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덕혜옹주
1. 개요
덕혜옹주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2. 유년기
[1] |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 |
덕혜옹주는 어린 나이에도 신분 고하에 대한 이해가 빨랐던 모양이다. 외삼촌인 양 상관이 덕수궁에 입궐할 때마다 "양 상관이 온다"며 하대하고 "아기씨의 외가는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궁인들의 질문에 생모 귀인 양씨의 친정이 아니라 적모(嫡母) 명성황후의 친정인 죽동[2]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전통적으로 왕의 자녀는 생모가 누구이건 간에 모두 왕후의 자녀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므로, 덕혜옹주가 자신을 황제의 딸이라고 의식하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덕혜옹주가 점점 성장하는데도 일제는 덕혜옹주를 황적에 올려주지 않았다. 이에 고종이 직접 나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덕수궁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덕혜옹주를 보여주며 "이 아이가 바로 내 딸이다"고 소개해 결국 황적에 올렸다는 일화가 있다.[3] 이후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총독 관저로 돌아가서 측근들에게 "오늘은 멋지게 한 방 먹었다"고 했다고 한다.[4] 유치원 졸업 후, 덕혜옹주는 일본인 학교인 히노데 소학교(ひので小学校)에 입학했다.
일제가 덕혜옹주를 이왕가의 호적에 올려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어딘가에서는 "고종이 엄귀비 사후에 여러 궁녀들을 후궁으로 삼았으나, 일제는 일부일처제 국가라서 후궁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연히 후궁 소생들을 황실의 호적에 올리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신뢰성이 없는데, 역시 동아시아의 왕실들 중 하나인 일본 황실 또한 후궁을 잔뜩 들이는 관습이 있었고, 덕혜옹주가 태어날 때 천황인 메이지 덴노부터가 고메이 덴노의 측실 나카야마 요시코 소생이다. 메이지 덴노 역시 후궁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으며, 정실인 쇼켄 황후는 자녀를 1명도 낳은 적이 없고, 후계자인 다이쇼 덴노를 비롯한 야나기하라 나루코, 소노 사치코 등 5남 10녀를 모조리 후궁들에게서 보았다. 오히려 다이쇼 덴노가 후궁을 하나도 들이지 않은 최초의 천황으로서 대단히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데이메이 황후(사다코)가 아들만 4명을 낳았기 때문에 굳이 측실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는 결혼 후 딸만 줄줄이 4명을 낳아 시어머니 데이메이 황후에게 시집살이를 당하기도 하고 쇼와 덴노 역시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는 신하들의 압박을 받았으나, 본인이 거부했다. 그 정성이 닿았는지 고준 황후는 1933년에야 간신히 다섯째 아이로 그토록 바라던 아들 아키히토를 낳았다.
이에 비하면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대를 끊으려고 했기 때문에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는 주장이 차라리 더 신뢰성이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 당시 덕혜옹주가 태어난 사실은 이미 한참 전에 조선총독부에 알려져 있었다. "덕수궁(소주방) 나인 양춘기가 여자아기를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덕수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사건건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만약 덕혜옹주를 조선의 황녀로 인정하게 되면 다른 조선의 황족들까지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5] 일본은 덕혜옹주를 황적에 올리는 것을 일부러 미루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6]
3. 일본행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은 대개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1925년 13살의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 황족과 화족의 영애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女子學習院)[7]에 편입학되었다. 영친왕 내외는 덕혜옹주가 아카사카 저택에서 지내며 학교에 통학하는 것을 희망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옹주는 고향을 떠나자마자 가쿠슈인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방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기숙사에 입사하기 전 얼마간 잠시 영친왕과 본인이 덕혜옹주를 데리고 지냈었는데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고 한다.이때 함께 여자가쿠슈인에 다닌 동기들 중에는 메이지 덴노의 외손녀인 다케다노미야 아야코(竹田宮禮子)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8], 사가 히로, 소마 유키카(相馬雪香)[9] 등이 있다.
그 중 유키카는 항상 말없이 조용히 지내는 덕혜옹주를 안타깝게 여겼고, 독살이 두려워서 보온병에 담아 가지고 온 물만 마신다는 말을 듣자 덕혜옹주에게 "내가 덕혜님의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나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덕혜옹주는 이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유키카는 독립운동 운운하는 발언 때문에 교무실로 불려가 교사들에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 라며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가쿠슈인 학생들은 선생의 지시에 따라 덕혜옹주에게 '토쿠에사마(덕혜님)''라는 존칭을 쓰며 예의를 갖추었다고 한다. 고준 황후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당대 일본 황실에서 황족의 딸은 이름의 뒤에 '~미야(宮)'를 붙이고 화족(귀족)의 딸은 이름의 뒤에 '~키미(君)'를 붙였다. 본래 '히메(姬)'는 귀한 신분의 여인 전반을 칭하는 말이었다. 구 대한제국 황족들은 일본에서는 왕공족이라고 해서 황족도 아니고 화족도 아닌 애매한 취급이었는데[10] 그것이 호칭에서도 드러난 것. 하지만 화족영애는 물론이고 황족영애들도 다니던 가쿠슈인에서 급우들에게 '님(さま)'이라고 불린 것은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가쿠슈인, 히노데소학교, 사관학교 등의 일본 학교에 입학한 조선 황족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맨 앞자리에 앉아 급우들과는 다른 재질의 넓은 책상을 단독 사용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도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등[11] 여러 특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2] 가쿠슈인은 이미 특권층인 일본의 황족과 화족들이 다니는 학교인데 그 중에서도 특별대우를 해준 것이었다.
