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리즈 시티3. 창단4. 전성기 (1964~1975)5. 암흑기 (1975~1987)6. 두 번째 전성기 (1988~2001)7. 나락 (2001~2020)
7.1. 길었던 희망 고문
8. 최근 성적8.1. 2011-12 시즌8.2. 2012-13 시즌8.3. 2013-14 시즌8.4. 2014-15 시즌8.5. 2015-16 시즌8.6. 2016-17 시즌8.7. 2017-18 시즌8.8. 2018-19 시즌8.9. 2019-20 시즌8.10. 2020-21 시즌8.11. 2021-22 시즌8.12. 2022-23 시즌8.13. 2023-24 시즌8.14. 2024-25 시즌
1. 개요
잉글랜드 축구 클럽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2. 리즈 시티
이 글에 따르면 원래 리즈에는 리즈 유나이티드 FC 이전에 리즈 시티 FC라는 구단이 존재했었다. 그들은 1904년에 창단되었으며, 리즈의 문장을 엠블럼으로 하고, 구단 색상으로는 파란색, 노란색, 흰색을 선택하였다. 그 후 1년이 지난 1905년, 당시 잉글랜드의 2부 리그였던 풋볼 리그 디비전 2에 참가하였고 첫 시즌에 20개 구단 중 6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초대 회장은 감독과 코치를 겸임하였던 길베르트 길리스(Gilbert Gillies)로, 창단 초기부터 1908년까지 구단을 이끌었고, 그 뒤를 이어 프랭크 스콧월포드(Frank Scott-Walford)가 1912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하였다.1906-07 시즌, 리즈 시티는 링컨 시티 FC로부터 센터 포워드 빌리 맥클라우드(Billy McLeod)를 영입했다. 맥클라우드는 꾸준한 득점력을 보여주는 믿음직한 공격수였으며, 이 시즌에만 23경기에서 15골을 기록했다. 이후 그는 리즈 시티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공격수 중 한 명으로 활약했는데, 리즈 시티 소속 기간 동안 리그 289경기에 출전해 171골을 기록하는 놀라운 성과를 남겼다. 그의 득점 능력에도 불구하고 구단은 리그 중위권에 머물렀고,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대부분의 시즌을 그 위치에서 보냈다.
그리고 스콧월포드의 후임 감독은 후에 아스날 FC의 감독으로 유명해지는 허버트 채프먼. 채프먼은 3년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구단을 2부 리그 4위로 이끌며 당시 리즈 시티의 최고 순위 기록을 세웠었다. 다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그 영향으로 리그가 중단되어 버렸고, 잉글랜드의 많은 축구 선수들과 감독들은 군에 입대해서 복무하거나 군수산업에 협력하였다. 그 중에 리즈 시티의 감독인 허버트 채프먼 또한 군수공장을 맡아 군을 지원하게 되면서 잠시 구단을 떠나야만 하였다.
리그는 중단되었지만, 리즈 시티 내부에서는 점차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이 갈등은 허버트 채프먼이 군수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리즈 동부의 반보우 군수 공장을 맡게 되면서 자리를 비우게 되자 시작되었다. 채프먼은 떠나면서 자신의 수석코치였던 조지 크립스(George Cripps)에게 구단의 행정을 맡도록 권고했고, 경기 관련 업무는 새로운 회장 조셉 코너(Joseph Connor)와 다른 이사에게 맡겨졌다.
채프먼은 지난 3년간 카리스마 넘치고 성공적인 감독이었으며, 경기장 안팎에서 구단을 하나의 팀으로 결속시켰기에, 그가 떠난 공백은 컸다. 그의 부재는 내부 긴장과 갈등이 표면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심각한 갈등은 코너와 크립스 사이에서 발생했다. 회장은 크립스를 신임하지 않았고 이를 숨기지도 않았다. 코너는 크립스가 구단의 업무를 잘못 처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사회는 코너의 편을 들어 회계사를 고용해 구단의 장부를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크립스의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통신과 팀 관리를 맡기는 모순된 결정을 내림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후 길고 어두운 시기가 지나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마침내 종전되자 허버트 채프먼이 리즈 시티의 감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이사회는 채프먼의 복귀를 통해 내부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존 감독이던 조지 크립스(George Cripps)는 자신을 다시 수석 코치로 강등시키려는 이사회의 시도에 반발하였다. 크립스는 리즈 시티의 이사였었던, 변호사 제임스 브롬리(James Bromley)를 선임하여 구단을 고소하였고, 브롬리는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 1919년 1월, 크립스와 이사회 간의 거래를 협상하도록 성사시켰다.
다시 개막을 앞둔 1919-20 시즌 전, 리즈 시티의 선수였던 찰리 코플랜드(Charlie Copeland)가 구단과의 급여 인상 문제로 갈등을 빚어 사이가 틀어졌는데, 전쟁 전에는 찰리 코플랜드가 1군에서 뛰며 주급으로 3 파운드를 받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중단되었던 리그가 다시 개막을 앞둔 1919-20 시즌, 구단은 찰리 코플랜드에게 1군이 아닌 리저브에서 뛰는 대가로 주급 3.5 파운드를 지불하고, 이후 1군에서 뛰지 못하게 되면 자유 이적을 통해 방출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찰리 코플랜드는 기존 주급의 2배를 요구했고, 만약 이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구단이 전시에 구단의 비공식 선수들에게 임금을 불법적으로 지불했다는 것을 빌미로 FA에 이를 신고하겠다는 협박을 하였다. 이사회는 이러한 코플랜드의 행동에 위협을 느껴 그의 요구를 무시, 자유 이적을 통해 코번트리 시티 FC로 보냈는데, 특정 문서를 알 수 없는 경로[1]로 입수한 코플랜드가 1919년 7월, FA에 리즈 시티의 불법 임금 지불 문제를 폭로하면서 비로소 문제가 수면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러한 관행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지만, FA와 풋볼 리그는 공식적으로 제기된 이러한 주장을 무시 할 수 없었다.
곧 리즈 시티에게 혐의에 대한 답변을 요청하였고, 10월 6일까지 구단의 장부 문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즈 시티의 수뇌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FA의 요청을 무시하였다. 결국 문서 제출 기한이 지날 때까지 리즈 시티가 답변을 제출하지 않자 FA와 풋볼 리그는 리즈 시티의 불법 임금 지불 의혹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었지만, 리즈 시티가 침묵을 지킨 것이 죄를 인정한다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풋볼 리그는 리즈 시티를 풋볼 리그에서 추방, FA는 리즈 시티에게 공식적으로 구단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사들로부터 구단을 인수하겠다고 제안한 리즈 시장 조셉 헨리(Joseph Henry)의 개인적인 개입조차도 FA가 조사를 재고하도록 설득 할 수 없었고, 1919-20 시즌 8경기 만에 리즈 시티의 리그 일정은 중단되었다.
코너를 포함한 리즈 시티의 임원 5명은 종신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놀랍게도 허버트 채프먼 또한 그 중에 한명으로 포함되어있었다. 징계를 받은 이사회 임원들은 즉시 사임했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채프먼은 불법 임금 지불이 이루어졌을 때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제시되어 나중에 유예를 받았다. 코너는 리즈 시티가 조사에 의한 공정한 청문회를 받지 못했다고 불평했고, 리즈 시장 조셉 헨리 또한 리즈 시티를 대체했던 풋볼 리그의 포트 베일 FC가 리즈 시티를 퇴출시키고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조사팀에 과도한 압력을 가하였다고 믿었다. 포트 베일 FC는 리즈 시티의 경기 기록[2]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남은 경기를 대신 참가하여 최종적으로 리그에서 13위로 시즌을 마쳤다.
리즈 시티 폐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선수들이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선수들은 새로운 고용주를 찾기 위해 경매에 붙여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풋볼 리그는 새로운 구단을 찾을 때까지 선수들의 임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을 위한 최선의 방안은 경매라는 굴욕적인 절차였다. 1919년 10월 17일, 리즈에 위치한 메트로폴 호텔에서 리즈 시티의 자산을 둘러싼 경매가 열렸고, 30개 구단의 대표들이 흥정을 위해 모여들었다.
경매에는 구단의 모든 선수와 장비가 포함되었지만, 전체 경매 금액은 총 10,150파운드에 불과했다. 리그 최고의 스타 공격수였던 빌리 맥클라우드조차 1,250파운드에 거래되는 등 선수들의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선수들의 연봉이 200파운드 안팎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이었다. 10,150파운드는 2025년 현재 가치로 약 600,000파운드(약 10억 원)에 해당하지만, 이마저도 지금의 축구 시장에서는 평범한 선수 한 명의 이적료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결국 경기장을 비롯해 16명의 선수들이 그물, 골대, 축구화, 유니폼, 장비 등과 함께 팔려나가야 했다. 풋볼 리그는 선수들이 원치 않는 구단으로의 이적을 강요하진 않겠다고 했지만, 선수들로서는 하루빨리 그라운드로 복귀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경매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경매 과정에서 구단들이 우위를 점하면서 선수들은 자신의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렇게 팔려간 선수 중 누구도 다시는 리즈 시티의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선수 생활 최전성기에 맞닥뜨린 이 믿기 힘든 사태는 그들에게 있어 견디기 힘든 굴욕이자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3. 창단
그렇게 리즈 시티는 경매를 통해 완전히 해산되었다. 하지만 리즈 시티의 영혼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었다. 호텔에서 한 구단이 이렇게 사라지고 있던 것과 동시에 같은 날인 1919년 10월 17일, 또 다른 장소에 위치한 세일럼 채플(Salem Chapel)[3] 이라는 어느 한 회중교회에서는 지역 변호사이자 축구 애호가였던 알프 E. 마서(Alf E. Masser)의 주재하에 1,000명이 넘는 리즈 축구 서포터들의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해체된 리즈 시티를 대체하여 미래를 보고 장기적으로 운영할 새로운 프로 축구 구단을 만들기 위해서 독자적으로 조직된 위원회를 결성하였다.또한 리즈 시티의 위기 당시 구단 인수를 제안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조셉 헨리(Joseph Henry) 시장의 아들 조셉 헨리 주니어도 창단 위원으로 참여했다. 비록 리즈 시티가 없어졌다고는 하나, 리즈 지역의 두터운 팬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리즈 시티의 초대 주장이었던 딕 레이(Dick Ray)[4]를 필두로 한 7명이 이 새로운 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지금의 리즈 유나이티드 FC였다.
곧 리즈 유나이티드는 리즈 시티가 해체되어 함께 사라진 리즈 시티 리저브 팀의 자리를 대신하여 미들랜드 풋볼 리그(Midland Football League)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리즈 시티를 응원했던 서포터들을 기반으로 지지층을 탄탄하게 쌓았기에 곧바로 리즈를 대표하는 구단으로 부상하였다. 리즈 시티의 홈구장이었던 엘런드 로드는 일부 지역 사업가에 의해 구장을 허물고 그 부지에 벽돌 공장이 들어설 뻔 했지만, 다행히도 요크셔 아마추어 AFC라는 아마추어 구단이 엘런드 로드를 임대하여 재개발을 막을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리즈 시민들의 즉각적인 활동과 열렬한 지원에 감명을 받은 허더즈필드 타운 AFC 회장 힐튼 크로더(Hilton Crowther)는 허더즈필드 타운 이사회와의 상의도 없이 신생 구단인 리즈 유나이티드와 구단을 통합하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당시 크로더가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던 허더즈필드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고, 크로더 역시 리즈 시티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새로 탄생한 리즈 유나이티드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크로더는 두 구단의 통합에 적극적이었고 그의 계획은 리즈 관계자들과 일부 허더즈필드 선수들의 지지까지 얻었다.
