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012e, #01013a 20%, #01013a 80%, #01012e); color: #ffc224; min-height: 34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조지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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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월폴 | 스펜서 컴프턴 | 헨리 펠럼 | 토머스 펠럼홀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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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S | |||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본명 | 제임스 램지 맥도널드 James Ramsay MacDonald | ||
출생 | 1866년 10월 12일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스코틀랜드 머리셔 로시머스 | |||
사망 | 1937년 11월 9일 (향년 71세) | ||
대서양 여객선 | |||
재임기간 | 제56대 총리 | ||
1924년 1월 22일 ~ 1924년 11월 4일 | |||
제58대 총리 | |||
1929년 6월 5일 ~ 1935년 6월 7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 배우자 | 마거릿 글래드스턴 | |
자녀 | 맬컴, 이시벨 등 6명 | ||
학력 | 버크벡 런던 대학교 | ||
종교 | 유니테리언 | ||
정당 | |||
의원 선수 | 9 | ||
의원 대수 | 28, 29, 30, 32, 33, 34, 35, 36, 3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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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정치인, 제56·58대 총리.보수당-자유당 양당제였던 영국에서 노동당이 배출한 첫 번째 총리이며, 따라서 영국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기도 하다. 그의 총리 재임으로 처음 집권하게 된 노동당은 이후 급부상해 자유당을 제치고 보수당과의 새로운 양당 구도를 형성하였다.
2. 생애
1866년, 스코틀랜드의 빈농 아버지와 가정부인 어머니의 혼외자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이후 다른 지역의 교회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다가 15살의 나이로 학교를 때려치고 농업에 종사했다. 1885년 브리스톨로 이사해 최초로 사회주의 정치단체에 가입했다. 이후 해당 단체가 다른 곳에 통합되자 브리스톨을 떠나 런던으로 이주했다.런던에서 실직 상태로 전전하다 창고 관리 업무를 맏게 되었고, 후일 버크벡 런던 대학교가 될 버크벡 문학과학연구소에서 과학 공부를 해 과학자가 될 꿈을 품었으나 건강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때려친다. 이즈음 1887년 트라팔가르 광장에서 아일랜드 자치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무력으로 진압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자 충격을 받고 보수당 규탄에 나섰다. 이후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자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그가 정치에 뛰어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3. 정치 생활
1888년 자유당 내 급진주의 하원의원의 비서로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비서직을 그만두고 페이비언 사회주의 협회에 가입,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1893년 키어 하디가 결성한 사회주의 정당인 독립노동당에 가입해 1895년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00년 선거에서도 또 낙선했다. 이후 영국 노동당의 전신인 노동대표위원회로 옮겨 서기가 되었다.1903년 자유당 대표 허버트 글래드스턴[1]과 글래드스턴-맥도널드 협약을 맺어, 선거 시 자유당과 노동당 지지층 사이에 표가 분산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자유당이 일부 선거구에서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는 이후 이어질 자유당과 노동당 간의 연대의 시작이었다.
1906년 정식으로 노동당이 출범하자 1906년 총선에 출마, 자유당이 해당 지역구에서 맥도널드로 단일화를 선언함에 따라 당선되었다. 이때 당선된 노동당 의원은 총 29명 뿐이라, 아직까지 군소정당에 불과했다.
1911년 노동당 당수가 되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먼저 사망하는 아픔을 겪는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노동당은 전쟁에 적극 찬성했으나, 그는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전쟁 예산안 찬성 문제로 당 주류와 갈등을 빚고 당수직에서 사임했다. 이후에도 한동안 전쟁 참여를 반대한 일 때문에 엄청난 공격과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점점 길어지고 수렁으로 빠지자 차츰 명성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1918년 치러진 총선에서는 자유당이 다수당이 되며 패배했으나, 베르사유 조약 비난, 군축과 평화 주장 등의 정치활동을 이어가며 당세 확장에 집중한다.
이후 1921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패배했으나 1922년에 다시 당선되었다. 이 즈음 그는 전쟁 이전의 명성을 완전히 회복해, 노동당 당수에도 무난히 당선되었으며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차세대 좌파 지도자로서 크게 두각을 드러냈다.
