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2:21:15

유다이즘

1. 개요2. 역사
2.1. 바빌로니아 유배 시대
2.1.1. 본토의 상황2.1.2. 유배지의 상황
2.2. 페르시아 시대
2.2.1. 키루스의 관용 정책2.2.2. 에즈라느헤미야
2.2.2.1. 느헤미야의 종교 개혁2.2.2.2. 에즈라의 성전 재건 운동
2.3. 헬레니즘 시대
2.3.1. 팔레스티나 유다 공동체2.3.2. 헬레니즘에 직면한 유다이즘
2.4. 로마 시대
2.4.1. 하스몬 왕조 말기2.4.2. 헤로데 치하
3. 헬레니즘적 유다이즘
3.1. 디아스포라3.2. 대표적 지역들
3.2.1. 메소포타미아의 디아스포라3.2.2. 이집트의 엘레판틴 디아스포라3.2.3.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
4. 사회 계층
4.1. 성직자
4.1.1. 대사제
4.1.1.1. 변천 과정4.1.1.2. 제의적 성격4.1.1.3. 특권4.1.1.4. 의무
4.1.2. 사제
4.1.2.1. 명칭4.1.2.2. 서열4.1.2.3. 고위 사제직4.1.2.4. 일반 사제
4.1.3. 레위인들
4.1.3.1. 명칭4.1.3.2. 직무
4.2. 원로4.3. 율법 학자4.4. 백성들
5. 조직과 제도
5.1. 성전
5.1.1. 예루살렘 성전 이외의 성전들
5.1.1.1. 족장 시대5.1.1.2. 팔레스티나 정복부터 솔로몬 성전까지
5.1.2. 예루살렘 성전5.1.3. 성막
5.2. 제의
5.2.1. 이스라엘 제사의 특징5.2.2. 제사 방법
5.2.2.1. 화제(火祭)5.2.2.2. 전제(奠祭)5.2.2.3. 고제(告祭)5.2.2.4. 거제(擧祭)
5.2.3. 제사의 종류
5.2.3.1. 번제5.2.3.2. 속죄제5.2.3.3. 속건제5.2.3.4. 친교제5.2.3.5. 곡물 제사인 소제
5.2.4. 제의에 대한 예언자들의 태도
5.3. 의회
5.3.1. 명칭5.3.2. 구성5.3.3. 기능5.3.4. 의회의 진행
5.4. 회당
5.4.1. 명칭5.4.2. 기원5.4.3. 구조와 비품
5.4.3.1. 위치5.4.3.2. 방향5.4.3.3. 건축5.4.3.4. 비품
5.4.4. 회당의 관리 및 남녀 분리
5.4.4.1. 회당장5.4.4.2. 핫잔(Hazzan)5.4.4.3. 사자5.4.4.4. 남녀 분리
5.4.5. 회당의 예배
6. 축제
6.1. 이스라엘 월력
6.1.1. 하루6.1.2. 월6.1.3. 주간6.1.4. 년(年)
6.2. 축제

1. 개요

유다이즘 / Judaism

유다이즘이란 용어는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서 그와의 관계 속에 들어간 유다인 공동체를 구성하는 계명, 의식, 전통 신앙 등의 전 생활 영역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바빌론 유수 이후 유다와 벤야민 부족이 머물러 있던 유다의 작은 지방이 유다이즘의 지형적 참조가 되게 되는데, 이 지방이 유다이즘이라는 이름을 제공하게 됐다. 유다이즘이란는 표현은 마카베오기 하권 2장 21절, 8장 1절, 14장 38절과 갈라티아서 1장 13절 이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다인이라는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는 많이 쓰이고 있으나 구약 성경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 새로운 요인이 들어 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인들이라는 용어는 동일한 민족의 역사에 나타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역사의 단계를 표시하여 준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유다교의 연속성이 실제로 단절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오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빌론 유수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멸망까지 유다인들은 전승된 기본 신앙의 여러 발전 형태를 체험하게 되므로 이때를 엄밀한 의미에서 초기 유다이즘이 뿌리를 내린 시대로 본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는 후기 유다이즘이라고도 하는 랍비 유다이즘이 형성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2. 역사

2.1. 바빌로니아 유배 시대[1]

2.1.1. 본토의 상황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폐허가 된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곤 하였으므로 성소로서의 역할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본토에 남은 사람들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로서 그들이 간직하고 있었던 종교적 충성심이 알게 모르게 침체되어 순수한 야훼 신앙이 변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당시의 예언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다.

스켐, 실로, 사마리아 지역의 종교도 호세아가 말하는 바[2]와 같이 기원전 721년 이전부터 이교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아시리아 왕들이 강제로 끌어다가 그곳에 정착시킨 이방 민족들이 가져온 이교적 관습이 혼합됨에 따라 순수성을 상실해 갔다.

따라서 팔레스티나에 남아있는 이스라엘인들은 수적으로는 많은 편이었으나, 이스라엘의 장래를 그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진정한 핵심적 계층은 고향을 떠나 이국 땅에 옮겨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2.1.2. 유배지의 상황

바빌로니아에서 살고 있던 유다인들은 유다 왕국의 정치적, 종교적, 지성적 지도층에 있던 핵심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니푸르 지역에서 집단 생활을 하면서 제한적인 자유를 누렸다. 대부분 소작으로 농사를 지었으나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고, 서로 회합할 수도 있었고, 유다 땅에 남아있던 자들과 서신 교환을 할 수도 있었다.

이 공동체는 성소나 제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포로 생활 이후에 새롭게 생긴 종교적 형태라고 추측할 수 있는 고정된 기도문, 공적인 금식과 신앙 고백, 그리고 토라를 연구하기 위한 집회들이 진전을 이루었다. 특히나 안식일 준수는 포로 생활 중에 있던 그들에게 율법 전체를 지키는 것과 같은 중요성을 지녔다. 이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소수였으나 훗날 유다인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재건하고,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계하게 된다.

2.2. 페르시아 시대[3]

2.2.1. 키루스의 관용 정책

기원전 539년, 근동 아시아의 패권은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 제국으로 넘어 간다. 당시 황제였던 키루스 2세는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와 달리 관용 정책을 펼쳤고, 이는 바빌로니아에 유배 갔던 유다인들에게도 큰 변화를 미쳤다. 제2이사야가 환영하였던 이러한 키루스의 정책은 전해지는 칙령이 히브리어아람어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정책은 디아스포라와 고국의 유다인들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첫째,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에서의 해방은 유다인의 민족성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따라서 키루스의 관용 정책은 유배 시대 이후의 귀환과 성전 재건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해 주었다.
  • 둘째, 키루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정복한 지역에서 사용하던 중요한 언어를 인정하고 정복한 지역의 민족 언어로 칙령을 쓰도록 허용하였다. 특히 아람어는 이미 유다 왕조 시대 말기에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서 무역과 정치의 표준어였는데, 이를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공용어로 승격시켰다. 그리하여 아람어는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고,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도 점차 대중 언어화되었으며, 예수 시대에도 서민들은 그 언어를 사용하였다.
  • 셋째, 키루스는 예속된 민족들의 종교와 성소를 파괴하지도 않았으며 제국의 종교에 종속시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속된 민족들의 종교와 성소를 회복, 재건, 장려하였다.

2.2.2. 에즈라느헤미야

에즈라느헤미야의 연대 설정은 무척이나 난해하다. 어떤 학자들은 에즈라를 느헤미야 앞에 두어 기원전 458년에 에즈라가 활동하고, 그후 느헤미야가 기원전 445년에 활동한 것으로 보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들은 느헤미야가 앞에 활동하여 에즈라의 활동 연대를 기원전 428년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섣불리 결정하기는 힘든 문제이다.
2.2.2.1. 느헤미야의 종교 개혁
느헤미야는 두 번의 총독 임기 중에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여 유다인들을 긴밀하게 결속된 공동체로 만들었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벽을 다시 건축하여 사마리아로부터의 위협과 공격을 물리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강경한 배타주의로 일관함으로써 이민족과 혼합된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과의 날카로운 대립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유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혈통, 율법의 준수, 성전의 보호에 충실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이것은 유다이즘의 옹졸한 신학적 관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영향을 받은 유다이즘 속에는 제2이사야에서와 같은 보편주의적인 성향이 자리를 잃게 되고, 결국 민족주의적인 성향만이 남는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율법에 대한 복종과 가문의 계승을 통하여 거룩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과 그러한 상황 하에 있던 공동체가 그들의 영적 유산을 지키기에 노력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수 있다.
2.2.2.2. 에즈라의 성전 재건 운동
에즈라는 느헤미야와는 달리 정치적인 권위를 가지고 페르시아 황제의 파견을 받아 팔레스티나로 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종교 문제를 조사하고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에즈라는 바빌론에서 올 때 모세율법 사본을 가지고 왔고, 초막절에 에즈라는 이 율법을 읽어 주었으며 계약 갱신 의식을 실행하였다.[4]

또한 에즈라는 느헤미야가 강조했던 순수 혈통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국제 결혼을 금지하였다. 그래서 잡혼을 맺는 경우에는 그 혼인을 강제로 무효화시키는 일도 있었다. 이렇듯 에즈라 역시 귀향하는 유다인들의 팔레스티나 정착에 있어서 그들의 정통성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2.3. 헬레니즘 시대[5]

2.3.1. 팔레스티나 유다 공동체

2.3.1.1.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집트의 지배
페르시아 시대에는 유다이즘의 굳건한 토대가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중동에서는 갑자기 거대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이스라엘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파르메니온 장군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지배 하에서 누리던 권리를 계속하여 가질 수 있었다.

