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3 21:38:47

문왕(발해)

대흠무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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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31a2><colcolor=#ffffff> 발해 제3대 국왕
문왕 | 文王
파일:발해문왕.jpg
중국의 상경용천부 박물관에 있는 문왕의 그림.[1]
출생 710년대 추정
발해
사망 793년 3월 4일 (향년 70~80대)
발해
능묘 용두산 M11호분(추정)
재위기간 발해 제3대 국왕
737년 8월 ~ 793년 3월 4일 (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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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31a2><colcolor=#ffffff> 대(大)
흠무(欽茂)
부왕 무왕(武王)
왕후 효의황후(孝懿皇后)[2]
왕태자 대굉림(大宏臨)[3]
왕자 대숭린(大崇隣)
공주 공주(요절), 정혜공주, 정연공주, 정효공주
신장 약 156cm 초과[4]
작위 발해군왕(渤海郡王)→발해국왕(渤海國王)[5]
묘호 미상
시호 문왕(文王)
존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연호 대흥(大興), 보력(寶歷) }}}}}}}}}

1. 소개2. 내정3. 외정4. 외교5. 연표6. 기타7. 가족 관계8. 같이 보기

[clearfix]

1. 소개


발해의 제3대 군주이자 가독부. 아버지인 제2대 무왕이 외치에 힘을 기울였다면 문왕 대흠무는 무왕 대무예가 만들어 놓은 세력을 기반으로 내정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소수림왕의 발해 버전이라 볼 수 있을 정도지만 발해의 기록 자체가 부실해서 재위 기간이 길고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왕의 행적 역시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다.

재위 기간이 무려 56년으로 발해의 왕 중에서 가장 길고 문왕 이후 한국사의 어느 군주도 그의 집권 기록을 깨지 못했다. 발해 문왕 이전 시대에서 찾으면 가야수로왕, 고구려태조대왕장수왕, 신라혁거세 거서간 재위 기간이 56년을 넘는다. 다만 수로왕태조왕박혁거세의 경우 신화가 섞인 고대 기록이다 보니 불분명한 측면이 있어 장수왕 정도가 확실히 문왕보다 오래 집권했다고 볼 수 있는 군주일 듯. 이후 시대에 그나마 문왕의 재위 기록에 가까이 다가갔던 군주가 고려 고종(45년), 조선 영조(51년)와 숙종(46년), 고종(44년)[6] 정도다.

그러다보니 대흠무의 재위 기간은 228년 발해 사직의 25% 수준이나 된다. 즉위하던 해에 벌써 딸인 정혜공주를 득녀했고 정혜공주도 차녀인 것을 감안하면 문왕이 즉위한 나이는 10대 후반 내지 20대 초반 정도 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물론 청년기에 즉위해서 80세 무렵까지 살다 갔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정효공주 묘비에 "대흥보력금륜성법대왕"이라는 내용이 새겨진 걸로 보아 유교와 불교를 장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내정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내정을 닦고 외교에 힘을 기울였다. 수도를 여러 번 천도했는데 지방 통제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에서 안사의 대란이 일어나자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했고, 780년대에 다시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겼으며, 대학 기관인 주자감도 설치했다. 금륜성법대왕으로 자신을 칭해 불교를 호국이념으로 세웠다. 3성 6부제를 만든 것도 문왕 때의 일이었다. 불교ㆍ유교ㆍ율령을 업그레이드 한 건 고구려 소수림왕과 비슷하다.

