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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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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colcolor=#000000><colbgcolor=#eee8aa> 베르킨게토릭스 Vercingetorix | |
생몰년도 | 기원전 82년 ~ 기원전 46년 |
출생지 | 고대 갈리아 루그두눔/제르고비 |
현재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 론주 |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수도 로마 감옥에서 처형 |
지위 | 아르베르니족 부족장 |
소속 | 갈리아 아르베르니족 |
참전 | 알레시아 공방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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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리아의 영웅으로 상당수 프랑스인의 가슴에 자존심으로 남아있는 사나이. 프랑스 만화 아스테릭스에서는 그의 항복 장면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발등에 방패와 투구를 내던져 찍어버리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렸다.프랑스어 발음인 베르생제토릭스(Vercingétorix)로도 알려져 있다. 그 뜻은 갈리아어로 위대한(Ver) 전사의(Cingetos) 왕(Rix)라는 의미다.
사실 그의 본명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로마에서는 그를 베르킨게토릭스라고 불렀으나 이는 칭호다.
이 문서 맨 위의 사진은 알레시아 공방전에서의 활약을 기려 알레시아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지만 실제 모습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후대의 상상에 기반한 것이다. 나폴레옹 3세를 닮게 만들었다. 나폴레옹 3세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존경했고 아예 자신의 이미지를 그에 덮고자 동상을 만들 때도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만들게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패하면서 물러날 때, 그의 반대파들은 그리도 존경하는 베르킨게토릭스처럼 처형당하면 그 이름은 남을 것이라고 야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스테릭스와 신들의 전당(한국 발매순으로 18권)에선 '무릎 꿇은 베르킨게토릭스' 버전도 등장한다. 앞의 사진은 골족의 관점이고, 이것은 카이사르의 관점으로 회상하는 부분이다.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자존심 내세울 처지는 아니었다. 드라마 ROME을 비롯한 많은 창작물에서는 끌려오다시피 해서 무릎을 꿇은 모습이 일반적. 아스테릭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베르생제토릭스의 항복은 꽤 유명한 주제라서 관련 작품이 많은데, Vercingetorix surrenders로 검색해보면 그를 당당한 모습으로 표현한 사례가 많다. 아무래도 프랑스 쪽에서는 영웅이라 그런 듯.
2. 생애
갈리아족 부족 중 하나인 아르베르니족[1] 족장의 조카였으나 쿠데타를 일으켜 친로마파인 족장을 죽이고 족장 자리를 찬탈했으며 로마에 저항한 최후의 갈리아인이자 최초이자 최후의 갈리아 연합 부족장이다.당시 갈리아는 거의 로마에 의하여 완벽하게 점령당해 있었고 갈리아 전쟁은 끝난 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는데,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인의 자유와 독립을 기치로 내걸고 갈리아 전역의 반로마 봉기를 촉발시켰다. 말 그대로 그동안 로마가 원했던 갈리아 전쟁의 모든 결과를 수포로 만들어버린 셈.
용의주도한 전술과 뛰어난 전략으로 로마군을 격파하며 수차례의 승리를 얻었으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처음 활동을 시작했을 때가 17~19세 정도로 추정) 분열하기 쉬운 갈리아인들을 휘어잡아 로마에 대항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보잘 것 없는 부족 출신의 새파란 젊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부족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수많은 부족들이 중구난방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갈리아 내에선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유능함을 주변에서 인정했다고 봐야 한다.