1919년 11월 7일, 앨비온 거리의 YMCA 홀에서 한때 리즈 시티를 지원하려 했던 조셉 헨리 시장의 주재로 리즈 유나이티드의 지지자들과 잠재 투자자들이 모인 대규모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힐튼 크로더와 허더즈필드의 감독 아서 페어클로, 그리고 리즈 유나이티드 위원 마크 바커 등이 참석해 의견을 개진했다.
회의 결과 허더즈필드의 리즈 이전은 만장일치로 가결되는 듯했으나, 추후 리즈 유나이티드 위원회의 표결에 부쳐졌을 때는 과반수 찬성을 얻는 데 그쳤다. 조셉 헨리 시장은 두 구단의 통합이 성사될 경우 엘런드 로드를 새 구단의 근거지로 삼는다는 계약 내용도 언급했다. 한편 구단명은 '리즈 유나이티드'와 '리즈 트리니티' 중에서 전자가 우선적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허더즈필드의 리즈 통합 시도에 허더즈필드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며 거센 반대 시위를 벌였고, 허더즈필드 이사회 또한 여론을 의식해 통합을 막기 위해 힐튼 크로더에게 진 2만 5천 파운드의 채무를 조기 상환하기로 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결국 크로더는 자신의 허더즈필드 지분을 정리하는 대신 거액의 보상을 받고 물러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허더즈필드와 리즈 유나이티드의 통합은 무산되고 크로더는 리즈에 전념하게 되었다.
크로더는 리즈 유나이티드의 초대 회장 자리에 올랐고, 리즈가 1부 리그로 승격하는 즉시 상환을 시작한다는 조건으로 구단에 3만 5천 파운드를 대출해 주는 등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이어 리즈 유나이티드는 요크셔 아마추어 AFC로부터 250파운드에 엘런드 로드를 완전히 인수하는 데도 성공했다. 1920년 2월 26일엔 크로더와 리즈 통합을 지지했던 허더즈필드의 아서 페어클로 감독이 리즈의 새 사령탑에 올랐고, 딕 레이가 그의 보좌를 맡았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리즈 유나이티드는 1920년 5월 31일, 풋볼 리그 가입을 위한 투표에서 31표를 얻어 1위로 선정되었다. 2위를 차지한 카디프 시티 FC(23표)와 함께 이듬해인 1920-21 시즌부터 2부 리그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1920년 6월 17일에는 리즈 회장 크로더와 허더즈필드 타운 간의 기나긴 협상도 마침내 합의를 통해 끝을 보았고, 그 다음달에 채무 문제는 완전히 정리되었다. 비록 크로더와 페어클로가 추진했던 허더즈필드와의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지만 리즈는 풋볼 리그 입성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고 본격적인 도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크로더가 아무리 지원을 해도 성적이 별로였던 허더즈필드 타운은 정작 크로더가 손을 떼고 리즈 유나이티드의 회장이 되자 전성기를 맞이했다. 허더즈필드는 리즈 시티에서 불명예스럽게 추방당한 허버트 채프먼을 새 감독으로 선임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선택이었다. 채프먼은 허더즈필드를 1920년대 최고의 명문 구단으로 탈바꿈시키며 리그 3회 연속 우승과 FA컵 결승 진출이라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일궈냈다. 리즈가 구단 역사상 첫 1부 리그로의 승격을 위해 노력하던 시기에, 허더즈필드 타운은 이미 구단 역사상 첫 1부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리즈 시티의 몰락과 리즈 유나이티드의 탄생이 가져온 가장 아이러니한 결과 중 하나가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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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21 시즌 당시 리즈의 첫 선수단들 |
페어클로의 리즈 유나이티드는 첫 시즌인 1920-21 시즌 리그에서 14위라는 다소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원정에서 기록한 10골은 구단 역사상 최저 기록이었다. 하지만 이후 점차 안정을 찾아 1921-22 시즌에는 8위, 1922-23 시즌에는 7위로 상승세를 보였고, 마침내 1923-24 시즌에는 54점을 기록하며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해 구단 역사 최초의 승격을 달성하였다.
당시 팀은 특히 수비에서 강점을 보였는데, 주장 짐 베이커(Jim Baker), 풀백 버트 더필드(Bert Duffield), 그리고 22세의 센터하프 어니 하트(Ernie Hart)가 주축이었다. 하트는 이후 잉글랜드 대표팀에도 선발되며 리즈에서 16년 동안 400경기 이상을 뛰는 레전드가 되었다. 공격에서는 잭 스완(Jack Swan), 퍼시 휩(Percy Whipp), 조 리치몬드(Joe Richmond)가 스코틀랜드 윙어 조 해리스(Joe Harris)의 지원을 받아 그 시즌 리그에서만 44골을 합작하는 활약을 펼쳤다.
마침내 1부 리그 승격을 보는 것에 성공한 크로더도 만족스럽게 회장직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1부 리그 데뷔 시즌인 1924-25 시즌에서 리즈는 18위로 간신히 잔류에 성공했다. 1925-26 시즌에는 더 어려운 싸움을 펼쳐야 했고, 최종전에서 토트넘 홋스퍼 FC를 4-1로 이겨 간신히 강등을 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시즌 동안 페어클로는 팀을 상당히 발전시켰다. 체스터필드 FC에서 윌리스 에드워즈(Willis Edwards), 미들즈브러 FC에서 러셀 웨인스코트(Russell Wainscoat), 레이스 로버스 FC에서 톰 제닝스(Tom Jennings)를 영입하는 등 팀 보강에 힘썼다.
하지만 1926-27 시즌, 팀은 결국 1부 리그에서 강등되고 말았다. 제닝스가 리즈의 역대 최다인 69골 중 35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11승 30점만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1925년에 변경된 오프사이드 규칙으로 공격수들의 득점이 용이해진 반면, 수비진들은 아직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지 못한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강등 이후 페어클로는 사임하였고, 1927-28 시즌을 앞둔 리즈 이사회는 그의 후임으로 4년 전인 1923년에 동커스터로 떠났던 리즈 유나이티드의 초대 감독 딕 레이를 다시 데려오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다시 지휘봉을 잡게된 딕 레이는 부임 첫 시즌만에 맨체스터 시티에 이어 2위를 기록하며 곧바로 리즈의 승격을 이끌어냈다. 리즈는 당시 구단 기록인 98골을 터뜨리며 57점을 기록했다. 제닝스와 웨인스코트에 더해 젊은 찰리 키틀리(Charlie Keetley)와 하츠에서 5,000파운드에 영입한 스코틀랜드 대표팀 선수 족 화이트(Jock White)가 공격진에 합류해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총 78골을 합작했다.
1부 리그로 복귀한 리즈는 1928-29 시즌 13위를 기록했다. 시즌 마지막 17경기에서 단 3승, 최종 12경기에서 1점만을 획득하는 부진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다음 시즌(1929-30)에는 더욱 발전하여 5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는데, 이는 돈 레비의 부임 이전까지 구단 역사상 최고 순위였다. 이제 에드워즈와 하트는 경험 많은 대표팀 선수로 성장했고, 풀백 잭 밀번(Jack Milburn)도 주전으로 자리잡으면서 팀의 전망은 밝아 보였다. 특히 1930년에 윌프 코핑(Wilf Copping)이 합류하면서 에드워즈-하트-코핑으로 이어지는 하프백 라인은 코핑이 1934년 리그 챔피언 아스널로 이적할 때까지 리즈 팀의 중심축이 되었다.
1930-31 시즌에는 리즈가 우승 경쟁에도 참여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단 12승을 거두는 부진한 시즌을 보내며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이 시즌에도 미들즈브러를 7-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5-0으로 이기고, 블랙풀을 상대로 7-3 원정 승리[5]를 거두는 등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31-32 시즌에는 리즈가 즉시 반등하여 울버햄튼에 이어 2위로 다시 1부 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167경기에서 112골을 기록했던 톰 제닝스는 시즌 전에 떠났고, 215경기에서 87골을 기록한 러셀 웨인스코트도 1931년 10월에 팀을 떠났지만, 찰리 키틀리가 23골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다. 조 퍼스(Joe Firth, 33경기 14골)와 빌리 퍼니스(Billy Furness, 25경기 12골)도 그를 뒷받침했다. 에드워즈-하트-코핑의 조합은 전성기를 맞았고, 리즈는 9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9연승을 포함해 15경기 무패 행진을 기록하는 등 눈부신 시즌을 보냈다.
1932-33 시즌 1부 리그 복귀 후 첫 두 경기에서 패배했지만, 이후 14경기 무패 행진을 펼쳤다. 비록 시즌 후반에 부진했지만(20경기에서 단 4점 획득), 최종 8위를 기록했다. 1933-34 시즌에도 9위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1934-35 시즌에는 윌프 코핑이 아스널로 이적한 영향으로 92실점하며 18위로 추락했다.
결국 1935년 3월, 딕 레이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제한된 자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리즈 유나이티드의 평판을 높이고 여러 젊은 선수들의 재능을 발굴하는 데 기여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딕 레이는 총 8년 동안 리즈를 지휘하며 잠시 부진한 시기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딕 레이의 후임 감독으로 빌리 햄슨(Billy Hampson)이 부임했다. 빌리 햄슨 역시 1917-19년 사이 리즈 시티에 임시 선수로 활약했던 인물로, 1930년 선수 은퇴 후 칼라일 감독을 맡았었다. 햄슨은 경험을 중시하며 알버트 맥인로이(Albert McInroy), 조지 브라운(George Brown) 같은 전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들을 영입했다. 또한 딕 레이가 발굴한 베르트 스프로스턴(Bert Sproston)을 성장시켜 1937년 잉글랜드 대표팀에 데뷔하게 했으나, 재정 부족으로 1938년 9,500파운드에 토트넘으로 그를 매각해야 했다.
1936년에는 중위권 성적을, 1937년에는 19위로 간신히 강등을 면했다. 특히 원정에서 단 3점밖에 획득하지 못했지만, 시즌 후반 리버풀에서 고든 홋슨(Gordon Hodgson)을 영입하면서 반등의 계기를 마련했다. 홋슨은 13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고, 리즈는 마지막 두 경기에서 모두 3골씩 넣으며 승리해 간신히 강등을 피했다.
1938년에는 시즌 초반 우승 경쟁에 참여할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였고, 홋슨은 36경기에서 25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1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16경기에서 단 2승을 거두는 부진으로 최종 9위에 머물렀다. 1938-39 시즌,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마지막 정규 시즌에서는 13위를 기록했지만, 홋슨이 레스터를 상대로 구단 기록인 한 경기 5골을 기록하는 등 밝은 모습도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공식 축구 활동은 중단되었고, 전쟁 중에 에릭 스티븐슨(Eric Stephenson)과 전 선수였던 앨런 파울러(Alan Fowler)가 사망했다. 짐 밀번도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회복하여 전후 구단에 복귀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리즈는 1부 리그 무대를 맛보기도 했지만, 놀랍도록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1920년 리그 가입 이후 12년 동안 총 5번의 승강강등을 겪었다. 그럼에도 에드워즈, 하트, 코핑과 같은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들을 배출했고, 리즈 시티 시절처럼 재정 문제에 시달렸음에도 전쟁 이후를 기대하게 하는 희망을 팬들에게 안겨주었다.
전쟁 직후 리즈는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빌리 햄슨은 쓸쓸히 구단을 떠났고, 그대로 축구계에서 은퇴했다. 햄슨의 후임으로 리즈에서 444경기를 뛰었던 윌리스 에드워즈가 지명되었지만, 첫 감독 경험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단 한 시즌 만에 구단을 떠났다. 그의 후임으로 프랭크 버클리(Frank Buckley)가 임명되었다.
