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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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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전 의학
2.1. 동양의 고전 의학
2.1.1. 동양 의학의 부활 운동
2.2. 서양의 고전 의학
3. 근대 의학
3.1. 근대 의학의 태동
3.1.1. 프랑스 혁명 이론
3.1.1.1. 이데올로그 철학3.1.1.2. 프랑스 혁명전쟁3.1.1.3. 1794년 프랑스 의회의 새로운 의학의 근본원리 제정
3.1.2. 푸코(Michel Foucault) 이론
3.2. 주요 사건
3.2.1. 하비의 혈액순환론3.2.2. 소독법의 발명3.2.3. 병원성 세균의 발견3.2.4. 항생제의 발명3.2.5. 백신의 발명
4. 현대 의학
4.1. 근거중심의학4.2. 분과별 전문화
4.2.1. 전문의 제도의 역사4.2.2. 한국의 전문의 제도4.2.3. 전문의 제도의 부작용
4.3. 현대 의학의 기원
5. 미래의 의학

1. 개요

의학사(醫學史)는 의학의 역사를 뜻하는 말로, 의학사를 연구하는 학문 영역은 의사학(醫史學)이라 한다.

2. 고전 의학

고전 의학(classical medicine)은 푸코의 연구에서 근대 이전의 의학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된 용어이다. 과학혁명 이전의 의학은 그 당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분석한 인체의 항상성을 당시 지역적, 사상적으로 통용되었던것들을 기반으로 하여 가설을 세운뒤 이러한 체계화된 가설들을 통해 의학 체계를 구축하여 질병치료와 건강증진에 대한 수단을 개발하고 개량해 나갔으나, 그 당시엔 해부학, 생리학병리학은 커녕 현상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인식조차도 아직 나오지도 않아 의학가설을 검증할 수단도 없었고, 만약 있었더라도 마취제, 소독약이 없어서 수술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한의학이 대표적인 예인데, 근대적인 생리학병리학적 지식이 없던 고대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에 인체의 활동 및 이상현상을 오행과 기 등의 개념을 이용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이런 체계화 과정을 통해 당시에 통용되었던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다루던 식자층이 주로 의술을 담당하게 되었고, 역으로 의술이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변호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국내의 경우에는 의술과 의술을 다루는 의사가 국가의 통제 범위 내로 편입되어 이를 후대에 전승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인체관은 권위자에 의한 자의적 해석을 허용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경전과 같은 권위를 부여받아 비판을 어렵게 하며 무엇보다도 교차 검증이 불가능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한 번 권위를 부여받은 의술이나 약제들에 대한 다른 해석을 거부하고 다른 관점에서의 연구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발전과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새로운 치료의 발견[1]을 더디게 하였고, 당시의 기술 부족과 맞물려 수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2.1. 동양의 고전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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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동양 의학은 단전, 기(氣)와 같이 도교 및 유교적 사상이 여럿 섞인 양상으로 발생하였다. 고대 서양 의학 연구의 대부분이 임상 의사들이 아닌 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듯, 동양 전통 의학의 이론체계 역시 임상 의사들이 아닌 유학자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는데, 현대까지도 한의학의 가장 중요한 원전으로 여겨지는 황제내경이나 한국의 한의학과 중의학을 구분하는 핵심 이론인 사상의학이 비 임상가들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사실이 일례이다.

황제내경한나라 시절에 편찬된 의학서로 도처에 퍼져 있던 민간요법을 집대성한 것인데, 황실의 권위와 유교의 유행 아래 마치 <히포크라테스 전집>이나 갈레노스의 저서들과 같은 권위를 가져 고대 동양의 의학 발전을 저해해온 측면이 있다.

2.1.1. 동양 의학의 부활 운동

전통 서양 의학과 마찬가지로 동양 전통 의학은 핵심 이론이 형이상학적 신앙에 기반한다는 근본적 한계로 인해 실증성(positism)을 획득하지 못하고 과학 발전에서 도태되었으나, 한국과 중국에서는 전통 문화를 활성화한다는 취지 아래 한국의 '한(韓)의학', 중국의 '중의학'의 이름으로 부활해 관료들로부터 대체의학을 넘어선 주류 의학으로써의 역할을 기대받고 있다.

