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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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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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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년 시절3. 사제 시절4. 교황청 외교관5. 베네치아 총대주교(추기경 론칼리)
5.1.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의 마찰
6. 재위기간7. 선종 후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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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23세의 생애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초년 시절

  • 안젤로의 생일이 11월 하순이기 때문에, 아래에서 나이를 표기할 때에는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고 간주한 만 나이로 통일하여 쓴다.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미래의 요한 23세는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의 시골 마을 소토 일 몬테(Sotto il Monte)[1]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1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훗날 안젤로 론칼리는 어려웠던 생활을 회고하며 말하길 "남자를 망치는 것이 3가지 있는데, 술, 여자, 그리고 농삿일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농삿일로 당신 자신을 망치셨습니다."라고 하였다.[2] 이런 와중에도 신심 깊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영향으로 안젤로 역시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다. 그 덕에 7세이던 1889년 2월에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매우 빨리 첫영성체견진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가난한 농부 집안의 아들이었고 주변에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젤로는 별나게도 공부를 무척 좋아하고 머리가 좋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삼촌 자베리오가 퍽 놀랐다고 한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머리 좋은 티가 나자 반 친구들이 방과 후에 불러내어 때린 적도 있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도 안젤로는 독학을 하거나 삼촌 자베리오로부터 배웠다.

가족들에게 처음 사제가 되고 싶다는 뜻을 드러내었을 때 대다수 가족들은 '우리 집안에서 무슨 사제냐?' 하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젤로를 눈여겨 보던 삼촌 자베리오는 그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삼촌의 도움을 받아 안젤로는 1892년(10세)에 가장 가까운 도시 베르가모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소신학교'는 마을의 초등학교 위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해당했기 때문에 소신학교에 들어간다고 꼭 안젤로가 신학생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근방에서 초등학교 이상의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들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3] 하지만 아마도 이미 그때부터 안젤로는 사제가 되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처음 안젤로가 베르가모로 가던 날, 어머니가 온 집안을 뒤져 보았지만 있는 돈이라고는 단 2리라였다고 한다. 농촌 마을이라 어지간한 물건을 다 물물교환으로 얻었기 때문에 화폐가 별 필요가 없었던 것. 어머니는 도시로 공부하러 가는 장남에게 그 2리라를 건네주면서 울었다.

안젤로는 베르가모에서 공부하다가, 소신학교에 입학하고 3년이 지나 1895년(13세)에 삭발례[4]를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신학생으로서 성직자 입문단계를 밟았다. 그러나 아직 사제가 된 것도 아닌데도, 휴가 기간에 고향으로 돌아갈 때면 마을 사람들은 마치 안젤로가 이미 신부가 된 양 존대했다고 한다. 안젤로는 이러한 것을 거북하게 여겼다. 그러한 대접에 질투가 났는지, 한번은 다른 사제에게 안젤로의 가족들 중 누군가가 '벌써 신부라도 된 양 거만하게 군다.'는 말을 흘렸다. 이 말이 신학교에까지 전해지자 안젤로는 '너 자신을 낮추라.' 하는 꾸지람을 들었다.

1898년(16세)에는 평생 동안 큰 영향을 받은 라디니-테데스키 몬시뇰을 만났는데, 몬시뇰은 안젤로에게 로마에서 공부해보라고 권하였다. 안젤로는 로마 교황청립 아폴리나레 신학교에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 로마에서 공부했다. 아폴리나레 신학교에서 안젤로를 가르쳤던 교수 중에는 훗날 비오 12세가 된 파첼리 신부도 있었다.

1901년(19세)에 이탈리아 정부는 신학생들에게 부여했던 군 면제 혜택을 폐지하고 신학생들도 군인으로 징집했다. 안젤로도 징집되어 이등병으로서 베르가모 여단의 병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 사제 지망생에게 제일 힘든 것은, '군대 병사들의 분위기' 그 자체였다고 한다. 신학교에서는 하지 않는(혹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행동들을 거리낌없이 행하는 동료 병사들의 문화가 상당한 쇼크였던 듯하다. 하지만 가난한 시골 마을 출신인 덕에 체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서 군대 생활에 나름대로 잘 적응했고, 병장 진급도 오히려 빨리 했다.

