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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총리 |
본명 | მიხეილ სააკაშვილი Міхеіл Саакашвілі 미헤일 사카슈빌리 | |
출생 | 1967년 12월 21일 ([age(1967-12-21)]세) | |
소련 그루지야 SSR 트빌리시 (現 조지아 트빌리시) | ||
국적 | [[조지아| ]][[틀:국기| ]][[틀:국기| ]] → [[우크라이나|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키이우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법학대학원 조지 워싱턴 대학교 로스쿨 국제 인권 연구소 | |
가족 | 아내: 산드라 룰로프스 | |
장남 에두아르드 사카슈빌리(1995년생) 차남 니콜로즈 사카슈빌리(2005년생) | ||
정당 | ''' [[조지아 시민연합| 조지아 시민연합 ]](1995년 - 2001년)[[통합국민운동| 통합국민운동당 ]](2001년 - 현재)[[새힘운동| 새힘운동 ]]'''(2017년 02월 23일 - 현재) | |
서명 | ||
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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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의 전 대통령이자 우크라이나 전 오데사 주 주지사를 지낸 정치인.2. 생애
1967년 트빌리시에서 태어났다.1992년 우크라이나 키이우 대학교를 졸업한 후[1] 미 국무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컬럼비아 대학교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법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 후 미국 뉴욕의 로펌에서 근무했다.
1995년 지인의 권유로 조지아로 귀국 후 정치활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해 의원으로 당선됐고 2000년에는 법무장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셰바르드나제 정권 관료들의 부패를 고발하다가 2001년 장관직을 사퇴, 국민운동당을 창당한다.
2.1. 조지아 대통령 재임기
2003년 셰바르드나제 정권의 부패와 실정에 조지아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이 사임하는 장미 혁명이 일어났다. 장미 혁명의 주역중 한명이었던 사카슈빌리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 2004년 30대의 젊은 나이로 조지아의 3대 대통령이 되었다.강한 친미, 친유럽주의 성향의 사카슈빌리는 조지아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연합에 가입하길 희망했다. 사카슈빌리는 조지아의 NATO가맹 합의를 이끌어내고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2008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그러던 중 조지아 내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독립찬반투표에서 문제가 터졌다. 독립파의 압승으로 끝난 선거 결과에 대해 조지아 정부는 이를 러시아에 의한 강제병합음모라 비난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다.
조지아와 러시아의 갈등은 2008년 8월 남오세티야 전쟁으로 이어졌고 조지아는 패전,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어 버렸다.
2013년 3선에 실패한 뒤 대통령 재임 당시 스캔들[2]에 연루되어 임기 말미에 기소되었고 우크라이나로 망명했다.
2.2. 우크라이나 망명 후
페트로 포로셴코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사카슈빌리에게 우크라이나 국적을 부여했고 사카슈빌리는 오데사주 주지사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에서 새로운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주지사 재임 기간동안 우크라이나 정부 인사들과 갈등을 빚고 1년여만에 쫓겨나고 우크라이나 시민권도 박탈당하고 말았다.그 이후 한때 절친이었던 포로셴코 탄핵을 주도하다가 유로마이단으로 축출된 친러 성향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사주를 받았다는 혐의로 우크라이나 검찰에 체포, 폴란드로 추방당했다.[3]
그 후 2019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사카슈빌리의 우크라이나 국적을 회복시켜주어 그해 5월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우크라이나로 입국했다.
2.3. 조지아로의 재입국, 수감생활
2021년 10월에 조지아 지방선거를 앞두고 조지아에 제발로 입국했다가, 체포되었다. 사카슈빌리는 자신의 출신 정당을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위해 방문하겠다고 했고, 진짜 방문했다가 공항에서 체포당한 것.(...) 체포 이후 사카슈빌리는 권력 남용 혐의를 인정받아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교도소에 수감된 후 단식투쟁을 전개하다가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다.# 2022년 2월에 의료 환경 개선을 목적으로 또 다시 단식투쟁을 했다가 3월 10일에 단식투쟁을 끝냈다.#2023년 3월 13일, 사카슈빌리는 현재 형집행 정지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수감 사이에 체중이 120Kg에서 무려 64Kg으로 빠졌다고 한다. 전성기 시절 그의 사진과 비교하면 충격적으로 수척해진 모습이다. # 사카슈빌리의 건강 악화에 독극물이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폴란드는 이를 조사하기 위해 의료 팀을 파견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조지아 정부에 전달했다. 정부 측은 단순히 사카슈빌리가 단식 농성 때문에 수척해지 것 뿐이라며 부정하고 있다. #
2023년 7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가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을 죽이려 한다며 동맹국들을 향해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3. 평가
반대파로부터는 남오세티야 전쟁으로 조지아를 위기에 빠트렸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러시아를 적대하는 상황에서 과도하게 무모한 모습을 보였고, 러시아군이 주둔한 남오세티아를 상대로 대규모 군사행동을 벌였지만 러시아 개입 시에 대한 대책이 부족했던 것은 실책이다. 우크라이나 망명 후에도 조지아 정치권을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정적들에게 비난받기도 한다.한편 과거 대학생 시절부터 학생운동과 인권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으며 셰바르드나제 정권의 부패와 실정을 고발하고, 대통령 재임 후 조지아의 개혁을 이끌어 조지아 마피아를 소탕하고 부패가 판치던 조지아를 기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 세계 10위권(사업 친화지수 전세계 6위, 유럽 2위, 경제자유지수 세계 16위, 유럽 8위)로 올려놓은 공적도 있다. 이를 통해 유럽연합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으로 가입을 시도하는 등 조지아의 친서방, 친유럽주의 정책 방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집권 이후 정적을 부패혐의로 탄압하거나 언론을 탄압하는 등, 전형적인 구소련식 권력자의 모습도 보였다. 이런 모습은 국내에서도 서방에서도 꾸준히 비판받았다.
조지아가 급속히 친러화되고 있는 2024년 현재, 그의 임기 시절 행했던 친서방 정책들과 민주화는 무위로 돌아가고 부정되어 도로 소련 시절의 권위주의로 회귀하고 있으며, 본인 역시 집권 여당인 조지아의 꿈에 의해 수감 생활 중 혹독한 인권 탄압까지 받고 있다.
4. 여담
- 조지아어,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 우크라이나어 등 5개 언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 페트로 포로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키이우 대학교 선후배 관계로 한때 절친이었다.
- 2010년 3월 15일 조지아의 한 방송사가 뉴스에서 "러시아가 기습 공격을 가해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사망했다."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조지아 국민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방송국 PD가 만든 가짜뉴스였고, 해당 방송국은 국내외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 러시아에서 굉장히 싫어하는 외국 정치인으로 손꼽힌다. 기행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극우 정당 러시아 자유민주당의 알렉세이 미트로파노프 전 의원은 사카슈빌리가 율리야 티모셴코 전 우크라이나 총리와 육체적 관계를 가진다(...)는 내용의 에로 영화를 제작해 물의를 빚었다.
- 러시아의 반정부 야권에 동조하는 입장으로 보리스 넴초프 암살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판했으며 오데사 주지사 재임 시절 푸틴 반대활동을 하는 예고르 가이다르 전 러시아 총리의 딸 마리야 가이다르를 부지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