하지만 현대인의 관점으로 아무런 과학적 기반을 갖고 잊지 않는 고대 동양 의학을 오늘날의 의학과 동등한 준위로 평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국과 한국의 한의사들은 위와 같은 시대적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동양의학의 과학화' 사업에 돌입했으나, 세계화를 기점으로 동서양의 지역적 구분이 사라진 현 시점에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는 현대의학'과 '동양의학만의 차별적 정체성'이라는 모순적 개념을 양립시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모순적 현실 속에서 한의사들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다음의 두가지 중 하나이다.
* '새로운 시대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고전의학적 치료방법에 대한 알맹이 없는[2] 임상시험'을 반복하면서도, '현대의학과의 차별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참 전에 도태된 동양사상적 인체관 및 질병관과 이에 기반한 변증법을 고수한다.
* '새로운 시대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현대의 생리학 및 병리학적 지식에 기반한 진단을 도입하되, 치료에는 '현대의학과의 차별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전의학적 방법[3]만을 사용한다(소위 '양진한치').
첫 번째 입장은 근본적으로 현대과학의 기준을 만족할 수 없는 일수자천(一手遮天)에 불과함이 자명하고, 두 번째 입장에 대해서는 이미 현대의학적 지식에 기반한 최선의 현대의학적 치료가 존재함은 뒤로 하고,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치료를 환자에게 처방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남는다. 동양의학이 어디까지나 대체의학의 범주에 국한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으로,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된 최선의 치료법이 존재하는 한, 동양의학과 같은 효과와 안정성이 열등한 치료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동양 의학 부활 운동에 대해 비슷하면서도 다른 시각의 비판이 본 문서의 '현대 의학의 기원' 문단에 기술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오늘날 한의사들의 이러한 자기모순적 행태는 '현대' '전통' 의학의 "과학을 추구하지만 과학이 되어서는 안되는 모순적이면서도 불안한 정체성"에서 기원한다는 것이다.

2.2. 서양의 고전 의학

과학혁명 이전의 의학은 일종의 신앙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전통 서양 의학의 사상적 기반은 히포크라테스사체액설에 있었는데, 이는 엠페토클레스사원소설을 신체에 적용한 것으로, 이후에도 갈레노스 등에 의해 3정령설 등이 추가되어 발전하며 수천년간 고대 서양 의학계를 지배했다.

특히 갈레노스의 의학은 신앙과도 같은 위치에 이르러, 동양의 사상가들이 공자의 무오성에 빠져 문화 발달이 지연되었듯이 "갈레노스의 학문은 절대적"이라는 믿음 하에 서양 의학의 발전을 저해했다. 이러한 풍토는 1700년대까까지 이어졌으며, '사혈 치료'로 대표되는 유사 의료 행위가 완전히 중지된 것은 세계화와 과학혁명에 따른 현대의학이 자리잡은 190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3. 근대 의학

근대 의학은 내과외과의 통합, 사상학적 질병관의 폐기와 해부병리학적 임상의학의 도입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3.1. 근대 의학의 태동

의학의 근대성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최초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근대 임상의학이 프랑스에서 태동하게 된 과정은 연구 방법론에 따라 크게 두가지 학설로 갈린다. 첫 번째 학설은 근대 의학이 프랑스 혁명에 의해 발생하게 되었다는 이론이고, 두 번째 학설은 근대 의학이 프랑스 혁명과는 관계 없이 실증주의(positivism)의 기반 아래 의학적 담론의 구성 방식이 변화하며 발생하였다는 이론[4]이다.