유다인 공동체 안에서의 외적인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으나, 온 나라 안에 그리스인들이 들어오게 됨에 따라 그들 내부의 생활은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 땅에 거주하게 된 그리스인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희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한 문화적 정책은 결국 유다인들이 희랍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창출케 했으며, 그러한 언어 정책은 훗날 신약 성경이 희랍어로 쓰여지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작스럽게 죽자 신속하게 합병된 엄청난 제국은 정치적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래서 팔레스티나는 헬레니스트 국가가 된 이집트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고, 헬레니즘적인 영향은 팔레스티나 안에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페르시아 및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마찬가지로 프톨레마이오스 역시 예루살렘 공동체의 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았다.
2.3.1.2. 마카베오 독립 전쟁
셀레우코스 제국안티오코스 3세는 팔레스티나를 이집트로부터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유다인들은 디아도코이의 세력 판도가 시리아인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전쟁을 치루는 동안 시리아에 동조했으며, 그로 인해 시리아가 승리를 거둔 후 호의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적인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았다. 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를 장려함으로써 그러한 정책에 대해 여러 다른 민족들을 밀접하게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당연히 유다인 사회는 그러한 정책에 대해 반대를 하고 나섰다.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가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성전의 다양한 기물들을 안티오키아로 가져갔으며, 유다인들에 대한 헬레니즘화는 계속해서 강요되었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 유다교는 종말을 맞는 것처럼 보였으나, 유다인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을 쉽게 저버릴 생각이 없었다.

결국 시리아의 정책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율법에 충실한 모든 유다인들이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뭉쳤으며 하시딤[6]도 그들과 연합하였다. 마카베오 전쟁은 거의 두 세대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129년, 안티오코스 7세가 죽자 마카베오 집안 시몬 타시의 아들이며 계승자인 요한 히르카노스 1세가 독립된 유다 왕국을 평온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2.3.1.3. 하스몬 왕조
요한 히르카노스 1세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하여 싸우는 국민 군대가 아니라 그가 모집하고 그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는 용병 군단을 이끌고 전투를 수행하여 그의 지배권을 확대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러한 히르카노스의 정책은 군사적인 계획에서는 성공했으나, 백성들로부터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부되었다. 경건한 사람들은 그의 군사적 노력을 지배자들의 세속적인 행위로 보며 비난하였다.

2.3.2. 헬레니즘에 직면한 유다이즘

헬레니즘 시대에 유다인들의 신앙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한쪽은 여러 형태의 우상 숭배로 가득 차고 자연의 세력을 찬미하였고, 다른 한쪽은 자신들이 믿는 유일신에게 바치던 예배와 율법만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 신앙의 열심 앞에 이방 권력자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유다인들은 그들의 전통을 고수할 수 있었다.

헬레니즘은 그 본산지인 그리스가 패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으로나마 유다이즘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유다이즘에서는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희랍어 문학을 탄생시켰고, 그 가운데 문학 작품 여러 매가 성경에 삽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사상이 유다인 전승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손상시키지는 못하였다.

2.4. 로마 시대[7]

2.4.1. 하스몬 왕조 말기

기원전 67년에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자 두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2세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각기 저마다 적대 세력인 바리사이파사두가이파의 지지를 받으며 왕위와 대제관직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다. 기원전 65년 폼페이우스가 시리아를 장악하고 63년에 다이스코스에 당도했을 때, 이 두 파벌은 서로 폼페이우스의 호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폼페이우스가 왕국을 폐하고 옛날 제사장들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줄 것을 원하였다. 이렇듯 하스몬 왕조는 외적인 힘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유다 백성들에게서도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렇게 해서 폼페이우스는 유다의 내정에 간섭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티나에 대한 결단을 미루자 히르카노스 2세보다 좀 더 유리한 형세에 있었던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군사적인 수단으로 자기 지배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하려 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그를 의심하게 되고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포진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진격, 입성하여 성전에 들어가 지성소에 침임합으로써 그들의 성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소에서 아무것도 탈취하지 않았으며, 곧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명하여 유다인들이 전통적으로 누려오던 종교적 특권만은 인정하였다.

2.4.2. 헤로데 치하

로마 제국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요한 히르카노스 2세와 이두매아인인 안티파테르는 승리자인 카이사르 편에 가담하여 그를 위하여 이집트에 원군을 보내는 등 호의를 보냈다. 이로써 히르카노스 2세는 대사제직을 확고히 할 수 있었고, 안티파테르는 세습적인 로마 시민권을 받는 동시에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로데는 대제관 히르카누스 2세의 모든 정치적 권력을 빼앗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침공으로 하스몬가의 마지막 혈손인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가 이 로마의 적대자들에 의해 유다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그러자 헤로데는 로마로 도망갔다가 기원전 39년 자기를 왕으로 삼는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의 칙임을 갖고 돌아왔다.

그는 군대의 세력으로 일단 추대되자 수년 내에 고대 왕가의 후손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유다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현명한 행정가이긴 했지만, 동시에 폭군이었기 때문에 특히 바리사이파로부터 원한을 샀다. 예수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은 그의 재임 말기였다.

기원전 4년, 그가 죽자 계승권을 두고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때 로마가 개입하여 그의 아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와 필립과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나라를 분할하여 줌으로써 해결되었으나, 기원후 6년 아르켈라우스가 프랑스로 귀양을 가게 됨으로써 이제 유다 땅은 총독에 의해 지배되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이 로마의 총독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은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로마 황제의 흉상을 예루살렘에 들여 오려고 하였으나 유다인들은 이 조치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유다의 행정장관들은 기사 계층으로서 흔히 동방 그리스인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원로원 계층이었으며, 시리아의 총독들보다 더욱 반(反) 셈족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마지막 행정 장관들은 유다인들의 종교적 민감성에 무관심하였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그들 종교의 핵심적 부분이었던 여러 애국적 집단은 유다인들을 극한 투쟁으로 몰고 가 기원후 66-70년에는 로마와의 혈전을 벌이도록 만들었다. 이 전쟁은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그 절정에 달하였다.

3. 헬레니즘적 유다이즘

3.1.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는 분산(διασπορά)이라는 뜻의 희랍어에서 파생된 말로써 전쟁과 외국의 지배로 말미암아 팔레스티나 밖의 그리스나 로마, 이집트 등지에서 흩어져 살았던 유다인들의 공동체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다인들이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다음과 같다.
  • 첫째, 기원전 8세기 경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에세르가 쳐들어와 북 왕국 전 지역을 장악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는데, 이때 아시리아에 유다인 거주지가 생겼다.
  • 둘째, 기원전 598-587년 사이에 바빌론 1, 2차 침략으로 인해 남 왕국의 지역이 침략되면서 많은 유다 왕국의 사제 계급, 지식층 등 상류층이 바빌론 지역으로 끌려갔는데, 이때 바빌로니아에도 유다인 거주지가 생겼다. 이후 그들 중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으나 그러지 않고 대부분은 바빌론 지역에서 흩어져 살면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에서는 이집트로의 이민이 활발하였는데, 그것은 생활 영역에서의 침체로 생긴 생계 유지의 방편이었다. 그밖에도 소아시아,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등도 있으며 그 중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지역은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의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2. 대표적 지역들

3.2.1. 메소포타미아의 디아스포라

이 지역은 기원전 734년에서 721년에 티글랏 필에세르 3세와 사르곤 2세가 유다인을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강제로 추방해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실제적인 분산을 그 후 기원전 597년 네부카드네자르가 침략하여 유다인들을 잡아감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보며, 그 귀환자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귀환하지 못한 유다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며, 예루살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종교적, 민족적 특색을 지니면서 발전하였다.

3.2.2. 이집트의 엘레판틴 디아스포라

이 지역은 자발적으로 이주한 자들이 살던 곳이다. 초기의 이주민들은 기원전 586년에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야훼 이외의 다른 신들도 인정하였다. 기원전 5세기 중에 번성한 엘레판틴 유다인들은 페르시아 황제의 유다인 용병들의 주둔지와 가까이 하면서, 그들의 가정을 이루고, 토지나 가옥 매매, 상업을 하기도 했으며, 법정의 소송도 제기할 수 있었다. 특히 여자도 재산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집트인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모세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즉, 유다교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듯 하다.

이들은 게토에 살지 않았으며 언어는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습관, 종교도 이집트와 달랐고, 자신들만의 평의회 회장이 있었다. 자족, 자치의 공동체로 유다인과 상업 및 결혼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기원전 411년 이후 이집트에 대한 페르시아의 통치가 약화되고 이집트인의 배타심이 강화되면서 그들의 거주지 생활 상태는 나빠졌으며, 기원전 404년 경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3.2.3.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

이 지역은 헬레니즘 시대에 가장 유명한 유다인 거주지로서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도시를 세우고 유다인을 그곳에 거주시킨 것에서 시작한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에는 알렉산드리아 시의 동북부에 유다인 거주 지역을 따로 정해 주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다인들이 시내 도처에 살기 시작하게 되고, 그들의 회당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 시는 5개 구로 구분하는데, 그 중 2개 구가 유다인구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들의 시민권 소지 여부에 대해 요세푸스 같은 경우의 입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도시를 세울 때 유다인과 마케도니아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었고, 유다인들은 그들의 특별 정치 단체를 조직하여 시민보다는 좀 못하고 거류민보다는 높았다고 한다. 특히 유다인은 시민과 거의 동등했으며 원하면 조상으로부터 전해받은 종교를 버리고 도시 국가의 신들을 섬기며 삶으로써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디아스포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유다인들을 싫어하였는데, 그 이유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자기들만의 법을 지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격리해서 살기를 원했고 자신들의 관습을 고집했다. 특히 20세 이상된 유다인 남자는 매년 반 세켈[8]씩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제 유지를 위해 바쳤다. 이들은 그들의 신전보다도 예루살렘의 제의를 좋아해서 세 번의 순례 축제인 과월절, 오순절, 초막절 축제 때에는 예루살렘을 순례하였다.

