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탄생에서 가독계승까지
1534년 음력 5월 12일.[1] 오와리[2]의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적차남으로 태어나, 2세 때 나고야 성(名古野城)[3]의 성주가 되었다. 아명은 킷포시(吉法師). 참고로 노부나가의 집안은 오다 단조노츄(弾正忠)로, 오와리 지방의 슈고(尾張守護)인 시바(斯波) 가문의 신하이며 오와리의 하 4군의 슈고다이(守護代)인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또는 키요스 오다 가문)의 가신인 키요스 삼 봉행의 한 가문이었다. 노부나가가 탄생했을 즈음의 오다 가문은 오와리 슈고인 시바 가를 괴뢰로 만들고 정권을 잡은 센고쿠 다이묘였으며, 통상적으로 협조를 얻을 명분이 부족한 하극상 세력이 그러하듯이 내부 분열로 인해 아버지 노부히데가 속한 오다 단조노츄 가,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 그리고 오와리의 상 4군의 슈고다이인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또는 이와쿠라 오다 가문) 등 3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1548년에는 오다 노부히데와 사이토 도산 간의 정략결혼에 합의, 그의 딸 노히메와 혼례를 올린다.
2. 오와리 통일
부친이 사망하자 평소 노부나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하야시 히데사다, 하야시 미치토모, 시바타 카츠이에는 노부나가의 친동생 오다 노부유키를 옹립하려 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장례식 때 노부나가는 아버지의 시신에 향을 한사발 뿌리고 그대로 불을 붙여 화장을 시켜버렸는데 당시 화장보단 매장을 했던 일본 문화권 입장에선 경악할 일이 었다. 이 사건 때문에 가신 중 한 명은 할복을 하였다. 다만 이건 전통적인 것을 꺼리는 오다의 성향이기도 하고 이 부분이 그의 세력을 확장 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아무튼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없애기 위해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 모리 요시나리 등을 끌어들여 대립한다.
당시 어린 노부나가는 아직 위험했고 친족들과 동네 패싸움급 작은 싸움을 하면서 실력을 기른다. 당시 오다 가문의 내분으로 1500명의 군세를 이끌고 3000명과 이겨내기도 하면서 친척들과 싸우면서 실력을 길러 나간다.
1556년 4월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나가라가와 전투"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남 사이토 요시타츠와의 싸움으로 사망한다. 노부유키 파는 노부나가가 도산의 지지를 잃게 된 것을 호기로 여겨 같은 해 9월 27일 군사를 일으켜 노부나가와 "이노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 스에모리 성(末森城)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어머니 도타고젠의 중재로 노부유키와 카츠이에 등을 사면한다.
1557년 오와리의 통치자였던 오다 노부토모[4]의 지지로 노부유키가 다시금 모반을 꾀하나 카츠이에의 밀고로 모반이 발각되어 노부유키는 살해당한다. 이후 오와리의 명목상 최고 통치자로서 노부토모와 일을 같이 하던 시바 요시무네(斯波義統)가 노부토모의 음모를 노부나가에게 밀고하였고, 분노한 노부토모가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하자 노부나가가 주가 살해의 죄를 물어 다시 노부토모를 살해하여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559년에는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의 거성 이와쿠라 성을 함락해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도 멸망시켰다. 이로써 방계 혈통이던 노부나가가 오다 가의 당주가 되었다.[5]
2.1. 오케하자마 전투
가문의 주인이 된 후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6] 3국의 태수이자 도카이도 제일의 다이묘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군사 3만을 이끌고 오와리를 침공한다. 당시 노부나가는 삼천의 군대를 이끌고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군을 기습하여 격파, 결국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벤다.3. 미노 진공
이후에 처조카 사이토 타츠오키[7]의 사이토 가문을 격파, 미노를 수중에 넣고, 당시 교토로 가는 통로인 오우미의 중견 영주였던 아자이 카타마사에게 여동생 오이치를 주었다.4. 기나이 진공: 상락
한편, 노부나가가 미노에서 사투를 벌일 당시, 기나이에선 미요시 요시츠구가 1565년 5월에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죽이며 무로마치 막부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8] 이 에이로쿠 정변에서 요시테루의 유력 친족들은 절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야마토에 기거하던 요시테루의 동생들 중 한 명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야마토에서 어찌어찌 살아남은 요시아키는 아사쿠라 가문과 교섭하여 야마토를 탈출, 이후 노부나가에게 몸을 의탁한다.[9]노부나가는 아직 미노 전체를 수중에 넣은 상태가 아님에도 요시아키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고 미노를 평정하자 천하포무(天下布武)의 기치를 걸며 다음 목표를 기나이로 정하게 되었다. 1568년 7월 즈음부터 요시아키와 함께 상락의 채비를 시작한 노부나가는 9월 7일, 군사를 이끌고 미노의 기후성에서 출발했다. 이에 노부나가의 출병 소식을 들은 기나이의 여러 세력들은 노부나가에게 저항하기 위해, 지금껏 자신들을 지원해준 미요시 가문의 편에 붙어 군사활동을 준비해나가기 시작한다. 미요시 가문이 강한 영향력을 뻗혔던 사카이는 해자를 파고 망루를 세워 군사방어 시설을 구축했으며, 에고슈(会合衆) 또한 이즈미의 동맹세력을 찾아 동분서주하며 방비를 구축해가는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그마치 동월 25일에 반 노부나가 세력에 속하는 롯카쿠 요시카타의 오우미 간논지 성을 무력으로 통과, 26일부터 다시 진군하여 미요시 산닌슈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 있는 야마시로와 셋츠 일대에 이르렀다. 야마시로 쇼류지 성에 있던 이와나리 토모미치는 밀려오는 노부나가의 군세와 맞서 싸웠으나 열세가 계속되자 29일,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고야 말았다. 동쪽의 중요 거점을 빼앗겼다는 보고를 들은 미요시 가문의 기둥격인 미요시 나가야스는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 셋츠 아쿠타가와야마 성에서 간레이 격에 위치했던 호소카와 노부요시를 데리고 아와로 도망쳤다. 심지어 노부나가의 군세는 미요시 가문에 의해 새로 옹립된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거처하고, 미요시 가문이 보호하던 지역인 후몬지(普門寺) 또한 공격하는 기염을 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요시히데 또한 아와로 물러났으나, 본인은 10월 20일에 병사하고 말았다.