4. 강제 유학 시절
그러나 일본에서 덕혜옹주는 내내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러다 1929년 5월 30일,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끝내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이때부터 처음으로 몽유병과 조현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이에 대해 2가지 추측이 있다. 황실의 호적에 올라간 탓에 생모인 귀인 양씨와는 공식적으로는 남남이 되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자녀로서 3년 복상을 하지 못한 것에 크게 상심했기 때문이라는 설과[13] 이 시기 즈음에 일제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일본 방계 황족인 야마시나노미야 후지마로(山階宮藤磨) 왕[14]을 거론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5]
또한 아버지가 식혜를 먹고 얼마 안 있어 의문사한 뒤에 일본 사회에서 고립된데다 평소 독살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곤 했는데[16], 이 역시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올케 이방자는 말년의 회고록에서, 덕혜옹주가 일본에 온 직후에 만났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처음 내가 보았던[17] 옹주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함과 영롱한 눈초리는 없었다. 나를 보고는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한 모습이 보였다.
그 후 여자가쿠슈인에 편입학하기까지의 아주 잠깐 동안만 영친왕, 이방자와 함께 살았다. 영친왕 부부는 아직 어리고 그동안 여러 일로 충격이 컸을 덕혜옹주를 위해 자신들이 데리고 살며 보살피겠다고 했지만, 일본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덕혜옹주를 학교 기숙사로 보냈다고 한다. 영친왕은 자신에 이어 어린 여동생이 볼모로 끌려온 데 대해 매우 불쾌해 하고 있었는데, 오라비 내외가 데리고 있는 것조차 거부당한 것에 심하게 화가 나서 오랫동안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덕혜옹주는 이미 10대 후반 때부터 정신병 증상이 시작되어 등교거부를 한다. 이후 올케 이방자는 의사를 불러 덕혜옹주를 진찰하게 했는데,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덕혜옹주는 신경쇠약으로 인해 등교거부 상태였으나, 설상가상 졸업 이전의 시점이던 이때는 이미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데다 혼담까지 오가고 있어, 당시에는 여자가쿠슈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덕혜옹주가 학업을 마친 건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이듬해인 1931년의 일이다.
5. 혼담
고종은 사실 덕혜옹주가 8세 때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을 시켰다. 김황진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자 "그럼 조카라도 달라"고 해서 맺은 혼약이었다고 한다.하지만 고종이 세상을 뜬 후 약혼은 무효화되고, 일본은 그녀를 일본 남성과 결혼시키려 했다.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 모두, 자신들에 이어 어린 옹주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든다며 해당 혼사를 굉장히 불쾌히 여기고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특히나 이 시기 이미 몽유병이나 신경쇠약을 비롯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덕혜옹주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창수[18]가 자신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결혼을 서둘러 진행한 탓에, 옹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더욱 반대를 해서 어떻게든 혼담을 깨려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이방자의 기록에는 "식사도 잘 하시고 조금은 조리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어 무사히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적혀 있는데, 그 말은 '이미 증상은 지속되고 있으나 일시적으로 나았다'는 뜻이 된다.
병세가 호전되는 듯 보이자 1931년 데이메이 황후에 의해, 데이메이 황후의 오빠 쿠죠 미치자네(九條道實)를 후견인[19]으로 두고 있던 대마도의 번주 출신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혼인하게 된다. 임진왜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라는 성씨와 대마도 번주라는 점에서 눈치챘을 수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쓰시마 도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참전했던 소 요시토시가 바로 다케유키의 10대조다.[20] 덕혜옹주의 올케 이방자의 회고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이 결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6. 소 다케유키와의 정략 결혼
<colbgcolor=#29176e>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사진 |
그러나 소 다케유키는 가쿠슈인 고등과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엘리트에[22] 준수한 외모를 가진 명문가 자제로, 부부 사이도 괜찮았다고 한다.[23] 신혼 때는 각종 행사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기도 했는데, 대체로는 덕혜옹주의 표정이 밝았다고 한다. 다만 한쪽 눈이 사시였는데, 애꾸눈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사진 속 덕혜옹주는 원치 않는 결혼 때문에 계속해서 오열했고, 이 때문에 사진 속에서도 평상시와 다르게 많이 부은 모습을 볼 수 있다.
