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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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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2.1. 2003년 FIFA U-20 월드컵

청소년대표 시절 '킬러'라고 불릴 만큼 감각적인 슈팅과 개인기, 탁월한 골결정력 등 한국 축구를 이끌어나갈 차세대 유망주로 지목받았고 2003년 FIFA 청소년 월드컵에 2살을 월반해 출전했다.

2.2. 2004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

2004년 U-19 AFC 청소년 대회[1]에서 득점왕과 MVP를 차지한 경력이 있다. 조별리그[2]에서 3경기에서 혼자서만 3골을 터트리며 하드캐리했다. 4강에서는 라이벌 히라야마 소타가 이끄는 일본 대표팀을 상대로 1골 1도움을 기록했고, 팀은 승부차기 끝에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는 중국을 상대로 2골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는데,수비수 3~4명을 제치며 개인기로 골을 만들어내던 장면은 지금봐도 인상깊을 정도. #

2.3. 2005년 FIFA U-20 월드컵

이후 2005년 U-20 월드컵 대표선수로 발탁되었으나, 팀 전체적으로 부진한 활약을 보였고 박주영도 나이지리아전 프리킥골을 제외하면 큰 활약은 없었다. 하지만, 그 대회 준우승 팀인 나이지리아를 잡아봤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볼 수 있다.

3.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3.1.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박주영은 2005년에 있었던 독일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 처음으로 성인 대표팀에 발탁된 이후 줄곧 성인 대표팀에서만 뛰었다. 월드컵 종료 이후 새로 부임한 핌 베어벡 감독이 U-23 대표팀도 겸직함에 따라, 자연스레 2006 도하 아시안게임 최종 명단에 들어 U-23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와의 B조[3] 1차전에 2득점 활약을 보였으나, 이후 득점포가 침묵하며 대회를 4위로 마쳤다.

대회 성적 5경기 2득점

3.2. 2008 베이징 올림픽

베이징 올림픽 2차예선에 1경기 출전, 최종예선에 3경기를 출전하며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본선 최종 명단에 포함되어 조별예선 3경기에 모두 출전하였고, 카메룬과의 1차전에서 선제골을 넣었다. 팀은 1승 1무 1패로 8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대회 성적 3경기 1득점

3.3.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1 김승규 · 2 홍철 · 3 신광훈 · 4 김주영 · 5 김영권 · 6 홍정호 · 7 구자철
C

8 윤빛가람 · 9 박희성 · 10 박주영 [[와일드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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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조영철 · 12 김민우 · 13 장석원 · 14 김정우 [[와일드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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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오재석 · 16 서정진 · 17 윤석영 · 18 지동원 · 19 김보경 · 20 이범영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서정원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태영 ·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이케다 세이고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봉수

온갖 우여곡절 끝에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게 되었다. 월드컵이 끝난 뒤 리그에서 완벽히 살아난 듯한 모습을 보여준지라 A매치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 실제로 아시안게임 대표팀이 지리멸렬한 경기력을 보이며 팬들이 울화통을 터뜨린 가운데, 8강 우즈베키스탄전까지 4경기 3골을 기록하며 맹활약해 '박주영 안 뽑았으면 어쩔 뻔했냐'하는 찬사를 들었다.

그러나 준결승 UAE전에서 원톱으로서 시종일관 최전방에 고립되어 활약을 못하고 주어진 결정적인 찬스까지 날려버리며 입대를 확정지었다. 사실 제일 불쌍하게 된건 괜히 주축 스트라이커 내보내 성적은 성적대로 까먹고 결국 군면제도 못받아낸 AS 모나코. 박주영은 '실망을 많이 했지만 대회를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상무 입대보다는 차라리 최대한 입대를 연기한 뒤 현역으로 갈 생각인듯 하다.

대회성적 6경기 4득점

3.4. 2012 런던 올림픽

1 정성룡 [[와일드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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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오재석 · 3 윤석영 · 4 김영권 · 5 김기희 · 6 기성용 · 7 김보경
8 백성동 · 9 지동원 · 10 박주영 [[와일드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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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남태희 · 12 황석호
13 구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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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김창수 [[와일드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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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 박종우 · 16 정우영 · 17 김현성 · 18 이범영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태영
스태프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건하 ·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이케다 세이고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봉수

소속팀에서 오랫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해 실전감각이 떨어져 있다는 지적을 받았으나 올림픽 개막 직전 뉴질랜드, 세네갈과 가진 2차례 평가전에서 모두 골을 기록하며 우려를 불식시켰고, 본선 스위스전에서 남태희의 크로스를 다이빙 헤더로 연결해 선제골을 기록했다.

결국, 지동원김현성 역시 소속 팀에서 벤치 멤버로 뛰며 폼이 떨어진 상황이라 대표팀에서 주전 공격수로 기용되고 있다.

그러나 박주영 역시 한 시즌 동안 뛰지 못해서 마찬가지로 폼이 떨어진 상황. 8강까지 끝난 시점에서 스위스전 골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즉 인게임 상황에서 예전같은 날카로운 공격 가담이 거의 없다.

파일:external/cdn.newsen.com/201208110904192330_1.jpg
런던 올림픽에서 김태영 코치와 기쁨을 나누는 박주영. 아래 항목에 실린 2011년 아시아 예선 때 사진보다 근육이 다소 줄어있고 어딘지 기가 죽어있는 듯한 모습이다.

