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3:20:30

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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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
顔回
파일:WssJIQm.jpg
원(元)나라 '지성선현반신상[1]'에 그려진 안회(顔回)의 반신상
기원전 514년 ~ 기원전 483년
노나라 출신.(현재의 산둥 지방)

1. 개요2. 존호3. 생애4. 유교경전에서5. 여씨춘추에서6. 사서(史書)에서7. 대중매체에 그려진 안회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께서 곡하셨다.
이에, 따르던 자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너무 애통해 하십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애통해 하였느냐?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애통해 하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위해 애통해 하겠느냐?"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로서, 관련 에피소드가 제일 많다. 달리 말하자면 공자 제자 3천 명 중 넘버 원. 공자와 친척관계라는 설도 있다. 자는 자연(子淵). 따라서 안자연이라고 불리워야 했으나, 공자는 자연에서 "연"자만 따서 안연(顔淵)이라고 불렀다.[2]공자의 제자 가운데는 학자·정치가·웅변가로서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안회는 덕의 실천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2. 존호

원문종 3년(지순至順 원년, 1330년)에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사당(孔門祠堂)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다. 이때 자사, 맹자 등도 함께 추봉되었다. 연(兗)이라 함은 스승 공자와 안회 본인의 고향인 노(魯)나라가 고대 중국 9주 중 하나인 연주(兗州)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지금의 산둥성 서쪽에 해당된다. 현재 중국에서도 '옌저우 구(兖州区)'로 남아 있다.[3] 이라 함은 앞의 '연'과 결합되어 '연나라'의 뜻을 갖는다. 이라 함은, 너무나도 유명한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그 복. 충서(忠恕)와 더불어 공자 가르침의 양대 진리인, 그 극기복례의 지극한 경지에까지 다다른 안회였기에 이러한 글자가 바쳐졌다. 이라 함은 '~하신 성인(聖人)'의 의미. 앞의 '복'과 연결되어 復聖'을 안회의 고유 칭호로 만든다. 해석하자면, 앞서 언급했듯 대략 '극기복례의 지극한 경지에 이르신 성인' 정도. 이라 함은 쉽게 말해 공작(公爵). 앞에서 굳이 연나라(兗國)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를 창조해 안회에게 준 것은 바로, 이 '공작'이 제후의 작위이므로 반드시 거할 나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작 체면에 나라가 없으면 가오가 안 살잖아?'라는 이유로 가공 국가의 영주로 봉해진 셈이다.

3. 생애

공자가 대놓고 극찬만 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인물로, 논어 위정편에는 "오여회, 언종일 불위여우, 퇴이성기사, 역족이발 회야불우"라 하며 안회를 극찬한 부분이 나온다. 공자가 안회와 하루종일 대화를 해도 자신의 이야기에 토를 달거나 반문하거나 하는 일이 없어 어리석은(못 알아들어서 질문하지 않는) 자인가 했는데, 이후에 실제 안회의 사생활을 알아보니 자신이 말해준 것들을 모두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그가 어리석기는 커녕 자신의 가르침을 질문도 없이 모두 이해한 훌륭한 제자라 극찬한 것이다. 어쩌다 한 질문도 엄청나게 규모가 큰 개념에 대한 것이었다. 논어 안연편에서 유가의 본질인 "인"이 뭐냐고 대놓고 공자에게 물었다.

안회는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4] 오로지 연구와 덕을 수양하는 것에만 전념하여,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다. 또한 공자의 제자 가운데 겸허한 구도자의 상징이 되었으며, 공자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반자이기도 했다. 성균관에 배향된 5성에서 공자 다음의 위치에 있다. 나머지 셋은 증자, 자사, 맹자이다. 전형적인 백면서생 타입이라 초반에는 괄괄한 성격의 자로와 티격태격했으나 자로가 안회의 덕행에 감격해 서로 돕고 돕는 친우가 된다.