그의 유능함은 로마 사상 손꼽히는 명장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대로 잘 발휘되었는데 그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기간 내내 갈리아 부족들의 내분을 이용하여 우호 부족을 확보한 뒤 보급을 그들을 통해 조달받으며 전쟁을 수행해 왔음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그는 카이사르의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갈리아 부족들에게 내분을 중단하고 자유를 얻기 위해 모두 로마와의 친분을 끊으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호소는 의외로 잘 먹힌 게, 카이사르가 2개 군단이 전멸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아코라는 족장을 부족회의에서 잔인하게 처형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이 부족장들 사이에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2][3] 게다가 카이사르가 그들에게 위협이 되었던 게르만족과 게르만 부역자들을 남김없이 격파해주자 더이상 로마의 신세를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이제 그만 로마도 물러나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력 부족장들은 베르킨게토릭스가 유능하긴 하였으나 그의 부족의 세력은 약했으므로 베르킨게토릭스가 로마를 쳐부수고 난 뒤엔 자기네들이 로마의 공백을 메꾸고 맹주 노릇을 할 것이라는 기대도 하고 있었다. 즉 이래저래 베르킨게토릭스의 총궐기를 하자는 제안은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따라서 처음엔 게르만족을 데리고 와서 설쳤다가 카이사르에게 깨진 부족들만 호응을 받았던 베르킨게토릭스 연합에 점점 유력 부족장들이 호응하기 시작하였고 나중엔 친로마 부족들마저 배신하게 된다.[4] 이렇게 되자 카이사르가 갈리아 사방에 주둔시킨 군단들은 우호부족에게서 조달되고 있던 보급이 끊긴 채 고립되고 만다.
이때 이탈리아 북부에 머물던 카이사르는 서둘러 북상하였고 교묘하고 재빠른 행군으로 베르킨게토릭스의 눈물겨운 방해공작을 뿌리치며 갈리아의 로마군과 합류한다. 이때는 겨울철이었는데 당시 전쟁은 겨울철에는 쉬고 봄에 시작해 가을에 끝내는 것이 상식이었다.[5] 그러나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중심으로 세력이 규합되고 있음을 보고 받고는 선수를 치기 위해 서둘러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진입한 것이었다. 이때 카이사르는 사람 키만큼의 눈이 수십 킬로를 덮은 지대를 뚫고 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민한 행군 끝에 10개 군단에 이르는 군단을 자신의 휘하에 집결하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자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 상대로 청야전술을 구사한다. 우호부족들이 모두 이탈한 카이사르군은 오직 약탈을 통해서만 군량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 주위의 도시를 깨끗이 초토화함으로써 로마군의 보급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우선 주변 마을을 몽땅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들 중 아바리쿰 시는 시민들이 베르킨게토릭스에게 카이사르가 와도 능히 막아낼 천혜의 요새를 뭐하러 태우느냐고 생떼를 쓰는 바람에 태워지지 않고 남았다. 현지 조달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불타지 않고 남아있던 이 도시를 타겟으로 삼았는데 10개 군단의 맹공을 받은 이 도시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점령당하고 그 도시 내의 거주민은 모두 학살당한다(아바리쿰 공방전). 그러나 오히려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는 강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사태를 내다보고 도시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는 이 도시를 점령하고 군량을 노획하여 간신히 숨통이 트였다.
그 뒤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에 있던 갈리아의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를 직접 타격하고자 하였는데 그 전에 자신의 병력을 둘로 나눠 4개 군단을 라비에누스에게 주어 다른 갈리아 부족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6개 군단을 지휘하였다(게르고비아 공방전). 이는 전사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대실수로 이로 인해 하마터면 갈리아 정복을 실패할 뻔 했다. 아바리쿰 시를 공략하는 데 10개 군단을 동원한 반면 게르고비아에 있던 베르킨게토릭스를 공략하는 데 6개 군단을 동원한 것으로 이러한 병력의 열세는 베르킨게토릭스로 하여금 게르고비아를 지켜내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이미 초토화하여 보급을 차단하는데 성공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무조건 지구전으로 갈 생각밖에 없었다. 또한 게르고비아라는 곳이 워낙 방어하는 데 좋았기 때문에 천하의 로마군도 쉽게 점령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군대의 숫자도 훨씬 많았으므로... 군량이 이미 바닥난 상태였던 카이사르는 퇴각을 결심하였다. 퇴각하기 전 체면상 최후로 강력한 공격을 한번 해보았는데 흥분한 병사들이 제멋대로 너무도 깊숙히 공격을 하여 전열이 무너져 패배하고 만다. 이로써 베르킨게토릭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최초로 후퇴시킨 인물이 된다.[6][7]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에서의 패배로 갈리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결국 꿈에 그리던 갈리아의 해방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었다. 그런데 베르킨게토릭스는 느닷없이 갈리아 연합군을 이끌고 철수하고 있었던 로마군을 정면으로 공격한다(빈게네 전투).[8]
이는 카이사르에게 느닷없는 횡재나 다름없었고 훈련의 대부분을 평지에서의 회전에 맞춰 왔던 로마군에게 이러한 싸움은 대환영이었다. 더군다나 사령관은 로마 역사상 가장 유능한 장군 중 하나인 카이사르.[9] 베르킨게토릭스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왔으나 이들은 그대로 떡실신당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로 퇴각한다.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쫓아 알레시아를 겹겹히 포위한다. 로마군의 포위란 띠를 두르듯 방책을 세우고 참호를 깊게 파 물 샐 틈 하나없이 완벽히 차단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게르고비아와는 달리 알레시아는 전혀 포위당하는 것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아 포위당한지 며칠 만에 군량이 바닥나버렸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공격했으나 그때마다 큰 피해만 입는다.
