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 |
발생일 | 1970년 3월 31일 |
유형 | 하이재킹 |
발생 위치 | 일본 상공 |
탑승인원 | 승객: 122명[1] |
승무원: 7명 | |
생존자 | 탑승객 129명 전원 생존 |
기종 | B727-89 |
항공사 | 일본항공 |
기체 등록번호 | JA8315 |
출발지 | 하네다 국제공항 |
도착지 | 후쿠오카 공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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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건 당시의 대한뉴스 영상 |
사건 당시의 뉴스 영상 |
납치 10개월 전, 후쿠오카 공항에서 찍힌 사진.(해당 기체는 1966년에 일본항공에 인도된 기체였으며 등록 번호는 JA8315. 1972년까지 일본항공이 운용하다가 도아국내항공(1988년 일본에어시스템으로 사명 변경)에 매각하여 1976년 해외로 매각했다. 2019년 기준으로 하네다 발 후쿠오카 행은 JL303~335편이다.) |
2. 과정
2.1. 공중 납치 실행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 33분경 타미야 타카마로(田宮高磨) 등 일본 공산주의 동맹 적군파(赤軍派) 요원 9명이 도쿄발 후쿠오카행 일본항공 351편 요도호(기체 등록번호: JA8315)를 공중 납치했다. 당시 극좌 조직인 적군파는 납치 사건을 벌이기 전 경찰서 습격사건 등으로 일본 정부의 수사를 받으며 조직이 와해되는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요도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등 129명이 타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일본도와 권총, 폭탄 등의 무기를 들고 승객들을 창가로 몰아세운 뒤 로프로 포박해 기장을 위협하여 처음에는 쿠바의 아바나로 갈 것을 요구했지만 애초에 후쿠오카행으로 계획되었던 연료량과 중-단거리 비행을 위해 설계된 보잉 727의 항속거리 문제로 인해 일단 이타즈케 공항에 착륙했다. 이후 북한의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2.2. 이타즈케 공항으로
비행기에서 풀려나는 인질들 |
범인들의 요구에 기장은 "이 비행기는 국내선이라 북한까지 갈 연료가 없다"고 범인들을 설득했고[2] 연료의 보충을 위해 오전 8시 58분경 이타즈케 공항(현 후쿠오카 공항)에 비행기를 주기시켰다. 납치범들은 연료 보급과 평양으로 가는 지도를 요구했다. 일본 경찰은 범인들이 국외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위대를 보내 활주로를 막는 등의 공작을 펼쳤지만 오히려 범인들을 더욱 자극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장은 범인들을 설득한 끝에 여성, 노인, 어린이, 환자를 포함한 인질 23명을 풀어주고 다시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하며 이항했다. 문제는 그들이 받은 것은 제대로 된 비행로가 있는 지도가 아니라 사회과 부도보다도 부실한 지도였다는 점이다.[3]
대한해협을 지나던 중 범인들은 승객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읽고 싶으면 빌려주겠다."고 얘기하였는데 그 책들은 적군파의 기관지 '적군(赤軍)', 레닌 전집, 김일성 전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이었으나 승객들 중 책을 빌린 사람은 후술할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뿐이었다고 한다.
2.3. 김포국제공항 도착
김포국제공항에 주기 중인 요도 호를 감시 중인 한국군 |
요도호는 실제로 삼팔선은 넘었지만 휴전선과 삼팔선은 완벽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비행기는 아직 대한민국 영공에 있었다.[4] 하지만 삼팔선을 넘자 북한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기장은 영어로 "여기는 JAL351편"이라 신호를 보냈으나 응답을 들을 수 없었다. 곧 "여기는 평양 진입 관제"라는 수신이 들어와 지시대로 남쪽으로 회항하였는데 이것은 범인들을 속이기 위하여 한국 측에서 기지를 쓴 것이었다.[5] 채희석 관제사는 자신이 평양 관제사라고 연기[6]하면서 비행기를 서해 한가운데로 유인한 후 방향 구분이 안 되는 상태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망명을 원하면서 정작 한국어조차 전혀 모르던 범인들은 아무 의심을 가지지 않았고 인천 앞바다를 거쳐 3월 31일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비상 착륙했다. 범인들은 그들이 착륙한 곳이 평양이 아님을 알아챈 후 승무원과 승객을 인질로 잡고 북한까지 안전한 비행 보장을 요구했다.
