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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당시 신성로마제국 영방국가 지도 |
언어별 명칭 | ||
독일어 | Land / Territorium / Territorialstaat | |
영어 | Territorial state | |
한국어 | 영방(領邦) / 영방국가(領邦國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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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방국가는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는 제후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봉신에 불과하였던 이들 제후국은 황제로부터 광범위한 권한을 넘겨받아 사실상 준독립국화되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붕괴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1815년 빈 회의에서 영방국가들을 모아 독일 연방으로 재편하면서 사라졌다.문서의 표제어를 영방 '국가'로 하긴 하나, 후술하듯이 이 시기 영방은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2. 용어 및 개념
기본적으로 Territorialstaat/Territorial State는 '영토 국가'라고 하는 학술 용어이다. 영토 국가는 '법치'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더 크고 복잡한 정치체를 가리키며, 한 개인이나 그를 중심으로 한 소집단(친족, 마을 등)과 같은 인적 공동체가 '소유'하고 있는, 개인들 사이의 인적 유대 관계에 기초한 전근대적 정치체와 구별된다.[1] 유럽사에서 영토 국가는 13세기 이후 잉글랜드, 프랑스, 에스파냐 등 개인 간의 유대관계에 기초한 봉건적 질서에서 군주를 중심으로 영토 내의 정치권력의 통합(중앙 집권)으로의 발전이 진전된 국가를 의미한다.독일에서는 Land(란트)라고 하는 정치체를 중심으로 영토 국가가 발전했다. 중세의 Land는 '영지'의 의미로, 토지나 영역을 기초로 하고 있기 보다는 구성원 간의 연합, 즉 개인 간의 유대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 그 주요한 특징이다.
한편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레갈리아라고 하는 고급 재판권, 화폐 주조권, 관세 징수권, 축성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통치에 대한 특권이 황제에서 제후들에게 이관되기 시작했다. 이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후반 황제의 권력 기반이 흔들리면서 발생하였는데,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 성직 제후 및 세속 제후들과 각각 교회 군주들과의 동맹(Confoederatio cum principibus ecclesiasticis, 1220), 제후들을 위한 법령(Statutum in favorem principum, 1231)을 통해 법제화되었다.
이후 대공위시대를 지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각 제후국의 군주를 중심으로 '영방화/영토 국가화(Territorialisierung)'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황제의 권력이 Land를 지배하는 제후에게 이관되고, 제후들은 이를 바탕으로 영토 내에서 정치권력을 강화해 나간 것이다. 즉 이 시기에 이르러 Land는 단순한 중세적인 '영지'에서 '영방'의 개념으로 발전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2] 영방(Land/Territorium)을 통치하는 영방 군주(Landesherr)에 의한 영방 지배권(Landesherrschaft)의 발전은 중세 말기를 거치며 가속화되었고, 일부 학자들은 근대 초기 이후 영방 지배권이 영방 고권(Landeshoheit)으로 발전하였다고도 한다.
