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균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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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균 尹承均 | Yun Seung-gyun | |
출생 | 1983년 1월 7일 ([age(1983-01-07)]세)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수유초 - 신일중 - 신일고 - 홍익대 |
신체 | 184cm, 80kg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2005년 신고선수 (두산) |
소속팀 | 두산 베어스 (2005~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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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두산 베어스 소속의 외야수로 빠른 발로 잠시 주목받았으나, 강간 사건을 일으키며 성범죄자로 전락했다.2. 선수 경력
2001년 드래프트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2차 12순위 지명을 받은 후 홍익대학교에 진학했으나, 빠른 발 외에는 이렇다 할 장점이 없어서 현대 유니콘스에서 지명권을 포기[1]했다. 결국 졸업 후 신고선수로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신고선수로 입단했음에도 김경문 감독의 눈에 들어 시즌 내내 1군에서 활동, 116경기에 출전했다. 이 때 KBO 리그가 126경기 체제였으니 10경기 빼고 전부 출전한 것. 하지만 거의 대주자로만 나섰기 때문에 많은 경기수에도 불구하고 단 99타석에 들어서는데 그쳤으며, 타격 성적도 .189/.232/.244 1홈런에 볼넷 단 5개를 고르는 동안 삼진은 34개를 허용하는 등 초라했다. 그러나 도루와 베이스러닝 실력만큼은 리그 정상급이라 39도루를 기록해 박용택(43도루)에 이어 리그 도루 2위를 기록했다. 박용택이 전경기 출장에 500타석 넘게 들어선 점을 감안하면 전문 대주자로 저정도 도루 숫자를 쌓은건 경이적인 수준.[2][3] 심지어 도루실패도 12개로 성공률도 76.4%를 기록해 나쁘지 않았다. 발만 보자면 리그 최고 수준이라는 표현에 하등 오류가 없었다.
김경문 감독이 윤승균을 1년차부터 꾸준히 기용한 것도 이 주력 때문이었다. 여기에 당시 두산 외야진은 정수근의 FA 이적, 장원진, 전상렬, 최경환 등 기존 주전 자원의 노쇠화, 강봉규, 김창희 등 백업 자원의 부진, 2004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된 윤재국과 임재철의 공백[4], 성장이 더딘 채 상무에 입대한 유재웅 등 온갖 악재가 산적한 상황[5]이었고, 김경문 감독 역시 잠재적으로 윤승균의 타격을 가다듬어 미래의 리드오프로 기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2005 시즌 종료 후 하술할 초대형 강간 사건을 일으키면서 법정에 서게 되었고, 2006 시즌 초반에 잠깐 기용되었으나 여론의 반발 속에 5월 8일에 임의탈퇴되었다. 그러나 법적조치와 별개로 리그 차원에서는 아무런 징계를 내리지 않았고, 1년을 딱 채운 후 2007년 5월에 임의탈퇴가 해제되었다. 중간에 잠시 1군에도 등록되는 등 구단의 비호 속에 지속적으로 복귀를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두산 베어스 팬들의 엄청난 비난[6]에 직면했고, 결국 2군에서만 뛰다가 2008년 11월 30일 보류선수 명단 공시일에 다시 한 번 임의탈퇴되었다.