3.1.1. 프랑스 혁명 이론

3.1.1.1. 이데올로그 철학
프랑스 의학 혁명은 카바니(Pierre J. G. Cabanis)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그(Ideologues)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몽펠리에 학교의 교수진 목록을 보면, 실재로 프랑스 혁명기 이데올로그 학파와 연관을 가졌던 의사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카바니의 철학에 따르면, 의학의 중심은 논리적으로 당연히 '관찰'이 되어야 했으며, "젊은 의사들에 대한 올바른 교육은 책을 통함이 아니라 병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카바니는 또한 엄격한 관찰에 근거하여 감각을 분석하는 방법을 옹호했으며, '분석'을 "정확한 관찰과 경험에 의해 수집된 사실에만 한정하여 그것들의 유사성과 상이성을 찾아내고, 단순한 결과로부터 연역을 해내며, 계산에 의해 보다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엄격한 방법"으로 정의했다.[5]
3.1.1.2. 프랑스 혁명전쟁
프랑스의 의학 혁명을 촉매한 두 가지 요소는 프랑스 혁명프랑스 혁명 전쟁이었다. 혁명 초기 프랑스 의학의 전통적 체계는 격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혁명 의회는 새로운 공중보건정책을 만들며 프랑스 병원의 전통적 재정 기반을 파괴했다. 공공복지위원회(public welfare committee)가 제창한 '새로운 정책'에는 의료의 중앙집중화, 새로운 국가기관 및 기구, 일관된 규율과 규제, 나은 의료를 위한 국가의 재정적 지원에 대한 기대가 함축되어 있었다. 프랑스 혁명에 동조했던 내과의사와 외과의사는 프랑스 의학의 민주화에 앞장섰다.

프랑스 혁명 전쟁은 검증되지 않은 고전 의학의 무용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해부학과 국소병리학의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792년부터 시작된 전쟁으로 인해 의료의 수요가 증가하자 기존의 종교화된 의학적 가르침이 사실상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는 지난 수천년에 걸쳐 분리되어왔던 내과학외과학의 재결합을 촉발했다. 내과의사[6]들은 기존의 사색적 의학이론을 버리고 해부학국소병리학에 기반한 외과적 접근법을 받아드려야만 했으며, 부검의 일반화와 함께 염증, 종양, 궤양과 같은 국소적 병변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전쟁을 통해 병원은 이제 임종 환자의 치유를 위한 장소에 그치지 않고, 처치, 치료, 교육에 걸친 모든 의료의 중심 기구로 인식되게 되며, 국가적 차원의 병원중심 의료가 도입되게 되었다.
3.1.1.3. 1794년 프랑스 의회의 새로운 의학의 근본원리 제정
1794년 11월 27일 프랑스 의회는 푸르크로와(Fourcroy) 보고서를 채택했다. 핵심만 발췌하자면, 다음과 같다.
"Ecole de Sante에서 진료는 의학이론과 하나가 될 것이다."
"적게 읽고 많이 보는 것, 그리고 실제로 많이 해보는 것은 위원회가 제안한 새로운 교수법의 기본이 될 것이다.치료를 실제로 해보는 것, 병상 옆에서 관찰하는 것 등 지금껏 행해지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교육의 주요 부분이 될 것이다.[7]"
"내과학과 외과학은 같은 학문의 두 가지 분야이다. 그것들을 따로 공부한다는 것은 정신착란적 상상을 위해 이론을 포기하거나 맹목적인 일상을 위해 실천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 둘을 다시 연합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은 그 둘이 서로를 가르쳐 그 진보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후 파리 학교, 몽펠리에 학교, 슈트라부르 학교의 교과목에 관한 자료를 보면, 1795년 이후 의학 교육에서 내과학과 외과학을 모두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슈트라스부르와 같이 전통적인 의학을 함께 가르치는 학교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실제적 의학에 더 비중을 두는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8]

3.1.2. 푸코(Michel Foucault) 이론

푸코에 의하면 근대 의학과 의학 혁명 이전의 고전 의학과 구별되는 점은 질병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시작된다. 근대 의학은 고전 의학과 달리 '3차적 공간화(tertiary spatialization)'의 관점으로 질병을 바라본다는 사실에서 구분된다.