7. 딸 마사에(정혜)의 출산
결혼한 지 1년쯤 후인 1932년 8월 14일, 두 사람 사이에 마사에(正惠)라는 딸이 태어났다. 한국식으로 읽으면 '정혜'이다.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이 두 사람의 상의 하에 자신의 이름 중 '혜' 자를 붙여 정혜라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소 다케유키는 아픈 아내 대신 마사에를 데리고 여러 번 조선 황족들의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8. 병환과 이혼
마사에를 낳은 후 덕혜옹주의 조현병이 재발[24]했고, 부부 사이도 점점 파탄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신병이라는 사실이 더욱 부끄러운 일로 취급받았고[25] 이 때문에 소 다케유키도 심정이 복잡다단했을 것으로 보인다.게다가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1947년 5월 3일 신헌법이 시행됨에 따라 화족들은 죄다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역시 그에 따른 특권을 상실해 생계 유지가 어려워졌다. 넓은 저택에서 다소 좁은 곳으로 집을 옮기고, 하인들도 다 내보내 마지막엔 하인이 딱 1명만 남았었다고 한다.
결국 1946년 덕혜옹주는 남편에 의해 마츠자와(松澤)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51년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결혼을 주선했던 데이메이 황후가 사망하고, 1955년 덕혜옹주는 이혼을 당한다.[26] 사실 이방자의 회고에 따르면 이 이혼은 다케유키와 영친왕, 이방자 세 사람의 논의 이후 결정된 합의이혼이었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정신질환자였기 때문에 오빠 부부인 영친왕, 이방자가 후견인으로서 대신 협의해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다케유키는 가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후 장남 다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 등 2남 1녀를 더 낳았다. 때문에 이 부분에서 "소 다케유키가 너무 성급한 거 아니었냐"고 비판받기도 하는데, 사실상 별거 상태가 10년 가까이 지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예 이해하지 못할 행동도 아니긴 하다. 게다가 쓰시마 종가의 당주로서 다케유키는 대를 이어야 할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이미 50줄을 바라보던 나이였으니. 어쨌거나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소 다케유키의 결혼 생활에 대해 순애보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남편으로서 할만큼은 했다"는 평을 내리는 편이다.
후일담으로 덕혜옹주가 1962년 귀국하고 10년 뒤인 1972년에 소 다케유키는 잠시 방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옛 아내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나 당시 주변에서 "괜히 덕혜옹주의 병세만 악화될 수 있다"며 이를 거절하였기에 결국 만나진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뒤 레이타쿠대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5년 사망했고, 대마도에 있는 선친들의 묘지에 함께 안장되었다.
9. 딸 마사에(정혜)의 실종
한편, 덕혜옹주의 딸 마사에(정혜)는 어머니와 사이가 소원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버지 다케유키가 재혼할 즈음인 1955년에 1살 위의 스즈키 노보루(鈴木昇)[27]라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분가했다. 노보루는 마사에와 마찬가지로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중학교 교사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결혼한 후, 흔히 하는 것처럼 마사에가 남편의 성씨를 따른 게 아니라, 마사에는 '소'라는 성씨를 유지하고 남편이 마사에의 성씨를 따라 '소 노보루'가 되었다. 이는 장인어른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였다고 한다.그런데 1956년 8월 26일 아침, 갓 결혼한 새댁이었던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이때 마사에가 현해탄(대한해협)에 뛰어들었다는 루머도 있으나, 유서에 의하면 마사에는 야마나시현과 나가노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28]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다. 사실인지는 불명.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다케유키는 죽을 때까지 끝끝내 딸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아 법적으로 생존 상태에 있었지만, 다케유키의 사후 마사에의 이해 관계인에 의하여 일본 민법 제30조 조항에 따라 마사에의 실종신고 후 7년이 경과할 때까지 그 어떠한 생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종 선고가 성립되어[29] 사망 처리되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마사에(정혜)의 실종 이후 수색대의 노력에도 그녀의 생사를 알 수 없자 부재자의 상태로 노보루와의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 남편이 된 노보루가 2007년 4월 발표한 시집에 의하면, 마사에(정혜)의 시신은 실종 후 50년 가까이 경과한 시점에서야 발견되었고, 유품인 수첩으로 신원을 특정하여 사망 사실이 확실해진 것으로 보인다.
수첩(手帳), 소 노보루(宗昇)[30]
가끔은 여기 온천에 나갔다 오지 않겠어요?
(たまにはここの鉱泉に出かけてきませんか)
지금 마을은 일제히 신록의 싹이 트는 중.
(いま里はいっせいに新緑の芽吹き.)
그 싹이 능선을 넘어 산은 하루하루 그 모습을 바꾸고 있습니다.
(その芽吹きが尾根を走り, 山はいちにちいちにちその相貌を変えていきます.)
많은 눈도 녹아서 정상 근처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고 두릅나무의 새싹도 지금이 가장 맛있을 때입니다.
(沢の雪もとけて頂上ちかくにわずかに残っているだけで ほどなく山開きになりましょう。たらの木の芽もいまがいちばん美味しいときです。)
산천에는 신록의 향기가 넘쳐흐른다.
(たよりは新緑の匂いにあふれていた。)
골짜기에는 세 개의 큰 폭포가 흐르는데 정상과 가까운 G폭포에서 등산로를 벗어나 이백수십미터쯤 북쪽으로 들어간 곳에서 그것은 발견되었다.