3.1. 총리 취임 이후
3.1.1. 1기: 1924년 1월 ~ 1924년 11월
당수로서 맞이한 1923년 조기 총선에서 노동당은 의석수를 49석 늘리며 191석을 차지, 다시 한번 자유당을 누르고 보수당의 뒤를 이은 원내 2당 지위를 유지했다. 스탠리 볼드윈 총리가 이끈 보수당은 86석을 잃으면서 원내 다수당 지위를 상실, 헝 의회(Hung parliament)이 되었다. 당초에는 볼드윈이 총리 자리를 지키기 위해 소수당 정부 출범을 각오하고 다음 국회가 열리는 1924년 1월까지 사임을 거부했지만, 조지 5세의 개회 칙유 발표 이후 있었던 정부 계획안에 대한 승인 투표를 노동당과 자유당이 손잡고 부결시키면서 버틸 수 없게되자 사임을 선택한 것.조지 5세가 사임한 볼드윈을 대신해 맥도널드에게 소수 정부 수립을 명했는데, 자유당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전 총리의 전략적인 지지를 받는 상황이 되자 이를 수락하면서 영국 역사상 최초의 노동당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1 또한 최초의 노동자 출신 총리, 종합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몇 안되는 총리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2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정부 구성에 협조한 자유당의 리처드 홀데인 경에게 대법관 겸 상원의장을 맡기고, 자유당 출신인 필립 스노든을 재무장관에 임명하면서 야심차게 움직였다. 취임 이후 첫 과제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지워진 과도한 전쟁 보상금과 이로 인해 촉발된 프랑스의 루르 점령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1924년, 맥도널드 총리는 런던에서 전시 연합국 회의를 소집해 프랑스가 도스 안을 수용하도록 압박하고 영독 상업조약을 체결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숨통을 터줬는데 이 과정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견해를 많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프랑스가 루르 점령을 포기하고 배상금 조정을 받아들이면서 취임 후 여럿 외교 성과를 내었다.
또한 1924년 2월, 소비에트 연방을 승인하고 수교 협의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유당의 반발을 사게 된다. 특히 신생 국가인 소비에트에 차관을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고 보수당이 기회를 노려 자유당에 호응하면서 노동당과 자유당 간의 느슨한 연대가 깨지게 된다. 특히 이 사이에 벌어진 캠벨 사건(Campbell Case)가 맥도널드 내각의 운명을 끝장내고 만다.
공산주의자이자 신문 편집자이었던 존 로스 캠벨(J.R. Campbell)이 공개적으로 군인을 모욕하는 서한을 기고한 것에 대하여 영국 검찰에서 폭동을 선동한 죄로 기소하자 맥도널드와 노동당 내각이 기소를 중지하도록 압박했다는 폭로가 터져나오면서 그야말로 난리가 나고 말았다. 보수당과 자유당은 즉시 맥도널드 내각에 대한 불신임결의를 하원에 제출해 찬성 364표, 반대 198표라는 어마어마한 차이로 통과시킨다. 이는 역대 영국 내각불신임결의 중 가장 큰 격차로 가결된 결의안이다.
결국 램지 맥도널드는 이에 대응해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선언했다. 1924년, 1년만에 열린 조기 총선에서 노동당이 40석을 잃고 151석에 그친 상황에서 보수당이 의석을 무려 154석을 늘려 401석을 확보해 단독 과반을 달성. 1월에 굴욕을 당했던 스탠리 볼드윈이 화려하게 총리로 복귀하게 된다.[2]
특히 선거를 4일 앞두고 지노비예프 서간 사건이 터진 것이 치명타였다. 보수 계통 일간지인 데일리 메일에서 지노비예프가 서명한 ‘코민테른 서간’의 비밀문서를 공개했는데 거기에 영국 노조와 군대에게 공산주의 쿠데타를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 이로 인해 노동당은 색깔론에 대책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더 억울한 것은 이 편지가 알고보니 위조된 가짜였다는것과 앞서 맥도널드 내각에 대한 내각불신임 근거였던 캠밸 사건은 노동당 맥도널드 내각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보면 매카시즘의 선배격 전략에 그대로 당하고 만것.
