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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 성왕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2. 즉위 초기
정확한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무령왕의 아들이라지만 즉위 기사의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른 부분에서 장남이라면 으레 들어가는 원자(元子), 장자(長子) 같은 표현이 없고, 그냥 아들(子)이라고만 되어 있어 장남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성왕의 장남이 확실해보이는 위덕왕이 《일본서기》의 백합야 전투 당시 나노리 기록상 553년에 29세였으므로 525년생인데, 전근대에는 장남을 보통 10대 후반~20대 초반에 얻었으므로 역산하면 아버지인 성왕의 출생 연도는 500년대 초반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1]즉, 성왕은 461년 혹은 462년생인 아버지 무령왕이 40세를 전후해 늦게 얻은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2]
523년 음력 5월,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523년 음력 8월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을 보내 물리쳤다. 524년 양나라(梁)와 국교를 더 긴밀히 하여 양무제로부터 '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을 책봉받았다.
525년 음력 2월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526년 음력 10월 수도 웅진성을 수리하고 수성하였다.
그런데 529년 음력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친정을 감행, 군대를 이끌고 침입해 들어와 기어이 북쪽 변경에 있던 혈성이 함락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성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을 내려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군에 맞서 싸우게 했고, 이에 오곡원(五谷原)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2,000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등 패하고 말았다. 그 후 고구려에게 추가적인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기까지 한 것은 덤.[3][4] 결국 무령왕 이후 한동안 소원해져 있던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해 고구려의 남진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후 고구려는 안장왕의 승하로[5] 전성기가 끝난 후 그 뒤를 이은 안원왕의 재위기 말엽 때 벌어진 추군과 세군 간의 내전을 필두로 하여 내부의 혼란이 가속화되었고, 이 덕택에 성왕은 마음놓고 내정 개혁, 가야 방면 진출, 한강 유역의 수복을 시도할 수 있었다.
3. 사비 천도
백제의 도성 및 궁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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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위례성[a] | 하북위례성[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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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tablebgcolor=#fff,#1f2023><tablewidth=100%><bgcolor=#008080> 사비백제 ||
사비성 | 별도 금마저 | |
부소산성 / 관북리 유적 | 부여 나성 / 청산성 | 왕궁리 유적 |
||<tablewidth=100%>[a] 어떤 성곽이 위례성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
||<tablewidth=100%><tablebgcolor=#008080> 백제의 왕릉 ||
}}}}}}}}} ||동성왕과 무령왕이 웅진백제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온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하여 재위 16년(538년)에 사비(泗沘)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기존 수도였던 웅진성(熊津城)[6]은 계획된 수도 선정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침으로 위례성을 빼앗기고 외부 세력에 내쫓기는 형태로 문주왕이 천도한 것으로 전시수도ㆍ임시수도의 성격이 다분했다.
위성 지도로 공주 공산성 주변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주변 산세와 강줄기가 침략을 방비하기에는 도움이 되지만[7] 터가 좁은 편이라서 오래 쓸 나라의 중심지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 사비성(泗沘城)[8]은 부지가 넓고, 기존 수도였던 웅진성과 멀지 않았기에 성왕의 철저한 계획 하에 천도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비 천도는 왕권과 국력 강화 정책의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비 천도에는 사비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 사택씨, 沙宅氏) 가문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사비 천도 후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여 부여의 정통 후손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이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와의 경쟁 의식에서 비롯된 걸로 추정된다. 백제가 부여 정통이라면 고구려는 곁가지라고 간접적으로 아래에 두는 뉘앙스가 있다. 남부여 국호는 부여 의식에 공감을 못한 백제 주류 귀족들의 의지 때문에 성왕 사후 백제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비성이 현대에 부여군으로 불리다는 걸 감안하면 남부여의 흔적은 남긴 셈이다.[9]
하지만 백제는 고고학적으로 2세기 고구려에서 분기한 임진강 고구려 세력권이 3세기 한강 이남으로 내려가 토돈분구묘 세력과 연합해 한성백제를 세웠고 해당 고구려 세력권은 고구려 문화만 확인될 뿐 부여 문명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백제의 부여 후예 주장은 고구려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한 프로파간다로 보고 있다. 고구려가 부여에서 분기되었음에도 부여를 상대로 정통성을 내세우고자 고리국 주장을 했지만 부여가 무시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상황이라고. 고고학적으로 부여는 고리국에서 갈라졌다가 역으로 병합했고, 고구려도 부여를 상대로 갈라졌다가 역으로 병합한 걸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역사는 반복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고구려와 백제는 당나라와 신라에게 사이좋게 망했지만.