미요시 세력을 한 번에 물리친 노부나가는 30일 그들의 주요 거점이었던 아쿠타가와야마 성에 입성하여 잠시 동안 자신의 거성으로 삼았다. 상락 이후에 노부나가에 대한 축하 인사가 끝도 없이 이어진 것을 생각해보면 미요시 가문의 옛 거성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노부나가의 아쿠타가와야마 성 직할 통치는 10월 14일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며, 후임은 와다 고레마사에게 맡겼다.
이렇게 노부나가는 끝내 기나이의 세력을 물리치고 교토로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됐지만, 원래의 명분대로 14대 쇼군 요시히데를 부정하고 요시아키를 새로운 15대 쇼군으로 세워 무로마치 막부의 존속에 진력하게 된다. 또한 이번 기나이 원정에서 활약한 세력들에게도 논공행상을 하여 요시츠구에게는 카와치의 반을, 히사히데에게는 야마토를, 하타케야마 다카마사에게는 카와치의 반을, 이타미 지카오키, 이케다 가쓰마사, 고레마사 세 명에게 셋츠의 치교권을 부여하였다. 기나이의 호족들을 자신의 세력에 머물도록 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4.1. 히사히데와의 연락
에이로쿠의 변 이후 기나이에서 어찌저찌 통치를 해나가던 미요시 가문이었지만, 1565년 10월에 미요시 산닌슈와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내분이 터지자, 가문이 두 쪽나게 된다. 히사히데는 이후 명확한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계속 밀려나는 모양새였으며, 당주 미요시 요시츠구가 제 편으로 전향했음에도 좀처럼 세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이에 요시츠구와 히사히데는 자신들과 인연이 있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상락의 준비를 보이는 노부나가에게 연락을 취하였다.1567년 8월부터 이들은 통교를 시작했다.
4.2. 미요시 가문과 전쟁
노부나가에 의해 기나이는 평정된 듯이 보였지만, 미요시 가문에게 형과 어머니를 잃은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미요시 가문의 반공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곧 아직 기나이가 완전히 진정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요시아키는 모리 모토나리와 오토모 소린의 사이,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사이를 조율하며, 분쟁 상태에 놓인 열도의 다이묘들을 통합시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 화친의 고나이쇼에 "아슈의 흉도들을 퇴치해줄 것"이라는 내용의 문장을 활용하고 있으니, 요시아키가 당시에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다.과연 요시아키의 걱정은 딱 맞아 떨어져, 기나이는 미요시 가문을 필두로한 여러 반 노부나가 세력과의 다툼에 시달리게 된다. 1568년 12월 28일에 산닌슈 세력은 키나이에 상륙해 요시츠구의 성들을 떨어트리며, 1569년 1월 5일에 요시아키가 거처하는 혼코쿠지(本圀寺)를 습격했다. 기세에 밀리게 된 요시아키였지만, 요시츠구 등의 다이묘들이 혼코쿠지 습격 소식을 듣고 바로 지원군으로 달려온데다, 소식을 들은 노부나가가 10일날 교토로 복귀했기에 산닌슈의 세력은 마땅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아와로 다시 철퇴하게 되었다. 이렇게 미요시 가문을 물리친 노부나가는, 그들에게 병량미를 제공해주고 같은 편에 섰던 야와타(八幡)를 공격하거나 아마가사키에 불을 놓는 등 후환을 제거해나갔다.
1570년이 되자 이번엔 노부나가가 셋츠의 치교권을 준 이케타 가문에서 6월 19일에 소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케다 가쓰마사의 일족 이케다 토모마사가 아라키 무라시게, 미요시 나가야스와 협력해서 가쓰마사를 이케다 성에서 추방시킨 것이다. 특히 후세의 군키모노가타리에선 토모마사의 배반에 나가야스가 끼친 영향력이 지대하다 읊고 있으니, 미요시 가문은 기나이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렸어도 노부나가와 싸워 옛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필사적인 작업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4.3. 이세 진공
1569년 8월, 노부나가는 이세의 키타바타케 토모노리[10]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 이전, 즉 상락 이전에도 노부나가는 오와리 침공의 경로가 될 수 있는 이세에 대한 제압 작전을 실시하였지만, 그때 주로 상대하였던 것은 북이세의 칸베 씨와 나가노 씨였다. 그 칸베 씨는 노부나가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삼기로 하며 노부나가에게 굴복한 상태였고, 나가노 씨 역시 노부나가에게 축출되었기에, 키타바타케에 대한 공세를 시작할 때 북이세는 오다의 영역이었다. 이 오다의 북이세 장악, 특히 키타바타케 가의 분가가 되어 있었던 나가노 가의 축출이 키타바타케의 반발을 불렀고, 양자의 적대를 심화시켜, 노부나가의 대대적 이세 침공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대군을 이끌고 남하한 노부나가는 키타바타케의 거성이었던 오카와치 성을 포위하고 키타바타케 군과 교전하였다.