당시 적군파들의 목적은 북한의 독재 체제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일본을 공산혁명하기 위한 배후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북한을 자신들의 군사 기지로 만들어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북한을 뒤집어엎어서 자기네 땅으로 만든다는 게 아니라 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발족하면서 민주 기지론을 내세웠듯이 일본에서 혁명을 하기 위하여 북한을 전진 기지로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계획은 매우 비현실적이었으며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이들의 범행 선언에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
이들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한 후에도 한참 동안 속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매우 철저한 위장을 했기 때문이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북한 인민군 복장도 준비해서 입혔으며 김포공항의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올렸다. 게다가 '환영 평양 도착' 같은 플래카드까지 걸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적군파 대원들이 북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의 원인에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먼저 간단한 한국어도 못 하는 그들이 한국 측 요원에게 어느 나라 말로 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설령 요원과 일본어 혹은 영어로 대화했다면 요원 측에서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라 잘 못 알아들은 척 얼버무리면 저런 해프닝은 간단하게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후술되지만 테러범들은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 했으며 그래서 결국 일본어로 교섭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포공항에 주기 중이던 미국 항공사 노스웨스트 항공의 민항기를 보고 알아차렸다거나[7] 흑인인 미군 병사를 보고 의심했다든가 하는 의견도 있다.[8] '긴 닛세이의 커다란 사진을 가지고 와봐라' 라는 요구에 북한과 적대관계인 한국엔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위조 공작이라는 걸 알아챘다는 말도 있다.[9]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적군파 한 명이 자신 근처에 있던 인민군으로 위장한 한국군에게 영어로 "이곳이 서울이냐?" 라고 질문했는데 한국군이 "YES!" 라면서 맞다고 대답하자 눈치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군 병사들은 북한군 군복을 입고 당시 북한군 제식소총이었던 PPSh-41을 지참하는 등의 만반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설령 사실이라도, 군대 특유의 보안의식 때문에 그냥 말을 하지 말라고 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때 공항 관계자들은 "여러분이 갑자기 오는 바람에 환영 준비를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등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시 3월 31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공항측은 미리 연락을 받고 공항 내에서 태극기나 UN기 등을 모두 치우고 KAL기들도 대피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적군파 그룹에서 공항 건물에 있는 환송객들을 보고 의심해 김일성의 사진과 인공기를 가져오라고 요구했다고... 이 때 한국 측에서는 15명의 꽃다발을 든 여인들을 섭외할 정도로 신경썼으나 범인들은 "비행기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날 8시 30분여부터는 평양으로 속이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서울임을 인정한 뒤 협상에 나섰는데 이때 샌드위치 등을 기내에 반입하려고 했으나 범인들의 강경한 태도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범인들이 인질을 살해하는 등 최악의 상황으로 진행될 경우 한국 군/경 측에서는 특전사 및 전투경찰, 헌병부대를 요도호에 투입해 진압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전문적인 대테러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이런 항공기 인질극에 대한 준비와 대응 매뉴얼조차 없던 때라서 만약 무작정 투입됐다면 범인들뿐 아니라 다수의 인질들도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수 있다. 한국의 전문 대테러 부대인 특전사 707특임대[10]나 경찰특공대는 1980년대에 창설되었다. 707특임대 이전에도 특전사에 606부대[11]와 제27특공 부대[12]가 있었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1970년은 이들 부대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데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대테러 부대라는 개념조차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현대 특수부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SAS도 IRA와 교전을 벌이면서 막 대테러 전술을 연구하기 시작할 때로, 최고의 군사 선진국인 미국에서조차도 전문 대테러 부대는 아직 없었다. 요도호 사건으로부터 2년 뒤인 1972년에 뮌헨 올림픽 참사를 겪은 뒤에야 전문 대테러 부대의 필요성을 깨닫고 세계 각국에서 부랴부랴 대테러 전술 개발 및 부대 창설에 나섰다.
밀폐된 기내에 수면가스를 주입해 납치범들을 무력화해 제압하는 방안도 계획했지만 승객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역시 무산되었다.