(沢には三つの大きい滝がかかっているが 山頂にちかいG滝から登山道をそれて二百数十メートル北にはいった所でそれは発見された。)
산장 관리인이 버섯 따기에 열중해 있을 때였다.
(山小屋の使用人が茸狩りに深く分け入ったときだった。)
그때 거기서 어떤 버섯을 보았을까.
(そのときそこにどんな茸を見たのだろう。)
덮고 있는 흙을 걷어내자 구덩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覆っている土を取りのぞくと窪地に背をもたせ足を投げだしたかたちですわっていたという。)
소식이 끊기고 반 세기가 지나고 있었다. 그 구덩이에도 이제는 신록이 돋아나고 있을까.
(消息を絶ってから半世紀がたっていた。その窪地にもいまは新緑がざわめいているだろうか。)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제한다면 나의 삶은 그 10분의 1도 남지 않았을 터.
(食べて生きてきただけの時間を差し引いたらわたしの生はその十分の一も残るまい。)
그 혼자만의 시간동안 언제나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고 앉아 있던 모습으로 반세기, 나 역시 같은 어둠속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そのひとりだけの時間にはいつもその時々の何ものかに背をもたせ足を投げだして半世紀 わたしもまた同じ闇をみつめていただけなのかもしれない。)
우리는 대개 서로의 시간만을 맞춰서 살아왔기에 되돌아보면 그런 기억만 있었다는 것이 떠오릅니다.
(わたしたちはたがいの時間を食いあいながらでしか生きてこられなかったのだろう。振りかえってみてもそんなものだったという記憶ばかりが想起されてくる。)
줄줄이 놓인 유품 속에 수첩이 있었다.
(並べられた遺品のなかに手帳があった。)
구덩이에 기대어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계속 적고 있었겠지.
(窪地にもたれて目が見えなくなるまで書き続けていたのだろう。)
수첩의 페이지마다 잔글씨로 채워져 있었지만 잉크가 완전히 번져버려서 한 글자도 판독할 수 없었습니다.
(どのページも細かな文字で埋められていたが インクがすっかりにじんでしまって一字も判読できない。)
게다가 반쯤 흙으로 변해 붙어있는 페이지를 억지로 넘기면 희미하게 흙집 냄새마저 나면서 무너질 뿐이었습니다.
(その上半ば土に化して貼りついているページを無理にめくれば かすかに土くれの匂いさえして崩れてしまうばかり。)
거의 반세기동안 수첩 한 권 안에 갇혀있던 어둠은 끝내 판독불능의 결과만 남긴 채 밝은 회의실 책상 위로 주르륵 쏟아집니다.
(ほぼ半世紀のあいだ手帳一冊のなかに閉じ込められていた闇は ついに判読不能のまま 明るい会議室の机の上にぽろぽろとこぼれていった。)
가끔은 여기 온천에 나갔다 오지 않겠어요?
(たまにはここの鉱泉に出かけてきませんか)
지금 마을은 일제히 신록의 싹이 트는 중.
(いま里はいっせいに新緑の芽吹き.)
그 싹이 능선을 넘어 산은 하루하루 그 모습을 바꾸고 있습니다.
(その芽吹きが尾根を走り, 山はいちにちいちにちその相貌を変えていきます.)
많은 눈도 녹아서 정상 근처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고 두릅나무의 새싹도 지금이 가장 맛있을 때입니다.
(沢の雪もとけて頂上ちかくにわずかに残っているだけで ほどなく山開きになりましょう。たらの木の芽もいまがいちばん美味しいときです。)
산천에는 신록의 향기가 넘쳐흐른다.
(たよりは新緑の匂いにあふれていた。)
골짜기에는 세 개의 큰 폭포가 흐르는데 정상과 가까운 G폭포에서 등산로를 벗어나 이백수십미터쯤 북쪽으로 들어간 곳에서 그것은 발견되었다.
(沢には三つの大きい滝がかかっているが 山頂にちかいG滝から登山道をそれて二百数十メートル北にはいった所でそれは発見された。)
산장 관리인이 버섯 따기에 열중해 있을 때였다.
(山小屋の使用人が茸狩りに深く分け入ったときだった。)
그때 거기서 어떤 버섯을 보았을까.
(そのときそこにどんな茸を見たのだろう。)
덮고 있는 흙을 걷어내자 구덩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覆っている土を取りのぞくと窪地に背をもたせ足を投げだしたかたちですわっていたという。)
소식이 끊기고 반 세기가 지나고 있었다. 그 구덩이에도 이제는 신록이 돋아나고 있을까.
(消息を絶ってから半世紀がたっていた。その窪地にもいまは新緑がざわめいているだろうか。)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제한다면 나의 삶은 그 10분의 1도 남지 않았을 터.
(食べて生きてきただけの時間を差し引いたらわたしの生はその十分の一も残るまい。)
그 혼자만의 시간동안 언제나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고 앉아 있던 모습으로 반세기, 나 역시 같은 어둠속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そのひとりだけの時間にはいつもその時々の何ものかに背をもたせ足を投げだして半世紀 わたしもまた同じ闇をみつめていただけなのかもしれない。)
우리는 대개 서로의 시간만을 맞춰서 살아왔기에 되돌아보면 그런 기억만 있었다는 것이 떠오릅니다.
