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5:27:26

송호창(e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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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만행
2.1. 이재항 퇴출 사건2.2. 이윤열 노예계약 및 혹사 사건2.3. 그 외 만행들2.4. 이윤열 결승전 방치 루머
3. 평가

1. 개요

스타크래프트 위메이드 폭스의 전신인 팬택 앤 큐리텔과 투나 SG, 그리고 화승 오즈의 전신인 IS 팀의 감독이었다. 1971년 11월 17일 출생.(현재 [age(1971-11-17)]세)

투나 SG-팬택 감독 시절에는 프로리그 1회 우승과 2회 준우승, 팀리그 준우승 1회 등 감독으로서의 커리어 자체만 놓고 보면 명장의 축에 속하지만, 정작 실상 스타판에서 그의 이름 석자는 그냥 금지어 수준이다. 특히 이윤열 팬들은 아예 대놓고 10창이라고 부를 정도로 경멸할 정도다. 이는 송호창 감독이 그야말로 꾸준하게 여러가지 사고들을 터뜨려줬기 때문. 김철 감독[1], 이유찬 감독,[2] 박외식 감독,[3] 원종욱 감독,[4] 조규남 감독, 김동우 감독, 이재균 감독 등과 한세트로 묶여서 e스포츠판 최악의 감독 중 하나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5]

물론 앞선 감독들 중 몇몇과는 다르게 선수 발굴도 잘 해냈고, 송호창이 계속 팬택 감독으로 있었을 때는 팀 단위 리그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찍었기에 다른 감독들보다 능력면에서는 약간 위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내력이 워낙 대단하기에 빛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제일 결정적인 것은 이 업적들 대부분 본인이 개차반처럼 굴렸던 이윤열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2. 만행

그의 주요 만행들은 다음과 같다.

2.1. 이재항 퇴출 사건

당시 상황을 정리한 블로그

이재항은 개인리그 커리어는 사실 별 볼 일 없는 선수였지만, 프로리그에서는 달랐다. 팬택 저그라인의 핵심이었으며, 팬택이 SKY 프로리그 2004 2Round 우승을 할 때 큰 기여를 하였고, 2004 시즌 통합 다승왕을 한 적도 있다. 심지어 한빛 스타즈와의 그랜드파이널 때는 팀이 1:3로 열세로 몰리고 있을 때 회심의 4드론실패하고 나서도 꾸역꾸역 버티고 버텨서 결국 승리를 따냄으로서 팀이 추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6] 헌데 황당하게도 해당 리그가 끝난 뒤 팀에서 재계약 제외 대상자에 심소명, 서기수 등과 함께 포함되었다.[7][8] 이에 대한 불만을 송호창에게 토로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결국 이재항은 SKY 프로리그 2005 전기리그에서는 출전을 못하다가 대회 이후 팀을 떠나 서기수, 정영주와 함께 이네이쳐 탑[9]으로 갔다. 이듬해인 2006년에 겨우 다시 팬택으로 돌아오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결국 은퇴를 하고 만다.

2.2. 이윤열 노예계약 및 혹사 사건

지금도 가끔 인구에 회자되는 사건이다. 당시 투나 SG는 바로 전 시즌에 슈마 GO를 상대로 아쉽게 준우승을 했고, 홍진호가 다시 KTF로 이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병민, 이재항, 심소명, 서기수 등의 걸출한 선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송호창은 오로지 이윤열만을 내보내곤 했다. 가장 유명한 혹사로는 SKY 프로리그 2004 그랜드 파이널+IOPS 스타리그 04~05+2차 KT-KTF 프리미어 리그+당신은 골프왕 MSL+MBC MOVIES 팀리그를 한 기간에 소화해낸 것이 있다.