4. 여러 나라들과의 교류
아버지 무령왕 때처럼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사(畵師) 등을 초빙하고, 《열반등경의》(涅槃等經義)를 수입하여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그리고 미륵 신앙을 이용해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면서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또한 성왕은 인도로부터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하여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시키고, 아울러 담욱(曇旭)·혜인(惠仁) 등이 지은 《율소》(律疏) 30권에 친히 《비담신율서》(毗曇新律序)를 써서 백제 신율을 성립시켰다. 성왕의 이러한 계율의 장려는 불교 교단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왜에 파송하여 석가 불금 동상 1구, 번개(幡蓋)[10]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보내어 줌으로써 왜에 불교를 전파했다. 이밖에도 성왕은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함으로써 왜에 대한 선진 문물의 전수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5. 중앙 관제 및 지방 통치 조직 정비
이와 더불어 사비 천도를 전후하여 웅진 시대 이래 행해졌던 내•외관제를 정비하여 지배 체제의 정비와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 관제로는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 및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또 왕도의 통치 조직으로서는 수도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의 5부(五部)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 5항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지방 통치 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檐魯制)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개 ∼ 10개의 군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런 관제 및 지방 통치 조직은 북위와 양(육조)의 제도를 참고하였을 것이다.
여튼 이렇게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 운영에 있어서 귀족 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6. 외교와 국방
성왕은 국제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온 신라와의 나제동맹 관계를 꾸준히 이어나감으로써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했다. 그리고 아버지 무령왕 때처럼 양(육조)과 왜국과의 외교 관계를 지속하는 한편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 교류 역시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성왕은 549년 10월에 양나라에 조공을 보내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당시 양나라는 대란을 일으킨 갈족 장수 후경(侯景)에 의해 무제 소연(蕭衍)[11]이 시해당하고, 3남인 간문제 소강(蕭綱)이 옹립된 상태였다. 거기에 후경 본인은 상국(相國)이라는 고위직에 올라 양나라 조정을 자신의 입맛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백제의 사신들은 도성 건강에 도착하고 나서 황폐하고 허물어진 궁궐을 보고 모두 소리를 내어 울었는데 이를 본 양나라 백성들도 나와서 곡을 했다. 후경은 이에 크게 노하여 시중(侍中) 왕위(王偉)에게 명해 이들을 모두 잡아들이게 하였고, 사신들은 후에 진패선(陳覇先)[12]과 왕승변(王僧辯)이 후경을 토벌한 뒤에서야 본국인 백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백제가 양나라에 보낸 마지막 사절단이 되었다.성왕은 550년 1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도살성(충북 제천)을 점령했다. 그러나 두 달 후인 3월 고구려는 반격을 개시하여 백제의 도살성과 인근의 금현성을 침공해왔다. 고구려는 금현성을 함락했고, 이어 도살성도 함락 위기에 처했다. 그때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의 원군이 왔고 신라군의 활약으로 고구려군은 패퇴했다.
신라군은 패퇴하는 고구려군의 뒤를 쫒아 강원도 일대의 고구려 영토를 전격 침공했고, 이에 백제군도 경기도 지역 고구려 영토를 침공했다. 백제는 북진하여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남평양'[13]을 빼앗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손아귀에 넣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강역에 편입시켰다.
백제의 6군과 신라의 10군 추정 위치 |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서기 551년,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서기 551년,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이 해(551년)에 백제 성명왕이 친히 백제의 군사[衆]와 두 나라【두 나라는 신라와 임나를 말한다.】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한 진군하여 평양(平壤)을 쳤다. 모두 6군(郡)의 땅은 고지를 회복한 것이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12년 백제의 성명왕이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차지하고 평양을 침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12년 백제의 성명왕이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차지하고 평양을 침
6.1. 웅진회의 및 사비회의(1차 541년, 2차 544년)
연맹설에 근거하여 제작된 가야의 지도 |
반파국(대가야, 현 경상북도 고령군) 등을 위시한 가야 연맹을 사비회의를 통해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기 시작했으며 왜왕 말도 안 듣는 왜인 오미노 케누(近江毛野)가 탁순국(현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횡포를 부리자 그를 격퇴해주는 대신 가야 남부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아 탁순국은 물론 가야 연맹 No.2인 안라국(아라가야, 현 경상남도 함안군)을 무력화시켰다. 《일본서기》 543년조에는 임나의 하한(下韓)[14]에 있는 백제의 군령(郡令, 군장이라는 뜻)과 성주(城主)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가야의 일부 지역까지는 백제가 직할 통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왕은 가야 소국의 사신들을 초청해 사비회의를 열어 신라의 진출로 위협받는 가야 소국을 백제가 보호해 줄 것이라고 선언하고 선물을 뿌렸다. 이후 안라국이 신라에도 접촉을 시도하는 정황이 포착되자 신라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회유와 협박을 하는 등 가야 소국들을 철저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신라는 가야의 일부인 탁기탄, 탁순국, 구야국을 먹는데 성공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가야 지역은 성왕의 영향력 하에 놓였다.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백제의 간섭까지 받게 된 안라국은 왜인을 매수해서 백제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도 쳐보고[15] 나중에는 고구려와 은밀히 손을 잡기까지 했으나 당시 고구려는 전성기가 다 끝나고 귀족들 간의 내전으로 약화된 상태라 동예인까지 모아온 고구려군을 독성산성 전투에서 나제동맹군이 크게 깨뜨리기도 했다. 이 때까지는 진흥왕도 수천 명의 원군을 보내주는 등 나제동맹이 아직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 이 사건 이후 가야는 백제의 속국으로 전락해 한강 유역 공격과 관산성 전투에서도 백제의 우군으로 동원되는 등 철저히 백제를 돕게 되었다.
