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38선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내용은 옹진-은파산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 옹진반도 전투 | ||
<colbgcolor=#536349> 시기 | 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 | |
장소 | 옹진반도 | |
교전국 | 대한민국 | 북한 |
지휘관 | 백인엽 대령 제17연대장 김희태 소령† 제1대대장 송호림 소령 제2대대장 오익경 소령 제3대대장 박연호 소령 제7포병대대장 노경억 대위 대전차포중대장 박준희 중위 공병대장 지세강 대위 야전병원장 신선균 소령 병참보급소장 함성렬 대위 헌병대장 | 김웅 중장 제1군단장 김재욱 소장 부군단장 유신 소장 참모장 방호산 소장 제6사단장 김후진 대좌 제1연대장 최현 소장 제3경비여단장 |
병력 | 병력 3,600명 화포 57문 기관총 25정 | 병력 15,000명 화포 196문 전차 및 장갑차 16대 |
피해규모 | 1,420명 사망 또는 실종 | 581명 사망 자주포 5문 손실 장갑차 5대 손실 |
결과 | 북한군의 옹진반도 점령 한국군 제17연대의 해상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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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 2일 동안 옹진반도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17보병연대와 북한군 전차 1개 중대가 증강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연대와 38경비 제3여단과 사이에 벌어진 전투. 삼팔선이 그어진 후 옹진반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였으나 육로로는 들어갈 수 없어 해상으로만 진입이 가능했고, 당시 전체 전선에서 북한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어 지원도 힘들었기에 지연전을 벌이다 인천으로 후퇴한 전투이다.2. 당시 상황
당시 제17연대는 45㎞에 달하는 전선에 제1대대(옹진 북방)와 제3대대(강령 북방)를 배치하고 제2대대를 예비로 한 전형적인 광정면방어형태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옹진반도는 삼팔선의 존재로 육로로는 진입이 불가능했기에, 당시 한국군으로서는 이곳에 지원해주기가 힘들었다. 이를 노린 북한은 계속 소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옹진반도의 고지들을 공격하였고, 이때문에 이곳을 방어하는 대한민국 국군과 옹진반도 주민들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대적인 침공에 나서면서 이곳에도 수많은 병력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3. 지형
옹진군[1] 지도 | |
장연군 지도 | 벽성군 지도 |
멸악산맥의 일부가 바다를 만나서 리아스식 해안이 된 지역으로 서북쪽에는 장연군이 있고, 전체적으로는 벽성군으로 육상 경계가 둘러싸여 있다.
옹진반도 내부는 뿌리가 되는 옹진반도 본체에 5개의 부속 반도가 붙어있는 손과 같은 모양을 가지며 반시계 방향으로 북쪽부터 교정면의 교정반도, 용천면과 서면의 소(小)옹진반도로도 불리는 읍저반도, 동남면의 사곶반도로도 불리는 마산반도, 부민면과 용연면, 봉구면과 흥미면으로 구성된 강령반도, 원래 벽성군이었으나 임시로 편입된 동강면의 동강반도로 구성된다. 면적은 대략 1,260㎢ 정도다.
방어에 유리한 고지대는 주로 북면, 옹진읍, 부민면의 북방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고지인 527m인 국사봉은 삼팔선 이북에 있다.
북서쪽으로는 대동만(大東灣)으로 장연군과 경계가 나누어지며, 북동쪽은 황포(黃浦)로 해주시와 떨어져 있다. 그리고 동강반도가 있는 벽성군 동강면과 해주시 용당포와는 거리가 750m 정도 밖에 안 떨어졌으므로 장연군쪽에서 오는 육상교통로는 보조로 하고 해주시에서 뻗어나오는 교통로로 철도와 주요간선도로가 아어져서 육상교통로가 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해주시가 북한령이 되는 바람에 옹진반도는 다른 대한민국 영토와는 육상교통로가 끊어진 자연적인 배수진이 되고 말았다.
6.25 전쟁 직전 대한민국이 확보한 옹진반도는 옹진군에서 삼팔선 이북의 교정면과 가천면 북부 65% 정도를 제외한 곳과 벽성군의 삼팔선 이남 지역인 동강반도를 포함한 곳이다.
3.1. 방어측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 자연지형상 옹진반도를 경제적으로 방어 가능한 선은 장연군 동남부의 태탄과 벽성군 중앙부 서부방면에 있는 취야를 연결하는 방어선이다. 하지만 태탄과 취야 사이의 방어선을 확립하더라도 방어선이 30㎞ 이상인데 현실은 삼팔선으로 인해 무려 45㎞ 이상의 방어선을 가지게 되어 방어에 취약했다. 이것도 원래는 60㎞에 육박하는 방어선 중에서 두락산 서쪽의 방어불가능 지역을 경찰에게 담당하게 한 후 방어선 서쪽 끝을 두락산으로 잡았기 때문에 줄어든 것이다.당시 미국은 1개 사단이 방어선을 감당 가능한 길이가 10㎞라고 설정하는데 무려 4.5배의 길이를 가진 방어선을 증강된 1개 연대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태탄과 취야가 북한군의 보급기지 겸 발진기지가 되는 통에 분쟁때마다 공세가 최소 2곳에서 동시에 발생했다.
위에 언급했듯이 가장 높은 고지인 국사봉을 비롯한 주요 고지들이 삼팔선 이북이나 그 근처에 존재하며 고지대 자체도 그렇게 높지도 않고 험준하지도 않으며 좌우폭이 길지도 않아서 방어선의 65%만 감당가능하며 서쪽을 중심으로 교정반도 남단을 비롯한 방어불능지역이 존재하는 등 지형적 방어도 별로 좋지 않다. 북한군이 이 점을 노리고 가천면 서남부 경계선인 두락산을 집중공격해서 일시적 함락까지 한 이유도 두락산만 제압하면 소(小)옹진반도가 북한군의 손에 떨어지면서 대한민국이 보유한 옹진반도의 25%를 점령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북부의 산악지대가 유일한 방어선이었다. 약간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조금씩 흩어진 수준의 언덕과 같은 고지대라고 부르기 민망한 곳을 제외한다면 더 이상 통합적인 방어선이나 제대로 된 방어거점으로 쓸 곳이 없었다. 즉 삼팔선 근방의 고지대가 경계진지 겸 주진지 겸 최후의 방어선이었고 방어진지의 깊이도 8㎞ 정도가 최대였다.
여기에 더해서 좌우측 교통로가 1개밖에 없으며, 삼팔선에서 5㎞에서 10㎞ 사이 정도로 조금 떨어진 옹진과 강령이 교통의 요지이며, 옹진선 철도와 도로가 통하는 신강령역과 도로가 옹진과 강령으로 갈라지는 양원 쪽에는 협만이 깊숙하게 들어와 있기 때문에, 북한군이 돌파공격을 가하면 쉽게 전선이 옹진과 강령으로 양분되면서 조직적인 저항이 어려워지고 북한군의 전략적 승리가 되어버리는 약점까지 가지고 있다.
옹진반도 내부의 교통도 매우 불편했다. 위에 언급한 지형적인 것도 크지만, 철도도 삼팔선 이남의 옹진선은 옹진역에서 신강령역까지의 매우 짧은 거리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협궤라 수송능력도 열악했다. 지도에 나와있는 부포선은 그 때는 존재하지 않은 노선이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열악한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그냥 개점휴업상태로 실제 운행은 안 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중장비를 하역할 수 있는 큰 항구도 부족해서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대형선박은 하루 2회만 입항가능한 부포항이 유일한 보급항이었으며, 인천항으로부터의 항해거리도 90㎞이나 되었고, 위치도 옹진반도 남동쪽 끝이라 유사시 빠른 보급이 힘들었다. 소(小)옹진반도의 읍저리나 사곶반도의 사곶리도 항구가 있었으나 작은 목조선박 정도나 정박가능한 어항(漁港)이라 병력과 보급품 하역에는 부적당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병력 이동과 보급이 좁은 1차선 비포장도로, 그것도 우회로가 없는 곳에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유사시에 빠른 병력이동과 재배치가 불가능했다.
3.2. 공격측
공격측 입장에서도 삼팔선 이남의 옹진반도가 은근히 크고 복잡한 지형을 가지고 있어서 소탕전이나 완전확보가 좀 어려웠다.일단 삼팔선 이남의 면적만 따져도 1,000㎢ 이상이며 삼팔선 이남의 부속 반도가 4개이고 그 중에서 강령반도는 등산곶이라고 부르는 흥미면 일대가 잘록한 육지로만 이어져서 사실상의 추가반도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크다. 그리고 각 반도의 교통로는 그냥 도로 1개가 고작으로 그나마도 비포장도로다. 설상가상으로 주변에 섬도 매우 많고 면적이 크거나 항구등 주요시설이 있는 섬만 따져도 순위도, 기린도, 창린도, 용호도(북한), 어화도, 마합도로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옹진반도에 딸린 각각의 부속 반도들도 크기가 만만치 않은데다가 일단 투입한 병력을 다른 곳에 쓰려면 다시 옹진읍 쪽으로 되돌아갔다가 목적지로 다시 진격하는 시간 많이 걸리고 이동거리가 길어지는 일을 해야 한다. 억지로 반도 사이의 좁은 협만을 통해서 건너가려고 해도 일단 대형 선박이 진입할 수가 없는 곳이 많아서 소형 목선을 비롯한 작은 쪽배들을 많이 확보해야 하며, 옹진반도의 지형 자체가 항구가 아닌 곳에서 선박을 이용해서 승선과 하선을 할 수 있는 곳이 적고 조수간만의 차도 커서 조금만 실수하면 갯벌에 고립되기 십상이므로 실제 실행하면 소수의 병력만 축차적으로 상륙했다가 역습당하기 쉬워서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라서 위에 언급했듯이 돌격을 통해 옹진반도의 방어선을 두 토막으로 내놓고 조직적인 저항을 끝내는 전략적인 승리는 가능해도 방어군이 갈라진 부속 반도에 방어선을 만들면서 서서히 철수하는 것을 막기가 힘들다. 이걸 해결하려면 해군을 동원해서 옹진반도의 항구들을 기습공격해서 점령함으로서 철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런 일을 할 정도로 당시의 북한 해군이 강하지가 못했다.