5. 노부나가 포위망
오다 노부나가 초상[11] 효고현 히카미 정 소장 |
5.1. 아사쿠라와 아자이의 동향
1570년 4월이 되자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롯카쿠 요시카타가 본격적으로 거병하여 노부나가와 적대하기 시작하였다. 노부나가는 동맹 관계의 도쿠가와를 끌어들이는 한편, 롯카쿠 세력을 격파하고 사사건건 대립했던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을 멸하기 위해서 에치젠에 출병하지만, 아사쿠라 가와 동맹이었던 아자이 가의 나가마사가 노부나가를 배신하게 된다.(가네가사키 전투) 이후 아자이, 아사쿠라 동맹과 오다, 도쿠가와 동맹 사이에 큰 교전은 그해 6월에 벌어졌다. 두 세력은 오우미 아네가와(姉川)에서 대규모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의 승자는 노부나가였고, 아사쿠라 - 아자이 동맹은 타격을 입었다.(아네가와 전투)크나큰 타격을 입은 것 같던 아사쿠라 - 아자이 동맹이지만, 9월에 혼간지 세력을 끌여들여 노부나가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늘려나갔으며, 이들의 군사 활동이 활발해지자 다시 오우미로 출병하기에 이르렀다. 20일에는 남오우미를 전전하며 노부나가에게 소속된 성을 떨어뜨리거나 사카모토에 진을 놓고 야마시나고(山科郷)를 불태우고 다니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며 노부나가를 괴롭히게 된다. 이 과정 중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에게 속했던 사사세력인 엔랴쿠지를 불태우기도 했다.[12]
5.2. 미요시의 동향
셋츠에서의 공작에 성공한 미요시 산닌슈 세력은 1570년 7월에 노부나가에 대한 병사를 일으켰다. 노부나가는 이 상황에 대처하며 친선 관계에 있던 모리 테루모토에게 "셋슈에서 착란이 발생했기에 4일 상락하였습니다. 로닌들은 무사히 소멸하여 하향하고 있으나 각별한 주의를"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서장을 7월 10일 보내어 다시 기나이를 평정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하지만 셋츠의 미요시 세력은 소멸되는 일 없이 오히려 세력을 더욱 불려나가게 된다. 먼저 8월에 거점을 노다(野田)와 후쿠시마(福島)로 지정하여 셋츠에 뿌리를 내렸으며, 9월이 되자 혼간지 세력과 연계하여 그들을 노부나가 포위망에 본격적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더욱이 산닌슈 세력은 아와에 남아있던 미요시 가문의 당주 미요시 나가하루와 그의 측근 시노하라 나가후사를 위시로 하여 9월 27일쯤 시코쿠군을 키나이 상륙시키게 된다. 특히 혼간지 세력과 혼척 관계에 있던 나가후사에겐 혼간지 켄뇨의 맹약 서장이 9월 19일에 한 번, 10월 1일에 한 번 보내지기까지 하여, 아와의 2만과 합쳐 약 3만의 군세를 규합하는 것에 성공한 미요시 가문은 셋츠의 카와라바야시 성이나 이바라키 성을 공략하고 교토를 목전에 둔 상태가 되었으니, 미요시 가문이 이번 노부나가 포위망에서 이시야마 혼간지와 함께 당당히 서쪽의 주력을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이런 혼간지와 미요시의 대세력에 가로막힌 노부나가는 오우미로 출병을 계속하는 아사쿠라 - 아자이 동맹을 직접 막기 위해, 동월 22일에 미요시 요시츠구와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노다, 후쿠시마 성의 포위를 맡기고 사카모토로 떠났다. 이후 셋츠의 전선은 교착 상태로 접어들었고, 주력 세력 중 하나였던 켄뇨는 10월 30일에 소렌인(清蓮院)의 몬제키(門跡) 손쵸 호신노(尊朝法親王)의 중개를 받아들여 노부나가와 강화를 맺게 되었다. 미요시 가문 또한 한 달 정도를 버틴 11월 21일에 나가후사가 히사히데를 중개로한 강화를 받아들였기에, 노부나가는 서쪽의 전선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에 성공했다.[13] 이번 중재의 결과, 노부나가는 히사히데의 딸을 양녀로 받아들여 나가하루와의 혼인을 성사시켰기에, 미요시 가문과는 혼척 관계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미요시 가문은 노부나가를 상대로 옛 영향력을 어느정도 회복시키는 것엔 성공했지만, 노부나가 측의 강화를 수락함으로써 당분간 노부나가 측에 강경한 공격을 걸어오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14]
반면 나가후사는 1571년 5월에 오다 가문과 동맹상태에 있던 모리 가문의 영지인 비젠의 코지마로 공격을 감행했기에, 노부나가는 잠시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15] 비젠의 사태가 좀 진정된 동월 26일날 테루모토와 함께 수명에 간당간당한 모리 모토나리가 연서한 서장이 노부나가의 앞으로 보내진 것은 모리 가중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요소가 아닐까. 아무튼 이런 서장을 받은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에게 내용을 전달해, 각각 6월 20일 모리 조손 앞에, 6월 12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앞에 시코쿠 세력의 평정 명령이나 강화 사실에 대한 변명을 하는 내용이 담긴 서장을 써내게 된다.
5.3. 쇼군의 거병
한편 적대세력들이 노부나가의 새로운 영지를 갉아먹는 와중, 노부나가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관계는 점점 험악해져갔다. 결국 요시아키는 우에스기, 다케다, 호조 등의 세력에 고나이쇼를 보내며 자신 또한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으로 참전할 것을 결의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이로서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적대하게 된다.
노부나가의 군세에 의해 친 노부나가 세력에 복속되어있던 미요시 요시츠구와 마츠나가 히사히데 또한 쇼군의 움직임에 빠르게 반응해나갔다. 이들은 5년에 걸쳐 적대해온 미요시 산닌슈 세력과 강화를 맺어 자신들이 반 노부나가 세력으로 참전한다는 것을 알렸으며, 히사히데 부자가 1571년 5월 6일, 요시츠구가 6월 11일에 거병하여 카와치의 하타케야마 가문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완전히 노부나가를 져버리고 쇼군의 편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이들은 7월 4일에 야마토, 15일에 셋츠 타카츠키 성의 와다 코레마사, 8월 4일에 츠츠이 준케이, 10월 15일에 아와 세력의 원조를 받으며 야마토를, 11월 14일엔 다시 카와치를 공격하는 엄청난 활동을 보여주며, 노부나가의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오르게 된다. 더욱이 비젠의 전선에서 군사를 물리고 돌아온 시노하라 나가후사 또한 요시츠구, 히사히데와 동맹을 맺고 7월 12일 즈음엔 키나이에서의 행적이 보일정도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껏 안정시켜놓았던 서부전선이 급속히 무너져내린 것이다.
