서 '당의'가 처음 등장한 때는 17세기이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은 시간상 촉박함을 이유로 명부(命婦)의 모임에 예복으로 장삼(長衫)을 대체하여 당의를 입도록 한 기록이 있다.
명부(命婦)의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의 복식은, 평시에 있어서는 마땅히 장삼(長衫)을 입고 머리를 수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일이 촉박하여 형편상 구비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임인년 가례(嘉禮)[1] 때에 행했던 예에 따라 양이엄(涼耳掩)에 당의(唐衣)를 입고 입시하도록 하라.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 5월 7일
이 밖에 당의를 당저고리(唐赤古里), 당고의(唐串衣), 당한삼(唐汗衫) 등의 여러 명칭으로 혼용하는데, 《궁중발기》에서 왕비세자빈의 옷은 당고의로 쓴 기록이 가장 많다. 특히 《정미가례시일기》에서 경빈 김씨는 당의복, 가례에 참석하는 내빈은 당저고리, 시중드는 궁녀는 당의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신분에 따라 명칭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당고의, 당의복, 당저고리, 당의 순으로 명칭의 격이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2]

과거에는 당의(唐衣)에서 당나라 당(唐)이란 글자 때문에 당나라에서 유래된 옷이라고 추측하였다. 당의는 당저고리(唐赤古里), 당고의(唐串衣)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는데 모두 당나라 당(唐)자를 쓰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 학자들의 저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1841년(헌종 7)에 박규수가 쓴 복식연구서인 《거가잡복고(居家雜服考)》가 있다. 그러나 박규수도 당의의 기원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밝혔으며 자신의 추측을 썼을 뿐이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당의가 부인의 예복이라고 이른다. 그 제도 또한 녹색이고 좁은 소매에 옆을 트며 길이는 배를 가릴 정도인데 또한 어디서부터 기원하였는지 알 수 없고 이것은 예에 근거가 없다. 【생각건데, 원삼과 당의의 제도는 모두 근본이 없어 이른바 당의라는 것은 당나라 때의 부인의 편복이었는데 우리나라 풍속이 우연히 그것을 본떠 마침내 당의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거가잡복고》 권2는 내복(內服)
이처럼 단편적인 기록만을 가지고 당의의 기원을 중국에 두기에는 구체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또한, 학계의 여러 연구 조사로 의 멸망 전까지는 주로 단삼이라는 단령 형태의 옷을 주로 치마저고리 위에 착용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를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재현하여 주조연 여성 배우들이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당의는 조선 전기부터 입었던 장저고리가 변화·발전하였다는 설을 가장 타당하게 본다. 임진왜란은 큰 전쟁이었던 만큼 의생활에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여성의 저고리 형태는 짧아지고 품에 딱 맞게 변화하고, 대수머리도 임진왜란으로 더이상 칠적관(七翟冠)을 받아올 수 없어서 자체적으로 체발(髢髮)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때문에 임진왜란 전후 복식 비교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나오는 것이다. 특히 종중 후손들이 조상의 묘를 이장하면서 종중과의 협의를 거쳐 조사와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렇게 발굴된 복식 유물이 대학교나 박물관에 기증되는 덕도 크다.[3]
당의는 역대 가례도감의궤의 행렬도나 회화 자료의 분석을 통해 왕조 초의 장유(長襦)가 변형된 국속옷이라고 해야 옳다.
이경자, 「우리 의생활의 전통양식」, 『傳統的 生活樣式의 硏究(中)』, 1982, p.165
둔부를 가릴 정도의 저고리의 길이가 점차 시대가 내려올수록 길어지고 양옆이 트여 당의와 같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후반기 가례도감 반차도에 보이는 저고리의 변천은 광해군비 중궁 유씨의 저고리와 같은 형(形)의 저고리가 점차 길어지고 그에 따라 양옆의 트임도 깊어져 오늘날의 당의제가 성립됨을 알려준다.
유송옥, 『조선왕조 궁중의궤 복식』, 수학사, 1991, p.399
시기상으로 봐도 10세기(907년)에 멸망한 당나라의 복식이 갑자기 17세기(1610년)의 조선에 전해졌을 리도 만무하고,[4] 애초에 당나라 시기의 한족들이 입었던 당나라 한푸는 주로 원피스 같은 형태로, 조선의 당의와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따라서 당(唐)이라는 글자만 따왔을 뿐 당의와 당나라는 그다지 관계가 없고, 여성 한복의 진화상으로 보아 당의는 조선 초기의 장저고리가 변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5]

다만, 이러한 사실이 전문가 및 한복에 관심이 많은 준전문가들을 제외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탓에 여전히 당나라 유래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6][7]
파일:여성 한복의 진화.png