문일지십(聞一知十), 즉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말은 안회 때문에 나왔다. 정확히는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서 나온 것. 공자가 자공에게 '안회와 너를 비교하면 누가 더 나은가?'라고 질문하자 자공은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겨우 둘밖에 알지 못합니다.'[5]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자는 '네 말이 맞다. 너와 나 모두 안회를 따라가지 못한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공자가 강의한 이후에 질문을 하지 않는 나날이 이어지자, 공자가 의문을 품고 문답을 하였는데, "몰라서 질문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내 말을 다 알아듣고 이해해서 질문을 안 한 거였다"[6]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좋은 의미에서) 인간 같지 않은 품성의 소유자로, '자신의 화를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다(不遷怒)'는 특징을 가졌다. 수평폭력을 행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인데 당시 시대적배경을 생각해보면 (현대여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인격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천재는 요절한다던가, 안타깝게도 가난하게 살면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굶는 일이 허다해지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일설에는 29세에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버렸고, 결국 32세요절하고 말았다고 하나, 32세에 죽었다는 것은 후세의 착각으로 보인다. 공자의 천하 주유에 동행한 점이나 자로, 자공[7] 같은 사람들과의 교우 문제를 봐도 그렇게 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40대 중후반에 죽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사망 시기가 40대 중후반이라고 해도 요절이라고 평할 수는 있을 것이다.[8][9]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도다,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도다."(天喪予! 天喪予!)라고 탄식했다고 한다.[10] 훗날 노의 실권자인 계강자가 와서 제자 중 으뜸이 누구냐는 질문에 공자는 "안회만이 내 뜻을 알았소. 하지만 지금은 죽고 없다오."라고 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딱히 본인의 저술이나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안회의 자손은 공자·맹자의 자손과 함께 곡부[11]에 모여살면서 명·청대에 안씨학(顔氏學)을 세워 나라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명나라 때부터 안회의 직계 후손에게 한림원 오경박사의 직위를 세습하도록 했다. 중화민국이 들어선 후에는 1915년 복성안자봉사관(復聖顔子奉祀官)으로 개칭해 77대손 안세용(顔世鏞, 1903~1975)이 1918년 세습했으며, 1935년에 복성봉사관으로 개칭되면서 임명되었다. 국부천대장제스를 따라 타이완으로 건너가지 않고 대륙에 남았다. 이후 중국공산당의 회유를 받아 2기 정협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이후 3기와 4기 정협 상무위원을 지냈다. 1935년에 설치된 5개 봉사관 직책 중 유일하게 그 후손이 대만으로 가지 않고 대륙에 남은 경우이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문화대혁명이 터진 후에 반성할줄 모르는 반동 유교분자로 몰려서 비투회에 끌려다녔고 홍위병들이 몰려와서 안부(颜府)를 때려부쉈다. 안세용은 개조를 위해 시골로 보내졌다. 안부는 나중에 2014년에야 복구된다.

4. 유교경전에서

공자와 안회와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논어에 실려있다.
  • 논어 선진편에 의하면 안연이 죽자, 안연의 부친인 안로는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안연의 곽[12]을 만들자고 청했다. 공자는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역시 각각 다 같은 아들이다. 내 아들 이가 죽었을 때 관만 있고 곽은 없었으니 내가 걸어다니기로 하고 곽을 만들어 줄 수도 있었으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대부의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이라 걸어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13] 즉 그렇게 좋아한 제자 안회가 죽고 난 다음에, 안회의 아버지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안회의 덧널을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고 하자 공자가 거절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엄청 쪼잔하다라는 평판이 나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안회의 신분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안회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평민의 예로 장례를 지내야 했고, 덧널을 쓰면 안되었던 것이다.
  • 역시 논어 선진편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안회가 죽은 다음에 공자의 제자들이 안회의 장례를 크게 치러주고싶어 했지만 공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결국 안회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어주었는데, 공자는 이것이 예절에 어긋나며 자기 책임이 아니라 니들 책임이라고 꾸짖었다는 것이다.[14]
    그리고 이 전후에는 공자가 얼마나 안회를 좋아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공자가 안회를 좋아한 것은 좋아한 것이고, 안회가 평민인 것은 평민인 것이다라는 것이다.[15]