4. 부대 배치 상황
기본적으로 병력 면에서는 북한군이 압도적 우위였고 병력의 질 면에서도 북한군이 우세했다. 비록 38경비 제3여단의 병력이 미숙한 점이 있지만 대한민국 국군도 실제 가용병력으로 잡는 한국 경찰이 훈련도는 그럭저럭이지만 장비가 매우 빈약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약점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장비 면에서는 양자의 차이가 더 커진다. 대한민국 육군이 포병은 사정거리 6.5㎞가 고작인 M3 105mm 경곡사포를 운영하고 대전차포는 구경 57㎜의 6파운더의 미국 라이센스형과 M18 무반동포 및 60㎜ 구경의 M9A1 바주카를 보유하고 있는데 반해 조선인민군 육군은 일반적인 사정거리가 10㎞ 이상인 122mm M-30 곡사포와 76mm ZiS-3 사단포를 보유하고 대공포지만 대지상포격도 가능한 100㎜ KS-19 대공포, 85㎜ 52-K 대공포도 보유하고 전차는 T-34-76과 T-34-85, 자주포는 SU-76M, 장갑차는 BA-64를 보유했다.
게다가 옹진반도는 다른 곳과 바다로 분리된 배수진인 관계로 M8 그레이하운드같은 대한민국 국군의 미약한 기갑전력도 배치가 안되고 지원도 불가능한 상황이라 대전차화기로 적 전차를 상대해야 하는 중요성이 더 커지는데 그나마 제일 강력한 6파운더도 미국이 라이센스할 때 관통력 높은 분리철갑탄은 명중률 낮다고 생산을 안하는 바람에 북한군 전차를 상대로 전면에서 상대할 경우 교범상의 통상근접거리인 500m보다 더 들어가는 초근접거리인 320m까지 근접해야 이론상 관통이 가능할 지경이었고 경사장갑에 착탄시 탄두가 붕괴되며 장갑을 관통 못하는 탄자붕괴현상이 발생하기 쉬우며 실전에서는 철갑탄까지 크게 부족한 바람에 정면승부에서는 전혀 대응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성능도 큰 차이가 나는데 수량도 모자랐다. 제17보병연대가 지원부대를 증원받아서 다른 보병연대에 비해 화력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화포 57문에 기관총 25정만을 중화기로 보유할 때 북한군은 각종 화포만 따져도 196문에다가 전차 및 장갑차를 16대 보유해서 병력도 압도적인데 화력면에서도 압도적인 우세 상태였다.
5. 개전 직전
개전 직전의 병력배치상황도 |
전반적으로 조선인민군이 병력을 일시에 집중해서 속전속결로 전략적인 승리를 하는 것을 목적한데 비해 대한민국 국군은 평소에 있었던 대규모 국경 분쟁 수준으로 대비하고 있었다는 게 차이다.
5.1. 조선인민군
원래 북한군은 1947년 7월 이후부터 옹진반도 서쪽 끝에서 연백군의 배천까지의 100㎞을 초과하는 광범한 범위에 대해 38경비 제3여단이 담당했다. 해당 여단의 배치방식은 4개 대대를 삼팔선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여단사령부가 위치한 죽천에 집결해서 예비대로 보유했다. 이 때까지는 그냥 삼팔선 방어나 가벼운 분쟁 대비용 배치였다.그러나 38경비 제3여단의 증강이 계속 진행되면서 전쟁 직전에는 7개 보병대대, 본부중대, 위생중대, 수송중대, 정찰중대, 45㎜ 대전차포중대, 경비소대로 구성되면서 크게 증강되었으며 각 보병대대도 대대본부와 3개 보병중대, 기관총중대, 박격포중대, 45㎜ 대전차포소대, 근무대로 구성되어 8,000여명의 규모를 자랑함으로서 사실상 이미 경비임무가 아닌 침공작전 보조부대로 크게 변모하였다. 그리고 경비여단 답지 않게 자체적으로 포병을 보유했는데 76㎜ 곡사포 20문과 45㎜ 대전차포 33문과 120㎜ 박격포 10문과 82㎜ 박격포 68문으로 숫자도 많고 위력도 강한 편이었다.
물론 38경비 제3여단은 옹진반도 뿐 아니라 청단 - 연안 - 배천지역도 담당하기 때문에 전력의 분산이 이루어졌으나 그걸 감안해도 옹진반도의 한국군을 압도하는 숫자였다. 그래서 임무를 위해 전력을 양분하여 1950년 6월 21일에 3개 대대를 옥동 부근으로 이동시켜서 전력을 집중했다. 옹진반도 전투에는 38경비 제3여단의 4개 대대가 참여하기로 작전이 정해진다. 그리고 진격을 돕기 위해 자주포와 장갑차를 합쳐서 8대를 임시로 배속받았다.
여기에 더해서 북한군 제6사단으로부터 1개 연대 병력을 지원병력으로 배속받았다. 해당 연대인 제1연대는 제203전차여단으로부터 1개 전차중대까지 추가로 지원병력을 받았으므로 기갑전력까지 갖추었으며 연대 포병전력도 122㎜ 곡사포 4문, 76㎜ 곡사포 12문, 45㎜ 대전차로 12문, 120㎜ 박격포 6문, 82㎜ 박격포 68문을 보유해서 막강했다. 추가적으로 SU-76M 76㎜ 자주포 5문도 사용가능하므로 기갑전력의 보조도 가능하였다.
1950년 6월 22일 밤에는 제203전차여단으로부터 1개 전차중대를 배속 받은 북한군 제6사단 1연대가 취야로 이동하여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명백하게 옹진반도를 대규모 침공하려는 배치로 바꾸었고 38경비 제3여단이 옹진반도 서쪽을 담당하고 북한군 제6사단 1연대가 옹진반도 동쪽을 담당하며 주공은 교통요지인 양원과 신강령역 방면을 담당하는 제6사단 1연대가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의 작전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으나 일종의 양동 작전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 제6사단이 원래는 팔로군 소속의 조선인으로 구성된 사단이 국공내전이 중공의 승리로 끝나가는 것으로 보이자 북한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과 사단장인 방호산을 비롯한 병력 대다수가 국공내전에서 실전경험이 풍부한 병력으로 구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개성-문산 전투에서도 전면의 전선에서 압박을 넣으면서 동시에 버려진 경의선 철도를 몰래 수리해서 열차를 타고 대규모 병력이 개성역을 통해 개성 시가지로 돌입하는 양동작전을 쓴 것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높다.
해당 작전은 일단 서쪽의 태탄을 본진으로 하는 38경비 제3여단이 대한민국 국군의 옹진반도 서쪽 방어선을 집중공격해서 제17보병연대의 예비대가 그 쪽으로 투입되는 것을 노려서 동쪽의 취야를 본진으로 하는 북한군 제6사단 1연대가 T-34-85 전차를 비롯한 기갑전력을 앞세우고 기습돌격해서 옹진반도 동쪽 방어선을 돌파하고 양원과 신강령역 일대를 점령함으로서 옹진반도를 두 토막으로 나누고 전략적인 승리를 빠르게 이루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이후 서쪽에서는 새벽 4시 30분에 바로 38경비 제3여단의 보병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동쪽에서는 개전 1시간 30분 후인 새벽 5시 30분까지 포격 외에는 아무런 공격이 없었다.
전반적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지만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병력 숫자는 38경비 제3여단이 많지만 이들은 원래 삼팔선 경비 목적으로 창설되었기 때문에 병력의 숙련도와 질이 낮고 중화기도 상대적으로 많지가 않았다. 이들만으로 공격할 경우에는 병력 숫자와 화력이 우월한데도 불구하고 포병대대를 비롯한 증강된 전력을 가지며 이미 강화된 진지를 확보하고 전투 배치된 대한민국 육군 제17보병연대를 상대하기가 힘들어진다. 시간을 들인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전광석화같이 빠른 작전을 해야 하는 북한군 입장에서는 희생만 많아지는 장기전 같은 방법을 쓰기 어려웠다.
그래서 실제적인 주공은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와 여기에 배속된 1개 전차중대인데 이들은 할 일이 많아서 옹진반도쪽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조공을 담당해서 개전시 담당할 영역이 옹진반도부터 청단, 연백, 개성을 지나 고랑포에 이르는 100㎞가 훌쩍 넘어가는 수준이었으며 이들 지역을 빠르게 석권한 후에는 강화도와 김포반도에 상륙하는 작전까지 계획되어 있었다. 그래서 양원과 신강령역, 강령을 점령한 후에는 다시 해주방향으로 회군해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이걸 보충하려면 북한 해군의 도움이 절실하다. 하지만 북한 해군은 전력도 미약한데다가 개전 당시에는 대부분의 전력이 동해안으로 진격하는 북한 육군을 도와주기 위한 동해안 각지의 게릴라 상륙과 부산항 기습공격을 위한 게릴라 수송등으로 동원되어 있어서 옹진반도 쪽에는 쪽배 하나도 지원할 상태가 아니었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개전 초반의 빠른 돌파와 전략적 승리 이후에 북한군의 진격속도가 느려져서 대한민국 국군의 바다로의 철수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5.2. 대한민국 국군
제17연대는 2개 대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예비대로 두는 기본적인 방어 배치를 하고 있었다.상세하게 살펴보면 연대본부는 옹진시내 북쪽 2㎞ 지점에 위치한 탄지말에 있는 옹진광산의 버려진 시설을 이용해서 배치하고 그 곳에 연대의 예비부대인 제2대대를 집결시켰다. 좌측 방어선에는 제1대대를 배치했는데 서쪽의 두락산에서 동쪽의 호동까지 13.5㎞의 방어선을 담당했다. 우측 방어선에는 제3대대를 배치하여 서쪽의 호동부터 동쪽의 초동까지 17.8㎞의 방어선을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포병부대를 비롯한 지원부대들은 탄지말, 옹진 시가지, 냉정리에 분산시켜 주둔했다.