11월 8일에는 나가후사, 요시츠구, 히사히데, 미요시 야스나가 등이 타카야 성을 포위하고, 츠케지로(付城)를 쌓는 등의 군사활동을 보이면서 노부나가를 더욱 압박했다. 이 키나이의 미요시 연맹은 신부이자 예수회 일본포교장이었던 포르투갈인 프란시스코 카브랄(フランシスコ·カブラル)이 인도 관구장(パードン·アントニオ·デ·フアドウロ)에게 보내는 1572년 9월 23일 서간에 "근처에서 아와 및 하나의 쿠니의 주인인 시노하라공이 쿠보님을 살해한 미요시공과, 단죠 공 또한 함께 군사를 이끌고 쿠보 측의 성들을 포위하고 있습니다."고 나타나있으니, 미요시 세력이 얼마나 격하게 노부나가의 영역을 들이치고 있었는지 쉬이 알 수 있다.
이 와중에 동부 전선에서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아자이 연합과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1572년 아자이 나가마사의 본성인 오다니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572년 10월 드디어 다케다 신겐이 대군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력을 비교하면 노부나가의 전력이 신겐의 전력보다 거대했지만, 노부나가 포위망이 완성된 상태였기에 노부나가는 군대를 더 모아 신겐을 막을 여력이 충분하지 못했다. 다케다 신겐은 음력 12월 22일 노부나가의 맹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격파한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면서 적설을 핑계로 군을 물리기도 했다.
이윽고 1573년 2월이 되자 노부나가와 요시아키의 악화된 관계는 표면화되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자 요시아키는 3월에 직접 거병, 본격적으로 노부나가와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1573년 5월 다케다 신겐이 사망하면서 다케다 군이 퇴각하고 이제 한시름 놓은 노부나가는 재빨리 이 모두를 일축하기 시작한다.
1573년 8월엔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요도 성의 이와나리 토모미치를 전사시켰고, 11월에는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카와치 와카에 성의 공격을 명해 요시츠구를 자결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로써 약 5년 동안 노부나가의 뒷통수를 노리던 미요시 가문의 수뇌부는 키나이에서 대부분 축출되었다.
전황이 최악의 끝을 달리자 미요시 나가하루는, 동년 4월에 이미 자신의 동생인 소고 마사야스가 노부나가에게 요시츠구를 공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고 주전파인 나가후사를 축출하며[16] 내부세력을 어느 정도 추스렀다고 생각해서 노부나가와 친선을 맺으려는 시도를 행했지만, 노부나가는 당연히 거절했다(...).[17] 나가하루는 추후에도 친선의 서장을 보냈지만 노부나가가 그를 허용하는 일은 일체 없었고 사이카슈의 보고에 따르면, 계속해서 반 노부나가 세력에 남아있을 것을 표명하여 여전히 노부나가의 적으로서 시코쿠에 주둔하는 상태에 머물렀다.
동쪽에서도 1573년 9월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아자이 나가마사가 나란히 붕괴되었다. 요시아키는 모리 테루모토에 의지해 주고쿠로 달아났다. 노부나가는 나가마사의 아버지 아자이 히사마사와 요시카게, 나가마사의 해골에 금박을 입혀 술잔으로 만들고, 히사마사의 아내이자 나가마사의 어머니 오노도노의 열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가며 처형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하였다.
6. 기나이 평정
노부나가 포위망을 일소시킨 노부나가는 완전히 기나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움직인다.1574년 4월이 되자 강화로 물러나있던 혼간지의 세력들이 노부나가의 움직임에 맞춰 다시 거병하였다.
1575년에 들어서자 반 노부나가 세력으로서 이즈미에서 할거하던 소고 가문이, 4월에 니이보리 성이 함락되면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미요시 가문의 세력이 쇠하자 카와치에서 할거를 계속하던 미요시 야스나가 또한 결국 1575년 4월 8일을 기점으로 타카야 성에서 항복을 표명하게 된다. 노부나가는 이런 야스나가를 자신의 세력으로 맞이해주었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기나이에서 활동하는 미요시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게 된다.
이후 노부나가는 즉각 미요시 가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기나이 평정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혼간지는 자신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야스나가와 노부나가의 중요 외교관 중 한 명인 마츠이 유칸을 통해 10월 중 노부나가와의 강화에 들어가게 되어 12월에 강화를 확정지었다.
교토 북서쪽의 탄바 지역은 이미 당시 그 지역의 유력가였던 하타노 히데하루(波多野秀治)가 노부나가 상락할 때의 종속했었지만, 1576년에 당시 같이 출진해있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돌연 통수를 날렸다. 이에 1578년에 미츠히데는 노부나가의 명을 받고 본거지 야카미 성(八上城)을 포위했다. 병량이 다한 히데하루는 동생 히데나오(秀尚)와 함께 항복, 아즈치 성으로 끌려갔고 노부나가는 이 둘을 책형으로 다스렸다.