4. 사회 계층

4.1. 성직자

유배기 이후의 유다이즘 문학은 제2성전[9]에 속한 제사장 제도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대사제, 사제, 레위인의 세 직급은 독립된 개별적인 계급으로써 명확하게 규정된 임무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4.1.1. 대사제

4.1.1.1. 변천 과정
넓은 의미에서 대사제는 아론의 아들인 엘아자르의 자손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신정 체제로서의 대사제직은 다윗이 차독을 대사제직에 임명했다는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이런 제도는 마카베오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귀환한 유다 공동체는 그 이전의 왕정 체제에서 신정 체제로 되었다. 따라서 대사제는 그 이전의 왕의 권위를 모두 갖게 되었다. 그 예로서, 기원전 520년에 이르러서는 대사제 예수아와 다윗 왕조의 즈루빠벨이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이중 통치 제도는 즈루빠벨의 사라짐과 함께 다윗 왕조가 막을 내리자 대사제가 유다 국가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어 교회의 영역에서와 같이 최고의 위치로 부상하였다.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서는 대사제가 제사장, 서기관, 원로들로 이루어진 게루시아[10]를 관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대사제의 권세와 영향력이 강대하기 때문에 그리스 시대에는 야심가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기도 하였다. 마카베오기 하권에서 야손은 그의 형 오니아스를 몰아내고 조공을 많이 올려주는 대가로 대사제직을 사들였다. 그러나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러 대사제직은 지난 날의 명예와 영광을 회복하였다. 하스몬 왕조의 통치 하에서 유다인이 잠시 독립을 누리던 시기에 이 직분은 그 절정을 이루며, 대사제의 중요성은 매우 커졌다. 그것은 대사제가 산헤드린의 의장이었으며, 왕이 없는 시대에는 백성의 첫 번째 대변자로서 이방인에 대해 유다 민족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4.1.1.2. 제의적 성격
대사제직의 제의적인 성격을 특징짓는 것은 그의 죽음이 속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대사제가 죽으면 바로 그날 도피성 등에 도망가 있었던 살인자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11] 이러한 대사제직의 제의적인 성격, 즉 '영원한 거룩함' 때문에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자로서 유다 공동체에서 절대적인 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서 대사제는 그에게만 허용된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또한 그에게만 부여된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4.1.1.3. 특권
  • 1년에 단 하루,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제의에 있어서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제물을 바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 상을 당한 경우에도 제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 '성전의 성물들'이 직무를 수행한 사제들에게 분배될 때 제일 먼저 선택할 권한이 있었다.
  • 유다인의 최고 행정기관이며 최고 재판소인 산헤드린의 의장이었다.
  • 퇴임 후에도 대사제라는 칭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며, 퇴임 대사제의 죽음도 도피성의 살인자들에게 면죄의 효력을 지녔다.
4.1.1.4. 의무
  • 제의적 의무
가장 중요한 의무는 제의적인 것으로써 율법에는 대사제가 대속죄일에만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지배적인 관습에 따르면 더 많은 제의적 의무들이 부과되었으며, 미쉬나의 보도에 따르면 대속죄일 이전의 한 주일 동안 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저서에 따르면 위의 의무들 이외에도 안식일, 신년제, 세 가지 대축제와 온 백성이 모이는 때에 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경제적 의무
대사제는 매일 아침, 저녁에 봉헌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곡식 예물을 날마다 몸소 바칠 필요는 없었고, 단지 거기에 해당하는 돈만 지불하면 되었다. 그밖에 속죄 제물로써 도살될 숫소들의 비용과 키드론 계곡의 교량 건축비 등을 지불하는 것도 대사제의 경제적 의무에 해당했다.
  • 정결 규정
대사제는 대속죄일 이전 일주일 동안 정결 예식을 치루어야 했으며, 시체로 인한 부정을 피하기 위해서 비록 죽은 사람이 자기 부모일지라도 그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되며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옷을 풀거나 옷을 찢어서도 안 되었다. 또한 대사제직은 세습제였기 때문에 자신의 후손을 흠없는 자들로 보존하기 위해 결혼에 관한 규정도 엄격하였다. 즉, 대사제는 오직 12세 정도의 처녀하고만 결혼할 수 있었다.
  • 그 외
대사제는 자기 지위에 합당한 용모를 갖추고 처신을 해야 했다. 그들은 매우 짧게 자른 머리를 하여야 했으며, 행차 시에는 많은 수행원들의 호위를 받아야 했다. 또한 그들은 퇴임한 후에도 대사제의 의무를 그대로 유지해야 했다. 따라서 선택이 제한된 결혼 규정과 시체로 인한 부정에 대한 금지, 장례식 참석에 대한 금령 등은 계속해서 유효했다.

4.1.2. 사제

4.1.2.1. 명칭
구약 성경에서 사제는 히브리어로 코헨(kohen)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용어의 용례는 야훼의 사제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집트, 필리스티아, 모압,암몬과 같은 이방인 나라의 사제들에게도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명사 코헨은 동사 카한(kahan)에서 나온 말로서 쿤(서다)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사제는 하느님 앞에 그분의 종, 또는 신하로 서 있는 자이다.
4.1.2.2. 서열
사제직은, 대사제직 - 고위 사제직 - 일반 사제직 - 레위인 서열로 되어 있다.
4.1.2.3. 고위 사제직
  • 성전 경비 대장: 축제 제의 때 대사제를 도왔고, 대사제의 제의와 당직 사제들을 총감독했으며, 대사제가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대사제의 대리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성전에서 최고의 경찰력을 장악하고 있어 막강한 세력을 누렸다.
  • 주간 당직 사제들의 통솔자들과 일반 사제들의 통솔자: 세 가지 순례 축제 이외에 한 주간 한 단위씩 24주간을 예루살렘에 머무르며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제의 직무를 담당하였다.
  • 성전 감독과 창고 책임자: 성전 감독은 성전 감독권과 성전 열쇠를 관리하였으며, 창고 책임자는 성전 수입과 재산을 관리하여 성전 봉헌물의 접수와 성전에 봉납된 기구들의 용도를 결정하였으며 성전세를 총관리하였다.

위와 같은 제의 거행과 재정 관리와 성전 감독은 고위 사제들 이외에도 고위 레위인들이 관장하기도 하였다.
4.1.2.4. 일반 사제
대다수의 일반 사제들은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 밖의 조그마한 촌락에서 살았다. 그들은 24개의 당직반으로 편성되어 각 반마다 일주일씩 봉직했고, 일주일이 지나면 다음 당직반과 교체되어 귀가했다. 일반 사제들의 직무는 다음과 같다.
  • 첫째, 사제들은 전반적 종교 행사를 주관하고 감독하였다. 사제 없이는 모든 종류의 제사 진행이 불가능했으며, 희생 제물의 봉헌은 제사장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성전 파괴로 말미암아 성전 의식은 율법의 종교로 대체되었고, 사제들은 랍비들로 대체되었다.
  • 둘째, 사제들은 하느님의 뜻과 교훈을 간직한 토라를 전하고 해설하는 교수, 즉 교사의 직무를 담당하였다.
  • 셋째, 사제들은 계시의 중개자로 율법을 설명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한 교훈을 전하고 해석하였으며, 번제단에 제물을 놓고 유향을 피울 때 백성들의 기도와 탄원을 대신 하느님께 드렸다.
  • 넷째, 예언의 임무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신탁이나 예언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고 꿈이나 징조를 해석해 주었다. 이러한 예언과 신탁 임무에서 연장하여 백성들의 문제 등을 돌봐주는 재판, 상담 역할도 하였다.
  • 다섯째, 사제들은 성소에서 신성한 여러 전승들을 보존하고, 해석하여 관장하는 전송 업무도 하였다. 그외에도 공동체의 건강 관리자로서 율법에 제시된 여러 부정한 일과 질병에 관한 판단을 하기도 하였다.

사제들은 비록 대사제에게 적용된 것보다는 약하지만 그와 비슷한 규정들을 지켜야 했다. 따라서 사제들은 친족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시체도 만져서는 안 되었으며, 기타 다른 규정들은 대사제의 것과 비슷하다.

4.1.3. 레위인들

4.1.3.1. 명칭
레위인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레위(lewi)로 야곱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 레위의 자손이란 뜻이며, 이 용어는 한 지파를 나타낼 수도 있다.
4.1.3.2. 직무
레위인들은 사제들 가운데 하급 성직자 계층에 속했으며, 제사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고 성전 음악과 여러 가지 봉사직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24개 분야로 나누어 1년에 한 번 정도 일주일간 성전에서 성전 음악과 성전 경비, 봉헌 준비, 예물 접수 등 성전의 잡일을 하였다.
  • 성전 음악
가수들과 음악가들은 레위인들 가운데 상층 계급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은 매일 거행되는 아침, 저녁 예배 때와 특별한 축제 행사 때에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 성전 직무
성전 일꾼들은 여러 가지 잡일을 했는데, 우선 제의와 관련된 온갖 직무를 수행하여 사제들이 제의를 입고 벗는 것을 도와주고, 성경 낭독을 위한 율법서의 준비와 초막절 축제용 화관을 쌓는 하였으며, 성전 청소 그리고 성전 경찰 직무도 수행하였다. 성직자 중 가장 지위가 낮은 레위인들 가운데서도 위의 두 부류, 즉 성전 음악가들과 성전 일꾼들 사이에는 사회적인 격차가 있어서 성전 음악가들이 성전 일꾼들보다 더 높은 계층을 이루었다.

