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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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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울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제7호
울산왜성
[ruby(蔚, ruby=ウル)][ruby(山, ruby=サン)][ruby(倭城, ruby=わじょう)] | Ulsan Japanese Fortress
파일:AKR20190228140000057_01_i_P4.jpg
<colbgcolor=#01454F> 이칭 동로울산왜채(東路蔚山倭寨)
울산청정대채(蔚山淸正大寨)
청정별영(淸正別營)
울산적굴(蔚山賊窟)
울산적영(蔚山賊營)
도산토굴(島山土窟)
도산왜채(島山倭寨)
도산성(島山城)
울산성(蔚山城)
울산진(蔚山陳)
요산대(樂山臺)
신학성(神鶴城)
학성(鶴城)
증성(甑城)
형태 연곽식 산성
건설 1597년 (선조 30년, 추정)
가토 기요마사
폐성 1598년 (선조 31년) 11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59,678m²
지정연도 1997년 10월 30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소재지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100
1. 개요2. 역사3. 위치 및 구조
3.1. 외곽부3.2. 학성공원
4. 과거 모습 및 현황5. 교통6. 여담7. 외부 링크8.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한가운데에 솟은 학성산에 위치한 정유재란 당시의 왜성.

2. 역사

[ 조선왕조실록 보기 · 닫기 ]
>◎ 울산군(蔚山郡)

본디 굴아화촌(屈阿火村)인데,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현(縣)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이름을 하곡(河曲)으로 고치고 【혹은 하서(河西)라고도 한다. 】 (...) 별호는 공화(恭化), 또는 학성(鶴城)이다.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본군(本郡)의 정(呈)에 일컫기를, "본디 계변성(戒邊城)인데, 신라 말기에 학(鶴)이 와서 울기 때문에 신학성(神鶴城)이라 고쳤고,(...) 】 부곡(部曲)이 1이니, 갑화(甲火)이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조
당초 적은 동래에서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 한 길은 경상좌도로 장기(長鬐) · 기장을 거쳐 좌병영인 울산을 함락시키고 경주 · 영천 · 신령 · 의흥 · 군위 · 비안을 지나 용궁(龍宮)의 하풍진(河豊津)을 건너 문경으로 진출해서 중로의 군사와 합류, 조령을 넘어 충주로 침입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2년 5월 1일
평안도 우방어사(平安道右防御史) 김응서(金應瑞)가 치계하였다. "신이 독포사(督捕使) 박진(朴晉), 좌방어사 정희현(鄭希玄),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 등과 합병(合兵)하여 경상도 밀양 땅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근일 적세를 탐지해 보니 양산 · 울산 등지의 적이 부산 · 동래 · 서생포 · 제포 등지로 진(鎭)을 옮겨 널리 퍼져 둔취(屯聚)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7월 18일
이제 흉적이 잠깐 물러간 것은 소굴로 돌아가려는 계획이 아닙니다. 그들이 경성(京城)을 떠나면서부터 그 연도(沿道)에서 노략질을 자행하는 등 조금도 금즙(禁戢)함이 없었고 대군이 고개를 넘어 진격한 다음에야 서서히 물러가 경상 좌우도의 요해지인 울산 · 서생포 · 동래 · 부산 · 기장 · 언양 · 양산 · 김해 · 웅천 · 제포 · 가덕 · 천성(天城) · 거제 · 영등포 · 율포 · 옥포 · 지세포와 수군절도사의 진영이 있는 군읍(郡邑)과 진포(鎭浦) 등처에 둔취하고 있는데 거의 수십 구역이나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1월 19일
각 진영의 왜장 성명을 알리기 위해 모두 그 나라의 향담(鄕談)에 따라 글자를 맞추어 적겠습니다. (...) 울산에는 모리유긴로가미(毛里有緊老加未)[1]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봉왜정사(封倭正使) 이종성(李宗誠)이 도망쳐 돌아왔다. (...) 큰 길을 경유할 수 없다보니 길을 잘못 들어 울산의 왜둔(倭屯) 앞길로 나와 다시 산골짜기로 숨어들어서 낮에는 잠복하고 밤에만 길을 가노라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다가 경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館)과 역(驛)을 따라 북상해 올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1596년 4월 1일
유정(惟政)이 "울산에 가등청정의 배 5백여 척이 해구(海口)에 정박하고 있어 마치 성곽과 같은데 불로 치면 가능한 길도 있다."고 합니다만, 우리 나라의 형세로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1597년 4월 13일
10월 안으로 청정은 울산에 새로운 진지를 만들 것이며 올해와 내년 사이에 다시 출동할 뜻은 없는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0월 3일
청정의 방문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각 주부(州府)·군현(郡縣)의 부로(父老)·좌수(座首)·별감(別監) 등에게 통문한다. 일본의 모 진장(陣將)이 살길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근년에 조선을 살벌(殺伐)한 것은 너희의 죄가 아니다. 조선 국왕이 무도하여 한갓 백성들에게 원망을 살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와도 불화하고 무례하여 다시 이처럼 살벌을 하였는데도 전혀 강화하여 올 뜻이 없으니, 내년 봄에는 다시 큰 군사를 일으켜서 남은 백성을 다 죽이기로 계획을 이미 정하였다. 너희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각 고을의 좌수(座首)·별감(別監) 중 한 사람이 스스로 서생포진이나 울산진으로 오라. 그렇게 한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후록(後錄)을 자세히 보고 각기 개록(開錄)하여 바치면 된다. 봄이 되면 즉시 군사를 출발시킬 것이니 출발하기 전에 조속히 들어와야 군색스럽고 급박한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찾아오는 군현은 인민을 살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곳에 초목(草木)이라도 꺾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은 편히 먹고 자며 농사지으라고 할 뿐이겠지만, 찾아오지 않은 군현은 그곳에 먼저 가서 살벌을 한 뒤에 서울로 향할 것이니, 올 적에 이것을 가지고 올 것을 각각 잘 알라.