다만 저건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물려서 혹사처럼 보일 뿐 어느 정도 걸러 들을 필요도 있는 것이, 개인리그의 경우는 그만큼 이윤열이 뛰어난 기량을 보여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10] 애초에 본인이 거기까지 못 올라갔다면 프로리그와 팀리그만을 준비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여기에 단체전의 경우도 SKY 프로리그 2004 그랜드 파이널은 팀의 2라운드 우승과 2004 시즌 승률 전체 1위 자격으로 결승전에 직행한 것이며, 2라운드 우승은 이윤열 말고도 이재항의 개인전[11]과 이병민 or 이윤열/심소명의 팀플 조합 역시 큰 역할을 했고, MBC MOVIES 팀리그 결승 진출 또한 심소명, 김상우 등의 선수들이 1번씩 올킬을 해주는 등[12] 이 때의 팬택은 09~10 이후 사실상 이제동 원맨팀이 된 화승 오즈, 09~10 전까지 이영호 소년가장 팀이었던 KTF마냥 이윤열에게 모든 전력이 편중되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저런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13] 물론 그중에서도 이윤열의 비중이 가장 컸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단적인 예로 2006 전기리그 팬택의 6승 4패 중 5승이 이윤열의 하루 2승으로 이룬 성과다.[14]

사실 혹사 면에서 송호창이 까여야 될 점은 이윤열을 경기 외적으로, 즉 각종 행사들에 이윤열을 끌고 다녀 연습할 시간까지 부족하게 만들고 행사비는 자신이 중간에서 챙겨가는[15] 그야말로 악덕 감독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다.[16] 결과는 스타리그 빼고 전부 준우승.[17] 그러다가 이윤열의 계약기간이 만료까지 얼마 남지 않자 이윤열을 놓치기 싫었던 송호창은 몸도 안 좋았던데다가 게임판의 정세에도 그리 밝지 못했던 이윤열의 어머니를 억지로 만나 온갖 헛소리들을 다 동원해서 이윤열을 붙들기 위한 행보를 보였다.

2.3. 그 외 만행들

이런 것들 외에도 당시 극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던 김성제에게 갖은 욕과 험담을 하면서 네가 대회에 나가서 얼마나 성공할 수 있냐는 등의 막말을 지속적으로 했다.[18]

2004년도 프로리그부터 선수가 시즌 중 팀을 옮기면 그 시즌에는 프로리그를 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SKY 프로리그 2004 3Round에서 POS와의 경기에서는 안기효가 당시 Plus에서 이적한 박경수에게 지자 송호창 감독은 박경수가 시즌 중에 이적한 선수인데 어떻게 경기에 나올 수 있냐면서 이 경기는 무효라고 심판진한테 항의했지만 심판진은 박경수가 시즌 시작 전에 딱 이적을 완료해서 규정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했고[19], 당시 여론은 송호창의 치졸함을 욕하는 글이 가득했다.

T1의 전신인 동양 오리온 멤버들 중 한빛 스타즈 출신이었던 박용욱SouL 출신이었던 이창훈 등을 제외하면 모두 송호창이 싫어서 빠져나온 IS 게이머와 코치진들이다.[20] 홍진호, 이윤열 등도 KTF 임대 후 송호창한테서 벗어나려 했지만, 홍진호만 성공하고 이윤열은 실패하고 만다.

또한 2005년에는 이윤열과 팀의 투톱 반열에 있었던 에이스 이병민이 KTF로 이적한다. 최연성과의 계약이 불발된 KTF는 그에 따른 테란 라인 보강을 위해 이병민을 영입하려 하자 팬택에서 이병민을 붙들고자 KTF와 같은 계약조건을 내밀었지만, 이병민은 망설임 없이 KTF로 이적하였고, 이적료 없이 이적한 유일무이한 선수가 되었다.[21] 이병민은 시즌 중 이적이라 2005년도 후기리그에는 참가할 수 없었고 팬택은 후기리그를 이윤열 원맨팀으로 임하였다.[22] 보통 같은 계약 조건이면 원 소속팀에 남는 경우가 많은데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이적했다는 게 세간의 평.