그렇기에 중세 말 근대 초기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은 편의상 영방 국가라고 옮겨지지만, 엄밀하게는 이들을 국가로 설명하는 것은 다소 부적절하다. 이는 영방이 중세 동안 가산제(家産制) 영역으로서 영주 개인 및 그 가문의 소유물이었으며, 비록 근대로 갈수록 각 제후령 단위로 영방화하였더라도 여전히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남아있으면서 권리 및 의무를 지닌 까닭이다.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도 각 영방은 근대적인 의미의 주권을 보유한 것은 아니었다. 황권 강화에 맞서는 것과는 별개로, 영방국가들은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제국법을 따랐으며 제국의회에 참석하거나 제국군에 대한 병력 혹은 재원을 제공하였다. 이는 제국백이나 여러 공국, 주교후령 등 대다수 영방은 제국 바깥과 정면대결하기에는 그 힘이 미약하여 제국의 울타리 안에서 서로 힘을 보태며 황제의 보호받는 것이 유리해서였다. 제국 질서와 무관하게 독립적인 주권을 확보한 것은 프리드리히 2세(재위:1740-1786) 이후 유럽 강대국 정치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1701년에 프로이센 왕국 설립)이 유일한 사례였다.[3] 프로이센 왕국을 제외한 독일 영방이 확실하게 주권을 지니게 된 것은 신성 로마 제국 해체 후 빈 회의에서 제국 복구가 아닌 독일 연방 결성을 결정하면서였다.[4]
한편으로 근대 초기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은 제국의회의 참석 권한 및 투표권을 가진 구성원을 의미하는 제국신분(Reichsstände)과도 동일시된다. 다만 제국신분에는 제국기사(Reichsritter)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제국 구성원 전체가 포함되지는 않는다.[5]
3. 영방신분과 근대 국가
근대 초기 이후 '영방 지배권' 혹은 '영방 고권'의 확립은 막스 베버가 근대 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핵심 요소로 규정한 '국가의 폭력 독점'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중세 후기 영방 제후들이 영방 내에서 개인 간의 사적인 무력 사용인 '페데(Fehde)'를 금지하였던 '평화령(Landfriede)'을 선포하였던 것은 영방 내에서 군주가 군사력을 포함한 물리력을 독점하고 내부의 질서를 규제하고자 한 시도였다.정치권력을 중앙 집권화하려는 시도는 제국 전체 차원에서도 물론 있었다. 1235년 프리드리히 2세가 마인츠 평화령을 선포한 이래 1495년 막시밀리안 1세는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영구 평화령(Ewiger Landfriede)를 선포하여 제국 내 사적인 물리력 행사를 종식시키고자 하였고,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을 설치하여 이를 통해 국내의 분쟁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이로부터 시작된 막시밀리안 1세의 제국개혁(Reichsreform)은 1498년 또다른 제국 최고법원인 제국추밀원(Reichshofrat)의 설립, 1500년 제국관구(Reichskreis) 설치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결코 의식적으로 근대적인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아니었다. 제후들은 물론이고, 황제조차도 제후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통일된 중앙 정부를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근대 국가는 어떠한 결정적인 계기나 당대 군주들의 명확한 의도를 바탕으로 출현한 것이 아닌, 중세 말~근대 초 유럽에서 발생한 변화들이 누적되면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성 로마 제국 영방국가들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중세 후기 이후 중앙의 권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영방 군주와 영방 내 각 신분 집단을 대표하는 영방신분(Landstände)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는 기도하는 자(성직자), 싸우는 자(귀족/기사), 일하는 자(평민)의 폐쇄적인 3위계 신분제 체계를 바탕으로 성립된 중세 유럽의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중세 후기에서 근대 초기 사이 각 신분은 법적 능력을 갖춘 조합(Korporation)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고자 했다. 영지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무엇보다도 재정 확보를 위한 조세 권리를 확보해고자 했던 군주는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하는 신분회의(신분제 의회)를 개최하여 각 신분에 대해 조세 권한에 대한 동의를 비준받고자 하였다. 특히 14세기 이후 유럽 국가 간의 전쟁 빈도가 증가하면서 전 유럽적으로 신분제 의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졌고, 신분제 의회는 16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독일에서도 영방신분 전체를 소집하는 영방의회(Landtag)가 각 영방 단위로 개최되었다.
3.1. 독일 영방신분회의 유형
1930년 오토 힌체는 서구 신분제 헌법의 유형론(Typologie der ständischen Verfassungen des Abendlandes)이라는 고전적인 논문에서 유럽 신분제 의회의 유형을 2원제와 3원제로 분류하고 양자의 발전 단계를 개념화했는데, 이는 각론에서는 많은 도전을 받았으나 큰 틀에서는 아직도 유용한 분석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힌체는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봉건제와 로마법의 영향력이 강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상급 귀족과 성직자가 상원을, 하급 귀족과 도시 대표가 하원을 구성하는 구식의 2원제에 비해 진보한 형태인 성직자-귀족-도시의 3원 체계의 신분제 의회가 나타났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면서도 하급 귀족에 해당하는 제국기사의 대표권이 보장되지 않고 선제후, 제후, 도시의 3원제로 구성되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에 대해서는 다소 특수하기는 하지만 상원이 나뉘어진 2원 형태의 연속으로 보았다.
