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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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 |
{{{#!wiki style="margin: -12px -9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px><tablebordercolor=#ece5b6> 木川 頓氏 목천 돈씨 | }}} | |
관향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 ||
시조 | 을지문덕(乙支文德) | ||
중시조 | 을지수(乙支遂) | ||
집성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태평외리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 용정리 | ||
인구 | 85명(20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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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천 돈씨(木川 頓氏)는 한국사의 명장인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시조로, 중시조를 을지수(乙支遂)로 두고 있는 성씨이다.2. 기원
돈씨가보(頓氏家譜)에 의하면, 을지씨는 원래는 을(乙)씨였는데, 고구려 을지문덕 때에 '을지(乙支)'씨로 바뀌었다가 후에 '돈씨(頓氏)'로 변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을지문덕의 16세 후손 을지수(乙支遂)가 동생인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등과 함께 고려 인종 때 일어난 묘청의 난에 의병장으로 서경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졌고 돈(頓)씨를 사성 받았다. 이후 을지수의 증손인 돈예숭(頓禮崇)이 목천(木川)[1]으로 이주해 살면서 본관을 목천으로 하였다고 한다.3. 집성촌
-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태평외리[2][3]
이 마을 뒷산에 을지문덕의 묘소가 있으며, 이 마을에 을지문덕 장군의 후손들이라는 돈씨 집안 30~40호 가량이 있어 이 일대가 돈산군(頓山君)의 봉토로 여겨지고 있다.
4. 동국여지승람의 유래
동국여지승람에는 목천 돈씨에는 재밌는 설화가 하나 전해져 내려오는데, 본래 돈씨 집안은 백제 유민으로 고려에 누차 반기를 들어 태조 왕건의 미움을 사 돼지를 뜻하는 '돈(豚)'씨 성이 됐다가 뒤에 복성됐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자주 소란을 피워 그 지방 주민들에게 돈(豚)·상(像·코끼리)·우(牛·소)·장(獐·노루) 등 짐승 이름을 성으로 삼게 했다. 이들 성은 후에 돈(頓)·상(尙)·우(于)·장(張)씨로 한자를 바꿨다고 한다.그러나 위의 설화가 실린 동국여지승람은 편찬되었던 시기가 이미 고려 태조 때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조선 성종 때이기 때문에 단순히 그 지역에 구전되던 민간 설화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을지씨 가문이 보덕국의 고구려인들같이 구 백제령으로 이주했다가 후백제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상씨 외의 다른 성들이 후백제에서 주요 인물로 활약한 기록은 전무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역시 그리 설득력이 높지는 않다.[6]
5. 을지문덕이 목천 돈씨의 조상인가?
혹자는 목천 돈씨가 숭조 사업을 통하여 족보를 부풀린 것을 의심한다. 그러나 숭조사업은 보통 비슷한 성씨의 인물을 이용한다.[7] 그런데 돈씨는 을씨가 을지씨로 또 을지씨가 돈씨로 개성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의 부연설명을 첨가해가면서도 굳이 목천 돈씨가 을지문덕을 시조로 만들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당장 한나라 시대 효자로 유명한 인물인 돈기(頓琦)를 시조로 하는 것이 더 간편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나 중세시대에는 지역명을 따서 성씨를 짓는 경우가 흔했다. 예를 들면 지금의 한국의 당씨(唐氏)는 중국(원나라)에서 도래한 성씨가 아니라 다원리(茶阮里)라는 지명이 당(唐)과 발음이 비슷해서 생겨난 성씨이다.[8]평양 인근에는 목천 돈씨 가보와 관련된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1930년 11월 1일 별건곤 제34호에 연재된 이윤재의 '을지문덕묘 참배기'[9]를 보면 이윤재가 돈씨 문중의 일원인 돈종각(頓宗珏)씨와 인터뷰한 내용이 나온다. 돈종각 씨에 따르면 평안남도 강서군 잉차면 이리(二里) 현암산(玄巖山)[10] 동쪽 산기슭에 을지문덕의 묘가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도 을지문덕의 묘가 있다는 자리에는 40년 전에 조성된 전주 이씨 이정우(李廷愚, 1842 ~ 1871.7.)[11]라는 사람의 묘가 있었다. 돈종각 씨가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과거에는 그곳에 을지문덕과 관련된 비석과 여러 개의 장군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현재는 장군석 1기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땅 속 깊이 묻혀 있어 찾을 수도 없다고 하며, 그나마 남아 있던 장군석 1기도 그나마 머리만 조금 드러나 있었던 것을 조선시대에 강서군수가 와서 파내어 묘 아래 공터에 세워둔 것이라 한다.