여담으로 스위스 수비수 모르가넬라의 어이없는 시뮬레이션 액션에 넘어간 심판에게 억울하게 옐로카드를 받았다.[4] 누리꾼들은 박주영의 장풍, 초능력에 맞아 쓰러진거라며 모르가넬라를 까고 있다. 모르가넬라의 무개념 행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아서 자신의 트위터에 한국인을 두들겨 패고 싶다. 정신적 지체아라는 글을 올렸다가 대표선수 직위를 박탈당했다.[5] 그리스의 파파크리스토에 이어 2번째. 퍼거슨 의문의 1승

결국, 홍명보 감독도 박주영을 아래로 끌어내려 수비가담과 공격작업을 맡기고, 구자철을 위로 끌어올리는 변화를 줬다. 이런 역할 교대는 성공적이었지만... 그러라고 뽑은 와일드카드 공격수가 아니라는 거. 지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도 그랬지만, 감독이 어떤 롤을 맡겼을 때 득점력이 떨어지는 부분은 공격수로서 큰 약점이다.

스위스전을 제외하고 가봉전과 영국전에 출전했으나 크게 번뜩이거나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영국전에서 환상적인 중거리 골을 넣으며 폼이 살아난 듯한 지동원과 비교되었고, 승부차기 이후 다른 선수들은 어울리면서 뛰어가는데 혼자서 기도하고 있다고 또 까였다. 물론, 골 세리머니에서 기도를 하는 건 본인의 자유이므로 당연히 존중받아야겠지만, 아무래도 미운털이 박힌 상태에서 또 기도를 하고 있으니 곱게 보일리가 만무하다.

8강 영국전에서도 크레이그 벨라미가 경기 중에, 그의 뒷통수를 가격하고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는 기사가 나서 화제가 됐는데 가격이 아니라 인사일 가능성이 높다. 악의적인 가격이었다면, 그대로 드러누워서 파울 유도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기 때문.

심지어 4강 브라질전에서는 선발 출전을 못했다. 와일드카드로 뽑힌 선수가 4강 토너먼트, 그것도 최강의 난적을 상대로 선발 출전을 못한 것은 명백히 와일드카드 값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반에 전세가 기울고 교체로 투입되었으나 별 활약은 없었다.


그러나 그간 와일드카드 역할은 고사하고 스위스전을 제외하면 1인분도 제대로 못하던 박주영은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시불로 와일드카드 값을 치렀다. 전반 37분, 후방에서 오재석이 걷어낸 공을 하프라인 근처에서부터 단독으로 몰고 올라가더니 달라붙는 일본 수비수 3명을 간결한 페인팅과 드리블로 죄다 엮어버리고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골대 구석을 향하는 기가막힌 슛을 때려 선제골을 집어넣었다. 하프라인에서 박스까지 동료의 도움없이 혼자의 기량으로 만들어낸 엄청난 골이었으며, 일본 진영에서 따라오는 수비수들을 드리블로 굴비 엮듯 줄줄이 엮어 따돌려버리는 모습이 마치 리오넬 메시와 같다고 하여 '박메시', '메시 빙의'라고 불리기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박주영의 번뜩이는 천재성하면 2004년 중국전 단독 드리블 골과 함께 회자되는 명장면이며,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경기에서도 이만한 단독 드리블 골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 게다가 후반 11분에는 정성룡의 골킥을 쇄도하는 구자철에게 백헤딩으로 정확히 연결하여 구자철의 골까지 어시스트했다. 그 외에도, 볼키핑 다툼에서 다른 동료들이 올 때까지 일본 선수 2명을 붙들고 몸싸움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며 활약하다가 교체되었다. 그리고, 경기 종료 30초 전, 그동안 서로를 믿고 의지했던 사제지간인 홍명보 감독과 부둥켜안으며 동메달을 자축했다. 결국 박주영은 1골 1어시스트를 기록, 대한민국의 두 골에 모두 관여하며 가장 중요한 경기인 한일전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이전까지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헤딩셔틀과 수비 가담만 하던 박주영이 유독 이날 메시를 연상케 하는 환상적인 득점 장면을 연출하자, 누리꾼들은 농담 반 진담 반 '저 놈 저거 군대 가기 싫어서 저렇게 필사적으로 넣은 거 아냐?'라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박주영이 군대에 안 가려고 죽을 힘을 다한 것이 골을 넣은 원동력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 슛의 이름은 그대로 군대안가 슛, 병역면제슛, 또는 논산거부슛이 되었다.

올림픽 대표팀 승선 이전부터 홍명보 감독을 다시 이등병으로 만드느냐 마느냐[6]로 말이 많았고 승선 후에도 부진한 활약으로 미친듯이 까였지만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인 역대 최강 하드코어 한일전에서 그야말로 인생역전을 하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의 대활약으로 박주영은 한바탕 인생역전극을 치르고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병역면제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전설의 박시탈이 탄생하였다

그런데, 기자와 박주영 간의 인터뷰 내용을 보니 사실은 빗맞은 슛이었다고 한다. 기사[7][8]

대회성적 6경기 2득점 1도움

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4.1. 본프레레호 시절

사실 박주영의 첫 국가대표 발탁은 2005년이 아닌 고려대학교 1학년이던 2004년이다. 당시 몰디브 쇼크로 해임된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의 빈 자리를 수석코치였던 박성화가 본프레레 감독이 부임하기 이전까지 4경기를 감독 대행으로 지휘하였는데, 첫 공식경기인 파라과이와의 평가전에서 박성화 감독대행은 자신이 겸직하고 있는 U-20 팀에서 지도한 바 있는 박주영을 엔트리에 소집하였다. 그러나 출전은 불발되었다. 하지만, 박성화 감독대행이 A대표팀을 사퇴하기 직전 발표한 아시안컵 예비명단에 포함되며 국가대표 출전의 희망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어 감독직을 이어받은 본프레레 감독이 이 명단을 추려가는 과정에서 바레인과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평가전엔 투입하지 않았고, 결국 아시안컵 최종 엔트리 깜짝 발탁에는 실패하게 된다.[9] 훅 불면 날아갈 것 같다라고 박주영을 평가한 그의 발언은 이때 박주영을 지도해보고 판단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청소년 대표팀에서 맹활약 후 FC 서울에서 신인임에도 아주 좋은 모습을 보이자 박주영을 뽑으라는 언론의 압박이 거세져 2005년 6월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우즈베키스탄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는데, 이 경기에서 패배 직전에서 기사회생하는 동점골을 터뜨리며 대한민국 대표팀을 극적으로 독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켰다. 우즈벡전에서의 활약으로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으로부터 선발 기회를 부여받은 박주영은 이어진 쿠웨이트전에서도 선제 결승골로 A매치 두 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며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리고 2005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월드컵 최종 예선에도 차출해 출전시키는 등 본프레레호 마지막까지 꾸준히 중용됐다.

