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00:54:22

데이비드 라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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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라이머
David Reimer[1]
파일:데이비드 라이머 이미지 2 .jpg
2000년대 찍은 사진[2]
본명 데이비드 피터 라이머
David Peter Reimer
개명 전 이름 브루스 라이머
Bruce Reimer[3]
브렌다 라이머
Brenda Reimer[4]
출생 1965년 8월 22일
캐나다 자치령 매니토바주 위니펙
사망 2004년 5월 4일 (향년 38세)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
묘소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 세인트 비탈 묘지
236 River Rd, Winnipeg, MB R2M 5G6 캐나다
학력 R. B. 러셀 직업 고등학교[5] (중퇴)
직업 도축업자, 잡역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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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라이머 가문
국적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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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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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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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성별 남성
종교 기독교 (개신교, 재침례파)[6]
작품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As Nature Made Him: The Boy Who Was Raised as a Girl)》
부모 아버지 론 라이머 (Ron Reimer, ? - ?)
어머니 자넷 라이머 (Janet Reimer, ? - ?)
형제
자매
쌍둥이 동생 브라이언 라이머 (Brian Reimer, 1965 - 2002)
배우자 제인 폰테인 (Jane Fontane) (1990년 결혼)
자녀 제인 폰테인의 자녀 3명 }}}}}}}}}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성전환과 여성으로의 양육2.3. 끔찍한 실험의 결말2.4. 말년
3. 실험의 배경4. 매체5. 여담6. 관련 문서7.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img.ibxk.com.br/10115149563361.jpg
학창 시절 데이비드 라이머

캐나다의 인물.

포경수술의료사고음경을 잃은 후 강제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가 원래의 성으로 돌아간 의료사고의 피해자다.

2. 생애

데이비드가 자살하기 4년 전 촬영한 오프라 윈프리 쇼 영상[7] 데이비드와 또 다른 피해자에 대한 노르웨이 다큐멘터리[8]

2.1. 출생

파일:0_GD167870.jpg
쌍둥이 형제를 안고 있는 어머니 자넷

1965년, 캐나다 위니펙에서 쌍둥이 형제 중 형으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브루스 피터 라이머(Bruce Peter Reimer). 일란성 쌍둥이 남동생은 브라이언 라이머(Brian Reimer).

아기 때 포경수술을 받으러 먼저 들어갔는데 전기 소작기(일명 보비)[9]를 사용하던 집도의가 실수로 기구를 잘못 쓰는 바람에 음경을 크게 다쳤다. 덴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타들어 사라질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은 것이다.
"새까매서 조그만 노끈 비슷하게 보이더군요. 그마저도 뿌리까지, 몸 바로 앞까지 다 타버렸고." 론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석탄 조각 같았어요. 그 지경이 됐으니 원상복구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었죠." … 그 후 며칠에 걸쳐 브루스의 성기는 서서히 마르면서 차츰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머지않아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억장이 무너진 부모는 북미의 온갖 용하다는 의사를 다 찾아가 봤지만 기본적으로 완전한 성기 재건 수술은 불가능했다. 결국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교 병원의 심리학자이자 성 과학자인 존 머니[10]를 만났다. 당시 존 머니는 "성 혁명계의 공작원"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을 정도로 성에 대해 도발적인 주장을 펼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11] 머니가 1952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은 <반음양: 인간 본성의 패러독스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이후 6년간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심리호르몬 연구팀을 꾸려 중성(반음양) 환자에 대한 연구를 보강했다. 이에 따라 중성 어린이들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성 구분 없이 태어나며, 양육에 따라 남성적인 기질과 여성적인 기질을 습득하게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이론이 있지만, 반음양 환자들을 관찰한 결과 알 수 있듯이 심리학적으로 볼 때 출생 당시 중립적이었던 성별은 성장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성적인 쪽으로 혹은 여성적인 쪽으로 차별화되기 시작한다."
존 머니#

양육에 따라 남성이 여성이 될 수도 있다는 머니 박사의 주장은 절망에 빠진 브루스의 부모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아이가 어린 시절부터 겪을 조롱과 멸시 대신 차라리 어린 시절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으로 살 수 있다면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여겼으며 이름도 브렌다 라이머(Brenda Reimer)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후 벌어진 일을 보면 그는 차라리 성불구자일지언정 남자로 살다가 몸이 자란 후 성기 재건수술을 받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2.2. 성전환과 여성으로의 양육