3. 사제 시절

군에서 제대하고 1904년(22세)에 로마에서 사제로 서품받았다. 그러나 막상 부모와 삼촌 자베리오는 아들/조카의 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로마행 기차표를 살 돈이 없었던 탓이었다. 안젤로는 부모와 삼촌에게 감사의 편지를 따로 보내야 했다. 고향 소토 일 몬테의 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린 뒤, 로마의 아폴리나레 신학교로 돌아와 사감으로 일하면서 교회법 공부를 계속했다.

한편, 안젤로에게 로마에서 공부하라고 권했던 라디니-테데스키 몬시뇰은 당시 교황 비오 10세 때문에 큰 괴로움을 겪었다. 라디니-테데스키는 사회개혁에 큰 열정을 쏟았고, 그렇기 때문에 (당시 가톨릭 기준으로는 빨갱이스럽단 평가를 받았던) 레오 13세 시절에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임 교황이 된 비오 10세는 보수적인 인물이라 당시 라디니-테데스키가 진행하던 사회운동을 멈추라고 명하고 베르가모의 주교로 임명했다. 비오 10세는 라디니-테데스키를 주교로 임명함으로써 일종의 좌천을 시킨 것이다. 이것이 라디니-테데스키에겐 큰 고통이었다. 아무튼 베르가모의 주교로 임명된 뒤 라디니-테데스키는 1905년에 안젤로(23세)를 비서로 삼아 임지로 부임했다.

안젤로의 고향에서 가까운 베르가모는 롬바르디아의 공업도시로 공장 노동자들이 많고 가난한 곳이었다. 신자들은 새로 부임한 주교가 '로마에서 온 귀족 출신 성직자'이기 때문에 선입견이 있었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는 라디니-테데스키의 태도를 보고 점차 생각을 바꾸었다. 안젤로는 주교의 비서로 일하는 동안 노동자들의 고충을 알게 되어 사회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후에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게 된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 때문에 근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아 교황청으로부터 찍혀 있었다.[5]

한편 라디니-테데스키 주교는 계속해서 비오 10세와 충돌했다.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태도였던 것과 달리 교리에서는 의외로 보수적이던 라디니-테데스키 주교에게는, 교황과 계속 충돌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신적 고통이었다. 심지어 교구 안에 자신과 교황 사이를 이간질하는 첩자가 있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라디니-테데스키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지다가 1914년에 안젤로(3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가 사망한 날짜는 교황 비오 10세가 사망하고 이틀 뒤였다. 라디니-테데스키 주교를 진심으로 존경하던 안젤로에게는 이 죽음이 큰 아픔이었다. 바로 이해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이듬해(1915),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는 동원령을 내렸는데, 안젤로도 33세 나이로 군에 동원되었다. 안젤로는 병장 계급으로 밀라노의 의무대에 배치되었다. 후방으로 이송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꾼으로 노릇하면서도 또한 성직자로서 활동했다. 1916년에 이탈리아 정부는 군에 징집된 모든 사제들을 군종 신부로 임명했다. 이때 안젤로는 군종 신부로서 중위가 되었다. 한편 안젤로의 남동생들도 군에 징집되었고 여동생 1명은 암에 걸려, 안젤로는 공적인 일로도 사적인 일로도 바쁘고 힘들었다. 이 시기에 안젤로는 베르가모 주교의 명으로 학생용 호스텔을 짓고 학생들을 받아들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6]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19년(37세)에 공식적으로 제대하여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성체대회를 준비하는 일을 하였다. 1921년(39세)에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안젤로를 몬시뇰로 임명하고 전교회(당시에 일어난 가톨릭 선교단체)를 통합하고 이끄는 역할을 맡겼다. 안젤로는 이 일을 크게 부담스럽게 여겼지만 주변의 권유로 받아들였다. 당시에 서로 독자적으로 일어나 중구난방으로 활동하던 유럽의 전교회를 통합하고 바티칸의 지휘를 받는 조직으로 만드는 일을 하였다.