4.2. 아드보카트호 시절

아드보카트호 1기부터 꾸준히 차출됐고 겨울 전지훈련 명단에도 포함됐다. 사우디 4개국 친선대회에서 그리스전 1골을 기록하였고 핀란드와의 경기에서 A매치 첫 프리킥골을 기록하였다. 이외에도 2006 칼스버그컵 준우승에 기여했다.

2006년 3월 앙골라와의 홈경기에서 선제 결승골을 기록하며 월드컵 명단 포함 가능성을 높였다.

4.2.1. 2006 FIFA 월드컵 독일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딕 아드보카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스태프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기동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마지막 스위스전에 선발 출전하지만 일천한 경험에 유럽에 장신 수비수들과 파워 대결에서 완벽히 밀리며 부진한 모습을 보여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차라리 가만있으면 다행이었을 상황에[10] 괜히 수비가담을 하다가 위험한 파울로 프리킥을 내줬고, 데드볼 마스터 하칸 야킨이 이 프리킥을 필리페 센데로스의 이마에 정확히 갖다놓으면서 선제골 실점의 빌미까지 제공했다.

4.3. 베어벡호 시절

월드컵 직후 지독한 소포모어 징크스에 빠졌고 베어벡호 1기에만 소집됐고 이후 약 1년 반 가량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4.4. 허정무호 시절

허정무호 1기부터 선발돼 다시 대표팀에 복귀했다.

2008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1차전 중국전 프리킥 득점과 헤더 등 A매치 데뷔 첫 한 경기 멀티골을 기록하며 제 컨디션을 찾아갔다. 비록 2,3 차전 모두 부상으로 결장했지만 공동 득점왕에 오르며 대한민국의 우승에 기여했다.

월드컵 3차 예선 요르단과의 2연전에서 모두 페널티킥으로 득점하며 2경기 연속 득점과 함께 최종 예선 진출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후 모나코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컨디션 난조로 약 반 년 간 소집되지 못했다.

월드컵 최종 예선 사우디아라비아 원정을 앞두고 대표팀에 복귀했고 후반 교체 투입해 중거리 슈팅으로 쐐기골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의 19년 만에 사우디아라비아 상대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2008년 허정무호에서만 5골을 터뜨리며 이근호와 함께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

2009년 초반까지는 정성훈에 밀려 후반 조커로 출전했지만 4월 소집 들어 이근호의 파트너로 선발 출전하기 시작했으며 최종 예선 UAE 원정에서 감각적인 트래핑 이후 오른발 슈팅으로 선제 결승골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의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2009년 8월 파라과이와의 상암 경기에서 이동국이 25개월 만에 대표팀에 복귀했지만 후반 교체 투입해 루즈볼을 선제 결승골로 득점하며 또 다시 대표팀 내 투톱 경쟁에서 비교 우위를 가져갔다.

2009년 10월 호주와의 상암 경기에서 이번엔 이동국과 투톱으로 선발 출전했고, 전반 5분 만에 이청용의 스루패스를 침투해 오른발로 선제 결승골을 기록했다. 이로써 허정무호 8호골로 이근호를 넘어 허정무호 득점 단독 1위로 올라섰다.

2010년 들어 소속팀에서 오른쪽 햄스트링 부상으로 3월 런던 소집에 불참했고 5월 소집 직전 우측 넓적다리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 직전 국내 최종 평가전인 에콰도르전에서도 결장하고 말았다.

그래도 월드컵 직전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에서 열린 일본 대표팀의 월드컵 출정식에서 전반 박지성 골로 앞선 상황에서 하프타임에 염기훈과 교체 투입하며 복귀전을 치렀다. 그리고 후반 막판 자신이 직접 침투해 나라자키 세이고의 반칙을 유도해 PK를 얻었고 직접 득점해 성공하며 승리했다.

이후 유럽에서 열린 벨라루스, 스페인과의 평가전에 모두 선발 출전하며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4.4.1.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1 이운재 · 2 오범석 · 3 김형일 · 4 조용형 · 5 김남일 · 6 김보경 · 7 박지성
C
· 8 김정우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이승렬 · 12 이영표 · 13 김재성 · 14 이정수 · 15 김동진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정성룡 · 19 염기훈 · 20 이동국 · 21 김영광 · 22 차두리 · 23 강민수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허정무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스태프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태하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허정무 감독이 최종예선 내내 박주영 이근호 두 공격수를 중용했기 때문에 본선 출장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11] 본선에서도 전 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B조[12] 첫 경기 그리스전에서는 열심히 뛰고 수비진을 휘저으며 위협적인 장면도 여러 차례 만들어냈다. 전반에는 박지성의 칼 같은 스루 패스를 받아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만들어 냈으나 안타깝게 득점에는 실패했고, 후반에도 회심의 헤딩슛이 골대를 살짝 넘겼다. 그래도 풀타임 뛰면서 공격수로서 자신의 실력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4년 전, 2006년 월드컵 데뷔전에서 유럽 장신 선수들의 피지컬에 눌려 완전히 버로우했던(...) 모습에 비하자면 글자 그대로 괄목상대. 그리스의 장대 수비수 사이에서 당당히 공을 따내고 포스트 역할까지 충분히 수행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날 박지성의 환상적인 패스로 얻은 1대1 찬스를 놓친 것 때문에 네티즌들이 비판을 퍼붓기도 했지만, 실제로 박주영은 숨은 MVP로 불릴 만큼 상대 수비수들을 몰고 다녔으며 2선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아깝게 놓친 1대1 장면에서도 본인이 못차서 못넣은 게 아닌, 그리스 키퍼의 눈부신 선방에 막힌 것이었다. 참고로 ESPN에서는 이 경기 MOM(Man of the Match)로 박주영을 선정하였다. 피파 공식 MVP는 박지성.