2.4. 교섭
한국 당국은 범인들과 영어로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범인들은 영어조차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성립되지 않아 결국 일본어로 교섭을 시도하였다. 범인들은 다시 바로 평양으로 떠날 것을 요구했는데 멈춘 엔진을 재가동시키기 위해선 보조 시동기가 필요했지만 한국 측에선 보급을 거부하여[13] 그대로 서울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나온 범인들이었으나 곧 교섭에 응하여 식사 등을 넣어 주었다.31일 저녁 일본항공 특별기가 야마무라 신지로(山村新治郎, 1933~1992) 운수성 정무차관 등 일본 정부 관계자와 일본항공 직원을 태우고 도쿄 하네다 공항을 이륙하여 1일 새벽 서울에 도착했다. 이어 1일 오후 하시모토 도미사부로(橋本 登美三郎, 1901~1990) 운수성 장관 및 가네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1909~1997) 주한특명전권대사가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정래혁 국방부 장관, 백선엽 교통부 장관, 박경원 내무부 장관이 협상에 참여했다.
사흘에 걸친 협상 끝에 범인들은 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을 인질로 맞교환했다. 79시간 만인 4월 3일 오후 6시 5분 범인 9명과 조종사 3명, 그리고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 등 13명이 탑승한 요도호는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1시간 반 후 북한 미림 비행장에 도착했고 범인들은 북한에 망명하였다.
3. 평양 도착
오후 7시 20분경 요도호는 평양의 미림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미 해가 진 후였는데 미림 비행장에 유도등 등 야간 항공등화시설이 없어서 요도호 기장이 예전 2차 세계대전 당시 야간 특공 항공대 경험을 살려 육안으로 야간 착륙을 시도했다고 한다.착륙 후 북한 측은 무기 등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여 범인들은 무기들을 놓고 비행기를 내렸는데 범인들이 소지한 일본도, 권총, 폭탄 등은 전부 장난감이었다는 것이 이후에 알려졌다.[14]
요도호에 타고 있던 범인 9명, 승무원 3명, 인질인 야마무라 차관 총 13명은 북한 당국에 의해 신병이 확보되었다.
한편 서울 김포공항에서 해방된 99명의 승객들은 일본항공 특별기 DC-8-62(JA8040)[15]를 타고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NHK가 오후 7시 반에 내보낸 특별 방송 '요도호 승객들 돌아오다'는 40%가 넘는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애초에 북한은 "인도주의적 차원에 따라 범인들을 뺀 승무원과 기체는 돌려보내겠다."고 했으나 요도호가 도착하자 곧 말을 바꾸어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승무원과 기체의 빠른 송환은 보장할 수 없다."고 발표하여 일본 측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결국 한 발 물러나 꼬리를 내린 북한은 다시 "인도주의적 관점에 따라 승무원과 기체의 송환을 행하겠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다음 날 범인들을 제외하고 조종사 3명과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요도호를 타고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한국 정부는 수년 전 만경봉호를 통해 북한으로 수많은 재일 한국인을 북송시킨 것에 대해 일본 정부를 마음놓고 깔 수 있게 되었고[16] 일본은 한국과의 외교 교섭에서 커다란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인질을 구출한 곳은 한국 김포공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테러범들에 대한 한국 측의 대처는 당시 일본의 큰 호감을 샀다. 일제 패망 이후 일본은 대학생들에게 '지도에서 한국을 찾아보라'고 하니 대다수가 위치를 몰라 애먹을 정도로 아예 한국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나마 6.25 전쟁으로 특수를 누린 일본이기에 그 정도는 인식할 뿐이었다. 때문에 테러범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일본에서는 "휴전 중인 나라에다 군사정변도 있었다니 그냥 다 쏴 죽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한국은 간단한 방법으로 테러범을 속이려 들었고 그것이 먹히지 않았을 때도 무차별 무력진압이라는 카드를 꺼내지도 않았다. 결국 일본 측이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승무원을 제외한 인질 전원이 한국에서 풀려나게 되어 이것이 일본 측의 호감을 샀다. 이 점은 이후 한일간 외교 교섭에서도 한국 측에 유리하게 작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요도호 탑승자 중 한 명이었던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는 1911년생으로 일본에서는 요도호 사건 관련 방송에 당시 피랍된 기내의 상황 설명에 증언자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17년 7월 18일 만 105세로 사망했다. # 성인병 전문가로 일본에서는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책도 많이 쓰고 감투도 많이 썼다. 84세였던 1995년에 자신이 원장으로 있던 성누가병원[17]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당시 개방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사건 당시 인질로 북한에 갔던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국민들을 위해 북한의 인질로 간 희생자라는 이미지를 얻었고 당연히 일본으로 귀국하자마자 요도호 기장과 함께 엄청난 국민영웅 수준의 환대를 받으면서 평생 까임방지권을 얻게 되었으며 이른바 '인질 대신(身代わり大臣)'으로 국민들에게 큰 인지도를 얻었다.