리즈는 2부 리그에서 한동안 머물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 리즈 유나이티드 최초의 스타 플레이어가 탄생하였다. 1948년 9월, 존 찰스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17살의 나이에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리즈 유나이티드의 감독 프랭크 버클리는 그를 오른쪽 풀백과 센터하프, 레프트하프 자리에서 시험했다. 존 찰스는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8년동안 뛰며 150득점을 기록하였다. 존 찰스의 활약 아래, 리즈 유나이티드는 1955-56 시즌 2부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며 승격에 성공하였다. 존 찰스는 1956-57 시즌에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득점왕을 차지하는 위업을 달성, 이 활약을 바탕으로 유벤투스 FC로 이적하였다.
리즈는 스타 플레이어를 잃었지만, 또 다른 선수를 얻게 되었다. 1군에 데뷔한지 5년차에 접어든 잭 찰튼이 주전에 완전히 도약하게 되면서 리즈 유나이티드는 다시 반등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4. 전성기 (1964~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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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역사상 최고 명장의 등장 |
부임 초기 레비는 팀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1961-62 시즌, 리즈는 3부 리그로의 추락 직전까지 갔으나, 레비는 결정적인 순간에 에버튼에서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미드필더 바비 콜린스를 영입했다. 콜린스는 작은 체구였지만 승리에 대한 엄청난 의지를 가져왔고, 시즌 마지막 날 뉴캐슬과의 원정에서 3-0 승리를 이끌어 리즈의 2부 리그 잔류를 확정했다.
이후 레비는 과감하게 유스 시스템에 투자했다. 폴 리니, 노먼 헌터, 게리 스프레이크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1군에 과감히 기용했고, 이들은 이후 리즈의 중추가 되었다. 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조니 자일스를 영입한 것은 레비의 가장 성공적인 영입 중 하나였다.
돈 레비 감독의 지휘 아래 잭 찰튼과 빌리 브렘너을 중심으로 구단은 똘똘 뭉쳤고 여기에 피터 로리머의 활약까지 힘입어 1963-64 시즌 2부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다시 1부 리그로 승격하였다. 미들즈브러에서 영입한 앨런 피콕은 시즌 후반 8골을 기록하며 승격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부 리그로 복귀한 첫 시즌부터 리즈는 강호의 면모를 보였다. 1964-65 시즌, 이들은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고 FA컵 결승까지 진출했다. FA컵 준결승전에서 리즈는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던 맨유를 만났는데, 잭 찰튼과 데니스 로가 충돌을 일으키면서 경기 양상이 과격하게 변하였다. 이때의 앙금과 두 구단의 전성기는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고, 본격적으로 로즈 라이벌리가 형성되는 사건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잭 찰튼의 동생 바비 찰튼이 맨유의 레전드라는 것. 아무튼 빌리 브렘너의 결승골로 리즈는 맨유를 탈락시켰지만, 결승전에서 리버풀 FC에게 패하며 리그에 이어 FA컵에서도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보비 콜린스는 올해의 축구선수상을 수상하며 팀의 성공을 대표했다.
1965-66 시즌에는 처음으로 유럽 무대에 진출한 리즈가 인터-시티 페어스컵 4강까지 진출했지만, 레알 사라고사에게 패했다. 1966-67 시즌에는 리그 4위를 차지했고, FA컵 4강과 페어스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모두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레비는 팀의 약점이었던 공격력을 보강하기 위해 1967년 10월, 구단 기록을 깨는 10만 파운드를 들여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미크 존스를 영입했다. 그의 헌신적인 플레이와 공 소유 능력은 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테리 쿠퍼와 에디 그레이가 왼쪽에서 안정적으로 활약하면서 팀의 창의성이 한층 높아졌다.
마침내 1968년, 리즈는 리그 컵에서 첫 트로피를 획득했다. 아스날과의 결승전에서 테리 쿠퍼의 장거리 슛으로 1-0 승리를 거둔 것이다. 같은 해, 인터-시티 페어스컵 결승에서는 헝가리의 페렌츠바로시를 1-0 종합 스코어로 이기고 첫 유럽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968-69 시즌, 레비는 선수들에게 한 경기도 지지 않고 리그 우승을 차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비록 맨체스터 시티와 번리에게 패배를 당했지만, 이후 28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펼치며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1부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리즈는 단 26실점으로 당시 리그 기록인 67점을 획득하며 리버풀과 함께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군림했다.
우승 이후 레비는 안주하지 않고 영국 이적 신기록인 16만 5천 파운드를 지불하며 레스터 시티의 잉글랜드 U-23 스트라이커 앨런 클라크를 영입했고, 이로써 스프레이크, 리니, 쿠퍼, 브렘너, 찰튼, 헌터, 로리머, 클라크, 존스, 자일스, 그레이, (교체) 마델리로 이루어진 그 유명한 리즈 유나이티드의 클래식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1969-70 시즌, 리즈는 세 개의 트로피를 놓고 경쟁했다. 리그에서는 에버튼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고 1월 첼시를 상대로 5-2 승리를 거두며 우승 가능성을 높였다. FA컵에서도 순항했지만, 일정 혼잡으로 인한 체력적 부담이 문제가 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컵 준결승전에서 세 경기 마라톤 끝에 승리했지만, 이는 팀에 큰 부담이 되었다. 결국 레비는 리그 우승 경쟁을 포기하고 컵 대회에 집중했지만, 유러피언컵 준결승에서 셀틱에게 패했고, FA컵 결승에서는 첼시와 1-1로 비긴 뒤 재경기에서 2-1로 패했다.
1970-71 시즌에는 또다시 리그 우승에 근접했다. 팀은 초반부터 선두를 달렸지만, 아스날의 끈질긴 추격을 받았다. 브렘너와 그레이의 부상, 2월 FA컵에서 4부 리그 콜체스터에게의 충격적인 패배, 그리고 4월 웨스트 브롬위치와의 경기에서 논란이 된 레이 팅클러 심판의 판정으로 팀의 자신감이 흔들렸다. 결국 아스날에게 우승을 내주고 준우승에 그쳤지만, 페어스컵에서는 리버풀을 꺾고 결승에 진출해 유벤투스를 원정 다득점 규칙으로 이기며 두 번째 유럽 트로피를 획득했다.
1971-72 시즌, 웨스트 브롬위치와의 경기 이후 관중 소동으로 인해 리즈는 홈 경기장 사용 금지 처분을 받아 시즌 초반 4경기를 다른 요크셔 클럽의 경기장에서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홈에서는 단 두 점만 내주며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원정에서의 부진으로 10월 초 이미 네 번의 패배를 기록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팀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5-1로, 사우스햄튼을 7-0으로 대파하며 '슈퍼 리즈'라는 별명을 얻었다. FA컵에서는 아스날을 1-0으로 꺾고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앨런 클라크의 헤딩골이 결승전의 유일한 득점이었다. 하지만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울버햄튼에 2-1로 패하며 또다시 리그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1972-73 시즌, 레비는 팀 재건을 위해 허더즈필드 타운에서 수비수 로이 엘람과 트레버 체리를 영입했다. 엘람은 적응하지 못했지만, 체리는 리즈에서 오랜 기간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시즌은 첼시에 4-0 패배로 시작했고, 경기 도중 미크 존스와 데이비드 하비가 부상으로 이탈하는 악재가 겹쳤다. 시즌 내내 우승 경쟁을 펼쳤지만 결국 리버풀과 아스날에 이어 3위로 마무리했다.
FA컵 결승에서는 2부 리그의 선덜랜드 AFC를 만나 최대 우승 후보로 평가받았으나, 이안 포터필드의 전반전 골과 짐 몽고메리 골키퍼의 기적적인 더블 세이브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UEFA 컵위너스컵 결승에서는 AC 밀란과 맞붙었지만, 브렘너, 클라크, 자일스, 에디 그레이의 결장과 불공정한 심판 판정으로 0-1로 패했다. 추후 당시 주심이었던 그리스 심판 크리스토스 미카스(Christos Michas)가 밀란으로부터 뇌물을 받았음이 공식조사로 밝혀졌고, 심판은 평생 자격정지의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밀란은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아 리즈 팬들은 이 경기를 '빼앗긴 우승'으로 여긴다.
1973-74 시즌, 많은 비평가들이 리즈가 더 이상 과거의 강팀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38세의 잭 찰튼은 은퇴를 선언하고 미들즈브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레비는 에버튼과 그리스 축구 연맹의 감독직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리즈에 남아 두 번째 리그 우승을 노렸다. 에디 그레이와 조니 자일스가 부상으로 시즌 대부분을 결장했지만, 고든 맥퀸, 테리 요라스, 조 조던, 트레버 체리 등이 훌륭한 대체자 역할을 했다.
리즈는 시즌을 압도적으로 시작하여 연속 7승을 거두고 리그 29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기록했다. 그러나 2월 스토크 시티에 3-2로 패하며 무패 행진이 끝났고, 이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반등에 성공했고, 4월 24일 아스날이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이기면서 리즈의 두 번째 리그 우승이 확정되었다. 앨런 클라크의 골로 QPR을 1-0으로 이기며 시즌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이 우승은 레비의 리즈 시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 해 여름, 그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며 트레이너 레스 코커를 대표팀에 데려갔다. 레비의 후임으로는 오랫동안 리즈를 비판해온 브라이언 클러프가 충격적으로 선임되었다. 클러프는 선수들에게 과거의 메달은 부정하게 얻은 것이니 버리라고 말하며 팀과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결국 44일 만에 해고되었다.[6]
일례로 브라이언 클러프는 취임하자마자 리즈 선수들을 불러모아놓고 그 동안 레비와 너희들이 이룬 명성은 전부 사기라고 말하며 스스로 악감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특히 에디 그레이에게 '네가 만약에 말이었다면, 나는 총을 쏴서 널 죽였을것이다' 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에디 그레이는 잉글랜드내에서도 입지전적 선수로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있음을 생각하면 브라이언 클러프의 성격이 얼마나 모났으며 리즈 감독을 맡은 저의가 의심 될 정도다. 일부러 리즈를 망치기 위해 리즈에 부임했다고해도 무리가 없다.[7] 이로써 리즈의 황금기는 막을 내리고, 회광반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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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 | |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녹아웃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
- | 1라운드 | | 5:3 승 | 4:1 승 (홈) | 1:2 패 (원정) | |||||
| 5:3 승 | 3:2 승 (홈) | 2:1 승 (원정) | 2라운드 | | 5:1 승 | 2:1 승 (원정) | 3:0 승 (홈) | ||
| 2:1 승 | 2:0 승 (홈) | 0:1 패 (원정) | 준준결승 | | 4:0 승 | 3:0 승 (홈) | 1:0 승 (원정) | ||
| 2:0 승 | 0:0 무 (원정) | 2:0 승 (홈) | 준결승 | | 3:2 승 | 2:1 승 (홈) | 1:1 무 (원정) | ||
4승 1무 1패 (9득점 4실점) | 합계 성적 | 6승 1무 1패 (17득점 6실점) | ||||||||
◀ 1973-74 | 결승 | ▶ 1975-76 |
'''''' | ||
파르크 데 프랭스 (파리) | ||
주심: 미셸 키타브지안 (프랑스) | ||
관중: 48,374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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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뮌헨 | 리즈 | |
감독:데트마어 크라머 | 감독:지미 암필드 | |
2 | 0 | |
<rowcolor=#000,#fff> 71' 프란츠 로트 81' 게르트 뮐러 | | - |
- | ||
◀ 1974 유러피언컵 결승전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 1976 유러피언컵 결승전 |
클러프 이후 지미 암필드가 후임 감독으로 부임하여 리즈를 이끌었는데, 1975년 당시 유러피언컵에서 암필드의 리즈가 돌풍을 일으키며 결승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리즈가 일으킨 최대 이변은 준결승전이었다. 리즈의 준결승 상대 바르셀로나는 명장 리누스 미헬스의 지휘 아래 유러피언컵 3연패와 1974년 월드컵 준우승으로 발롱도르를 3회나 수상한 요한 크루이프를 주축으로 요한 네스켄스, 카를레스 렉사흐, 미겔리, 마리뉴 페레스, 안토니오 데라크루스, 후안 마누엘 아센시 등등 우수한 선수들이 포진한 팀이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는 선수단 명성에 걸맞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1라운드에서 SK VÖEST 린츠를 상대로 5-0 대승을 거뒀고, 2라운드에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를 3-0으로 이겼으며, 8강전에서는 오트비다베리 FF를 5-0으로 크게 이기면서 무실점으로 준결승까지 당도하며 압도적인 우승후보로 떠오르게 되었다.