그 뒤 갈리아족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로마군의 포위망을 안팎으로 30만여 명의 대군이 공격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것마저 격파한다.
이 패배로 더이상 저항할 수 없었던 베르킨게토릭스는 직접 카이사르에게 나아가 항복했고 구심점을 잃은 갈리아 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항복, 그 결과 카이사르는 갈리아족의 대대적인 봉기를 진압하는데 성공하고 갈리아 제패를 마무리짓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1889, Lionel-Noel Royer)
플루타르코스의 카이사르 전기에 따르면 베르킨게토릭스는 자신의 멋드러진 백마를 타고 로마군의 진영을 한 바퀴 돈 다음 카이사르의 발치 앞에 무기를 던진 후 갑옷을 벗고 정좌한 채 끌려나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간지 넘치는 방식으로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베르킨게토릭스가 로마에게 받은 처우는 좋지 못했다. 포로로 로마에 끌려간 후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와 원로원 간의 로마 내전이 끝난 후 열린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동원되었고 다시 감옥에 갇혔다가 3년 후, 특이하게도 처형당했다.[10] 그가 죽을 무렵에는 36세로 아직도 한창의 나이였기 때문에 훗날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인을 없애버린 처사라고도 볼 수 있다.
3. 평가
3.1. 부정적 평가
아직 부족제에 머물러있던 켈트족을 연합하려 했던 위대한 영웅.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분열되어 통일된 정치체제를 갖추지 못한 채 각개격파당하던 켈트족을 통합해서 로마에 저항하려 했으나 부족제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패배한 인물이다.카이사르와 로마에게는 반항적인 이민족 왕이었겠지만 갈리아의 후계라고도 할 수 있는 프랑스 등에서는 애국자이자 민족을 위해 투쟁한 자로 보기도 한다. 독일에서 아르미니우스를 보는 시선과 동일한 셈.
베르킨게토릭스가 게르고비아에서의 패배로 인해 속주로 퇴각하는 카이사르를 공격하여 자멸한 이유에 대해선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1차 사료인 갈리아 전기에선 베르킨게토릭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군은 갈리아를 떠나 속주로 퇴각하고 때문에 당분간의 자유는 확보될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보면 이것만으론 불충분하다. 이들은 대군을 이끌고 돌아올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군수품과 함께 행군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들을 완전히 쳐부술 유일한 기회이다.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병사를 공격하면 로마군은 이를 지키기 위해 꼼짝달싹 못하게 될 것이고 만일 로마군이 군수물자를 버리고 달아난다면 로마군의 그동안 쌓은 명성은 모두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를 보면 베르킨게토릭스는 1. 로마군의 재침략을 두려워하고 있다 2. 후퇴하고 있는 로마군은 공격하면 군수물자를 버리고 달아나는 데 급급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위 두 가지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선 첫 번째의 경우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은 로마 정부의 방침이라기보단 카이사르의 개인적인 야심으로 인한 전쟁이었다. 카이사르의 임기는 이미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고 따라서 모든 군대가 갈리아에서 철수한 뒤 다시 갈리아 정복 전쟁을 시작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즉, 카이사르의 임기 내에 다시 갈리아 정복을 노릴 만큼의 여유는 없는 상황이었다. 카이사르의 임기가 종료된 뒤 새로 파견된 로마 총독이 갈리아 정복을 위해 재침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철수를 한다면 로마 내의 수많은 정적들에게 카이사르는 엄청난 비판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였다. 당시 로마의 정세는 크라수스가 죽고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로 완전히 돌아선 상황이어서 카이사르는 고립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갈리아에서의 철수는 카이사르에게는 정치생명이 끝날 가능성도 있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여러모로 유능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으나 로마의 정세와 적 사령관이 처한 입장을 고려하지는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는 적 사령관의 기질, 성격까지 훤히 파악한 한니발과 대조된다. 한니발까지 갈 것도 없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1년차의 게르만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도 카이사르의 상황을 훤히 알고 있어 "내가 카이사르를 이기면 로마 귀족들이 환호해 줄 것"이라 말했다.