6.2. 신라와의 미묘한 관계
548년 독성산성 전투에서 동맹국인 신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백제는 이후 신라와 미묘한 관계를 이어갔다.자세히 말하면 일단 독성산성 전투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성왕은 550년 1월,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해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3월, 보복에 나선 고구려가 금현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될 위기에 처했으나,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이 도착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다시 말해서 백제는 대고구려 전선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있었으나, 이는 사실상 동맹국 신라에게 의존한 결과였던 것이다.
고구려군이 물러나자, 이사부는 고구려의 재침에 대비해 1,000명의 군대를 금현성과 도살성에 주둔시키고, 성을 증축했다. 다시 말해서, 도살성과 금현성이 자연스레 신라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성왕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전혀 클레임을 넣지 않았는데, 독성산성 전투 및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 관련 기록이 보여주듯 당시 백제가 단독으로 고구려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음으로 신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16] 오히려 신라가 연속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할 정도로 강성해져 있었다.
이듬해인 551년, 돌궐(튀르크)의 침략을 받은 고구려의 남쪽 방비가 허술해진 기회를 노려 백제와 신라는 함께 한강 유역을 공격했고, 그 결과 신라는 한강 상류를, 백제는 하류를 차지하여 백제는 잠시나마 위례성이 있었던 고토를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상류를 차지한 신라가 서진해서 하류까지 모두 먹게되면서 백제의 고토 회복도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진흥왕 순수비를 통해 진흥왕이 고구려와 밀약을 맺어 신라가 함경도 방면의 북진을 포기하는 대신 한강유역을 차지하기로 밀약했다는 학설도 있다.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서 하류 유역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백제가 자체적인 사정으로 불가피하게 스스로 한강 하류를 포기했고, 신라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군대를 몰아 한강 유역 전부를 차지했다는 설도 있다.
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이 해(552년)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일본서기》<흠명기>
일본의 사서 《일본서기》는 《백제신찬》 등 백제 사서를 직접 인용했기에 이 시기 역사를 알아보는 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대놓고 백제가 한강 유역을 포기했고, 신라는 그냥 그걸 낼름 먹었을 뿐이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이 해(552년)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일본서기》<흠명기>
《삼국사기》에서도 한자의 미묘한 의미 차이지만, "백제 동북을 취(取)했다"라고 쓰고 있다. 참고로 <성왕 본기>, <진흥왕 본기>의 다른 부분에서 백제나 신라가 뭔가 공격해서 빼앗을 때는 '공취(攻取)', '침(侵)' 자를 썼다. '가지다'와 '치다', '침범하다'는 같은 상황에 쓰일 여지는 있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백제의 한강 유역 포기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임용한[17]인데, 그 이유로 3가지를 든다.
- ① 북쪽의 고구려와 동남쪽의 신라 양면에서 압박을 받게 되는 점
- ② 신라는 고지대인 남한강의 상류를 차지하여 백제에 비해 군사적으로 유리한데, 백제가 이러한 지리적 불리함을 상쇄하고 전술한 양면 압박에 대비해 많은 군사력을 한강 유역에 집중하면 수도 사비성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점
- ③ 옛 수도였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면 부여씨 왕권이 강화될 것을 우려해 충남 지역에 연고를 둔 백제 귀족들이 한강 유역 사수에 부정적 입장이었으리라 짐작되는 점[18]
노태돈, 송호정, 주보돈 등이 2019년 공동집필한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에서는 '백제의 포기 후 신라 무혈입성'설이 실렸다. 즉, 고대사 대표 학자들도 한강 유역 포기설을 비중있는 학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성왕이 어쩔 수 없이 하류 지역을 포기했고, 이에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 전체를 차지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이 땅을 버려서 신라가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고 적혀 있고,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그 땅을 "빼앗다" 라고 하지 않고 거뒀다라고 표현해 전투가 없었음을 간접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전투의 결과라면, 수백 년간 이어진 백제와 신라 관계 역사상 최대의 영토 획득과 상실로 양쪽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전투일텐데 참전 장수나 병력 규모 등 구체적 내용이 양쪽 기록 어디에도 전혀 없다는 점도 이 설을 뒷받침한다.