한편 두산은 윤승균이 강간 사건을 일으킨 후 외야 보강을 위해 김창희와 강봉규를 보내고 삼성으로 보내고 강동우를 받아왔으나, 강동우는 두산에서 실패를 겪고 두 시즌만에 KIA로 트레이드 되어 팀을 떠났다. 여기에 김동주의 장기부상이라는 악재도 겹치며 2006년 두산은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으나, 혜성같이 나타난 이종욱이 첫 해부터 윤승균에게 기대하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더니 2007년에는 김현수와 민병헌이 주전으로 자리잡으며 순식간에 세대교체를 완성해 윤승균의 공백은 더더욱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7]
2010년 말 두산 베어스에서 임의탈퇴가 해제되자 2011년 초 KIA 타이거즈에 입단 테스트 요청을 하였고, KIA 2군에 합류하여 훈련하였다. 마찬가지로 발빠른 외야수 자원이 크게 부족했던 KIA의 사정상 입단 테스트에 합격하여 입단을 눈앞에 뒀으나, 윤승균의 과거를 알아낸 KIA 팬들의 영입 반대[8] 릴레이 끝에 구단에서도 입단 직전에 입단을 승인하지 않기로 하면서 결국 그의 선수 복귀는 완전히 좌절됐다.# ##
3. 사건 사고
3.1. 강간 사건
자세한 내용은 두산 베어스/사건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2005년 12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성을 집에 데려다 주겠다며 자신의 차에 태운 후 강간하는 초대형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윤승균 본인의 커리어는 완전히 결딴났다.
이후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성폭력 치료교육 40시간 이수의 처벌을 받았다.
4. 여담
- 이름이 비슷한 윤상균과 헷갈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윤상균이 2012년에 윤요섭으로 개명하며 그럴 일은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윤동균 전 감독과도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윤동균도 OB 감독 시절 항명사건으로 흑역사가 되긴 했지만 나름의 공도 있었고 현역 시절의 활약상이 있기 때문에 평판이 바닥 수준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강력범죄를 저지른 윤승균보다는 양반이다.
- 비슷한 케이스로 라미고 몽키스의 궈슈옌이라는 사례가 있다. 이 선수는 실업야구를 뛰다가 야구를 그만두고 일반인으로 살아가던 중 뒤늦게 야구에 대한 열정이 생겨서 28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드래프트에 지명돼서 첫 해에 신인왕을 수상한 사연을 가진 선수였다.[9] 그러나 데뷔 첫 해가 커리어하이였고 그 후에는 대타로 간간이 나오면서 추락하다가 2017년 시즌 직전에 술에 취해 여성을 강간하려다 잡히는 바람에[10] 체포되고 구단에서도 방출해 버렸다. 방출 후에는 리틀야구랑 소프트볼 팀에서 감독, 코치로 일하고 있다.
- 일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도우에 하야토 역시 비슷한 사례. 이 선수는 더 악질인 게 프로 입단 전에도 성범죄 전과가 있었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그걸 알면서도 충분히 반성했다고 생각해서 드래프트 지명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단의 기대가 무색하게 입단 4년차인 2012년에 성폭행을 무려 3번이나 저지르면서[11] 시즌 중 방출당하고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갔다. 여담으로 대졸+실업야구 2년+독립리그 3년을 거쳐 만 28세라는 매우 늦은 나이로 육성선수 입단을 하고 뒤늦게 1군까지 올라가는 등 대기만성의 커리어를 보내온 선수였으나 아마추어 시절부터 고치지 못한 성범죄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사족으로 이 선수는 독립리그 시절에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직행하려 했으나, 실업야구 시절의 성범죄 전과 때문에 미국 비자가 거절당해서 미국 직행에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 이걸 용서해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문제였던 것.
- 마구마구 2014에서는 가명으로 처리되어 있지만, 컴투스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윤승균 실명 그대로 나왔다.
- 강간이라는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두산에서 꾸준히 복귀를 시도한 점도 현재 관점에서는 다소 특이한 케이스인데, 상대적으로 매체의 발달이 덜했던 당시의 환경과 이러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했던 당대 인식이 겹쳐진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KBO에서 아예 징계를 안 내렸을 정도니. 물론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뿐이지 중대한 범죄라는 사실은 당연했고 소식을 접한 팬들은 당장 윤승균을 쫓아낼 것을 주장했었다. 같은 사건이 2020년대에 일어났다면 언론은 물론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빠르게 소식이 전파되었을 것이고, 구단 차원에서도 복귀 시도는커녕 두 번 다시 프로야구에 발을 들일 수 없도록 조치했을 것이다. 당장 2023년 현재 서준원이 미성년자 약취·유인 혐의로 입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상황을 파악한 롯데 자이언츠 구단에서는 곧바로 서준원을 퇴단 조치했고, 서준원이 고교시절 받은 최동원 상 수상도 취소되는 등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12]
- 팀에서 사고친 선배 이종민과 쌍으로 엮여 두산이 왜 범죄두 소리를 듣냐하면 열에 다섯명은 십중팔구 이종민 또는 윤승균을 말한다.