두 번째의 경우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위의 연설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이 퇴각하고 있으므로 공격하면 물자들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첫 번째 로마가 끊임없이 재침공할 것이라고 파악한 것처럼 두 번째의 경우 역시 베르킨게토릭스가 일방적으로 예상하고 전략을 세웠는데 그는 '로마군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공격하온 갈리아군을 패주시킬 가능성'에 대해선 전혀 고려를 하지 않고 있다. 로마군이 그동안 갈리아군에게 보인 압도적인 전력의 우수함과 그로 인해 갈리아군이 초토화 작전을 써서 간신히 후퇴시킨 상황을 고려한다면 퇴각하고 있는 로마군이 추격해온 갈리아군을 거꾸로 격퇴할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였는데 이는 그가 보여준 뛰어난 자질과는 굉장히 대비되는 모습이어서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젊은 나이와 그로 인한 경험 부족이 뛰어난 천부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정적 순간에 오판을 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알레시아 전투에서의 패배로 카이사르는 한 방에 전세를 역전하였고 이 승리를 바탕으로 역사적 인물이 되고 만다.[12]
3.2. 긍정적 평가
베르킨게토릭스의 위 발언은 게르고비아 전투가 끝난 이후 로마군을 향해 출병하면서 갈리아인들에게 한 말이다. 정확히는 갈리아 전기 7권 66장의 기록이다.먼저 베르킨게토릭스는 위 발언을 갈리아인들에게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휘관이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적을 낮추는 연설을 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만약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인들 앞에서 솔직하게 "로마군은 아직 강성하며 우리 병사 대부분은 죽거나 불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과연 훌륭한 장군이라 말할 수 있을까?
베르킨게토릭스의 발언이 아니라 행동을 보면 그가 로마군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갈리아 부족 중 약소부족인 아르베르니족의 족장으로 갈리아 부족연합군 전체를 이끌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병력을 가장 많이 동원한 측이 맡는 것이 상식이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현대로 비유하자면 미군, 영국군, 벨기에군의 연합군을 벨기에군 총사령관이 맡는 격이다. 병력을 많이 제공하는 측이 달가울리 없다.
따라서 지위와 발언권이 약할 수 밖에 없고 실제로도 하이두이족이 자기 부족 인물을 총사령관으로 내세우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렇게 약한 지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청야전술로 로마군을 상대하려 했다는 것이다. 아바리쿰의 갈리아인들이 청야전술을 결사 반대하다 전멸한 것에서 보듯이 고대인이라고 집과 논밭을 불태우는 것이 달가울 리 없다. 지위가 확고한 왕이라도 쉽게 쓰기 힘든게 청야전술이다.
만약 베르킨게토릭스가 정말로 로마군을 얕봤다면 고달픈 청야전술 같은걸 쓸 필요도 없이 대군을 이끌고 당당하게 회전을 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회전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로마군에게 한방에 깨지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즉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을 결코 얕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베르킨게토릭스가 로마군을 얕보지 않았음에도 굳이 게르마니아 공방전 이후 로마군을 상대로 회전을 벌여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당시 로마의 국제정세를 보자.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는 멸망했고 남쪽의 마우레타니아 왕국과 누미디아 왕국은 유구르타 전쟁 이후 로마의 동맹국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역시 로마의 동맹국이라 아프리카는 완전히 로마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서쪽 이베리아 반도는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남동쪽 파르티아 제국은 로마와 거리도 멀거니와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를 한 번도 침략한 적이 없었다.[13]
동쪽 그리스는 코린토스 전투(BC146) 이후 로마의 영토가 되었으며 기원전 88년 일어난 그리스 반란(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도 술라에 의해 진압되었다. 아나톨리아의 폰토스 왕국은 3차례에 걸친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로마군에게 완전히 박살난 이후 로마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북동쪽 달마티아 너머의 게르만족이 로마에게 위협이 되려면 오현제 시기가 되어야 했다.