'1차적 공간화'에서 질병은 특수적 사례가 아니라 '이상적인 시간 순서'의 측면에서 이해되며, 하나의 질병은 다른 질병과의 유추를 통해 이해된다. 이러한 두 차원에서 질병의 발생원인과 인과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2차적 공간화'에서 질병은 원인이 되는 국소 부위와 연관성을 갖지만, 그 병리학적 실체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의사는 각 질병에 어떠한 특질(quality)가 존재하는지만을 가지고 진단할 뿐, 그러한 특질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3차적 공간화는 한 사회가 질병을 다루는 사회적 구조와 기술을 포함한다. 푸코는 3차적 공간화가 "사회 안에서 질병의 경계가 생기고, 질병이 의학적 투자의 대상이 되며, 지역에 따라 의학적 배치에 차별이 생겨 의학적 혜택을 더 많이 받는 지역과 계층으로 사회가 구분"되는 것이라 했다.

3차적 공간화의 핵심 사례는 프랑스 혁명기 전염병에 대처하는 의학계의 새로운 방법론이었는데, 당시 '새로운 의학'은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해 역학조사를 실시하고, 병을 원인에 따라 분류하는 등 질병의 일관적 모습을 찾으려 했다. 푸코는 의학적 경험과 담론의 변화가 이루어진 근본적인 개혁의 특이점은 1803년의 국민 의회에 의한 의료조직 재편이라고 보았다.

3.2. 주요 사건

3.2.1. 하비의 혈액순환론

혈액순환론은 영국의사 윌리엄 하비(Wiliam Harvey, 1578-1657)에 의해 제창된 것으로, 1628년 출판된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9]에서 처음 주장한 것이다. 혈액순환론의 의의는 이가 근대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최초의 의학 연구였다는 것에 있다. 하비의 기존의 이론을 가정하고 수반되는 결과가 타당하지 않다는 모순을 이끌어냄을 통해 반증했고, 새로운 이론에 대한 가설을 세운 뒤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관찰을 통해 이 가설을 증명했다. 가설-연역 모형(hypothetico-deductive model)에 따른 연구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하비는 심장에서 피가 생성되어 말단에서 사라진다는 갈레노스의 혈액파도설이 옳다면 심장에서는 매일 1회 구축량(stroke volume)과 하루동안 심장이 뛰는 횟수의 곱에 해당하는 피가 새로 생성돼야 하며, 그 양은 1800L에 달한다는 사실을 연역해냈다. 당연히 사람이 매일 이 정도 질량의 식사를 할 수는 없으므로 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비는 심장에 혈류 방향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판막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혈액은 심장에서 말초로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말초에서 심장으로 순환하기도 한다'는 가설을 생각해내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구상해냈다.

파일:하비의 결찰사 실험.png

개중 가장 유명한 것은 결찰사(ligature)를 이용한 실험으로, 하비는 팔뚝에 실을 묶어 혈관이 잘 드러나게 한 뒤, 정맥을 따라 판막을 전후로 피가 어떻게 흐르는지를 살펴보았다. 즉, 팔뚝 위쪽에서 판막을 거쳐 손목방향으로 정맥을 훑어 내리면 판막 아래쪽으로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반대로 손목 쪽에서 판막을 거쳐 팔뚝 위로 피를 훑어가면 피가 잘 흐른다. 이는 신체 말단의 피가 판막을 통해 심장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이다. 하비는 다른 동물의 심장과 혈관도 조사해 혈액이 순환하는 증거를 수집했다.

하지만 하비의 주장은 갈레노스의 이론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고전 의학계의 탄압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그의 스승이었든 파브리키우스마저 함께 하비를 비난했다. 당대 학자들이 하비의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하비가 동맥과 정맥이 이어지는 모세혈관의 존재를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모세혈관은 하비의 사후 30년이 지나 말피기에 의해 발견됐다.