반면, 돈 레비와 잭 찰튼이 팀을 떠난 리즈는 이미 한물갔다는 평을 받고 있었고, 때문에 바이에른 뮌헨과 바르셀로나가 준결승에 진출한 시점에서 이 두 팀이 결승에 가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놀랍게도 엘런드 로드에서 열린 1차전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리즈가 우승후보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경기 양상을 보면 빌리 브렘너가 전반 10분에 선제골을 넣었고, 후반 20분에 바르셀로나의 아센시가 동점골을 넣었으나 13분후 클라크가 다시 앞서가는 득점을 터뜨린 끝에 홈에서 값진 승리를 얻어내었다. 이후 캄 노우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이번엔 피터 로리머가 전반 7분만에 득점을 기록하며 점수차를 더 벌렸고, 후반 14분경에 바르셀로나의 마누엘 카를레스가 득점을 하여 다시 1골차로 따라붙었고, 리즈는 실점 1분만에 고든 맥퀸이 다이렉트 퇴장을 당하며 위기에 봉착하였다. 다행히도 추가 실점은 없이 경기가 1-1 무승부로 마무리 되어 종합 스코어 3-2로 바르셀로나는 탈락, 리즈가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망의 결승전을 앞두고 주요 선수들의 부상과 출전 정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빌리 브렘너, 앨런 클라크, 조니 자일스, 에디 그레이 등 핵심 선수들이 결장한 상태에서 리즈는 바이에른 뮌헨에게 0-2로 패했다. 경기 자체는 여러 논란이 있었다. 피터 로리머의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취소되었고, 베켄바워가 앨런 클라크에게 명백한 파울을 범했음에도 프랑스 심판 미셸 키타브지안(Michel Kitabdjian)은 페널티킥을 선언하지 않았다. 또한 노먼 헌터가 경기 도중 퇴장당하며 리즈는 수적 열세까지 겪었다.
바이에른은 후반에 두 골을 넣어 승리를 거두었고, 경기 후 분노한 리즈 팬들은 경기장 내에서 의자와 물건을 던지며 난동을 부렸다. 이에 UEFA는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4년간의 유럽 대회 출전 금지라는 중대한 처분을 내렸다. 나중에 암필드는 이 금지 기간을 2년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당시 리즈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 대회 출전권을 획득하지 못했기에 제재의 실질적 효과는 크지 않았다. 이 경기는 상징적으로 리즈의 전성기 종료를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레비 시대의 주요 선수들이 하나둘씩 팀을 떠나면서 한 시대가 마무리되었다.
5. 암흑기 (1975~1987)
유러피언컵 결승 패배 이후 리즈 유나이티드는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미 암필드 감독 아래 팀의 기둥이었던 선수들이 하나둘씩 팀을 떠났다. 장기간 리즈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테리 쿠퍼는 잭 찰튼이 감독으로 있던 미들즈브러로 이적했고, 조니 자일스는 웨스트 브롬위치의 선수 겸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황금기의 주축이었던 개리 스프레이크와 잭 찰튼은 2년 전인 1973년에 이미 구단을 떠났고, 미크 존스는 무릎 부상으로 1975년 10월 은퇴를 선언했다. 암필드는 재건을 시작하면서 토니 커리, 아서 그레엄, 앨런 커티스, 브라이언 그린호프와 같은 선수들을 영입했지만, 리즈는 더 이상 예전의 강팀이 아니었다.
1978년 리즈 이사회는 암필드가 더 이상 팀을 끌어올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78-79 시즌 시작 한 달 전 그를 해고했다. 이는 다소 놀라운 결정이었는데, 암필드는 돈 레비의 황금세대를 대체하는 까다로운 임무를 꽤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 동안 수석 코치 모리스 린들리가 팀을 맡았고, 이사회는 전 셀틱 감독 조크 스타인을 영입했다. 그러나 스타인은 계약서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으며, 6주 만에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기 위해 사임했다. 그의 후임으로 선덜랜드 감독 지미 애덤슨이 1978년 10월 부임했다.
애덤슨은 초반에 좋은 성적을 거두며 리즈가 16경기 동안 리그 무패 행진을 펼치도록 이끌었다. 1978-79 시즌에는 리그 5위를 차지해 UEFA컵 진출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9년 여름, 팀의 핵심이었던 토니 커리가 QPR로 이적하면서 리즈 팬들은 애덤슨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1979-80 시즌은 크리스마스 전까지 팀이 고전했고, 첫 8경기에서 1승만 거두자 애덤슨은 2개월 안에 성적을 개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홈 경기에서의 좋은 성적으로 11위까지 올라서며 감독직을 유지했지만, 컵 대회에서는 참담했다. 리그컵에서 아스날에게 7-0으로 대패했고, FA컵에서는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4-1로 졌다. UEFA컵에서도 루마니아 리가 I 소속의 우니베르시타테아 크라이오바에게 양 경기 모두 패배했다.
팀의 부진으로 팬들은 수천 명씩 구단을 떠났고, 구단엔 침체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바이런 스티븐슨, 존 루키치, 테리 코너, 마틴 디킨슨과 같은 유망주들이 등장하며 부활의 희망을 보여주기도 했다.
애덤슨은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아르헨티나 미드필더 알렉스 사벨라 영입에 40만 파운드를 투자했지만, 1980-81 시즌 초반 11경기에서 1승밖에 거두지 못하자 해고되었다. 잠시 모리스 린들리가 임시 감독을 맡은 후, 반즐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전 리즈 스트라이커 앨런 클라크가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클라크는 3년 안에 트로피를 획득하겠다고 약속했고, 첫 경기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수비적인 전술을 통해 팀을 안정화시켰고, 1980-81 시즌을 9위로 마무리했다. 1981년 2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올드 트래포드에서 이기는 등 희망적인 모습도 보였다.
그는 웨스트 브롬위치 앨비언에서 잉글랜드 윙어 피터 반스를 93만 파운드에,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프랭크 그레이를 30만 파운드에 영입하며 이적시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81-82 시즌 개막전에서 스완지에 5-1로 대패하며 시작했고, 첫 10경기에서 1승만 거두는 등 부진했다.
포웨딩에서 골이 부족해 클라크는 버밍엄 시티와 바이런 스티븐슨을 프랭크 워딩턴과 트레이드했다. 워딩턴은 17경기에서 9골을 기록했지만 너무 많은 포인트를 놓쳤다. 시즌 마지막 홈 경기에서 브라이튼을 2-1로 이겨 강등권에서 벗어났지만, 다음 주 월요일 웨스트 브롬위치 앨비언과의 중요한 원정에서 2-0으로 패하며 울버햄튼과 미들즈브러와 함께 강등됐다. 이에 불만을 품은 팬들이 경기 후 폭동을 일으켰고, 리즈는 18년 만에 1부 리그에서 추락하면서 클라크와 그의 수석 코치 마틴 윌킨슨은 해고되었다.
전 윙어 에디 그레이가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상황은 150만 파운드 이상의 부채를 안고 있는 구단의 독배였다. 지속 불가능한 임금 구조를 줄이기 위해 그레이는 피터 반스를 레알 베티스에 임대하고 웨일스 국가대표 윙어 칼 해리스를 찰턴에 10만 파운드에 판매했다.
재정적 어려움에 더해 훌리건 문제도 구단을 괴롭혔다. 1982-83 시즌 개막전에서 그림즈비의 블런델 로드 경기장을 훌리건들이 파괴했고, 벌금과 경기장 폐쇄 위협에 대응해 이사회는 구단의 존립을 위협하는 "천박한" 요소를 없애기 위한 도움을 요청했다. FA는 12월 두 경기 동안 테라스 폐쇄를 명령하고 전 경기 전면 티켓제를 요구했다. 결국 1982-83 시즌은 8위로 마무리하며 승격권과 10점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구단의 유스 시스템에서 재능 있는 선수들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18세의 미드필더 존 셰리단의 잠재력이 돋보였다. 그레이는 젊은 선수들에게 희망을 걸었고, 대형 선수들을 판매해 비대해진 임금 구조를 정리했다. 또한 전 팀 동료 피터 로리머를 재영입해 데니스 어윈, 닐 아스핀, 스콧 셀러스, 토미 라이트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육성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변화로 1983-84 시즌에는 리그에서 고전했고, 컵 대회에서도 3부 리그의 옥스포드와 앨런 클라크의 스컨소프에게 패했다. 1984-85 시즌에는 연속 4승으로 시작해 희망을 주었지만, 다음 3경기를 연속으로 패하는 등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사우스햄튼 스트라이커 이안 베어드를 영입하는 등 시즌 마지막까지 승격 경쟁을 펼쳤다.
5월 6일 슈루즈베리를 1-0으로 이겨 마지막 경기를 남겨두고 6위를 차지했지만, 버밍엄 원정에서 패배하며 승격 희망이 무산되었다. 이 경기는 악명 높은 '세인트 앤드류스 전투'로, 경기 중 양팀 팬들이 그라운드에서 충돌해 벽이 무너지고 십대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기는 30분 동안 중단되었고, 96명의 경찰이 부상을 입었다. 리즈는 5,0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받았고, 다음 시즌 경기는 전면 티켓제로 진행되었다.
1985년 여름, 에디 그레이는 재정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동생 프랭크를 선덜랜드에 판매했지만, 무승부 5경기와 스토크 시티에 6-2 대패를 당하며 이사회의 신뢰를 잃었다. 6경기 연속 무패로 상황을 안정시켰지만, 10월 8일 월솔과의 리그컵 경기 승리 후 해고되었다.
이 결정은 선수들과 팬들 사이에 불만을 일으켰고, 경기장 주차장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사 브라이언 우드워드는 사임했다. 피터 로리머는 이사회에 성명서를 제출해 이 결정의 처리와 타이밍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사회는 사랑받는 전 주장 빌리 브렘너에게 감독직을 맡김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구단은 250만 파운드에 엘런드 로드를 리즈 시 의회에 매각하는 등 혼란에 빠졌다. 브렘너는 자금 마련을 위해 앤디 리니건과 마틴 디킨슨을 판매하고, 브렌단 옴스비, 데이비드 레니, 로니 로빈슨, 브라이언 캐스웰, 데이비드 할을 영입했다. 또한 동커스터의 미드필더 이안 스노딘을 20만 파운드에 영입해 주장으로 삼았다.