갈리아 전쟁 당시 이미 고대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였으며 모든 주변 영역이 안정되었다. 딱 한군데 갈리아만 제외하면 말이다. 정확히는 갈리아 자체보다도 게르만족이 갈리아를 통해서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했기 때문이다. 게르마니아와 이탈리아는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통행이 어려워 갈리아를 통해서 게르만족은 로마가 도시국가 시절부터 이탈리아를 수없이 침범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시절에도 30만이 넘는 게르만족이 북이탈리아를 침범해왔다. 갈리아 남쪽에서 벌어진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무려 로마군 8만명[14]이 게르만족에 전멸당했고 스페인 북부는 철저히 약탈당했다. 결국에는 로마군의 반격으로 쫓아내기는 했지만, 침입한 적을 쫒아낸 것이지 근본적인 대책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로마가 갈리아를 점령한다면 게르만족의 위협을 갈리아에서 방어할 수 있고 이탈리아는 게르만족의 위협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로마가 갈리아를 점령할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갈리아 전쟁의 원인이 카이사르의 야심인 것도 맞지만, 카이사르의 야심만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결을 통해 3개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례적으로 5년이나 되는 임기를 부여받았으며 4개 군단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이는 분명히 갈리아 전쟁을 염두에 둔 것이다. 카이사르가 황제라 독단적 결정을 내릴 입장도 아니었는데 로마 원로원이 이런 이례적인 지위를 부여한 것은 원로원도 갈리아를 점령할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뒤 카이사르의 독재를 경계하던 원로원조차 유례없는 20일이나 되는 감사제를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이어진 내전기에서도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는데 이 역시 갈리아 전쟁의 승리 덕분이다.
로마 원로원이 카이사르가 독재자가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것이 갈리아 점령도 반대한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다. 게르고비아 공방전 이후 갈리아인들이 회전에 나서지 않고 계속 청야전술을 했다면 카이사르는 몰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몰락하더라도 로마가 갈리아를 점령할 이유는 충분했고, 로마인들의 지지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이 갈리아를 다시 점령하러 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카이사르가 물러가도 다시 로마인들이 올 것이라 예상한 것이 잘못이라 볼 수 없다.
저 연설을 하기 전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회전에서 로마군을 무찌른 것이 아니라, 청야전술로 로마군을 격퇴했다. 로마군이 올 때마다 청야전술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마군이 돌아올 때마다 초토화 작전으로 맞서야 한다면 로마군 이전에 갈리아인들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군을 갈리아에서 완전히 격퇴하려면 회전에서 로마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필요가 있었으며 이것이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 그리고 로마군에게 매번 지기만 하던 갈리아에게 게르고비아에서 승리로 높아진 갈리아 병사들의 사기와 철수를 준비하던 로마군은 갈리아에게 두번 다시 없는 기회였다.
두번째는 위에서도 언급된 베르킨게토릭스의 약한 지위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약소 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연합의 수장으로 여러 큰 부족들에게 초토화 작전을 지시하였고 이를 통해 로마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희생된 부족들이 베르킨게토릭스에 대한 반감이 있었을 것이고, 베르킨게토릭스의 지시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거대 부족장들의 거부감은 상당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이 물러난 뒤 이렇게 반감을 가진 부족장들에 의해 숙청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로마군을 상대로 명백한 군사적인 성과를 거두길 원했다. 카이사르도 원로원의 견제를 받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는 카이사르보다도 약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지위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유겠으나 달리 갈리아족에서 로마군을 상대할만한 장군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갈리아족은 로마군을 상대로 수없이 싸웠지만 한번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을 상대로 회전에서 승리를 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회전 자체는 베르킨게토릭스에게 꼭 필요했으니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로마군이 갈리아족보다 회전에서 너무 강한 상대였고, 상대도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카이사르가 고용한 게르만 기병대가 베르킨게토릭스의 갈리아 기병대를 압도한 것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결국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전쟁에 진 이상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에 비견될만한 지휘관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류사 전체에서 손꼽히는 명장으로 평가된다. 카이사르와 로마군에게 졌다고 베르킨게토릭스의 평가를 너무 낮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15]
4. 기타
확실히 베르킨게토릭스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은 화폐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다.