임용한 교수의 주장은 대체로 군사 지리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삼국시대 당시 한강 유역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경시한 측면도 있다. 삼국시대에서 전성기의 기준을 한강 유역 차지로 볼 정도로 당시 한강 유역의 중요성은 컸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 최대한 연안 항해를 했던 당대에 한강 유역은 대중국 교류의 교두보였으며[19] 지금은 그렇게 안 보이지만 식량 생산량이 어마어마한 곡창 지대였다. 흔히 백제가 차지한 전라도에 한반도 최고의 곡창 지대 중 하나인 호남 평야가 있으니 백제가 한강 유역의 곡창 지대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당시 김제 만경 평야는 대부분이 뻘밭이라 본격적인 곡창 지대로 자리매김하기 전이었다. 한마디로 한강 유역은 지리적인 불리함을 감안하더라도 절대 백제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백제의 한강 유역 포기설의 2번째로 큰 근거[20]로 양면 압박을 받게 되어 방어하기 어려운 지역을 방어하려고 많은 군사력을 집중시키면 수도를 포함한 국가의 중심부가 위험해진다는 군사 지리적 문제점을 드는데 이는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한강 상류를 차지하여 고구려와의 전선이 백제보다 더 길게 형성되어 있었고 중심지인 경상도 지역이 백제의 중심지보다 한강 유역과 거리가 훨씬 먼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생기는 군사 지리적 어려움이 더욱 컸다고 볼 수 있다.[21]
그러나 백제의 한강 하류 지역 포기의 당위성은 충분하다. 한강 유역은 농업 생산력이나 외교 등 모든 측면에서 가치가 높아서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영토였던 것은 사실이나 유지할 국가적 역량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대중국 교류 측면에서 보면 물론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 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백제는 한강이 없으면 황해 진출이 아예 불가능한 신라와 달리 대체 경로로 당진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당시 항해 수준이 연안 항해 위주였으므로 백제로서도 한강 유역을 이용하는 것이 대중국 교류에 수월했겠으나 황해를 직접 횡단하는 것도, 고구려나 발해가 동해를 횡단해 일본 호쿠리쿠에 사신을 보낸 점이나 혹은 백제 멸망 당시의 13만 당군 상륙전을 보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반면 한강 유역을 이용한 대중국 연안 항해 경로가 아주 안전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초창기 연안 항해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경로는 한반도 서북 해안과 랴오둥 반도를 거쳐 산둥 반도로 가는 것이었는데 당시 랴오둥 반도와 서북 해안은 고구려의 영토였고 이후 경기/충남 해안에서 출발하여 장산곶을 거쳐 산둥 반도에 도착할 수 있게 될만큼 항해 기술이 발달했을 때도 역시 중국으로 가는 최단거리에 위치하는 장산곶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평양으로 가기 위해 산둥에서 오는 군대와 남쪽에서 바다로 올라오는 군대가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었으며 이 곳이 뚫리면 대동강 하구까지 쉽게 진출할 수 있어서 현재 북한도 이 곳의 방어 태세를 단단히 하고 있을 정도의 요충지므로 당시 고구려도 이 곳의 경계를 엄중히 했을 것이 분명하다. 종합하자면 대중국 외교를 위해 고구려의 방해 위험이 존재하더라도[22]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한강 유역을 이용해야 하는 신라에 비해 대체 경로가 있는 백제에게는 상대적으로 대중국 외교를 위한 한강 유역의 필요성이 떨어졌을 수 있다.
대고구려 외교 측면으로 보더라도 신라가 유리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의 양면전선 문제가 백제보다 덜했던 것이 고구려와 신라는 장수왕 중기까지만 해도 동맹국이었고 광개토대왕 시절 신라는 고구려에게 나라의 존속을 빚진 적도 있었다. 비록 적대국으로 돌아선 양국이었으나 서로 큰 원한을 진 원수 관계는 아니었다. 반면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가 서로의 국왕을 죽인 전적이 있는 원수였으므로[23] 고구려가 내부 사정과 북방의 문제로 영토를 넓게 맞댄 신라의 손을 잡고 이에 양면 압박의 위협에서 벗어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한다면[24] 백제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므로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유지할 수 없어서 철수했다는 주장의 당위성이 실린다.
