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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암브로시오 | 클로드 빅논 作 | ||||||
<colbgcolor=#8c1e2b,#8c1e2b><colcolor=#daa870,#daa870> 본명 |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 (Aurelius Ambrosius) | |||||
이명 |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Ambrosius Mediolanensis) | |||||
출생 | 339년경 | |||||
로마 제국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
사망 | 397년 4월 4일 (향년 56–57세) | |||||
서로마 제국 메디올라눔 | ||||||
직업 | 성직자(대주교), 정치인, 신학자, 작가, 작곡가, 작사가 | |||||
종교 | 기독교 | |||||
재임 기간 | 제13대 밀라노 대교구장 | |||||
374년~397년 | ||||||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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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욱센티우스 (355년~374년) | 암브로시우스 (374년~397년) | 심플리키아누스 (397년~400년) |
성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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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교부, 교회학자 | ||
상징물 | 꿀벌, 말, 목장, 주교관[1], 책 | ||
축일 | 12월 7일 | ||
수호 | 밀라노, 양봉업자, 주교, 학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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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대주교, 정치인, 신학자, 작가, 작곡가, 그리고 작사가.동방에 비해 그 세와 교리, 전례와 성직 분야에서 미숙했던 서방 교회의 대대적인 개혁을 이룩했고 아리우스파와 대립했던 인물 중 하나. 축일은 12월 7일이다.
암브로시우스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불멸'을 뜻한다. (암브로시아 참조.) 양봉업자와 양초 제작자의 수호성인이며, 상징물은 꿀벌과 꿀통. 미술 작품 내에서 그는 목장을 든 주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꿀벌들을 거느리는 모습으로도 나타나나, 승마용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타는 모습으로 묘사될 때도 있다.
2. 생애
2.1. 성직자가 되기까지
암브로시우스는 330년 경에 독일 트리어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아버지 아우렐리우스는 갈리아의 최고위 지방장관(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직까지 지냈다고 한다. 그에게는 형제자매가 둘 있는데, 그들 중 '마르켈리나'라는 여동생은 후에 수녀가 되어 고행으로 수도생활을 했으며 오빠처럼 성인이 되었다. 축일은 7월 17일.비록 그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지만, 암브로시우스는 그의 아버지의 커리어를 따라 엘리트 행정관의 길을 걸어갔다. 로마에서 수사학과 법학, 문학을 공부하고 북부 이탈리아 일대의 행정직을 거친 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 시절(374년)에 밀라노의 집정관으로 부임한다.
밀라노 집정관으로 근무하면서 그는 밀라노 주교의 임명을 두고 다투던 정통파와 아리우스파의 중재를 맡았는데, 뛰어난 화술과 정치력을 발휘해 협상을 잘 이끌어 나갔다. 그래도 양파의 대립이 심해서 결정은 나지 않고 있었는데, 협상장에서 "암브로시우스를 주교로!"하는 반응이 나와버렸다.
이때 암브로시우스는 아직 세례받지도 않은 예비 신자였으며, 딱히 신학 공부를 한 적도 없었다. 따라서 암브로시우스를 주교로 모시자는 주장이 나오자 "나는 사제가 아닌데 무슨 수로 주교가 됨?"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거기다 그는 로마 제국의 고위 행정관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성직자가 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라노 교회, 특히 정통교회가 열성적으로 그를 설득하자 그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 칩거하면서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서신을 보내서 처우를 결정해 달라고 청했고, 황제의 허가가 떨어지자 그는 행정관직을 포기하고 세례를 받은 후 1주일 만에 주교직에 오른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대략 이런 식으로 기록이 전해내려온다.
오랜 뒤에 밀라노 시가 주교 선출을 앞두고 있을 때 그(암브로시우스)는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 간에 유혈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치안 유지에 힘쓰고 있었다. 그가 성당 복도를 걸어 내려가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암브로시우스를 주교로 선출하세요!!"하고 소리쳤다. 그는 자신이 세례받지 않은 예비 신자였으므로 그 직무에 부적합하다고 거절했으나, 대중의 의견을 수렴한 암브로시오 성인은 황제의 허락을 구한 뒤 정식 절차를 밟아 세례를 받고 이례적으로 세례 후 1주일 만에 주교좌에 착좌하였다.