1920년대 초, 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에서 집권하던 시기에 안젤로는 여러 번 무솔리니를 비판하는 언행을 하곤 했다. 그 외에도 '가톨릭 신자가 비가톨릭 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용함이 좋겠다.'[7]는, 당시 가톨릭으로서는 놀랍도록 좌파적인 주장을 하여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에 바티칸 일각에서는 안젤로에게 '근대주의자(modernist)'[8] 혐의가 있다는 딱지를 붙였다. 쉽게 말하자면 '저놈 이단자 아닐까요?'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4. 교황청 외교관

1925년(43세)에는 주(駐)불가리아 교황청 순시자로 임명받았다. 교황청 순시자가 신부여서 권위가 없다는 이유로 주교로 서품받았지만, 이것은 안젤로가 교황청이나 이탈리아 종교계에서 힘을 얻지 못하도록 좌천시키는 작업이기도 했다. 불가리아처럼 가톨릭 신자가 소수인 나라로 가는 교황청 외교관은 한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파견된 순시자는 무려 6백 년 만에 불가리아로 가는 교황청 외교관이기도 했다.

안젤로는 외교관으로 임명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이유는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본인이 신자들 속에서 일하는 사목자를 바랐다는 것, 다른 하나는 외교관이 되면 누이들을 가사도우미로 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론칼리 집안이 가난했던지라 안젤로는 누이들을 가사도우미로 들여 자기 집 가사를 부탁한 후 월급이라는 명목으로 생활비를 주었다. 성직자든 뭐든 론칼리 집안에서 그래도 가장 성공한 사람이 안젤로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도와달라 돈을 부쳐달라는 부탁을 많이 들었으므로, 가족들을 돕는 일환으로 누이들을 가사도우미로서 두어 자신은 집안일을 맡기고 누이들은 생활비를 받는 일석이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외교관이 되어 해외로 나가버리면 더 이상 누이들을 가사도우미로 둘 수 없고, 따라서 월급도 줄 수 없으므로 꺼렸다. 하지만 결국 외교관이 되었다.

불가리아 정교회교황청 순시자로서 부임하는 안젤로를 두고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정교회를 전복시키려는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안젤로는 불가리아에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의혹들을 피하려 노력했고, 불가리아의 가톨릭 하층민들을 껴안고자 애썼다. 당시 불가리아 가톨릭은 프랑스인 사제들이 이끌었는데, 전례에서 기도도 불가리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했다고 한다. 안젤로는 '불가리아어로 기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불가리아 정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자 노력했다.

당시 불가리아 국왕 보리스 3세가 이탈리아 공주 조반나의 결혼 문제를 두고, 안젤로는 교황청의 대리인으로서 양측을 조율해야 했다. 보리스 3세는 정교회 신자로서 정교회식으로 결혼하고 아이들에게 정교회 세례를 주고자 했으나, 당연히 조반나 공주와 교황청은 반대했다. 처음에는 보리스 3세가 교황청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듯하였으나, 결혼식 당일에 기습적으로 정교회 결혼성사를 거행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왕비로부터 아기를 빼앗아 정교회 세례를 주었다. 이 일로 안젤로는 교황청에 소환되어 질책을 받았다.

1935년(53세)에는 주터키/그리스 교황 대사로 임명받아 불가리아를 떠났다. 당시 아타튀르크 정부와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과감하게 공식 문서에 튀르키예어를 도입, 터키 정부와 유화적인 관계를 맺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불필요한 어그로를 끌지 않고자 성직자의 복장인 수단 대신 평범한 양복을 입었는데, 한 번은 양복을 입은 자기 사진을 어머니에게 부치면서 "양복을 입은 주교 아들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스탄불에서 그는 국제 정세와 각종 국가들의 정보들을 입수해서 교황청에 보고하는 역할도 맡았다.

한편 터키에서 미사를 드리며 성경을 튀르키예어로 읽거나, 라틴어 전례문을 읽다가 터키어 기도문을 짧게 덧붙이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듯, 이때의 가톨릭 교회의 전례(미사를 포함한 일곱 성사, 시간 전례 등)는 성경이나 전례문이 모두 라틴어였으니 안젤로의 이러한 조치는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항의하거나 또는 로마에 알렸다. 안젤로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나오는 반발을 보고, 겉으로는 어떻든 속으로는 상당히 상처를 받은 듯하다.