바이에른, 헤센카셀 방백국, 브라운슈바이크를 비롯한 많은 서부와 남부의 독일 영방 신분회는 성직자-귀족-도시의 고전적인 3원제를 형성했다. 한편 종교 개혁 이후 북부 개신교 지역인 메클렌부르크와 서부의 가톨릭 지역인 베스트팔렌 등에서는 성직자들이 신분회에서 제외되어 귀족-도시의 2원제를 형성했다. 다른 한편으로 황제의 영향력이 강해서 황제 직속의 제국백(Reichsgraf), 제국기사(Reichsritter)가 많았던 슈바벤 지역의 뷔르템베르크, 바덴과 프랑켄 지역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귀족이 영방신분에서 이탈하여 성직자-도시/관료의 2원제가 나타났다.
작센, 보헤미아 왕국[6], 프로이센 공국 등을 비롯한 엘베강 이동의 동부 독일에서는 고위 성직자와 귀족이 하나의 대표를 형성하고 그 아래에 기사와 도시의 대표가 각각 존재하는 3원 형태가 나타났다. 힌체는 이를 카롤루스 제국의 주변부에서 나타나는 2원적 요소가 잔존한 3원제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독일 봉건제의 영향 속에서 나타났다고 보았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오늘날의 베를린 일대인 쿠어마르크(Kurmark)와 폴란드 포모르스키에 일대인 힌터포메른(Hinterpommern) 지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오버외스터라이히, 니더외스터라이히)는 귀족 계급 내부에서 고위 귀족과 하급 귀족(기사)가 분화하여 성직자-귀족-기사-도시의 4원 체제를 형성하였는데, 힌체는 이를 3원제의 연장선에서 보았다. 하지만 이 지역이 힌체가 제시한 카롤루스 제국의 중심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힌체의 유형론이 가지는 문제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힌체의 유형론을 수정한 헬무트 쾨니히스베르거에 따르면 이들은 복합 국가(Composite State)로서 한 군주 아래 여러 영지가 결합되어 있었고, 내부 영지에 따라 다른 유형의 신분제 의회가 존재했다. 가령 현재의 독일 남서부의 오스트리아 영토인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7]의 경우 3원제가 일반적이었고, 티롤 후백국의 경우 농민의 신분회 대표가 인정된 4원 형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티롤을 비롯해 슈바벤 등 남서부 독일에서는 독일 농민전쟁을 기점으로 농민이 영방신분회 대표에 포함되는 영방 대의체(Landschaft)가 눈에 띄게 발전했다. 역사가 페터 블리클레는 이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전근대 농민을 비롯한 '평민(Gemeiner Mann)'이 역사 속에서 주도적으로 수행한 역할을 강조했다. 슈바벤 지역의 주요 제후국이었던 뷔르템베르크 역시 구제국 말기에는 하원을 통해 농민의 정치적 대표성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고, 구제국 몰락 이후에도 독일 자유주의와 의회주의 발전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Landschaft의 발전은 또한 북부 독일에서도 동프리슬란트와 하델른을 비롯한 북해 연안 지역에서 나타났다.
3.2. 초기 근대 국가로의 발전
한편 힌체는 유럽 근대 국가의 성립에 있어 유럽의 분열 및 치열한 군사적 경쟁이라는 지정학적 배경이 초래한 전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지적했다. 근대 초기 유럽 국가는 종교 전쟁, 계승 전쟁 등 빈발하였던 전쟁과 군사 혁명[8]이 초래한 기술적 혁신을 바탕으로 고도의 전쟁 수행 능력을 요구받게 되었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비용 역시 크게 증가하였다.고도로 증가하는 재정적 요구를 확보하기 위해서 군주는 지역의 엘리트 집단인 신분제 의회와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정치 권력을 재분배할 필요가 있었다. 쾨니히스베르거에 따르면 이 과정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 의회의 우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폴란드
- 의회와 군주 간 균형: 헝가리-크로아티아, 뷔르템베르크, 메클렌부르크, 동프로이센, 바이에른, 시칠리아, 카탈루냐, 프랑스 지방(부르고뉴, 브르타뉴, 랑그도크)
- 군주의 우위: 에스파냐, 포르투갈, 프랑스, 덴마크, 나폴리, 사보이아(사르데냐 왕국)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이 과정이 17세기를 기점으로 각 영방마다 다르게 전개되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헤센[9]은 군주의 우위가 관철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브란덴부르크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30년 전쟁 기간에 전쟁 수행을 위해 설치된 상비군과 관료 기구들을 전쟁 후에도 유지하는 한편, 1653년 영방 의회에서 융커 계급과의 타협을 통해 광범위한 조세 권한을 확보하였다. 그러면서 1653년을 마지막으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영방 의회는 소집되지 않았다. 또한 1661년 동프로이센의 신분제 의회가 소비세 도입을 거부하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프로이센 공국의 신분제 의회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신분제 의회에 강압적으로 통합시켰다.