군사적 측면에서 분석해도 신라의 우위이다. 소백산맥 부근에 위치한 신라의 성들은 백제의 중심부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 백제는 황해로 향하는 강들을 활용하여 한강으로 직접 들어가 빠르게 보급과 군사를 투사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 역시 불리해지면 상류의 고지대로 철수한 뒤 동남쪽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25] 방어하다가 증원군이 도착하면 다시 반격하고 백제 증원군이 오면 방어가 유리한 상류로 다시 올라가 방어를 준비하는 히트 앤드 런식의 유격전을 펼칠 수 있었으니 신라가 한강 유역에서 적극적 공세를 펼치지 못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반대로 한강 하류 일대는 곡창 지대였는데 이는 곧 평야를 의미했으므로 오히려 백제가 신라군의 공격을 받을 경우 방어선을 유지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계백이 괜히 5천 결사대와 함께 산성에서 버틴게 아니라는 걸 생각한다면 신라의 위치는 공격과 방어에 양측 모두에 유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점을 고려한다면 여러 산을 넘어와야 하는 신라의 지형 특성 상 보급은 다소 늦겠지만 공격과 방어 모두 불리한 백제군을 상대로 충분히 전술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제가 이런 불리함 속에서 끝까지 한성을 방어 혹은 공략하려했다면 백제는 아무리 빠르게 대군을 투입하고 보급을 이어줘도 끊임없이 손해만 강요받는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고 그간 대 고구려 전쟁 동안 인력과 물자를 대줘야했던 귀족들이 왕에게 포기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래서 성왕이 이러한 지정학적 불리함을 미리 파악하고 인명과 자원을 손실하기 전에, 귀족들로부터 볼멘소리 나오기 전에 미리 군사를 물려 힘을 응축하는 방법을 택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신라 역시 한강 하류 지역 방어가 여의치 않았다.'는 사실은 '백제가 신라와 비교해 한강 하류를 방어하는데 불리하지 않으니 백제가 자발적으로 한강 하류 지역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주장의 논거인데 그 말대로라면 신라의 선제 공격에 대한 당위성도 약해진다. 쉽게 말해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고 방어하는데 겪는 어려움이 백제보다 컸다면 신라는 이 지역을 공격해서 차지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럼에도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다는 것은 백제가 포기해서 전투없이 접수했다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 다시 말해서 백제가 한강 유역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신라보다 불리했거나 백제에게 다른 사정들이 추가적으로 있어서 물러났다는 주장의 신빙성만 높여주는 셈이다.
성왕의 복수 다짐을 신라의 선제 공격 근거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혈입성이라도 피는 똑같이 흘렸는데 동맹국이 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이익을 전부 차지했다는 사실에 백제 측에서 당연히 반감을 가질 수 있다. 오히려 성왕이 즉각 반격에 나서지 않고 진흥왕과 국혼까지 맺었다는 것은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를 탈취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더 힘을 실어주는 근거가 된다. 패전으로 영토를 빼앗겼는데 공주를 시집보내며 화친을 청하는 것은 자존심 문제를 넘어서 왕과 왕실의 권위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26]
당시의 나제동맹 지속 여부와 영토 분할 합의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문헌적인 확증이 없는 상황이라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한강 유역 영토를 백제가 하류, 신라가 상류로 나누기로 합의한 것도 초반 점령지를 가지고 추측에 의존해야 한다. 생산력이 높은 한강 하류의 가치가 상류보다 뚜렷이 높으므로 그런 일방적으로 손해인 합의를 신라가 사전에 했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영토 문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민감하여 가급적 확실히 해야 할 문제이므로 사전 합의도 없이 동맹을 맺고 전쟁에 임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양국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계산없이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따라서 한강 상류는 신라,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는 영토 분할 합의를 하기는 했는데 신라는 전술한 백제에 대한 군사 지리적 이점과 대 고구려 외교 여지를 앞세워 선제 공격을 하거나 백제가 스스로 포기할 경우 한강 하류를 접수할 계획을 미리 세우고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의 전쟁에 돌입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쨌든 이유가 전투에서의 패배이든지 자발적 포기든지 도살성과 금현성을 비롯해 한강 유역 전부를 신라가 차지하는 상황에 대해 성왕은 겉으로는 공주를 신라로 시집보내는 등 드러내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적잖이 들끓었을 것이 자명하다.
6.3. 관산성 전투 패배와 최후(554)
신라가 한강 하류를 그대로 집어 삼킨 이후, 성왕은 553년 딸 소비 부여씨를 신라 진흥왕에 시집보내며 나제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제스처를 취했다.[27] 그러나 이는 관산성 전투를 위해 신라의 경계심을 흐뜨려놓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같은 시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정월에 백제가 상부(上部)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왜에 보내 군대 파견을 요청하고, 이에 왜가 6월에 전쟁 물자를 백제에 보냈으며, 554년 초에도 구원군, 말,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 문물을 답례로 보내주는 등 뒤에서 관산성 전투의 실루엣을 남기고 있었다. 《일본서기》에서는 왜에 원군을 요청하고, 왜가 장병들과 무기들을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백제 왕실에서도 이 시기에 연합군을 편성하면서 전쟁 준비를 진행했을 것으로 점쳐볼 수 있다.