한편 그리스에서는 안젤로가 활동할 때마다 정부가 감시요원을 붙였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교황청과 무솔리니가 동맹을 맺었다 여기고, 교황청 대사가 '무솔리니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했다고 한다. 터키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리스에서는 정말로 언행 하나하나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또한 가난한 가족들에게 어떻게든 돈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성직자로서 받는 월급을 쥐어 짜야 했다. 35년/39년에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망하여 슬퍼했다.

사적으로 공적으로 힘든 와중에도 동방정교회와 화해를 적극 모색한 덕에 1937년 안젤로가 교회일치위원회를 방문했을 때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불가리아든 터키든 그리스든 모두 가톨릭이 소수종교인 지역이라, 교황청 대사로서는 한직에 불과했다.

1944년(62세)에 주불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었는데, 처음 소식을 듣고 명령이 잘못 전달된 줄 알기도 했다. 한직만을 맴도는 자기가 갑자기 주불대사라는 요직[9]에 임명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안젤로가 임명된 것은 당시 교황 비오 12세가 처음 주불대사로 생각한 성직자가 건강상 이유로 임명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직만을 맴돌긴 했지만 가는 곳마다 온후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평을 듣는 안젤로 주교를 주불대사로 임명했던 것. 이 사실을 알고 안젤로는 "이 없으면 당나귀라도 일해야지."하고 자조했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에 좌파 사상의 영향을 받은 신자, 성직자들이 제법 있었으므로, 역시 적당히 그쪽 물이 든 안젤로가 파견되면 잘 다독거릴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외교관'이란 말을 들었으며, 외교관으로서뿐만이 아니라 또한 주교로서 프랑스의 본당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붙잡힌 나치 독일 포로들의 공정한 처우와 석방을 프랑스 정부에 촉구하는 한편, 나치에 협력한 혐의가 있는 주교들을 조사해 교회에서 퇴출시켰다.

1951년(69살)에는 바티칸 공식 옵저버로서 유네스코에 파견되어 총회에서 '유네스코는 인종과 언어와 종교를 가리지 않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내용으로 연설을 하였다. 다른 참석자들은 가톨릭의 대주교가 가톨릭 중심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고 놀랐다고 한다.

5. 베네치아 총대주교(추기경 론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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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로는 1953년(71살)에 베네치아의 총대주교 겸 사제급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베네치아와 리스본의 총대주교는 가톨릭 교회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총대주교의 착좌 후 빠른 시기에 추기경으로 서임됨은 물론, 추기경으로 서임되지 않더라도 추기경의 의장을 갖추는 특권을 누렸다.[10] 20세기에 들어서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지내다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이 3명이나 있었는데 바로 성 비오 10세, 성 요한 23세, 그리고 복자 요한 바오로 1세였다. 밀라노 대교구장이었던 바오로 6세 또한 교황이 되었다.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 안젤로의 문장은 상단부에는 베니치아의 상징인 사자가, 하단부는 론칼리 집안의 문장인 탑이 있는 것이었다.[11] 문장이 말하는 바는 결국 론칼리 집안 출신 베네치아 총대주교라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내용인데, 교황이 된 뒤에도 전임자 비오 10세의 전례를 따라 총대주교 시절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교황 문장으로 따왔다. 사목표어는 'Oboedientia et Pax(순명과 평화)'.

안젤로는 베네치아에서도 예의 자기 성품대로 따뜻하고 온화하게 다른 사람들을, 혹은 문제들을 껴안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또한 성직에 입문한 뒤로 신자들 속에서 일하는 사목자를 꿈꾸었기 때문에, 외교관 대신 일선 교구를 맡음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젤로는 교황이 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베네치아 총대주교가 된 시점에서 이미 70대 노구였으므로, 이를 마지막으로 고향 소토 일 몬테로 은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안젤로의 조카 중에서도 (주교 삼촌을 둔 영향인지) 신부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삼촌이 고향 마을로 은퇴하면 거창한 축제를 열려고 준비하기도 했다. 안젤로는 이 소식을 접하고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럴 필요 없으니 관두라." 하였다.