흔히 '절대주의' 체제의 형성으로 알려진 이러한 과정은 결코 군주가 신분 집단을 완전히 무시하고 멋대로 세금을 징수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특권 신분은 관료 제도에 편입되어 군주의 국정 운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고, 그렇기에 군주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이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특히 귀족들은 결코 군주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었고, 기존의 특권을 보장받고 새롭게 정비된 정부 및 군대에서 높은 지위를 얻는 대가로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한편 국정 운영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대선제후의 권력 강화는 융커 계급에 대한 광범위한 특권 보장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프로이센의 관료제만 하더라도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르게 정확성, 효율성, 예측 가능성과 같은 근대적인 의미의 '합리적'이고 비인격적 지배 체제로서의 관료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대왕 시기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집무실 통치(Kabinettsregierung)는 전근대적인 가산 관료제의 성격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나 근대 초기 유럽 국가에서 만연했던 매관매직 관행은 공권력의 사유화를 촉진하였고, 이는 이 시기 국가 권력의 '근대성' 및 '중앙 집권'이 가지는 한계점을 드러내는 측면이었다.
또다른 영방 절대주의의 사례인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막시밀리안 1세의 시대를 거치면서 광범위한 재정, 행정, 법률 분야의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군주권의 강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17세기 동안 총 3번 소집되었던 바이에른 영방 의회는 1669년을 마지막으로 개최되지 않았고, 1682년에는 상비군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바이에른의 영방신분은 집행 능력을 갖춘 상설 위원회를 바탕으로 조세 및 재정 분야를 포함한 국정에 여전히 영향을 미쳤다.
군주와 신분회 간의 권력 균형이 형성된 작센 선제후국과 뷔르템베르크 공국, 메클렌부르크 공국들에서는 신분제 의회가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전까지, 심지어는 그 이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신성 로마 제국의 주요 영방들은 한편으로는 국가가 조세 권한을 독점하고 조세를 통해 재정을 조달하는 조세 국가(Steuerstaat)로, 한편으로는 상비군을 보유한 무장 제국신분(armierter Reichsstand)으로 발전하였다.
한때 이러한 초기 근대 국가의 형성을 '절대주의' 국가로 규정하였으나,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역사학계에서는 절대주의라는 개념을 점차 지양하고 있는 추세이다. 대신 근대 초기 유럽 국가의 조세 권한 독점을 통한 재정의 일원화와 상비군의 정비를 비롯한 폭력의 독점에 주목하여 재정 군사 국가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10] 다만 재정 군사 국가 역시 프랑스를 모델로 정립된 절대주의와 비슷하게 영국의 사례를 일반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에, 아직 절대주의 개념을 완전히 대체했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으로 독일사학계에서는 프랑스 중심적인 '절대주의'나 영국 중심적인 '재정 군사 국가' 개념보다는, 사회적 규율화(Sozialdisziplinierung) 및 교파화(Konfessionalisierung)라는 개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게르하르트 외스트라이히가 도입한 '사회적 규율화' 개념은 근대 국가의 형성을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한 것으로, 영방 내에서 법 질서 및 규율, 경찰력의 강화를 통해 치안을 유지하고 신민의 일상생활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려 한 것을 의미한다.[11]
여기에 볼프강 라인하르트와 하인츠 쉴링은 사회적 규율화 논의를 이어받아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을 부각한 '교파화' 이론을 개념화했다. 교파화 과정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군주가 영방의 종교를 선택하게 되면서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의 3대 '교파(Konfession)' 교회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면서 군주의 교회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각 영방에서는 각 교파의 교리를 기반으로 사회 규율을 강화한 것을 의미한다. 특히 라인하르트는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의 내부 개혁 및 교파화를 강조하면서 가톨릭 종교 개혁이 단순히 '대항종교개혁'이 아니라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유럽 근대 사회의 형성에 기여하였음을 밝히고자 했다.