5. 여씨춘추에서

여씨춘추》〈審分覽〉편은 공자와 안회에 관한 매우 교훈적인 일화를 전한다(이 번역을 약간 수정하였다),
공자(孔子)가 진(陳), 채(蔡)나라 사이에서 고통을 겪을 때의 일이다. 명아주 국물조차 마실 수가 없었고, 이레 동안 쌀 한 톨 입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공자가) 누워 있는 동안, 안회(顔回)가 쌀을 구해다가 밥을 지었다. 밥이 다 되어 풀 때 쯤에 공자가 멀리서 바라보니, 안회가 솥에서 밥을 집어 먹고 있었다. 얼마 후 안회가 상을 차려 공자에게 가져와 권하자, 공자는 이를 못 본 체 하며 일어나 말하기를, "방금 꿈 속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뵈었다. 밥을 깨끗이 한 후에 올리고 싶구나." 안회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안됩니다. 아까 솥 안에 재티가 떨어졌는데, 밥을 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지라, 그 곳을 걷어 먹었습니다." 공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눈은 믿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눈도 믿을 수가 없고, 마음은 의지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마음마저 의지할 수가 없다. 너희들은 명심하여라. 사람을 안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임을."

평소에 공자가 입을 대기 전엔 입을 대지 않던 안회가 먼저 밥을 집어먹은 것이 의아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핑계로 안회를 떠본 것이다. 제사에 쓰일 밥을 먼저 먹어서는 안 되므로. 그래서 안회가 '스승께 드리기엔 더럽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지라 자기가 먼저 한 입 먹었다'며 이 밥을 제사에 쓸 순 없다고 털어놓자, 안회를 의심한 자신을 후회하며 한 말이다.

6. 사서(史書)에서

사마천의 《사기열전》은 백이와 숙제의 열전으로 시작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사실 인물전이라기보다 사마천 자신의 목표의식을 나타낸 서문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안회는 사마천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리마의 꼬리에 매달려 천리를 가는 파리[16]'다. 안회 자신이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17] 공문십철[18]의 으뜸으로 인정받은 것이 공자의 적극적인 PR 덕분이었던 것처럼 역사적, 지위적 당위성을 지닌 '본기' '세가'의 인물들과는 달리 '열전'의 주인공들은 사마천 자신 덕분에 후세에 이름을 남길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7. 대중매체에 그려진 안회

  • 쌍권총 공자가 나오는공자의 일생을 다룬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에서는 얼어버린 강을 건너던 도중 얼음이 깨져서 수레에 실려 있던 죽간이 물에 빠지자 물에 빠진 죽간을 건지다가 힘이 다해서 사망하는 것으로 나온다.[19] 이 부분은 영화의 허구.
  • 맹꽁이 서당 학동들은 안회같은 사람이 되자는 말이 안회처럼 32살에 빨리 죽으라는 아주 큰 욕이라고 주장하였다. 장쇠는 나쁜 뜻이 아니라 안회처럼 훌륭한 학자의 길을 가자고 얘기하는 것인데... 게다가 안회의 통칭인 안자를 이용해 "자기는 낮잠을 안 자기 때문에 자기도 안자다." 같은 언어유희성 드립을 치기도 한다.
  • 《세상 속으로 뛰어든 신선》이라는 책에서는 回(회)라는 이름이 舜(순)임금의 환생이기 때문에 붙었다고 주장하였다. (pp.304-305)