진지의 경우에는 지형상 삼팔선 근처의 고지대인 두락산 - 412고지 - 충무고지 - 녹달산 - 까치산 - 초동을 연결하는 선이 돌파당하면 끝이므로 1950년 2월에서 4월까지 가용한 병력 전체를 동원하는 한편 지역 내 주민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연인원 6만여 명을 동원하여 북한군의 방해용 포격에 5명이 사망하는 희생에도 불구하고 주진지의 유개화 공사를 마무리지음으로서 일단 기본적인 방어력은 확보했다. 그리고 냉정리에 관측기같은 경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비행장을 확보하여 긴급연락이나 미국 군사고문관을 비롯한 요인 탈출에 사용가능하도록 했다.
병력 부족 상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내의 딱별단, 백골단,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같은 단체를 단일체제로 통합해서 향토방위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해당 단체의 간부급 요원부터 시작해서 순차적으로 군대에서 2주간의 단기로 진행되는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함으로서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치안을 보조하며 유사시에는 보조병력으로 활용하도록 조치했다.
방어계획에 대해서는 서류상에서 대충 작전을 만들어놓긴 했다.
- 제1호 작전: 삼팔선상에서 국지적인 소규모 분쟁이 발생되었을 경우에는 적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내게 하면서 분계선을 고수한다.
- 제2호 작전: 적이 국부적으로 삼팔선 이남으로 침범할 경우에는 적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면서 증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주저항선을 지탱한다.
- 제3호 작전: 적이 전면적인 남침을 전개할 경우에는 적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한 다음, 해군의 지원을 받아 해상으로 철수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제1호 작전에 따른 대비만 주로 이루어졌으며 제2호 작전에 대해서는 전황악화에 대한 임기응변적으로 그냥 써놓기만 한 것이다. 실제로 옹진-은파산 전투를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주저항선이 무너진 후 옹진읍 근처에서 구원군이 올 때까지 필사적인 방어를 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제1호 작전과 제2호 작전에 대비하여 지역 내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마을 단위로 피난 및 대피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건 약과인게 제3호 작전에 대해서는 진짜로 언급만 했지 실제로는 옹진반도 사수! 같은 거나 주장하면서 일부러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는 태도를 보였으며 이 때문에 민간인 철수같은 상세한 계획은 고사하고 병력과 장비 철수에 대한 기본 계획도 전혀 수립하지 않았다. 후에 언급하는 철수작전이 그나마 손해가 크지 않게 이루어진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방어하기가 어려운 탓에 제17연대장인 백인엽 대령은 최악의 상황시 제3호 작전을 실시할 것을 자기 혼자서만 생각하고 있다가 최소한의 대비책만은 마련하려고 휘하의 대대장 3명과 배속된 부대의 부대장 및 참모들을 소집해서 간단한 회의 후에 방침을 명령했다. 해당 내용은 해주로 이어지는 취야 방면 통로를 담당하는 제3대대의 방어를 강화하며 적의 침공시에는 예비대를 증원함으로서 북한군이 옹진반도를 두갈래로 나누는 것을 막고 최악시에는 공무원과 군인 가족을 병력과 함께 철수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상세계획 수립 수준의 명령은 아니라 그런 방침이 정해졌다는 것 정도의 수준이었으며 회의가 끝난 후에 백인엽 연대장은 육군본부 정보국장인 장도영 대령에게 연락해서 옹진반도 쪽의 북한군 동향을 보고하는 한편 북한군이 옹진반도 침공을 노리고 있으니 병력증원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화와 무전으로 보고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평소의 방어체제는 잘 해봐야 대규모 분쟁에 대비한 것이며 특히 지형상의 이유로 방어가 힘들고 돌파당할 시 소(小)옹진반도가 북한군의 손아귀에 떨어질 위험성이 있는 두락산이 있는 제1대대의 서부 방어선에 대한 대비가 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북한군의 주요 진격로가 될 3대 지역 중에서 태탄에서 옹진으로 가는 서부 진격로만 대비가 이루어지고 동부의 취야에서 강령으로 가는 진격로나 중요 보급로겸 병력 배치 전환루트인 양원에서 부포까지의 도로 방어는 별로 신경을 안썼다.
이러다가 개전 직전에서야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챘는지 앞서 언급한 회의 후에 동부 방어선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기 시작하고 1950년 6월 24일에 육군본부로부터 휴가와 외출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를 실행하지 않고 경계태세를 강화시켰으며 동부 방어선을 담당한 제3대대쪽에 105㎜ 곡사포 1개 포대와 57㎜ 대전차포 1개 소대를 배속해서 증원시키고 제17보병연대 전체와 옹진경찰서에 출동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UN 한국위원단의 요원 5명이 옹진반도를 방문해서 제17연대의 보고를 받고 전방 관측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중기관총과 81㎜ 박격포가 전방에 배치된 것을 보고 삼팔선이 평온한데 긴장감을 조성하게 하는 것은 역효과만 날 뿐이며 특별 경계태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라는 지적을 한 후에 서울로 귀환했다. 육군본부의 압박과 함게 UN에서도 저런 개소리를 늘어놓으니 압박에 이기지 못한 백인엽 연대장은 전방에 배치된 부대를 빼고는 비상조치를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개전 직전 옹진반도 방면의 대한민국 국군의 병력은 제17연대의 2719명, 제7포병대대의 526명, 대전차포중대의 129명을 합쳐서 정규군이 3,300여명이고 그 외의 각종 지원병력을 합하면 3,600여명이었다. 주요 장비로는 M3 105mm 경곡사포 15문, 57mm M1 대전차포 6문, 81mm 박격포 12문, 60mm 박격포 18문, 60㎜ M9A1 바주카 60문, 각종 기관총 25정을 보유했으나 그 중에서 105㎜ 곡사포 3문은 고장나서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6. 개전
옹진반도 전투 상황 지도 |
6.1. 초기 전투 상황
개전 1일 전인 6월 24일부터는 평시와 달리 한밤중까지 계속된 북한의 대남방송에 제17보병연대는 장시간 경계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제17보병연대 지휘부를 포함한 일선 장병들 대부분이 잘 해봐야 대규모 분쟁 수준의 공격을 상정하였다.당시 제17보병연대의 개전 직전 병력 배치 상황은 아래와 같다.
- 연대본부: 탄지말 (옹진 북쪽 2㎞ 지점)
- 제1대대: 좌전방 일선지역인 두락산 ~ 호동 간 13.5㎞ 방어
- 제3대대: 우전방 일선지역인 호동 ~ 초동 간 17.8㎞ 방어
- 제2대대: 연대 예비병력으로 탄지말에 집결 주둔
- 경찰: 두락산에서 옹진반도 서쪽 해안까지 방어
일선병력을 지원하는 부대는 아래와 같다.
- 포병부대, 대전차포부대: 1개 포대와 1개 대전차포 소대를 각각 제1대대와 제3대대에 배속하고 잔여부대는 연대본부에 배치
- 공병대: 기존 병력이 40명이라 탄약작업 소대원을 통합해서 연대직할로 운영하고 연대본부에 배치
- 현병대, 병참보급소, 특무대, 야전병원: 연대본부에 배치
6.2. 서부 방어선
옹진반도 전투 진행 상황도 |
6.25 전쟁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 옹진반도 일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새벽인 4시 정각에 갑자기 붉은 조명탄이 새벽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면서 발사됨과 동시에 이를 신호로 북한군은 삼팔선 북쪽에 미리 만들어놓은 포병진지에서 각종 화포를 포격하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 국군 방어선을 강타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었고 30분 후에는 포격이 일선진지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약 1개 대대 규모로 추산되는 북한군이 제1대대의 주저항선으로 밀어닥쳤다.
이미 북한군은 각종 방법을 동원해서 알아낸 대한민국 국군의 진지를 포병으로 정확하게 포격하는 바람에 모든 유선망이 절단되었으며 무선망까지도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사실상 이 때부터 전선의 각 부대들은 독자적으로 싸워야 했으며 이는 제17보병연대도 마찬가지였다.
제1대대는 제1중대를 예비로 하고 제2중대를 두락산을 담당하는 서쪽에, 제3중대를 토끼고지를 담당하는 동쪽에 배치하였다. 2개 중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1개 중대를 예비대로 두는 전형적인 방어배치였지만 전쟁이 터지자 두 지역 모두 38경비 제3여단이라는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그냥 싸워도 불리한데 개전 극초반에 지휘관들의 엉성한 보고와 상황파악이 일을 더 키웠다. 제1대대장 김희태 소령이 잠에서 깬 시각은 오전 4시 15분으로 적의 포격이 시작된 뒤 15분이나 지난 시각이고 그나마도 포격음에 깨어난 상황이었다. 깨어난 후에는 포격이 있다는 상황을 즉시 상급부대인 제17보병연대 본부에 연락했으나 일단 상황판단을 보류하고 전방의 제2중대와 제3중대에게 경계철저와 적 포격에서의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통상적인 명령을 내렸다.