(わたしたちはたがいの時間を食いあいながらでしか生きてこられなかったのだろう。振りかえってみてもそんなものだったという記憶ばかりが想起されてくる。)
줄줄이 놓인 유품 속에 수첩이 있었다.
(並べられた遺品のなかに手帳があった。)
구덩이에 기대어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계속 적고 있었겠지.
(窪地にもたれて目が見えなくなるまで書き続けていたのだろう。)
수첩의 페이지마다 잔글씨로 채워져 있었지만 잉크가 완전히 번져버려서 한 글자도 판독할 수 없었습니다.
(どのページも細かな文字で埋められていたが インクがすっかりにじんでしまって一字も判読できない。)
게다가 반쯤 흙으로 변해 붙어있는 페이지를 억지로 넘기면 희미하게 흙집 냄새마저 나면서 무너질 뿐이었습니다.
(その上半ば土に化して貼りついているページを無理にめくれば かすかに土くれの匂いさえして崩れてしまうばかり。)
거의 반세기동안 수첩 한 권 안에 갇혀있던 어둠은 끝내 판독불능의 결과만 남긴 채 밝은 회의실 책상 위로 주르륵 쏟아집니다.
(ほぼ半世紀のあいだ手帳一冊のなかに閉じ込められていた闇は ついに判読不能のまま 明るい会議室の机の上にぽろぽろとこぼれていった。)
10. 정신병원 입원 후
덕혜옹주의 입원비는 이혼 전까지는 다케유키, 이혼 후에는 영친왕이 냈다. 당시 돈으로 월 1만 엔에 달하는 거액의 병원비를 다달이 지불했다고 한다. 당시 대졸 초임 평균 연봉이 약 6,500엔 정도 했으니, 당시로서도 상당히 큰 금액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시가로 계산해 보면 약 30만 엔 가량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그야말로 거금을 대납한 것이었는데, 당시는 영친왕도 다케유키도 재산을 크게 잃은 상태였다. 신헌법 시행으로 백작/왕공족 직위를 잃고, 거기다 이승만 정권의 황실 재산 강제 국유화 등으로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한 시점이었기에, 영친왕은 원래 살았던 이왕가 저택마저 헐값으로 내놔야 했다. 집세를 핑계로 참의원에서 공건물을 빌렸다고 서류에 쓰고 돈을 줄 정도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거액의 병원비를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대가 가족이라 해도 정신질환자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알면, 영친왕이 동생에게 정말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31]
11. 귀국
1962년이 되어서야 덕혜옹주는 김장한의 형인 기자 김을한[32]의 노력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결단으로 37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김을한은 특파원으로 일본에 머무를 때 수소문 끝에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덕혜옹주의 모습을 보고, "고종황제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라며 눈물을 흘렸으며, 그녀의 귀국을 위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어렵게 부탁하여 국적을 회복시켜 귀국시키는 등 신경 써주었다고 한다. 이때 박정희는 "고종에게 딸이 있었느냐?"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당시 덕혜옹주는 원래도 남자 왕족이 아니라 왕위계승권이 없어서 이복오빠들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는데, 정신병이 재발한 후로 오랫동안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 탓에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잊혀진 상태였다.
이승만 정부 시절엔 공적으로 대한제국 황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황족들의 국적 회복과 귀국 요청 등을 전부 거부했었다. 이는 대한민국이란 공화국의 상징성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승만이나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나 다름 없었던 대한제국 황실을 대단히 혐오했던 영향이 컸다.[기타의견]
이렇듯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에선 패전과 신헌법 시행의 여파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구 왕공족들도 경제적으로 상당히 막막한 처지에 처해있었다. 오죽하면 의친왕의 장남 이건은 장사를 하며 근근이 살았을 정도였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이건을 찾아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건에게 미처 말을 걸지도 못하고 돌아오면서, '이제 우리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34]
이승만 정부가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해 몰락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섰을 당시엔 장면이 영친왕에게 주영대사직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이미 그즈음 영친왕은 뇌일혈 후유증으로 건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고사했다. 이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한국이 공화국으로 확실히 기반을 잡아 옛 황족들이 이제 더 이상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으며[35] 영친왕을 비롯한 생존 황족들 중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한 이건을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 모두에게 귀국을 허락했다.
덕혜옹주가 하네다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36]에 오르기 전, 여자가쿠슈인 재학 시절 동기들이 나와서 꽃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환송했다. 굳이 가쿠슈인의 전 황족과 귀족 출신 여자들이 도와준 걸 볼 때, 덕혜옹주를 동정했던 모양. 신헌법 시행으로 평민이 되면서 생계가 막막해진 건 자신들도 마찬가지였고, 덕혜옹주는 사실상 인질 신세로 끌려와 정신병까지 얻고 고향에 돌아가는 거니, 인생이 참 기구하다 싶기도 했을 것이다.