3. 외정

문왕은 내치 뿐만 아니라 외치로는 북으로는 말갈을 포섭하고, 남쪽으로는 용흥강 주변까지 발해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4. 외교

당나라, 신라와 본격적으로 통교하였으며,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하면서 국서를 보냈는데 여기서 고려국왕 대흠무로 자신을 지칭해 고구려 계승 문제에서도 중요한 사료로 취급받는다.
지금 보내온 국서(國書)를 살펴보니 부왕(父王)의 도를 갑자기 바꾸어 날짜 아래에 관품(官品)을 쓰지 않았고, 글 끝에 천손(天孫)이라는 참람된 칭호를 쓰니 법도에 어긋납니다. 왕의 본래의 뜻이 어찌 이러하겠습니까.····· 고씨의 시대에 병난이 그치지 않아 조정의 위엄을 빌려 저들이 형제를 칭하였습니다. 지금 대씨는 일없이 고의로 망령되이 사위와 장인을 칭하였으니 법례를 잃은 것입니다.
속일본기》권32

또한 《속일본기》 기록에는 문왕이 '천손'을 자칭하자 일본 조정이 불쾌해 했다는 식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초기애는 이 천손 자칭을 중국의 천자(天子)나 일본의 천황(天皇)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이웃나라를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1988년 6월 함남 신포시 오매리의 절골 유적에서 출토된 명문(銘文·새긴 글씨) 금동판의 발견으로 발해 ‘천손’의 원류가 고구려임이 확인됐다. 결국 고려국왕과 더불어 천손 자칭 또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낸 귀중한 사료인 것이다.#

어찌됐든 내부적 불쾌감과는 별개로 신라를 공격하려던 일본은 발해에 도와달라는 사신을 보내기도 했으나 문왕은 괜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또 그의 치세에 당나라에 안사의 대란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 역시 개입하지 않았다. 756년 평로유후 서귀도가
"금년 10월에 안록산을 쳐야 하니 기병 40,000명을 동원해 도와주셔야 한다."
고 했으나 의심해 보류한 것.

762년 당나라 측에서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했다. 이전까지는 '발해군왕'이라 해서 제대로 된 왕으로도 안 쳐주던 상태였다. 군왕(郡王)이 국왕(國王)보다 격이 낮다. 그런데 발해가 시간이 지나며 확실하게 국가로 자리를 잡아버렸으니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때부터 시작해서 무왕까지 이어온 앙숙 관계가 드디어 끝나고 발해와 당나라는 서로가 멸망할때까지 평화적으로 교류하였다.