갈리아인과 베르킨게토릭스가 프랑스에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이며 더 정확히는 나폴레옹 3세 때이다. 그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안타까운 애국자라고 하면서도 지금 자신들에게는 로마인의 유산이 더 많다고 했지만 제3공화국 시기에 보불전쟁 패배로 인한 애국심 고취로 본격적으로 영웅시되었다. 프랑스어 위키피디아의 갈리아인 문서에서는 개요 마지막 문단에서 갈리아인들의 그때 확립된 이미지가 아직까지 프랑스에서 고정관념으로 남아버렸다고 쓰여있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그의 이야기를 토대로 제작한 2001년작 영화 Vercingétorix: La légende du druide roi(국내개봉명 검의 제왕)이 있는데, 하이랜더 시리즈로 유명한 배우 크리스토퍼 램버트가 베르킨게토릭스 역할을 맡았다. 평은 가히 최악이다. 고증, 연출, 캐스팅, 영상미 거의 모든 면에서 악평을 받고 있으며 그 수준은 2001년작이라는게 의심 할 정도다.[16]
1권 골족의 주관적인 관점 | 18권 카이사르의 관점이자 역사 고증 |
드라마 ROME에서는 1편부터 인상깊게 등장한다. 1편에서 ‘갈리아의 왕’으로 카이사르 앞에 나와 항복하면서 나체가 되고 로마에 대한 복종의 상징으로 로마군의 독수리 군기에 굴욕적으로 입을 맞추며, 로마로 끌려가 지하 감옥에 갇혔다가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끌려나와서 많은 로마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해 죽음을 맞는데, 이름 모를 갈리아인들이 개선식 뒤에 쓰레기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그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고 화장하는 장면에서, 비록 로마인의 문명을 이어받았지만 갈리아인과 게르만인의 후손에 가까운 영국, 미국인의 감성이 느껴진다.[17]
콜린 맥클로우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 5부인 Casar 편의 전반부에서는 당연히 주인공 카이사르와 대결을 펼치는 최종보스격의 인물로 나온다. 흔히 생각하는 야만인 이미지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민족을 생각하는 제3세계 게릴라 지도자처럼 그려지는게 포인트. 가상이지만 초반부에 카이사르와 단독 회담하는 장면에서의 카리스마는 일반적인 이미지의 야만인을 넘어선다. 이후에도 상당히 잔인한 면모를 보여주지만 찌질이와는 다른 모습의 적장으로 그려진다.
스위스 출신 포크/멜로딕 데스 메탈 밴드인 Eluveitie는 이름(헬베티)에 걸맞게 베르킨게토릭스의 이야기를 자주 다룬다. 익스트림 메탈 특유의 그로울링 보컬이 베르킨게토릭스의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전희절창 심포기어 시리즈의 악역인 웰 박사의 풀 네임 존 웨인 웰킨게트릭스의 '웰킨게트릭스'는 이 베르킨게토릭스에게서 따온 것이다. 한국어 번역 과정에서 표기가 엉망진창이 된 케이스.
Fate/Grand Order에서는 로물루스=퀴리누스의 인연 퀘스트에서 로마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개념인 로마의 신 로물루스에게 분노하면서 덤비는 부디카와 로마의 죄는 자신의 죄라고 인정하지만 인리를 지키고 마스터를 위해 쓰러질 수는 없다는 로물루스의 싸움 중에, 칼데아에 수납된 성배가 부디카의 증오에 영향을 받으면서 베르킨게토릭스가 망령으로 나타나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며 공격했다. 로물루스는 마스터를 지키기 위해 부디카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부디카도 수락하면서 베르킨게토릭스의 망령을 쓰러뜨린 후, 부디카는 로물루스에게 당신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인리를 지키는 후지마루 리츠카의 서번트로서 인리를 수복할 때까지 로마에 대한 복수를 유예하겠다고 선언했다.