5. 관련 문서
[1] 즉, 윤승균의 지명권을 행사하던 현대가 저때까지도 지명이 유효했다.[2] 보통 대주자 전문 선수는 루상에 나갈 기회 자체가 적은데다가, 대주자를 기용하면 그만큼 상대 배터리의 견제도 심해지기 때문에 어지간히 도루를 잘 해도 20개 정도면 상당히 많이 하는 편이다. 강명구가 대표적인 사례.[3] 참고로 이 해에는 유독 대주자 선수들이 도루 랭킹 상위권에 이름을 많이 보였는데, 윤승균 바로 다음 등수가 당시 대주자/대수비로 경험을 쌓고 있던 LG 유망주 이대형(37개), 공동 8위에는 "2군의 이치로" 라고 불리던 삼성의 유망주 강명구(21개)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4] 둘 다 공소권 없음으로 처벌은 받지 않게 되었지만, 윤재국은 곧바로 사회복무요원으로 소집되었고 임재철 역시 복무를 오래 미룰 수는 없었다.[5] 유재웅은 팀 동료인 송원국과 출근도중 교통사고로 송원국은 큰 수술을 받으며 결국 은퇴를 했고 유재웅은 송원국 보다는 덜 했지만 그래도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거기다가 수술은 했지만 다친 부분이 말썽이였고 아마시절의 명성을 프로에 와서는 보여주지 못했다.[6] 오히려 팬들이 7개 구단 팬들에게 까이는 신세가 되었다.[7] 특히나 이종욱은 상무 야구단에서 아마시절 명성을 보여주듯이 병역이행과 야구 실력을 보여줬고 한때 베어스의 1번타자로 활약한 정수근 이후 제대로 된 리드오프로 자리매김 하였다. 원래 다른팀에서 지명받은 선수 였으나 구단에서 비슷한 유형의 선수가 있다면서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버림받고 친구 손시헌의 추천으로 오게 되었다. 정작 손시헌은 이종욱과 1년 함께 뛰고 본인도 병역 압박으로 상무에 갔다가 제대 후 복귀했다. 김현수는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에서 금메달을 따오며 병역특례까지 챙겼다. 덤으로 이종욱도 김현수랑 같이 뽑혔지만 당시 대표팀 중에서 유일한 군필자 신분이였다. 민병헌은 2007 시즌 이후 뜬금없이 주전에서 멀어졌다가 2010 시즌이 끝나고 경찰 야구단으로 입대했지만, 그동안 정수빈의 등장과 함께 임재철을 비롯한 다른 야수들이 주전으로 잘 활약하면서 큰 공백은 없었고 민병헌은 전역 후 리그 정상급 외야수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8] 한동안 네이버 순위 검색어 1순위가 윤승균이 였던적이 있었다.[9] 동생 궈용웨이도 같은 팀에 있었다. 일반적인 대졸 야구선수의 커리를 타고 형보다 3년 일찍 프로에 진출했으며 이 선수는 2023년 전력외통고를 받았으나 신생팀 타이강에 입단하며 2024년 현재도 현역이다.[10] 강간은 아니고 강간미수+주거침입이었다.[11] 거기다가 피해자 중에는 여고생도 1명 있었다.[12] 물론 이는 서준원이 범죄를 저지른 대상이 성인이 아닌 미성년자인 점, 서준원이 경찰 조사를 받은 사실을 수 개월 간 구단에 알리지 않고 은폐하다가 입건이 되고 나서야 알린 점 등 추가적인 이유도 있긴 했지만, 이러한 요인이 없었다 하더라도 윤승균이 사건을 일으켰을 당시의 반응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이 이어졌을 것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