이러다가 오전 4시 40분에 제3중대장으로부터 북한군 1개 소대가 담당구역 좌측인 토끼고지로 접근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30분이나 지속된 포격후에 오는 전방의 보고가 상당히 부실한 것도 문제가 있었으나 이런 보고를 받고 전후상황을 생각 안하고 국지전으로 판단하고 대대장 스스로가 적을 생포한답시고 제3중대 본부로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이동하는 개막장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막상 제3중대본부에 제1대대장이 오자 중대본부의 벙커가 직격탄을 맞아서 박살났으며 토끼고지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으며 상세한 상황은 현지에 있던 제3중대의 소속 병사로부터 제2소대장 김호경 소위가 전사했으며 북한군이 너무 많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그 때서야 제1대대장은 현재 상황이 전면전임을 파악했다.
그러나 소수인원만 데리고 온지라 전선에 대한 실질적인 증원이 불가능했기에 제1대대장은 다시 대대본부로 돌아가는 삽질을 했고 그 사이에 오전 5시에 제2중대장 한혁 중위로부터 은동 정면에 북한군 1개 대대, 두락산 정면에도 북한군 1개 대대와 교전중이라는 연락을 끝으로 전방의 모든 부대와의 교신이 끊어졌다.
대대본부로 돌아온 제1대대장은 오전 5시 30분에서야 예비부대인 제1중대를 자동 방면으로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제17보병연대장에게 상황보고와 함께 제2대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개전 직후 2시간이나 대책 지연이 계속되는 동안 설상가상으로 북한군이 제1대대본부까지 위치를 알아내고 포격하는 통에 오전 6시에 직접 제1중대 지휘를 하려고 대대본부 앞으로 나온 제1대대장 김희태 소령이 개전 2시간만에 북한군의 82㎜ 박격포 포격으로 전사하였다. 직격탄을 정통으로 맞아서 제1대대장의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었으며 유품은 손목시계 밖에 남지 않았다. 이로서 사실상 제1대대는 조직적인 저항능력을 상실하였다.
최전방에 배치된 제2중대와 제3중대는 결국 예비대 지원 없이 수중에 가진 병력만으로 각자 백병전까지 치르면서 싸웠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옹진반도 서쪽의 지형 특성상 방어에 불리한데다가 두락산이 순식간에 함락당한 후 북한군의 병력이 더 많고 방어가 불가능한 서쪽으로 우회공격까지 들어가기 시작한데다가 기선까지 제압당해서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북한군의 후속부대가 기병까지 데리고 등장하면서 결국 부대는 완전하게 붕괴되고 잔여 병력은 분산해서 각자 알아서 철수하게 된다.
예비대인 제1중대의 경우에는 오전 7시 30분에 방어지역인 자동에 도착했으나 이미 그 때는 전방의 북한군이 국군 방어를 돌파하고 대대본부를 빈집털이해서 점령한 상황이었다. 연락까지 두절된 상황에서 주변에 안개까지 끼여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다가 안개가 사라지자 자동적으로 자신들이 북한군에게 포위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2시간동안 포위공격을 당하면서 필사적으로 버티다가 제2대대의 지원으로 포위망이 뚫리자 제2대대와 합류해서 싸우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제1대대는 완전붕괴되었다. 중과부적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제1대대장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예비대를 이용해서 전방의 병력들에게 보충을 해주거나 탈출구를 마련해주었다면 이거보다는 조금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든다.
6.3. 연대본부
제17보병연대본부도 전면적인 북한군의 침공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전 4시 40분에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에게 대기명령을 내리고 제7야전포병대대장 박정호 소령에게 전방의 제1대대와 제3대대에게 지원사격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오전 5시 30분에 제1대대장인 김희태 소령의 지원요청을 받은 후 연락이 두절되었고 오전 6시 10분에 제1대대장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북한군의 공격이 서쪽인 제1대대에 집중된 것으로 판단한 제17보병연대의 연대장인 백인엽 대령은 예비대인 제2대대의 대대장인 송호림 소령에게 북한군이 양동작전을 벌이면서 옹진을 탈취하는 게 목적인 것 같으니 제1대대 방면에 병력을 투입해서 원래 방어선을 다시 재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와 동시에 오전 6시에는 제3대대장인 오익경 소령에게 현지사수를 명령했다. 여기까지는 정석적인 대규모 분쟁에 대응하는 방어명령이었고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하지만 오전 5시 30분부터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가 전차까지 앞세우고 동쪽의 제3대대 방면을 공격한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오전 9시에서나 제3대대 방면에도 약간의 증원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제2대대쪽에 연대장이 직접 가서 일부 병력의 제3대대 지원을 지시했으며 오전 10시경에는 연대본부 근처까지 북한군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연대장은 육군본부에 대책을 요청했지만 적을 지연시키며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전 10시 35분에는 옹진에 도착한 미국 군사고문관들로부터 북한군이 전선 전체로 침공해서 증원이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받게 된다. 연대장과 연대본부가 현장상황을 파악 못하고 북한군의 양동작전에 제대로 걸린 것이다.
이러다가 오전 11시에 동쪽 방어선을 담당한 제3대대가 북한군에게 석계리와 치마산 방어선을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받은 후에나 북한군 주공이 동쪽의 제3대대에 몰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제17보병연대본부와 연대장은 그제서야 연대본부를 강령으로 이동시켜서 제3대대를 증원토록 하고 포병으로 제3대대의 철수를 엄호하라는 사실상의 철수명령을 내리게 된다. 말이 증원이지 연대본부가 철수하는 것으로 같이 내려진 명령에는 서류와 보급품과 시설같은 당장 움직이기 어려운 것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동시에 주민들에게 피난하도록 지시했다.
오전 11시가 넘어가자 옹진읍내에도 북한군의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하고 거리에는 부상병과 피난민이 가득했으며 냉정리의 야전병원은 이미 더 이상 부상병을 치료하지 못할 정도로 후송된 부상병이 많아서 군청 휘하의 후생과장과 의료요원까지 동원해서 치료를 진행하던 상황이었다.
연대본부 철수시에는 인사, 정보, 작전요원과 함께 군수요원의 일부를 먼저 출발하게 하는 한편 의무대장에게는 2½톤 트럭 5대를 배정해서 환자 수송을 지원하게 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도로 차단속도가 빨라서 1차로 후송한 중상자만 강령으로 철수가 가능하였고 그 이후에 북한군이 양원지역을 점령하고 도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나머지 부상병들은 자력으로 강령까지 온 사람들만 구출되었다.
연대본부의 정리를 담당한 후방대는 사령부 내의 유류저장고와 탄약고등의 시설물을 처리한 후 오후 2시에 105㎜ 야포탄을 적재한 2½톤 트럭 5대를 데리고 사곶항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현지 주민의 피난선을 징발하여 포탄을 적재하고 병력 10명과 함께 바다로 나간 후 부포항에 오후 9시에 다시 상륙해서 본대와 합류했다. 해당 포탄들은 부포항 철수 작전에 사용되었다.
6.4. 예비병력
제1대대 방면에 지원을 해줄것을 명령받은 제2대대는 오전 6시 40분에 이동차량을 지원받아서 제1대대본부로 출발했다. 병력 선두가 마현에서 북한군 1개 대대가 제1대대본부에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자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병력을 하차시켜서 말제 일대에서 제5중대를 도로 우측에, 제7중대를 도로 좌측에 배치해서 매복했다.오전 7시에 전술행군대형으로 남하하여 제1대대본부를 빈집털이로 습격해서 아무런 저항 없이 일시적으로 점령한 북한군에게 포격과 기습을 해서 큰 피해를 준 제2대대는 제5중대에게 역습을 지시하고 제7중대를 전방인 사동방면으로 진출시켰다. 이렇게 해서 제1대대의 주저항선을 일부나마 회복하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전체 전선사항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쪽 전선만 본다면 대규모 분쟁에 대비한 정석적인 방어대응이었고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그래서 오전 9시에 제17보병연대장인 백인엽 대령이 마현까지 직접 와서 대대를 격려하고 1개 중대 병력을 제3대대 쪽에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대대 병력 대다수가 적과 교전중이었고 전선상황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일단 후방병력인 제8중대의 박격포소대와 제3포대를 강령 방면으로 파견했다.
오전 10시에는 제2대대장이 대대관측소를 제1대대본부 동측의 능선까지 올리고 반격중이던 제5중대를 격려하고 있을 때 소총탄이 좌측 얼굴을 스쳐서 귀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으나 위생병에게 응급치료를 받고 계속 지휘하였다. 소총탄에 귀를 관통당하는 것은 말만 경상급 부상이지 이 정도면 반복된 통증으로 두통까지 올 수 있어서 지휘에 큰 지장을 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전투지휘를 지속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여기까지 본다면 제2대대는 전반적으로 매우 잘 싸웠다. 압도적인 북한군을 상대로 반격도 잘 했고 제2대대장이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지휘를 계속하는 용맹도 보였다. 그러나 주변 상황이 안좋아졌으니...
6.5. 동부 방어선
동부 방어선 돌파상황[5] |
이렇게 서쪽의 제1대대 방면에서 반격이 이루어지는 동안 동쪽의 제3대대 방면은 그 동안 파국이 발생하고 말았다. 양동작전으로 새벽 5시 30분까지 포격만 날리던 북한군이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갑자기 돌격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전 4시에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하자 제3대대장인 오익경 소령은 제1대대장과 마찬가지로 국지전이나 분쟁에 따르는 포격으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제3대대 휘하의 각 중대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각 중대에 경계강화를 지시하는 한편 연대장에게 보고하고 지원포격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포격이 1시간 반이나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 포병은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된 지 1시간이 지난 후인 오전 5시에나 미국 군사 고문단인 브라운 소령이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파악하고 포격을 허락한다는 지시를 받고서야 응사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는 미군 고문관이 105㎜ 야포의 사격을 통제함으로써 일어난 것이었다. 그 이유는 기존의 삼팔선 분쟁과 그 대응에서 미숙한 병력들이 포탄을 마구잡이로 발사하는 통에 엄청난 탄약낭비가 일어났기 때문이었고 이를 교정하기 위해서 이번 전투에서는 미군 고문관들이 개입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의도는 좋았으나 때가 안좋은 조치 덕분에 북한군에게는 아군 포격 피해가 별로 발생하지 않게 된다.