후록은 다음과 같다.

1. 각 고을의 아무개가 좌수의 직임을 맡았고, 아무개가 별감의 직임을 맡았고 아무개가 경내(境內)의 색장(色掌)·유사(有司)의 직임을 맡았는지, 각기 성명을 개록할 것

1. 각 고을의 리(里), 면(面)의 수가 얼마이며, 전결(田結)의 수가 얼마인지를 각기 자세히 개록할 것."
조선왕조실록』, 1597년 11월 15일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이 치계하기를, "흉적이 바다를 건너갈 생각을 하지 않고 울산과 양산 등지에 즐비하게 점거하여 소굴을 만들고 성을 쌓으며 더러는 산을 나와 배를 타고 곳곳에 하륙하여 노략질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 이제 접수한 언양 현감 김흔의 첩정(牒呈)에 "(...) 10월 30일 울산 태화(太和)에 주둔하고 있던, 수효를 알 수 없는 적이 동래 근처로 내려갈 적에 기장 입석(立石)의 길 곁에 매복하고 있다가 불의에 후미를 공격하여 많은 수를 사살하였으나 머리를 베려고 할 때 선두로 가던 적이 서로 싸우는 소리를 듣고 좌우의 산꼭대기에서 포위하고 협공하였기 때문에 두 급(級)만을 베어 왔다.(...)" 하였고, (...) 박춘석 등의 고목에 "태화(太和)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차단하여 무찌를 계획으로 마등오 촌에 다달아 3일 한밤에 밥을 지어 먹고 행군하려고 막 떠나는데 왜적이 불의에 습격하여 왔다. (...)"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1월 28일
양 경리(楊經理) · 마 제독(麻提督)울산의 적영(賊營)을 공격했으나 불리하여 돌아왔다. 이때에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울산에 성을 쌓아 오래 머물 계책을 삼았는데, 경리와 제독이 몰래 군사를 내어 엄습하자 적이 혼란하여 지탱하지 못하고 내성(內城)으로 도망하여 돌아갔다. 중국 군사가 적의 외책(外柵)을 빼앗고는 노획(虜獲)하는 이익을 탐내 즉시 진군하지 않자, 적이 드디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갑자기 큰 비가 내리고, 비가 온 후에는 매우 추워서 사졸이 모두 지치고 동상에 걸렸으며, 말이 많이 얼어 죽었는데, 양남(兩南)에 주둔하고 있던 적들이 수륙(水陸)으로 지원해 오니, 경리는 적의 엄습을 당할까 염려하여 서둘러 회군하고, 마귀와 도원수 권율로 하여금 남아서 경주를 지키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2월 1일
권율이 아뢰기를, "서생포의 적은 울산으로 진을 옮겼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2월 4일
제독(提督)의 접반사 장운익(張雲翼)과 도원수 권율, 경리(經理)의 접반사 이덕형(李德馨)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이달 23일 축시 초에 삼협(三協)의 중국군이 일시에 경주에서 세 길로 나누어 전진한 바 새벽에 좌협의 선봉이 바로 울산에 있는 왜적 소굴에 이르러 무찌르다가 패한 양 유인하면서 다시 큰 싸움을 벌여 수급 5백여를 베었고 왜장 1명을 생포하였습니다. 그자를 다방면으로 심문하니 청정서생포에 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밖의 적의 장막이 모두 불에 탔고 나머지 적은 성안의 토굴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 적굴로 들어간 적이 지금 선소(船所)로 짐을 운반하는 것을 보면 밤을 틈타 도망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일 다시 치계할 계획입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2월 28일
차관이 아뢰기를, "23일 사시에 천병이 청정의 별영(別營)을 무너뜨렸는데, 그날밤 청정이 서생포에서 울산으로 들어왔습니다. 천병이 바야흐로 도산(島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데 적군은 높은 둔덕에 있고 아군은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상자가 퍽 많았습니다. 그러나 23 ~ 24일의 싸움에서 마(麻)·주(周) 두 천총(千總)만이 탄환을 맞고 죽었을 뿐, 죽은 군병은 30명도 안됩니다. 수로(水路)를 따라 온 왜적들은 천병에게 쫓긴 나머지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천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였다. (...)

군문이 말하기를, "어제 제독(提督)의 차인(差人)에게 들었습니다. 가등청정서생포에서 밤에 울산으로 달려왔다가 울산이 이미 무너졌으므로 도산으로 들어갔다 하니 얼마 안가서 생포하게 되었습니다. 울산이 함락되던 날 왜장 한 사람이 금갑을 입은 채 죽었는데, 이 자도 청정과 같은 관원이라고 합니다. 청정이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으므로 그 운명이 다하여 스스로 도산으로 들어갔으니, 아군이 해안을 차단하면 부산 · 양산전라도의 적이 감히 구원하러 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
조선왕조실록』, 1597년 12월 30일
정원이 아뢰기를, "군문통사(軍門通事) 박의검(朴義儉)이 방금 경리(經理)의 야불수(夜不收)와 함께 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달 23일에 경리가 친히 좌협(左協)과 우협(右協)의 병사들을 독려하여 울산을 공격, 함락시키고 5백여 급을 베었으며, 24일에는 8백여 급을 베었는데 적이 모두 토굴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25일에는 고 중군(高中軍)과 조 총병(祖總兵)이 군대를 거느리고 서생포에서 응원하러 나오는 왜적을 차단하였다. 가등청정은 포위된 토굴 안에 있는데 형세가 몹시 곤궁하고 위축되어 있다. (...) 중국군이 현재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서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하였습니다. (...) 또 이 사람의 말을 들어보건대, 울산과 도산은 같은 장소인 듯합니다."