6.1. 본격적인 이시야마 합전 개막
1576년 2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모리 데루모토를 의지해 빈고 토모로 하향했다. 요시아키와 적대관계를 명확히 한 노부나가 또한 이 일을 들었기 때문에, 에이로쿠 말년에서 이어진 오다 가문과 모리 가문의 관계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1570년부터 꾸준히 노부나가에게 적대해온 혼간지 세력 또한 두 번의 강화를 맺었음에도 반 노부나가 세력으로서의 거동을 멈추지 않았다. 요시아키 또한 자신의 곁을 떠나 데루모토에게 떠난 시점에서, 혼간지 세력에 예의주시하던 노부나가는 1576년이 되자 혼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모리 가문이 혼간지를 지원해주기 시작하며 서쪽 전선의 구도는 모리vs오다로 흘러가는 모양새를 갖추기도 하였다. 특히 세토내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혼간지 세력에 병량미를 가져다 주는 모리 가문에게 대적하기 위해, 5월 23일의 노부나가 주인장에 보이듯이 아와지에서 수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아타기 진고로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며 모리 가문의 해상전력을 막기 위한 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노부나가는 혼간지 세력을 지원해주는 모리 가문을 막기 위해 7월의 키즈가와구치에서 이들과 전투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6.2. 쵸소카베 가문과의 접촉
노부나가는 시코쿠 동부에 본거를 두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공격을 가해온 미요시 나가하루를 토벌하기 위해, 미요시의 후방을 쳐 줄 수 있는 시코쿠의 다른 우군을 찾아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시코쿠 각지의 슈고(守護)를 맡았던 호소카와 가문의 당주 호소카와 노부요시를 통해, 미요시 가문에게 항전하는 카가와 노부카게 등의 사누키 호족들에게 미요시 가문의 영지인 사누키 동부나 아와 서부를 수여해준다는 서장을 1574년에 보내며 지방의 호족 및 공권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다.특히 노부나가가 눈독을 들이던 사내는 호소카와 가문에 사관했던 무사 집안의 당주이자, 호소카와 가문의 주요 통자인 모토(元)를 쓰며, 1575년에 토사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쵸소카베 모토치카였다.[18]
이러한 노부나가는 아와로의 출병을 결의하는 모토치카에게 아와에서의 군사활동을 보증해주며, 아케치 미츠히데를 전담 외교관으로 붙여주었고, 그의 장남에겐 자신의 통자인 노부(信)를 주어 노부치카(信親)로 이름을 정할 것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7. 동방 진공
7.1. 나가시노 전투
1575년 다케다 신겐을 계승한 다케다 카츠요리가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충돌하자, 지난번에 노부나가 포위망이 조여들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노부나가는 이젠 아사쿠라-아자이도 정리되었겠다.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나와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다케다에게 큰 패배를 안겼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이로부터 다케다 군은 서서히 약해졌고 1582년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다케다 토벌군이 편성되어 모리 나가요시에게 북시나노 방면,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 코즈케 방면으로 진공하게 하여 다케다를 소멸시키고, 이는 우에스기 세력에게도 커다란 압박이 되었다.
7.2. 카츠이에의 호쿠리쿠 원정
나가시노 전투에 승리한 노부나가는 호쿠리쿠 방면 진출에도 한 발을 걸쳤다. 이에 호쿠리쿠의 주인 우에스기 겐신은 1576년 잇코잇키와 손을 잡고, 오다와 우에스기 사이에 껴 있던 지방인 엣추(도야마현), 노토 반도를 침공한다. 이 전투는 노토 영주가 결사항전해 시간을 끌었고 간토 전선에서 원군 요청이 와 우에스기 겐신은 일단 철군한다.1577년 10월, 노부나가는 엣추, 노토 지방에 오다군을 파견하나,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시바타 카츠이에가 지휘하는 5만 오다군을 우에스기 겐신은 더 적은 3만 5천 병력으로 크게 격파한다. 일본에서도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하천 테도리가와의 물이 불어났고, 겐신은 퇴로를 이 강으로 막아서 전투로 죽은 병사보다 물에 빠져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노부나가의 후방에 큰 위협이 될 상황이었지만, 과거 다케다 신겐이 갑자기 죽는다는 행운이 노부나가에게 찾아왔던 것처럼, 1578년 4월 겐신마저 급사해 노부나가를 막을 길은 사라졌다.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시대의 막을 내리고 노부나가는 자신에 반대하는 영주들을 차례로 멸하여 맹위를 떨친다.
1582년, 시바타 카츠이에로 하여금 우에스기 씨를 밀어붙이게 하여 호쿠리쿠의 도야마 성 · 우오즈성(魚津城)을 치게 하고, 여기에 우에스기씨 내부에서 시바타 시게이에가 반란을 일으켜 우에스기씨는 안팎의 적을 막느라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진다.
8. 서방 진공
한편 키즈가와구치 전투에서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주었던 아타기 진고로는 1577년이 되자 노부나가 세력에서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기에[19], 모리 가문에게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을 다시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해 여러 번의 교섭을 직접 관리하기도 하였다.1578년 3월에는 하리마의 벳쇼 나가하루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1578년 11월 6일 제2차 키즈가와 해전에서 구키 요시타카가 모리 수군을 격멸했고, 이로써 제해권을 장악한 오다 수군은 혼간지로의 보급을 끊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1579년 10월 아리오카 성이 함락되고 미즈키 성의 정세가 상당히 악화되어 혼간지 세력은 강화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강화협상이 시작됐다. 강화가 이뤄진 후 1580년 3월에 혼간지 세력이 오사카에서 퇴거했다. 8월에는 혼간지 켄뇨를 이어 오사카에서 잔존세력과 노부나가에게 항전을 계속하던 혼간지 쿄뇨도 오사카에서 물러나, 혼간지 세력을 사실상 평정했다.
1580년 8월 20일에는 시마즈 가문과 오토모 가문의 강화를 명했다.
1581년 11월 6일에는 노부나가에게 이탈했던 아타기 가문 등의 아외지 호족들이 다시 노부나가의 세력으로 포섭됐다.
8.1. 히데요시의 주고쿠 원정
1580년 음력 3월이 되자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모리 가문을 공격하기 위한 주고쿠 원정을 명령하게 된다. 이 시점을 전후로 노부나가는 혼간지 세력과 강화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히데요시와 우키타 나오이에, 그리고 사누키와 이요 등의 세력을 이용해 모리 포위망을 구상했다고도 볼 여지도 있다.1580(1582?)년[20] 9월 즈음에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미요시 가문의 시노하라 사네나가 등의 구원요청에 응해, 구로다 요시타카, 센고쿠 히데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을 통해 아와와 아와지에도 영향을 뻗히기 시작했다.