이러다가 북한군은 갑자기 오전 5시 30분에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주저항선을 돌파하였다. 제2대대장인 오익경 소령은 자기 대대에 배치된 57㎜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를 파괴시키지 못하자 당혹감에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분리철갑탄도 없이 그냥 철갑탄, 그것도 부족한 수량의 철갑탄으로는 북한군 전차의 전면을 사격할 경우에는 이론상 320m까지 초근접해야 했다. 해당 거리는 그 당시 대전차포 교범 상에 나오는 근접사격거리인 500m보다 훨씬 더 들어가는 초근접거리로 이렇게 적을 근접시킬 경우에는 전차에 명중탄이 나는 것을 댓가로 해서 전차의 공축기관총에서 발사되는 정확한 조준의 기관총탄과 전차의 주포탄이 대전차포 조작원을 육편으로 만들기 딱 좋았을 뿐더러 보통은 적 전차가 아군 대전차포를 알아채고 선제사격해서 깔끔하게 제거하게 된다. 괜히 교범에서 500m를 사실상의 근접거리 한계로 보는 게 아니다. 그 이하면 서로 쏘고 둘다 쓰러지는 양패구상(兩敗俱傷)하거나 전차에게 선제사격당해서 대전차포와 조작원이 세트로 제거당하기 딱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민국 국군의 훈련상황도 그 당시에는 중대 훈련을 받은 게 대부분일 경우였고 보병간의 소총 사격전은 분쟁등으로 인해 실전경험이 높았지만 대전차포 같은 중화기를 다루는 실력은 앞서 포병의 경우처럼 별로 좋지 않았다. 이러니 매복지를 찾아서 전면에 대전차 지뢰밭을 심어놓고 전차의 측면을 사격한다 같은 고급 전투기술을 사용할 수가 없었던 데다가 당시의 대한민국 상황상 대전차 지뢰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옹진반도는 매복에 적당한 지형이 별로 없었다. 이러니 실제로는 800m 이상의 원거리에서 전차의 전면장갑에 대고 사격하게 되며 훈련상태가 상대적으로 좋은 인원들도 교범상에 나온대로 500m까지 적 전차가 근접한 상황에서 사격하므로 포탄이 다 튕기는 것이었다. 설령 320m 이내의 초근접거리에서 대전차포를 쏘더라도 미국이 준 철갑탄은 구식이라서 경사장갑에 착탄시 탄두가 붕괴되면서 장갑관통을 못하는 탄자붕괴현상이 이미 2차대전 때 발견된지 오래된 물건인지라 제대로 매복하고 사격해도 어차피 답이 없었다.
북한군이 주저항선을 돌파함과 동시에 대대관측소가 북한군 포격에 박살나고 유선과 무선 통신기가 모두 파손되어 제3대대를 실질적으로 통합지휘할 수 없었다. 그나마 제9중대장의 무전기가 남아서 각 중대와의 통신망을 간신히 확보할 수 있었지만 연대와의 연락이 불가능해졌다. 제3대대도 수중에 가진 병력만으로 싸워야 하는 사태가 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이 시점에서 제3대대에 연대의 예비병력이 증원되어야 하나 이미 예비병력은 서쪽의 제1대대쪽으로 증원된 상황이었고 그나마 통신두절으로 이런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제3대대는 느낌상 제17보병연대의 증원이 불가능함을 직시하고 오전 8시에 치마산과 석계리를 이어주는 선으로 철수해서 제9중대와 10중대로 지연진지를 급하게 만들게 되었다.
철수 도중에 강령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연대본부에서 보낸 장교가 탑승한 지프를 발견한 제3대대장은 전선을 유지하고 통신망을 확보하라는 연대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제3대대장은 북한군의 공세를 버티기가 어려우니 지원병력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 후 지프와 연락장교를 되돌려보냈다.
제1대대와는 달리 무선연락망이 한줄기 실같이 남아있었기에 각 중대의 상황을 파악한 제3대대장은 병력들이 분산철수하는 상황을 파악하고 각 중대에게 곧 지원이 도착하니 제11중대는 판서, 제9중대는 석계리, 제10중대는 치마산에서 진지를 건설하고 적을 막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치마산 기슭에 배치된 제10중대는 병사들이 전차 출현에 당황했다. 사실 전차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병력들이 대다수인지라 무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조급하게 선제사격을 가한 탓으로 북한군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되어 강령으로 분산 철수한다.
반면 석계리의 제9중대는 제3대대장이 같이 있어서 병력장악이 쉬웠고 저수지 옆에 있는 험한 길에 종심이 깊은 저지진지를 편성하였다. 얼마 후 북한군의 전차장들이 상반신을 노출시키면서 진격하고 후속하는 보병부대들은 전술행군대형을 유지한 채 국군의 살상지대로 들어섰다. 북한군도 전차 사용법에 미숙한데다가 T-34 전차 계통의 잠망경 시야가 별로 좋지 않다는 문제가 서로 얽혀서 벌어진 대실수였다. 그래서 제9중대 장병들은 북한군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여 기습사격으로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북한군의 반격으로 대한민국 국군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데다가 더 이상 현 진지를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제9중대는 강령으로 분산 철수하였다.
이리하여 제3대대는 분산 철수를 하면서 일시적으로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개전 8시간만에 북한군 제6사단 1연대는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양원과 신강령역을 점령함으로서 옹진반도 내의 좌우교통을 차단하면서 대한민국 국군을 반토막으로 갈라놓았다. 북한군이 전략적 승리를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제17보병연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사태를 비관시한 미국 군사고문관 5명은 냉정리에 위치한 경비행기용 비행장에서 연락기를 타고 탈출하였다.
제3대대도 결국에는 붕괴 후 분산철수를 했으나 제1대대에 비하면 부대 건재를 유지하고 후퇴할 수 있었다. 이는 제3대대장이 제1대대장처럼 백해무익한 소수인원만의 전방진출과 후퇴를 하지 않았으며 무선망을 일부라도 살려서 각 중대를 어떻게든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7. 철수작전
옹진반도 방어에 실패한 제17보병연대는 철수를 해야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철수작전을 수립하지 않아서 혼란스런 철수가 진행되었고 둘로 갈라진 부대는 각각 철수해서 한참 뒤에나 합류하게 된다.7.1. 사곶항 철수
제2대대가 오후 2시까지 일시적으로 제1대대의 주방어선을 일부 회복했고 탄약보급을 요청할 때 제17보병연대로부터 제1대대 지역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연대본부가 오전 12시에 강령으로 철수했으니 제2대대도 철수하라는 것이었다.당시 자신이 담당한 지역의 상황만 제한적으로 알고 있으며 옹진반도의 전체 전황에 대해서 몰랐던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철수를 독자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각 중대에 연대본부의 철수명령을 전달한데다가 연대본부와 지원부대들이 원래 주둔지에서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직후 제1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냉정리 부근의 불당산으로 철수하였다.
갑자기 내린 철수명령 때문에 제2대대도 분산철수하는 상황이 되었다. 제7중대는 오후 1시에 첫번째 목표인 사동을 확보한 후 다음 목표인 은동으로 진출해서 제1대대의 저항선을 회복하기 직전 상황까지 왔다. 그러나 철수명령을 받고 후퇴중에 제3소대장 조유동 중위와 소대선임하사 고용출 중사가 전사하는 바람에 지휘관을 잃고 부대가 뿔뿔히 흩어져서 제1소대와 제3소대는 비행장이 있는 냉정리로 철수했다.
제5중대도 상황은 마찬가지라서 초기 철수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이미 북한군이 깊숙히 침투한 상황이었고 철수로를 뚫는 임무 수행중 차량을 세우라는 주민의 신호를 무시하고 도로를 달리다가 보리밭에 매복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서 5중대장인 김교석 중위등 5명이 전사한다. 그래서 5중대도 분산철수해서 비행장이 있는 냉정리로 갔다.
대대본부도 무사하지 않아서 오후 3시에 마현으로 이동하던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도 81㎜ 박격포 2문으로 냉정리에서 진격하는 북한군의 자주포를 일단 저지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고 오후 3시에 다시 마현으로 후퇴하다가 매복한 북한군의 총격을 받았으나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냉정리 남쪽에서 철수병력과 다시 만났다. 이 때의 병력은 낙오병력을 수습한 것까지 합쳐서 400여 명의 병력으로 불당산에서 재편성을 실시하였다.
기록상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반격을 잘 수행하던 제2대대가 철수명령 받았다고 급속하게 붕괴되는 것에는 북한군의 반격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군의 38경비 제3여단의 일부 부대는 격퇴했지만 다른 부대가 우회해서 매복한 것에 당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여기에 더해서 양원을 점령한 북한군 6사단 1연대의 일부 병력이 38경비 제3여단을 지원하려고 서쪽으로 이동중이라서 협격당할 위험에 처한 것도 한몫했다.
원래 철수계획상에는 옹진과 강령을 거쳐서 부포항으로 철수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미 옹진에 북한군의 선발대가 진출한 상황을 확인한 후 사곶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제2대대장이 연근산 부근에 이르렀을 때 연대 정훈관인 한서한 중위로부터 “제1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사곶항으로 철수하라”는 연대장의 본격적인 철수명령을 뒤늦게 받았다. 이는 송호림 소령이 1950년 4월에 제2대대장으로 배치변경 되기 전까지 제1대대장을 하고 있었기에 혼란속에 뒤섞인 제1대대와 제2대대 병력을 통합지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다.