이후 을지문덕의 묘소가 있던 땅은 전주 이씨와 김씨, 현씨, 장씨의 소유로 각각 쪼개졌다. 1909년(융희 3)에 순종이 평안도 지방을 시찰하면서 선열(先烈)들의 무덤과 사당을 모두 모으라고 지시했을 때, 평안도 관찰사가 한 차례 인력을 파견해 을지문덕의 묘를 조사케 하였으나 타인의 무덤이 있는 것을 보고 근거가 모호하다며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5년 10월 1일부터 10월 3일까지 동아일보 1면에 상, 중, 하로 나뉘어 연재된 김준연의 '隋軍 백만을 격퇴한 을지문덕묘를 찾어서'에도 1935년 9월 27일 김준연이 안창호·김동원·송진우·김성업(金性業)·최병선(崔秉善)과 함께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태평외리에 사는 돈종각(당시 52세, 대서업)을 만나 을지문덕 묘를 방문하였다. 태평외리 뒤쪽 밭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나오고, 이 소나무숲에서 야산 쪽으로 30분 가량 올라가면 위 이윤재의 참배기에 등장하는 장군석이 보이며, 거기서 열 몇 걸음을 더 올라가면 을지문덕의 묘터가 나오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4, 50년 전에 전주 이씨 이정우의 묘가 그 자리에 들어섰고, 돈종각의 8촌 삼종숙과 촌수가 먼 족형(族兄)이 평안남도 평양부에 살고 있던 이정우의 아들 이공건(李公鍵)에게 항의해봤지만 그들은 평양부의 유력 가문이었기에 도리어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이 자리가 을지문덕의 묘터임을 알면서도 묘를 썼다고. 한편, 이공건은 당시 현암산에 선산을 쓰고 있던 금오위장(金五衛將) 김종우(金宗禹)로부터 이 땅을 양도받았다고 하는데, 1909년 순종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을지문덕 묘를 조사하라고 했을 때 김종우는 을지문덕의 무덤을 침범해 선조의 무덤들을 쓴 것이 탄로날까 두려워 선산을 이장하고자 하였다. 이때 흙 속의 석회가 단단히 굳어 돌처럼 되었고, 파내기가 어렵게 되자 다이너마이트로 폭발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묘석 파편에 맞아 중상을 당했고, 평양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한편, 안창호가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이미 을지문덕 묘에 대한 구전을 듣고 학생들과 을지문덕 묘소에 수학여행을 가서 답사를 하는 한편, 지방 관리들과도 상의하여 을지문덕 묘소의 개축을 계획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6년 5월 20일자 기사에 따르면, 을지문덕 묘소의 존재를 알게된 평양부 유지들이 1935년 가을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이공건에게 아버지 이정우의 묘를 이장할 것을 교섭한 끝에 1936년 4월 5일 묘를 파내어 화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즉시 을지문덕이 안장된 위치를 상고하여 봉분을 만들어 놓고, 묘터의 지주와 협의하여 묘소를 수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조만식, 최윤옥(崔允鈺), 김병연(金炳淵), 김성업(金性業) 씨 등 4명이 '을지문덕 묘산 수보회(守保會)'을 조직하기로 하여 1936년 5월 22일 오후 8시 35분에 평양부 설암리 평양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기인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조만식이 실행위원장, 김취성(金聚聲)이 서무실행위원, 김성업이 재무실행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오윤선(吳胤善)과 최윤옥, 이훈구(李勳求), 노진설, 한근조, 김병연, 김동원이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밖에 82명의 발기인이 이 총회에 참석하였다.[12]
그러나 위 기사들에 대한 후속 기사를 찾기 어려워 이후 을지문덕 묘소의 수축이 실제로 이뤄졌는지 알 수 없고, 현재는 6.25 전쟁으로 인해 분단되었기에 더더욱 알 길이 없다.