5. 대중매체에서
5.1. 게임 레이스톰의 2면 보스
이름의 모티브는 1번의 베르킨게토릭스. 덧붙여 이외에도 레이스톰에서는 로마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던 인물들의 이름을 보스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프랑스[18] 지역의 상공을 날아다니는 전함형 보스다.
전작 레이포스의 3면 보스와 비슷한 패턴을 구사한다. 기뢰 뿌리기 및 꺾어지는 레이저를 구사하고, 화면 뒤로 갔다가 부스터를 분사하기도 한다. 처음에 하면 좀 어려운 상대. 대신 공격패턴은 일정하기때문에 적응되면 어느 정도 할 만해진다. 다만 내구도는 더럽게 높다. 패턴특성상 록온 공격을 위한 접근도 쉽지 않다. 파츠 먼저 4개 다 부수는 쪽으로 선공을 하자.
5.2. 코드 기아스 망국의 아키토의 나이트메어 프레임
코드 기아스 망국의 아키토에 등장하는 나이트메어 프레임. 휴가 아키토의 형인 신 휴가 샤잉이 탑승하는 기체로, 황금빛 컬러링과 켄타우로스형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19] 원래 라운즈의 나이트 오브 투였던 망프레디의 전용기로 개발되어 이름도 원탁의 기사에서 유래한 사그레모르였지만, 그가 유로 브리타니아로 이적하면서 기체명과 기체번호가 바뀌었고, 망프레디 본인도 1장에서 자살의 기아스로 목숨을 잃는 바람에 신 휴가 샤잉이 탑승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기체.
보행을 하지 않고 랜드스피너로 이동하는 보통의 나이트메어 프레임들과 달리 경쾌하게 뛰어다니며,[20] 당대 나이트메어와 궤를 달리하는 엄청난 기동성을 발휘한다. 주 무장은 여러 톱니바퀴가 맞물려 형태가 변하는 SDA 액스와 샷건.
[1] 로마: 토탈 워 EB모드의 그 아르베르니 맞다. 팩션 소개에선 아이두이를 '약하다', '악랄하다', '지배할 능력이 없다'라고 마구 까는 것에 비하면... 현실은 시궁창. 아이두이족은 당시 세콰니족과 갈리아를 양분하는 최강 부족이었던 반면 아르베르니는 비교적 약한 부족에 지나지 않았다.[2] 사실 이것 자체가 갈리아 전쟁을 너무 오랫동안 질질 끄는 감이 있었고 본국 로마에서도 정세가 불안해지자 전쟁을 서둘러 끝내기 위해 카이사르가 저지른 계산된 행동이었다. 반감을 가진 부족장들을 자극해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함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중 역대급으로 뛰어난 베르킨게토릭스가 있었던 것.[3] 심지어 아트레바테스 족장 콤미우스는 본래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원정을 직접 돕다가 적의 포로가 되기도 하는 등 카이사르에게 큰 신임을 받던 인물이어서 카이사르의 사고방식과 전투방식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런 인물까지 카이사르를 배신할 정도로 카이사르는 큰 패착을 저지른 것이다.[4] 레미족 하나만 빼고 모두 배신했다. 심지어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초반부터 든든한 우군이었으며 군량 유통을 맡아왔던 갈리아 최대 규모의 하이두이족까지 배신하는 바람에 보급이 끊겨서 카이사르도 진짜로 죽을 뻔했다. 카이사르가 이토록 불리할 때도 끝까지 신의를 지켰던 레미족은 전황이 역전된 후 동맹자 자격이 박탈된 하이두이족 대신 최고의 우대를 받게 된다.[5] 한니발이 예외적으로 알프스를 넘은 뒤 북이탈리아에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군사활동을 벌였다.[6] 사람에 따라서 카세(당시 영국의 부족)의 지도자인 카시벨라우누스를 들기도 한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브리튼 섬으로 건너갔지만 별거 못 건지고 갈리아로 돌아오긴 했다.[7] 하지만 갈리아와는 달리 카이사르는 애초부터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생각이 없었다. 브리타니아를 침공한 자체도 선전 효과 + 탐색전의 개념이었고 진심을 다한 전쟁이 아니었던지라, 카이사르 입장에선 상황이 조금만 묘해도 철수하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철수한 이유도 카시벨라우누스와의 전투에서 지거나 불리한 상황이라 그런 것도 아닌, 애초에 계획된 철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의 습격을 당하여 항복하고 인질을 제공하였는데, 즉 이 원정에서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서 원하는 바를 이뤘음을 알 수 있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서 건진게 별로 없었던 이유는 정말로 그 땅이 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8] 이에 대해서는 추측이 분분하다. 