한편 당시 신라는 551년 진흥왕이 섭정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친정하게 되었고, 직후 진흥왕이 신라 조정의 세대교체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간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이사부 등 원로들을 2선으로 물러나게 하고 김무력 등 신진 세력을 기용하는 등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성왕은 딸을 신라로 시집보내 당시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던 신라 왕실과 조정의 내부 동향을 파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왕과 태자 창은 신라의 이러한 정권 교체기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던 듯 하다. 불패의 명장 이사부가 어이없이 퇴진한 가운데, 당시 신라군을 이끄는 장수들 역시 젊고 경험이 부족한 장수들인데다가 진흥왕이 무리하게 정권 교체를 단행하면서 군 내부 지휘 서열까지 꼬여버린 상황이었다. 당시 신라를 이끄는 진흥왕은 21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진흥왕은 후세에 명군으로 고평가를 받게 되지만, 이 당시 백제에게 진흥왕은 아직 아무런 업적이 없는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이에 554년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28] 태자 창(昌)의 강경한 주장을 받아들여 신라를 침공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정벌군에는 대가야와 왜의 원군도 합세했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400년 때랑 비슷하지만 신라는 이전처럼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관산성 전투의 경과 및 성왕이 죽음을 맞는 과정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본서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29]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30]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29]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30]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 >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 <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高干都刀}> ,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 왕 명농이 가랑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공격하여 성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4명과 연합군 29,600명을 참하고,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 왕 명농이 가랑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공격하여 성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4명과 연합군 29,600명을 참하고,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신라는 명왕(明王, 성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다른 이름은 谷智이다】에게 "고도는 천한 노(奴)이고 명왕은 훌륭한 임금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훌륭한 임금을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 의자)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머리뼈는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554)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 의자)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머리뼈는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554)
《일본서기》에는 일설로, 사로잡힌 성왕이 참수되었으며 몸은 백제로 돌아갔지만 그 목은 신라 왕궁 북청 계단 밑에 묻었다고 기록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유독 신라를 미워하는데, 사실은 《일본서기》가 백제의 관점을 그대로 자신들의 관점으로 바꿨다는 의혹을 가지게 만드는 점 중의 하나다. 성왕을 사로잡은 부대 지휘관이 금관가야계이며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金武力)이었다. 가문이 그야말로 백제를 배신한 원수였다. 문무왕도 김무력의 손녀 문명왕후의 아들로 외증손이고.
그러나 이 사건은 당대 백제의 유민들 사이에 돌던 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위에 옮긴 《일본서기》 기록부터가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본문은 구덩이를 파 묻었다는 것이고, 신라 궁전 계단 밑에 머리를 묻었다는 것은 '그랬다는 설이 어떤 책에 있다' 정도로 처리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보통 적대국의 최고 지도자를 사로잡은 경우 어느정도 대우를 해주는게 보편적 현상이었으며 설사 함부로 대하더라도 살려서 포로로 잡아두어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으로 전략적 이득을 취하는게 대부분이었다.[31] 세계사적으로 포로로 잡은 비무장의 왕을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는 기록은 백제의 성왕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 무엇보다 왕궁을 매번 다녀야 할 지배층이 소름 끼쳤을 테니 말이다. 또한 적국의 왕이라도 그렇게 대우를 하는 건 신라 스스로도 본인을 깎아내리는 격이었다. 당장 《일본서기》 기록만 봐도 성왕의 목을 베기 전에 일단 신라 장군이 절부터 올렸다. 적이라도 고대 사회의 국왕은 고귀한 혈통이었으며, 그러한 사람의 목을 계단 밑에 묻어서 아무나 밟도록 만들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신라가 귀족의 혈통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은 골품제로 이미 유명한 사실인데, 당장 성왕의 딸 소비 부여씨가 진흥왕에게 시집갔던 것과 같이 백제 부여씨 왕가와 신라 김씨 왕가는 서로 대등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 관산성 전투 기준으로 바로 얼마 전 일이었다. 다른 나라도 다 그렇겠지만 신라는 특히 골품제로 잘 알려져있듯 왕이 아무 가문하고나 혼인을 하지 않았다. 즉 성왕 일가를 신라의 성골이나 진골에 준하는 격으로 간주한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기록을 통해 백제가 신라를 원수로 여기게 되었고, 신라인들의 행위를 잔인하게 묘사하며 복수심을 불태웠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타소의 시체를 옥중에 파묻은 게 성왕에 대한 복수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고, 문무왕이 백제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운 원인도 '여동생을 옥중에 파묻어서'라고 전해지므로, 이러한 사건들이 쌓여감에 따라서 두 나라 간의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7. 사후의 정세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 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 대까지 어렵게나마 확립되어 가던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에서 다시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로 바뀌었다. 귀족들이 한사코 뜯어말린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성왕 본인과 태자가 강행했다가 왕은 전사하고 무려 30,00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으며, 어마어마한 피해까지 누적되었으니 어찌보자면 부여씨 왕권의 추락은 불가피한 결말이었다.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두 나라는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이는 삼국 후기 한반도의 역학 관계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다. 오히려 백제는 신라 타도를 기치로 내걸며, 예전부터 고국원왕과 개로왕 살해를 비롯해 서로 원한이 많았던 고구려와는 점차 화친, 나아가 동맹을 맺게 되었고,[32] 더 나아가 고구려는 그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던 백제의 동맹국인 왜와도 손을 잡기 시작했다.[33] 신라는 이러한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중국 통일 왕조인 수나라와 당나라에 친하려 하는 등 그 반대가 된다. 원래 외교라는 게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되는 것이 현실.