하비의 혈액순환론이 완전한 사실인 것은 아니다. 체순환과 폐순환으로 나뉘어지는 인체의 혈류역동과는 달리 하비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우주론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체순환만을 기술했을 뿐 폐순환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하비는 심장을 혈액을 흐르게만 하는 장기가 아니라 생명력의 근원에 해당한다고도 보아, 당시 의학 지식의 한계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2.2. 소독법의 발명

의학 혁명 이전까지의 병원은 오늘날과 같은 통합적인 의료기관이 아닌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치유만을 담당하는 기관에 가까웠는데, 감염은 이러한 결과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다. 19세기 병원은 감염의 온상이었고, 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의 사망률은 가택에서 치료받는 환자에 비해 3-4배 가량 높았다. 당시 의사들은 손이나 수술 도구를 잘 씻지 않았고, 수술실의 위생상태 역시 처참했다. 당시 외과의사들은 피와 오염물로 범벅이 된 수술 도구를 오히려 자신의 경험과 실력의 증표로 여겼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아직 병원성 세균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당대 지식의 한계 때문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의사들은 '독기'라는 부식성 물질 입자가 공기 중의 유독성 증기를 타고 전해지며 질병이 퍼진다고 믿고 있었다.

헝가리산부인과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 1918-1865)는 비엔나 종합병원의 분만 클리닉에서 남자 의대생들이 산모를 돌보는 클리닉이 산파들이 산모를 돌보는 클리닉에 비해 훨씬 높은 사망률을 보이는 것을 보고 "해부실에 있던 의사들이 사체에서 나온 입자를 분만실로 옮겼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당시 이 문제에 대한 의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은 남자 의대생들이 산파에 비해 산모를 단순히 더 거칠게 다루기 때문에 산욕열이 증가했다는 것이었으나, 제멜바이스는 이에 납득하지 않았다.

제멜바이스는 병원에 염소 처리된 석회수를 담은 대야를 설치했으며, 해부실에 있다 분만실로 가는 의사들에게 산모를 돌보기 전 소독액을 사용해 손을 씻게 하였다. 그러나 1847년 1000명 당 98.4명에 달했던 사망률이 1년 뒤 1000명 당 12.7건으로 급감했다. 제멜바이스의 주장은 비록 당시 학계에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세균 이론이 확립된 이후 소독법의 선구자로써 재조명받게 되었다.

조지프 리스터(Joseph Jackson Lister, 1786-1869)는 외과 수술에 소독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의사로, 파스퇴르가 발표한 포도주의 발효 및 부패에 관한 논문을 보고 수술 후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상처부위와 수술장을 소독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현미경을 이용해 염화아연(ZnCl2), 황화합물 및 석탄산(페놀, C6H5OH)에 살균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고, 그는 석탄산을 사용해 1865년 경골(tibia) 골절로 내원한 한 소년을 절단 없이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

1867년 리스터는 '외과 치료의 무균적 수술법'[10]이라는 논문을 통해 1864-1866년 시행된 일반적인 사지절단술의 사망률이 무려 45%에 달했던 반면, 1865-1867년 자신에 의해 시행된 무균술의 사망률은 15%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소독의 시대를 개막했다.

3.2.3. 병원성 세균의 발견

3.2.4. 항생제의 발명

3.2.5. 백신의 발명

4. 현대 의학

현대의학은 20세기 말 급격하게 진행된 과학기술 발전과 정보 혁명을 통한 세계화를 기반으로 발달한 의학이다. 20세기 말부터 분자생물학, 유전학, 면역학 등의 의학적 지식이 전례없는 속도로 확장되고, 이러한 과학기술 발전은 PCR, ELISA, 컴퓨터단층촬영, 자기공명영상, 표적 치료제와 같은 새로운 의학기술의 도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20세기 초반까지 시행되던 비과학적 치료법은 대부분 사장되었으며, 수많은 질병의 병태생리가 새로이 발견되고 근거중심의학이 도입되며 이전의 의학과는 완전히 다른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의 의학은 사실상 20세기 이후에 새로이 발명된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외에도 의료의 목적이 단순한 평균 수명의 증가가 아닌 삶의 질과 건강 불평등 해소로 이행되고 '맞춤 의료'로 알려진 정밀 의학 개념이 도입되는 등의 근본적 변화 또한 동반되었다.