이 부총(李副總)[2]의 접반사 이덕열(李德悅)이 치계하였다. "본월 22일 밤에 대군이 일제히 출동하였는데, 이 부총이 선봉으로 나아갔습니다. (...) 성 안에 있는 왜적들의 집에서는 일시에 불길이 치솟았고 북풍이 크게 불어 불길이 덮치자 적의 무리들이 우왕좌왕하면서 토굴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모든 군사가 성을 함락시키고 진격하여 토굴을 공격했으나 토굴이 겹겹으로 되어 있고 석축이 견고하고 험하기가 비길 데 없어 격파하지 못했습니다. 시험삼아 대완구(大碗口)를 쏘아보았으나 산비탈이 가파르고 높아서 포석(砲石)이 장애를 받아 곧바로 쏠 수가 없어 종일토록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월 1일
군문 도감(軍門都監)이 아뢰었다. "제독(提督)의 차관에게 물어보니 "23일과 24일 양일간 교전한 뒤에 곧 도산성 아래로 진격하였다. 성은 모두 네 겹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은 주위가 산아래에까지 닿아 있고 흙으로 쌓은 것이 낮아서 우리 병사들이 공격하여 열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세 겹 성은 석축으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위에 방옥을 잇달아 설치하였는데 그 방옥이 성밖에까지 걸쳐 나와 있어서[3], 그들은 우리를 굽어보면서 총을 빗발처럼 쏘아댈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아래에서 성중의 형세를 전혀 살필 수가 없는데다가 또 쏟아지는 총탄 아래에 가까이 갈 수도 없어서 우리 군사는 부득이 탄환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둔치고 있었다. (...) 성이 험고하여 격파하기 어려워서 이런 상태로 진격하면 우리 병사들이 많이 손상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여러날 그들을 포위한 상태로 주둔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성중에는 양식이 적고 물이 고갈되어 오래지 않아 저절로 무너질 것이니, 우리 병사들의 군량이 부족하지 않다면 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이다. 성의 주위가 겨우 2 ~ 3리에 지나지 않고 그 속에 1만 명의 왜적이 있는데 부산의 왜적은 아직 와서 구원하려는 형적이 없고 서생포의 왜적은 매일 수로를 따라 출몰하지만 우리 병사들에게 차단당하여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하루에 두세 차례나 하고 있다. 청정이 포위 속에 있다는 사실은 투항한 왜적들과 조선 여인들이 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월 3일
류성룡이 치계하였다. "이달 25일 군관 구회신(具懷愼)이 울산에서 돌아왔습니다. 중국군과 아군이 왜적의 내성을 공격했는데 성이 매우 견고하여 대포로도 격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적들이 성위에 있는 구멍을 통해 조총을 많이 쏘아 중국군과 아군이 많은 손상을 입자 경리(經理)가 징을 울려 공격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1598년 1월 4일
경리(經理)의 접반사인 이조 판서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였다. "(...) 경리가 제독(提督)과 함께 묘시에 삼협(三協)을 재촉하여 진군시키고 함께 가서 독전(督戰), 성황당(城隍堂)의 토굴(土窟)을 공격했습니다. 성 안에 있는 집들과 강변에 있던 왜선(倭船) 2척이 불화살을 맞고 타느라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중국군이 소리 지르면서 성을 함락시키자, 여러 왜적들이 도산에 있는 토굴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중국군이 추격하여 많은 적을 참획하였고 경리와 제독은 그 맞은 편에 있는 봉우리에 올라가 독전하니 모든 군사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성의 동쪽으로 진격하여 갔습니다. 중국군 10명이 성 위로 올라갔으나 싸우다가 나오지 못했고 나머지 군사들도 성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올라갔습니다. (...) 항복한 왜적과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심문하였더니, 모두들 "청정이 23일 밤중에 서생포에서 말을 타고 왔는데, 휘하 장수 5 ~ 6인과 함께 토굴 속에 모여 있다." 하였습니다. 왜적의 수효는 2천 명 정도인 듯한데 석축이 깍아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쳐다보며 공격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1598년 1월 6일