결국 야심차게 출범한 영국 역사상 첫 노동당 내각은 보수당과 자유당의 마타도어식 날조에 불과 10개월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3.1.2. 2기
3.1.2.1. 노동당 총리: 1929년 6월 5일 ~ 1931년 8월 24일
그렇게 자유당의 배신과 색깔론 공격 속에 치를 떨며 총리직을 내려놓은 맥도널드지만 기회는 5년만에 찾아왔다. 볼드윈이 이끄는 보수당 정권이 1926년 총파업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데다가, 높은 실업률이 임기 내내 그 발목을 잡고 있었다. 거기다 오랜만에 나타난 장기 집권 내각의 부작용으로 국민들이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했다.이 반작용으로 1929년 열린 총선에서 노동당이 136석을 추가로 확보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원내 1당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단독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번에도 자유당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전 총리의 지원 속에 2차 내각을 출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맥도널드는 첫 집권때 외교 문제에 집중하다가 국내 문제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가지고 실업 수당을 인상하고 노동당의 핵심 지지층인 석탄 산업의 임금과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법안을 차례로 통과시켰다. 또한 빈민층이 거주하는 슬럼의 위생상태 개선에 초점을 맞춘 주택법을 입안하는 등 비로소 노동당 정권다운 행보를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외교 문제 역시 포기한 것은 아니라,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주도하여 전 세계의 해군 군비를 제한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번 맥도널드의 앞길을 막는 대형사고가 터졌으니 바로 대공황이다.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가 영국 경제도 덮치면서 1930년 말즈음에 이르러서는 실업률은 두 배가 되었고, 실업자 수도 250만 명이 넘었다. 문제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전 총리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맥도널드 총리에게 적극적인 확장 재정 정책을 펼 것을 요구했음에도 재정보수주의 성향에 가까운 필립 스노든 재무장관이 재정 압박을 이유로 적자 지출을 한사코 거부한 것. 보수당 역시 대규모 공공부문 임금 삭감과 실업수당 등 공공 지출 규모 축소를 요구하는 등 맥도널드 내각을 계속해 압박했다.
한편 아서 헨더슨 외무장관 등 노동당 내 일각에서는 이런 압박에 굴해선 안된다며 즉각적으로 확장 재정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반대로 맥도널드를 압박했고, 결국 진퇴양난에 빠진 맥도널드는 총리직 사임을 선택했다.
이렇게 다시 한번 노동당 내각이 붕괴하는 듯 했지만, 일은 의외의 방향으로 진행됐다.
3.1.2.2. 거국내각 총리: 1931년 8월 24일 ~ 1935년 6월 7일
대공황의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럽게 정권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은 조지 5세는 맥도널드 총리에게 위기 극복을 위한 거국내각 수립을 제안했고, 맥도널드는 이를 받아 보수당, 자유당과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라는 이름의 거국연립정부를 수립하기로 한다.이로 인해 노동당은 그야말로 두 개로 쪼개졌는데, 맥도널드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은 국민노동당(National Labour)으로 분리되어 나갔으며 노동당에는 아서 핸더슨 등 보수당과의 연립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남았다. 졸지에 정권을 잃은 노동당은 분노에 차 맥도널드 총리, 스노든 재무장관 등을 당에서 제명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버린 상황이 됐다.
노동당의 강력한 지지층이었던 노조의 분노가 맥도널드와 국가노동당을 덮쳤고, 런던과 맨체스터에서는 연이어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노동당에 남은 수많은 사람들 역시 맥도날드가 자기만 살려고 당을 버린 배신자라고 비판했으며 맥도널드는 그 희생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취임 직후 있었던 총선에서 국민 정부 내 다수당을 차지한 보수당이 국민정부가 선거 연합을 해 선거를 치르도록 맥도널드 총리를 압박했고, 노동당은 사실상 유일한 야당으로서 선거에 임하게 됐다. 결국 선거에서 국민정부 연합이 615석 중 554석(90.1%)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연장하는 데 성공한다. 근데 이중 470석을 보수당이 차지하면서 거국내각은 사실상 보수당 정부가 된다.(...)
덕분에 명목상 맥도널드는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의석 수를 보유한 총리가 됐지만, 실제 권력은 추밀원의장에 오른 스탠리 볼드윈 전 총리와 새롭게 재무장관에 오른 네빌 체임벌린이 주도하게 되면서 일종의 바지사장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오타와 협정 체결 이후 관세가 도입되자 맥도널드의 동료로 함께 해왔던 필립 스노든 역시 이에 반대해 내각을 떠나고 만다.
1934년에는 당시 연립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이 일본 외무대신으로 재임하고 있던 히로타 고키와 접촉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종료된 영일동맹을 대체하는 영일불가침조약을 새로 체결하려 했지만, 램지 맥도널드는 이 조약이 미국에게 영일동맹의 재림으로 보일까 우려했고, 일본 역시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이권을 보장해줄 의지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 탈퇴 통보를 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주로 외교 문제에 집중하는데 여러 군축 활동, 세계 경제회의 주재 등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니,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독일을 상대로 유화책을 실시하면서 나치 독일이 성장할 시간을 주고 만다.