4.1. 근거중심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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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의학은 근거중심의학의 도입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은 1992년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교의 임상역학자인 고든 기얏(Gordon Guyatt) 등에 의해 처음 명명된 것으로, 이전까지의 진단 및 치료가 단편적 임상 경험이나 병인론에 근거한 추론에 따라 결정되었다면, 근거중심의학에서 모든 판단은 임상실험을 바탕으로 과학적 근거 위에서 결정된다. 근거중심의학에서는 질병에 대한 병리학적 연구 결과보다 임상에 직접 이용될 수 있는 연구, 특히 무작위 대조 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이나 메타 분석(meta-analysis)의 결과를 중요시한다.

기얏의 1992년 논문에 따르면, 근거중심의학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11]
Conscientious explicit and judicious use of current best evidence in making decision about care of individual patients
개별 환자의 진료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현재 최선의 증거를 양심적으로 명시적이고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

근거중심 의학의 패러다임은 기존 임상 의학의 패러다임과 비교할 때 많은 점에서 대조적이다. 근거중심 의학을 옹호하는 일부 학자는 근거중심 의학의 패러다임이 기존 임상 의학의 패러다임을 대신할 것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으며[12], 임상 경험과 질병에 대한 병리학적 지식은 여전히 의사가 임상 판단을 내리는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제도적 차원에서도 모든 신약이나 술기는 임상실험에 앞서 해당 치료가 질병을 어떠한 매커니즘으로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반드시 제출해야만 하며, 이러한 절차를 만족하지 못한 임상실험은 임상가들에게 충분한 신뢰성을 주지 못한다.

2000년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중재 중 신뢰할 만한 임상시험 근거를 갖춘 중재는 평균 76%(중앙값=78%)에 달하며, 무작위대조시험에 의해 증명된 중재 역시 평균 37.02%(중앙값=38%)이나 된다고 한다.[13] 지난 10년에 걸쳐 시행된 RCT의 수는 드라마틱하게 증가했으며, 이는 머지않아 근거중심의학이 현대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완전히 가져올 것이라는 데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14]

4.2. 분과별 전문화

4.2.1. 전문의 제도의 역사

19세기 후반 의학 지식의 분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의사들은 의과대학의 교육만으로는 전문 지식을 완전히 습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럽을 시작으로 의과대학 졸업생을 병원에 상주(resident)시켜 졸업 후에도 경험을 쌓는 전공의(residency, 레지던시) 제도가 관행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오늘날 '레지던트'의 어원이 바로 이것으로, 병원 차원에서 전공의 제도를 공식적으로 표방한 것은 1889년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이 시작이다. 오늘날 전공의 과정이 전문의 자격 취득을 위한 수련 과정으로 인식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전문의 제도보다 전공의 제도가 먼저 만들어졌으며, 1917년 미국에서 전문의 제도가 시작되기 전까지 전공의는 특정 분야에 관한 전문 교육보다는 병원이 자율적으로 의학 전반에 관한 경험을 쌓게 해 주는 시스템에 가까웠다.

전문의 자격 제도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17년 미국안과 의사들이 최초의 전문의협회(specialty board)를 구성하면서부터이다. 당시 미국의 안과 전문의협회는 전문의시험을 통해 전문의자격(specialty certification)을 부여하기 시작했으며, 안과 전문의를 위한 '수련지침'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미국 전문과목 협회(american board of medical specialities)가 설립되어 5개의 전문과목에 대한 전문의 교육과 전문의 시험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1933년까지 만들어진 전문 과목은 안과, 이인후과(otolayrngology), 산부인과, 피부과, 소아과였으며, 이후 매해 2-3개의 전문의 과정이 추가로 개설되며 1991년에 이르러서는 24개의 주요전문과목이 운영되게 되었다. 전문의 제도가 민간의 관행에서 벗어나 사회제도화된 것은 1965년 연방정부가 메디케어를 도입하게 되면서부터로, 이후 연방정부는 미국의 전공의 과정에 재정을 지원하게 되었다.