이달 24일 아침에 총병(總兵)이 고 도독(高都督)과 함께 군사를 출동시켜 울산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주둔시켰습니다. 좌협(左協)의 군사가 이미 적과 만나 싸운다는 말을 듣고 총병에게 물으니, 총병이 "적에게 4개의 진영이 있는데 이미 동쪽의 진영을 격파하였으니 모든 진영의 적이 오늘 반드시 도망칠 것이다." 하였습니다. (...) 요즈음 사로잡은 왜인에게 물으니, 가등청정은 성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적에게 잡혔던 사람 6 ~ 7인이 도망쳐 나왔는데 그들에게 물으니 "성중에는 양식도 없고 우물도 없어 적의 졸개들이 밤에 성을 내려와 탄 쌀을 주워서 먹고 있으며 성밖에 있는 우물은 이미 다 묻어버렸다. 적도들이 그릇이 없어 작은 주발로 물을 떠서 마시거나 혹은 옷을 적셔 짜서 마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월 10일
지난해 울산 싸움에서는 12월 23일 기병(騎兵)이 먼저 도착하여 울산성의 외부 방책을 격파하였고, 다음날 제가 보병(步兵)을 거느리고 안에 있는 목책 세 겹을 격파하여 석굴(石窟) 아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성이 견고하여 공격해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므로 풀을 쌓아 태우려고 사람마다 한 단씩을 가지고 오르는데 총탄이 비처럼 쏟아져 가까이 가는 자마다 총을 맞고 넘어졌기 때문에 감히 성에 다가가는 자가 없었습니다. 대포(大砲)로 격파하려고 하였으나 성이 높아 쳐다보 아야 하는 형세라서 기예를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월 20일
도원수 지중추부사 권율이 장계를 올렸다. "울산 내성 토굴 속에 있는 왜적은 여전히 그곳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풀을 베던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아 와 그에게 물으니 "가등청정이 포위되어 있을 당시 청정이 제진(諸陣)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므로 각처의 왜인들이 모두 울산에 모였다. 중국군의 위세가 매우 성대한 것을 보고는 모두 범하기가 어렵다고 여겨 경솔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중국군이 스스로 먼저 포위를 풀었다. 그래서 여러 왜적들이 청정을 위로하기를 「포위가 풀려 살게 되었으니 기쁨을 금치 못하겠다. 」 하였고, 제진에서 온 왜인들은 각기 소굴로 돌아갔다. 올해는 계속 소굴에 머물면서 공격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월 23일
울산의 싸움에서 이긴 전공을 오로지 저에게만 돌리고 계시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해 12월 13일 외성을 공략하였고 또 14일에는 내성을 공략하였는데, 토굴(土窟)의 병사들이 함께 힘을 쓰지 않아서 한번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참획(斬獲)한 공은 있다 하더라도 전혀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2월 3일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기를, "울산 성황당의 무너진 굴을 다시 수축하기 위해 산역(山役)하는 왜적들이 혹은 2백 ~ 3백 명씩 혹은 4백 ~ 5백 명씩 무리를 지어 기병과 보병이 서로 뒤섞여 무상 출입하고 있었는데, 좌병사(左兵使) 성윤문(成允文)과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 등이 합세하여 돌격해서 도합 13급을 참획하였으므로 올려보냅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2월 13일
그러나 다행히도 장사(壯士)들이 용맹을 떨쳐 곧바로 적의 진루(陣壘)를 공격하여 40여 리를 박살(撲殺)시킴으로써 견성(堅城)과 대책(大柵) 여러 곳을 격파하였습니다. 그때 불에 타 죽고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은 그 숫자를 셀 수가 없고, 사로잡고 참수된 장교(將校)들도 1천 3백여 명이 넘었습니다. 평소 저축했던 것과 여러 해 동안 준비했던 것을 하루 아침에 완전히 쓸어버렸습니다. 청정은 간신히 빠져 나가 도산의 소굴로 달아났는데 아군이 다시 공격하면 총탄에 상할까 두려워 긴 성책을 구축하여 지키고 있는 지가 이미 열흘이 넘었습니다. (...) 다만 조선 사람들이 또 극력 성을 쌓을 수 없다고만 핑계될 뿐, 청정이 도산에 쌓은 성이 작년 섣달에 시작해서 쌓은 것이지만 견고하고 험악하여 지킬 만한 것으로는 조선 팔도 안에 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점이 염려됩니다.