1581년 11월에는 아와지에 군세도 직접 파견하여 이와야 성을 공략하여 아와지를 노부나가의 세력하에 두는 것에도 성공한다.
8.2. 시코쿠 원정 계획
노부나가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을 표명한 미요시 나가하루는 1576년 12월, 상관격인 호소카와 사네유키에게 패해 사망해버렸다.[21] 이에 미요시 가문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지만, 소고 마사야스가 1578년 1월에 사카이에서 내려와 미요시 가문의 새로운 당주가 되었기에 미요시 가문의 혼란은 어느 정도 수습됐다. 문제는 마사야스가 모리 가문의 최중요 인사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축의를 받았단 사실이다. 노부나가로서는 알아서 무너져갈 세력이 갑자기 되살아난 꼴. 어쨌든 미요시 가문이 다시 기능을 시작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친 노부나가 세력에 속하는 토사의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본격적으로 미요시 가문의 영지를 침공하기 시작했다.1578년, 시코쿠의 아와에서 미요시 가문의 미요시 시키부노쇼(三好式部少輔)가 모토치카에게 항복했다.[22] 모토치카는 이 일에 대해 노부나가에게 보고했던듯, 노부나가는 6월 12일에 "시키부노쇼 등과 관련해서 뒷생각을 품고 있진 않다. 아와 방면에선 열심히 일해주길 바라고, 시키부노쇼와의 일은 그쪽에서 처리하길"이라는 주인장을 모토치카의 동생인 코소카베 치카야스에게 붙임과 동시에, 미요시 야스나가에게도 부장의 발급을 명하여, "노부나가의 주인장과 시키부노쇼에 관련된 일"이 적혀있는 6월 14일의 야스나가 서장 또한 치카야스의 앞으로 보내지게 되었다.[23]
이렇듯 노부나가는 쵸소카베 가문을 우군으로 생각함과 동시에, 그들이 아와를 공략하는 데에 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한 태도를 취해왔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1580년 6월 26일 아케치 미츠히데를 중개로하여 매와 설탕을 진상해왔다고 할 정도로. 그런데 1581년 정월에 들어서며부터 이들 사이엔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게 된다. 노부나가가 동월 23일에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보내는 서장의 내용 중에서 "미요시 야마시로노카미를 아와로 보냈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여태껏 시코쿠의 방침에 손을 대지않던 노부나가가 야스나가를 시코쿠로 파견시킨 것이었다.
야스나가가 속하는 미요시 가문은 아와에 본관을 두는 일족이었고, 쵸소카베 가문의 아와 진공에 강경한 관여를 보이지 않던 노부나가가 갑자기 지역적 연고가 존재하는 야스나가에게 시코쿠로의 도해를 명한 것은, 모토치카가 노부나가를 의심하기에 아주 충분한 조건이었다. 1580년으로 비정되는 11월 23일의 마츠이 유칸 서장에서 유칸이 노부나가가 야스나가에게 아와와 사누키를 내렸다는 부분을 보면 노부나가의 의도는 사실상 명백한 상황.[24] 더욱이 야스나가의 군세는 타라오, 이케다, 노마 등을 포함하는 카와치의 세력이자 미요시 요시츠구의 중신이었던 자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노부나가가 키나이에 세력을 영유하던 미요시 가문을 배척하거나 떨어뜨려놓긴커녕 중용했다는 사실 또한 간파할 수 있겠다.[25]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의 가세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이러한 노부나가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일련의 사건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는 서장을 1580년 11월 24일에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보내게 된다.[26] 이후 노부나가는 12월에 미츠히데의 중개를 통하여 모토치카에게 이요의 새매를 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도 했으나 상기된 대로 야스나가의 시코쿠 파견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다만 1581년에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이던 마사야스가 갈등을 맺던 호족들과 화했을 뿐, 야스나가가 시코쿠에서 어떤 활동을 보였는지, 심지어 도해가 확인되는 사료조차 전무하기에, 노부나가가 자신의 생각대로 시코쿠를 지배하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불협화음을 내며 삐걱이던 관계는 1581년 11월까진 어찌저찌 유지됐지만, 곧 파탄에 이르렀다. 이에 노부나가는 본격적인 시코쿠 원정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게 된다.
1582년 2월이 되자 정식으로 모토치카를 토벌하기 위해 야스나가를 시코쿠로 파견, 3월 가이 다케다 다이묘 가문을 멸망시킨 노부나가는 5월 7일이 되자 이세 칸베 가문의 양자로 가있는 자신의 삼남인 노부타카에게 하나의 주인장을 붙였다. 적혀있는 내용은 다름 아닌 시코쿠의 국분에 대한 내용으로, 시코쿠로의 원정이 마무리된다면 "사누키를 노부타카에게", "아와를 야스나가에게", "남은 양국은 노부나가 자신이 아와지에 도착하면 정할 것", "야마시로노카미(야스나가)에 대해선 군신, 부모의 마음가짐으로 대할 것"이 주된 내용으로 적혀있다. 즉, 당시의 노부나가는 확실히 시코쿠를 자신의 세력으로 밀어버릴 심산이었으며, 도사의 모토치카와 아와의 마사야스는 그의 국분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었다는 말이다. 또한 "우노몬도닛키" 6월 1일 조에 "산시치(노부타카)공이 야마시로노카미의 양자가 되었다"는 구절마저 있으니, 노부나가는 자신의 아들인 노부타카를 미요시 가문의 야스나가와 연결지어서 동시코쿠 일대를 자신의 친족들로 지배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한 상황이다.[27]
이로써 노부나가는 모토치카를 통한 시코쿠 계획을 몽땅 처분하고, 야스나가를 중심으로한 미요시 가문을 통해 시코쿠를 통치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한 것이었다. 야스나가에게 있어선 시코쿠 원정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는 일생일대의 대기회이기도 하였다.