1935년까지 자리를 유지했으나 건강이 계속 악화되어 총리직을 계속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스탠리 볼드윈에게 다시 총리 자리를 양보하고 사임하게 된다.
3.2. 총리직 사임 이후
1935년 총선에 다시 출마했으나, 노동당의 매니 신웰 후보에게 36.4%p 차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전직 총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만큼 큰 격차로 분당 이후 한동안 고통받았던 노동당으로서는 의석수를 대폭 불리는 동시에 '배신자 맥도널드'에게 그야말로 한방을 먹인 셈.[3]그래도 스코틀랜드 대학교 혼합 선거구에서 열린 1936년 1월 재보궐선거에서 56.5%를 득표해 다시 서민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보궐선거 직전 조지 5세가 서거하면서 실의에 빠졌다고 전해지며 이후 요양을 위해 딸과 여행을 하던 도중인 1937년, 대서양을 가로지르던 여객선 안에서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맥도널드의 유해는 화장한 뒤 고향인 모레이 카운티의 가족묘에 안장 되었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895 | 1895년 영국 총선 | 사우샘프턴 | 867 (4.0%) | 낙선 (5위) | ||
1900 | 1900년 영국 총선 | 레스터 | [4] | 4,164 (13.0%) | 낙선 (4위) | |
1901 | 런던 카운티 자치의회 선거 | 핀스버리 센트럴 | ? (?%) | 당선 (1위) | 초선[5] | |
1906 | 1906년 영국 총선 | 레스터 | 14,685 (39.8%) | 당선 (2위) | 초선 | |
1910.1 | 1910년 1월 영국 총선 | | 14,337 (31.4%) | 재선 | ||
1910.12 | 1910년 12월 영국 총선 | 12,998 (38.5%) | 3선 | |||
1918 | 1918년 영국 총선 | 레스터 웨스트 | 6,347 (23.6%) | 낙선 (2위) | ||
1922 | 1922년 영국 총선 | 애버라본 | 14,318 (46.6%) | 당선 (1위) | 4선 | |
1923 | 1923년 영국 총선 | 17,439 (55.6%) | 5선 | |||
1924 | 1924년 영국 총선 | 17,724 (53.1%) | 6선 | |||
1929 | 1929년 영국 총선 | 시햄 | 35,615 (72.5%) | 7선 | ||
1931 | 1931년 영국 총선 | 28,978 (55.0%) | 8선 | |||
1935 | 1935년 영국 총선 | 17,882 (31.8%) | 낙선 (2위) | |||
1936 | 보궐선거 | 스코틀랜드 대학 혼합 선거구 | 16,393 (59.5%) | 당선 (1위) | 9선[6][7] |
5. 여담
-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저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와 스탠리 볼드윈을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대독 유화책을 내세워 아돌프 히틀러가 성장하도록 방기했다는 이유. 물론 최종 오판은 네빌 체임벌린이 한거긴 하다만, 사실 이런 류의 비난은 결과론적이긴 하다. 노동당의 맥도널드나 보수당의 볼드윈, 체임벌린이나 히틀러를 경계하지 않은건 아니기 때문. 다만 전쟁이 터지고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점에선 결국 할 말 없긴 하다. 독일이 팽창하고 영국이 밀리면서 일관되게 히틀러를 깠다는 이유만으로 처칠이 당시 뒷방 늙은이 신세에서 결국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
히틀러가 키워준 처칠?다만 맥도널드는 이 라인에선 가장 앞쪽에 있던 총리인데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도 전에 사망해서 더 억울할 법은 하다.
[1] 자유당의 유명한 총리인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아들[2] 웃긴 점은 자유당은 노동당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무려 118석을 잃으면서 의석이 겨우 40석으로 줄고 당수였던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도 낙선하고 말았다. 자유당 입장에서는 가미카제 총선이 된 셈.[3] 참고로 램지 맥도널드의 낙선은 그 후 약 90여년 뒤인 2024년 영국 총선에서의 리즈 트러스의 낙선 이전까지 전직 총리가 총선에서 낙선한 마지막 사례였다.[4] 독립노동당 당원 자격도 유지[5] 1904년 국외 부재로 자격 박탈[6] 전임자 노엘 스켈톤 1935.11.22 사망[7] 1937.11.9 임기 도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