병과에서 계요총독(薊遼總督) 형개(邢玠)가 당보(塘報) 한 전의 일에 대한 내용을 초출하여 본부에 보냈는데 이를 다시 해사(該司)에 보냈더니, 해사에서 안정(案呈)을 만들어 본부로 보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니, 대병이 울산을 공파하고 다시 도산을 포위했으며 연달아 네 곳의 성채를 깨뜨렸는데, 참획한 수급도 1천 여나 되며 왜추(倭酋) 가등청정 등의 무리가 이미 군색하고 급박하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2월 16일
계요총독 형개는, 적추(賊酋)를 거의 사로 잡을 뻔했는데 구원병이 갑자기 들이닥쳤으므로 삼가 편의상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휴식을 시키다가 다시 출동하여 해방(海邦)의 평정을 도모하려는 것에 대한 일로 제본을 올립니다. (...) 그 내용에 의하면, 울산 태화강(太和江), 반홍정(伴鴻亭)[4], 성황당, 도산 등처를 공격하여 취했다는 것과 청산(靑山)·직산(稷山)의 싸움에서의 각 장관(將官)의 용겁(勇㤼)과 공죄(功罪)에 대한 대략을 언급한 것으로 각각 본직(本職)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2월 19일
울산에서 접전할 때에는 청정서생포에서 성안으로 잠입하였는데 성 안에는 군량은 많이 있었으나 식수가 모자라 물을 많이 길어다 놓고는 혹 부족할까 염려하여 조총을 가진 자에게만 나누어 마시도록 허락해 주고 그 나머지 군줄에게는 모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적인(賊人)들이 밤에 성 밖으로 나가 물을 길어오다가 많은 사람이 살상당했다. 그리고 성 안의 왜적들은 스스로 이기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는데 외원병(外援兵)이 건너편에 많이 집결하자 살아날 길이 있다고 여겨 뭇 왜적이 기뻐 날뛰었다. 청정이 중국 장수를 만나려고 나올 생각이었으나 중국 장수가 거처하는 장막(帳幕)이 너무 멀어 사로잡힐 걱정이 있을까 두려워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중국군이 퇴각했던 것이다. 그때 성 안에 있던 왜적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으나 성 안 가득히 숨어 있었다. 요즘 청정서생포에 있으며 강화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실로 거짓말이 아니고 진정이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2월 23일
이어서 양소조(楊紹祖)의 발보(撥報)를 보여주었는데, 발보에 "본월 24일에 중국군 3백여 명이 울산 근처로 진격하자 왜적이 도망쳐 본채(本砦)로 돌아갔는데 중국군이 추격하여 30여 급(級)을 참하였다. 책(柵) 밖에서 살펴보니 왜적의 수가 많지 않았으며 동쪽으로 잇대어 성 하나를 쌓아 우물이 성 안으로 속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3월 1일
여여문(呂汝文)이 경리를 수행하고 의성(義城)에 이르러 송호한(宋好漢)과 더불어 먼저 들어가서 체탐(體探)하려는데, 호환이 수십 리 밖에 이르러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여문이 머리를 깎아 왜인의 모습을 하고 성윤문(成允文)의 진(陣)에 소장되어 있던 왜의(倭衣)를 가져다 바꾸어 입고 들어가서 성황당 · 도산 · 태화강 세 곳의 토굴에 있는 적병의 다소를 파악하고, 또 손수 형세를 그려가지고와서 경주(慶州)에 있는 경리의 영(營)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경리가 몹시 칭찬을 하면서 은(銀) 10냥을 상으로 주고 그 도형을 가지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면서 행병(行兵)을 강론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3월 27일
류성룡이 아뢰기를, "대구에서 중영장(中營將)으로 있을 때는 백성들이 그의 힘으로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고, 또 항왜들을 잘 다루어 울산 싸움 때 항왜들을 데리고 밤이면 도산성(島山城) 밖에 잠복해 있다가 물 길러 나온 왜병들을 4 ~ 5명 혹은 6 ~ 7명씩 밤마다 꾀어내었기 때문에 명장(明將)들도 그를 기이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습니다." 하니,
조선왕조실록』, 1598년 4월 29일
신이 수차례에 걸쳐 적의 정세를 조사해 보니, 동쪽으로 울산의 도산에서부터 서쪽으로 순천의 왜교(倭橋)에 이르기까지 병영과 둔전을 연달아 설치한 것이 수미(首尾) 9백여 리에 달하는데, 조그마한 목책은 제외하고 큰 병영만 꼽아도 모두 20여 군데나 되며, 날마다 성을 쌓고 해자를 파며, 둔전을 설치하여 곡식을 축적하고, 노쇠한 군사는 교체하여 정병으로 보강하고 있으니, 어찌 그 뜻이 없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1598년 7월 1일
마 제독의 접반사 이광정(李光庭)이 치계하기를, "금월 18일 도산의 왜적이 소굴을 모두 불태우고 남김없이 철수하였습니다. 제독이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면서 한편으로 추격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1월 25일
이보다 앞서 풍신수길이 죽고 원가강(源家康)이 용사(用事)하면서 여러 장수들의 처자를 볼모로 잡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오게 하니, 울산 · 사천 · 순천 세 방면의 적이 모두 바다를 건너 갔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2월 21일
이 사례하고, 이어서 묻기를, "대인이 몸소 부산 · 도산 및 연해의 적채(賊寨)까지 가셨었는데, 형세가 어떠했습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이번에 왜적이 물러간 것은 관백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듯합니다. 조만간 다시 쳐들어 올 것인데 그 해독은 반드시 더욱 심할 것입니다. 그러니 방수(防守)하는 데에 십분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적채의 배치와 형세의 험난하고 평이함은 배신이 직접 보았으니 제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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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를 재현한 그림 울산성 전투를 묘사한 17 ~ 18세기의 병풍화
울산 지역은 조선 초기부터 경상좌도병영성을 설치했고, 태화강구에 염포(鹽浦)를 개방해 삼포왜관 중 하나를 설치할 정도로 조선-일본 국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삼포왜란의 직격타를 맞기도 했고, 상주하는 일본인이 존재할 만큼 안보상으로서도 중요한 지역이어서, 경상도 고을 중 큰 편에 속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일본군이 가장 먼저 진격하여 함락시킨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동해안 지방의 최전선이자 가장 큰 요새였던 서생포왜성과 인접해 있어서, 일본군은 서생포에 거점을 두고 언양, 울산, 경주 등지를 타격했다. 당시부터도 울산 지역에는 기초적인 일본군의 거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기존에 있던 울산읍성이나 경상좌도병영성을 허물거나 그 안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측에서는 왜둔(倭屯)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서생포왜성과 같은 본격적인 석성이 아닌 토루와 목책으로 간단한 진을 쳤던 듯하다. 이곳에 주둔했던 왜장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리 요시나리이다.