이렇듯 선수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팬들은 그를 매우 증오하였고 팬택과 재계약 시즌이 오자 송호창 감독은 프론트에 1년에 1억씩, 3년 계약이라는 요구를 제안했다. 하지만 팬택은 창단년도 우승 말고는 2년동안 프로리그에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던지라, 프런트는 일단 6개월 단기계약 후 성적을 보고 다시 협상하자고 제안한다. 즉, 프런트가 감독의 지도력에 의문을 제기한 셈. 그 후 팬택이 SKY 프로리그 2006 전기리그에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면서, 결국 2006년 8월에 송호창은 팬택과 결별하였다. 이후 그 자리엔 성재명을 거쳐서 김양중 감독이 들어왔다. e스포츠판에서 사실상 감독직을 내려놓고서는 업계에서 그와 친한 사람이 1도 없었는지 전직 e스포츠 감독 치고는 이후 근황이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감독직을 그만둔 이후로는 e스포츠 판에서 완벽히 손을 씻고 더 이상 e스포츠 판에 대한 미련을 하나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같은 개막장 감독인 이명근의 행보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섬뜩하다.

2.4. 이윤열 결승전 방치 루머

이윤열이 하나포스 센게임 MSL 결승전에 진출했는데, 결승 상대가 하필 당대 최강급 테란이자 자신의 숙적인 최연성이었다. 이윤열은 최연성에 비해 열세이긴 했으나, 그래도 그나마 최연성을 잡을 수 있을 만 하다고 평가되던 몇 안 되는 선수였다. 결승 당일, 루나에서 치러진 1경기에서 이윤열은 분전하지만 결국 패하고 만다. 이를 본 송호창은 심사가 뒤틀리기라도 하였는지(...) 나머지 경기를 보지도 않고 그대로 이윤열만 남겨둔 채 차를 타고 숙소로 가 버린다. 이런 송호창의 미친 막장행각에 각성이라도 한 듯 이윤열은 2경기 유보트와 3경기 엔터 더 드래곤에서 최연성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최연성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게 된다. 최연성은 이윤열의 뜻밖의 분전에 당황한 듯한 기색을 보였고, 이를 눈치챈 주훈 감독이 4경기 시작 전 최연성의 자리로 가서 최연성에게 조언을 한 반면에, 감독이라는 인간이 그냥 버리고 간 마당에 이윤열에게 다가가서 그나마 위로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결승 상대의 선배이자 스승이며, 자신 못지 않게 송호창한테 당해서 송호창을 잘 알고 있지만, 현재는 본인이 쓰러뜨려야 하는 상대 최연성네 팀 주장인 임요환이었다. 이후 이어지는 4경기 데토네이션에서 이윤열은 회심의 전진 2배럭과 벙커링을 시도하나 최연성의 사기적인 SCV 블로킹과 미친 수비력에 끝장을 내지 못했고 그로 인해 결국 마지막 5경기 루나에서까지 패하며 이윤열은 우승을 놓치게 되고 팀 감독도 돌아가버린 상황에서 이윤열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렸다. 다행히 SKT T1 측에서 송호창이 이윤열을 버리고 간 딱한 사실을 알았고, 이윤열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 우승자 최연성과 같이 이윤열을 회식에 참여시키고, 이윤열은 결국 SKT T1의 차를 얻어타고 숙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후 IOPS 스타리그 04~05 결승전 때 우승자 포토타임에서 송호창은 이윤열 옆에서 실실 쪼개면서 다시 한 번 팬들의 어그로를 끌어버렸다.

그러나 이윤열이 강민과의 합방에서 위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해당 합방. 1시간 23분 27초부터 이 부분이 나온다. 실제로는 당시에 결승전 경기가 끝나고 난 뒤 송호창이 족발, 소주 사줘서 숙소에서 본인은 엉엉 울면서 팀원들하고 같이 밤새도록 소주 마셨다고.[23] 그리고 저때 임요환이 자신을 챙겨준 적이 전혀 없으며 요환이 형의 팬이 쓴 가설이냐며 헛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였다. 위에 적힌 송호창의 막장 행각들이 워낙 악명이 높았던지라 이런 말도 안되는 오해가 꽤 긴 시간 동안 정설로 간주된 것.