그러나 아르헨티나와의 본선 2차전 경기에서 리오넬 메시의 프리킥 세트피스 상황에서 한국 문전으로 날아온 볼이 실수로 박주영의 정강이에 맞고 들어가는 바람에 한국의 월드컵 출전 역사상 2번째 자책골[13]을 기록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리오넬 메시의 어시를 받아서 골로 연결한 축구선수 박주영 그러나 스위스전 패배[14]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던 2006 독일월드컵 최종 3차전 스위스전의 잊지 못할 삽질과는 다르게, 이 경우는 박주영 한 명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각자 맨투맨 마킹을 놓쳐서 나온 실수였기 때문에 운이 너무 없었다.[15]


3차전 나이지리아전에서 정성룡의 킥이 최전방에 있던 박주영에게 정확히 전달됐고 이를 두고 상대 수비수와 경합하다 페널티 박스 바로 바깥쪽에서 파울을 얻어냈다. 그리고 자신이 얻어낸 프리킥을 자신이 차며 수비벽의 옆면을 절묘하게 넘겼고, 키퍼가 각을 보고 몸을 날렸음에도 공이 원바운드 되어 막을 수 없게 만드는 환상적인 감아차기로 월드컵 데뷔 골이자 역전 골을 만들어냈다. 이 득점으로 대한민국의 원정 첫 2라운드(16강)[16] 진출을 이끌며 2차전의 실수를 깔끔하게 만회했다.

여담으로 박주영이 초등학교를 나온 대구 동구 안심에서는 자책골을 넣자 국가대표 되었다고 걸려있던 현수막이 사라졌다가, 나이지리아전 역전골을 넣자 그 현수막을 다시 내건 일도 있었다. 그리고 안심 근처인 율하지구 남쪽에 생긴 작은 축구장의 이름이 박주영 축구장으로 명명되기도 하였고 이것 덕분에 원정 첫 16강에 진출했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나와서 득점을 기록하지 못해 일부 네티즌들로부터 비판들을 받기도 하였으나,[17] 대부분의 축구 커뮤니티 팬들은 좋은 플레이를 보였다며 괜찮은 평가를 내리는 편이다. 실제로 이날 경기에서 박주영은 초반 나이지리아 전과 비슷하게 수비벽 옆면을 절묘하게 넘기는 프리킥으로 골대를 맞추며 상대를 위협하였고, 좋은 움직임을 보이며 동료들의 찬스를 많이 만들었다. 또한 스카이스포츠, 골닷컴 등 각종 외신 및 해외 언론으로부터 한국 선수 최고 평점[18]을 받았다. 일각에선 차라리 처음부터 이동국을 선발로 기용해 투톱을 편성했다면 공격상황에서 더 골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당연히 지상병담이요 탁상공론이다. 지금껏 대표팀이 8회 월드컵에 출전하는동안, 공격수를 두 명 둘만큼 강한 미들진을 가져본 역사가 없다. 하물며 이전 유로와 아프리칸 네이션스컵에서 감지되던 기류였지만, 역시나 2010년 월드컵의 대세는 4-5-1이었다.[19] 에펨, 피온은 작작하고 실축 좀 봐라[20]

2010 월드컵에서 박주영의 활약상에 대해 국내외 축구계 인사와 해외언론에서는 찬사를 보냈으나, 자살골이라는 임팩트와 필드골이 없었다는 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골로 말하는 스트라이커이니만큼 "움직임이 위협적이면 뭐하냐? 골을 넣어야지."라는 날선 비판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허정무 감독이 박주영에게 수비진의 어그로를 끌어 미드필더들이 침투할 공간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부여했기에 득점에만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분석도 있고, 분명 박주영 자체도 최전방이나 섀도우, 윙 등 공격면에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래 플레이 스타일에서도 언급되지만 다양하게 소화할 수 있으면서도 압도적으로 잘하는 게 없다는 것. 공을 받아서 자신이 넣건 남에게 주건 어떻게든 득점으로 연결해내는 능력이 꾸준히 하향선을 그리며 거의 바닥까지 떨어지게 된다.

뭐 미래에는 박주영의 폼이 바닥을 뚫고 내핵까지 떨어졌었지만 어쨌든 이 당시에는 골은 없었지만 박주영의 폼이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다만 이런 문제가 항상 묘한 게 까는 쪽이나 빠는 쪽이나 서로 대립하다 보면 과장에 과장이 붙기 때문에. 정리하자면 박주영은 2010년 월드컵에서 자기 몫을 훌륭히 해냈지만, 빠들이 빨아주는 것처럼 그가 뭐 유럽파로서 족적을 남겼던 만큼 역대 공격수들 중에서도 대단하고 특히 당시 라이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활약이었냐면 그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았다. 반면 까들의 주장과는 달리 박주영이 이 당시 다른 스트라이커들에 비해 원톱으로서 독보적인 실력을 갖추었고, 한국 대표팀의 전술에 가장 걸맞은 공격수였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어쨌든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라는 특수한 위상 덕분에, 최순호, 김주성, 황선홍, 이동국 등의 뒤를 이어 본인이야 잘했든 못했든 팀이 지면 닥치고 쌍욕을 처먹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4.5. 조광래호 시절

2011년에 열린 한국과 UAE의 2014 브라질 월드컵 3차예선 4차전에서의 박주영. 이때만 해도 몸 상태가 괜찮아 보인다.