1985-86 시즌, 리즈는 강등권과의 싸움을 벌였다. 4월 5일 2위 포츠머스 원정에서 리즈는 강등권보다 단 5포인트 위에 있었고 7경기가 남아있었다. 포츠머스가 전반에 선제골을 넣었지만 리즈는 앤디 리치의 동점골, 이안 베어드의 역전골, 다시 리치의 추가골로 3-2 승리를 거두며 귀중한 3점을 획득했다. 마지막 4경기에서 3패를 당했지만 강등권보다 7포인트 앞선 채로 1985-86 시즌을 마무리했다.
브렘너는 팀 재건을 시작하며 데니스 어윈, 토미 라이트, 스콧 셀러스, 테리 페이란, 조지 맥클러스키, 게리 햄슨, 데이비드 할을 내보냈다. 그는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득점력 높은 스트라이커 키스 에드워즈를 12만 5천 파운드에 영입했고, 피터 해독, 잭 애셔스트, 존 버클리, 로니 싱클레어, 러셀 도이그도 영입했다.
그러나 1986년 9월 20일 브래드포드 시티의 오드셀 스타디움에서 다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경기 중 생선과 감자 튀김 판매차가 뒤집히고 불타면서 경기가 20분간 중단되었다. 경기장은 비워졌고 경기는 침묵 속에서 진행되었다. 리즈가 전면 티켓제 복원을 제안하자 FA는 신속히 요청을 수락했다.
1986년 12월 21일 스토크 시티에게 7-2로 대패한 후 브렘너는 대대적인 변화를 주었다. 그는 이안 스노딘을 구단 기록인 84만 파운드에 에버튼에 판매하고, 미키 애덤스, 존 피어슨, 바비 맥도널드, 마크 에이즐우드를 영입했다.
이러한 변화는 구단의 운명을 바꿨고, 리즈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FA컵 준결승에 진출했다. 힐스버러에서 열린 1부 리그 코번트리와의 경기는 흥미진진했다. 리즈는 전반 15분 데이비드 레니의 골로 선제골을 넣었지만, 교체 선수 미키 진이 동점골을 넣었고 키스 하우첸이 종료 12분 전 코번트리에게 역전골을 넣었다. 브렘너는 4분 후 키스 에드워즈를 교체 투입했고, 그가 동점골을 넣어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연장 전반, 코번트리의 데이비드 베넷이 3-2 결승골을 넣으며 역대 최고의 준결승 중 하나를 마무리했다.
리즈의 2부 리그 성적도 컵 대회의 성공과 비슷했고, 마지막 8경기에서 5승을 거두며 4위를 차지해 첫 시즌 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 올덤을 만나 홈에서 1-0 승리, 원정에서 종료 직전 2-0으로 패배하고 있었지만 교체 투입된 에드워즈가 원정 골을 넣어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에서는 찰턴을 만났다. 밸리에서 1-0으로 패했으나 홈에서 같은 스코어로 이겨 연장전에 들어갔다.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3차전이 열렸다. 90분 동안 득점 없이 연장전에 돌입했고, 존 셰리단이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넣었지만, 피터 셔트리프가 종료 직전 두 골을 연속으로 넣어 찰턴의 승리를 확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멋진 시즌이었고, 리즈는 다음 시즌 승격 유력 후보로 지목되었다. 이사회는 브렘너의 계약을 연장해 그의 업적에 보답했다. 1987-88 시즌 리즈는 부진한 출발 후 브렘너가 11월 35만 파운드에 더비 카운티의 스트라이커 바비 데이비슨을 영입했다. 그러나 팀은 7위라는 평범한 성적으로 마무리했고, 실망한 팬들은 리즈 출신 미드필더 데이비드 배티의 등장 외에는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1988년 여름, 브렘너는 포츠머스에서 센터백 노엘 블레이크와 윙어 빈스 힐레어를 영입했으나, 개막전에서 전 소속팀인 포츠머스에 4-0으로 패하고 이안 베어드가 퇴장당했다. 리즈는 이후 5경기에서 1승만 거두었고, 브렘너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6. 두 번째 전성기 (1988~2001)
1988년 10월, 리즈 유나이티드는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하워드 윌킨슨을 새 감독으로 영입하며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윌킨슨의 첫 행보는 대대적인 팀 개편이었다. 그는 도전적인 선택으로 윔블던의 강성 미드필더 비니 존스를 65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선수단을 활력 있게 만들었다. 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기량이 떨어진다고 여겨졌던 노장 미드필더 고든 스트라칸을 영입했는데, 이는 새 팀의 리더로서 영감을 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윌킨슨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윌킨슨은 시즌 중반에도 팀 강화를 위해 노팅엄 포레스트의 타깃맨 리 채프먼, 셰필드 웬즈데이의 임레 바라디, 스토크에서 크리스 카마라를 영입하는 등 지속적인 보강을 이어갔다. 스트라칸은 리그에서 16골을 터뜨리며 스코틀랜드 대표팀에 복귀했고, 채프먼은 21경기에서 12골을 기록하며 윌킨슨의 투자를 증명했다.
결국 1989-90 시즌, 셰필드 유나이티드와 뉴캐슬과의 접전 끝에 리즈는 마지막 두 경기를 모두 이기면서 승격권을 확보했다. 레스터와의 홈경기에서는 멜 스털랜드의 선제골 이후 레스터의 게리 매칼리스터가 동점골을 넣어 절망적인 상황이 됐지만, 스트라칸이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려 팬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 본머스 원정에서 채프먼의 결승 헤더골로 2부 리그 우승과 함께 12년 만에 1부 리그 복귀를 달성했다.
승격과 함께 윌킨슨은 즉시 팀 보강에 나섰다. 아스날에서 골키퍼 존 루키치, 레스터에서 미드필더 게리 매칼리스터, 웨스트 브롬에서 수비수 크리스 화이트를 영입했다. 특히 매칼리스터를 영입하기 위해 비니 존스를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보내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1부 리그로 복귀한 리즈는 1990-91 시즌 첫 경기부터 에버튼을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11월과 12월에는 10경기 무패 행진을 달리며 연말 기준 3위에 올랐고, 최종적으로 4위에 안착하는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리 채프먼은 리그에서 21골을 기록하며 1부 리그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1991-92 시즌을 앞두고 윌킨슨은 첼시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 왼쪽 풀백 토니 도리고, 사우스햄튼에서 스트라이커 로드 월러스,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미드필더 스티브 호지,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데이비드 웨더럴과 존 뉴섬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다.
이러한 투자는 리그 우승을 향한 도전으로 이어졌고, 리즈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선두를 달리며 두 팀만이 10경기 후에도 무패 행진을 유지했다. 11월 23일 빌라 파크에서의 4-1 승리는 리즈의 우승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맨유와의 세 번의 대결에서는 FA컵과 리그컵에서 패했지만, 12월 29일 리그 경기에서는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우승 희망을 이어갔다.
1월 1일, QPR이 맨유를 4-1로 꺾고 리즈가 웨스트햄을 3-1로 이기면서 리즈는 1점 차 선두로 올라섰다. 리즈는 1월 12일 셰필드 웬즈데이를 상대로 채프먼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6-1로 대승했다. 그러나 FA컵 경기에서 채프먼이 부상을 당해 2월 말까지 결장하게 되자, 윌킨슨은 노츠 카운티에서 토니 아가나를 임대로 데려오고 에릭 칸토나라는 논란 많은 프랑스 국가대표를 영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칸토나는 적응 기간을 거친 후 루턴 원정에서 첫 골을 기록하며 팀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후 리즈는 승격권 경쟁에서 맨유를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시즌 막판 맨유가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2-1로 패하고 리즈가 코번트리를 2-0으로 이기면서 우승 경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마침내 4월 26일, 리즈는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원정경기에서 3-2로 승리하고 맨유가 리버풀에게 2-0으로 패하면서 19년 만에 두 번째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특히 이 경기에서 브라이언 게일의 자책골이 결승골이 되어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91-92 시즌 리즈의 우승을 이끌었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스트라칸, 배티, 매칼리스터, 스피드로 구성된 리그 최고의 미드필드 조합이었다. 특히 리즈 유스 출신의 데이비드 배티는 투쟁적이고 헌신적인 플레이로 팀의 중원을 지켰다. 배티는 수비적 미드필더로서 상대 공격수들을 차단하고 볼을 탈취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이는 스트라칸과 매칼리스터가 공격에 집중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의 단단한 태클과 투지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은 그를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로 만들었다.
1992-93 시즌, 새롭게 창설된 프리미어 리그에 진출한 리즈는 아스날에서 데이비드 로캐슬을 구단 신기록인 200만 파운드에, 블랙번에서 스콧 셀러스를 8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시즌은 웸블리에서 리버풀을 4-3으로 이기며 챠리티 실드를 획득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1993년 11월, 윌킨슨은 구단 기록을 깨는 275만 파운드에 배티를 블랙번으로 이적시켰다. 이는 많은 리즈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팀의 중원 약화로 이어졌다. 배티의 빈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았고, 이는 리즈의 성적 하락과도 연관이 있었다. 리그에서는 부진했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슈투트가르트에게 3-0으로 패하며 조기 탈락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홈 경기에서 4-1 대승을 거두었고, UEFA가 슈투트가르트의 외국인 선수 초과 출전을 이유로 재경기를 명령했다. 리즈는 바르셀로나의 캄 노우에서 열린 재경기에서 2-1로 승리했지만, 2라운드에서 레인저스에게 양 경기 모두 패했다. 이 시즌 리그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홈에서의 강한 모습으로 17위를 기록했다.
이후 1997년 새로운 회장 피터 리즈데일이 취임하면서 리즈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데이비드 오리어리가 1996년 감독으로 부임한 후, 그는 유스 아카데미 출신 선수들을 과감하게 1군에 기용했다. 조나단 우드게이트, 앨런 스미스, 리 보이어, 해리 큐얼, 스티븐 맥페일 등이 주축이 되어 "오리어리의 아기들(O'Leary's Babe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흥미롭게도 1998년 12월, 데이비드 오리어리의 첫 영입으로 데이비드 배티가 440만 파운드에 뉴캐슬에서 리즈로 복귀했다. 이는 그의 "영적 고향"으로의 귀환으로 묘사되었고, 오리어리의 젊은 선수들에게 경험과 리더십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1999-2000 시즌, 리즈는 에이릭 바케, 마이클 브릿지스, 대런 허커비, 다니 밀스, 마이클 듀베리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10월 24일 에버튼과의 4-4 무승부 전까지 구단 기록인 10연승을 달리면서 강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시즌 마지막 날, 리즈는 리버풀과 함께 3위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리버풀은 강등권에 있던 브래드포드 시티와의 원정에서 예상을 깨고 패배했고, 리즈는 웨스트햄과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3위에 올라 2000-01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했다.
2000년 여름, 리즈데일 회장은 프랑스 미드필더 올리비에 다쿠르, 셀틱의 호주 스트라이커 마크 비두카, 리버풀 수비수 도미닉 마테오 등을 영입하며 대대적인 투자를 이어갔다. 1860 뮌헨을 상대로 예선을 통과한 리즈는 바르셀로나, 밀란, 베식타스와 함께 1차 조별리그에 속했다.
리즈는 바르셀로나 원정에서 0-4로 패배하며 시작했지만, 이후 밀란을 상대로 1-0으로 승리하고 베식타스를 6-0으로 대파하는 등 2승 3무로 밀란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2차 조별리그에 진출했다. 2차 조별리그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라치오, 안데를레흐트와 같은 조에 속했고, 레알 마드리드에게 두 경기 모두 패했지만 나머지 팀들을 상대로 3승 1무를 기록하며 8강에 올랐다.