6월이 되자 미요시 노부타카는 니와 나가히데, 하치야 요리타카 같은 노부나가의 중진, 중견 가신들을 이끌고 셋츠 스미요시에 진을 둔 다음, 쵸소카베 가문에게 저항의 태세를 계속하는 시노하라 사네나가에게 자신이 곧 시코쿠로 건너가겠다는 제찰(制札)을 1일에 보내었다.
9. 혼노지의 변
우에스기씨 공격이 좋은 진척을 보이고 있던 그 무렵인 5월 15일, 코슈 원정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나가가 머무는 아즈치 성을 방문했다. 이에야스를 대접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이에야스 접대역을 맡겨 사흘에 걸쳐 이에야스를 대접하게 했다.이 무렵 빗츄 타카마츠 성을 공략 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즈치 성으로 사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돌연 미츠히데의 접대 담당역을 해제하고 히데요시의 원군을 이끌고 지원에 나서도록 명한다.
5월 29일,[28] 노부나가는 서방 원정을 위해 교토에 상락하여 혼노지라는 절에 본진을 차리고 머물러 있었다. 노부나가의 서장자 노부타다의 군대 또한 함께 상경해서 주둔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를 향해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주군 노부나가를 토벌하기로 결의하고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본진을 차리기 사흘 전인 5월 26일[29]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6월 1일(양력 6월 20일), 미츠히데는 영지 탄바에서의 거점인 카메야마 성에서 군대 1만 3천 명을 이끌고 출진, 수도 교토로 향했다.
밤을 넘겨 다음 날 새벽 무렵 교토 경계인 카츠라가와 앞에 다다르자, 1만과 3천으로 병사를 나누고는 3천 명만 데리고 카츠라가와를 건너 교토로 입성했다. 6월 1일(양력 6월 20일) 밤, 미츠히데의 접근 사실을 모르는 노부나가는 잠자리에 들었고, 미츠히데는 그 시각 교토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혼노지의 변의 개막이었다.노부나가가 혼노지 거처와 함께 불 속에 갇히자, 거처가 다 연소되기를 기다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노부나가의 죽음을 확인한[30] 미츠히데는 니조신고쇼(二条新御所)[31]로 피신해서 맞서 싸우던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와 무라이 사다카츠를 공격했다. 노부타다는 세 번에 걸쳐 안으로 들어오는 아케치군을 물리쳤으나, 아케치군이 자신의 측근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자 무라이 사다카츠 등과 함께 자결했다.
10. 이후 이야기
그 이후 노부나가의 복수전을 대의로 내세운 하시바 히데요시가 뒷수습을 하였으며, 미츠히데를 야마자키 전투에서 격파하였고 사실상 노부나가의 차기 권력자로서 자리매김한다. 패한 미츠히데는 도망가다 부하들과 함께 농민들에게 살해당했다.[32]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지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후계자 지명을 위한 회의가 열리는데, 이것이 '키요스 회의'이다. 그의 장남이자 당초 후계자였던 오다 노부타다는 이미 노부나가와 함께 죽었던 터라 새로운 후계자를 급히 뽑아야 했다. 여기에서 그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는 미래의 권력자인 히데요시의 후원을, 3남인 오다 노부타카는 그의 또 다른 충복인 시바타 카츠이에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던 도중 히데요시가 카츠이에의 편에 섰던 니와 나가히데와 협상을 벌여서 장남 노부타다의 3살짜리 어린 아들인 산보시[33]로 후보를 바꾸었고, 결국 산보시가 후계자로 채택된다. 4남인 히데카츠(秀勝)는 이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가 있어서 후계자 후보에선 논외였다.
이로써 후계자 히데노부의 후견인이 된 히데요시가 권력을 틀어쥐게 되었고, 오다 가문은 권력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1] 양력 6월 23일(天文3年5月12日)[2] 지금의 아이치현 서부[3] 현재의 나고야성(名古屋城)과 한자는 다르지만 같은 곳.[4] 원래 오와리는 시바 가가 통치하던 곳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가신이었던 오다 가가 실권을 차지하였으며 이 시점에서는 다시 오다 가의 방계이자 가신이었던 오다 노부히데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 즉, 원래 오다 노부나가는 신분상 가신의 가신이었다. 당시 전국시대의 일본은 이런 하극상이 꽤 있었고 당장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도 다이묘 토키 가문을 내쫒고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5] 그러나 이것이 곧 노부나가의 오와리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와리 동남부는 이마가와 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가 오와리 통일에 8년 내지 10년이 걸렸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6] 스루가, 도토미는 지금의 시즈오카현(이즈 반도 제외), 미카와는 아이치현 동부[7] 장인이 사이토 도산, 그 아들이 요시타츠고 요시타츠의 아들이 타츠오키이므로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처조카에 해당한다.[8] 오타 규이치는 《신장공기》에 "미요시 슈리노다이부(나가요시)에게 권력이 넘어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겨 모반을 꾸몄다"고 (미요시 측에서 본) 쇼군 요시테루가 사망한 이유를 적어놓고 있지만, 나가요시는 이미 1564년에 병몰하고 죽음이 감춰진 뒤였다. 한마디로 노부나가 세력은 요시테루가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던 것이다.[9] 반면 미요시 가문은 1565년 5월에 요시테루를 살해한 뒤, 미요시 산닌슈파와 마츠나가파로 이분되는 내란에 빠지게 되었다. 요시츠구 또한 이 난에 휘말려, 1년 동안 쇼군 후보가 없는 정치를 행했음에도 1566년 6월 11일에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효고항에 쇼군 후보로서 상륙하는 등의 일을 거쳐, 그를 새로운 무로마치 쇼군으로서 인정하고 만다.