해당 시점에서 제1대대, 제2대대, 다른 부대의 낙오병등의 병력이 뒤섞였으므로 임시로 재편을 실시했다. 여수·순천 10.19 사건때 적진에 포위된 경험이 있던 김백일 대령과 예전에 주고받았던 대화중에서 긴급시에는 활동이 간편하고 기동이 빨라야 했다는 것을 떠올린 제2대대장은 1개 분대를 5명으로 하고 3개 분대를 1개 소대로 하며 5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해서 총 7개 중대로 병력을 재편하였다.
우선 철수 루트부터 확보해야 했으므로 7대의 2½톤 트럭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선두의 5대에는 전투병력을 탑승시키고 후방의 2대에는 부상병을 탑승시켰으며 그 뒤에 탄약차를 뒤따르게 한 후 옹진읍내에 돌격해서 기관총과 소총으로 일제사격을 하면서 거리를 돌파하는 작전을 시행하는 한편 보병부대는 옹진읍내를 피해서 연근산으로 이동했다.
오후 7시 30분에 연근산에서 다시 300여 명의 낙오병력을 수습한 제2대대는 6월 25일 오후 9시에 제7중대와 제4중대의 박격포소대를 연근산에 잔류시켜서 후위를 엄호하게 한 후 철수를 개시하여 2시간 후에 사곶항에 도착하였다. 사곶항에 도착했을 때는 낙오병이 계속 몰려들어 1,300여명이 되었고 경찰과 일반주민을 합쳐 해상철수 대상인원이 2,000여명이나 되었으나 선박을 구할 수가 없었다.
원래 사곶항은 어항이라 현지 주민의 어선이 많았으나 공무원과 가족 및 현지 피난민들이 이미 개전시부터 피난에 어선들을 사용해서 제2대대가 도착했을 때는 1척의 배도 남지 않았다. 애초에 사곶항 철수는 원래 계획상에 없는 터라 다른곳에서 선박이 올 턱이 없었고 온다고 해도 부포항으로 가게 된 상황이었다. 현지의 자재를 활용해서 뗏목이나 빈 드럼통을 엮는 방법도 존재했지만 시간이 다급한데다가 성과도 좋지 않아서 일단 시도했으나 답이 없었다.
이 때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북한군이 얼마 후에는 사곶항으로 밀려올 것은 분명한데다가 사곶항 주변에는 방어진지로 쓸만한 곳도 없었다. 제1대대와 제2대대는 그냥 보병대대로 중화기도 별로 보유하지 않은 상황인데다가 다수의 낙오병까지 합쳐져서 조직적인 전투가 힘들었고 개인화기와 휴대한 탄약만으로 버텨야 하므로 장시간의 전투도 곤란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곶항을 빨리 떠나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2대대장은 오후 11시에 서장대행을 담당한 김선진 경감으로부터 대대장이 나서서 용호도에 있는 선박을 철수 지원에 투입하라 압박할 것을 제안받았다. 그래서 연락끝에 사곶항 맞은편에 있는 용호도의 지서주임 김두의 경사의 주선으로 대성호라고 부르는 20톤급 기관선을 지원받았다. 원래 대성호도 25일 낮 12시부터 저녁 9시까지 옹진의 공무원과 경찰 및 가족들을 안전지대로 피난시킨 후 자신들도 밤 11시에 용호도를 떠나기로 예정했지만 일부 선원들이 아직 탑승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서주임인 김두의 경사가 독촉하여 사곶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대성호 1척만으로 6월 26일날 아침까지 군인과 경찰을 용호도로 수송하였다. 정원 90명짜리 소형 선박으로 안전을 위해 80명씩 탑승하고 하선시에는 선착장 근처의 수면에 탑승객이 뛰어들어서 각자 알아서 육지에 상륙하는 방식으로 속도를 필사적으로 높여서 실어 나른 끝에 군인과 경찰의 철수는 거의 완료되었다. 6월 26일 오전 7시에 후위를 담당한 제1중대가 탑승하기 시작하고 민간인 수송에도 착수하였으나 시작하자마자 사곶항 부근에 북한군의 박격포가 발사하는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그 강도도 점점 심해지는지라 하는 수 없이 제1중대가 철수한 후 민간인 5백명을 남겨둔 채로 수송작전을 중단하게 되었다.
여기서 비극적인 일도 발생했다. 사곶항쪽으로 대한민국 해군의 LST 1척이 제17보병연대장의 요청에 따라 혹시나 피난민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6월 26일 오후 2시경에 접근하였으나 북한군 선박으로 오인한 대한민국 육군이 신호를 보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LST는 이미 사곶항 주변이 모두 북한군에게 점령된 줄 알고 떠나버렸고 결과적으로 용호도등 주변 섬으로 대피한 민간인들도 스스로 선박을 구하지 않는 한 완전한 철수를 제대로 못한 것이다.
용호도는 원래 어업의 중심지중 하나였고 인천해양과학고등학교의 전신이자 1926년에 개교한 용호도공립수산보습학교가 존재했으므로 이용 가능한 선박들이 있었다. 다만 대부분의 선박들이 용호도의 피난에 사용되는 바람에 용호도에 대성호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용호도에서 제2대대가 지서주임인 김두의 경사의 배려로 식사를 하는 동안 제2대대장은 보급관인 박원근 중위에게 철수할 선박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원근 중위는 26일 오전 9시에 대성호를 타고 출항해서 4시간 후인 오후 1시에 20톤급 동력선 1척과 대형화물 운반용 바지선 6척을 예인해서 돌아왔다.
이렇게 천신만고끝에 구한 선박을 이용해서 동력선 1척당 바지선 3척을 로프로 예인하는 방식으로 철수선박을 확보한 후 동력선에는 부상병과 김두의 경사 및 대성호의 선원 가족들을 탑승시키고 각 바지선마다 200명씩 탑승하게 한 후 제2대대는 6월 26일 오후 3시에 용호도를 출항한다. 그 후 4시간이 지난 오후 7시에 부포 앞바다에서 제3대대 병사 10명이 탄 소형 선박을 만나서 부포항이 이미 함락된 것을 안 후에 방향을 돌리게 된다.
원래부터 선박이 낡기도 했거니와 예상치 못하게 긴 항해를 해야 하므로 선창에서 스며드는 바닷물을 철모로 퍼내는 등의 고생을 하다가 연평도 앞바다에서 바다가 거칠어지면서 예인용 로프가 끊어지는 등의 각종 사고가 일어난 끝에 6월 27일 오전 7시에 연평도에 도착했다.
그 이후에는 연평도에서 동력선 1척을 더 구하고 1척의 동력선에 2척의 바지선을 묶는 식으로 편성을 변경하여 3개 선단을 만들고 동력선에 급유하고 로프를 교체하고 고장부위를 수리하는 한편 병력들에게 식사를 하게 한 후 6월 27일 오후 8시에 연평도를 출발해서 인천으로 향했다. 선두의 대성호가 이끄는 선단은 제2대대장인 송호림 소령이 지휘하고 두번째 선단은 이동호 대위가 지휘했으며 세번째 선단은 박주용 대위가 지휘했는데 항해중에 해군의 무전을 들은 결과 북한군 선박과 만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분산해서 항해하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각 선단이 1시간 거리를 유지하도록 분산하였다.
그 결과로 6월 28일 오전 6시에 첫번째 선단이 인천에 입항하고 곧 두번째 선단도 인천에 입항했다. 여기서 김두의 경사와 대성호 선원 및 가족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작별을 한 제2대대장은 세번째 선단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서 결국 저녁 8시에 인천을 출항해서 남쪽으로 항해하던 중 덕적도 근해에서 해군의 YMS-513함을 만나서 함장인 박경철 대위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목적지를 군산으로 돌려서 6월 29일 오전 7시에 군산에 도착한 후 상륙하여 준비된 열차에 탑승하여 대전으로 이동한 후 선화초등학교에서 제17연대 본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선단을 포함한 일부 병력은 6월 29일 오전 11시에 인천에 상륙했다. 혼란에 빠진 인천 시가지에 들어가서 인천경찰서에서 상황설명을 들은 후에 후퇴 경로를 나누어서 일부는 경찰이 찾아낸 차량에 탑승해서 수원을 거쳐서 대전으로 이동했으며 나머지는 인천에서 다시 배를 타고 당진까지 항해해서 상륙한 후 육로로 대전으로 이동해서 6월 30일에는 대전의 선화초등학교에서 제17연대 본대와 합류했다. 이로서 총 6일간에 걸친 제17연대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사곶항 철수는 계획에 없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매우 훌륭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민간인을 어쩔 수 없이 철수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7.2. 부포항 철수
강령에서 낙오병을 수습한 제3대대는 죽교리과 중기동을 연결하는 선에 저지진지를 편성하였으며, 공병대는 북한군 전차가 우회하기 어려운 조촌교를 폭파시켰다. 그리고 백인엽 연대장은 대전차포 4문과 최소한의 운영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제3대대장 지휘하에 일시적으로 넘기고 스스로는 대전차포와 함께 강령에 남아서 후퇴하는 낙오병을 수습하려고 했다.북한군이 강령을 점령한 후 남진을 계속하고 있을 때 강령강 제방에 배치된 대전차포 중대는 근거리 사격을 퍼부어 북한군 자주포 4대와 장갑차 2대를 격파한다. 하지만 이는 무한궤도와 보기륜을 파손하여 자주포와 장갑차의 기동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는 의미로서의 격파였다. 그 이후에 대전차포도 중기동으로 철수하였다.