정유재란 당시 충청도에서 조명연합군에게 밀리기 시작한 일본군은, 임진왜란 때 그랬듯 한반도 남해안의 왜성에 들어가 수성전을 벌일 채비를 했다. 다만, 이번에는 임진왜란 시절보다 최전선이 더 전진했으므로 기존의 성들을 재활용하되 그보다 전방에 성을 신축해 새로운 전진기지로 삼았다. 울산왜성을 비롯해 합포왜성, 사천왜성, 남해왜성, 순천왜성 등이 지어졌다.

울산왜성은 기장왜성서생포왜성 방면에 주둔하며 일본군의 우측 전선을 도맡던 가토 기요마사가 설계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최소한 1597년 9월 이전에 축성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오타 가즈요시(太田一吉)의 감독 아래, 모리 히데모토아사노 요시나가주고쿠 지방의 다이묘들과 가토 기요마사의 병사 일부가 동원되었다. 성벽의 자재 중 일부는 경상좌도병영성과 울산읍성을 허물어 조달했다. 공사가 마무리되고 12월 4일에는 아예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지를 서생포왜성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일본군이 왜성을 쌓고 농성하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조명연합군은 그 유명한 울산성 전투를 벌여 이곳을 함락시키려 했다. 1598년 1월, 완전히 포위당한 가토 기요마사와 휘하 일본군은 식량과 식수가 떨어져 종이를 끓여먹고 말의 혈액과 소변까지 마시면서 버틴 것으로 유명하다.[5]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기본적인 구조조차 생소했던 왜성을 상대로 고전하다, 결국 1차와 2차 울산성 전투에서 울산왜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먼저 성을 불태우고 철수하면서 전투가 끝나버렸다. 이어서 사천성 전투왜교성 전투까지 실패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소모적이기만 할 뿐인 왜란을 더 이상 이어나갈 의향이 없었던 왜장들이 전면 철수를 결정하면서, 조명연합군은 결과적으로 왜성 중 단 하나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왜성에 대한 조선 조정의 관심을 증폭시킨 계기가 되었고, 선조는 조선 각지의 성곽왜성의 구조를 도입할 것을 명령한다.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모든 목조 방어시설을 불태워 버려 요새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으나, 울산왜성은 왜란 이후에도 한동안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 이용되었으며 1624년부터 30년간 전선창(戰船廠)을 배치하기도 했다. 개항기에 지역 유지였던 김홍조가 울산군에 기증할 목적으로 1913년 땅을 사들여 각종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었고 1928년 울산공원(蔚山公園)이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개원했다. 현재는 학성공원(鶴城公園)이다. 물론 지금의 울산대공원과는 관계없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에 의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63년 1월 21일에 울산학성(蔚山鶴城)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9호로 지정되었으나 1997년 1월 1일에 일제 지정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에 따른 등급조정의 일환으로, 다른 왜성들과 함께 사적에서 해제되었다. 1997년 10월 30일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하고, 공식명칭도 울산왜성으로 고치면서 지금에 이른다.

3. 위치 및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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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에서 제작한 울산왜성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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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전체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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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주곽부 구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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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항공사진 (1954)
태화강과 동천이 합류하는 지점 방향의 퇴적사주 방면에 독립적으로 불쑥 솟아 있는 해발 약 50m의 학성공원 구릉지 위에 주곽부가 위치한다. 성이 위치한 산은 다른 산줄기와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사면 어디에서든 공격로를 찾기에 쉽지 않은 구조를 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울산성 전투 초반, 돌격전을 감행하였던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고 성을 점령할 수 없었던 반면, 그만큼 공격측이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성을 포위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기 쉬웠다.

가장 중심의 제1곽은 동서로 100m, 남북으로 60m 정도이고, 북측과 동측에 각각 돌출부를 조성해 마스가타 고구치(桝形虎口)[6]를 터 출입하게 했다. 동남측 돌출부 석축 하단에는 보강 석축(腰巻石垣)이 1단 남아있으며 그 바로 서측에 굴절부가 1곳 있는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가 남측으로 뻗어 내려간다.

일반적인 왜성과는 달리 천수 기단으로 상정할 만한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서, 원래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울산왜성을 완공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울산성 전투가 일어났기 때문에, 1차 전투를 치를 때 미처 천수를 설치하지 못했거나 1차 전투 이후 전투 대비를 위해 구태여 공간을 할애하여 설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제1곽 북측에 바로 붙은 해발 35m 지점 경사면에 동서로 100m, 남북으로 40m 규모의 부곽(副郭)이 있어 제2곽으로 취급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석축은 많지 않지만, 부곽의 배치 상태로 미루어 보아 서북측과 동남측에 출입구를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북측에는 산 아래까지 이은 노보리이시가키가 있어 제4곽과 연결하고 있다. 서측 끝의 경사면에는 를 설치했던 석축의 흔적이 있어 웅천왜성, 서생포왜성 등지와 같이 조선 성곽의 시설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제2곽의 서북측에는 불쑥 튀어나온 능선 해발 25m 지점에 방형의 제3곽이 올라가 있다. 동서로 40m, 남북으로 100m 정도의 크기로 동북측의 모서리가 남아있고 동측에 돌출부를 두어 마스가타 고구치를 내었다. 정황상 성 바깥과 통하는 2곳의 출입구 중 하나인 것으로 본다. 주곽부 석축은 산의 경사에 의지해 외부를 큰 돌로 쌓고 내부를 적심석(積心石)으로 가득 채우는 산탁(山托)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벽은 여타 왜성과 같은 각도를 유지하며, 다듬은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반듯하게 축조했다. 석축의 내부 적심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의 잡석을 이용했는데, 이때 석축에 가까운 적심석은 노보리이시가키의 길이대로 열을 맞추어 계단 형태로 쌓았기 때문에 외벽이 무너져도 내부 적심석은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 이는 조선전기의 평지성에서 흔히 나타나는 방식으로, 왜성의 건조에 조선의 축성 기술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제1곽과 제2곽의 동측에는 산 아랫부분을 따라서 길게 제4곽을 조성했다. 이곳의 석축은 현재 도로에 딱 붙어 있어 아슬아슬하게 멸실을 피했는데, 일부는 복원되어 새하얀 돌을 끼워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제2곽에서 내려오는 노보리이시가키의 끝 지점에 돌출부가 1곳 있고, 그 남측에 마스가타 고구치를 두었으니 이곳을 울산왜성의 주출입구(大手口)로 비정할 수 있다. 다만 그 규모는 다른 왜성들에 비해 작은 편이라 출입구가 매우 좁다. 남측에 아주 조그마한 돌출부가 1곳 있다.