파일:external/www.es-transgender.com/IMG_0467.jpg 파일:Brenda and Brian Reimer.jpg
브라이언과 브렌다
파일:Brenda Reimer.jpg
파일:Brenda Reimer and Family and John Money.jpg
브렌다 브렌다 가족과 존 머니

브렌다 라이머는 젖먹이 무렵 머니 박사 팀의 성 전문의들의 손에 의해 거세와 그 밖의 생식기 수술을 받았다. 이후 12년간 존 머니는 라이머에게 여자라는 인식이 자리잡도록 집중적인 훈련을 가했다. 머니는 브렌다에게 기본적인 호르몬 치료와 함께 사회적·정신적 교육을 실시했다.

위에 설명했듯이 존 머니는 인간의 성 정체성이 양육에 의해 형성된다는 이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의외로 초기에는 인터섹스 환자를 만나서 교정수술 없이도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식의 논문도 내놓았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 입장을 변경하여 성 정체성이 양육에 의해 형성된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태아기에 남성호르몬에 노출되어 남성에 가까운 외성기를 타고난 인터섹스를 여성으로 교정한 결과 여성의 정체성이 형성된 것을 근거로 성별 정체성이 양육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사례자의 성별 정체성이 여성인 경우다. 인터섹스의 대표적인 경우가 클라인펠터 증후군인데 남자의 외형이며 XXY이다. 다만 염색체와 실제 성 행동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동성애자를 상대로 호르몬 실험을 한 결과 호르몬 치료를 해도 성 정체성이 바뀌지 않는다는 게 증명되면서 선천적으로 형성된다는 이론이 큰 타격을 입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후천설이 설득력을 얻어 존 머니의 주장은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더불어 남녀의 차이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이라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케이트 밀럿(Kate Millett), 앨리스 G 사전트(Alice G. Sargent) 등이 라이머 사례를 자신의 책에 인용했다.

이러한 머니의 치료법에 따라 라이머는 고환, 음낭 등 다른 성기를 다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뒤 여자로 길러지고 이름도 브렌다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존 머니는 성공의 약속에 눈이 멀어 과학자로서 갖춰야할 본분을 잃고 말았다. 데이터를 자신의 의도에 맞게 끼워맞추고 보고 싶은 것에만 주목했다. 예컨대 어린 브렌다에게 “어떤 원숭이가 되고 싶은지” 물었는데 “여자(girl)”라고 대답했다고 논문에 적었지만 사실 브렌다는 “고릴라”라고 대답했다. 또 존 머니는 브렌다를 여자로 기르기 위한다는 이유로 10살도 안 된 아이한테 임산부의 분만 같은 성인도 보기 힘든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당연히 브렌다는 이런 주치의를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초등학생도 안 된 애한테 성별 구분을 주입식으로 세뇌하려 들었고 성형 수술을 강권했으며 브라이언까지 끌어들여서 쌍둥이 간에 남녀의 성관계 장면을 모사하도록 하였다.[12] 존 머니가 비록 페도필리아 범죄자는 아니었지만[13] 머니의 이런 치료법은 세상 누구에게 들려주더라도 아동 성범죄를 떠올릴 만한 것이었으며 브렌다와 브라이언 역시 그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런 실상을 아이들의 부모에게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2.3. 끔찍한 실험의 결말

존 머니는 실험의 실상은 감춘 채 과학계에 성공적으로 여자로써 길러지고 있다고 속이는 연구부정행위까지 일삼았다. 존 머니는 신생아 때 성전환수술을 받은 ‘남자’아이가 별탈없이 ‘여자’아이로 자라고 있다는 식으로 이 쌍둥이의 사례를 선전했으며 이 사례를 발판으로 세계 성의학계의 권위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여자로 길러지고 있다고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브렌다가 계속해서 남성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었고, 존 머니는 이 사실을 학계에 철저히 숨겼다.