4.2.2. 한국의 전문의 제도

한국의 전문의 제도는 1930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처음 시행된 것으로 보이며, 1951년 9월에 이르러서는 국민의료법에 의해 전문과목 표방 허가제가 시행되며 전문의제도가 법제화되어 시행되게 된다. 초기에는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비뇨기과, 정신과, 정형외과, 방사선과의 10개 진료과로 시작했으며, 1962년 국민의료법 개정과 함께 외과에서 신경외과흉부외과가 분리되고 마취과병리과가 신설되게 되었다. 1963년에는 병리과가 해부병리과(현 병리과)와 임상병리과(현 진단검사의학과)로 분리되고 예방의학과가 신설되었다. 1964년에는 피부비뇨기과가 피부과비뇨기과로 분리되었으며, 1967년에 결핵과, 1975년에 성형외과, 1982년에 재활의학과가 신설되고 신경정신과가 정신과신경과로, 방사선과가 진단방사선과(현 영상의학과)와 치료방사선과(현 방사선종양학과)로 분리되었다. 이후에도 1986년에 가정의학과, 1995년에 응급의학과, 핵의학과가 신설되고 산업의학과(현 직업환경의학과)가 예방의학과에서 분리되며 현재 총 26개의 전문과목이 운영되고 있다.

4.2.3. 전문의 제도의 부작용

현대에 이르러 의학이 과도하게 전문화되며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되고 일차의료가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특히 한국에서 대두되고 있는데, 전문의제도 시행 후 오늘날 전체 의사의 73%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게 되며 일차의료를 담당할 의사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OECD 국가들에서 전문의의 비율은 평균 64% 가량으로, 공공의료가 발달한 국가일수록 그 비율이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15] 가정의학과응급의학과는 '일차의료 전문의' 과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신설된 전문 과목이다.

4.3. 현대 의학의 기원

현대 의학 뿌리는 동양과 서양의 전통의학 중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현대 의과대학에서 가르치는 의학 지식의 절대 다수는 생리학병리학의 급격한 발전에 따라 지난 100년 이내에 새로 발견되고 정립된 것으로, 관용어나 대학 문화 등의 부수적 요소를 제외하면 전통 서양의학 및 전통 한의학과 이론은 물론 임상적 처방법에도 연관성이 거의 없다.

이때문에 오늘날 의학계는 현대 의학과 동양의 대체의학(한의학, 중의학 등)을 지역적으로 구분하고 이원화시키려 하는 시도에 부정적이다. 현대 의학은 사실상 지역적 경계가 허물어진 현대에 정립된 신생학문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현대의학을 '서양의학'이라는 지역적 프레임에 가두어 '양의'와 '한의'로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생물학에 동서양의 구분이 없듯, 의학에도 양의와 한의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한국에서는 한의사들이 '한의학의 과학화'를 제창하며 전통 서양 의학의 '사체액설'에 대응하는 '도교 및 유교 철학 사상'을 임상 이론에서 배제하고 현대 생리학을 교육하려 하고 있으며, 한의학과 교육과정의 70% 가량을 기초 현대 의학 과목으로 대체하는 등 '전통' 한의학과 구분되는 '현대' 한의학을 재정의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지역적 이원성을 따질 수 없는 현대학문의 지평에서, '현대' '전통' 의학이라는 모순적 어휘의 의의를 억지로 찾으려다 보니 이러한 시도는 자연스레 현대의학적 진단 및 치료법의 차용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후술할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낳고 있다.