2011년 AFC 아시안컵 엔트리에 포함되었으나, AS 모나코와 FC 소쇼의 경기에서 종료직전 극적인 결승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하다 무릎에 통증을 느껴 정밀 진단한 결과 "우측무릎대퇴골 외측 박리성 골연골염" 진단을 받고 4주 이상 휴식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와 카타르 아시안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박주영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한 박지성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주장이 되었다.

부상에서 돌아온 박주영은 2011년에 열린 A매치 8경기 10골을 기록하였다.

3월 25일 온두라스와의 평가전에서 헤딩골을 기록하였고 6월 3일 세르비아와의 평가전에서도 헤딩골을 기록하였다.

2011년 8월 10일 한일전에 참가했으나, 이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훈련조차 못한 제대로 못한 몸상태로 팀에 합류, 실망스러운 경기력를 보이다가 교체되었다.

2011년 9월 2일 월드컵 아시아 예선 레바논전에서 아스날 입단으로 마음고생을 털어버렸다는 듯이 자신의 A매치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이근호와 교체되었다.

2011년 9월 7일 벌어진 쿠웨이트 원정에서도 환상적인 선제골을 넣으며 대활약했다. 다만 팀이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승리를 따내지는 못했다.

2011년 10월 7일 벌어진 폴란드와의 평가전에서는 후반에 동점골, 역전골을 모두 뽑아내었다. 이로 인해 아스날 입단 이후 3경기 6골이라는 엄청난 스탯을 쌓았다.[21] 4일 후, 월드컵 3차 예선 아랍에미리트와의 홈경기와 원정경기에서 모두 골을 기록하고 A매치 6경기 연속골을 기록, 2000년 이후 A매치 최다 연속골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으나 폴란드전이 A매치로 불인정되면서 아쉽게 기록을 놓쳤다. 경고 누적으로 레바논과의 월드컵 아시아 예선 원정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하였다.

4.6. 최강희호 시절

이후 레바논전의 패배로 조광래 감독이 경질되면서 최강희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한 후 3차 예선 마지막 경기인 쿠웨이트전에 출전하였으나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소속팀 아스널에서의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자, 실전감각의 여부를 최우선으로 삼은 최강희 감독이 원톱 자원으로 이동국, 김신욱, 이근호 등을 중용하면서 주장 완장을 뺐은 동시에 대표팀과 멀어졌다. 병역 연기 논란 이후 2012년 5월 최강희 감독은 박주영에게 국가대표 소집을 받으려면 병역 연기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라고 요청받았다. 후에 박주영은 기자회견을 우선으로 해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밝혔다.

셀타 비고로 이적 후 2012년 10월 17일(한국시간) 이란과의 원정경기에 풀타임 출전하였다.

2013년 2월 잉글랜드에서 열린 크로아티아와의 친선 경기에 출전한 이후, 소속팀에서 출전 기회를 많이 잡지 못한 탓에 약 1년 동안 국가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4.7. 홍명보호 1기 시절

지역예선을 통과하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따낸 최강희 감독의 뒤를 이어 홍명보 감독이 취임했으나, 오래도록 실전을 뛰지 못해 경기 감각이 전무한 박주영을 뽑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러나 많은 기대를 모았던 홍명보호가 동아시안컵을 시작으로 계속된 평가전에서 시원찮은 득점력을 보여주면서 다시 한번 박주영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9월 10일 열렸던 크로아티아의 평가전에서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고도 미미한 골 결정력을 보이자 홍명보 감독이 기성용과 박주영을 체크하기 위해 영국행 비행기에 오를 것이라는 기사가 떴다.

하지만 홍명보 감독은 소속팀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는 차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실히 해두며 1월 이적시장까지 지켜보겠다 밝혔고, 박주영 쪽에서도 컨디션이 100%일 때 합류하겠다며 국대 차출을 보류했다. 그리고 절치부심하여 다시 국대에 승선한 김신욱이 물오른 연계능력을 보여주고 득점까지 성공하며 박주영을 애타게 찾는 기자들의 목소리도 사그라들었다.

결국 이렇게 국대에서도 잊혀지는가 했지만, 약 1년여 공백을 깨고 3월 6일에 열리는 그리스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 많은 전문가들은 박주영의 국가대표 선발이 확실할 것으로 점쳐왔는데, 실질적으로 박주영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반 18분 손흥민의 패스를 받아 논스톱 슛으로 약 2년만에 득점하여 인생경기를 보여준 뒤 후반전에 김신욱과 교체하고 나갔다. 선제골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이청용 소녀슛으로 날려버린 어시스트급 패스도 날리는 등 여러모로 활약을 했기 때문에 각종 커뮤니티에서 박빠와 박까의 충돌이 극에 달했다.

4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이미 국가대표 코치인 이케다 세이고 코치와의 1:1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근데 엔트리 발표는 아직 안났다(...)(한가지를 덧붙이자면 기성용 등등의 선수도 함께 훈련을 하였다. 파주 NFC의 훈련은 박주영 뿐만이 아닌 모든 예비명단의 선수들에게 제공되는 것).

5월 8일, 월드컵 최종 명단 접수 마감일보다 3주 이상 빠르게 앞당겨 발표한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 홍명보 감독은 박주영을 대체할 공격수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이유를 밝혔다. # 당연히 각종 포탈 스포츠뉴스 게시판과 커뮤니티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박주영와 마찬가지로 봉와직염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박주호가 탈락하고, 이 시점까지 K리그 9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대세로 떠오른 이명주[22] 역시 탈락했기 때문.

