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9:08:43

조아키노 로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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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조아키노 로시니
Gioacchino Rossini
파일:GR1792.webp
성명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
Gioacchino Antonio Rossini
출생 1792년 2월 29일
이탈리아 페사로
사망 1868년 11월 13일 (향년 76세)
프랑스 파리
경력 작곡가 → 미식가
사조 낭만주의
신장 187cm[1]
쥐띠
별자리 물고기자리
종교 천주교
1. 개요2. 생애
2.1. 소년 작곡가 로시니2.2. 청년 작곡가 로시니2.3. <세비야의 이발사>2.4. <신데렐라>2.5. 콜브란과 결혼/베토벤과 만남2.6. <세미라미데>2.7. 마지막 오페라 작곡 : <기욤 텔>2.8. 오페라에서 은퇴한 후의 작곡2.9. 미식가 로시니
3. 주변인4. 이야깃거리5. 주요 작품
5.1. 오페라5.2. 성당음악5.3. 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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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의 대표 오페라 작곡가. 멜로디 구성에 서는 그 누구도 쉽게 비교되기 어려울 정도의 뛰어난 천재성을 선보였다. 젊은 시절에 큰 부를 축적한 갑부부자 작곡가이자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긴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37살에 오페라 작곡가를 은퇴하고 미식가로 활동하면서, 39년의 여생 동안 풍파 없이 편안하게 즐기면서 살았다.

오페라 작곡을 그만두게 된 이유에 대해 먹는 일이 더욱 즐겁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농담했는데, 실제 이유는 자신의 작품을 노래할 성악가가 없었기 때문이라 여겨지고 있다. 그의 오페라는 부인 이사벨라 콜브란을 비롯하여, 안드레아 노자리, 지오반니 다비드 등대의 주요 성악가에 맞춰 작곡되었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벨칸토 창법을 익힌 성악가들이었으나, 다음 세대의 작곡가들과 성악가들이 벨칸토 창법을 멀리하게 되었기에, 결국 로시니는 오페라 무대를 떠나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2. 생애

2.1. 소년 작곡가 로시니

로시니는 소년 시절 작곡에 천재성을 선보이며, 12살 때는 <6개의 현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했다. 1804년 성당음악의 작곡에 뛰어난 안토니오 테제이 밑에서 정식으로 작곡공부를 하고, 1806년 볼로냐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첼로,피아노,작곡 등을 배웠다. 재학 중에 발표한 칸타타 <오르페오의 죽음에 대한 아르모니아의 통곡> 으로 상을 받고, 1810년 베네치아에서 공연한 <결혼 얼음> 으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1813년 <탄크레디>,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으로 대성공을 하며, 로시니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2.2. 청년 작곡가 로시니

1814년 <이탈리아의 터키인>, <시기스몬도>를 작곡했지만 실패하며 볼로냐로 돌아갔으나, 그를 고평가한 사업가 도메니코 바르바야에 의해 나폴리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활동을 재기했으며, 바르바야는 로시니에게 200 두카트의 월급에 나폴리 2개 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으며 1년에 1개 이상의 오페라 작곡을 부가조건으로 걸었다. 거기에 덧붙여 극장의 별실 사교장에 마련된 도박장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정부분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바르바야 덕에 로시니는 평생 돈 걱정 없이 살수 있었다.

2.3. <세비야의 이발사>

1816년 작가 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곡을 기초로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하였다. 하지만 같은 희곡을 기초로 작곡한 대선배 조반니 파이지엘로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대중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대선배 작곡가와 같은 내용의 오페라를 발표한다는 것이 젊은 로시니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내용의 오페라를 발표한다는 것을 알아챈 파이지엘로의 여성팬들이 극장을 찾아 초연 무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2] 파이지엘로의 여성팬들은 객석에서 야유와 고함을 지르고, 휘파람을 부는 것은 물론이고, 무대 위에 유럽에서 유명한 불행을 가져다 준다는 검정고양이 까지 풀면서 고의적으로 공연을 방해했다. 다음 공연부터는 특별한 소동없이 큰 성공을 거두며, 유럽 전역에서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인기를 얻었다.