갈리아의 젊은 영웅이 거듭되는 승리에 도취되어 과감한 공격을 시도했으리라는 추측도 있고, 베르킨게토릭스 본인은 지구전을 고수했지만 그를 지지하던 다른 족장들이 자만해서 전면전을 요구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사실 베르킨게토릭스가 속했던 아르베르니족의 입지를 생각하면 후자가 꽤 설득력 있다. 그러니까 어디를 가나 높으신 분들이 문제다[9] 사실 카이사르의 군사적 업적 중에 중요한 결전에서는 상당히 운적인 요소가 작용했으나(예를 들어 알레시아나 파르살루스에서의 승리도 상대의 뻘짓에 기반한 것이 컸다), 이러한 기회를 잡아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도 그의 전술적인 능력과 임기응변이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것이다.[10] 로마는 아무리 고전했다고 하더라도 개선식에 쓰인 고위급 포로들은 죽이지 않고 유배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11] 물론 카이사르가 손만 대고 돌아온 후 제정 시기 로마군이 다시 브리타니아를 침공해 복속시킨 것을 보면 언젠가는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최소한 카이사르의 대에서는 아닐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12]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런 점에서 지중해를 제패한 카이사르의 정적 폼페이우스와 같은 길을 걸었다 할 수 있다.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 역시 카이사르의 해상보급선이 없음을 파악하여 수비 위주의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디라키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폼페이우스파 원로원 의원들의 요구에 따라 이후 전략 수정을 감행하여 카이사르와 파르살루스에서 회전을 벌였으나 카이사르의 예상치 못한 전술에 결정적인 패배를 맞이한다.[13] 크라수스가 먼저 가만히 있는 파르티아를 침략해서 카르헤 전투에서 참패하지만 이는 정말로 명분도 실익도 없는 전쟁이라 원로원, 호민관, 집정관이 전부 반대했다.[14] 로마군 80,000명과 40,000명의 하인 및 군대를 따라다니며 보급지원을 하던 민간업자들이 사망.[15] 거기다가 카이사르는 당대 최고의 선진강대국 로마군을 이끌고 있었던 반면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에 비하면 야만인 취급을 받았던 데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족별로 분열되어 있었던 갈리아군을 이끌었기 때문에 입지가 비교적 약했던 것을 고려해야 한다. 당시 갈리아군에서는 베르킨게토릭스만큼 그 카이사르를 위기로 몰아넣은 장군은 없었다.[16] 역사 왜곡도 심각한데 특히 게르만족들은 거의 무슨 석기시대 수준의 미개하고 잔인한 야만족으로 묘사된다... 아무리 프랑스인들이 독일을 싫어한다고 하지만...[17] 배우 개그라면 배우 개그인 것이 극중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맡은 배우는 지오반니 칼카뇨(Giovanni Calcagno), 즉 이탈리아 본토 사람이다.[18] 작중에서는 올드 골 시티, 즉 갈리아의 옛 도시라는 명칭으로 불림.[19] 코드 기아스 쌍모의 오즈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이 기체의 사족보행 구조는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 DS의 오리지널 최종보스 기체 에쿠스의 발전형으로, DS에서도 황금색의 반인반마형 KMF 레갈리아가 등장한다.[20] 같은 망국의 아키토에 나오는 알렉산더나 팬저 훔멜도 보행을 하는 연출이 있기 때문에 망국의 아키토 자체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