위와 같이 대사제, 사제, 레위인의 성직자들은 아론의 후손들에게서 뽑혀졌으며, 유다 백성들 안에서 확고한 특권층을 형성하였고 매우 잘 조직화되어 있었다.

4.2. 원로

평민 귀족이라고도 부르는 원로는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의 구성원 중의 하나이다. 즉, 산헤드린은 세 집단,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원로 집단의 구성원은 산헤드린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산헤드린은 유배 이후 왕이 없는 유다 민족을 재조직할 때 중추적인 기관이 되었는데 그 토대를 이룬 것은 전통적인 가문 제도였다. 즉, 유다 민족은 전통적으로 가부장 제도가 지켜져 왔는데 왕정이 무너진 후 높은 가문의 가장들이 당시 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이 가장들은 비사제 가문으로 귀향 후에도 백성의 대변인으로 등장하였으며 평민 귀족을 대표하고 지도하였다. 이들에 대한 명칭은 원로, 백성의 지도자들, 명망 있는 사람들, 유력자들이란 칭호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원로들의 구성과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추정된다.

원로들은 많은 경우 사두가이파에 동조를 했는데, 이는 그들이 대사제들과 함께 권력층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원로들은 보수적인 집단으로 유력한 사제 귀족들과 제휴함으로써 백성들의 생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원로들은 고위 사제들과 함께 산헤드린을 구성하여 통치자들을 보좌하며 정부와 사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 세력의 판도는 알렉산드라 여왕 때부터 바뀌기 시작했는데, 알렉산드라 여왕은 바리사이파에 호의를 보였으며, 이를 계기로 바리사이파는 산헤드린에 진출하게 되었고, 대다수의 민중들은 점점 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추종하게 되었다. 또한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헤로데 대왕에게 투쟁하는 가운데 내적인 결속력을 다졌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세력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결국 기원후 1세기에 50년 동안 대사제의 정치적인 위기가 약화되자 그 결과로 원로들도 몰락하였다. 그렇지만 많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기간 동안 그 당시 산헤드린에서 그들의 의지를 더욱더 관철시킬 수 있었다. 즉, 가문의 특권에 기초한 과거의 상층 계급이었던 사제 귀족과 일반 귀족은 강력한 신흥 상층 계급인 율법 학자들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

4.3. 율법 학자

소페림(soperim)은 소퍼(soper)의 복수이며, 소퍼는 기호(sofar)를 쓸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서 율법 학자란 말이 나온다. 율법 학자가 전문적인 계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바빌로니아 유배기였으며, 유배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때에 율법 연구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율법 학자의 의미는 넓은 의미로는 지혜의 사람들, 정의의 사람들이었다. 유배기 이후 율법 학자들은 구약 성경을 선별하여 확정하였다. 그들은 종교적인 편지들과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문헌 등을 수집하고 정리하였고, 번역하기도 했으며, 또한 성경 본문이 지닌 순수성을 보존시켰고 사본을 만들었으며 편집하는 역할을 하였다.

율법 학자가 확고하게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은 에즈라 시대였다. 사제 겸 율법 학자였던 에즈라처럼 유배 회복기의 율법 학자들은 사제들과 레위인 가족들로부터 뽑혀졌으며, 그들 자신의 조직과 결속을 형성하고 있었다. 회당의 학자들은 셀레우코스가 유다를 헬레니즘화 시키던 시대와 마카베오 혁명이 절정에 달했던 민중 저항 운동에서 종교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했었다. 그들은 하시딤 운동의 선봉에 선 자들이었다.

율법 학자 계급의 사람들 중 영향력이 있던 집단이 백성들로부터 지지자와 동조자를 얻어서 그들 자체의 민중적이고 민주적인 정당을 형성하게 된 것은 헬레니즘 시대 초기였다. 그들은 바리사이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팔레스티나 전역에서 그들의 법적인 직능을 실천하였다. 또한 산헤드린의 구성원이 되어 특수한 고위층으로 활약을 하였는데 사제들과 그 부류들 다음으로 산헤드린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그 시대 유다 귀족 계층에 있어서 지도자들로서의 위치를 잡았다.

사제들이 주로 사두가이파에 속해 있었던 것에 반하여 산헤드린의 율법 학자들은 바리사이파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두가이파에 속한 율법 학자들도 소수 있었으리라고 추정하나, 아마도 산헤드린의 율법 학자들은 전적으로 바리사이파였던 것으로 보이며, 바리사이파는 사두가이파와 연합체로서 서로 대립과 타협 속에 정치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생각 된다.

율법 학자가 되는 것에 있어 출신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직 지식만이 힘이었다. 율법 학자단에 가입하면 종교법과 의식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며, 형사소송 때는 재판관으로 참여할 자격도 있었고, 민사소송 때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단독으로 판결을 내릴 수도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랍비라는 칭호가 주어졌으며 서품을 받은 율법 학자들은 토라에서 유래한 전승들의 전달자이자 창조자였다. 민중의 동조를 받은 바리사이파적 가르침에 따르면 이러한 전승은 토라와 동등한 가치를 가지거나 토라보다 우위에 있었다. 따라서 율법 학자의 말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였다.

율법 학자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바리사이파였다. 사두가이파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이 전승에서 사라진 이유는 주로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역할이 약화되고, 기원후 2세기 이래 문서화된 현존하는 전승들이 전적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 것만 전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성전 파괴 이전부터 사두가이파 율법 학자들이 미약한 세력으로 전락했다는 사실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4.4. 백성들

백성들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 순수한 유다 혈통
이들은 사제나 레위인들과 함께 소위 '순수한 이스라엘'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족보가 중요시 되었으며, 족보는 문서로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사회적으로 천시받고 억압당하는 이들
이들은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자들과 유다인 노예들이다. 전자의 경우 악취 나는 직업, 여인들과 함께 해야 하는 직업, 속임수를 쓰는 직업들로써 법률적인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직업으로 간주되었다. 후자의 경우, 도둑이 자기가 훔친 것에 대해 배상을 할 수 없을 때와 자발적으로 자기를 판매함으로써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다. 노예로 팔리는 경우는 성인 이스라엘 남자에 한하지만 12세 미만의 미성년 여자 아이도 노예로 팔릴 수 있었다.
  • 비합법적인 이스라엘인들
이들은 사소한 결함이 있는 사람과 큰 결함을 가진 사람으로 구분된다. 비합법적인 사제의 후손들, 개종자들, 이방인, 해방 노예 등은 전자에 속하고, 사생아, 성전 노예, 아버지 없는 사람, 주워온 아이, 고자 등은 후자에 속한다.
  • 이방인 노예들이다
이들은 유다인 공동체와 매우 밀접한 생활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만 유다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그들 주인의 완전한 소유물이었다.

5. 조직과 제도

5.1. 성전

성전은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건축된 인공적인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산당(山堂)과는 원칙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성전은 고대의 산당을 대신하여, 혹은 그것과 관련되어 세워지기도 했다. 그 기본 개념은 변하지 않고 계승되어, 하느님이 그의 현존을 나타낸다고 믿어지는 곳, 그리고 인간들이 예배와 경배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을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은 '벳'(집)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5.1.1. 예루살렘 성전 이외의 성전들

족장들이 인도했던 히브리 유목민의 최초 출현, 즉 여호수아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던 때와 왕정이 수립된 때는 서로 상당한 기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히브리 역사 속에서 비교적 후기의 사건이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 성전의 건축 이전에 팔레스티나에 있던 히브리인의 예배 장소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그 이전에도 종교적 제사 의식이 예배 장소나 신당 혹은 성전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5.1.1.1. 족장 시대
창세기는 족장들이 팔레스티나 땅에서 예배 보던 곳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것들은 대체로 가나안의 신당들과 마찬가지로 옥외에 세워졌다. 예를 들어 베텔 성소는 아브라함이 제단을 세운 곳으로 후에 북이스라엘 왕국의 민족적 성소의 기원이 되었다. 베텔, 그러니까 '엘(El)의 집'은 신의 현현의 표시로서 야곱이 돌기둥을 세운 것에서 유래했다.

이런 것들은 헤로데 대왕 시대의 통속적인 전승 속에 그 기억이 살아남아 있었다. 헤로데 대왕은 성스러운 지역이라 생각되는 곳 주변에 기념 울타리를 세운 사람이다. 엄격히 말해서 비록 족장들의 성소들이 성전 건물이라는 의미에서는 성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족장들이 설립했고 또 족장들이 방문한 예배 장소들 중 몇 개는 후대에 가장 대중적인 성소와 성역으로 발전되었다.
5.1.1.2. 팔레스티나 정복부터 솔로몬 성전까지
역사서 저자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적 교의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교의가 되었다. 그들은 이 교의의 근거를 모세의 예언적인 언급에서 찾고자 하였으나 그들의 관점을 역사적 현실과 조화시킬 수는 없었다. 솔로몬 통치 이전에 여러 가지 지방 성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성경 저자들도 알고 있었으나 가나안 사람들이 세웠다는 점 때문에 침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현실과 단일 성소론 간의 갈등은 잠정적으로 세 가지 방향으로 해결되었다.
  • 첫째, 스켐이나 길갈과 같은 종교적 중심지들은 주로 민족적인 기념이 될 만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 둘째, 이스라엘인들이 초기에 예배를 드리던 장소들은 광야 시대로부터 왕실 성소 건축 기간까지, 임시로 있던 것으로 간주되었다.
  • 셋째, 지방 성소들은 계약 궤 혹은 성막에 딸린 물건들을 둔 적이 있다는 사실 내지 가정으로 인해 합법화되었다.