5월 12일, 논란을 의식했는지 이례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힌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인즉슨 국민들이 원하지 않으면 월드컵에 나갈 이유도, 생각도 없다. #

5월 28일. 튀니지전에서 좋지않은 모습을 보이며 비판을 받았다. 참고로 튀니지는 벨기에, 러시아는 물론이고 알제리보다 명백한 약체였으며, 우리나라 팀이 훈련을 세게 해서 체력이 100%가 아니었다고 변명하지만, 튀니지는 경기 이틀전에 입국했기 때문에 체력은 커녕 시차적응이 됐을지도 의문인 상황이었다. 심지어 튀니지는 세대교체중으로 1군도 아니었다. 그리고 역시나 언플 스타트.

6월 10일. 가나전에서 65분 동안 뛰었지만 튀니지전에 이어 다시 한 번 닌자모드를 가동시켜 팬들과 기자의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이 날 경기는 대체 누구부터 까야 할지조차 혼란스러운 총체적 난국 그 자체였던 막장 경기홍명보호에서 독보적으로 많이 까이고 이런 수준은 아니다. 이 날 경기에서 보여준 WTF스러운 경기력에 손흥민, 이청용 빼고는 모두 엄청 까이고 있으며 제일 많이 까인 사람은 단연 홍명보이니...

4.7.1.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1 정성룡 · 2 김창수 · 3 윤석영 · 4 곽태휘 · 5 김영권 · 6 황석호 · 7 김보경 · 8 하대성
9 손흥민 · 10 박주영 · 11 이근호 · 12 이용 · 13 구자철
C
· 14 한국영 · 15 박종우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김신욱 · 19 지동원 · 20 홍정호 · 21 김승규 · 22 박주호 · 23 이범영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태영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건하 ·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안툰 두 샤트니에 ·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이케다 세이고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봉수

월드컵 조별 본선[23] 러시아전에서 다시 한번 홍명보에게 중용받으며 선발 출전했다. 전술적인 움직임과 공중볼 능력에서 강점을 보여주었으나, 결국 후반전에 이근호와 교체되었다. 공중볼 경합에서 몇 개의 공을 따내기는 했지만 차라리 김신욱을 기용하는 게 더 나을 뻔했다.

전반 초반 이청용의 상당히 질좋은 패스를 받고도 슈팅은 커녕 볼터치조차 제대로 못하고 중심을 잃으며(...) 기회를 날려먹은 이유로 박따봉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하나 더 획득하였다.

안정환은 "박주영이 어시스트하고 이근호가 마무리했다", "러시아 선수들을 잘 흔들어 주었다"며 실드를 쳐주었지만, 틀린 말은 아닌게 흔들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했다. 한마디로 박주영의 장점이라고 알려져 있던 그 모든 부분에서 돋보이기는 커녕 결여되어 있는 모습만 보여주는 상황.

그리고 2014년 6월 23일 2차전, 알제리전에서 실망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또다시 굴욕적인 교체를 당한다. 교체로 들어온 김신욱이 공중볼을 따내며 두번째 골에 기여를 한 모습과 대조되어 무능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모습만 계속 보여주며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선다. 사실 알제리전의 패인은 전반전에 중앙 싸움에서 밀리던 상황이 형편없는 수비 조직력과 연계되어 무너진게 가장 큰 패인이었고, 두 골을 뽑아준 공격진은 나름 역할을 해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절하게 악전고투를 펼친 손흥민, 김신욱, 이근호 등과는 달리 박주영은 슈팅은 물론 피파울도 0개라는 굴욕적인 성적을 보여주면서 정성룡 골키퍼와 더불어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외신들에게도 재앙같은 경기력이라는 축구선수로서 있을 수 없는 평가를 들었다.

이렇게 끔찍한 평가의 연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홍명보는 마지막 3차전 벨기에전을 앞두고 박주영의 선발 출전을 고려한다는 뜻을 내비치며 가뜩이나 바닥인 여론을 더욱 폭발시켰다. 결국 여론을 의식하여 김신욱과 김승규를 선발로 출전시켰고 박주영은 정성룡과 함께 벤치에서 팀의 탈락(27등)을 지켜보아야 했다. 비록 1:0으로 졌으나 경기력은 알제리전에 비하면 더 나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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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 경기 후 상의를 탈의한 박주영. 3년 전보다 근육이 눈에 띄게 줄어있다.[24][25]

당시 박주영은 전반전조차 제대로 소화 못할 정도로 기본 체력이 형편없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동국 등 국내파 공격수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그들에게 실례인 수준.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박주영에 대해 총평하자면 박주영 축구 인생 최악의 흑역사이자, 홍명보호의 2014 브라질 월드컵 졸전을 이끈 선봉장. 아무리 축구 국대 공격수가 욕받이가 될 수 밖에 없는 자리라지만, 박주영은 브라질에서 무려 공격 포인트 0개, 슈팅 0개도 모자라 피파울 0개라는 환장할 성적을 보이며 홍명보호를 침몰시킨 가장 큰 원흉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4년 후 열린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승했음에도 공격 포인트가 단 1개도 없었던 프랑스의 올리비에 지루처럼 월드컵을 비롯한 국제전에서 국대 공격수가 부진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하지만 공격 포인트는 없었음에도 연계와 포스트 플레이 면에서 굉장한 강점을 보이며 프랑스의 공격을 매끄럽게 진행시켜준 윤활유 역할을 해주며 매우 큰 기여를 한 지루와 달리, 박주영은 공중볼 몇개 따내준 걸 제외하면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하며 한국이 상대와 사실상 11명 대 10명으로 경기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런 대참사가 벌어지게 된 이유는 역시나 홍명보의 아집이었다. 홍명보는 의리 축구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선수만 주구장창 활용하고 다른 좋은 선수들은 냉대하는 모습을 보여왔는데,[26] 박주영은 정성룡, 윤석영과 더불어 의리 축구의 가장 핵심적인 멤버로 손꼽히는 선수였다. 당시 박주영은 아스날에서는 그저 주급만 실컷 받아먹으며 허송세월하고[27], 셀타 비고와 왓포드로 임대를 가서도 부진하고 불성실한 모습까지 보였으니 경기 감각은 커녕 위의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몸 상태 자체가 작살이 난 상태였다. 그리고 홍명보는 그런 박주영을 그저 자신이 아끼는 선수이자 자신의 전술에 맞는 선수라는 이유로 대책없이 선발 라인업에 박아놓았으니 브라질 월드컵의 참사는 어찌보면 예견된 참사였다.