하지만 성 정체성이 양육에 의해서 증명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 실험 결과를 정설로 받아들였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인용하였다. 아이러니하지만 동성애자 전환 치료 프로그램의 이론적 토대 중 하나를 마련한 셈. 물론 동성애자 전환 치료는 이전부터 각종 사이비 이론이나 검증되지 않는 학설까지 동원되면서[14] 행해지고 있었으며[15] 존 머니는 호모포비아는 아니긴 했지만 그의 제자들(대표적으로 케네스 주커 박사)이 존 머니의 학설을 변용해 어렸을 때부터 여성적인 성향을 보이는 남자아이를 상대로 교정하면 트랜스젠더동성애자가 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전부터 인터섹스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거나 전쟁 중 독일 인구통계를 분석하거나 를 대상으로 실험하여 성 정체성이 선천적으로 형성된다는 결론이 나온 논문이 다수 나왔고 존 머니 박사의 라이벌인 밀턴 다이아몬드 박사도 존 머니의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이는 묻혀 버리고 말았다.

머니 박사의 주장과 달리 '브렌다' 라이머는 완전한 '여자'가 되지 못했다. 라이머의 '여성화'를 위한 호르몬 치료와 교육은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브렌다는 극심한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브렌다 라이머는 이미 유아기부터 남자아이처럼 군대놀이나 칼 싸움을 하면서 노는 걸 좋아했고 인형놀이드레스 입기 같은 여자아이의 놀이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동생인 브라이언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화장실에서도 서서 소변을 보는 등 남자 같은 행동을 보였다. 부모는 브렌다를 여자아이로 교정시키려고 했지만 당연히 별 효과가 없었으며 성적 미달로 인해 초등학교에 겨우 입학할 정도였다. 브렌다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남자 같은 행동을 보였으며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더욱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브렌다는 자라면서 친구가 거의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선머슴 같은 행동거지 때문에 따돌렸고 반대로 남자아이들 사이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끼지 못했다. 모두가 '그녀'를 조롱하고 원시인이라고 불렀다. 안 그래도 이랬던 브렌다의 정신상태는 머니 덕에 더욱 빠른 시일 내로 자살할 것 같은 처참한 지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비록 고환은 없었지만 난소도 없었던 브렌다가 사춘기에 접어들며 남성적인 생김새를 갖게 되자 머니는 자신의 환자였던 트랜스여성을 동석시킨 상담에서 호르몬 요법과 수술을 강권했다. 영아기에 하기엔 몸에 부담이 큰 데다 인공 질을 만들 만큼 몸이 커지지도 않아서 못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을 만들면 평생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질확장(다이얼레이션, dialation)을 매일 해야 하는데 성행위가 뭔지도 모르는 꼬마가 뭘 어쩌겠는가? 이런 이유로 소아 성 전환에 긍정적인 의견을 보이는 의료인도 성장판이 안 닫힌 어린이에 대한 성기 수술은 몸을 키우고 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한다. 여담으로 포경수술은 트랜스여성의 질 재건 성형에 있어서도 나쁘면 나빴지 좋을 것은 전혀 없다. 성전환 수술 문서 참조.

브렌다는 몸이 여자처럼 변해 간다는 스트레스를 감내하고 잠깐 여자처럼 하고 다니기도 했지만 놀림만 받았으며 유방이 나오기까지 하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브렌다는 부모에게 "나 머니 다신 안 봐. 또 만나라 하면 죽어버릴 거야!"라는 일갈을 날렸다.

브렌다는 13살에 사춘기가 되었을 때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어머니 자넷이 회상하길 브렌다가 소녀로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매우 반항적이었고 남성적이었으며 어머니도 여성스러운 것을 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 결국 부모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엄마는 브라이언을, 아빠는 브렌다를 옆에 두고 사실을 알려줬다. 브라이언은 크게 충격을 받고 울분을 토했지만 브렌다는 아빠가 사준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내리도록 가만히 있었다. 14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원래는 남자아이로 태어났다는 아버지의 고백을 들은 라이머는 이렇게 반응했다고 회상했다.
예전부터 쭉 이어지던 건 별로 없었어요. 난 내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모습과 얼마나 다르게 느끼는지, 또 실제로 얼마나 다른지도 알기 시작했죠. 그래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습니다. 나는 내가 괴물이나 뭐 그런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마음이 놓였어요. 그제서야 모든 수수께끼가 해결된 듯한 심정이었어요. 난 돌연변이가 아니었어요. 미친 것도 아니었고요.#
파일:0_GD167713.jpg
18세의 데이비드 라이머