위와 같은 현대 한의학의 노선 변경은 한의사들에게 최소한의 의학 지식을 갖추게 함으로써 환자 안전에 조금이나마 도움될 수도 있겠으나, 적으로 의학과 한의학이 이원화되어있는 한국에서 동양의학의 원전에 근거하지 않은 현대의학적 치료 및 진단방법을 시행하는 것은 의사와의 직역 갈등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문제가 있다.[16] 더욱 현실적인 우려로는 현대의학 분야에 있어 엄연한 '비전공자'인 한의사로부터 현대 의학을 교육받은 신세대 한의사들이 과연 정확하고 온전한 지식을 갖출 수 있을지, 과학적 방법론을 체화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불완전한 현대 의학 교육이 환자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한중의 한의사들이 작금처럼 '현대 전통 의학'을 위시해 의사와 다름없는 진단과 치료를 좆으려 한다면, 이들은 당초의 불안한 정체성을 결국 완전히 잃어버리고 의사의 하위호환으로 전락하여 직역의 존재 의의 자체를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한의학계는 과학을 추구하지만 과학이 되어서는 안되는 모순적이면서도 허상적인 정체성을 사수하기 위해 '양진한치'와 같은 과학의 탈을 쓴 유사의료행위를 버젓이 자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가장 성숙하게 해결한 사례는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의학과와 한의학 교육이 이원화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한의사들은 의사이면서 한방과를 전공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동서양의 구분 없이 전통 의학이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비과학적 한방의료행위가 아닌, 한방에서 유래하였지만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는 치료법을 처방한다. 자세한 내용은 의료일원화 문서를 참조하자.

5. 미래의 의학

여러 과학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들이 의학에 접목되기 때문에, 의학의 발전은 지속가능한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진화생물학의 발전은 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는데, 지적 한계(Frontier)에서의 시행착오와 실수를 복기해보면 상당부분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의학 연구자들이 고려하지 않은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실수를 바로잡고 진화생물학적 패러다임을 적극 도입하여 인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새로운 길을 도모하는 것이 미래 의학이 갈 길이며, 현재 걷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1] 한의학의 경우 대표적으로 외과적 시술이 있다. 사실 동양에도 외과적 시술이란 발상 자체는 화타수술 관련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적어도 중세 이전부터 존재하긴 했지만, 치료에 앞서 형이상학적 논리가 우선시되기에 '왕의 몸에는 칼을 댈 수 없다.' 라는 이유로 죽어간 왕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2] 생리학, 병리학적 근거가 없는[3] 임상실험을 통한 효과의 증명 여부와는 관련 없이[4] 푸코의 학설[5] Williams, EA. The Physical and the Moral: Anthropology, Physiology, and Philosophical Medicine in France, 1750-185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6] 이전까지 의학(physiology)는 '내과의사(physician)'의 학문으로 여겨졌으며, 외과의(surgeon)는 의사와는 완전히 다른 범주의 직업으로 간주되었다.[7] 앞서 설명한 카바니, 피넬, 코르비사르 등이 주창한 임상적 접근법과 일맥상통한다.[8] Ackerknecht EH. Medicine at the Paris Hospital, 1794-1848.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isty Press, 1967[9] Exercitatio Anat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 영어: An Anatomical Exercise on the Motion of the Heart and Blood in Living Beings[10] Antiseptic Principle of the Practice of Surgery[11] 해당 정의는 2002년 같은 저자의 논문에서 수정되었다.[12] Haynes RB What kind of evidence is it that evidence-based medicine advocates want health care providers and consumers to pay attention to? BMC Health Serv Res 2002 2 3-9
Sehon SR Stanley DE A philosophical analysis of the evidence-based medicine debate BMC Health Serv Res 2003 21 3-14
Bribiesca LB Evidence-based medicine a new paradigm? Arch Med Res 1999 30 77-79
[13] 수혈, 심정지 환자에 대한 처치 등과 같이 많은 중재는 윤리적으로 RCT가 아예 불가능하므로 더 낮은 수준의 연구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14] Imrie R, Ramey DW. The evidence for evidence-based medicine. Complement Ther Med. 2000 Jun;8(2):123-6. doi: 10.1054/ctim.2000.0370. PMID: 10859606.[15] 아일랜드(56.1%), 캐나다(47.4%) 등[16] 원칙적으로 한의사들의 비한방 의료행위는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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