한편, 전술한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은 이때까지 살아있었는데,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가 김포국제공항에 착륙하자 창덕궁에서 순정효황후 윤씨가 보낸 상궁들과 함께 입국장 앞에서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연신 "아기씨!"라 불렀으며, 덕혜옹주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통곡했다.
돌아온 덕혜옹주는 주변 사람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지만, 창덕궁으로 돌아오자 옛 기억이 살아났는지 궁 안을 돌아볼 때 연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맞이한 친척들 앞에서 옛 황실 예법을 그대로 따라 황실의 큰어른되는 순정효황후 윤씨[37]에게는 모로 꺾어 큰절을 올리고, 아랫사람되는 이우의 아내 박찬주[38]가 자기한테 절을 할 때는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전부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본인이 조선의 궁(宮)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것이다. 그리고 영부인 육영수가 직접 한복을 선물로 준비했을 정도로, 국민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간간히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릴 뿐 끝내 정상인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으며, 덕혜옹주의 간병 및 간호는 유모이던 변복동과 올케 이방자의 몫이 되었다.[39] 변복동은 1972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옹주만을 걱정했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지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창덕궁 낙선재로 일본인 신사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 사람은 바로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였다. 당시 낙선재의 지배인으로 있었던 이공재한테 다케유키는 "옛 아내를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공재는 당시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방치하고 이혼했다고 알려진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40] 그래서 "만나봤자 옹주가 할 얘기도 없고, 이미 이혼한 사이니 만나야 할 이유도 없다. 옹주가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옛날 생각이 나서 오히려 병세가 더 악화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당신같은 사람한테는 면회를 일절 허용치 않으니 썩 돌아가라."고 하면서 경찰을 불러 그를 매몰차게 쫓아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소 다케유키는 그대로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후 죽을 때까지 덕혜옹주와 재회하지 못했다.
12. 말년
<colbgcolor=#29176e> 1972년 5월 덕혜옹주(왼쪽에서 두 번째)의 회갑잔치 당시 모습. 맨 왼쪽이 유모 변복동 상궁으로,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
말년의 덕혜옹주가 잠깐 정신이 맑았을 때 썼다는 글. 기억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던 것 같다.[41] |
이 글귀가 〈한국사 전(傳)〉과 소설 《덕혜옹주》에서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런데 이 글귀를 1983년 KBS 〈뉴스 파노라마〉에서 처음 공개할 무렵에는 '살고 싶어요' 부분만 알려져서, 이게 '살려달라'는 뜻으로 왜곡이 되는 바람에, 덕혜옹주가 낙선재에서 학대를 당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그 외 덕혜옹주를 모신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텔레비전을 보거나 정신이 간혹 맑아지면 옛 상궁들과 화투를 즐기곤 했다고 하며, 의사 표현은 불편한 부분이 있을 때만 "싫어"라는 말을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고종의 손자인 이석의 증언에 의하면, 덕혜옹주는 복상궁이란 이름의 상궁의 시중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이석이 면회를 가서 덕혜옹주에게 절을 하며 "고모님"하고 불렀지만 치매와 정신착란 때문에 아무 반응 없이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시중을 들던 상궁의 기록에 의하면, 가끔 딸의 이름(마사에)을 부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도 한다.
1985년,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일본에서 사망했다. 4년 후인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도 76세를 일기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사망한다.[44] MBC 뉴스데스크 덕혜옹주 사망 보도. 덕혜옹주는 후사가 없어 오빠인 의친왕의 종손인 이준 황손이 상주를 맡아 4월 25일, 황실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엄수되었다.[45]
<colbgcolor=#29176e> 덕혜옹주 영결식에 상주를 맡은 장조카 이준 황손 |
시신은 경기도 미금시(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능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의 앞면과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묘표가 새겨졌다.
- 앞면: 大韓 德惠翁主之墓(대한 덕혜옹주지묘)
- 뒷면: 開國五百二十一年五月二十六日生 五百九十八年四月二十一日卒 全州李后李旺載謹書(개국[46] 521년 5월 26일 생 598년 4월 21일 졸 전주 이씨 후손 이왕재 삼가 씀)
<colbgcolor=#29176e> 덕혜옹주의 빈소 | <colbgcolor=#29176e> 홍유릉 능역에 마련된 덕혜옹주의 묘 |
2015년 6월 24일 일본 분카학원 복식박물관(日本 文化学院服式博物官)으로부터 덕혜옹주가 입던 한복 유품을 돌려받았다. #1, #2, #3, #4, #5 같은 해 8월,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덕혜옹주 유품 특별 전시회가 열렸다.