제4곽의 남측에 현재는 시가지화되어 없어졌지만, П자 모양의 석축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있었다. 구조상 이곳이 울산왜성의 선착장(舟入り)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지금은 상상하기가 힘들지만 태화강의 물이 울산왜성 코앞까지 들어왔다는 뜻이다. 1950년대에 촬영된 항공사진에서 해당 석축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는데, 상부에 경작지가 들어서 있고 물이 들어왔었을 곳은 모두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농경지가 되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소는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103번지와 97번지, 78번지 일대로, 도로의 모양으로 윤곽이 어렴풋이 남아있으며 이를 나타내는 선입지 석표의 유구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제4곽의 동측으로 ㄱ자로 길게 뻗은 토축 성곽이 1개소 있었다. 약 500m의 길이로, 1950년대의 항공사진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이 토성은 현지 주민들이 나팔성(喇叭城)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울산성 전투에서 성 안에 식수를 미처 확보하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른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성채의 동쪽으로 길게 성을 새로 쌓아 성 내부에 우물을 확보했다는 보고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사에서 등장하는 성이 바로 이 시설인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부가 8m 정도의 넓이에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며, 주변의 논과 인가의 흙을 퍼 급히 쌓아올렸고, 토성 위에는 150cm 간격으로 목책을 세운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시가지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다만 울산침례교회와 유성빌라가 있는 곳의 빌딩들이 조금씩 도시축과 어긋나 있는 것에서 과거에 지형이 솟아 있었다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지적도를 보면 아직도 ㄱ자 모양의 지번의 경계가 이어지고 있다.

3.1. 외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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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동 보루가 위치했던 마을의 항공사진[7] (1954)
지금은 학성공원 중심부에 있는 석축성을 울산왜성이라고 부르나, 정유재란 당시에 이곳은 도산성(島山城)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불렀다. 2019년에 발굴된 『조선일본도설』의 「사로왜채총도」에는 현재의 울산왜성이 도산왜채(島山倭寨)로 표기되어 있고, 그 동쪽에 연이어서 울산청정대채(蔚山淸正大寨)라는 큰 요새가 추가로 그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울산성 전투를 묘사할 때 '울산'으로 묘사되는 외성(外城)을 무너뜨리자 가토 기요마사가 '도산'으로 묘사되는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았던 정황이 있다.[8] 즉, 울산왜성은 우리가 오늘날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광활하고 큰 규모였다는 것이다. 다만 석축으로 보강한 중심의 주곽부만 남고, 목책과 토루(土壘)가 주를 이룬[9] 외곽부는 모조리 소실되었을 뿐이다.

도산성의 주변에는 토루와 해자를 판 긴 최전선을 둘렀으며, 동측, 북측, 서측에 전진기지(出郭)을 설치했다. 가장 컸을 것으로 보이는 동측 전진기지는 동천과 약사천(藥泗川)이 만나는 해발 20m의 작은 구릉 위[10]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곳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쓰일 때부터 반구정(伴鷗亭)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반구동 보루'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북측 전진기지는 현재 충의사가 위치한, 학성공원과 마주보는 학성산(鶴城山)의 자락에 위치했을 것으로 예상하며 지역 이름을 따 '성황당 보루'로 부른다.[11] 서측 전진기지는 조금 멀찍이 떨어뜨려 태화루(太和樓)가 있었던 지역 근방에 위치했을 것으로 본다. 현재는 세 곳 모두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울산읍성과 경상좌도병영성을 전진기지로 삼아 유기적으로 연계했을 가능성도 있다.

3.2. 학성공원

울산왜성 터에 조성된 울산광역시의 공원이다. 1913년, 울산의 유지인 추전 김홍조가 주변 7천여 평의 땅을 구입해 가꾸었다. 흑송, 벚꽃, 매화 등을 심은 공원은, 1928년 울산면에 기증되어 현재까지 울산의 대표적인 도시공원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공원 부지 내에는 봄편지 노래비, 박상진 의사 추모비, 충혼비, 놀이터와 운동기구 및 각종 편의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소나무를 중심으로 녹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산허리에 조성된 산책로는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보물 제441호인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가 전시되어 있기도 했지만 2011년 울산박물관 개관하고 박물관 내부로 옮겼다.

학성공원은 울산을 대표하는 시민들의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해왔으나, 울산왜성의 보존에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도와 화단을 조성하고 편의시설과 상점을 유치하면서, 북서쪽 석축과 제2곽 및 제3곽은 대부분 훼손되었다.

4. 과거 모습 및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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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학성 전경[12]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유리건판 사진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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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학성 전경[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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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본 울산 학성 전경[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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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학성 전경[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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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에서 본 울산 학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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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중구 학성 전경[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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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학성[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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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학성 본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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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학성 본환 대수문 우측 정면[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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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학성 본환에서 본 이환[20]
울산 중구 학성 본환에서 본 신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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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학성 익수 통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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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중구 학성 본환에서 본 울산읍[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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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중구 학성 본환 대수문 벽 위에서 본 풍경[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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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중구 학성 본환 대수문 벽 위에서 본 풍경[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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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중구 학성 본환 대수문 벽 위에서 본 풍경[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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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중구 학성 본환 대수문 벽 위에서 본 풍경[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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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곽 남측 돌출부의 모서리 잔존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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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곽 동측 출입구의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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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곽 서남측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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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곽 서북측 돌출부의 복원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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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곽부의 무너진 석축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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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곽의 석축 기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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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곽 서측의 복원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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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곽 동남측의 보강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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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곽 동측 출입구 남측의 돌출부

5. 교통


학남 정류장이나 학성공원앞 정류장에서 하차해 학성공원으로 올라가면 된다. 도심 속에 잘 닦인 공원인지라 접근성이 매우 좋고 관리도 잘 되어 있어 석축을 잘 구별할 수 있다.