5. 연표

737년 8월 무왕이 병으로 죽자 아들 흠무가 즉위하였다. 대수령 다몽고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고, 당에서 단수간을 보내어 무왕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
738년 6월 당에 사신을 보내 당례, 삼국지 등의 책의 필사를 요청하였다
739년 2월 동생 대욱진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739년 7월 부사 운휘장군 기진몽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739년 10월 수(우)복자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739년 11월 기진몽이 일본국의 수도에 당도하였으나 대사 충무장군 서요덕 등 40인은 물에 빠져죽고 말았다
740년 1월 쇼무 덴노가 충무장군 서요덕, 수령 기알기몽을 각각 추증하였다
740년 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40년 4월 운휘장군 기진몽이 발해로 출발하였고 일본국왕 쇼무가 견발해사를 보냈다
740년 10월 견발해사 견양이 일본으로 돌아갔고 당에 사신을 보내다
741년 2월 실아리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741년 4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42년 ?월 수도를 동모산 오동성에서 현주의 중경현덕부로 옮기다
743년 7월 동생 대번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746년 3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46년 10월 철리와 함께 일본 출우국으로 1,100여명의 사신을 보내다
747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49년 3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50년 3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52년 9월 보국대장군 모시몽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753년 3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53년 5월 보국대장군 모시몽이 일본에 도착하였다
753년 6월 보국대장군 모시몽이 돌아오다
754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56년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도읍을 옮겼다
758년 4월 당의 왕현지가 장군 왕진의를 보내 문왕에게 아뢰었다
758년 9월 대사 보국대장군 겸 장군 행목저주자사 겸 병서소정 개국공 양승경 외 23인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759년 12월 양승경 외 23인이 일본의 수도에 도착하였다
759년 1월 준닌 덴노가 대사 양승경, 부사 양태사, 판관 풍방례 포함 19인에게 위계를 주었다
759년 2월 일본에 보낸 사신이 돌아오다
759년 10월 보국대장군 겸 장군 현토주자사 겸 압아관 개국공 고남신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759년 12월 고남신이 나니와강 하구에 도착하였다
760년 1월 준닌이 대사 고남신, 부사 고흥복, 판관 이능본, 해비응, 안귀보 등에게 위계를 주었다
760년 2월 일본에 보낸 사신이 돌아오다
760년 8월 하정사 양방경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762년 ?월 당 대종이 문왕을 검교태위, 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762년 10월 자수대부 행 정당좌윤 개국남 왕신복 이하 23인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763년 1월 일본국왕 준닌이 대사 왕신복, 부사 이능본, 판관 양회진, 품관 착비(?), 달능신 등에게 위계를 주었다
763년 2월 일본에 보낸 사신이 돌아오다
764년 ?월 왕탄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765년 10월 양승경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기존 기록을 보고 추측)
766년 3월 일본에 보낸 사신이 돌아오다
767년 5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67년 8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69년 3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1년 6월 청수대부 일만복 등 325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772년 1월 고닌 덴노가 국서 내용에 불만을 품고 일만복에게 따졌다
772년 9월 모창록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772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3년 2월 일본에 사신으로 간 모창록이 죽었다
773년 4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3년 6월 당에 사신을 보내고 오수불 외 40인을 일본 노토국에 보내다
773년 1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3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4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4년 2월 당에 인질로 가있던 대영준이 귀국하였다
774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5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5년 5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5년 6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5년 ?월 5일 문왕의 부인인 효의황후가 죽다
775년 10월 24일 효의황후를 진릉대에 장사지내다
775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6년 12월 헌가대부 사빈소령 개국남 사도몽 등 187인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풍랑을 만나 고숙원 외 1인이 죽었고, 46인만 살아남았다
777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7년 4월 딸 정혜공주가 죽었고 당에 사신을 보냈고 일본국왕 고닌이 사도몽, 고록사, 고울림, 사주선, 고규선 등에게 위계를 주었다
777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78년 9월 현가대부 사빈소령 장선수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779년 2월 일본으로 보낸 사신이 돌아오다
779년 9월 압령 고양죽 등, 철리 포함 359인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780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80년 10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80년 11월 정혜공주의 묘를 조성하다
782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82년 5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785년 ?월 상경용천부에서 동경용원부로 도읍을 옮기다
786년 9월 이원태 등 65인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아이누인에게 12인이 납치당하고 41인만 도착하였다
790년 3월 신라 원성왕이 일길찬 백어를 사신으로 보냈다
791년 1월 대상정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791년 8월 아들 대정알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792년 6월 딸 정효공주가 죽었다
792년 11월 정효공주의 묘를 조성하다
792년 12월 압말갈사 양길복등 35인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793년 3월 4일 문왕이 죽었으나 손자 대화여가 아닌 족제이자 고왕의 종손인 대원의가 즉위하였다.