위와 같은 연구 흐름을 거치면서 현재 독일에서는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까지를 '종교 개혁 시대'로, 1555년부터 1618년 30년 전쟁 발발 이전까지를 '교파 시대(Konfessionelle Zeit)'로 지칭하는 경향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12] 한편으로 이전까지 '절대주의 시대'라고 불리던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까지의 기간은 최근 18세기를 기점으로 '바로크 시대'와 '계몽 시대'로 구분하기도 하는데,[13] 아직 광범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한 상황이다.
4. 문서가 있는 영방국가 목록
신성 로마 제국 산하의 영방국가들 중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거나 해당 영방국가의 후신이 되는 국가가 나무위키에 문서로 존재하는 경우만 아래 목록에 기재한다. 명칭은 신성 로마 제국 존속 당시의 국명으로 기재한다.[예외]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영방국가들의 전체 목록은 다음의 링크들을 참조한다. - #, #- 독일 왕국
- 마인츠 선제후국
- 쾰른 선제후국
- 트리어 선제후국
- 팔츠 선제후국
- 작센 선제후국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
- 바이에른 선제후국
- 하노버 선제후국
- 오스트리아 대공국
- 뷔르템베르크 공국
- 바덴 변경백국
-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
- 헤센카셀 방백국
- 올덴부르크 공국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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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센마이닝겐 공국
- 작센알텐부르크 공국
- 안할트 후국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후국
- 리페 후국
- 샤움부르크리페 백국
-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
-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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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 나사우우징겐 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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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스터 주교후국
- 잘츠부르크 대주교국
- 리히텐슈타인 공국
- 함부르크 제국도시
- 브레멘 제국도시
- 뤼베크 제국도시
- 보헤미아 왕관령
- 부르군트 왕국
-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
5. 여담
한편, 독일사 및 중세 유럽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영방을 연방과 동의어라고 오해하는데, 둘은 전혀 다르므로 구분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연방은 동등한 지위의 정치체 간에 결성되고 가맹 혹은 탈퇴하는 권력통일체이나, 영방은 제국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체제도 연방제가 아닌데, 아무리 각 제후령 별로 저마다 중앙집권화하였어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국을 없애는 그 순간까지도 봉건제는 유지되었다. 각 영방은 군주인 신성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서약으로써 제국에 신속되었으며, 주군인 황제로부터 자발적으로든 힘으로든 승인받지 않는 한 제국에서 독립할 수 없었다. 예컨대 신성로마제국령 폴란드 영지는 독립하여 폴란드 왕국이 되기 전에 황제를 상대로 전쟁을 치렀다. 이 점은 연방구성원들의 합의로 구성국 탈퇴가 이루어진 말레이시아-싱가포르와 같은 사례는 물론 가입은 가맹국들 승인을 얻되 탈퇴는 회원국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유럽연합 등 국가연합 유형하고도 다른 점이다.알기 쉽게 보자면, 국가연합은 각 가맹국 정부들이 국가로서의 군대와 외교, 내치 등 주권 행사를 자유로이 한다. 연방은 각 지방의 주정부 혹은 구성국이 국가로서의 그러한 주권을 가지지 못하여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다.[15]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제국의 틀로써 묶여있는 영방 제후국들은 부분적 주권을 인정받았으나 이는 자신들 스스로 합의로써 세운 황제 및 제국법에 종속되었으므로,[16] 황제의 승인 혹은 묵인 하에서 그것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에 황제도 군주라기보다는 대표자에 가까운 존재여서 암묵적으로나 불법적으로 외교권 등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영방국은 독립국과 구성국의 중간 정도 지위이다.