3. 평가

이래저래 말이 많지만 이런 인식과는 다르게 이윤열과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던 편. 이윤열이 아이옵스 스타리그 결승전에서 우승하고 나서 우승의 기쁨을 만끽한 나머지 송호창 감독과 코치와 포옹하고 울먹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윤열 스스로도 송호창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라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24] 다만 여전히 KTF 임대 후, 부모님과의 관계를 앞세워 정식 계약을 맺고 싶어하는 KTF 대신 SG로 낚아챘다는 루머가 있는 등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홍진호는 KTF로 완전 이적에 성공해 억대 연봉을 받은 반면, 이윤열은 SG패밀리 시절을 거쳐 부천 송내의 투나 쇼핑몰의 후원을 받았는데, 연습실은 지하의 PC방에서 하고, 식사도 도시락으로 하는 등 꽤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후 팬텍이 창단됐을 때도, 물론 성적을 고려해 1억 2천의 연봉을 받았지만 대외적으로 공표된 2억과는 꽤나 차이가 있었다.

한때 송호창의 인간성, 그리고 선수들의 불화를 감안하더라도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인정받아야 된다는 일부 여론이 등장한 바 있었다. 송호창이 감독직을 사퇴한 후에는 팀이 10-11 시즌 종료를 끝으로 해체되는 순간까지 프로리그 및 위너스리그 우승은 물론 결승 진출도 더 이상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25] 하지만 이는 당시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던 이윤열을 혹사시킴으로써 겨우 얻은 성적이다.[26] 게다가 송호창 사퇴 이후에도 개인리그에서는 이윤열이 우승 1회, 준우승 1회, 박성균이 우승 1회, 4강 1회, 심소명이 준우승 1회, 이영한, 박세정이 4강 1회를 진출함으로써 송호창이 재임하였던 투나-팬택 시절의 이윤열의 우승 1회, 준우승 2회, 이병민의 준우승 1회, 4강 3회에 준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퇴출 이후의 성과는 이윤열 하나에 집중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송호창 명장설은 불식되었고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도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다.

사실 저런 여론이 나왔던 것은 선수들의 개인리그 입상 경력 비교와 별개로 팀으로서의 응집력이 팬택 시절만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조차도 전술했듯 2005년 상/하반기 드래프트 때 선수를 한 명도 지명하지 않으며 후진 육성을 아예 내팽개친 점과, 시즌 개막 전 유효전력을 세 명이나 방출시킨 점까지 묶어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송호창 때문에 팀의 미래가 박살나버렸고, 그 악영향을 후임 감독들인 성재명과 김양중이 모조리 덤터기쓴 거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드래프트 세대들이 프로리그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SKY 프로리그 2006 후기리그의 경우 팬택은 11팀 중 꼴찌였다! 당장 KBO 리그 한화 이글스10년을 넘어가는 암흑기도 2000년대 초중반의 수 년간 신인 지명을 아예 하지 않은 것부터 조짐이 있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27]

후에 안기효가 개인방송에서 썰을 풀었는데, 시청자가 송호창에 대해 묻자 일할 때는 빡세게 일하고 놀 때는 시원하게 노는 스타일이라고 하였다. 성격은 예상대로 상당히 불같은 스타일로 화가 많았다고 이야기했고 전형적인 B형 타입 남자라고 한다. 본인은 송호창과 성격이 비슷해서 케미가 잘 맞았다고 하는데, 다른 선수들과 달리 송호창과 큰 불화가 없었던 모양.