2.4. <신데렐라>

1817년 샤를 페로의 동화를 기초로 <신데렐라>를 작곡했다. 독창 부분과 앙상블으로, 그의 정제된 작품 중 하나라 평가된다. 로마의 발레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에서 이 오페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곧 이탈리아반도 여러 국가와 그 외의 국가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1820년의 영국 런던과 1826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공연되었다. 19세기 대부분 동안, <신데렐라>의 인기는 < 세비야의 이발사>와 견주었지만, 콜로라투라 콘트랄토 성악가가 드물어지면서, 이 작품은 일반 공연 레파토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로시니가 르네상스의 것을 즐긴 것처럼, 로시니 메조 소프라노들의 새 세대가 다시 새롭게 이 작품의 인기를 보장해주었다. 그 가수들에는 체칠리아 바르톨리, 에바 포델레쉬, 제니퍼 라모어, 캐서린 컬만, 조이스 디 다나토, 페데리카 폰 슈타테, 누리아 발렌티니 페라니, 수잔 마시, 베르난데테 쿨렌, 앤 머레이, 비비카 제노 등이 있다.

<신데렐라> 에서 전통적인 동화가 일부 변경되었는데, 로시니는 현실주의자로 오페라 안에서 마술 장면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화 속의 계모와 마법사를 대신하여, 계부인 돈 마그니피소와 철학자 알리도로를 설정하였다. 계부가 친딸들을 감싸고, 의붓딸인 신데렐라를 구박하는 것으로 나온다.

2.5. 콜브란과 결혼/베토벤과 만남

1822년 자신의 중요한 오페라의 주역을 담당했던, 스페인 출신의 유명 성악가 이사벨라 콜브란과 결혼하였다. 신혼여행으로 유럽의 음악 중심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을 방문하여 선풍을 일으켰다. 빈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만나기도 했다. 베토벤은 당시 청력을 완전히 상실해서 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 로시니씨 당신이 바로 <세비야의 이발사> 작곡가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계속되는 한 지속적으로 공연될 오페라인듯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희가극만 쓰세요. 다른 장르의 오페라는 당신의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충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2.6. <세미라미데>

1823년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고작 33일만에 오페라 <세미라미데>를 작곡하였다. <세미라미데 서곡>은 저음부의 비중을 높여서 한층 장중한 음향을 구현하고 있으며 복잡한 전개부가 있고 조용하게 진행하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갑작스러운 클라이맥스로 긴장을 극대화시키는 등, 오페라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오케스트레이션을 구현하고 있다. 관현악법과 별도로 <세미라미데>는 오페라 역사에서도 중요한 작품으로, 오페라 세리아 양식으로 작곡된 최후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2.7. 마지막 오페라 작곡 : <기욤 텔>

1829년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을 기초로 오페라 <기욤 텔>을 작곡하고,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뒤 로시니는 죽을 때까지 오페라 작곡을 한 곡도 하지 않았다. 로시니는“예전에는 떠오르는 선율을 따라가면서 악보에 받아 적기만 하면 되었으나 이젠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멜로디를 찾아서 궁리해야 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게을러서 체질에 맞질 않아 오페라 작곡을 집어 치울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2.8. 오페라에서 은퇴한 후의 작곡

로시니는 기욤 텔 작곡 후 25년 동안은 작곡 자체를 매우 드물게만 수행했다. 1835년 Soirées musicales(저녁 음악회)이라는 12곡 세트의 피아노 반주 가곡집을 작곡했고,[3] 1841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및 4인 독창 등의 대규모로 구성된 종교곡 스타바트 마테르(성모의 눈물)를 작곡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다가 1850년대 중반 들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갑자기 작곡에 다시 몰두했는데, 이 때에도 오페라는 일절 작곡하지 않았고, 가곡이나 솔로 피아노곡 등 실내악 작곡에 집중하였다.[4] 로시니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작품이 작은 장엄 미사인데, 로시니가 이 곡에 대해 두 가지 버전을 남겼다. 먼저 1863년에는 합창단과 독창 4명 외에 피아노 2개와 하모니움 1대만으로 반주를 구성하는 소규모 작품을 썼으며 이러한 점 때문에 작은 장엄 미사가 되었던 것인데, 그로부터 4년 후에는 합창과 독창 선율을 어떠한 변형 없이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원래의 제목과는 거리가 많이 먼 관현악 확대 편곡을 하였다. 작은 장엄 미사의 실내악 초판은 로시니가 살아있던 1864년에 초연되었고, 관현악 편곡판은 로시니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69년에 초연되었다.