사무엘기, 열왕기, 역대기 등을 근거로 할 때 연대적으로 보아 최초의 지방 성소는 에프라임 지방에 있는 실로 성소이다.

5.1.2. 예루살렘 성전

역사적으로 성전은 구약 시대의 솔로몬 성전, 즈루빠벨 성전, 헤로데 성전 등 3개가 건축되었는데 모두 같은 자리에 세워졌었다.

최초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은 기원전 968년에 착공되어 기원전 961년에 완공되었다. 이 성전은 완공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교 및 국민 생활의 중심으로 성역화되었으나,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 파괴되었다.

기원전 538년 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되어 이전에 끌려갔던 이스라엘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자, 그곳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인들과 당시의 지도자였던 즈루빠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새로 짓기 시작하여 기원전 516년에 완공되었다. 솔로몬 성전에 비해 그 규모는 매우 축소된 것이었으나 완공 이후 기원전 63년까지 500년간 존속되었다.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예루살렘 침입으로 즈루빠벨 성전이 파괴된 뒤, 기원전 37년 헤로데 대왕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기원전 20년에 파괴된 이 성전을 수리 개조하였고, 그 뒤로 50여 년간 여러 차례 증축되어 헤로데 성전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헤로데 성전도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침략 때 파괴되었고, 성전의 기물들은 전리품으로 로마가 가져갔다.

5.1.3. 성막

성막은 이동시킬 수 있는 성소로서 모세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성막은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들 가운데 거처하시는 장소였다. 또한 하느님의 계약 궤를 두는 곳이기도 했고, 광야 생활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었다. 가나안 땅 정착 후, 성막은 몇몇 곳으로 옮겨지다가 마지막에는 솔로몬 성전으로 대치되었다.

성막은 회막, 장막, 증거막으로도 불렸다. 히브리어의 '모임'이라는 낱말은 '약속에 의해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막에서 하느님이 모세와 이스라엘을 만났다고 하여 '희막'이라고도 불렸고, 이러한 모임의 목적이 '전달'이라는 의미에 의해서 '증거막'이란 뜻도 지니게 되었다. 한편 탈출기 26장 1절에서는 사실상의 지성소를 의미하기도 했다.

5.2. 제의

5.2.1. 이스라엘 제사의 특징

이스라엘 제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첫째, 이스라엘인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예배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러한 유일신 사상 때문에 여러 개의 성소에서 예배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어떠한 여성적 신의 존재도 전혀 용납치 않고 육감적 의식들을 배제한다. 거기서부터 정결과 속죄가 이스라엘인의 제의 목적 중 하나로 나타나게 된다.
  • 둘째, 이스라엘인들은 역사에 개입하시는 인격적인 하느님을 섬겼다. 그들이 섬기는 하느님은 인격적인 계약의 하느님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제의는 신화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갱신하는 것이다.
  • 셋째,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제의에서 어떠한 형상도 용납하지 않았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여타의 신과 우상 숭배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야훼는 언제나 형상 묘사를 초월해 계신다는 인식 때문이다. 모세의 제사 제도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계시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 제사의 종류에 따라 선물, 친교의 통로, 속죄의 방법을 표현한다.

5.2.2. 제사 방법

5.2.2.1. 화제(火祭)
제단 위의 제물을 전부 태워서 온전히 하느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방법이다. 여러 제물의 머리, 내장, 정강이 등을 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 번제단에서 태운다. 곡식, 고운 가루, 기름 한 줌, 유향 등을 취하여 제단 위에서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제사를 올린다.
5.2.2.2. 전제(奠祭)
포도주나 술, 제주(祭酒) 등이나 제물용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거나, 찍어 바르거나, 쏟아 붓는 방법이다.
5.2.2.3. 고제(告祭)
하느님 앞에 제물을 흔들어서 보인 후 그것을 손에 취하여 제단 위에서 번제물과 함께 불사르는 방법으로, 그 번제물을 제사장에서 분깃[12]으로 주기도 한다. 예물로는 짐승의 가슴이나 다리 부분과 기름 또는 빵과 곡식단을 택한다.
5.2.2.4. 거제(擧祭)
제물의 어느 부분을 높이 받쳐드리되, 수평을 유지하며 높이 받들어서 드리는 행위이다.

5.2.3. 제사의 종류

5.2.3.1. 번제
  • 명칭: 번제란 희생 제물이 제단 위로 올라간다는 것, 혹은 그것을 불사를 때 연기가 하느님께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 목적: 무의식적인 원죄를 없이 하기 위해 바친다.
  • 제물: 재산 정도에 따라서 흠없는 숫송아지, 숫양, 숫염소, 그리고 비둘기를 바친다. 동물은 수컷만 가능하다.
  • 제물 분배: 제물 전체가 온전히 불태워져서 바쳐진다. 이것이 여타 제사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 방법: 아침, 저녁으로 드려지는 가장 흔한 제사로서 제주(祭主)가 성전에 짐승을 끌고 가서 그 제물에 안수하고 제사 드린다. 제물은 직접 제단 북쪽에서 죽여 각을 뜨며, 내장과 정강이는 씻어서 제사장에게 넘겨 준다. 사제는 피를 취해서 제단 위에 뿌리고 그 제물들은 제단에서 화제로 하느님께 드린다.
  • 의미: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신앙과 흠숭을 보여 드림으로써 이미 맺었던 하느님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다. 번제의 특성인 '온전히 드림'에 포함되는 피와 기름은 생명, 머리는 사상, 정강이는 행위, 내장은 마음의 느낌과 감정을 각각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5.2.3.2. 속죄제
  • 명칭: 죄와 죄를 없애는 의식 양쪽을 다 의미한다.
  • 목적: 대체로 종교적으로 범한 죄로 인해 드리는 제사로 '배상이 불가능한' 본의 아니게 무의식적으로 지은 죄를 없이 하기 위한 제사이다.
  • 제물: 제물은 제주(祭主)의 신분에 따라 정해졌다. 이는 속죄제가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신분에 따른 제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제사장: 흠없는 숫송아지
- 온 회중: 흠없는 어린 숫송아지
- 왕, 추장: 흠없는 숫염소
- 평민: 흠없는 암염소
- 가난한 자: 두 마리의 새(비둘기)
- 아주 가난한 자: 고운 가루* 제물 분배: 제물에서 취한 기름은 하느님께 태워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 몫이 되며 그것은 성막 뜰 안에서 먹어야 한다. 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는 불사른다. 이 나머지 제물은 진 밖에서 전부 불사른다.* 방법: 죄를 깨우친다. → 제주(祭主)가 제물을 가져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하느님 앞에서 잡는다. →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성소 휘장에 7번 뿌리고 향단 불에 바른다(족장과 평민을 위한 것이면 번제단 불에만 바른다). → 남은 피는 모두 번제단 밑에 쏟고 기름은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다. → 나머지는 진 밖의 재 버리는 곳에서 나무로 불태운다.* 의미: 속죄제의 특별한 점은 '피'이다. 피가 죄를 대신한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곧 생명이 피 안에 있다는 의식 때문에 피가 죄를 속죄한다. 속죄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백성의 죄를 씻어 정결케 하는 것이다.
5.2.3.3. 속건제
  • 명칭: 범죄, 범법, 침해 등을 의미한다.
  • 목적: 제2급 속죄제라고도 하며 배상이 가능한 하느님의 성물 침해, 타인의 소유권 침해와 같은 특별 범죄를 용서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그래서 보상의 희생이라고도 한다. 자발적인 윤리상의 죄, 즉 하느님 말씀이 기록된 구체적인 법에서 떠나 범한 윤리적인 죄를 사하는 제사이다.
  • 제물과 보상: 제물로는 흠없는 숫양만을 드린다. 보상으로는 성물의 침해인 경웨 그것의 5분의 1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하고, 사람들에 대한 피해인 경우는 본래의 것에 5분의 1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 보낸다.
  • 제물 분배: 먼저 보상의 행위를 하고 나서 제물의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고 모든 기름을 콩팥과 함께 하느님께 화제로 드린다. 나머지는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
  • 특성: 피를 제단에 쏟지 않고 제단 사면에 뿌린다. 속건제는 하느님의 계명으로 금한 어떤 일을 부지불식 간에 행했을 때 드려진다. 속건제는 누군가 죄를 지으면 그것을 배상하기 전에는 하느님 앞에 빚진 자이다. 그러므로 속죄제와는 달리 속건제를 드릴 때는 부자나 궁핍한 자나 모두 동일한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 의미: 실수로 저지른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번제는 인간의 원죄 문제를, 속죄제는 인간 죄의 본성 문제를, 속건제는 죄의 본성의 결실로 나타난 스스로 지은 죄와 양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라고 볼 수 있다.
5.2.3.4. 친교제
  • 명칭: 평안제 혹은 수은제라고도 한다. 이 말은 평화, 행복을 뜻하는 샬롬과 어원을 같이 한다.
  • 목적: 번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사를 통해 죄의 사함을 얻은 자가 하느님과의 친교, 화목을 드리는 뜻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변함없는 구원을 바라며 사람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선택적 제사이다. 친교제에는 제주의 목적에 따라 감사제, 서원제, 낙헌제로 분류한다.
  • 제물: 제주의 마음에 따라 흠없는 암컷이나 수컷의 소, 양, 염소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드린다.
  • 제물 분배: 기름 부분은 화제로 하느님께 드리고, 제물의 가슴은 언제나 하느님께 보인 후 제사장에게, 그리고 오른쪽 뒷다리는 거제로 드린 후 제사장의 소득으로 주어진다. 한편 제물의 나머지는 제주의 몫이 된다.
  • 방법: 제주가 제물을 하느님께 가져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후 죽여서 각을 뜬다. 제사장은 제물을 받아 피를 제단에 뿌리고 내장을 덮은 기름과 허리 부분의 기름, 간에 덮인 기름, 그리고 양인 경우에는 기름진 꼬리를 화제로 하느님께 드린다. 가슴은 요제[13](搖祭)로, 오른쪽 뒷다리는 거제로 드린다. 제물의 나머지를 제주의 친구와 가족들이 함께 나눠 먹는 축제로 제사는 끝이 난다. 친교제를 드려야 할 때의 전제 조건은 속죄와 청결이다.
  • 의미: 친교제는 번제와 마찬가지로 향기로운 냄새와 예물이다. 친교제의 회식은 신약의 최후의 만찬과 흡사하다.
5.2.3.5. 곡물 제사인 소제
  • 명칭: 곡물로 바치는 제사로서 제물이 곡물이기 때문에 무혈 제사라 할 수 있다.
  • 목적: 선한 뜻을 지키고 유지해 가려는 노력의 제사이다. 또한 가난한 자를 위해서는 속죄의 제사로 인정되기도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하느님께 소제를 드린다.
  • 제물: 고운 가루, 무교병, 첫 수확 곡물,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기름과 유향을 부어 제사를 드린다. 이 제물들에는 소금과 유향을 가미하고 누룩과 꿀은 넣지 않는다.
  • 제물 분배: 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취하여 제단 위에서 화제로 하느님께 바치고 남은 제물은 제사장에게 주어 성전에서 먹도록 한다.
  • 특성: 향기로운 냄새를 발하게 하고, 곡물과 더불어 기름, 유향, 소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제물 중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 몫으로 돌려졌다.
  • 의미: 제주가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뜻으로 드리는 선물이다. 그래서 친교제와 함께 드려졌었다. 곡식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며 가루로 됨은 고통의 상징이다. 하느님께 곡물을 태워 드리는 것은 공경의 표시이며, 여기에는 간구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5.2.4. 제의에 대한 예언자들의 태도