이후 브렌다의 부모는 그녀를 존 머니에게 데려가는 것을 중단했다. 그리고 14세의 브렌다는 데이비드[16]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지적 능력 감퇴, 집단따돌림, 온갖 종류의 반항 등으로 흑역사가 된 어린 시절을 뒤로 하고 남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자 다행히 삶의 즐거움을 얻었다고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다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트랜스남성의 음경 형성 수술을 생각하면 된다. 단, 라이머는 애초에 불의의 의료사고와 미친 실험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평범한 시스젠더 남성으로 살아갔을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경우는 성전환 수술보다는 성을 바로잡는 수술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17]

남자로서의 삶이 이전의 삶에 비하면 양반이긴 했지만 육체적으로는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 라이머는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맞고 양쪽 유방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뒤 몇 주에 걸친 엄청난 통증에 시달렸다. 처음 기본적인 수준의 음경을 만들고 나서는 후유증으로 수술 받은 첫 해 열여덟 번에 걸쳐 입원했으며 이후 3년 동안 주기적으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신체적 고통뿐이 아니었다. 새로운 성별로서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짧은 16년의 생에 걸쳐 만들어 온 인간관계를 모두 버려야만 했다. 만들어낸 음경으로는 삽입 성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항우울제를 삼키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성기능을 할 수 있도록 개발된 새로운 형태의 음경을 달기 위해 세 명의 외과의로부터 열세 시간에 걸친 두 번째 음경 성형술을 받고 오랜 회복기를 거쳤다.#
“의사는 말했어요. “(질을 시술받아 여자로 살지 않으면) 삶이 힘들어질 거야. 부당한 괴롭힘을 당할 거고, 너무 외로워질 거고, 옆에 아무도 없게 될 거야.” 난 스스로에게 되뇌었어요. 아시다시피 그 당시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그들 생각에 그게 내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 여긴다면 이 사람들은 꽤 얄팍한 치들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죠. 사람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윤택한 삶을 사는 단 하나의 이유가 다리 사이에 달고 다니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말이에요. 그게 나에 대해 생각하는 전부라면, 나의 가치가 내 다리 사이에 있는 것 때문에 정당화되는 것이라면, 나는 완전한 실패자가 되겠죠.”#

문제는 한 남성의 삶을 망가뜨려 놓은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 내내 이것이 다른 환자의 치료 기준으로도 널리 쓰였다. 데이비드 라이머가 남성으로 살기 시작한 뒤에도 진실을 모르던 의사들은 무려 17년을 더 막 탯줄을 끊은 인터섹스 영아나 왜소음경, 총배설강뒤집힘증 등의 환자에게도 '브렌다'의 이야기를 믿고 강제로 성전환 수술을 시켰다. 추가로 트랜스젠더, 동성애자도 그 이론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파일:md-jane-david (1).jpg
밀턴 다이아몬드(Milton Diamond)[18]와 데이비드 라이머[19]

결국 존 머니의 미친 실험은 브렌다의 근황을 궁금해하던 다이아몬드 박사와 운동가, 학자들에 의해 1990년대 초반부터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하였고 1997년에 언론에 의해 대대적으로 폭로되었다. 데이비드가 거의 30살이 되었을 때 그는 하와이 대학교의 밀턴 다이아몬드 박사를 만났다. 다이아몬드는 항상 유명한 쌍둥이의 운명에 대해 궁금해했는데 특히 머니가 1970년대 후반에 후속편 출판을 불가사의하게 중단한 이후 더욱 그러했다. 다이아몬드를 통해 데이비드는 자신의 성전환의 '성공'이 성기 손상과 성기가 손상된 유아 등이 광범위하게 성전환 수술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분노한 데이비드는 '아카이브 오브 소아과와 청소년 나(Archives of Pediatrics and Youthenment Me)'에 실린 '신화를 뒤흔드는 논문'(키스 시그먼드슨 박사와 공동저자)의 후속작에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다이아몬드는 1997년 3월 키이스 시그먼드슨 박사와 공동저자로 소아청소년의학 연구소에 논문을 발표해 전 세계 1면에 실어 라이머의 이야기를 폭로했다.