[1] 다른 사진[2]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지역.[3] Why? 한국사 시리즈에서는, 어린 덕혜옹주가 애교를 부려서 여기에 넘어간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얼떨결에 덕혜옹주를 인정해버린다.[4] 그러나 훗날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생각해 보면, 황적에 올리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이복오빠 영친왕이 '황족은 일본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인질로 강제 유학을 간 선례가 있었으니 말이다.[5] 실제로 20여 명에 달했던 의친왕 이강의 자녀들 중에서도 일제는 서장남(이건)과 서차남(이우) 단 둘만 황적에 이름을 올려주었다.[6] 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덕혜옹주> 편.[7] 現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가쿠슈인 여자대학의 전신[8] 훗날 아키히토 황태자의 비가 될 뻔했다가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난 시마즈 하츠코의 고모.[9] '일본 헌정의 수호신'이라 불리며 1953년까지 60년 넘게 중의원 의원을 역임한 오자키 유키오의 딸. 생몰년대는 1912년 1월 26일~2008년 11월 8일. 혼마 야스코(本馬恭子)의 저서 《德惠姬 : 李氏朝鮮最後の王女》에 소개된 유키카의 회고에 따르면, 유키오는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주 몹쓸 짓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10] 왕공족이란 신분 자체가, 황족보단 낮고 화족보다는 높은 신분이다.[11] 그래서 덕혜옹주의 학창시절 사진을 보면, 많은 학생들 중 누가 옹주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덕혜옹주 혼자만 모직코트 차림으로 화병이 놓인 테이블 옆에 앉아있는 학급단체사진도 있다.[12] 기록에 남아 있는 덕혜옹주의 학급 생활 기록을 보면, 조선에 있던 히노데 소학교 시절에도 덕혜옹주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이 그려진 이로무지에 하카마를 입고 전용 책상과 개인 화장실이 딸린 교실을 사용했으며, 수업 중에도 유모와 상궁들이 교실 뒤에서 지키고 서 있기도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옹주를 궁으로 모실 어마차가 교문 앞에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13] 이왕직에서는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왕공족이 아닌 귀인 양씨를 위한 참최복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해, 덕혜옹주는 3년상이 끝난 후에 입는 옥색 천담복을 입고 장례에 참석한 후 이틀 만에 일본으로 가야만 했다.[14] 데이메이 황후의 형부 야마시나노미야 키쿠마로(山階宮菊麿) 왕의 아들. 즉 쇼와 덴노의 이종사촌 동생이다. 키쿠마로 왕은 데이메이 황후의 동복언니 쿠죠 노리코(九條範子)와 결혼했으나, 노리코 비는 2남 1녀를 남기고 사망했다. 키쿠마로 왕은 시마즈 히사코(島津常子)를 후처로 맞이하여 3남을 더 낳았는데, 히사코 비의 장남이 후지마로 왕이다.[15] 이후 후지마로 왕은 신적강하를 신청하여 츠쿠바(筑波)라는 성씨를 창씨, 황족에서 화족 '츠쿠바 후지마로 후작'이 되었으며, 모리 키요코(毛利喜代子)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16] 보온병을 갖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이유를 물어보면 "독살을 당할까봐 무서워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7] 이방자가 영친왕과 처음 조선을 방문했던 1922년. (이때 두 사람의 큰아들인 이진 왕자가 죽었다.) 당시 덕혜옹주는 10살이었다.[18] 영화 덕혜옹주의 등장 인물인 한택수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당시 이왕직 장관으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다만 한창수는 한택수와 달리 해방되기 한참 전에 죽었다. 참고로 이런 한창수에게 당당하게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의 결혼을 성사시키며 빅 엿을 날린 게 이우다.[19] 소 다케유키는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20] 다만, 직계가 아닌 방계 혈통.[21] 소 다케유키에 대한 글. 참고로 댓글 중에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의견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동정심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키고 배우자로써 존중해 주었을 뿐'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 다만 소 다케유키의 인격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그리 많지 않다.[22] 중학교까지는 쓰시마섬에서 다녔다.[23] 덕혜옹주가 조현병을 앓았기에, 그녀를 보살펴야 하는 소 다케유키가 오히려 결혼생활에서 고생을 했다. 이렇게 보면 덕혜옹주를 폭행했다는 루머와 모순되게, 오히려 소 다케유키가 피해자에 가까운 측면도 있다.[24] 혼마 야스코의 저서에 의하면, 임신은 모체에 많은 부담을 주긴 하지만 조현병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25] 혼마 야스코에 의하면, 소 다케유키를 비롯한 덕혜옹주의 주변인들이 정신장애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한다. 다케유키는 치료를 시도하려 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신분상의 이유로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고, 정신과 의사가 아닌 안마사 등을 불러 긴장을 풀어주는 정도의 시도를 하는 것에만 그쳤던 모양이다. 사실 당시의 의학 기술로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것은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26] 이혼한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지만, 이방자의 증언도 있어서 1955년이 유력하다. 다케유키도 이에 대해 특별히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27] 시인. 1931년생.