2.9. 미식가 로시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mposer_Rossini_G_1865_by_Carjat_-_Restoration.jpg
1865년 말년의 로시니. 맛있는 요리를 많이 즐겨서인지 살집이 좀 생겼다.

젊은 시절에 갑부부자가 된 로시니는 37살에 오페라 작곡가를 은퇴하고 미식가로 활동하면서, 39년의 여생 동안 풍파 없이 편안하게 즐기면서 살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의 유명 예술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지냈다. 1845년 부인 이사벨라 콜브란이 사망했으며 이듬해에 프랑스의 모델 올랭프 펠리시에와 재혼하였다.

그가 음악보다 더 사랑한 것이 음식이었고 특히 트러플, 즉 송로버섯에 대한 애착이 특별했다. 오죽하면 그가 일생에 세 번 울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첫 번째는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초연이 엉망이 돼서이고 두 번째는 파가니니의 음악을 들었을 때, 세 번째는 뱃놀이에 싸 간 송로버섯 가득 채운 칠면조 요리가 강물에 풍덩 빠졌을 때였다고 한다. 그만큼 송로버섯에 대한 그의 사랑은 특별했다.

로시니의 음식 사랑은 오페라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의 오페라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에는 미식에 대한 그의 철학이 유머러스하게 등장하는데, "파파 타치" 모임에 가입하면 결혼해 주겠다고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파파 타치 모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먹기만 할 것’을 첫째 조건으로 하는 식사 모임이다.

실제로 로시니는 파파 타치 모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의 소품곡에는 ‘늙은이의 실수’, ‘로맨틱한 살코기’, ‘버터’, ‘작은 땅콩’ 등 음식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경우도 있어 그가 얼마나 유머가 많고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개발한 메뉴 중 가장 알려진 것은 ‘로시니 스테이크’라고도 불리는 ‘투르네도 로시니’가 있다. 조선호텔에서 재현해 보인 적이 있는데, 안심스테이크 위에 거위 간과 송로버섯을 곁들인 고급 요리로 로시니와 당대 최고 요리사 앙투안 카렘(Antonin Careme)이 함께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로시니는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오텔로’, ‘윌리엄 텔’ 등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한다. 그런 그가 37세 되던 해 갑자기 은퇴를 선언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 후에 로시니가 송로버섯을 찾을 돼지를 키우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됐다.

그는 독특한 유머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으며, 요리 얘기가 나오면 요리사들이 진저리를 칠 정도로 매우 수다스러웠고, 미식가를 넘어 대식가인데다가 노는 것을 좋아해 낙천적이지만 게으른 성격이었다. 작품 의뢰가 들어와도 술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노는 것에 열중하다가 마감일이 가까워지면 관계자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는데 그제야 작곡을 시작해 대충 예전에 만들어 놨던 작품들을 모방하기도 하고, 영리해 엄청난 집중력으로 단시간에 작곡을 했다고 한다. 오페라 ‘탄 크레디’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단 20분 만에 만들었다고도 한다.

그의 사망에 관한 일화도 흥미롭다. 미신을 잘 믿는 성격이라 평생 ‘13일의 금요일’이 되면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 못했는데 그가 죽은 날은 공교롭게도 13일의 금요일이었다.