이후 1998년 기자 존 콜라핀토가 롤링 스톤에 ‘존/조앤의 실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기고해 라이머의 사연을 폭로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라이머의 고통스러웠던 인생뿐 아니라 사건의 은폐를 둘러싸고 의학계에서 벌어진 추문을 폭로한 이 기사로 콜라핀토는 2000년에 전미잡지편집자협회상 보도 부문을 수상했다. 이후 라이머는 자신과 같은 의료 사고와 끔찍한 실험을 막기 위해 콜라핀토와 협력해 자신의 삶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20]

이하는 책 <As Nature Made Him: The Boy Who Was Raised as a Girl> 발매 당시 학자들과 언론들의 반응이다.
의학계의 교만과 학파 간의 알력, 성에 대한 상식을 짓밟은 이데올로기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은 한 어린이의 의지와 용기를 담은 매우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이자 증언이다.
데보라 태넌(조지타운 대학교 언어학과 교수), 2000년#
진주가 달린 분홍색 옷을 강요당한 공격적인 아이, 실패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깡패 같은 의사, 죄책감에 산산조각이 난 가족, 데이비드의 용감하고 믿기 힘든 성공담[21]은 오늘날 심리학 이론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엄청나게 틀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피플 매거진, 2000년#

그리고 BBC추적 60분인 <Horizon> 제작진은 북미 과학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라이머의 이야기를 온 세상에 구체적으로 공개했고 머니와 그의 주장에 근거한 심리학/정신의학 이론들은 몰락했다. 그런데도 머니는 늘그막에까지 자신이 맞다고 뻗댔다는 게 유머. 물론 다큐멘터리 엔딩에 나오듯이 제자를 비롯한 일부 학자는 "우리가 그 시절에는 아는 것도 의학 기술도 없었다. 그래도 모르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정도의 비루한 실드에 그치는 편이었다.

데이비드 라이머가 겪은 끔찍한 실험을 적은 보고서는 여러 의료 관행이나 성별 생물학에 대한 현재의 이해에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이 사건은 왜소음경, 다양한 희귀 선천성 기형, 유아기에 음경 손실을 얻은 명확한 XY 유아가 성전환 수술을 하는 사례를 빠르게 줄였다고 한다. 앞으로 이런 끔찍한 짓이 반복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영어 위키백과 문서, 데이비드 라이머의 유산

2.4. 말년

파일:david-reimer-and-his-wife-jane.jpg
파일:david-reimer-posing.jpg
이후의 데이비드 라이머
"You also see people gonna say now that David Reimer's case could have been successful, um... I'm living proof. And if you are not gonna take my word as gospel because I have lived through it. Who else is gonna listen to? Who else is there? I have lived through. Like, is it gonna take somebody do end up killing themselves, shooting themselves in the head, because people don't listen?"
"데이비드 라이머의 사례가 성공적일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음... 제가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그 사례를 겪었는데도 제 말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가 제 말을 들을 것입니까? 어느 누구가 있는데요? 제가 그 사례를 겪었는데요.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고 누군가가 머리에 총을 쏴서 자살이라도 해야 받아들일 것입니까?"
데이비드 라이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불행히도 이후에도 라이머는 험난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얼굴은 상당히 잘생긴 청년이었지만 트랜스젠더나 다름없는 몸이라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다가 무슨 일을 겪게 될 지 알 수 없었으니 적극적인 연애는 언감생심이었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평생 결혼을 못 할 것이라고 믿었고 이에 대해 우울해했다. 그는 20대 초반에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이후 도축업 등 여러 직업들에 종사했다. 다행히도 1990년에 홀로 여러 딸을 키우던 미혼모 제인 폰테인(Jane Fontane)과 결혼했지만[22] 30대 후반에는 실직[23]과 동생 브라이언의 죽음으로 인해 힘들어하였다.

그의 동생 브라이언도 허구한 날 브렌다만 신경 쓰는 부모님의 상대적인 무관심으로 인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진실을 안 후에는 브렌다 본인보다도 훨씬 큰 충격을 받아서 비뚤어졌다. 결국 조현병 진단을 받고 정신과 약으로 버티는 신세가 되었으며 항우울증 약물 과다 복용으로 2002년에 사망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죽음은 데이비드에게도 너무나 큰 슬픔으로 다가오면서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다. 2003년 가을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를 당하여 6만 5천 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잃기까지 했다.

이후 데이비드는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폭발하는 분노, 주기적인 우울감,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살기 쉽지 않았다. 동생의 사망으로 데이비드가 나태와 절망에 빠져들자 아내는 2004년 5월 2일 주말에 자신들이 당분간 헤어져야 한다고 말했고 데이비드는 집을 뛰쳐나갔다. 이틀 후 제인은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그들은 데이비드를 찾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위치를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시간 후 제인은 또 다른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경찰이 그녀에게 데이비드가 사망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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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라이머의 묘소

결국 데이비드 라이머는 2004년 5월 4일 거주하던 마을의 마트 주차장에서 소드 오프 샷건으로 자살을 감행해 향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24]당시 캐나다 뉴스 위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데이비드는 생전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 결국 자살까지 할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즉 자신의 말이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된 것이다.