[1] 사실 이쪽은 성적 부진만으로 까였을 뿐 인격적인 문제를 드러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금지어들과 동급으로 묶기에는 조금 억울한 감도 있다. kt의 팬들에게야 그런 거 알 바 아니겠지만.[2] 舊 이명근 감독.[3] 이쪽은 선수들을 아예 승부조작으로 끌어들여 팀 해체까지 일조했다.[4] 이쪽은 스타크래프트 1 시절에는 구설수가 없었지만 이후 스타크래프트 2 판이 생기고 나서 그곳에서 TSL 사건 등 온갖 사건에 만악의 근원 역할을 하면서 스타크래프트 2 팬들 사이에서 금지어로 전락한 위인이다. 아이러니한게 원종욱이 스타크래프트 2 판에 몸을 담기 이전에 스타크래프트 1 판에 코치로 활동하고 있었을 때 그가 소속되었던 팀이 바로 이 송호창 감독의 팀이었다는 점.[5] 조규남과 이재균은 엄밀히 말하면 팀의 감독으로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2019년 그리핀 사건에서 만악의 근원 역할을 한 주동자들임이 드러남으로써 송호창 이상의 악질들로 평가가 뒤집어졌다.[6] 다만, 이건 나도현의 안일한 플레이도 한몫했다. 4드론을 실패하고도 승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 물론 자신이 GG를 치면 준우승이 확정되는 상황이었으니 어떻게든 버틴 끝에 따낸 승리는 맞으나 4드론은 그 정도로 큰 리스크를 가진다. 막히는 순간 GG가 나와야 정상이며 설령 버티더라도 본진 배틀 관광까지 감수해야 할 리스크다.[7] 이재항이 모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말한 적이 있는데 "소명이와 기수가 잠깐 숙소를 나와 생활했는데 나와 소명이는 집이 서울이라 괜찮지만, 정작 걱정인 건 기수였다. 기수는 서울이 집이 아니라 지방에서 살고 있으며 게다가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었고 팀의 막내여서 내가 기수를 챙겼다."라고 한다.[8] 참고로 심소명은 팬택에 남다가 2008년을 끝으로 은퇴하였으며, 서기수는 이후 이지호를 따라서 eSTRO로 이적하였다.[9] 당시 이네이쳐 탑은 전기리그에서 최하위를 기록하여 규정상 후기리그에 출전할 수 없던 상태였다. 이 규정은 이듬해 폐지.[10] 마침 이때는 최연성스타리그 우승 직후부터 몇 달간 부진에 빠진 틈을 비집고 올라온 이윤열과 이 스타판을 갈라먹었던, 즉 삼신전의 시기였다. 실제로 이 당시 개인리그도 아이옵스 스타리그는 이윤열(vs 박성준)이, 당골왕 MSL은 박태민(vs 이윤열)이, 프리미어리그는 박성준(vs 박태민)이 우승을 차지하는 삼파전이었다.[11] 임요환의 레퀴엠전 첫 패배를 안겨준 선수가 이재항이다. 원래 이재항은 과거 IS 시절부터 저그 중에서는 마레기를 제외하면 유일무이한 임요환의 천적으로 유명했으며, 2004 프로리그 통합 다승왕까지 차지한 바 있다.[12]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렇게 1인분 이상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었던 선수를 명확한 사유도 없이 세 명이나 쫓아냈기에 송호창이 더더욱 까였던 것이며, 05시즌 팬택이 전/후기 모두 5위를 찍으며 포스트시즌 목전에서 좌절한 이유 역시 사실상 이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13] 오히려 이영호를 중심으로 김대엽, 우정호 등의 중견급 선수들이 쏠쏠하게 활약하여 우승까지 차지한 09~10의 KT와 비슷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04 그랜드 파이널 맞상대였던 한빛 스타즈의 전력 상태가 영 좋지 않았음에도 져버려서 폄하를 좀 당하기도 했지만, 사실 저 맞대결까지 포함해서 당시 팬택은 프로리그에서 한빛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것도 박정석, 변길섭을 KTF에 내준 후 제대로 된 전력보강도 없었던 한빛에게조차! 