하느님의 윤리적 본성을 강조한 예언자들은 제의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의견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대예언자들은 예외없이 모두 제사를 비난하고 있으며 또한 제사를 하느님과의 친교 수단으로 간주하는 발설도 하지 않았다. 이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제의나 기념제와는 전혀 무관하게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친교를 맺는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빌로니아 유배 후의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도 강력하게 비난했던 바로 그것으로 다시 돌아갔고, 재건기에서 이 제의는 유다 신앙을 보존하는 수단이 된다. 유배 후의 예언자인 하까이에게는 유배 전 예언자들의 특징을 이루었던 제사 의식에 있어서의 타락에 대한 비난마저 결여되어 있고, 정신적 메시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있다. 즉, 하느님의 계시라는 전체적 흐름보다는 오히려 유다이즘을 전개하는 노선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이후 성전과 성전의 예배는 유다인들에 있어 종교뿐 아니라 민족적 생활의 구심점이 됐다.

즈카르야서 마지막 부분에서는 미래의 행복한 시기에 대해 말할 때 제사 의식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도 재건된 성전은 새로 건설된 시온 성읍을 대표하게 된다. 역대기를 쓴 유배 후 작가 내지 편집자는 틀림없이 그 이전의 문서에 실린 다윗솔로몬의 설화를 알고 있으면서도 성전 의식의 경이로움과 장엄한 성직 편성을 묘사하는 시도를 한다. 즉, 다윗을 성전 구성진을 편성한 인물로, 또 성전 건물 자체의 구조에 대해서도 세심히 준비한 인물로 묘사하였다. 솔로몬 역시 제의 기구에 관심을 기울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래서 신명기 법전에서는 제사나 제의에 대한 적개심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신명기는 예언자들과 사제들 사이의 타협을 유도, 실현하였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예언자적인 문서인 동시에 그에 못지 않게 사제적 문서이다.

귀환기에는 제사 의식이 매우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예언자들의 가르침의 정수가 어느 정도는 존속되었다. 유배 후 작가들 가운데 몇몇은 제사와 의식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5.3. 의회

5.3.1. 명칭

산헤드린은 희랍어의 '쉬네드리온'을 탈무드에서 바꾸어 쓴 어휘로 71명으로 구성된 유다인의 최고 회의를 지칭한다. 이 용어는 쉰(συν)[14]과 헤드라(ἕδρα)[15]에서 유래되었다. 이 제도는 여호사팟의 명령으로 제사장과 레위 사람, 그리고 족장들로 구성된 법정이 예루살렘에 설치된 데 그 기원을 둔다.

5.3.2. 구성

이 법정에는 의장이 두 사람인데 대사제는 종교적 사항을, 유다의 부족장은 정치적 사항을 각각 처리하였다. 산헤드린은 예루살렘에 있던 대의회, 즉 최고 법원인 대산헤드린과 지방에 설치되어 대산헤드린의 지시를 받았던 소산헤드린으로 나뉜다. 대산헤드린은 사제들, 서기관들, 바리사이인, 사두가이인들로 구성되었고 정원은 모세의 전례를 따라 71명[16]이었다.

요세푸스와 신약 성경에 의하면 임직 회장직은 항상 대사제가 맡았고, 소산헤드린은 지방의 각 도시에 설치되었다. 주민이 120명[17] 이상 되는 도시에는 23명, 그 이하의 경우에서는 3명에서 7명의 장로로 구성되었다. 포로 후기 유다이즘의 전체 역사는 대사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사제의 귀족 정치가 의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살로메 알렉산드라 시대에도 왕후의 지배권은 명목 뿐이었고 실제로는 바리사이인들이 지배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 시대의 의회는 공식적으로는 사두가이파 사제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바리사이인들이 지배했다.

5.3.3. 기능

산헤드린은 국민의 종교 생활을 감독하고 제사직과 가정의 순결에 관하여 각별히 주목하고, 종교 생활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건을 심사하였다. 또한 종교적인 것이나 세속적인 논쟁을 재판하고, 나아가서는 교회나 국가에서의 최고 권위까지도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독립적인 기구로서 유다 율법에 의한 행사권까지도 행사하였다.

또한 행정적인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그 자체의 치안관이 벌금, 체형, 구속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원래는 사형에 처하는 권한도 갖고 있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후 권한이 제한되어 극형 선고의 권한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이라 해도 의회의 재량으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이방인의 구역과 성전 뜰 안을 구분하는 울타리를 넘어간 이방인의 경우로 성전 바깥 뜰에는 희랍어와 라틴어로 이방인의 출입을 금하는 경고 표찰이 있었다.

5.3.4. 의회의 진행

의회는 매일 아침 희생물을 모으는 시간부터 저녁 희생물을 드리는 시간까지 모이고 안식일이나 명절에는 모임이 없다. 의회 회원은 반원형으로 서로 볼 수 있도록 앉는다. 공증인 두 사람이 그들 앞에 서서 투표 상황을 기록했고 죄수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여 상복을 입는다. 사형 선고는 재판 당일에 통과될 수 없었고 판사의 결정은 다음 날에 다시 검토되어야 했다. 그러나 백성을 잘못 인도한 사람의 경우는 예외였는데, 이 경우에는 재판받은 날에 판결이 났고, 이런 까닭에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은 금요일이나 명절 전일에 재판하지 않았다. 선고받은 사람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전령관이 앞서 나가면서 만약 그 사람을 변호할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외친다. 그리고 형장에 가까이 와서는 사형수에게 내세에 참여하기 위해 스스로 죄를 고백하라고 한다.

5.4. 회당

5.4.1. 명칭

70인역에서 희랍어 '시나고게'(συναγωγή)는 히브리어 '에다'(회중) 를 번역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하였고, 성경의 아람어 역본들에서는 '에다'가 항상 '크니스타'(kenista)로 번역되었다. 성경 히브리어 '크네셋'(kneset)도 아람어의 모형으로 이런 단어들은 단지 모임만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탈무드 외경에는 '크네시야'(knesiya)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어떤 종류의 조합이나 협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기원후 1세기부터 시나고게라는 용어가 유다인 저자들의 작품에서, 특히 신약 성경에서 점차로 집회 장소, 예배와 교육의 집이란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의 회당은 가르침을 베풀기 위한 집회나 종교적 집회를 행하는 곳을 가리켰다.

시나고게란 단어는 몇몇의 유사한 단어로도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프로세우게'로 유다인들의 공공적인 예배 장소를 가리키며 기도, 기도의 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둘째, '토포스'로 흔히 거룩한 장소를 의미한다. 셋째, '오이코스'로 회당을 가리키는 말이다. 넷째, '삽바테 이온'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 가운데서 언급되는데 회당을 의미한다.