[1] 역사스페셜과 한성백제박물관은 성왕의 출생 연도를 504년으로 추정했다.[2] 무령왕의 즉위가 501년으로 딱 맞물리기 때문에 성왕은 무령왕이 왕자 시절에 결혼한 조강지처의 아들이 아니라 무령왕의 즉위에 일조한 공신 가문 출신 여성의 소생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역사스페셜은 성왕의 모친을 왕대비로 추정했다.#[3] 이미 백제는 무령왕 대에 들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성과를 내면서 점점 힘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안장왕이 왕위에 오른 뒤 백제에 맹공을 가하면서 다시금 수세로 전환되었고, 안장왕 사후에야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적극적으로 취하기 시작한다.[4] 그리고 학계에서는 동성왕과 무령왕 시기에 다시 한강 유역을 회복했으나 이때 안장왕의 침입으로 다시 고구려에게 내주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유난히 두 임금 사이의 기록에 한강 유역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나오고, 특히 안장왕과 <한씨 미녀 설화>에서는 백제가 지금의 한강 유역권인 경기도 고양시까지 태수를 두어 실효 지배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5]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장왕이 시해당했다고 하나 이 시기의 역사를 다룬 여타 국내외 사서들과 교차검증이 되지 않고 간접적인 암시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진실은 저 멀리에.[6] 오늘날의 충청남도 공주시.[7] 660년 백제멸망전 때에도 의자왕은 사비를 미리 떠나 웅진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려고 했는데 방어는 사비보다 웅진이 나았기 때문이다.[8] 오늘날의 충청남도 부여군.[9] 이 시기 백제의 지배층으로 떠오른 대성팔족 중 부여씨와 같은 남래(南來) 귀족은 진씨와 해씨뿐이고 목씨, 사씨, 백씨, 연씨, 국씨는 전부 마한 출신이라 부여 운운하는 백제 왕실의 프로파간다에 공감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왕실의 숙원이었던 북벌조차 공감을 못해 잘 도와주지 못한 마한계 귀족들이 평생 겪어보지도 못한 부여 운운에 공감했을 리가 없다.[10] 불교 의식에 쓰이는 도구로 '번(幡)'이란 세로로 늘어트린 깃발이며, '개(蓋)'란 불 보살의 위에 장엄하는 닫집, 일산(양산)을 가리킨다.[11] 후경이 반란을 일으킬 때 소연은 이미 86세의 고령이었고 그가 재위하는 동안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왕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양나라의 허술한 방비를 뚫고 도성 건강(建康)을 점령했던 후경은 소연을 감금하였고 먹을 것조차 주지 않았다. 한번은 소연이 후경에게 꿀물을 요구했는데 후경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연은 분노하며 쓰러졌는데 고령에다 지병까지 있어서 회복이란 불가능했고 얼마 못가서 아사했다.[12] 후에 소역(蕭繹)이 지정한 보정대신 중 한 명으로 호적수 왕승변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한 뒤 상국에 올라 황제를 겁탈하여 황위를 받아낸 인물이자 후에 진무제(陳武帝)가 되는 인물이다.[13] 南平壤 : 고구려에서 지금의 서울, 남양주를 이르던 말로 고구려 역시 한강 일대를 수도 평양 만큼이나 중요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14] 김태식 교수는 하한을 경상남도 남해군으로 비정했는데 남해군에는 2014년 백제계 유물이 출토되었다.[15] 《일본서기》에서는 임나일본부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임나일본부 식민지 경영설'로 악용되었기도 했고 '일본부'라는 용어 자체도 당대에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라는 등 문제가 있어 현대의 한국 학자들은 이 기관의 이름을 안라국에 머무는 왜인들의 기관이라는 뜻에서 임의로 '안라왜신관'으로 부르고 있다. 이 기관은 처음에는 왜왕의 입장을 대변했는데 언젠가부터 안라국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고 오히려 왜왕의 입장을 거슬렀다.[16]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성왕 초기의 기록이다. 무령왕 대에는 한강 유역을 탈환한 듯한 뉘앙스의 기록이 나올 정도로 그 위세를 회복했지만, 고구려 안장왕의 역공으로 큰 피해를 본 기록이 있다.[17] 다만, 임용한 교수는 고대사 전공자가 아닌 조선 정치제도 전공자라는 사실 또한 감안할 필요는 있다. 여전히 노태돈 등 한국 고대사의 대표 학자들은 신라의 한강 유역 탈취설을 지지하고 있다.[18] 한강 유역은 백제가 잃은지 오래인 땅이기 때문에 백제가 다시 국가의 영토로서 주권을 행세하려면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그들이 잘 정착할 수 있게 군사와 물자등이 지속적으로 투입돼야했다. 그런데 군사와 물자는 과연 누가 지원하는가? 바로 백제 조정에서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귀족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세상인 백제라는 나라가 망하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백제라는 나라가 근초고왕이나 무령왕 시기처럼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팽창하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즉 성왕을 비롯한 부여씨 왕족들이 아무리 고토 고토 노래를 불러도 귀족들의 찬동과 지원이 없다면 현실적인 측면에서 왕실의 힘만으로 한강 유역을 다시 영토화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19]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황해를 가로지르는 것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당시 항해술로는 굉장히 위험했다.