1.2. 형태의 변천

당의는 시기별로 형태의 차이가 있다. 당의의 깃과 소매의 진동 나비, 배래선이 점차 변화하여 지금 우리가 아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당의가 되었다. 또한, 당의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이므로 저고리의 변화에 따라 당의도 함께 변화하는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품이 크고 넉넉한 형태에서 몸에 완전히 달라붙을 정도로 작아지면서 당의도 따라서 품에 딱 맞는 형태가 된 것이다.[8]
파일:장저고리(청주한씨)_석주선기념박물관.jpg
파일:장저고리(기성군부인)_경기도박물관.jpg
청주 한씨 장저고리 기성군부인 장저고리
조선 전기의 장저고리는 길이가 70~82cm로 겨드랑이 아래로 긴 트임이 있었다. 16세기 복식 유물인 의혜공주의 손녀 청주 한씨가 입은 장저고리[9]와 기성군부인 평양 이씨[10]의 장저고리가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장저고리는 안에 짧은 저고리를 먼저 입고 덧입는 저고리로, 옆이 트여 있고 품이 크고 넉넉하다. 조선시대 저고리는 3, 4겹씩 겹겹이 껴입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가장 겉에 입는 저고리일수록 품이 크고 넉넉해야 했을 것이다. (·정조 시기 기준으로 가슴가리개 → 속적삼 → 속저고리 → 저고리 → 당의)
파일:장저고리(광해군비)_해인사.jpg
파일:당의(광해군비당의)_석주선기념박물관.jpg
광해군비 장저고리 광해군비 당의
광해군의 왕비 폐비 유씨가 입었던 장저고리의 정식 명칭은 홍색 토주 겹 장저고리[11]로 16세기 말 17세기 초의 복식 유물이다. 이 장저고리는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폐비 유씨의 당의와 매우 유사하다. 《조선시대 우리 옷의 멋과 유행》이라는 책에서 장저고리 복식 재현을 볼 수 있는데, 품이 크고 넉넉할 뿐, 우리 눈에 낯설지 않다.[12]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는 이전 시대의 장저고리에 비해 품도 좁아지고, 소매 끝에 넓은 거들지를 부착하게 된다. 이 시기 복식 유물 중 주목할 만한 것은 흉배를 부착한 경우이다.
파일:당의(의원군부인)_경기도박물관.jpg
의원군부인 안동 권씨 당의
위의 복식 유물은 1999년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의원군 이혁(李爀)[13] 일가 묘역의 이장 과정 중 발견된 것이다. 앞, 뒤에 금사 3올로 테두리를 두른 자수 봉황 흉배가 있어 인상적이다. 흔히 봉황을 옷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왕비세자빈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출토되는 복식 유물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봉황 무늬가 들어간 치마나 저고리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는 품‧진동‧배래가 더욱 좁아지고 곡선화 되었다. 특히 순조순원왕후의 딸 덕온공주의 복식 유물이 그렇다.
파일:당의(덕온공주자적당의)_석주선기념박물관.jpg
파일:당의(덕온공주홑당의)_석주선기념박물관.jpg
덕온공주 자적 당의 덕온공주 녹색 당의
당의는 홑당의와 겹당의로 나뉘는데, 왼쪽은 덕온공주가 입은 겹당의이며, 오른쪽은 덕온공주가 하절기용으로 입은 홑당의이다.지금의 시스루처럼 속이 비치지만, 절대 홑당의 한 벌만 입지 않았다. 간혹 지금의 시스루 패션을 생각하고 조선시대에 홑당의만 입었다고 생각하여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쓴 《순화궁첩초(順和宮帖草)》에 따르면, 홑당의는 홑겹으로 지은 당의로 궁중에서는 왕비단오 전날에 홑당의, 추석 전날에 겹당의로 먼저 갈아입어야 다음 날 다른 궁중 여성들이 따라서 갈아 입을 수 있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20세기는 19세기와 비슷해 진동이 넉넉하고 소매배래는 진동에서 소매길이의 중간지점까지 수평을 이루다가, 소매 끝에서 급격한 곡선을 이루며 줄어들었다.