6. 기타

  • 무왕의 본명이 대무예라서 문왕의 본명이 대문예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문왕의 본명은 대흠무이며, 대문예는 무왕의 동생으로 문왕에게는 작은아버지이다. 대문예는 흑수말갈 공격에 반대했다가 형인 무왕에게 차단당하고 당나라로 망명했다.
  • 둘째 딸 정혜공주가 737년생이라는 걸 감안하면 최소한 710년대 생이 아닐까하고 짐작한다. 사망년도는 유득공의 《발해고》에 따르면 대흥(大興) 57년(793년) 3월 4일이다.
  • 딸바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문왕은 과거에 둘째 딸 정혜공주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런데 막내딸 정효공주마저 792년에 자신보다 먼저 사망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심리적인 충격이 상당했던 듯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끼던 막내딸을 기껏 시집보냈더니만 그 남편이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정효공주는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정효공주는 남편과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딸마저 먼저 사망하는 참척을 겪었다. 이쯤 되면 정효공주의 상태는 심리적 충격은 고사하고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러한 딸을 지켜봐야만 했던 아빠 문왕의 심정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정효공주의 사망이 문왕에게 심리적, 육체적 타격이 꽤 컸던지 정효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1년도 채 안된 793년 3월에 문왕도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문왕 사후 발해에 15년 동안 군주가 6명 바뀌는 등의 혼란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아 문왕이 제대로 후계 구도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붕어한 것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정효공주의 요절이 문제의 발단이었을 수도 있다. 장남인 대굉림이 본인보다 먼저 사망한 것도 원인일지도.[7] 특히 정확한 친척 관계도 알려지지 않은 대원의 같은 인간이 어쩌다 갑툭튀해서 왕위를 슬쩍했는지는 이해가 매우 힘들다.

7. 가족 관계

  • 부인 효의황후/왕후. 《속일본기》에는 문왕의 왕후가 776년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775년 사망한 효의황후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으나 확실하진 않다.
  • 아들 대굉림(大宏臨)
  • 아들 대영준(大英俊)
  • 아들 대정한(大貞翰): 대정알(大貞斡)로도 기록되어 있다.
  • 아들 대청윤(大淸允)
  • 막내아들 대숭린(大嵩璘)
  • 장녀(이름불명)
  • 차녀 정혜공주
  • 3녀 정연공주
  • 4녀 정효공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장녀, 차녀 정혜공주(貞惠公主), 3녀 정연공주, 4녀 정효공주(貞孝公主)가 있었다. 본인들보다 무덤으로 유명한 공주들로 수능 국사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동모산 근처 육정산에서 출토된 정혜공주묘는 고구려 양식 무덤(굴식돌방, 모줄임구조)임에 비해 중경 부근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는 고구려 + 당나라 양식 무덤(모줄임, 벽돌무덤, 벽화)이다. 이는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와 당나라의 문화를 균형있게 받아들인 사례로 거론된다. 그리고 비문에는 문왕을 황상으로 칭하고 있어 발해가 외왕내제를 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 자녀들은 모두 아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문왕이 사망한 후 문왕의 사촌동생인 대원의가 즉위했는데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태자의 아들이자 문왕의 손자인 성왕이 즉위했다. 하지만 성왕도 일찍 죽어 문왕의 막내아들이 뒤를 이어 강왕으로 즉위했다.

아내는 효의황후(孝懿皇后)이다. 2005년 중국 지린성 룽터우산 고분군에서 발해국 효의황후 능이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8. 같이 보기


[1] 해당 링크의 이미지 중 마지막에서 3번째 사진에도 문왕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유일하게 왕의 복장을 하고 있다. 나머지 왕들은 전부 신하 복장.[2] 문헌이 아닌 2004년~2005년 육정산 고분 조사에서 이름이 나왔다. 다만 간왕의 부인 순목황후와 마찬가지로 이름 외의 정보가 알려진 바가 없다.[3] 유득공의 《발해고》 <신고> 기록.[4]정효공주가 유골 조사 결과 키가 156cm였는데 아버지가 딸보다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문왕의 키는 딸 정효공주의 156cm보다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5] 문왕 대부터 당나라와 친선관계가 형성되면서 정식으로 국왕으로 인정받고 이후로도 쭉 이어진다.[6] 다만 고종은 태황제로서의 기간인 3년과 경술국치 이후 이태왕으로서의 기간까지 모두 더하면 55년(+15일)이 되어 문왕의 기록에 근접하기는 한다. 물론 나라가 사실상 망했을 때인데다가 이태왕 시기에는 통치 기간을 따져봐야 소용이 없기는 하지만 망국과 갑작스러운 서거만 아니었다면 문왕의 기록을 뛰어넘었을 가능성도 있다.[7] 장손인 대화여는 꽤나 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