그는 인생 전반은 오페라의 성공으로 부를 얻고 후반은 오페라 대신 주방에서 가장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며 남은 생을 맛있게 지낸, 인생을 풍요롭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한 행복한 작곡가였다. 출처 이상순 교수

비록 오페라는 더 이상 작곡하지 않았지만 '스타바트 마테르'를 비롯하여 종종 이런저런 음악을 작곡했는데, 특히 그의 말년에 죽기 직전까지 작곡된 '노년의 과오'가 유명하다. '노년의 과오'는 14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로 피아노 독주곡이고 종종 성악이나 다른 악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로시니 특유의 유창한 멜로디라인이 돋보인다.

3. 주변인

4. 이야깃거리

  • 소년 시절 작곡과 연주에 천재적 재능을 보이며, 독창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엄청난 속필과 빠른 작곡속도로 유명했다. 작곡속도가 빨랐던 것은 천재성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로시니 특유의 빈둥대는 성격도 한몫 하였다. 실제로 그는 '오늘 할 일을 내일도 아니고 모레로 미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여유부리다가 마감이 다가올 때가 돼서야 비로소 작곡을 시작했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로 그를 고용한 극장장이 그를 오페라 하우스 다락방에 가둬두고 오페라를 작곡하게 한 뒤 지키고 있던 하인들에게 제 시간에 완성을 못 할 경우 창 밖으로 던져버리라고 한 일화가 있다. 이런 탓에 아이디어가 떨어진다 싶으면 중요한 부분만 신경써서 작곡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날림으로 처리하거나 기존에 작곡했던 곡으로 적당히 땜질해서 메꾸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헨델이나 니콜라 포르포라, 요한 아돌프 하세처럼 자신의 작품들을 조금씩 바꿔 우려먹는 자기복제를 서슴없이 했다.
  • 작품 중 인기작으로는 세비야의 이발사, 신데렐라가 압도적이다. 그래서 종종 로시니를 코믹 오페라 작곡가로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로시니는 원래 희극 작품보다 정가극이나 서정 비극에 주안점을 둔 작곡가였으며, 특히 '세미라미데' '코린트의 함락' '기욤 텔' 등의 대작들은 작품성 측면에서도 정점을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연주되지 않는 것은 공연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정가극 성향의 오페라 쪽에서는 주세페 베르디 같은 걸출한 후배 작곡가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로시니의 오페라가 상대적으로 밀리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까지도 그의 심각한 오페라들은 주로 서곡과 몇몇 아리아만 연주되었는데, 다행히 20세기 후반부터 여러 가지 공연상의 난점을 극복하고 전체 오페라가 종종 공연되고 있다.
  • 최전성기인 30대 후반에 갑자기 오페라 작곡을 중단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체적인 의견은 로시니가 낭만주의가 본격 도래한 뒤 자신의 음악양식이 환영받기 어렵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절필을 했다는 것이다. 로시니의 음악양식은 대체로 고전기와 낭만기의 사이의 과도기의 양식에 해당되는데, 그의 음악에는 분명 낭만기를 예견하는 음악수법이 많이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로시니는 벨칸토 창법과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 부파 등의 고전기의 작법에 충실했던 작곡가였다. 게다가 1820년대가 지나면서 자신의 부인 이사벨라 콜브란 처럼 벨칸토 창법에 충실한 가수들이 점점 사라졌던 것도 그가 오페라계를 떠나게 만든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으로 낭만주의로의 전환을 모색한 작품이 바로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기욤 텔'이었는데, 그 뒤 작품을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새로운 음악양식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의 말년 작품인 '노년의 과오'를 들어보면 고전주의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고 있는데, 죽을 때까지도 전통 작법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엄격하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작곡가로 볼 수 있다.
  • 한편으로는 너무 일찍 큰 돈을 벌었던 것도 이른 시기에 음악을 그만두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기본적으로 로시니처럼 속필에 다작을 하는 작곡가는 급진적인 성향을 추구하기 힘들다.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고 성공할지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타일이 충분히 양식화, 정형화가 되어 있는 상황이라야 다작과 속작이 가능한 것이다. '기욤 텔'을 작곡한 뒤 로시니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머리에 떠오르는 선율을 그저 손으로 옮기기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수고스럽게 찾아다녀야 하게 됐네‘ '기욤 텔'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익숙해져 있던 자신의 틀을 깨뜨려야 하고 이는 상당한 노력과 창작의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이미 큰 부자가 된 로시니는 굳이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작곡에 매달릴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자신의 작품 중에 '세비야의 이발사, 신데렐라 처럼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 여럿 있어서 이미 작곡가로서의 명예도 충분히 얻은 상황이었으니 더욱 빨리 힘든 작곡가 생활을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 그가 음악보다 더 사랑한 것이 음식이었고 특히 트러플, 즉 송로버섯에 대한 애착이 특별했다. 오죽하면 그가 일생에 세 번 울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첫 번째는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초연이 엉망이 돼서이고 두 번째는 파가니니의 음악을 들었을 때, 세 번째는 뱃놀이에 싸 간 송로버섯 가득 채운 칠면조 요리가 강물에 풍덩 빠졌을 때였다고 한다. 그만큼 송로버섯에 대한 그의 사랑은 특별했다.
  • 생일이 2월 29일인 탓에 4년에 한 번씩 생일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말년에 에두아르트 한슬리크[5]가 로시니를 만나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실제 나이보다 4분의 1로 줄여 말했다고 한다. 물론 심각하게 말한 것은 아니고, 그저 상술한 바와 같이 그의 유쾌하고 농담하기 좋아하는 성격을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다.
  • 어느 도시에 그의 동상(석상)을 세운다는 소식이 들리자, 로시니는 "동상 세울 돈 있으면 나한테 주고, 날더러 매일 거기 서 있으라고 하면 되는데..."라고 드립을 치기도 했다.
  • 로시니는 외동에, 두 번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었는데, 사망시에 그가 남긴 재산이 250만 프랑, 현재 시세로 따지면 수백억 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망 당시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그는 유언을 통해 재산의 일부는 둘째 부인에게 주고 친척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준 후 남은 돈은 모두 파리 시 당국에 기부했는데, 파리 시에서는 이 돈으로 그의 이름을 붙인 음악학교와 각종 재단을 설립했으며 이들은 현재까지도 남아 활발히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로시니의 출생지인 이탈리아의 페사로에도 그의 기부금으로 로시니 음악학교가 세워져서 음악학도를 교육하고 있다.