1.3. 착용 제도

당의는 착용하는 사람의 신분, 의례와 절기에 따라 색상, 재료, 장식 등에 차이를 두었다. 궁중에서는 신분에 따라 보(補)나 흉배(胸背)를 달아 입었고, 사대부 부녀자의 경우 남편의 품계에 따라 흉배를 달기도 하였다. 또한, 직금(織金) 직물을 사용하거나 금박(金箔)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지어 입기도 하였으며, 머리에는 화관이나 족두리로 장식하였다. 조선 중기까지 여성의 머리 장식으로 가체가 일반적이었지만, 영조 시기부터 가체 금지령으로 화관과 족두리가 가체를 대신한다.
파일:순정효황후친잠례기념사진.jpg
1906년 순정효황후 친잠례 기념 사진
위의 사진 자료는 당의의 착용 제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운데의 순정효황후를 비롯해 예복인 당의를 착용한 여성들은 머리에 화관이나 족두리를 하고 있다. 앞 줄의 치마저고리만 착용한 두 명의 여성은 첩지 머리를 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 사극처럼 당의 차림에 첩지 머리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대중 매체에서는 왕비와 공주, 세자빈의 당의에는 양어깨와 가슴, 등에는 왕의 것과 같은 용보나 봉황보를 다는 것으로 흔히 묘사된다. 그러나 당의에 용보를 달았던 시기는 의복 개혁을 시행하여 용보의 크기가 작아진 고종 때로 추정된다. 사람 머리 하나를 다 덮는 커다란 용보를 옷에 붙일 공간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왕비 외에도 그 외 비빈, 왕녀도 용보를 달았다.

1.4. 여담

  • 일본에도 카라기누(唐衣)라 하는 의복이 있는데, 한자는 같지만 이것은 당나라에서 전래된 반비가 변형된 것으로 한국의 당의와는 전혀 다르다. 길이가 짧은 상의로 쥬니히토에를 입을 때 위에 덧입었다.
  • MMORPG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존재하는 달숲이라는 지역에 가면 다양한 한복을 파는 상인이 있는데 당의 또한 구매할 수 있다. 오리지널 때부터 판매해온 유구한 아이템이다.

2. 糖衣

Frosting, Icing

당의정할 때의 그 당의다.


[1] 여기서 임인년은 1602년(선조 32)을 말하는 것으로 선조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가례 당시의 의복과 머리 모양 양식을 따르자는 말이다.[2] 출처: 김소현. "가례시 절차에 따르는 조선후기의 왕실여성 복식연구." 服飾 59.3 (2009): 96-108. )[3] 과거 조선시대는 지금처럼 수의가 삼베가 아니라 평소에 입던 옷이었기 때문에 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 더군다나 조선시대에는 회곽묘를 만들었으므로 온전하게 보존되었다면 직물의 무늬와 바느질의 기법까지 알아낼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회곽의 상태가 완전히 밀폐되지 않아 회곽 내부로 공기가 유입되었다면 부패 상태가 심할 수도 있어 발굴 전에는 보존 상태를 장담할 수 없다.[4] 약 700년의 시간차가 있다. 만약에 당의가 당나라의 복식이고 고려에 전해졌다면 유물이나 기록으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없고, 조선 중기에서야 처음으로 등장한다.[5] 또한 언뜻 보기에 당의와 비슷해보이는 명나라 초기의 복식은 당의가 아닌 고려양으로, 다름 아닌 고려 한복(긴 저고리의 형태)이 원나라 시기에 중국으로 전파되어 명나라 복식에 영향을 준 것이다. 중국의 한족들은 원래 기다란 원피스 형태의 한족 전통복장을 입었지만, 명나라 초중기에는 몽골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려양 복식을 입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15세기부터는 명나라 9대 황제 홍치제가 "고려양은 원래 중국의 풍습이 아니다"라며 고려양 복식 착용을 금지하고 송나라 복식으로 회귀시켰다.[6] 중문, 영문 Wikipedia, 바이두는 위와 같은 '당' 글자를 이유로 당나라에서 유래된 옷이라 추측하거나 단정 짓고 있다.[7]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강인 한강(漢江)의 경우에도 한강의 한자 표기의 '漢'은 단순 음차일 뿐 중국의 민족인 한족(漢族)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漢'이라는 글자를 이유로 한강은 한족의 강이라는 뜻이니, 이는 한국(韓國)이 예로부터 중국의 일부라는 증거다 라고 개소리를 하는 중국인들도 소수 있는데, 음차로 쓰인 한자를 근거로 중국의 것이라 주장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한 케이스이다. 그런 식으로 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음차로 쓰인 한자 때문에 중국의 것으로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8] 출처: 권혜진, 홍나영. "당의(唐衣)에 관한 연구 -궁중 발기와 유물의 중심으로-" 한국복식학회 춘계 학술대회2001, no.0 (2001): 20-20.)[9] 의혜공주의 손녀 청주 한씨가 광주 이씨 가문의 이집일(李執一: 1574~1613)에게 시집 갔다가 일찍 죽으면서 함께 묻힌 것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었다.[10] 기성군부인 평양 이씨는 성종숙의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견성군의 장남 완산군 이수함(李壽諴)의 부인이다.[11] 1965년 해인사 팔만대장경판고(八萬大藏經板庫)를 재중수하던 중에 발견된 복식 유물이다.[12] 출처: 오례(五禮) 트위터. #[13] 인평대군의 손자이자 복녕군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