오후 4시에 백인엽 연대장은 중기동을 방어함으로서 부포항을 확보하려고 결심했다. 그 이유는 육군본부에서 철수를 위해 보낸 전차상륙함이 곧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병력을 부포항으로 보내고 나머지 병력으로 중기동 방어선을 지키면서 북한군의 야간 기습을 막기 위해 포병들은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사격을 지속하고 부포항에 있는 차량을 이용해서 비어있는 트럭이 중기동 쪽으로 올 땐 전조등을 키고 부포항으로 돌아갈 때는 전조등을 꺼서 마치 증원군이 부포항에서 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기만작전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사곶항 쪽도 마찬가지지만 북한군이 열성적으로 추격전을 벌이지 않았다. 이는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는 강령을 점령한 후 38경비 제3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6월 25일 오후에 해주를 경유해서 개풍군 영정포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6월 25일 저녁 늦은 시간인 오후 11시 30분에 대한민국 해군 전차상륙함인 LST-801 천안함이 부포항에 접안하였다. 함장인 김옥경 대위가 백인엽 연대장을 찾아와서 6월 26일 아침 8시가 되면 썰물 때문에 배가 못 떠나니까 그 전에 모두 탑승하라는 요청을 했고 연대장은 6월 26일 석양이 질때까지는 승선을 완료한다고 말했다.
6월 26일 새벽 12시 30분에 최전선으로 돌아온 연대장은 제3대대와 포병대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적이 야간기습이라도 하면 곤란하므로 1개 중대씩 철수하면서 조용하게 실시하라고 했으므로 실제 철수는 오전 1시부터 시작해서 오전 5시경에는 방어선에는 제3대대의 1개 중대와 포병대대 1개 포대와 대전차포 중대만이 남았다.
오전 5시에 북한군이 포격과 함께 공격을 개시하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3대대 11중대를 철수시키고 야포와 대전차포로 사격을 지속하였으나 북한군이 화망을 돌파하고 오전 6시에 중기동 앞 하천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교량은 이미 폭파된 후였고 북한군이 현지 주민까지 동원해서 다리를 복구하려고 하는 때를 틈타서 나머지 부대도 부포항으로 철수하면서 대전차포 2문을 부포항 진입로 근처에 매복시켰다.
오전 8시에는 썰물이 진행되는 바람에 LST-801함은 부포항에서 5㎞ 떨어진 해안에 정박한 후 탑재한 보트와 주변의 어선을 써서 병력을 선내로 실어날랐다. 하지만 원래 2척이 와야 할 LST가 1척만 정시에 도착했으므로 수송선 부족과 썰물로 인한 직접접안불가로 인해 탑재 불가능한 모든 장비와 물자는 소각하거나 바다 속에 밀어 넣어야 했다.
오전 9시 30분에는 교량복구를 마치고 중기동에 진입해서 점령을 완료한 북한군이 부포항으로 진격하자 미리 매복해놓은 대전차포로 자주포 2문의 측면을 공격해서 일시적으로 정지시켰다. 이러는 동안 백인엽 연대장은 부포항에 가서 남아있는 100여명의 병력들에게 부두에 정렬한 야포와 대전차포를 분해해서 바다에 던진 후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고 뒤늦게 도착한 LST 1척은 부연대장인 김희준 중령이 인천에서 간신히 찾아내서 탑승한 후 도착한 해양대학 실습선으로 유창훈 대위가 탑승해서 사곶 쪽의 철수를 지원하라고 했다.
오전 10시 30분에 북한군이 부포항 코 앞까지 접근하자 앞서의 화포 파기때 M3 105mm 경곡사포 1문만은 약간의 포탄과 함께 남겨놓은 것을 사용해서 연대장인 백인엽 대령과 제7야전포병대대장인 박정호 소령은 엄호사격을 하며 북한군이 부포항 부근까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잔여 병력에게 남은 어선을 타고 철수를 지시했다.
오전 11시에 병력 승선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 LST-801함을 출항시키고 포탄을 다 쏘고 곡사포를 물 속으로 밀어넣은 후 백인엽 연대장은 자결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박정호의 설득으로 포기한 후 조각배를 타고 부포항을 떠났다.
오후 2시에 조각배를 타고 표류하던 연대장과 포병대대장은 어선에 구조된 후 오후 7시에 연평도에 도착했다. 이후 신성모 국방부장관으로부터 백인엽 대령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은 소해함인 JMS-302함과 JMS-307함이 연평도에 접안하였고, 백인엽 대령과 박정호 소령 및 부하 40명은 해군 소해정의 구출을 받아 6월 27일 오전 2시에 연평도를 떠났다. 6월 27일 오전 8시에 인천에 상륙하여 육군본부에 철수결과를 보고한 후 수원시로 이동하였으며,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군예비겸 대전으로 피난한 대한민국 정부의 경호대가 된 제17보병연대는 영등포에서 백인엽 대령과 합류한 후 대전 선화국민학교로 이동하여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부포항 철수의 경우에는 연대장이 진두지휘까지 해서 그럭저럭 잘 진행된 편이지만 수송선 2척중 1척이 제 때 오지 못했고 썰물까지 발생해서 접안이 불가능했으므로 다수의 중장비 상실과 더불어 연대장의 자결 소동등 마무리가 별로 좋지 않은 점이 종종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8. 평가
옹진반도 방어작전은 완전실패, 철수작전은 계획도 세워놓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준수했다고 평가된다.그래도 옹진반도 전투가 개전 초반 대한민국 국군의 전투 중에서는 평균 이상은 했다는 것이 6.25 전쟁 극초반의 대한민국의 열악한 상태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느낀다.
8.1. 방어작전
6.25 전쟁 개전을 앞두고 평소의 대규모 분쟁 수준으로 대비한 것이야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아주 큰 문제는 아니다. 더 멍청한 육군본부 같은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북한군의 양동작전에 제대로 걸려서 예비대를 엉뚱한 곳에 써먹고 초반의 강습으로 부대가 쉽게 분단되는 것은 분명하게 큰 문제였다. 특히 옹진반도내 동서 연결망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것 때문에 겨우 전투 1일도 안되어서 전략적인 패배를 달성하고 만다.
그 외에도 열악한 현지 상황을 감안해야 하지만 벙커나 유개호의 방어력이 약해서 북한군 포격이나 전차포 포격에 쉽게 붕괴되었으며 관측소 위치가 이미 모조리 발각난 탓에 개전하자마자 쉽게 집중공격을 받아서 유무선 통신장비가 박살나고 통신이 단절되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여 지휘가 어려워지고 조직적인 전투가 힘들어지는 사태도 발생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그리고 통신 단절은 수송 문제로까지 이어졌다는 부작용도 있었다. 당시 옹진반도 내에는 일단 전투기간중에는 충분히 사용가능한 수량의 탄약과 보급품이 존재했고 수송차량도 당시의 한국군 기준으로는 충분했으나 통신이 단절되는 바람에 일선의 장병들은 탄약과 보급품이 떨어졌는데 탄약과 보급품의 상당수는 아직 후방에 있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나마 유류와 식량은 민간조직을 동원해서 간신히 어느 정도 보급했다는 것이 다행일 정도다.
8.2. 철수작전
철수작전쪽도 옹진반도 사수 같은 거나 외치고 평소에는 전혀 생각도 못해서 말 그대로 1개 연대 전체가 전멸할 위기에 빠졌으나 북한군의 사정에 인한 추격의 둔화와 함께 임기응변적 발상에 의거해서 분단된 병력이 각자 어선과 쪽배등을 통해 분산철수한 것으로 인해 병력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는 점은 높이 살만 하다.다만 무계획적 긴급철수에 의해 중화기와 보급품등은 모조리 소각하거나 바다에 밀어넣어야 했고 일부 철수하지 못한 물품들은 북한군 손아귀에 떨어졌으며 부상병들도 제대로 구출하지 못했고 민간인 철수는 거의 제대로 진행하지 못해서 민간인들이 자력으로 알아서 철수해야 했다는 점은 오점으로 남는다.
8.3. 보병전
개전 직전까지 중대훈련을 받은 게 대한민국 국군의 평균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삼팔선 분쟁에서의 경험만 가지고 있는 제17보병연대가 북한군을 상대로 한 보병전에서는 백중세를 기록한 것 자체가 대단하다.지휘관의 경우에는 훈련과 경험 부족으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 은근히 많았으나 적어도 충성심과 용기는 대단하였다고 평가한다. 제1대대장도 전사하기 전까지 스스로 진두지휘를 하려고 했었고 제2대대장은 귀 관통상을 입고도 병력 철수까지 제대로 지휘하였으며 제3대대장도 전차를 포함한 주공이 밀려옴에도 불구하고 부대 건재는 유지했고 연대장도 철수 과정에서 진두지휘하면서 직접 적과 싸우고 끝까지 적에게 포격을 날렸다.
철수과정중에 분산철수라고 읽고 병력이 흩어져서 개별적으로 도주하는 일이 잦았다. 이는 만들어진지 얼마 안되었으며 훈련이 덜 된 군대의 특성상 벌어지는 일이다. 평소에 부대를 장악하는 능력이 지휘관 몇 명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그런 사람들이 전사하거나 부대가 강력한 화력에 직면하면 부대가 갑자기 분산되는 것이다. 그래도 분산된 병력이 빠르게 후퇴해서 다시 재집결하는 것을 보면 병력들의 충성심 자체는 높다고 볼 수 있다.