5.4.2. 기원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회당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다.
  • 타르굼(Targum), 특히 위 요나탄 타르굼과 미드라쉬(Midrash)에 나오는 여러 본문은 회당이 유다 백성이 존재하던 초기, 즉 족장 시대에 있었다는 설.
  • 신명기 31장 11-12절에 의거하여 모세 시대에 있었다는 설.
  • 바빌로니아 유배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예배를 할 수 없기에 도시의 교외나 강가, 집 등에서 율법서를 읽으면서 기도하였다는 설.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부터 있었다는 설.
  • 유배기 이전 예루살렘에는 성읍의 공공집회를 열 수 있는 특별한 건물이 있었는데 여기서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그래서 그 집회는 종교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설.

이 중에서 회당이 바빌로니아 유배지에서 생겨 유배 생활 중 성전을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는 세 번째 설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5.4.3. 구조와 비품

5.4.3.1. 위치
회당은 성읍의 가장 높은 지점에 있었다. 그런데 아모리 시대(3-5세기)에는 성 밖의 평지에 회당들이 있는데, 이런 관습은 일반적으로 바빌로니아에 국한되어 있다. 기원후 1세기에는 목욕재계 예식을 위하여 회당을 물과 가까운 곳에 짓기도 하였다.
5.4.3.2. 방향
원래부터 회당의 방향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쪽으로, 즉 예배자가 예루살렘을 향하도록 현관 맞은편 벽이 예루살렘을 향하게 되어 있다.
5.4.3.3. 건축
예루살렘 성전이나 아론의 장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성전이 있는 한 회당에 성전의 특성을 부여할 필요가 없이 단지 회당은 율법의 낭독과 계명의 교훈에 한정된다. 그러나 디아스포라는 예루살렘과 직접 접촉이 없기에 성전의 형태적 특징을 채택한 회당을 통해 그와 접촉하려고 노력하였다.

* 바실리카식 회당: 이런 형태는 초기 또는 갈릴래아의 형태로 사각형으로 된 커다란 홀이 있고, 대부분 장방형으로 건물 전면은 예루살렘을 향한다.
* 넓은 집 같은 회당: 이런 형태의 출현은 고정된 토라 보관소가 사용되던 시기와 일치되는 것으로, 최초의 실례는 기원후 3세기에 두라 에우로포스의 디아스포라 지역에서 나타난다. 팔레스티나의 남쪽으로는 새 회당 건물이 발견되는데, 이 건물들은 예배의 초점이 예루살렘을 향한 긴 벽에 위치하고 있다.
* 동쪽 끝에 반월형 부분: 이 형태는 기원후 530년에 교회로 재건된 카이사레아의 회당을 토대로 한 것으로 기원후 8세기까지 계속된다. 이 건물 형태는 바실리카 양식의 설계에 근거한다. 새로운 것은 반월형 부분이 예루살렘 방향을 지향하고, 예배자들이 중앙으로 들어선 다음에 뒤로 돌아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5.4.3.4. 비품
고대 회당이 갖추어야 할 한 가지 필수적인 비품은 토라 벽감이다. 이 토라 벽감의 명칭은 히브리어로 테바(teba)로, 일반적으로 '책들의 상자'라는 의미가 있다. 또 이것은 성경의 옛 이름으로 아론[18]이라 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4세기 말까지는 토라 벽감이 회당 안에 고정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이동식 상자로서 공공 예배를 위해 필요시에만 부속실에서 회당으로 가져왔다는 것을 탈무드 자료들이 전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후대 연구에 의하면 작은 건축물, 즉 초기(2세기) 회당들 안에 있던 사당 형태의 구조를 재구성하여 이 구조물이 토라 벽감을 위한 성소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론 형태의 토라 벽감은 일반 회중이 직접 보지 못하도록 휘장이 쳐있는데 이 휘장은 두 종류이다.
  • 첫째, 베일 혹은 커튼을 의미하는 아람어의 파로켓(paroket) 혹은 파로크타(parokta)로, 법궤가 놓여 있는 방이나 감실 전체를 가렸다.
  • 둘째, 킬라(kilah). 즉 법궤 위에 펼쳐진 일종의 천개로 팔레스티나 탈무드에서 언급된다. 이것은 팔레스티나 양식의 회당에서 토라 벽감을 취장으로 가리는 것을 반영한다. 그리고 토라 벽감과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베바가 있었는데 이것은 일과 낭독 및 축복 기도를 암송할 때 사용하는 약간 높은 받침대이다. 토라 벽감 앞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그밖에 회당의 비품으로는 트럼펫과 단식이나 축제를 알리는 나팔이 있다.

5.4.4. 회당의 관리 및 남녀 분리

5.4.4.1. 회당장
회당의 우두머리로서 집회는 주재하는 관리였다. 회의 중 토라를 낭독하고 설교할 일을 할당해 줄 권위를 가졌다. 직임은 일정 기간 혹은 종신제였다.
5.4.4.2. 핫잔(Hazzan)
핫잔은 직무 개념과 관련해서 일꾼, 종, 수종자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는 종교 의식에서 회당장의 조수로서 예배 중에 제각기 해야 할 직무를 지시해 죽었고, 토라를 봉독자에게 가져갔다가 가져오며, 사제가 축복 기도를 할 시각을 알려주었다.
5.4.4.3. 사자
회중의 사자는 핫잔의 직무와 밀접히 관련되는데, 주요 임무는 회중들이 그의 선창을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기도를 낭독하는 것이었다.
5.4.4.4. 남녀 분리
초기 랍비 문헌에는 회당에서의 남녀 분리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점은 여자들이 회당에 자유로이 참석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여자가 참석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함께 예식에 참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단지 회당에서의 남녀 구별은 여자석이 있다는 것에 따르는 것으로 알렉산드리아의 바실리카 회당에서는 여인들은 위층에 있는 자로 남자는 아래층에 있는 자로 구분했다.

5.4.5. 회당의 예배

회당은 성전이 아니기에 제사는 없었고 따라서 예배도 간소하였다. 회당은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개방되어 있고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집회가 있고 안식일은 제일 중요한 날로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보통날의 예배는 세 사람 또는 한 사람만이라도 집전할 수 있었지만 안식일의 예배는 일곱 사람이 집전해야 했다. 이들 일곱 사람의 순번은 핫잔에 의해 호명되었다. 그리고 집회가 합법적으로 구성되려면 열 명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들이 출석해야 하고 남자들은 13살이 되면 누구나 이 의식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관례적으로 식순은 첫째,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 회중은 모두 일어서서 예루살렘 쪽을 향해 '쉐마'와 '쉐모네 에스레'를 낭송하는데 찬양으로 낭송이 시작되고 끝맺음 말 '들어라 이스라엘아'에 이어서 소위 18개의 축복문이 뒤따른다. 때로는 회중의 한 사람이 율법의 두루마리를 넣은 선반 앞에서 그것을 소리 높여 낭송하는데 한 절이 끝날 때마다 아멘으로 응답한다.

둘째, 예배의 핵심 부분으로 3년마다 주기적으로 모세오경을 완독할 수 있도록 153단으로 구분하였다. 모든 유다인 남자들은 예배 때 앞에 나가서 성경을 읽을 수 있는데, 암기하여 낭독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율법의 원문이 결코 변질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율법 낭독은 히브리어로 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아람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율법 낭독이 있는 후에 예언서에 대한 강독이 있었다.

셋째, 낭독자는 자기가 읽은 부분을 주해할 수 있고, 주해할 때는 보통 앉아서 여러 가지 자세한 강화나 주석 또는 미드라쉬를 했다. 끝으로 제일 처음의 기도를 외운 자가 테바 앞에 나아가서 마지막 기도를 외우며 이 기도는 축복으로 끝난다.

6. 축제

6.1. 이스라엘 월력

6.1.1. 하루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하루를 일몰에서 다음날의 일몰까지로 계산했다. 여기서 시간 전체의 하루를 표현하고자 할 때 낮과 밤이라 부르거나 그와 비슷한 어구를 사용하였다. 아울러 낮과 밤의 구별 및 시간의 시작도 일몰에서 시작하였다.

하루의 구별은 자연 형상에 따라 부정확하게 구별했는데 가령 아침과 저녁(탈출 18, 13), 정오(창세 43, 25), 아침의 노을(창세 19, 15), 해질녘(창세 15, 12. 17), 저녁 바람(창세 3, 8), 가장 뜨거운 낮시간(창세 18, 1) 등이다. 또한 시간에 대한 표현이 자주 제사 의식과 관련된다. 가령 열왕기 상권 18장 29절과 에즈라기 9장 4절, 다니엘서 9장 21절에서는 저녁의 희생 제물을 드리는 때가 시간에 대한 표시로 나타난다. 일정한 종교 행위들은 두 저녁의 사이에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시간은 태양이 사라졌다가 밤이 사라지는 여명, 한밤중의 경(판관 7, 19), 마지막 경이나 아침의 경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짧은 시간의 부분에 대한 표현은 알려져 있지 않다.

6.1.2.