3. 실험의 배경

이들이 활동했던 20세기 중반(1960년대 전후)의 의학계, 정확히는 학문계 전반의(인문/과학 불문하고) 윤리적 결여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단 의학계만 보아도 전두엽 절제술 따위의 전혀 치료라고 볼 수 없는 악마적 행위가 무비판적으로 실행되었고 심리학에선 연구윤리가 씹히고 실험 참여자들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안겨준 밀그램의 복종 실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 다 이 시기에 수행되었다.[25] 우생학에 매달려 유대인가스실에 보낸 집단 나치 독일이 등장하고 진지하게 사회진화론제국주의, 전체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쇼비니즘 따위에 매달려 세계 역사상 최악의 전쟁인 제2차 세계 대전을 벌인 지 고작 10~20년 정도 지난 시점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연구나 학문의 성과 이전에 연구 과정에서의 윤리성이 더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다 이렇게 애꿎은 피해자들이 상처받고 희생된 비극이 과거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간단한 심리학 실험 하나만 하려고 해도 일반적인 연구 절차에 더해 윤리적 절차까지 포함되어 매우 복잡해졌으며 실험 과정이 비윤리적일 경우 아무리 대단한 연구를 수행해 성과를 얻었다고 해도 학계에서 철저하게 매장당한다.[26]

단순히 의학계의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신경과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디크 스윕에 따르면, 당시 학자들은 사회 구조를 인위적으로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개념에 심취했다고 한다. 인간은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미래를 꿈꾸었고, 사람들의 입맛에 너무 잘 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연구결과나 동물실험 등 의문이라도 제기할 법 한 논문들은 계속 나오고 있었지만, 이런 사례쯤은 옥의 티로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브루스의 실험은 애초에 제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브루스는 열네 살 때부터 남자로 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가족이 틀어막아도 남성성을 고집했고, 아예 데이빗으로 개명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학계가 뒤집혀 치료를 받은 시기는 1997년으로, 브루스는 무려 17년 동안이나 고통받아야 했다. 기자였던 톰 울프는 이런 행태를 보고 '급진 좌파적 취향'이라며 비판했으며, 지금도 몇몇 대학의 여성학과에서는 머니의 주장이었던 '성별의 사회적 형성'이라는 표현을 여전히 쓰고 있다.

4. 매체

2016년 영화 감독 피터 잭슨이 데이비드 라이머의 전기 영화를 만드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27]#
  • 생로병사의 비밀: 2007년 10월 16일자 "남자의 몸" 편에서 이 사건을 언급했다.
  • 시카고 메디컬(Chicago Hope): 2000년 미국의 의학 드라마로 시즌 6 13화에 이 이야기가 등장한다. 제목은 "Boys Will Be Girls".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5년 3월 1일자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 젠더 허물기(Undoing Gender):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로 데이비드 라이머가 언급된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번역됐다.
  • 차트를 달리는 남자: 2018년 64회 '억울한 의료사고' 차트에서 이 사건이 1위로 선정되었다.
  •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 여자로 길러진 남자 이야기(As Nature Made Him: The Boy Who Was Raised as a Girl): 라이머의 기구한 이야기에 대해 2000년 기자 존 콜라핀토(John Colapinto)가 쓴 저서다. 2002년 한국어 번역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뉴욕 타임스베스트셀러가 됐고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이 책의 수익의 절반은 데이비드 라이머에게 갔다고 한다. 라이머가 세상을 떠난 2006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개정판 역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라는 제목으로 2014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 나온 라이머가 말한 말 중 하나다.
    "자괴감이라면 이제는 신물이 나요. 그런데 절대 없어지질 않네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저 열심히 살아나가는 수밖에요.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잘못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게 아니야’ 이렇게 수없이 되뇌면서. 나를 위해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잖아요. 내가 되어야지.”(337쪽)
  • Boy: 데이비드 라이머의 인생을 그려낸 연극으로 2016년 초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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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mn of the Medical Oddity: 캐나다의 인디밴드 'The Weakerthans'의 노래로 데이비드 라이머에게 헌정한 것이다.[28]
  • Law&Order: SVU: 2005년 시즌 6 12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제목은 노골적으로 "Identity".
    {{{#!folding [ 내용 보기 (스포일러 주의) ]