8.4. 대전차전
57㎜ 구경을 가진 6파운더의 미국제 라이센스 대전차포가 전투 초반에는 전혀 효과가 없다가 철수시에는 효과를 보이는 상반된 모습이 나온다.여기에 대해서는 전투 초반에는 T-34-76이나 T-34-85같이 장갑을 제대로 갖춘 전차들이 선두에 섰고 그 이후에는 SU-76M 같이 장갑이 얇은 자주포들이 BA-64같은 장갑이 없다시피 한 정찰 장갑차들과 함께 선두에 섰기 때문에 벌어진 일로 본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예부대이자 1개 전차중대를 지원받은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는 강령을 점령한 후 회군중이었고 그 이후에는 훈련도와 장비가 빈약한 38경비 제3여단을 중심으로 한 부대들이 옹진반도 내부의 전투를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대전차포 매복에 쉽게 걸려드는 등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대전차포 자체의 문제점도 있었다. 한국군에게 지급된 6파운더는 탄약의 대부분이 장갑 관통력이 없는 고폭탄이었고 철갑탄의 숫자가 부족했을 뿐 아니라 관통력이 좋은 분리철갑탄은 명중률 안좋다고 미국이 라이선스 생산을 안해서 지급하지 않았고 이미 2차대전에서 경사장갑에 착탄시 탄두가 붕괴되면서 장갑관통이 실패하는 탄자붕괴현상이 입증된 구식 철갑탄만 지급하는 통에 이론상 320m라는 초근접거리 이내까지 T-34를 근접시켜야 정면장갑 관통이 가능했고 그렇게 초근접해서 명중탄을 날려도 경사장갑 때문에 탄자붕괴 현상이 일어나면서 전차 격파에 실패하는 답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비록 장갑이 얇거나 없는 자주포와 장갑차 상대로는 6파운더가 효과를 보였으나 급박한 철수상황이었으므로 몇 대의 자주포와 장갑차가 완전격파당했는지는 아직까지는 미지수다. 그 이후에는 철수작전시 선박부족등으로 인해 중화기의 대부분을 소각, 파기해야 했으므로 대전차포 자체가 사라진다.
57㎜ 구경의 M18 무반동포와 60㎜ 구경의 M9A1 바주카의 경우에는 57㎜ 대전차포보다 사정거리가 더 짧고 관통력이 더 낮아서 전차 격파에는 완전히 무쓸모한 존재였고 탄두의 문제 때문에 착탄 후 도탄이 발생한 후에나 발화하여 성형작약에서 발생하는 메탈제트가 허공으로 날아가므로 안그래도 부족한 장갑관통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오히려 고폭탄 대용으로 대전차고폭탄을 사용하는 대보병전에서 오히려 유용했다.
8.5. 포병전
M3 105mm 경곡사포는 북한군의 화포보다 사정거리도 짧은데다가 전투 초반에는 미국 군사고문관의 잘못된 사격통제로 포격을 1시간이나 늦게 시작해서 별 효과가 없었고 그 이후에는 전선이 빠르게 밀려나는 상황인지라 전방에 관측원을 둘 수 없어서 간접포격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전통적인 포격전에서는 성과가 별로 없었다.철수작전 때는 바로 코앞에 있는 일선장병들의 연락을 받아서 사격하는 형태로 운용되었으며 사실상 보병지원용 소형 박격포처럼 근접화력지원을 수행했는데 성과는 확실하게 있었던 것 같지만 역시 철수하는 상황인지라 확실한 전과달성여부는 미지수로 남았다.
그러나 개전 당시 전방에 너무 가깝게 포병을 배치해서 포격 후에 탄약공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화력지원에 애를 먹거나 보병과 함께 포병진지를 철수하는 과정에서 손해가 많았다는 문제점도 터졌고 특히 앞서 언급한 선박부족과 썰물 문제로 인해 대부분의 화포를 유기, 소각시켜 많은 수를 상실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에게 포병 전력은 다 합쳐서 포병연대 1개 뿐이었고 그나마도 육군본부 직할로 각 사단에 대대 단위로 분산해서 파견하는 식으로 굴릴 만큼 매우 귀중한 자원이었는데, 부실하게 계획된 철수 작전으로 인해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 포병대대를 빠르게 철수시켰거나 다른 전선에 배치했으면 적에게 더 출혈을 강요할 수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전쟁 발발 전, 어차피 대규모 공세에는 철수하기도 나쁠테니, 어느 정도의 국지전에 대항할 수 있으면서도 유사시 철수하기 쉽게끔 미 군사고문단 측에서는 1개 연대와 1개 포병대대를 혼성대대로 감축하려고 했었으나, 상술하다시피 그 전에 일이 터졌다.
9. 오보사건
그리고 제17보병연대가 인천으로 철수하는 상황에서 사기를 진작시킨다고 6월 25일 제17보병연대가 반격에 성공해서 해주시로 진격하고 있다는 오보가 터졌다.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당시 연합신문사의 최기덕 기자가 전쟁상황을 취재하려고 옹진반도에 가서 백인엽 대령과 인터뷰를 한 후에 해당 내용을 국방부 보도과장인 김현수 대령에게 전한 것이 원인이었다. 당시 최기덕 기자의 말에 따르면 "백인엽 대령이 서울에 가거든 이 말 한마디만 전해주소... 백인엽은 부대를 지휘하여 해주로 진격하겠다" 라고 제17연대장이 발언했다는 것이다.
기자 1명이 아무런 증거자료 없이 구두로 전달한 내용을 가지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킨다고 옹진의 제17연대가 해주로 돌입했다는 식의 오보가 터지는 바람에 효과는 전혀 없는데 북한의 중상모략거리만 되는 악수가 터진 것이다.
그리고 백인엽 대령의 증언으로는 당시에 전선이 붕괴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최기덕 기자와 장황하게 인터뷰할 상황도 아니고 해주 진공 따위는 당시 상황에서는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덕분에 제1보병사단과 사단장 백선엽이 오보가 진짜인줄 믿고 반격작전에 돌입했다가 서울이 함락되면서 일시적으로 한강 북쪽의 일산신도시정도 되는 위치에서 고립당하기도 했으며 이후 북한의 대한민국 북침설 같은 것에 악용되었다.
그 외에 6월 23일부터 옹진반도의 제17보병연대가 105㎜ 야포와 81㎜ 박격포를 700발이나 쏴서 6월 25일에 북한군이 어쩔 수 없이 반격했다는 옹진포격설이 있다. 6.25 전쟁이 개전한 후 한서한 중위를 생포한 북한군은 해당 장교가 제17보병연대의 작전지도 담당이라고 제시하면서 포격의 증거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며 북한의 언론 매체를 통해 일본의 아사히 신문이나 교토 통신사에서도 보도할 지경이었다.
해당 건도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자연적인 배수진에 보급하기가 심히 곤란한 지역인데다가 이미 미국 군사고문관이 포탄 낭비를 막기 위해서 포격을 통제하고 있던 상황이고 UN한국위원단 일행까지 6월 23일에 방문해서 삼팔선이 이상없음을 확인까지 한 마당에 포격전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했으며 당시 한국군의 탄약상황이 악화일로인 가운데 보급도 어려운 상황에서 연대장이 독단적으로 700발이라는 대량의 탄약을 소모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건이다. 한서한 중위도 직책이 정훈장교였고 포로가 된 후 4일이나 지나서야 언론에 공개한 탓에 증언의 신빙성이 전혀 없다.
10. 결과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제17보병연대는 총원 2,728명 중 전사 113명, 실종 64명, 부상 371명으로 사상율 20%으로서 고립된 반도 지역에서 분산철수를 했음에도 생환하여 대전으로 재집결한 병력은 2,180명이었다. 전과는 적사살 581명, 82㎜ 박격포 1문 노획, 자주포 파괴 5대, 장갑차 파괴 5대다.그러나 해당 기록의 경우에는 개전 초반의 혼란 속에 긴급히 분산철수한 관계로 손실과 전과를 면밀하게 기록하고 검증할 수 없다는 점과 제17보병연대와 같이 싸운 경찰병력, 현지 의용대 등의 손실이 기록되지 못한 점 같은 미비사항이 존재한다.
그리고 제1대대의 2중대, 3중대와 같이 포위되어 분전했으나 괴멸된 부대 및 제2대대처럼 분산 철수중에 타격을 입은 경우등 많은 손실이 일어난 전투항목이 존재하며 당시의 제17보병연대의 사기 및 전투의지를 감안하고 북한측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기록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사상자 숫자가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기록보다는 더 많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사실 백인엽 연대장의 성품만 생각해봐도 공식기록 정도의 손실을 보았다고 쉽게 옹진반도를 포기한다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해외에서 파악하는 옹진반도 전투의 대한민국 국군의 손실은 제17보병연대에 지원부대와 경찰 및 의용병까지 합한 전체 병력인 총병력 3,600여명중 1,42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제17보병연대는 총합해서 1개 대대 수준의 병력을 상실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짧은 전투기간이지만 용맹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타격을 입고 분산 철수하면서 손해가 더 커진 것을 반영한 것이다. 전과의 경우에는 해외에서도 보통 전투원 사살은 인정하는 편이고 기갑장비 격파도 격파라는 군사적인 개념을 따져본다면 별 문제 없이 인정받고 있다.
제17보병연대는 옹진반도에서 후퇴한 이후 철수 병력을 계속 규합하고 신병을 배치받음으로써 병력을 회복해나갔고, 소화기같은 개인 장비의 경우에는 전사자 분량까지 대부분 가져와서 이 부분에 대한 장비 부족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이후 지연전을 벌이면서 북한의 766부대를 궤멸시키는 등의 전공을 세워 9월 15일 한국군으로서는 해병 제1연대와 함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수복하였다.
11. 여담
- 옹진반도는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잠시 수복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상실하였고 이후 옹진군은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 그리고 연평도만으로 유지되다가 1973년 부천군을 폐지하면서 부천군 도서지역을 편입한 후 1995년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 옹진반도의 민간인들은 전쟁 당시에는 백령도 같은 주변 도서로 자력으로 피난을 갔다가 서해 5도와 인천, 강화도 등지에 정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