이스라엘이 한 달을 어떻게 시작하는지는 모른다. 가령 이집트인은 한 달을 하현달의 마지막 주기가 끝나는 그믐밤 다음의 아침부터 시작하여 계산했고, 바빌론인은 해가 상현의 초승달이 나타나는 저녁부터 시작하였다. 다만 이스라엘은 하루를 아침까지로 계산하는 것으로 보아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 같으나 확실치는 않다.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음력으로 한 달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1개월의 달에 '야레아'(yareah)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동시에 전체로서의 달도 의미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찍부터 개월로서의 달을 '호데쉬'(hodesh)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우선 초승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달의 변화 주기는 29일과 30일을 번갈아 계산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월명을 가나안 원주민이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계절과 관련된 것이다. 가령 아빕월(이사의 달), 시브월(꽃의 달), 불월(큰 비가 오는 봄 달) 등이다. 이것의 사용은 오랜 기간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유월절을 아빕월로 확정해 놓은 신명기에서 아직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이 솔로몬 이후의 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다. 이런 개월의 명칭은 공식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서민들의 일상 생활에는 다른 표현들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추수(아삽) 2달, 파주(자라) 2달, 늦은 파종(레베쉬) 2달, 아마의 자름(아차드 페세트) 1달, 보리 추수(카치르 세오림) 1달, 추수(카치르 야칼) 1달, 포도 따기(자마르) 2달, 여름 과일들 따기(카츠) 1달 등의 표현이다. 이런 표현들은 농부들이 계절에 따라서 수행해야 되었던 노동의 종류에 따라서 농업적인 1년의 표시를 의미하며 구약 성경에서는 이런 표현이 나타난다.[19] 월명이 서수로 기입되기 시작한 것은 바빌론 포로 후기에 도입된 것으로 후대에 와서 통용되었고, 이것이 유다교 안에서도 통용되었다. 흐름은 봄부터 시작된다.

히브리력 문서 참조.

6.1.3. 주간

한 달의 기간 중에서 증언이 잘 된 유일한 시간의 단위는 7일 주기이다. 달의 모습에 따라서 결정된 달력에서는 달의 변화에 따라서 한 달을 구분하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즉, 달의 변화에 의해서 한 달의 가운데에 나타나는 만월에 의한 구분이다. 실제로 15일은 바빌로니아의 달력에서 사팟투(shapattu)인데, 구약 성경에서는 사밧(shabat)이라는 이름의 축제일로 비슷한 구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축제인 유월절과 초막절이 1월과 7월의 제14, 15일에, 곧 만월이 뜨는 날에 거행되었으며 후대의 푸림절도 12월의 만월이 뜨는 날에 거행되었다. 이스라엘의 주간은 제7일의 휴식에서 자체의 특성을 지닌다. 이 안식일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종교 제도이며 이스라엘의 고유한 것이다. 가령 7년이 1년주를 이루고 7년주는 희년 등을 이루는 것이 이의 반영이다.

6.1.4. 년(年)

이스라엘은 1년을 두 계절로 구분하였다. 겨울(horep)과 여름(qayis)이다. 이 두 계절은 전체적으로 볼 때 춥고 더운 계절이요, 파종하고 추수하는 계절이다. 이같이 단순한 계절의 양분은 팔레스티나의 기후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대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그리스인의 춘하추동의 계절 구분을 받아들였다.

6.2. 축제

6.2.1. 과월절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의 3대 축제[20] 중의 하나로 유다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또 극적인 사건인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매 해 봄 이스라엘력 니산달 15일부터 7일간 지내는 이 축제는 유다 축제 중 가장 오래된 축제이며 민족의 축제이다.
6.2.1.1. 유래
유월절(파스카)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페샤(pesha)[21]에서 유래되었다. 유월절은 본래 그 절기 첫날의 전야, 즉 그 달 14일에 행해지며, 그날에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사가 드려지고 그 다음 7일 동안 무교절 축제가 행해진다. 무교절의 누룩을 제거하는 일은 유월절 제사에 사용할 짐승을 죽이기 전에 완전히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은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 음식은 그 자체가 무교병이었고 유월절이라는 말은 모든 축제일에 걸쳐 사용된 것이다.

유월절과 무교절의 역사에 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있지만, 유월절은 유목민들의 의식이고 무교절은 가나안의 농업 축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월절과 무교절은 이집트 탈출 이전의 의식에 탈출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중 가장 중요한 자료는 탈출기 12장 1절-13장 16절이다. 이 구절은 바빌로니아 유배기나 그 이후에 구성된 것으로 12장 1절-20절과 28절, 12장 40절-13장 2절은 사제계 문서로 보며, 12장 24-27절과 13장 3-16절은 신명기 저자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6.2.1.2. 의식
기원후 70년 성전이 파괴되기까지 유월절은 순례자들의 축제 중 하나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매년 예루살렘으로 10만 명의 순례자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유월절 저녁의 독특한 의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니산달 14일 저녁에 성전에서 양과 염소를 죽여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일이고, 또 하나는 가정에서의 식사와 친교 그리고 역사적인 기념이다.

성전에는 평상시에 한 사람만 있었지만, 이때에는 전 사제들이 참여하였다. 처음 예식 행위는 누룩을 제거하는 일이며 사제들이 누룩을 태운다. 오후 3시경 레위인들의 나팔 소리가 세 번 울리면 유월절 제사를 위해 짐승을 잡고 제사의 핵심인 피 뿌리는 예식을 행한다. 다음에 식사가 행해진다. 축복 기도 후 첫 번째 포도주 잔으로 식사가 시작되고 쓴 나물과 양고기를 먹는다. 두 번째 포도주 잔이 있은 후 아들이 '왜 오늘 밤은 다른 모든 날의 밤과 구별되는가?'하고 의식상의 질문을 한다. 이에 가장은 하가다(Haggadah)라는 이집트 탈출의 역사적인 구속 이야기와 노래의 암송을 소개한다. 기도가 끝난 후 형식적인 축하 행사는 끝나고 비형식적인 모임이 계속될 수도 있고 조심스럽게 헤어질 수도 있다. 성전이 파괴되자 유월절은 희생적인 의식으로는 끝을 맺고 하느님의 구속에 대한 거룩한 축하 행사로 계속되어 왔다.

유월절이 주로 역사적인 기념일인 반면에 유월절의 성실한 의식은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행사이다. 첫 열매를 드리는 이른 칠칠절에 시작해서 초막절에 끝난다. 새 보릿단을 흔들면서 바치는 것은 무교절 축제 의식의 한 일면이다.

6.2.2. 오순절

6.2.2.1. 유래
과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라 하여 펜테코스테라고 불리우는 오순절은 고대 이스라엘로부터 계속되어 온 추수 감사절이다. 원래는 지방마다 따로 축제를 거행했지만 성전 시대 이후 중앙 성전에 모여 일시에 지내면서 순례 축제가 되었다. 성전 파괴 이후로 유다인들은 이 절기를 시나이 산의 율법 수여를 기념하는 축제로 거행했다. 이 축제가 오순절이라고 불리어진 이유는 이 축제가 유월절 축제 때에 보릿단을 바치고 난 후 50일째 되는 날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탈출기 23장 16절에 의하면 오순절의 가장 고대의 이름은 추수절이다. 추수된 밀의 첫 열매들이 하느님께 바쳐지는 특별한 축제에 대해 사용된 '칠칠'이라는 이름은 보리의 수확을 시작으로 하고, 밀 수확을 끝으로 마치게 되는 곡식 추수의 전체 기간을 약 7주간으로 잡음을 의미한다.

그리스인들과 유다인들 가운데서 이 축제는 7주간의 추수 기간을 의미하는 오순절로 불리워졌다. 이 축제는 모세오경 이외의 구약 성경에서는 단 한 번[22] 언급되어 있다.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에 대한 내용은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에 언급된다. 이 곡식단을 바치는 날은 안식일 바로 다음날이었는데, 이것을 첫째 날로 계산하여 축제는 50번째 날에 거행되었다. 따라서 이 축제일은 항상 주간의 같은 날, 즉 일요일이 된다.
6.2.2.2. 의식
흔드는 제물로 가져온 곡식단은 곡식에 처음 낫을 댄 것으로 보관됐다. 이 곡식단의 일부는 제단에 놓여졌고, 그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다. 숫양은 번제물로 바쳐졌으며 곡식단을 제물로 드리는 의식은 무교절 축제의 일부분이었다. 그 축제는 수확 계절이 끝난 것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축제이다. 관습은 성회와 같이 일상적인 노동을 금지했고,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하느님 앞에 모이기 위해 성전으로 나온다. 다른 축제의 제물들은 일일이 지정되었다. 그날의 중요한 제물은 새 밀로 만들어서 누룩을 넣어 구운 두 개의 빵 덩어리이다. 빵과 함께 두 마리 양도 요제로 바쳤다.

7주일 전에 곡식단이 바쳐진 것은 새로운 곡식을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상징했다. 이 희생 제의를 시작으로 하여 이스라엘인은 예배의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이 축제는 가난한 자, 나그네, 레위인들이 초청되어 공동 식사를 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기원후 70년 성전 파괴 이후로 칠칠절은 시나이 산에서의 율법 수여를 기념하는 축제로서만 거행되었다

[1] 기원전 587-539[2] 열왕기 하권 17, 29-34[3] 기원전 539-332[4] 느헤 8, 1-8[5] 기원전 332-63[6] 훗날 이들 가운데서 바리사이파가 나온다.[7] 기원전 63-기원후 70[8] 그리스 화폐로 2드라크마의 가치[9] 즈루빠벨 성전[10] 원로원, 산헤드린의 초기 형태[11] 민수 35, 25[12] 제사장의 몫[13] 희생 제물의 가슴 부분을 제단 앞에서 흔들어 바치는 방식[14] 함께[15] 자리[16] 대사제 1명, 사제 4명, 평민 대표 장로 24명, 율법 학자 22명[17] 어른만 해당[18] 상자, 법궤[19] 맥추절, 추수절[20]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21] 통과하다, 면제하다[22] 2역대 8, 13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