6. 여담

  • 1998년 1월 경, 학성동에 살던 형제와 부산에서 놀러온 고종사촌 형제 4명이 학성공원 남쪽을 날아가던 UFO를 목격한 바 있다.
  • 혼마루 부근에서 태화강 방면이 보이는 절벽에는 오래된 안내비가 있는데, 국가 사적 시절에 만든 것임에도 오탈자가 심하다.
蔚 山 鶴 城(一名島山城)史蹟 第 9號ULSAN HAK SUNG (Crane Castle)
…or DO SAN CASTLE (Historic Spot No.9)
이 성은 선조30년(1597)정유재란 때 왜장 가또기요마사가 별성
으로 쌓은 성곽이다  동년12월 23일부터 다음해1월4일까지
아군과 명나라 원군의 총공격을 받아 성밖에서 싸우던
왜군이 패하여 성내에 들어갔으나 식량이 없어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먹으면서 성을 지키다가 원군이 와서
간신히 함락함을 면하였다. 왜군은 다시 성을 삼루로
개축하고 수비를 엄하게 하고 있었으나 1598년 8월에 다시
아군 및 명원군의 공격을 받아 백여일을 겨루다가 왜군은
밤을 타서 성을 불태우고 동남쪽 성문 밑에 있는 선입지에서
배를 타고 후퇴하여 갔다
THIS CASTLE WAS BUILT in the 30th Year of King Sun-Jyo (Yi
Dynasty-1597 A.D.) by Japanese General KATO KIYOMASA,
as a separate castle during the Jeong-Yew War.
From Dec. 23rd 1597 to Jan. 4th 1598, Korean
and Chinese troops attacked the outside
of the castle. The Japanese resisted until
auxiliares arrived. They reconstructed
the walls and existed on horse meat and their
own urine because of the scarcity of food.
The Korean and chinese joint forces attacked
again but after 100 days of fighting, the Japanese
fled at night to south-east after burning
the castle and escaped by boat.

7. 외부 링크

8.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울산광역시 학성동에 있는 이 성은 신라의 계변성이라 불리던 성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장 가또기요마사가 새로 쌓은 왜성으로, 우리측에서는 섬처럼 생긴 형상이라 하여 도산성이라 불렀다.

선조 30년(1597) 12월 23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왜군은 우리군과 명나라 연합군에 밀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식량이 없어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먹으면서도 성을 지킨 왜군은 구원병이 오자 성벽을 3중으로 쌓아 수비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듬해(1598) 2차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밤에 성을 불태우고 후퇴하였다.

이 성은 산정상을 중심으로 본성을 두고, 북쪽과 서북쪽에 2∼3겹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벽의 길이는 1.300m이고 높이는 10∼15m이다. 여기에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지은 망루 12개를 만들었으며, 남쪽을 제외한 3면에 흙으로 제방을 쌓고 다시 그 위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남쪽은 바다를 접하고 있어 배가 성 아래까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었다.

9. 관련 문서



[1] 모리 요시나리의 성씨와, 작위였던 이키노카미(壱岐守)의 음차를 합친 것이다.[2] 이여매(李如梅).[3] 이시오토시(石落とし)를 말하는 듯하다.[4] 반구정(伴鷗亭)의 오기로 보인다.[5] 이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가토는 일본에 돌아가서 자기 성인 구마모토 성을 개조해, 다다미를 비상식량으로 사용 가능한 토란 줄기로 짜고 성벽은 조롱박으로 도배를 하고 우물을 120개나 팠다.[6] 성 출입구의 외부나 내부에 공간을 두고 이중 출입구를 만드는 일본 성의 성문 조성 방식 중 하나이다. 한국으로 치면 옹성(甕城)과 비슷한 개념인데, 조성하는 이중문의 공간이 보통 방형(方形)이어서 바가지와 닮았다고 하여 마스가타라는 이름을 얻었다.[7] 마을 동북측 모서리, 약사천과 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구릉지에 토루로 판별할 수 있는 굴곡이 살짝 보인다.[8] 물론 조선 조정에서는 울산이 곧 도산인 듯하다고 추정했고, 넓은 의미에서 도산성은 울산왜성의 주곽부이므로 틀린 말은 아니라 할 수 있다.[9]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도산성을 지칭하는 석굴(石窟)과 대비되는 토굴(土窟)이라는 표현이 일관되게 등장한다.[10] 現 반구동 한라그랜드아파트[11]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성(鶴城)을 개축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영향인지 울산왜성을 지금까지도 학성, 내지는 신학성으로 부르고 있다.[12] 서북측에서 바라본 모습이다.[13] 북측면을 올려다본 모습이다.[14] 동북측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정면에 불쑥 돌출된 제3곽의 모습이 보인다.[15] 동남측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정면에 현재는 사라진 선착장의 석축이 보인다.[16] 울산왜성의 남측 근경을 올려다본 모습이다. 우측에 제1곽 동남측의 노보리이시가키가 선명하게 보인다.[17] 제1곽의 동남측 모서리를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18] 제1곽의 서측 내부에서 동측을 바라본 모습이다. 좌측에 북측의 출입구 석축이 살짝 보인다.[19] 제1고가 북측 출입구 서측의 돌출부 모서리를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20] 실제로는 제3곽을 내려다본 모습이다. 건너편에 솟아 있는 산은 학성산으로, 성황당 전진기지가 위치했던 곳이다.[21] 제3곽 동측 출입구를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22] 제1곽에서 서측을 바라본 모습이다. 집들이 모여있는 곳이 울산읍성이 있던 곳이고, 그 너머가 태화강 전진기지가 있던 지역이다.[23] 제1곽에서 동측을 바라본 모습이다. 살짝 솟아오른 곳이 반구정이 위치했던 구릉지로, 반구동 전진기지가 있던 지역이다.[24] 제1곽에서 동북측을 바라본 모습이다. 멀리 있는 평탄한 구릉지가 경상좌도병영성이다.[25] 제1곽에서 서북측을 바라본 모습이다. 우측에 제3곽과 석축이 조금 보이고, 정면에 학성산과 성황당 전진기지가 보인다.[26] 제1곽에서 동남측을 바라본 모습. 태화강과 동천의 합류지점이 보이는데, 정유재란 당시에는 사진에서 경작지로 변해 있는 지대까지 모두 강물이 들어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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