    쌍둥이 중 여자로 살게 된 누나 린지가 성폭행을 당할 뻔하다가 성폭행범을 정당방위로 살해한다. 그런데 시체에 남은 살인범의 DNA가 남성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엉뚱하게도 쌍둥이 남동생이 성폭력 피해자 및 살인범으로 몰린다. 경찰이야 시체의 증거나 갱단 출신인 망자의 과거 전력만으로도 자신이 강간하려던 피해자에 의해 사망했음을 파악했기에 잘 타이르려고 하지만 남동생인 로건은 영문도 모르는 일이니 당연히 경찰의 추궁을 부인하고 오히려 린지가 성폭행에 관한 진술을 눈물로 읊어 댄다. 이렇게 되자 DNA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정당방위 살인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누나를 사주하여 진술을 강요한 꼴이 되었으니 잘못하면 진짜 살인죄로 콩밥 먹게 될 지경이라 형사들로서는 보통 골 때리는 일이 아니다. 헌데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부모가 쌍둥이를 성 관련 정신과 전문의에게 보내던 것이 밝혀지면서 상황이 막장으로 꼬이게 된다. 마치 사춘기에 접어든 쌍둥이가 근친상간을 저질렀고 부모는 이를 방조한 것처럼 오해받으면서 부모들까지 감방 갈 처지가 됐다.

    결국 이 미친 실험의 전말을 알아낸 형사들과 면담을 한 부모는 눈물을 숨기지 못하는데 해당 주치의는 모든 것이 밝혀졌는데도 뻔뻔스럽게도 희대의 실험이라느니 이 이야기를 책으로 내겠다느니 하는 헛소리나 지껄이며 극중 형사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을 상대로 어그로를 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 경찰 출신의 다른 정신과 의사[29]는 이를 밝히는 과정에서 (동생 걱정과 DNA가 남자 것으로 나왔다는 것 때문에 정당방위 진술서를 쓰면서도 혼란스러워하던) 린지에게 주치의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폭로하며 의료계에서 몇 번이나 퇴출당하고도 남을 심각한 월권행위를 저지르는 바람에 면허가 날아갔다. 이 장면에서 린지가 울먹이며 "내 원래 이름 뭐였어요?"라는 질문에 수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이는 린지의 모델인 데이비드 라이머가 진실을 듣고 처음으로 했던 말이었다고...

    린지는 투약하던 여성호르몬을 끊었으며 린지의 몸에 남은 호르몬이 몸에서 전부 빠져나간 후 쌍둥이 중 하나가 직접 주치의의 집에 찾아가 정신과 의사를 끔살한다는 결말로 에피소드가 끝난다. 둘 중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지문은 남기지 않았지만 주치의의 머리를 박살내고 침을 뱉어 놨기 때문에 둘 중 하나가 범인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둘이 작정하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은 데다 동생의 몸에서 여성호르몬이 전부 빠져나간 뒤라 유전적으로 동일인인 쌍둥이 중 누가 살인범인지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5. 여담