결국 4년 전 남아공에서는 훌륭한 포스트 플레이와 연계로 극찬 받았던 박주영은 4년 후엔 정성룡, 윤석영 등과 더불어 한국 축구팬들의 혈압을 올려버린 원흉 중 하나로 전락했다.

4.8. 슈틸리케호

홍명보가 사퇴한 직후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취임했고, 많은 이들이 박주영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끝났다고 예상했지만 2014년 10월 18일에 박주영이 알 샤바브 FC 데뷔골을 터뜨리자 박주영 팬들의 위세도 다시금 부활했고, 조회수를 구걸하는 기레기들도 불필요하게 박주영 관련 기사를 쏟아 내고 있다. 무엇보다 박주영의 몇몇 팬들이 국가대표 재기용을 주장하고 있어서 문제. 그리고 항상 그러했듯이 언론에서도 이 골 하나만 보고는 대뜸 슈틸리케호 승선을 노골적으로 기대하는 논지를 드러내고 있어 불과 몇 달전 있었던 월드컵의 악몽을 기억하는 수많은 축구팬들을 자극하고 있다.

결국 2014년 11월 3일, 브라질 월드컵 참사의 주요 원흉이었던 정성룡과 함께 슈틸리케호의 평가전 명단에 포함되면서 앞으로도 박주영을 둘러싼 지긋지긋한 논쟁들이 예전의 강도로 재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특히 2015년 AFC 아시안컵의 명단에 들어가냐 아니냐 여부가 핵심 쟁점. 게다가 브라질 월드컵 전에 박주영을 마지막으로 시험해 보겠다면서 그리스와 가진 평가전에 기용했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라서, 박주영의 팬들에게는 기대감을, 박주영을 반대하는 이들에겐 불안감을 선사하고 있다.

요르단전과 이란전 두 경기 각각 선발과 교체로 출전했으나 그리스전 재판은 고사하고 달랑 슈팅 하나만 쏘고 무난히 무득점을 기록하면서 아무런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그리고 이 경기가 사실상 박주영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다. 한 경기 클린시트라도 기록한 정성룡만 못한 입지라고 할 수 있겠으나...

진짜로 신이 도우시는지 동포지션의 이동국김신욱이 부상으로 아시안컵 때 정상적인 몸상태일 거라고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 아시안컵 주전 스트라이커 박주영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판국[28]이었다. 하지만 슈틸리케는 당시 무명이었던 이정협을 발탁.

박주영이 FC 서울 복귀를 하자 슈틸리케 감독은 국내에 돌아와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을 먼저 축하해 주면서 대표팀 발탁에 있어서는 "그의 활약 여부에 달렸다"고 말했다. 2015년 5월 16일 전남 전에서 필드골을 터트렸지만, 국가대표 발탁문제에 대해서 슈틸리케 감독은 "박주영이 골을 넣었다고 했지만 30분밖에 뛰지 못했다. 대표선수는 30분만 뛰고 발탁될 수 있는 게 아니다"고 못을 박았다.

4.9. 2014년 이후

결국 2014년 11월 이란전 평가전 이후 박주영은 현재까지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았고, 세월이 흘러 박주영의 후배인 기성용구자철도 국가대표를 은퇴하였기에 사실상 박주영의 국가대표 경력은 막을 내렸다. 박주영 자신도 국가대표 발탁에 더는 미련이 없겠지만, 한시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로서는 아쉬운 결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또한 68경기를 소화한 탓에 2경기 차로 은퇴식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쉬운 결말. 다만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29], 런던 올림픽 동메달에 기여한 공이 커서 기성용, 구자철, 정성룡 등 런던 동메달 멤버들과 함께 은퇴식을 치를 수는 있다.[30]

5. 총평

처음 데뷔했을 때부터 천재라는 칭호를 얻으며 한국 대표팀의 새로운 구세주로서 기대받았지만, 결국 그 본인의 선택으로 인해 아쉬운 결말을 보인 선수이다. [31][32]

한편으론 대한민국 축구의 흥망성쇠를 겪은 선수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남아공 월드컵과 런던 올림픽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다가도 브라질 월드컵에서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영광과 좌절의 순간을 함께 하며 파란만장한 국가대표 생활을 한 선수 중 하나로 평가된다.