8. 관련 문서



[1] 至聖先賢半身像,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소장[2] 안연 외에도 공자는 제자들의 자가 두 글자일때 한 글자만 따서 성씨에 붙여 부르곤 하였다. 근데, 자공의 경우는 오히려 "자"가 자공이고, 진짜 이름이 "사"인데, "사"라고만 부르기도 했다.[3] 조조가 처음에 거점으로 삼았던 그 연주 맞다.[4] 오죽하면 단사표음(簞食瓢飮)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을 정도다. 뜻은 하루에 밥 한그릇, 물 한그릇만 먹고 버텼다는 뜻이다.[5] 이에 대해선 자공이 '저는 안회보다 못합니다'라는 겸손함과 '저는 그래도 하나를 들으면 둘은 압니다.'라는 자신감을 동시에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6] 상술된대로 가르침 이후 실제 안회의 사생활에서의 품행이 공자 자신의 가르침 그대로인 걸 알게되어 공자가 크게 감탄했기 때문이다.[7] 자공은 여러 책에 묘사된 정황상 안회보다 매우 어렸다.[8] 전근대의 평균수명이 짧았음을 들어 요절이 아니라고 평하는 경우도 있으나, 전근대의 짧은 평균수명은 높은 영아사망률과 질병사망률의 영향이 크다. 노화 정도는 지금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을 수 있다.[9] 하지만 이 시대보다 2천년이나 지난 일제강점기의 한반도에서조차 조선인들과 일본인들 모두 40대 후반을 지금의 만65세 정도 개념의 노인이라 칭했었다. 독립운동단체 중 "노인동맹단"이라는 단체는 46세(만45세)부터 노인회원으로 가입시켰으며, 조선총독부는 60대 후반이나 70대 독립운동가를 체포했을때 곧 죽을 나이라 생각해서 풀어준 적도 있다. 물론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66세 강우규 열사는 애초에 여러 사람들이 죽고 장애인이 되어 사형감이니 나중에 사형을 했지만, 처음에는 경찰이 강우규의 외모를 본 뒤 그냥 신상정보만 묻고 60대라니까 용의자로 두지도 않고 그냥 풀어줬다가(당시 현장 주변에 있던 20대와 30대 조선남성들만 괜히 죄다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나왔다) 나중에 수사로 밝혀진 뒤에 추적해서 체포했었다. 그리고 시위하는 60~70대 노인들은 역시 곧 죽을 나이라는 이유로 풀어주기도 했다. 그렇기에 춘추전국시대라면 40대가 지금의 80대는 아니더라도 60대 이상의 개념은 되었을 확률이 크며, 지금 시대에서도 60대 인물의 사망을 일찍 사망했다고는 표현해도 요절이라는 말은 쓰지 않으니 저 시대도 40대가 죽는다고 요절이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0대를 요절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21세기에나 통용되는 개념이기도 하다.[10] 비슷한 시기에 또다른 제자인 자로와 아들 공리도 죽었으며 이에 대해서 훗날 사마천백이열전에서 어째서 옳고 선한 인물의 최후가 이다지도 비참할 수 있는가? 라는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11] 曲阜, 공자의 고향.[12] 관을 둘러싸는 바깥 덧널. 뒤에 나오기도 하지만 당시 예법상 평민은 곽을 쓸 수 없다.[13] 顔淵이 死커늘 顔路 請子之車하여 以爲之槨한대 子曰 才不才에 亦各言其子也니 鯉也死커늘 有棺而無槨하니 吾不徒行하여 以爲之槨은 以吾從大夫之後라 不可徒行也니라.[14] 顔淵이 死커늘 門人이 欲厚葬之한대 子曰 不可하니라 門人厚葬之한대 子曰 回也는 視予猶父也어늘 予不得視猶子也하니 非我也라 夫二三子也니라.[15] 당시는 군주와 가신간의 살육이 끊이지 않던 전국시대이다. 공자는 주나라 예법을 처절할 정도로 지키내는 것이야말로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끝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16] 사마천은 이 표현을 한 고조 유방의 장수들 열전인 《번역등관열전》에서도 사용하고 있다.[17] 그러나 사실 젊은 나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공자가 십수년 주유열국하고 돌아와 2년 만에 사망한 것이라 나이는 중년이긴 했다. 다만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어야 할 그 시기에 덜컥 죽어 남긴 게 없을 뿐. 공자는 돌아온지 첫째 해에 아들 백어가 죽고, 둘째 해에 수제자 안회가 죽고, 셋째 해에 가장 친한 제자인 자로가 죽는 3단콤보를 맞고 끝내 사망하였다.[18] 일반적으로 십철의 필두로 꼽히나, 문묘배향에서는 십철이 아닌 성인급 위상을 갖는다.[19] 참고로 찬물에서 오랫동안 있거나 갑자기 빠지면 잘못하다가 저체온증 걸려서 죽거나 위험해질 수도 있다.[20] 해당 문서는 정도적인 내용도 있지만 사도적인(…) 내용도 있었는데, 결국 토론으로 후자는 삭제...되었으나 다시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