[10] 당시에는 가독을 아들 토모후사에게 양도하고 은거한 상태였지만, 토모노리가 가중 권력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문의 실질적 수장은 토모노리였다.[11] 그려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검은색 소쿠타이 차림인데다 유명한 조코지 소장 초상화[34]보다 젊어 보이는 인상으로 보아 교토 입성 직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12] 일본 중세사 연구에는 사사의 내부 문서가 중요한 자료이고, 엔랴쿠지는 역사가 깊은 절이기 때문에 이 엔랴쿠지 방화 때문에 날려먹은 사료의 규모가 제법 크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 이토 마사요시는 《사사세력의 중세》라는 책에서 "노부나가는 역사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원망스러운 인물이다. 노부나가놈!!"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남기기까지 했다. 물론 애시당초 승려이면서 정치판에 끼어든 쪽이 먼저 잘못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13] 11월 12일부터 12월 22일까지 이어지는 나가후사와 히사히데의 인질 교환과 강화 결정은 코후쿠지의 진켄이 작성한 진켄키(尋憲記)에 잘 나타나있다.[14] 후속 부대로 도착한 나가하루와 나가후사는 시간이 좀 더 지난 1월 말에 아와로의 귀환을 이루었다 한다.[15] 노부나가에게 다케다, 우에스기, 롯카쿠, 아사쿠라, 사사, 미요시 등의 적대세력에 의한 포위망이 겐키 연간에 형성되었던 것 처럼, 모리 가문 또한 오토모, 아마고, 우라가미, 미요시 등이 연합한 포위망으로 인해 비슷한 시기에 골머릴 썩었다. 이에 양세력은 미요시 가문 등의 공통의 적을 상대하고 서로의 배후를 안전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쇼군 요시아키를 중심으로 친선 관계를 구성하고 있었다.[16] 나가후사는 동년 5월 18일 이후 시작된 우에자쿠라 전투에서 주군 호소카와 사네유키&나가하루에 의해 토벌당하여 장남과 함께 전사했다.[17] 나가하루에게 직빵으로 보낸 서장은 확인되지 않고, 나가후사로 인해 난감한 상황을 겪었던 모리 가문에게 보낸 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18] 사실 노부나가는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새 없는 섬의 박쥐(鳥無き里の蝙蝠)에 비유하며, 우에스기나 다케다, 호조 같은 강자들이 즐비한 동일본에 비하면 이렇다할 강적이 없었기에 세력을 그만큼 키울 수 있었을 뿐이라고 부정적으로 평했다. 다만, 이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시코쿠에선 나머지는 다 별론데 그나마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그나마 새와 비슷한 박쥐쯤은 되니까 시코쿠에선 가장 낫다는 의미기도 하다.[19] 같은 아와지를 본거로 하는 칸 수군 또한 진고로와 같이 반 노부나가 전선에 가담하게 된다.[20] '쿠로다케 몬죠(黒田家文書)'에 전하는 히데요시의 아와지 진공에 관한 문서는 대부분 연대가 기입돼있지 않다... 덕분에 학자들에 따라 연대의 비정이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 1580년은 아마노 타다유키(天野忠幸) 박사의 9월 12일/9월 16일/9월 24일 문서와 11월 24일 모토치카 문서 사본을 통한 비정이다.[21] 편찬사료인 미요시 카후(三好家譜)에서는 사네유키가 노부나가 측의 명령으로 나가하루를 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노부나가가 호소카와 가문 일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22] 후술될 시키부노쇼가 등장하는 노부나가 주인장과 야스나가 서장은 발급 연도가 적혀있지 않다. 따라서 이 일의 비정은 자연스럽게 2차 사료인 군키모노로 행하곤 하는데.... 성립 지역이 다른 모토치카키(元親記)와 무카시 아와모노가타리(昔阿波物語) 두 서적이 시키부노쇼의 항복을 1578년이라 기재해놓고 있긴 하다.[23] 아마노 타다유키(天野忠幸) 박사는 '11월 23일 마츠이 유칸 서장'을 이용하여 1580년이라 비정했다.[24] 나카히라 케이스케(中平景介) 씨는 발급년도를 1581년으로 비정해 노부나가의 반 쵸소카베 태세를 좀 더 나중의 일로 주장하고 있다.[25] 더불어 치카야스에게 보내는 야스나가의 서장에서, 야스나가는 자신의 이름을 야스나가(康長)가 아닌 야스요시(康慶)로 적었다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중세 일본에서 이름을 바꾸는 개명행위는 정치적 요소가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돌이켜 본다면, 미요시 가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미요시 나가요시의 요시(慶)를 사용했던 당시의 야스나가의 정치적 위치와 자신의 의욕은 상당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26] 훗날의 관계로 인해 모토치카와 히데요시의 사이가 언제나 극악이었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당시에는 여러 번의 서장 교환이 있었을 정도로 표면적으론 양호한 관계였다. 모토치카의 새로운 담당 외교관이라 봐도 될 정도.[27] 군키모노인 세슈헤란키에서는, 노부타카의 양부이자 노부나가가 강제로 은거시킨 칸베 토모모리가 노부타카의 시코쿠 배령과 동시에 감시 및 제약이 해제되어 칸베 성으로 돌아왔다는 기술이 있다. 노부타카의 양부가 교체되었을 것이란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28] 양력 6월 19일[29] 양력 6월 16일[30] 노부나가는 성격상 일단 눈앞에 일이 닥치면 최선을 다하고 적의 손에는 죽지 않으며 내가 갖지 못한다면 상대도 가지지 못한다는 식으로 행동했는데 이걸 최후까지 지켰다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실제 노부나가는 포기하지 않고 그냥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전해진다.[31] 현재 교토 지하철 카라스마오이케역 근처에 있던 노부나가의 저택. 오기마치 덴노의 아들 사네히토 친왕이 이주하면서 고쇼가 되었다. 지금의 니조 성과는 다른 곳이다.[32] 일본의 농민들은 평화시기에는 얌전히 농사일에 종사하다 근처에 전쟁 직후 패한 쪽에서 패잔병이 생기면 이들을 사냥해서 무기 등 돈될 만한 것을 챙겼다.[33] 후의 오다 히데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