5.1.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의 마찰

추기경 시절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라면, 당대 바티칸의 실세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의 대립 정도. 파스칼리나 수녀는 안젤로 추기경에게 엄청난 결례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배우 클라크 게이블바티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파스칼리나 수녀와 비오 12세 모두 게이블의 팬이었다. 그런데 파스칼리나 수녀가 스케줄로 잡혀있었던 론칼리 추기경의 교황 면담을 취소하고, 게이블의 교황 알현을 스케줄에 넣어 론칼리 추기경을 바람 맞힌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저 두 사람이 연예인 팬이라 저지른 즉흥적인 사태라기보다는, 고위 성직자들에 대한 일종의 '기싸움'으로 벌인 일이기는 했다. 실제로 파스칼리나 수녀가 비오 12세의 묵인 하에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들의 교황 알현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서 교황과 파스칼리나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킨 것이 이 무렵이다. 한 예로 프랑스 출신인 외젠 티스랑(Eugène Tisserant) 추기경은 이 일로 파스칼리나와 말싸움을 벌이다 근위대에게 강제로 끌려나갔는데, 티스랑은 화가 난 나머지 파스칼리나를 죽여 버리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을 지경. 파스칼리나 수녀는 훗날 "안젤로 추기경이 교황으로 즉위할 것을 알았더라도, 배우 하나 때문에 바람맞히는 일을 했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대답은 YES였다고 한다. 심지어 "이 세상에 추기경은 많지만 클라크 게이블은 1명뿐 아닙니까?" 하는 말까지 남겼다.

그런데 안젤로는 교황이 된 뒤에, 자신을 계속 경계한 것은 물론 결례를 저지른 적이 있는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에게 보복하긴커녕 바티칸으로 불러 위로를 건넸다고 하니 그야말로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파스칼리나 수녀와 요한 23세의 성향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결국 죽을 때까지 둘이 화해는 하지 못했다. 요한 23세가 파스칼리나 수녀를 위로하려고 부른 자리에서도 잔잔한 다툼이 벌어졌다니 말 다했다. 요한 23세와 파스칼리나 수녀가 만났을 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보수 성향이 강했던 파스칼리나 수녀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후임자 바오로 6세도 파스칼리나 수녀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화해했다. 그 후에는 바오로 6세가 파스칼리나 수녀의 자선 사업에 직접 도움을 주었다.

6. 재위기간

요한 23세 교황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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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선종 후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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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cesnur.org/(3).jpg 파일:attachment/요한 23세/SaintJohnxxiii_tomb001.jpg
교황의 시신 성 예로니모 제대 안에 안치된 시신

부모와 형제 대부분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요한 23세도 가족력을 피할 수 없었고, 교황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위암 진단을 받았다.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고자 자신의 병을 숨겼고, 바티칸에서는 교황이 위통을 앓고 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요한 23세의 몸 안에 자리 잡은 암세포는 바티칸 공의회 1차 회기가 끝날 무렵에 크게 전이되었지만, 요한 23세는 놀라운 정신력으로 육체의 고통을 버텨냈다. 결국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서도 "교황이 위통이 아닌 위암을 앓고 있으며, 이미 말기"라고 보도했다.

1963년 6월 1일, 성 베드로 광장에는 '선하신 교황'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몇 차례 의식을 잃었다가 회복을 반복한 교황이 6월 2일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2번 반복한 말은 요한 복음서 21장 15~19절에 나오는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였다.[12] 이 말을 끝으로 교황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성령 강림 대축일 전날인 6월 3일 오후 7시 49분에 사망하였는데, 그 시간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봉헌된 교황의 건강을 기원하는 야외 미사가 끝난 무렵이었다.

유해는 6월 4일 사도 궁전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운구되어 이틀간 조문객을 받았고, 6월 7일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 매장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시복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관을 열었는데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망 후 유해에 특수 용액을 주입해 방부처리했기 때문이었다.# 2000년 9월 17일에 이미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요한 23세의 거룩함을 기리기 위해 사망 38주년인 2001년 6월 3일 무덤을 개장해 얼굴에는 피부 보호용 밀랍을 한 겹 씌우고 교황으로서의 의관을 갖춘 후 청동과 유리로 만든 새로운 관에 입관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신자들의 공경을 받고 옥외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그 후 교황의 유리관은 지하 무덤이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의 성 예로니모 제대 아랫쪽에 안치되었다.