  • 현재까지도 성 정체성의 선천성 여부와 젠더간 성차에 대한 의견이 거론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타고난 성 정체성'이 있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후천적으로 교정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자주 인용된다. 성전환 수술이 많이 발전한 현대에도 이는 전혀 해결되지 못한 논란이다. 자식을 실제로 낳고 길러 본 부모들 중에는 아무리 어떠한 매체나 장난감을 보여주고 가지고 놀게 한다고 해도 남녀의 태생적인 차이는 바뀔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 라이머의 이야기를 폭로하고 그의 전기문을 쓴 기자 존 콜라핀토(John Colapinto)는 라이머의 인생에 대해 "인간은 누구나 각자 자신의 본모습을 지켜야 하고, 억압하고 조롱하고 억누르고 뒤흔드는 세상에 맞서 싸울 의무가 있음을 일깨워준다."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 데이비드 라이머는 “만일 어떤 여자가 사고로 가슴을 잃었다면 남자로 만들어야 하나요?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 라이머 형제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친 가해자인 존 머니는 본인도 늘그막엔 부끄럽긴 했는지 선후배, 동료들과는 이 케이스에 대해 입에 담기조차 꺼렸다고 한다. 그의 동료들에 따르면 존 머니는 그의 실패에 대해 개인적으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피해자인 라이머에게 사과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라이머 본인은 물론 그의 쌍둥이 동생까지 불우한 삶을 살다가 끝내 잇따라 자살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았음을 접하면서도 말이다. 물론 상술한 대로 잘못된 결과를 바탕으로 강제로 시술된 수많은 사람들과 그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을 의사들한테도 말이다. 머니는 끝까지 이 폭로 자체가 “남성성과 여성성이 유전자 단계에 새겨져 있어서 여자는 침대와 부엌에만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익안티페미니즘의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 종종 언급하는 것과는 반대로 정작 데이비드 라이머의 젠더 실험을 폭로한 밀턴 다이아몬드 교수는 신경과학적 연구를 근거로 트랜스젠더를 두뇌 인터섹스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이름이 "브루스 라이머(Bruce Reimer) → 브렌다 라이머(Brenda Reimer) → 데이비드 라이머(David Reimer)"순으로 바뀌었다.[2] 어렸을 때보다 야위었다.[3] 생후 8개월까지의 이름이다.[4] 14세까지의 이름이다.[5] 학교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개인 교습을 받았다.[6] 부모가 메노파 소속이었다. 데이비드도 메노파 교리를 믿었는지는 불명.[7] 어머니 자넷 라이머와 데이비드의 생전 인터뷰가 기록되어 있다.[8] 참고로 존 머니는 뉴질랜드 사람이다.[9] 절단기에 전류를 흘려보내 절단 부위를 지져 혈관을 봉합함으로써 출혈을 막는 데 쓰이는 기구[10] '젠더'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인물이기도 하다.[11] 20세기 중반 존 머니는 성 정체성과 역할의 심리학에 대한 견해를 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학술 연구에서 젠더가 어릴 때부터 융통성 있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점 더 주류가 되는 아이디어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12] '교미와 삽입’ 따위의 포르노 사진들을 보여준 것은 물론이고 이들 쌍둥이 중 브렌다를 사무실 소파에 엎드리게 하고 브라이언에게는 뒤로 가서 가랑이를 ‘누나’의 엉덩이에 대도록 하기까지 했다.[13] 다만 페도필리아를 옹호했다는 지적도 있다.[14] 예를 들면 전두엽 절제술, 호르몬 대체 요법 같은 것들이 있다.[15] 물론 그 때문에 많은 동성애자가 고통을 받아야 했고 21세기도 현재진행형이다.[16] 자신이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17] 사실 라이머 같은 경우가 아닌 진짜 트랜스젠더에게 행해지는 수술도 성전환 수술이 아니라 '성 확정 수술'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18] 미국의 하와이대학교 교수, 생물학자, 해부학자이다.[19] 가운데 인물은 데이비드 라이머의 배우자 제인이다.[20]전기문은 한국에도 번역됐다.[21] 여기서 데이비드 라이머의 이야기를 성공담이라고 표현했는데 당시 언론들은 데이비드를 '빼앗긴 어린 시절과 이를 용감하게 극복한 사람'으로 주목했다. 이 기사는 존 콜라핀토(John Colapinto)가 데이비드 라이머 본인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정리해서 책으로 출판했을 때의 나온 기사다.[22] 이 결혼은 데이비드의 남성성을 찾아 주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23] 그의 이야기를 쓴 책이 많이 팔려서 인세를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24] 무려 세 번째 시도였다.[25] 다만 조작 의혹이 있다.[26] 대표적으로 황우석만 해도 논문 조작이 밝혀지기 이전 줄기세포 연구 과정에서 난자의 채취 과정에 의한 윤리적 문제 때문에 크게 곤욕을 치렀던 일이 있었다. 그때는 황우석이 국민적 영웅이나 다름없었고 사실상 정부가 뒤를 봐 주었기 때문에 민관의 지지를 받아 넘어갔지만 이후 연구의 일정 부분에서 조작이 있었음이 밝혀지자 큰 파장과 함께 완전히 몰락했다.[27] 피터 잭슨은 2000년대부터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라이머의 전기문 'As Nature Made Him'의 영화 판권을 사기도 했다.[28] 데이비드와 같은 위니펙 출신이다.[29] 아내와 별거에 들어간 남자 주인공 엘리엇 스테이블러와 은근히 을 탄다.[30] 7~80년대에 데이비드 라이머는 현대 의학 사상 가장 유명한 환자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실명이 공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