[28] 정확히는 카이고마가타케 산.[29] 아마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 이혼 후 재혼하여 낳은 마사에의 이복동생들이 실종선고를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사망한 시점에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수십 년간 실종 상태에 있었던 이복 누나 / 언니를 위해 호적을 한도 끝도 없이 그대로 두기에는 상속 문제도 걸려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원만한 법적 해결을 위하여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30] #[31] 동시기 필립 공의 모친인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가족자체가 해체되는 경우도 있었다.[32] 상술되었듯 김장한과 약혼한 적이 있었던 덕혜옹주 입장에선 시아주버님이 될 뻔한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로 김을한의 삼촌인 김황진은 황실 시종이었고 그의 아내 민덕임은 어린 시절 덕혜옹주와 함께 덕수궁 준명당 유치원을 다닌 친구이기도 하다. 2016년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이 내용을 각색하여 김장한이 직접 데려오는 것으로 나온다.[기타의견]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스스로 양녕대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도미 기간 중에는 아예 자신을 "한국 왕실의 후예"라고 소개했기에 통칭 프린스 리(Prince Rhee)로도 불렸다. 그런데도 한국 황실 후손들을 냉대한 이유는, 그들을 '잠재적 정적(政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6.25 전쟁 이전 일본 도쿄의 GHQ 행사 중 이승만과 영친왕이 조우한 일이 있었는데 (영친왕의 회고에 따르면) "(한국에) 올 테면 오시고 말라면 마시오."라며 차갑게 대했다고. 교육율이 그리 높지 않았던 시절인데다 옛 황실에 대한 향수가 많던 시절이었고, 또 실제로 6.25 전쟁 도중(부산임시정부)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영왕이 귀국해서 대선에 출마할 거라더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더욱이 이승만 대통령은 임기 시작부터 옛 이왕가 재산의 환수 과정에서 도정궁 등 황족이 아닌 종친, 사실상 사인(私人)의 재산까지도 꼼꼼하게 몰수했다.[34] 이방자의 외가인 나베시마 가문은 엄청난 부자여서, 이방자의 어머니 이츠코(伊都子)를 시집보낼 때 온갖 사치스러운 혼수들을 마련해 줄 정도였다. 이렇게 부유한 환경에서 살았던 이방자가 순식간에 생계 걱정을 해야 되는 삶으로 떨어지게 되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35] 이는 한국의 새로운 지배 세력이 된 대한민국이 구 체제를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공화국의 안정성을 과시하고, 국내에 남은 황족들과 대한제국을 경험한 구세대에게 정통성을 확보하여 이들의 지지를 끌어내 보려고 한 측면도 있었다.[36] 이용했던 항공사는 현재는 델타항공에 합병된 노스웨스트 항공. 영친왕 일가 귀국은 일본항공 DC-8 전세기를 이용했다.[37] 이복오빠인 순종의 아내이므로, 덕혜옹주에게는 손위올케에 해당한다.[38] 이우는 덕혜옹주의 또 다른 이복오빠 의친왕의 아들이므로, 이우의 아내 박찬주는 조카며느리에 해당.[39] 오빠 영친왕은 귀국 당시부터 이미 혼수상태로 누워서 귀국했고 귀국 직후 바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으며 1970년에 뇌일혈이 재발하여 사망했다.[40] 당시 정신병은 물론 정신병원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빴던 데다가 이혼에 대한 인식도 몹시 부정적이었음을 고려하면, 이공재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이 당시 지금보다도 심했던 반일감정과 상기했듯 소 다케유키에 대한 안좋은 루머까지 퍼졌던걸 생각하면, 제3자 입장이었던 이공재로서는 덕혜옹주의 전남편은 천하의 개쌍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공재만 그랬던 것이 아닌 것이, 당시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담았던 드라마에서도 소 다케유키를 부정적으로 표현했다. 그나마 덕혜옹주(영화)에서는 이런 선입견이 많이 제거되고 조현병에 시달리는 아내를 어떻게든 자기 선에서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41]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런지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아 한글 철자를 많이 잊어버려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글씨체가 삐뚤빼뚤하다. 오빠 영친왕은 일본에 살면서도 매일 무의식적으로 한국어를 중얼거리며 입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했고 가족들 몰래 한국어로 영어 교재까지 집필하며 쓰는 감각도 계속 유지했다. 그래서 어제까지 유창한 일본어를 쓰던 사람이 해방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한국어를 쓰기 시작해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도 전해진다.[42] 순종 사후 명목상 이왕(李王)의 자리를 계승해 황실 가족들은 '왕 전하'라 불렀다.[43] 영친왕의 아들. 즉 덕혜옹주의 이복조카.[44] 당시 아시아인 여성의 평균 수명이 75세 정도였으니, 기대수명 정도 산 것이다.[45] 자신을 핍박했던 이승만처럼 가족장임에도 경찰 싸이카 호위와 국방부 의장대까지 동원되었으니 사실상 사회장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오라버니 영친왕과 조카뻘인 이구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구체제 마지막 황손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를 갖춘 셈이다.[46] 서력기원이 아닌, 대한제국 이전 잠시 쓰였던 연호 '개국(開國,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서기 1392년을 원년으로 하는 연호)'을 사용했다.[47] 정식 사설단체는 아니고, 인터넷카페 모임이다.[48] 의친왕의 9남, 즉 덕혜옹주의 조카. 호적명은 해룡이며, 도미하여 미국에서 거주했었으며, 국내에 몇 번 귀국하여 남긴 인터뷰, 방송 출연 등이 있었으며 2014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