[20] 가장 큰 근거는 사료에서 신라가 나제동맹을 배신했다는 기록과 한강 유역의 전투 기록이 하나도 없는 거다.[21] 연개소문, 의자왕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실제로 한강 유역을 방어하려고 많은 군사력을 집중한 신라는 선덕여왕~태종 무열왕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 양면에서 압박을 받아 많은 경상도 영토와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당하는 등 존망의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이 때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계마저 끊어지면 끝장이었으므로 국가의 중심부가 위태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강 유역을 사수한다.[22] 온군해 일화가 대표적으로 이를 드러낸다.[23]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백제는 개로왕이 각각 전사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아예 백제를 '잔혹할, 남길 잔(殘)' 자를 사용해서 잔인한 백제놈들 혹은 (고구려에서 떨어져나간) 백제 잔챙이라는 중의적인 멸칭으로 '백잔'이라 지칭하고 있다. 백제에서도 박적(狛賊)이라며 고구려를 비하했다. 곰을 숭상하는 고구려 도적놈들이라는 뜻도 있지만, 옛 북부여의 주류였던 백제 자신들의 계승권을 빼앗은 정통성 없는 야만족이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는 표현이었다.[24] 실제로 고구려와 신라는 쉽게 서로의 이해 관계에 따라 화해하여 성왕은 격노했고 이는 관산성 전투로 이어졌다.[25] 그 예가 서울의 남쪽을 가려주는 관악산으로 '악'자가 붙을 정도로 험준한 산이다.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삼은 것도 방어에 용이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26] 실제로 성왕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산성 전투로 이어지는 신라와의 전쟁을 결정한 이유는 성왕 자신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이겨 빼앗은 영토가 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친 결과임에도 신라가 독식하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딸인 소비 부여씨까지 신라로 시집보내 동맹을 공고히 하려 했음에도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배신한 신라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도 물론 있었겠지만 공주까지 내어준 국혼 외교를 파탄낸 신라를 응징하지 않는다면 성왕과 백제 왕실의 권위가 심각하게 실추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훗날 위덕왕이 되는 태자가 이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이렇듯 신라와의 국혼이 백제 왕실의 위상이 실추되는 일이었다면 절대 성왕이 했을리 없다.[27] 성왕 쪽이 진흥왕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심지어 성왕의 아들 위덕왕 부여창이 진흥왕보다 10살이나 더 나이가 많다.[28] 또한 관산성 전투 이후 부여창이 아버지 성왕의 죽음 이후 멘탈이 붕괴돼서 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귀족들이 선왕이 저희 말 안들었다가 이 지경이 됐으니 어라하는 제발 저희 말을 좀 들으라고 하기도 했다. 이 부분에서 백제가 한강 유역을 포기했다는 점을 또한 유추할 수가 있다. 백제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 중 특이할 정도로 귀족들의 힘이 매우 강성했던 국가였다. 영토를 점령하고 유지하려면 군사와 이주할 백성들이 필수적인데 당시 백제 귀족들은 성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여러 이유로 불만을 품고 반대하며 백제 왕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강 점령에도 꽤 비협조적으로 일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태의 귀족들에게 있어 만약 성왕이 신라를 공격해서 자신들의 고토를 날름 먹은 신라를 타격하고 돌아오는 시나리오는 최악이었을 것이다. 결국 성왕은 귀족들의 비협조하에 신라를 침공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크게 패하고 전사하게 된다.[29] 주로 옥천군의 옛 지명 중 하나로 비정된다.[30] <백제본기>의 관산성 전투에 대한 언급은 이게 전부다. 관산성이라는 이름이나 저 50명 이외의 다른 군사들의 존재는 전혀 언급이 없다.[31] 하다못해 아무런 이득을 취할 수 없다면 관대함이라도 보일 겸, 적국의 내분을 일으킬 겸으로 아무런 대가없이 석방해주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토목보의 변 사례.[32] 다만 관산성 전투 직후에 여제동맹이 성립한 것은 아니다. 위덕왕이나 무왕은 줄곧 고구려를 신라와 비슷한 잠재적 적국으로 인식했으며,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같이 치자고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백제는 무왕 때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도와주지 않는 등 관망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최대한 직접적인 마찰을 피했다. 의자왕 중ㆍ후반기 쯤에 확실히 당과 결별하고 한층 더 고구려와 가까워진다.[33] 이 시기를 전후하면서 왜에 대한 고구려의 문물 전수와 외교 접촉이 늘기 시작했다. 사실 고구려는 한반도 북쪽이란 위치상 백제나 신라와 달리 일본과의 교류가 상당히 힘든 조건이었는데, 상당히 무리해서 동해 바다를 건너는 사신단을 파견했으며 바다에서 조난당하는 기록도 여러 번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