결론은 목천 돈씨가 을지문덕의 후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6. 인구
돈씨는 1930년 국세조사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 강서군, 황해도 안악군, 황주군 등 북한 지역에만 36가구가 있었다.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985년 16가구 69명이었고, 2000년에는 38가구 115명, 2015년에는 117명으로 조사되었다. 그 가운데 목천 돈씨는 86명이었다. [13]7. 인물
- 을지문덕 - 영양왕 대의 고구려-수 전쟁 당시 고구려를 지켜낸 불세출의 명장으로 목천 돈씨의 시조이다.
- 을지수(乙支遂) - 중시조. 을지문덕의 16세손으로 동생인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등과 함께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의병장으로 참여해 큰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지고 돈씨 성을 사성받았다고 한다.
- 돈정신(頓貞臣) - 평양 출신의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조방장(助防將)[14]
- 돈지철(頓志轍, 1778 ~ ?) - 1813년(순조 13) 별무사(別武士)로서 증광 무과에 병과 84위로 급제. 당시 거주지는 평안도 평양부였고 아버지는 학생(學生) 돈치황(頓致晃)이었다.
- 돈지문(頓志文, 1794 ~ ?) - 1813년(순조 13) 장교(將校)로서 증광 무과에 병과 134위로 급제. 당시 거주지는 평안도 평양부였고,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한 돈치로(頓致魯)였다.
- 돈규헌(頓圭獻, 1805 ~ ?) - 자는 전량(田亮). 1827년(순조 27) 유학(幼學)으로서 증광 진사시에 3등 27위로 입격. 당시 거주지는 평안도 평양부였고, 아버지는 유학(幼學) 돈지술(頓志術)이었다. 아래로 남동생 돈충헌(頓忠獻), 돈정헌(頓貞獻), 돈의헌(頓義獻)이 있었다.
- 돈지덕(頓智德) - 축구선수(은퇴)
- 돈종권(頓宗權) - 3.1 운동에 참여한 독립유공자[15]
[1]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2] 1930년 11월 1일 별건곤 제34호 - 을지문덕묘 참배기 (이윤재)를 보면, 인터뷰이인 돈종권씨를 비롯해 1930년 당시에 5가구 정도 살았다고 한다. 1935년 10월 3일 동아일보 - 수군 백만을 격퇴한 을지문덕묘를 찾어서 (김준연)에는 10여 가구가 있었다고 하였다.[3] 현 남포시 천리마구역 고창리[4] 현 평안남도 증산군[5] 현 평안남도 강서군 서기동[6] 후백제에 우봉이라는 사람이 있긴 했는데 한자가 又奉이다.[7] 신라의 김씨 왕실도 자신들의 선조를 김일제(金日磾)로 숭조한 기록이 문무대왕릉비에 등장한다.[8] 신라 단산(端山)의 석굴에 보관되어있던 고문헌들을 참고하여 조선 명종 시기에 제작된 야사집인 삼한습유기(三韓拾遺紀)에 의하면 조선의 당씨(唐氏)와 독씨(禿氏)는 고구려 대무신왕 시기에 고구려에 멸망당한 예맥계 부족 국가인 행인국(荇人國)의 출신 성씨이다.[9] 참고[10] 현암산(峴岩山), 연암산(硯岩山) 등으로도 불렸다.[11] 그 후손이 평안남도 평양부에 살고 있었다고 하며, 1935년 당시 아들이 70세쯤으로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12] 1936년 5월 24일 동아일보 기사[13] 목천 86명, 함평 12명, 태평 11명, 을지 5명, 기타 3명[14] 평양 10장사중 한명이었다고 하며,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 도중 장렬히 전사하였다.[15] 1882년 ~ ?.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태평외리 출신. 1919년 3월 경 평남 대동군 대보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6개월의 징역형을 처분받았음. 201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