5. 주요 작품

5.1. 오페라

5.2. 성당음악

  • 스타바트 마테르[10]
  • 작은 장엄 미사[11]

5.3. 가곡

  • 저녁 음악회[12]
  • 노년의 과오

[1] 베르디와 같다.[2] 일각에서 제기하는 것처럼 파이지엘로가 사주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애초에 당시 파이지엘로는 오늘내일 하는 노인이었다.[3] 이 중 테너가 부르는 제8곡 "La Danza"가 유명하다.[4] 상호 공통점을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베토벤과 쇼스타코비치 등과 같은 작곡가들도 말년에는 실내악에 매우 천착했다.[5] 당대 '비평의 교황'이라 불리며 빈 음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람스와 친하고 바그너, 브루크너, 말러 등에게 적대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책 가운데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가 번역되어 나와 있다.[6] 프랑스어 발음으로는 "기욤 텔"[7] 이탈리아어 발음으로는 "체네렌톨라"[8] 그가 14살이 된 해에 처음 작곡한 오페라[9] 그의 오페라 중 거의 유일하게 흥행에서 폭망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다만 서곡은 지금까지도 종종 연주되는 편.[10]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 외에도, 페르골레시와 드보르작의 같은 이름의 작곡이 유명하다.[11] 로시니의 마지막 작곡. 1863년 실내악 초판과 1867년 작곡가 자신에 의한 관현악 편곡판이 병존하는데, 음반의 수는 실내악 초판이 훨씬 많지만 관현악 편곡판도 종종 연주된다.[12] 이 중 제8곡 "La Danza"는 루치아노 파바로티나 롤란도 비야손과 같은 유명 테너들이 종종 부르기도 하여 잘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 2024년도 한양대 성악과 남자 지정곡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