[1] 이탈리아어로 '산 밑 마을'이란 뜻이다. 훗날 요한 23세를 기리고자 마을 이름에 '요한 23세'를 덧붙여, 소토 일 몬테 조반니 벤티테레치모(Sotto il Monte Giovanni XXIII)가 되었다.[2] 농사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15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장이 농삿일에 매달리는 것은 온 몸을 망가트릴 만큼 고된 일이 아니었을까? 요한 23세의 이 말은 평생 고생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묻어난다.[3] 이와 비슷한 당시 유럽의 상황을 해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볼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공부 잘 하는 초등학생이지만 독일의 정식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에 진학할 돈이 없어서 '신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주인공의 아버지는 평범한 소상공인이므로 기벤라트 집안이 특별히 가난한 것 같진 않다. 그런데도 한스는 신학교 말고 김나지움에 가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가 '기벤라트 집안이 갑부냐?' 하는 투로 핀잔을 들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정식 고등학교는 집안이 꽤 잘 살아야 가는 곳이었고,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 하면 신학교 같은 무료 교육기관으로 진학해야 했다. 소년들 대부분은 초등교육을 마치면 대부분 곧바로 도제가 되거나 농사를 지었다.[4] 신학생이나 성직자, 수도자들이 정수리 부분만 동그랗게 삭발함으로써 속인과 구분되는 인물임을 표시하는 의례. 오늘날 가톨릭 사제 양성 과정에서는 삭발례를 하지 않는다.[5] 훗날 요한 23세가 교황이 된 뒤에, 교황청 문서들 중 자기 관련 서류를 보았는데, 거기에 '근대주의자 혐의가 있다.'는 문구가 적힌 것을 보고 열이 뻗친 나머지 그 문서에 직접 "나, 요한 23세 교황은 근대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선언한다!"라고 적었다. 이후 분노가 가라앉자 "나는 성무성성으로부터 감시받던 사제도 교황이 될 수 있다는 예다."라고 추가로 적어넣었다.[6] 여기에 누이 2명을 불러 여사감으로 임명했다.[7]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8] 여기서 말하는 근대주의(modernism)는 20세기에 그리스도교 세계에 분 조류를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성으로 재분석하고 해체하여 다시 쌓아 올리자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비오 10세는 근대주의를 이단의 온상으로 강경하게 단죄하고 1910년에는 모든 성직자들이 反근대주의를 맹세하도록 했다. 비오 10세 교황의 이 조치는 1967년에 폐지되었다.[9] 주불 교황청 대사가 요직인 이유는, 당시 가톨릭 신자 비중이 매우 높은 프랑스에서 주불대사에게 각 교구주교 후보 추천권이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각국에 파견된 교황청 대사가 파견국 교구들의 주교 후보 3인을 교황청에 추천하면 교황이 그중 1명을 임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당연히 주불대사가, 가톨릭 인구가 거의 없는 터키 주재 대사보다 훨씬 요직이다.[10] 리스본의 총대주교는 교황보다 크기가 작은 세디아 제스타토리아와 공작 부채를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11] 유럽에서는 귀족 가문이 아니더라도 가문의 문장이 따로 있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귀족 가문이 아니기에 문장의 디자인이 매우 단순하다. 론칼리 집안의 문장 역시 탑이 하나 서 있을 뿐인 조촐한 것이었다.[12] 예수부활 후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재회했을 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3번째로 받은 사도 베드로의 대답. 굳이 같은 질문을 3번씩이나 한 것은, 십자가 수난 당시 베드로가 목숨을 부지하려고 3번 예수를 모른다고 한 것에 대해, 예수가 친히 용서해주기 위함이라고 해석된다. 이 대답을 듣고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하여 자신의 후계자이자, 사도들의 수장으로 재신임했다. 오늘날 교황들이 갖는 교회 수위권의 유래 중 하나가 되는 성경 속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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