2.2. 밀라노의 주교
주교가 된 암브로시우스는 성 심플리키아누스(축일 8월 16일)를 가정교사로 모시고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엄격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받은 엘리트 교육의 결과 그는 연설에 능통했으며 제국 내의 여러 언어, 특히 그리스어에 능숙했고 그렇기에 동방 일대의 유명한 설교사들, 신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학문적 지식을 쌓아갈 수 있었다. 그는 특히 구약성경을 연구하여 주석을 달고 설교하곤 했으며 사실상 서방 교회에 동방의 신학과 논쟁 기술 등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는다.또한 전례 측면에서 미숙했던 서방 교회에도 동방 교회의 전례 양식과 기법을 도입하였는데, 그가 제정한 전례 양식을 암브로시오 전례라고 한다. 지금도 그가 주교로 사목하던 밀라노 교구에서는 암브로시오 전례에 따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그의 연설 능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고 하며, 이에 감명받고 그리스도교에 투신한 인물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2]
또한 그는 교회의 사회 봉사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이는 그가 민중의 지지를 받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에 교회를 적극 개방하는 등 사회 봉사 활동에도 노력하였다.
2.3. 동서 로마 내전의 사이에서
이후 그는 단순히 서방 교회의 유력한 주교 수준을 넘어서 로마 제국 전역 그리스도교 사회의 최고 유력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심지어 영향력 면에서는 교황보다도 더 강했는데, 이는 단순히 그를 추종하는 신자들의 규모뿐만이 아니라[3] 엘리트 공직자 교육을 받으면서 키워 온, 어떻게 어디에 개입해야 하는지를 꿰뚫어 보는 그의 정치적 식견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한 마디로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의 영향력이 최고 수준에 다다랐던 것.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사죄를 받은 일이다. 390년, 테살로니카(테살로니키)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하고 황제 및 황후의 초상화를 흙탕물 속에 빠뜨려 모욕을 가한 사건이 일어나자, 분노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군대를 보내 주민 약 7천여 명을 학살했다(테살로니카 학살).
암브로시우스는 즉시 서한을 보내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당분간 성당 출입을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황제가 이를 묵살하고 부활절에 측근들과 함께 성당으로 행차하자 암브로시우스는 성당의 문 앞에 서서 황제가 성당에 들어오는 것을 저지했다. 그리고 성탄절에 다시 성당에 찾아온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마찬가지로 성당 문 앞에 서서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결국 황제는 이에 굴복하고 그 일에 대해 사죄하였으며, 암브로시우스는 가벼운 보속 이후 성당 출입을 허가하였다. 이 보속의 내용이 뭐였던고 하니, 황제를 상징하는 장식물과 옷을 다 벗고 일반 평복을 입고 주교 앞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는 다신교 시절의 로마에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4]
이는 암브로시우스의 강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실제로 십 몇 년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사하게 교회가 황실의 권위에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었는데,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대로 황제에게 박살나서 추방당했다. 사실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암브로시우스처럼 공식적으로 황실의 행동에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기보단, 시도 때도 없이 입바른 소리를 해서 평소부터 권력자들이 눈엣가시로 여기던 게 터져나온 것에 가깝다.[5] 그의 추방을 반대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하기아 소피아가 유실되기도 했다. 황제는 물론 이론적으로 평신도였지만 정치적 힘과 권위 측면에서는 황제가 더 강했으며, 심지어 암브로시우스는 이 당시 교황도 아닌 유력한 주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브로시우스가 이런 성공을 거둔 것은 그가 탁월한 정치적 식견으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자신이 저지른 짓을 후회한다는 점을 꿰뚫어 보았다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받는 민중의 지지가 상당한 수준이었고 그의 인맥, 그리고 그의 상황파악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거두고 교회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의 위상은 황제의 사과를 받음으로써 한층 더 올라갔다. 이는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큰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며, 암브로시우스는 이를 적절히 활용할 능력이 있었다.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하였다. 그 혐의는 갈리아 방위를 맡겼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 장군에게 돌아갔으나 어디까지나 정황증거 수준이었고, 자살한 것으로 여겨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런데 암브로시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추모하는 주례를 맡아 발렌티니아누스를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교인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갔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스도교 교리상 자살이라는 죄악을 저지른 자는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이는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이었고 사실상 서로마의 실권자였던 아르보가스트에 반대한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교회의 아르보가스트 반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아르보가스트와의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그는 내전 승리 후 가담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청원하기도 했는데, 아르보가스트가 다신교 우대 정책을 폈다는 점을 생각하면[6]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교뿐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다.[7]
2.4. 대제의 사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5년에 사망했을때, 암브로시우스는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스틸리코와 함께 테오도시우스의 임종을 지키고 유조를 들은 몇 안되는 인물이었으며 대제의 장례식 주례를 서기도 하였다.이후 동서 로마가 두 아들에게 분할되자 암브로시우스는 스틸리코의 편에 서서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스틸리코를 후견인으로 세운 것은 맡긴 것은 서로마 뿐만이 아니라 동로마도 포함된다는 주장을 하여, 독자적인 행보를 시도한 동로마를 견제하였다.[8]암브로시우스는 397년 4월 4일 성토요일[9], 파스카 성야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에 "오!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는지! 아!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치 마시고 저를 거절치 마옵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성 암브로시우스의 유해는 그가 사목했던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탐브로조 대성전(Basilica di Sant’Ambrogio)에 안치되어 있다.