[1]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2] 16강 조별리그[3] 28강 조별리그[4] 심판 뒤쪽에 서 있던 박주영에게 다가와 아주 살짝 접촉한 다음 혼자서 다소곳이 드러누워 몸을 감싸쥐었다. 심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박주영에게 경고를 주었다.[5] 모르가넬라는 장풍사건 이외에도 프로선수답지 않은 더티한 반칙과 시비를 일삼아 선수들이 상대하는데 꽤나 진을 뺐으며 차범근 해설위원은 본능적으로 식빵을 잘 굽는 파이터의 기운을 느낀 어느 일진분이 자꾸 그 주위를 맴돌아 불안했다고.[6] 잘못하면 홍명보 감독은 말 그대로 한군두...라는 틀린 생각이 퍼졌지만 1974년 이전 출생에 3대 이상 독자로 보충역에 해당했고 의무복무 면제 기준 고령인 38세를 진작 초과한 43세였으므로 그가 현역병으로 다시 입영할 가능성은 절대 없었다.[7] 다만 박주영의 성격상 자신이 기록한 대부분의 환상적인 득점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빗맞은 슛이라는 코멘트를 남긴다. 아마 이 득점도 박주영의 인터뷰 스킬의 연장선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8] 사실 골 넣는 과정에서 수비를 몰고 다니는 드리블은 환상적이었으나 슛을 할 각도가 없었고, 슛팅자체도 분명 잘맞은 느낌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키퍼가 좀만 더 클래스가 있는 키퍼였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만한 볼이었다.[9] 이때 같이 뽑힌 청소년 대표팀의 김진규차기석은 최종 엔트리에 뽑혔다. 게다가 김진규는 이후 본프레레호에서 주전 수비수 자리를 굳힌다.[10] 스위스 선수 한 명을 박주영 포함 한국 선수 세 명이 에워싸는 구도였다. 박주영이 가만있었어도 2 대 1 상황이란 얘기지만 박주영은 이때 팀 내 제일 어린 막내여서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이해해 주고 넘어가 줘야 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11] 정작 예선에서 활약했던 이근호는 엔트리에서 탈락했다.[12] 32강 조별리그[13] 첫번째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때의 조광래 전 국가대표 감독이다.[14] 이 패배로 대한민국은 조 3위 대회 17위로 아쉽게 16강은 무산되었다.[15]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박주영은 유투브 채널 슛 포 러브에 출연해서 "(역대 한국 선수 중에서) FIFA 월드컵에서 양 쪽 진영에다 골을 다 넣어본 한국 선수는 저 밖에 없는 것 같다. ㅋㅋㅋ" 라고 당시 자책골을 넣었을 때의 상황을 자조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16] 일본을 이기고 진출한 1954스위스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이 있어서 원정 첫 2라운드 진출이었다.[17] 전반 프리킥 빼곤 임팩트있는 장면이 없었으며 후반전에는 좋은 찬스에 홈런을 치고 가만냅둬도 나가는 공인데 어설픈 수비하다가 두번째 실점의 빌미가 되는 코너킥을 내줬느니 어쩌구... 그래도 브라질에서의 따봉에 비하면 훠~얼씬 나았다[18] 골닷컴에서는 단독1위, 스카이스포츠에서는 이날 골을 기록한 이청용과 공동 1위.[19] 괜히 염기훈을 썼던게 아니다. 포메이션 상으론 박주영과 투톱을 이뤘지만 실제 경기에선 3선까지 적극적으로 수비가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공격쪽에선 아르헨전 삽질을 포함해 그리 좋은 모습은 못보여줬지만 미드필더 지역까지 적극적으로 수비가담하여 중원싸움에 기여한 점은 좋게 평가받는다. 해외언론에게 받은 평점이 한국선수단중 상위권에 들 정도로[20] 그래도 해 볼 만한 모험인 게 우루과이는 첫 골 넣고 꾹꾹 잠그고 있었고 미드필더에서 한국의 우세였다. 또한 우루과이는 강팀이 즐비한 남미에서 중위권 팀들이 그렇듯 전통적인 카운터 형식의 축구를 구사해 왔고 1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허정무는 남미팀이랑 할 때는 각 팀의 특성에 맞춰 전술적으로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최대한 수비적이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다가 털렸는데, 지나간 뒤의 입축이긴 하다.[21] 다만 폴란드와의 평가전은 교체 선수를 7명 이상 사용해서 A매치 인정이 되지 않았다.[22] 그리고 이틀 뒤 5월 10일, 1골 2도움을 기록하며 연속 공격포인트 기록은 10경기로 늘었다.[23] 32강 조별리그[24]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줄곧 기용했던 은사 허정무 감독이 2017년 박주영 공백에 대한 질문에 덕담을 하면서도 "선수가 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첫 운을 뗀 건 이 모습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25] FC서울에서 2016년 우승했을 당시에 박주영은 근육맨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팔뚝과 복근이 상당했다. 역시 관리를 잘못한듯[26] 심지어는 함부르크를 거쳐 레버쿠젠에서 재능을 만개하고 있었던, 향후 대한민국 국대의 새로운 에이스로 거듭나게 될 손흥민조차도 자신의 전략과 맞지 않는다며 뽑지 않으려 했다는 루머까지 있었다.[27] 오죽하면 경기장에서 매우 가까운 벤치에서 명문 클럽인 아스날의 경기를 공짜로 보고 한국 돈으로 몇천만원에 달하는 주급이 꼬박꼬박 들어오는 박주영이 매우 부럽다는(...) 비아냥까지 있을 정도였다.[28] 이 기사에 따르면 박주영은 자신이 엔트리에 뽑힐 거라 여겼다고 한다. 7경기 1골로 부진했던 건 미드필더 였기 때문이라는데... 수비수라면 모를까 전직 공격수 출신의 미드필더가 어시도 없이 골만 달랑 1골이라는 건 문제가 있다.[29] 15위[30] 정성룡 또한 3경기 차이로 단독 은퇴식을 하지 못한다.[31]천재라는 칭호가 얼마나 대단한지 감이 안오는 축구 팬들이 많은데, 손흥민, 황희찬, 김민재 등 2020년대인 현재 한국 국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선수들 조차도 들어본 적 없는 칭호다. 기껏해야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TV에서도 소개된 바 있던 이강인 정도가 다다.[32]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2020년 기준으로 못했다고 하기에도 기대에 충족했다는 의견도 미묘한 쪽에 가깝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실패는 있었지만 월드컵에서 골을 넣고 16강진출 올림픽 메달 이걸 국대에서 달성한 원톱은 박주영이 유일하다. 결국 판단은 알아서 해라 라는 의견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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