8강에서는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를 누르고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발렌시아와의 준결승에서 1차전 홈 경기 0-0 무승부 후 2차전 원정에서 0-3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특히 2차전에서 앨런 스미스가 퇴장당하면서 팀의 분위기가 무너졌다.
리그에서는 마지막까지 리버풀과 4위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최종 라운드에서 승점 1점 차이로 4위에 그쳐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리버풀에게 내주고 말았다. 당시 잉글랜드는 챔피언스 리그에 3팀만 출전할 수 있었기에, 만약 현재와 같이 4팀이 출전할 수 있었다면 리즈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 시기 리즈의 두 번째 전성기는 무리한 재정 투자와 함께 빠르게 끝나게 되었다. 2003년에는 많은 핵심 선수들이 팀을 떠났고, 결국 2004년 프리미어 리그에서 강등되며 긴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7. 나락 (2001~2020)
2001-02 시즌을 준비하면서 리즈는 인터 밀란에서 임대로 데려왔던 로비 킨을 재계약하는 대신 헐값에 토트넘으로 보냈다. 대신 더비 카운티의 미드필더 세스 존슨을 700만 파운드에,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로비 파울러를 1,100만 파운드라는 기록적인 금액에 영입했다. 하지만 비싼 값을 치르고 데려온 세스 존슨은 적응에 실패하며 투자 대비 성과를 내지 못했다.시즌은 사우스햄튼 상대 승리로 시작했으나, 아스날과의 원정경기에서는 리 보이어와 대니 밀스가 퇴장당하는 등 규율 문제가 불거졌다. UEFA컵에서는 마리티무를 상대로 승리하고 워딩턴 컵에서는 레스터를 상대로 로비 킨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6-0으로 대파하는 등 희망적인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시즌 내내 일관성 있는 성적을 내지 못하고 겨우 5위로 마감하며 UEFA컵 진출권을 획득하는데 그쳤다.
이 시점부터 리즈의 재정적 몰락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리그 4강권, UEFA컵 4강, 챔피언스 리그 4강으로 기세등등해진 선수들은 높은 주급을 요구했고, 구단 회장 피터 리즈데일은 이를 은행 대출로 해결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출의 근거가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진출 시 중계권료로 상환'이라는 위험한 가정에 기반했다는 점이었다.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면서 예상했던 8500만 파운드의 장기 차입금이 더욱 늘어났고, 2002년 3월에는 1400만 파운드의 손실이 발생했다.
리즈데일은 최소 1500만 파운드의 선수 판매가 필요하다고 발표했고, 리 보이어의 리버풀 이적이 예상되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무산되었다. 선수단의 자산 가치는 독립적 평가에서 1억 9800만 파운드였지만, 주가는 구단 전체 가치를 단 2500만 파운드로 평가하고 있었다.
상황은 2002년 6월 27일, 데이비드 오리어리 감독이 갑작스럽게 해고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후임으로는 놀랍게도 아스날에서 뇌물 스캔들로 FA로부터 출장 정지를 당했던 전 첼시 감독 테리 베너블스가 선임되었다. 베너블스의 부임과 함께 이적시장에서의 활발한 움직임이 기대되었으나, 폴 오콘, 니키 밤비, 테디 루식 등 몇몇 선수만 영입되었다.
2002-03 시즌이 시작되기 전 리즈 팬들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리즈데일이 수차례 "왕관의 보석은 팔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장 리오 퍼디난드가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3000만 파운드에 이적한 것이다. 이는 당시 수비수 이적료 세계 신기록이었다.
그 뒤로도 주요 선수들의 대량 이탈이 이어졌다. 조나단 우드게이트, 리 보이어, 올리비에 다쿠르, 로비 파울러 등이 팀을 떠났다. 파울러의 경우 맨체스터 시티로의 600만 파운드 이적도 절반인 300만 파운드만 받고, 나머지는 2006년까지 연봉의 일부를 리즈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진행되었다.
리그 성적도 계속 하락했다. 맨체스터 시티와 웨스트 브롬위치를 이기고 좋게 출발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마저 해리 큐얼의 헤더골로 이겼지만, 11월과 12월에 참담한 성적을 기록했다. 결국 15위로 시즌을 마쳤고, 강등팀인 웨스트햄과 승점 5점 차이밖에 나지 않는 치욕적인 상황에 이르렀다. 베너블스는 8개월 만에 해고되고 선덜랜드 출신의 피터 리드가 시즌 종료까지 임시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3년 3월 말, 피터 리즈데일도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존 맥켄지 교수가 후임으로 선임되었다. 2002년 12월 말 기준 장기 부채는 7890만 파운드로 증가했고, 파울러, 존슨, 킨, 밤비 등에 대한 할부금 1690만 파운드도 지불해야 했다.
이 시기의 유일한 희망은 젊은 유망주들의 등장이었다. 제임스 밀너는 2002년 12월 26일 선덜랜드전에서 16세 나이로 득점해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연소 득점자가 되었고, 2003년 5월 4일에는 아스널 원정에서 3-2 승리를 거두는데 기여했다.
2003-04 시즌 전에는 또 다시 핵심 선수를 잃게 되었다. 한때 2000만 파운드 이상의 가치를 가졌던 해리 큐얼이 500만 파운드라는 헐값에 리버풀로 이적했다. 사실 이 과정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큐얼의 계약이 1년 남았고 자유계약으로 떠날 가능성이 있어 리즈는 매각을 결정했다. 리버풀이 리즈의 재정 상황을 악용해 700만 파운드를 제안했고, 리즈가 첼시와 맨유를 통해 이적료 경쟁을 유도하려 하자 큐얼은 "리버풀 외 다른 팀으로의 이적은 거절할 것"이라 언론에 밝혔다. 이후 리버풀은 제안을 500만 파운드로 낮췄고, 결국 그 금액에 매각되었다. 게다가 큐얼은 이적료 중 자신과 에이전트 몫으로 200만 파운드를 요구하는 소송까지 제기해, 리즈가 실제로 얻은 금액은 300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이러한 재정적 붕괴의 원인 중 하나는 전성기 동안의 무분별한 지출이었다. 당시 구단주 피터 리즈데일과 감독 데이비드 오리어리는 선수 영입뿐만 아니라 주급에도 엄청난 비용을 지출했다. 세스 존슨의 경우 에이전트가 주급 18,000파운드를 요구했으나, 구단이 오히려 25,000파운드를 제안했다고 알려졌다. 대부분의 주요 선수들은 5~6만 파운드의 주급을 받고 있었다. 또한 리즈 팬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금붕어 어항 사건'(회장실 금붕어 어항 관리비로 25만 파운드를 소모)처럼 불필요한 곳에 막대한 지출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리즈는 1억 파운드 이상을 은행 대출로 충당했고, 이 빚이 구단의 발목을 잡아 결국 2004년 프리미어 리그 강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기타 영입과 뻘짓을 나열하자면
- 로비 킨: 영입 - 인터 밀란 1200만 파운드, 이적 - 토트넘 핫스퍼 700만 파운드;
- 올리비에 다쿠르: 영입 - 에버튼 720만 파운드, 이적 - AS 로마 330만 파운드;
- 로비 파울러: 영입 - 리버풀 1100만 파운드, 이적 - 맨체스터 시티, 기본 이적료 300만 파운드+출장 횟수 및 성과에 따른 추가 옵션 300만 파운드;
- 마이클 브리지스: 영입 - 약 1천만 파운드에 이적, 자유계약으로 방출.
- 세스 존슨: 영입 - 더비 카운트 1000만 파운드, 이적 - 자유계약. (당연히 0파운드)
- 리 보이어: 리버풀의 900만 파운드 이적 실패, 02-03 시즌 후 자유계약.
- 이언 하트: 바르셀로나의 1200만 파운드 이적 거절, 03-04 시즌후 자유계약으로 레반테 행.
- 아론 레넌: 토트넘으로 100만 파운드에 방출. 아론레논은 EPL시절이 아닌 챔피언쉽 강등 이후 이적한 케이스로 이 목록에 넣기에는 무리가 있다. 선수본인 자체가 리즈에서 탈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레넌에 대해 리즈 서포터들은 극렬한 반감을 보이는 편.
- 대니 밀스: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 문제는 밀스의 높은 주급 중 상당수를 리즈가 내 줘야 했다.
- 조나단 우드게이트: 뉴캐슬로 700만 파운드에 이적. 당시 잉글랜드의 중앙 수비수로서 존 테리, 웨스 브라운, 레들리 킹과 비견되는 유망주 치고는 낮은 가격이었다.
결국 2003-04 시즌이 되어가며 선수진의 깊이는 너무나도 얇아져 버렸고, 그 선수진을 보충하기 위해 디디에 도미, 라민 사코, 주마나 카마나, 시릴 샤퓌스, 살로몬 올렘베, 호케 주니오르, 저메인 페넌트 등의 선수들을 임대했으나,
2003-04 시즌 당시에도 스미스-비두카의 공격진과 제임스 밀너-저메인 페넌트의 양 윙은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수준급인 실력이었으나 미드필더와 수비수의 큰 공백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며 결국 팀은 2003-04 시즌 말에 아스날에게 0-5로 패배하며[9] 풋볼 리그 챔피언십으로 강등당했다.
강등 직후 부채를 갚기 위해 선수들을 싼값에 팔고 주급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계약이 만료된 선수를 계속 방출하였지만 빚을 갚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리즈는 재정 파탄을 선고받았고 FA로부터 승점 감점이라는 제재까지 당하게 된다. 이때 자신들의 홈구장인 엘런드 로드(Elland Road)와 훈련장 소프 아크도 리즈 시에 매각되었으나 매각 비용과 같은 액수의 바이백 조항을 달아놓긴 했다. 그리고 엘런드 로드는 13년이 지난 2017년에서야 다시 구단 소유로 돌아왔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2004년 부터 2017년까지 연간 1.7m 파운드를 임대료로 지불했었다.
2부 리그 초기인 2004-05 시즌에는 리즈가 내 줄 수 있는 알량한 주급을 받아들여줄 수 있는 자유계약 선수들을 중심으로 영입하여 간신히 구색을 맞추었으나, 당시 리즈의 임시 구단주였던 매켄지 교수가 훈련장 및 구장 매각, 빚들의 탕감 및 상환 기간 연장, 선수단의 주급 구조 개선, 티켓값 상승(...)등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한 끝에 1억 파운드의 빚을 3천만 파운드 수준으로까지 낮추는 데 성공하였으며 유스 선수들을 올려가면서 팀의 체질 개선에 힘쓴 결과, 풋볼 리그 챔피언십 첫 시즌에 안정적으로 남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매켄지 교수는 리즈의 재정 안정을 어느 정도 달성한 후 새로이 구단주로 첼시를 말아먹은 전력[10]이 있는 켄 베이츠
게다가 2007년에는 3천 5백만 파운드의 빚을 막지도 못해서 부도를 내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나락 그 자체로 떨어져가는 분위기였다.
이런 절망 속에 몇몇 해외 구단 인수 떡밥이 돌기도 했다. 풋볼 리그 챔피언십으로 강등당한 왓포드와 같이 하위 리그로 강등당한 구단을 좀 더 싸게 사면서도 좀 이름값이 있는 구단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거의 소문일 뿐이었다.
그리고 켄 베이츠에 이어 바레인 투자은행의 살라 누르딘에 이어 맞이하게 된 구단주인 마시모 첼리노의 시기가 오면서 팀이 또 한번 요동치고 있다.
새로운 구단주가 된 마시모 첼리노는 과거 칼리아리 칼초 구단주 시절에도 감독을 자주 갈아치우기로 악명이 높았던 구단주인데 역시나 리즈에 부임한 1년 반 동안 6명의 감독을 갈아치웠다.