3. 기타
대중들에게는 암브로시우스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그가 한 말은 유명한데,sī fuerīs Rōmae, Rōmānō vīvitō mōre; sī fuerīs alibī, vīvitō sīcut ibī
훗날 로마에 있게 되면 로마인처럼 살아라. 만약 훗날 다른 곳에 간다면 거기 사람들처럼 살아라.
로마에 방문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밀라노의 금식일과 로마의 금식일이 다름을 알고, 돌아와서 암브로시우스와 대화할 때 나온 말로, 흔히 이를 줄인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로 잘 알려졌다. 즉 융통성 있게 행동하라는 의미.[10]훗날 로마에 있게 되면 로마인처럼 살아라. 만약 훗날 다른 곳에 간다면 거기 사람들처럼 살아라.
- 그가 태어났을 때에 꿀벌 무리가 그의 얼굴로 날라와서 꿀 한 방울씩을 남기고 떠나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는 그가 성인으로 인정됐을 때 기적 중 하나로 인정받았는데, 그가 성인으로 인정받은 게 중세라는 점을 감안하도록 하자.
- 설교할 때 독신의 가치를 너무 강조하여 귀족 가문의 처녀들 중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맹세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귀족 가문에서 딸들이 그의 설교를 듣지 못하게 집에 가두는 일이 발생할 정도로 달변이었다고 한다.
[1] 미트라(mitra)라고도 하며, 주교품 이상의 고위 성직자들이 착용하는 전례용 모자다.[2]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도, 암브로시우스의 언변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3] 그의 연설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를 따르는 신자의 수는 많긴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따르는 인물은 많았다.[4] 근데 로마 다신교에서는 제정 이후로 황제가 최고 제사장을 겸임했으므로 이 역시 암브로시우스의 위세보다는 제국 체제가 성격이 기독교화되며 얼마나 크게 달라졌나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5] 또한 지나친 아리우스파 이단 탄압과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동방에 대한 폭정,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학살까지 일으켜 도덕적 명분이 바닥을 쳤던 테오도시우스에 비해, 아르카디우스는 워낙 무능해서 정치적 권위는 낮았어도 도덕적 결함은 크게 없었기에 이런 종교계에 대한 상호존중 쇼 같은 거 없어도 감당이 가능했다.[6] 잠시 동안이지만 세웠던 대립 황제 에우게니우스도 그리스도교인을 가장한 이교도였다.[7] 근본이 종교인이었음에도 프리기두스 전투 전후로 굉장히 광신적으로 행동했던 테오도시우스보다 오히려 이성적인 판단을 한 셈이니 혜안이 꽤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당시 암브로시우스가 협력했던 테오도시우스가 워낙 정치적 명분이 형편없던 상태라서 종교 문제를 떠나서 지나치게 잔혹한 전후처리가 제국 안정에 전혀 좋을 게 없긴 했다. 은인중의 은인을 죽인 찬탈자를 약속 어기기 전까지는 인정했던 지저분한 과거를 가진 양반이, 실권은 없어도 나름 그 찬탈자보다 훨씬 제대로 된 절차와 명분을 갖추고(실권을 아르보가스트가 장악하긴 했다지만, 에우게니우스는 아르보가스트 혼자의 강압이 아닌 로마 원로원을 비롯한 정치 세력들의 합의 하에 황제가 된 것이다.) 황제가 된 사람을 냅다 선제공격해서 죽여버린 셈이니.[8] 근데 아르카디우스의 나이를 감안해보면 이미 장성한 아들에게 후견인을 붙였다는 거 자체가 테오도시우스가 아들의 무능함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될텐데, 그래서 암브로시우스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테오도시우스는 "내가 살아있을 땐 멀쩡했던 애가 자기 치세에 이상해진 건데?" 같은 식의 변명도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9] 주님 부활 대축일 바로 전날인 토요일[10] 참고로 말하자면, 이후로도 꽤나 오랜 기간 밀라노에서는 "암브로시우스 전례"와 같은 고유 전통이 유지되었고, 그레고리오 7세를 비롯한 개혁교황들이 지방교회들에 대한 교황청의 수위권을 강화해나가던 시기에 전례 또한 로마의 것으로 통일하려고 하면서 이에 관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11] 가톨릭 외에 여러 종교들과 연이 있었으며, 현재는 무종교라 한다. 무종교인이면서 세례를 받은 것이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전통적으로 세속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같은 거물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는 것은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 정치인들은 원래 종교가 뭐였던지간에 종교적으로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게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