6. 관련 문서
[1]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중세사가 테오도어 마이어는 인적 연합 국가(Personenverbandstaat)가 제도화된 지역 국가(Institutionelle Flächenstaat)로 발전하였다고 개념화하였다. 마이어의 인적 연합 국가 개념은 나치즘과의 관련성이 지적되기도 한데다 현재에 와서는 학술적으로도 비판을 받아 거의 폐기된 개념이나, 중세 유럽의 사적 유대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영토 국가의 출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2] 오스트리아의 중세사가 오토 브루너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직도 가장 중요한 참고 저작으로 꼽히는 Land und Herrschaft(란트와 지배, 1939)에서 중세 후기의 란트를 영주가 주재하는 단일한 법 질서에 의해 통치되는 영역 혹은 법적 공동체로 규정하였다. 브루너는 Land의 개념 규정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Land와 Territorium을 후대인들의 시선에서 엄격하게 구분하려 한 시도를 비판했고, 당대인들은 Land를 의미하는 Terra와 Territorium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3] 프로이센 왕국이 유일하게 주권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으로 황제인 합스부르크 가문을 꺾었기 때문이다. 다른 세속 선제후들인 작센 선제후국, 팔츠 선제후국, 바이에른 선제후국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반항하기는 했지만 작센은 슈말칼덴 전쟁, 팔츠는 30년 전쟁, 바이에른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박살났다.[4] 이러한 번역 문제는 공국이나 후국, 백국 등 여러 봉건적 정치체들에도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부분이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문서 참고.[5] 여담으로 이 제국신분을 얻기 위해 노력한 곳이 바로 리히텐슈타인의 통치 가문인 리히텐슈타인 가문이다. 본래 빈의 귀족 가문이었던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결혼으로 보헤미아 왕국(체코) 트로파우 일대에 엄청난 영지를 소유했지만 제국신분을 가질 수 있는 영지는 아니었고 이때문에 리히텐슈타인을 매입해 제국신분을 획득했다.[6] 보헤미아 본토, 슐레지엔, 라우지츠 등[7] 알자스와 슈바벤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월경지로 프라이부르크 등이 포함된다.[8] 다만 이는 현재 학계에서는 '혁명'이라기보다는 군사적 혁신에 가까웠다는 것이 중론이다.[9] 헤센카셀 방백국,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10]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절대 왕정이 탈락되고 재정 군사 국가 개념이 도입된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11] 이는 푸코의 권력 개념과도 유사성을 보인다.[12]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 개설서 시리즈 Gebhardt Handbuch der deutsche Geschichte의 최신 개정판에서 1495년에서 1648년까지 시기를 1495~1555 제국개혁과 종교개혁 / 1555~1618 교파 시대 / 1618-1648 30년 전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13] 올덴부르크 역사 개론(Oldenbourg Grundriss der Geschichte)에서 이 시대를 다룬 하인츠 두히하르트(Heinz Duchhardt)의 책의 2015년 개정판의 제목이 '절대주의 시대'에서 '바로크와 계몽'으로 수정된 것이 대표적이다.[예외] 정확히말하면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경우는 신성 로마 제국 해체 7개월전인 1월 1일에 왕국으로 승격되었으나 선제후국으로 서술한다.[15] 미국의 사례를 반례로 거론하는 경우가 있으나, 각 주정부가 지휘권을 갖는 주방위군과 주방위대는 어디까지나 연방법이 허용하는 선 안에 있거나 아예 연방법에 의거하여 존재하므로 옳은 예시가 아니다. 주방위군은 연방법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유사시 연방화되므로 완전한 독립군으로 볼 수 없고,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주방위대 육군의 경우 주법에 근거하므로 주방위군보다는 자유로우나 그 또한 연방법에서 규정되어 있는 합법무력이며, 그 실제 전력도 정규군에는 못 미치기에 준군사조직으로 보는 편이다.[16] 중세 유럽에서는 의외로 세속 봉건사회에서도 공화주의적 토대를 지닌 경우가 많았다. #스코틀랜드의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