- 브라이언 맥더못: ~2014년 4월 맥더못의 경우 첼리노가 오기전에 이미 임명된 감독이었다.
- 데이빗 호커데이: 2014년 7월~8월[12]
- 디르코 밀라니치: 2014년 9월~10월
- 닐 레드피언: 2014년 11월~2015년 5월[13] 리즈에서 오랜기간 코치 및 수석코치를 맡은 인물로 이 당시도 임시체제였다.
- 우베 뢰슬러: 2015년 7월~10월
- 스티브 에반스: 2015년 11월~
게다가 2014년에 이탈리아, 특히 자신이 구단주로 있던 세리에 A의 자원들을 주로 영입하였는데 그렇게 들어온 선수들이 너무 많아서 팀에 융화되지도 못하였고 실력도 어중간했다. 그러다보니 수적으로는 풍성한 스쿼드였으나 질적으로는 2013-14 시즌 득점왕이던 로스 맥코맥의 공백을 메우는데에도 실패하며 팀이 하위권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첼리노 구단주가 세금 포탈 문제로 법정 다툼중이고, 리즈를 인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인수 세력이 등장하지는 않다보니 현재까지는 구단 내의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
7.1. 길었던 희망 고문
이러니 저러니 힘들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지난 시즌 비록 승격 PO에서 패배하여 승격은 실패했지만 예전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보게되었다. 09-10 시즌 현재 3부 리그에서 1경기를 덜 치렀지만 2위 찰튼과 승점 4차를 유지하며 1위를 달리고 있다. 거기다 FA 컵에서 영원한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만날 가능성도 있어 많은 축구 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2009년 12월 8일. 캐터링 타운과의 FA 컵 3라운드 재경기에서 5-1로 대승을 거두고 6년 만의 로즈 더비에서 1-0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대망의 09-10 시즌 최종전. 한 명이 퇴장당한 상태에서 브리스톨 시티에 2-1 역전승을 거두며 밀월을 승점 1점 차로 찍어 누르고 챔피언십(2부 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승격 확정 후 선수, 스태프, 관중할 거 없이 운동장에 나와서 뒤엉켜 기뻐하는 모습에는 기쁨을 넘어서 한이 서려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
2010년 11월 8일 15라운드까지 진행 중인 상황에서 2부 리그 승격 후 첫 시즌에서 승점 23점으로 8위에 올라 있다. 3위와 승점 차이가 5점, 4위와는 1점 차이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로, 첫 시즌에 승격을 기대하기는 무리겠지만 다른 승격 동지인 밀월이 중하위권에서 구르는 것과 달리 희망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14] 다만 번리 원정 5:2 패배, 프레스턴 홈경기에서 4:6(...) 패배, 카디프와의 홈경기 0:4 패배 등 이따금씩 대량실점하는 것이 문제점이었다.
카디프전 패배 이후 6승 3무의 상승세가 이어지면서 22R 크리스마스 기준으로는 2위까지 올랐다. 특히 선두 QPR을 상대로 그라델의 2골로 2:0 완승을 거두기도 했다.
2011년 1월 20일 27라운드까지 치른 상황에서 5위로 선전하고 있다. 승격 가시권인 2위 스완시 시티에 2점 뒤진 5위라 희망이 있긴 하지만 득점만큼 실점도 많아 허약한 수비진 때문에 치고 올라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득점은 공동 1위 실점도 4위...득실율은 +4). 뭐 3~6위까진 플레이오프를 치르기에 지금 순위만 지켜도 승격 희망이 있긴 하지만.
10-11 시즌 전에 팀의 주포였던 저메인 벡포드를 잃었으나 브래들리 존슨 및 닐 킬케니 등의 선수들이 각성하고 팀의 중심인 로컬 보이 조니 호슨이 꾸준히 활약하고 있고, 유망주 및 챔피언십 리그의 타 팀의 쩌리로 영입한 선수들의 포텐이 터지면서 승격 후 첫 시즌이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타 팀에서 리즈의 핵심 선수들을 이적시키려 하는 모습을 보여서 리즈 팬들은 기대감 반, 불안감 반으로 윈터 브레이크를 지켜보고 있는 듯.
불행 중 다행으로 팀의 핵심 선수들은 지켜내는 데 성공했으나 영입도 임대 영입을 제외하고는 딱히 없는 편. 여전히 득점력은 후덜덜하나 실점도 다른 승격 경쟁팀들보다 훨씬 많아서 리즈 팬들은 매일매일 앨런드 로드 극장을 관람하는 중.
결국 2010-11 시즌은 막판의 수비 조직력 불안 문제로 인해 승격 경쟁에 필요한 승점을 얻어내지 못했고 최종전에서 챔피언십 우승팀 QPR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면서 유일하게 더블을 기록했지만 팰리스 원정에서 3:0 대승을 거둔 6위 노팅엄 포레스트에 승점 3점차로 밀려 7위로 시즌을 마감, 승격은 다음 시즌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39라운드[15]까지 5위에 올라있었으나 40~44라운드에서 2무 3패에 그친 것이 뼈아팠다.[16] 리그에서 81득점을 기록하며 노리치 시티 다음으로 득점수가 많으나 70실점은 리그 상위권 팀 중 가장 많은 실점수였다.
시즌 종료 후 수비 불안의 주범으로 지목받던 골키퍼 카스퍼 슈마이켈을 방출시키고, 야망이 크던 브래들리 존슨과 닐 킬케니를 방출시켰으나 전 토트넘, 포츠머스 출신 수비형 미드필더 마이클 브라운을 영입하였고, 팀 내 주전 윙어 둘을 지켜내는데 성공하며 팀의 밸런스를 맞춰가며 프리시즌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담으로 리즈의 공격수인 다비데 솜마가 6개월짜리 부상을 끊었는데 이 부상 사실을 공식 홈페이지에서 알리기 전에 자신의 트위터에서 먼저 이야기해버렸다. 결국 감독이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분노하였고, 이 사건 후부터 리즈 선수들은 모두 자기 트위터를 삭제하였다.
2012년 9월, 영국 언론에 따르면 바레인 지역 투자은행인 걸프 파이낸스 하우스가 5천만 파운드에 리즈의 영입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걸프 파이낸스 하우스가 성명을 통해 리즈를 인수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2015년 2월에는 헐리우드 스타이자 리즈의 서포터인 러셀 크로우가 리즈 인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트위터에서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8월에 다시 트위터를 통해 '리즈 인수를 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리즈 인수를 할 투자자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러셀 크로우 개인도 럭비 팀에 투자하다 보니 리즈까지 손댈 여력이 되지는 못하는 상황인 듯.
2015년 4월에는 에너지 드링크 회사인 레드불에서 인수 준비 중이라는 기사가 떴다.[17]
2017년 3월에는 말썽 많던 구단주였던 마시모 챌리노가 물러나고 안드레아 라드치아니가 새 구단주가 되었다. 그리고 2017년 6월에는 홈 구장인 엘런드 로드를 다시 구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예전처럼 임차료 내며 경기장을 쓰는 신세는 덜게 되었고 홈 구장을 다시 사올 수 있을 만큼 팀의 재정상황에 숨통이 트였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거기다 2018-19시즌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을 부임시키며 팀은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승격 실패.
2019-20시즌엔 1위를 수성한 끝에 우승하면서 마침내 승격을 이루어냈다!
8. 최근 성적
8.1. 2011-12 시즌
웨스트 햄, 카티프 시티 등의 팀들이 챔피언십에서 승격을 노리고 상당한 영입을 벌이는 동안 리즈는 선수 방출한 양에 비해서 영입을 하는 데 실패하였다. 마이클 브라운을 자유계약으로 영입하고, 골키퍼를 카스퍼 슈마이켈에서 앤디 로네건과 폴 라훕카로 교체하고, 약점으로 지목되면 측면 수비수를 셀틱 FC에서 대런 오데아를 임대 영입하는 데에서 그치고 만다.팬들의 우려대로 챔피언십 리그 첫 경기인 사우스햄튼 전에서 1-3으로 털리고, 다음 경기인 미들즈브러와의 경기도 답답한 경기 끝에 0-1로 패배. 물론 11-12 시즌 챔피언십이 약팀들이 강팀들을 잡아버리는 혼돈의 카오스 상태이긴 하지만 어쨌든 초반 2연패를 당한 리즈 팬들은 몇 년간 간신히 벌어놓은 이적료 7M을 그대로 경기장 보수에 돈을 꼬라박아버린 켄 베이츠를 까야 하나 고민중.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무척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돈도 없어서 주전 선수들을 죄다 팔아먹으면서 선수 수급도 전혀 못하는 덕분에 9월 8일 5차전까지 강등권과 1점차인 19위로 주저앉아서 또 3부 리그 강등당할 불안함을 보여줬으나 그 뒤로 5승 2무를 거두며 강등권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승격권으로 도무지 들어가지 못하여 올 시즌도 승격 희망은 사실상 접어버린 듯 싶다. 20경기가 넘도록 9~10위 중위권을 유지했는데 6위 플레이오프와 3점차밖에 승점이 떨어지지 않아서 리즈 팬들은 승격 희망을 가지게 했지만 이게 좀처럼 승점을 좁히지 못했다. 즉 리즈가 이기면 다른 팀들도 이기고 지면 다른 팀들도 지면서 이 순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28R에서 버밍엄시티에 홈에서 니콜라 지기치에게 4골을 허용하며 1-4 대패를 당하며 10위에 머무르자 2월 1일 리그의 2부리그 승격을 이끌었던 사이먼 그레이슨은 전격 경질되었다. 약 보름 후 직전 시즌 QPR의 승격을 이끈 '승격 전문가' 닐 워녹을 선임했다.
워녹 부임 이후에도 기복있는 행보는 이어졌다. 38R 주중 경기에서는 3부리그 강등 위기의 노팅엄 포레스트에 3-7이라는 야구 스코어로 지면서 6위 진입이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막판 40, 41차전을 패하면서 6위에 6점차로 벌어졌고, 44차전에선 61점으로 12위로 추락해버렸다. 남은 2경기를 이겨도 6위 71점을 따라잡을 수 없기에 올 시즌도 2부 리그에 남게되었다. 결국 더 이상 희망이 없어지자 남은 경기를 지면서 46차전이 끝난 2011-12 챔피언십 최종 순위는 14위로 마무리했다.
8.2. 2012-13 시즌
10월 19일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셰필드 웬즈데이 원정에서 한 훌리건이 경기장에 난입, 상대 골키퍼 크리스 커클랜드를 폭행하는 사건사고를 저질렀다. 이 훌리건은 영구 축구장 출입금지 및 철창행 처벌을 받았다.캐피탈원컵(리그컵) 3라운드(32강)에서 에버튼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뒀다. 16강에서는 또다른 EPL 팀 사우스햄튼에 3-0 대승을 거두며 8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첼시에 홈에서 1-5 대패를 당하면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FA컵 4라운드에서 토트넘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며 자이언트 킬링에 성공했다. 5라운드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만나면서 탈락했다.
31차전까지 리그 12위로 전 시즌이랑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냥 2부 리그 잔류 중위권 안착 가능성이 큰 현실. 중간에 닐 워녹 감독을 경질하고 레딩 FC에서 경질된 브라이언 맥더못 감독을 선임했지만 승격 경쟁은 무리였다. 42차전까지 리그 11위로 이번 시즌도 2부 리그 잔류가 확정되었다.