비슷한 시기 GO가 박태민, 서지훈을 끼고도 KOR에게 맥도 못 춘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14]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는 이윤열이 데뷔 이래 처음으로 양대리그 모두 진출에 실패하는 등 개인리그에서 가장 부진했던 시절이다.[15] 이 짓거리는 이윤열에게만 했던 것이 아니다. 임요환이 몇몇 선수들과 함께 IS를 나와 동양을 창단한 이유도 이것.[16] 일례로 2004년 여름 창단한 큐리어스의 스폰서 팬택은 이윤열에게 역대 최고의 연봉 계약을 약속했고, 언론에는 3년 6억으로 발표되었지만 이윤열이 훗날 방송에서 푼 썰로는 옵션 포함 금액이며 보장금액은 1억 2천이었다고 한다. 2억으로 발표한 건 당시 프로게이머들의 자존심 경쟁과 뻥튀기 발표로 e스포츠의 파이를 키워보려는 심산이었다고.[17] MSL에서는 최초로 저그에게 우승을 내준 테란이 되었고, 팀리그는 대장으로 나와 1킬밖에 따내지 못한 채 우승을 헌납했으며, 프로리그 또한 개인/팀플 합쳐서 2세트 모두 지고 준우승을 했다.[18] 참다 못한 김성제는 결국 임요환과 자신의 팬들의 도움을 받아 T1으로 이적해버렸다. 후술하겠지만, T1 자체가 송호창이 싫어서 나온 IS 선수들을 주축으로 창단된 팀이었다.[19] 참고로 당시 박경수의 소속 팀이던 Plus는 프로리그 1라운드에서 꼴찌를 했는데, 3라운드 진출전에서 2라운드 꼴찌인 헥사트론 드림팀에게 패하는 바람에 2라운드에 이어 프로리그에 나오지 못했던 상황이었다.[20] 최연성도 IS에 입단 테스트를 받은 상황이었으나, 정작 데뷔는 동양에서 했다. 이건 애초에 영입을 주장했던 사람이 임요환이니 뭐...[21] 이는 FA 제도가 만들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2] 게다가 팬택은 2005년 내내 처음 시작된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단 한 명의 선수를 지명하지 않았다.[23] 실제로 최연성에게 결승에서 패하고 마지막에 울먹이면서 인터뷰를 하였다.[24] 이후 이윤열은 게임아이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대회를 휩쓸던 시절이었다. 문득 송호창 감독과 함께 하던 시절 ‘이윤열을 혹사시킨다’는 소문의 진위 여부가 궁금했다. “그것 때문에 감독님이 오해를 받기도 해서 미안한 마음이 많아요. 당시에는 내가 욕심이 많았고, 경기에 출전해서 이길 자신이 있어서 제가 출전시켜달라고 했어요. 개인리그도 뜸했고 방송경기에 너무 나가고 싶었거든요. 감독님은 내 인생에 있어서 도움을 줬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 포모스 라이브 인터뷰 중[25] 송호창 사퇴 후 팀의 최고 성적은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준플레이오프 진출이며, 이게 유일한 포스트시즌 기록이다. 송호창 휘하의 투나-팬택 시절에는 프로리그 우승 1회, 준우승 2회, 팀리그 준우승 1회를 달성하였으며, 이윤열이 프로리그 개인전 다승왕 2회, 팀리그 다승왕 1회, 이병민이 프로리그 신인왕, 개인전 다승왕 1회, 결승전 MVP 1회, 심소명이 프로리그 팀플전 다승왕 2회, 정규시즌 MVP 2회, 이재항이 프로리그 개인전 다승왕 1회를 수상했다.[26] 일례로 SKY 프로리그 2004 그랜드 파이널에서도 이윤열을 개인전에 무려 2경기에 출전시키고 팀플 1경기에도 출전시켜 무려 총 3경기에서 기용을 하려는 모습을 보였다.[27] 애초에 송호창을 가장 불신했던 게 팬택의 팬이었으며, 팬택-폭스 팬의 절대다수는 이윤열의 팬이었다. 사실상 이들에게 있어서 이윤열의 위상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롯데최동원과 동급이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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