8.3. 2013-14 시즌
시즌 개막 전 애증의 켄 베이츠가 바레인의 사업가 살라 누루딘에게 팀을 넘겼다. 16차전까지 리그 5위를 기록하며 모처럼 승격 희망이 보이는 듯 하지만 10위와 승점 차가 3점. 뭐 4위와 승점 차도 2점이라 더 오를 가능성도 있지만 언제라도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23경기 17골을 뽑아낸 로스 매코맥의 활약으로 23라운드 반환점을 돌며 승점 35점으로 7위를 확보 중. 6강 플레이오프권까지는 단 한 골의 득실차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셰필드 웬즈데이에게 0-6 대패를 당한 것을 비롯한 부진이 이어지면서 28차전에는 11위까지 추락해버렸고 6위와 승점차도 8점으로 벌어져 이번 시즌도 힘겹게 되었다. 결국 계속 순위는 하락하면서 41차전까지 16위를 기록하며 올 시즌도 승격 좌절.4월에는 구단주가 전 카타니아 구단주인 마시모 첼리노로 바뀌었고, 새 구단주가 바뀌면서 브라이언 맥더못 감독은 6월에 상호 합의에 의한 계약 해지로 팀을 떠났다.
풋볼 리그 컵은 3라운드에서 강호 뉴캐슬을 만나 2-0 패배하며 탈락. FA 컵도 64강전에서 리그2(4부 리그) 로치데일에게 0-2로 패하면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8.4. 2014-15 시즌
리즈 유나이티드 FC/2014-15 시즌 문서 참고.8.5. 2015-16 시즌
리즈 유나이티드 FC/2015-16 시즌 문서 참고.8.6. 2016-17 시즌
시즌이 시작되면서 리즈 유스 출신 유망주인 알렉스 모왓, 루이스 쿡, 찰리 테일러를 향한 비드가 있었던 듯 하나 모왓은 재계약에 서명하면서 지켜냈고 아직 계약이 남은 테일러는 지켜냈으나 유망주 루이스 쿡을 본머스에 £7m에 팔았다. 주장이던 솔 밤바는 9월 '개인적인 사정'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했고, 이후 카디프로 자유 이적했다.짧은 연승과 짧은 연패를 오가며 22라운드 기준 오랜만에 승격 플레이오프권인 5위까지 올랐다. 다만 12위 반슬리와도 승점 7점밖에 차이나지 않을 정도로 순위표가 촘촘한 상황이라 이후의 성적은 두고 볼 필요가 있다. 이후 플레이오프권에서 밀려나지 않은 채 39라운드 기준 레딩과 4-5위를 경합하고 있어서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14-15 시즌의 리즈가 화끈한 공격력으로 부실한 수비진을 커버하며 승점을 벌었고 15-16 시즌의 리즈는 공격력은 약해졌는데 수비가 헐거워져서 매 경기 1실점은 깔고가몀서 승점을 날려먹었다면 이번 시즌의 리즈는 초반에는 다소 수비 조직력이 흔들려서 애를 먹었으나 처음 6경기 이후로 수비가 단단해지면서 승점을 효율적으로 먹고 있는 중. 그리고 이번 시즌에는 유스팀 소속이었던 17세의 호나우두 비에이라[18] 선수의 포텐이 터지면서 루이스 쿡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다. 특히 뉴질랜드 대표 공격수인 크리스 우드가 꾸준한 활약으로 득점 선두에까지 오르며 승격을 향한 희망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즌 막판 6경기에서 1승만을 기록하는 부진에 빠지며 2경기를 남긴 채로 7위로 밀려나 버렸다. 6위 풀럼에게 3점 차로 역전을 당했는데, 설상가상으로 6위권 경쟁팀들인 셰필드 웬즈데이는 5연승, 풀럼은 4연승을 기록하며 리즈의 승격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45라운드에서 노리치에게 0-3으로 뒤지던 경기를 저력을 발휘해 3-3으로 따라붙었으나, 이날 셰필드 웬즈데이는 이기고 풀럼은 비기면서 이들과 승점 차를 좁히는 데 실패했다. 1경기만이 남은 가운데 6위 풀럼에게 승점 3점 차에 골 득실이 14점이나 뒤지게 되어 승격 무산이 거의 확정적이다.
최종순위는 7위로 다음 시즌에도 EFL 챔피언십에 남게되었다.
3월에 마시모 첼리노 구단주가 물러나고 새 구단주로 안드레아 라드리차니가 첼리노의 지분을 흡수하여 새 구단주가 되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후 구단은 재정악화 당시에 리즈 시에 팔았던 엘런드 로드를 다시 바이백으로 구입하였다.
8.7. 2017-18 시즌
지난 시즌에 7위까지 팀을 올린 개리 몽크가 미들즈브러 FC의 감독으로 떠난 뒤 새 감독으로 토마스 크리스티안센을 선임했다. 크리스티안센은 선수시절에는 바르샤 출신 스트라이커였고, 지난 시즌에는 키프로스 소속 프로 구단인 아포엘에서 지휘봉을 잡고 유로파 16강까지 팀을 올린 경력이 있다. 함부르크의 스트라이커 피에르미셀 라소가를 임대 영입했다.2018년 1월 7일에 열린 FA컵 3라운드 에서 EFL 리그2의 뉴포트 카운티에 2:1로 패하며 탈락했다.
1월 24일에 6개월간의 디자인 과정과 10000명의 팬들의 감수를 거쳤다는[19] 새 엠블럼을 공개했는데, 이게 보통내기가 아닌지라 한시간만에 몇천명이, 하루만에 7만7천명이 새 엠블럼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참여를 했을 정도로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 외에도 아스톤 빌라와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식 트위터가 대놓고 조롱하는 트윗을 올리는 등 전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된 끝에 결국 하루만에 디자인을 재고해 보겠다며 철회하겠다고 하고 기존 엠블럼을 18-19시즌까지 사용을 연장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전 시즌의 유벤투스 엠블럼에 대한 역반응을 뛰어넘어, 13-14시즌의 에버튼 FC 엠블럼 이후 최악의 디자인 개편이었다는 평.
문제의 엠블럼 시안.
초반에는 돌풍을 보이기도 했지만 박싱데이 전후로 연패의 늪에 빠지며 감독을 해임하고 폴 헤킹버텀으로 교체하였으나, 큰 반전을 보이지 못하며 최종 리그 순위는 13위에 머무르며 마쳐서 다음 시즌도 챔피언십에서 보내게 되었다.
시즌 후 폴 헤킹버텀을 해임하고 마르셀로 비엘사를 2년 계약으로 선임했다.
8.8. 2018-19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즈 유나이티드 FC/2018-19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 EFL 챔피언십: 3위 (승격X)
- 에미레이트 FA 컵: 64강 VS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 카라바오 컵: 2라운드 VS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8.9. 2019-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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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유나이티드 FC 100주년 1919~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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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 EFL 챔피언십 우승 |
자세한 내용은 리즈 유나이티드 FC/2019-20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 EFL 챔피언십: 1위 (승격)
- 에미레이트 FA 컵: 64강 VS 아스날 FC
- 카라바오 컵: 2라운드 VS 스토크 시티 FC
8.10. 2020-21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즈 유나이티드 FC/2020-21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 프리미어 리그: 9위
- 에미레이트 FA 컵: 64강 VS 크롤리 타운 FC
- 카라바오 컵: 2라운드 VS 헐 시티 AFC
8.11. 2021-22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즈 유나이티드 FC/2021-22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8.12. 2022-23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즈 유나이티드 FC/2022-23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3년만에 결국 재강등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문제는 강등이 된 이후인데 안드레아 라드리차니 구단주는 UC 삼프도리아를 인수하기 위해 사실상 리즈 유나이티드와는 관계가 끝날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라드리차니가 자금이 없어서 삼프도리아 인수 자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엘런드 로드를 담보로 돈을 대출했다는 것. 이것이 현실화되면 리즈는 또다시 지난 강등 이후 엘런드 로드의 소유권을 잃은 상황을 그대로 반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8.13. 2023-24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즈 유나이티드 FC/2023-24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8.14. 2024-25 시즌
[1] 코플랜드가 이를 알고 신고한 것에는 브롬리가 코플랜드에게 정보를 흘렸다는 의혹이 있었다.[2] 8경기 4승 2무 2패, 득점 17, 실점 10, 승점 10[3] 리즈 도심에 위치한 교회로 1791년에 지어진 이래, 2024년 현재까지도 존재할 정도로 리즈의 가장 오래된 예배당이다.[4] 리즈 시티가 본격적으로 리그에 참가한 1905년부터 리즈 시티의 초대 회장인 길베르트 길리스를 따라 리즈 시티로 이적함과 동시에 구단의 주장을 맡았었고, 1908년에 선수 생활에서 은퇴를 한 이후 딕 레이는 1912년, 왕립 육군근무대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하였었다.[5] 구단 역사상 유일한 원정 7득점[6] 이 사건과 관련된 영화로는 2009년에 나온 '댐드 유나이티드'(The Damned United)라는 영국 영화가 있다.[7] 이 후 브라이언 클러프는 노팅엄 포레스트 FC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UEFA 챔피언스 리그 2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하지만 여기도 클러프 사임 이 후 3부 리그 강등까지 가면서 추락했던 게 리즈랑 판박이다.[8] 주니오르는 임대 복귀한 후 AC 밀란에서도 계속 구멍 노릇을 해서 레버쿠젠으로 방출당한다. 레버쿠젠에서는 영입 직후에 잠깐 반짝하나 그 이후에 또 구멍이 되었다.[9] 티에리 앙리가 4골을 집어넣으며 맹활약한 경기로도 유명하다. 이 경기로 앙리는 아스날에서 150번째 골을 달성했다.[10] 하지만 말아먹은 것만 강조되지만 이 양반이 구단주로 있던 시절 첼시가 중상위권 강호였으며 위너스컵 우승 및 리그 4강 진입과 같은 성적도 거뒀다. 물론 빚이 쌓이고 쌓이면서 결국 첼시를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팔게 된다.[11] 엘런드 로드 경기장은 관중석이 4만석이 넘었는데 이는 3부 리그에서 유일했다. 참고로 1979~1980년 UEFA 챔피언스 리그 전신인 유러피언 컵을 2년 연속 우승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다가 리즈와 같이 3부 리그 소속이던 노팅엄 포레스트 경기장 조차도 3만 석이 되지 않는다. 경기장을 고치면서 39,600석으로 줄었지만. 그러다가, 2017~18시즌에 선덜랜드 AFC가 3부리그로 강등당하면서 5만석 가까운 49,000석 경기장을 가진 선덜랜드가 3부리그에서 가장 큰 경기장을 보유한 구단이 되어있다.[12] 논 리그 출신의 무명 감독이었고, 6경기 말아먹고 짤렸다.[13] 리즈에서 임시 감독만 3번 했다.[14] 1위로 승격한 노리치는 7위[15] 승격 경쟁팀이었던 노팅엄 상대로 4:1 대승을 거뒀을 시점이다.[16] 그중에는 하위권 팀 더비에게 당한 2:1 역전패나 3부리그 강등 위기의 크리스탈 팰리스 원정에서 당한 1:0 패배도 있었다.[17] 레드불은 뉴욕 레드불스를 포함, 오스트리아, 독일, 가나 등 여러 곳의 축구단을 운영 중이다.[18] 이름만 들으면 공과 수를 모두 갖춘 완벽한 축구 선수의 이름인데, 이 선수는 1998년생 기니비사우 출신으로 아버지가 실제로 호나우두의 이름을 따 아들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선수의 쌍둥이의 이름은 호마리우인데 호마리우 역시 리즈 유스 팀에서 뛰고 있다.[19]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실제로 디자인을 감수받은 것이 아니라, 리즈 구단 하면 가장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수준의 질문을 던져서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팬들'이자 그걸로 디자인을 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