물론 고위직이라 목숨까지 희생될 가능성은 적었지만 미수교국인 북한과의 협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적어도 수 개월간 인질 생활을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에 영구 억류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처음 야마무라 차관과 조종사들을 북한에 억류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여튼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이후 딱 한 차례의 선거를 빼면 당선되는 등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했으며 농림수산성 대신(장관), 현재의 국토교통성의 교통부에 해당하는 운수성 대신도 지내고 중의원 당선도 되고 예산위원까지 하며 잘 나가다가 1992년 외교사절로 재방북을 하루 앞둔 때 정신질환을 앓았던 차녀의 칼에 찔려 사망했는데 아버지의 일을 잘 도와 오히려 그녀를 후계자로 삼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기 때문에 정신이상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신이상에 의한 살인이라 책임능력 부족을 이유로 기소는 되지 않았으나 둘째 딸은 1996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야마무라 가문의 정치가로서의 생명은 끊기고 말았지만 그의 비서였던 지츠카와 유키오(実川 幸夫, 1943년 10월 14일~)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의지를 이어받았다.
4. 북한으로 망명한 적군파 조직원
이들은 북한 정권으로부터 '세계혁명을 추진하는 동지'로 떠받들여지며 대대적으로 환영받았지만 그들이 주장하던 혁명기지고 뭐고 씨알이 먹힐리가 없고(...) 도리어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의 관리하에 놓여 평양시내 모 처에 수용돼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및 주체사상에 대한 강도높은 사상교육을 받았다고 지닌 1997년 탈북한 황장엽이 안기부 조사에서 진술했다.
이후 이들은 북한 공민증을 받아 외화벌이 상점에서 근무하는 등 일상생활을 영위하였으나 일각에서는 일본인 납치, 남파공작원 양성에 동원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사이에 다미야 다카마로, 오카모토 다케시, 요시다 긴타로 등 3명이 사망하고[18] 당시 16세였던 시바타 야스히로는 1988년 일본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가 유일하게 체포돼 형기를 마치고 석방됐으며 다나카 요시미는 2000년 6월 태국에서 달러 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았다.
일본 공안당국은 북한에는 나머지 4명의 범인과 일본인 처[19], 20여 명의 자식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들이 납치범(테러리스트)이므로 인도해 줄 것을 북한에 꾸준히 요구해 왔으나 북한 측은 이를 거부해 왔지만 2001년부터 북한은 요도호 납치범 가족의 귀국을 허용하여 몇 차례 귀국이 이루어졌으며 2004년 7월 북한은 요도호 문제는 일본 정부 측과 이전의 적군파 구성원들 사이의 문제라며 납치범을 일본으로 보낼 수 있다고 밝혔다.
다음 명단은 실제 납치에 가담한 테러범들로 생존한 이들은 2024년 현재까지 북한 내에 생존중이거나 일본에서 수배중이다. (2024년 3월 한국인 관광객이 촬영한 수배 벽보)
사망이 확인된 자들은 †
북한 내에서 사망한 자들은 ☆
일본에서 사망한 자들은 #
사망이 불분명한 자는 ?
볼드체로 표기된 자들은 현재 수배중
- 타미야 타카마로†☆
- 코니시 타카히로 (小西隆裕) - 현재도 북한 거주 중.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타미야 사후 멤버들의 리더격인 듯하다. 도쿄대학 의학부 중퇴.
- 오카모토 타케시?
- 타나카 요시미 (田中義三)# - 북한 당국의 지령을 받고 태국 등에서 슈퍼노트 유통 범죄에 가담하다가 2000년 일본에 송환되어 수감 중이던 2007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메이지대학 졸업.
- 우오모토 (아베) 키미히로 (魚本 (安部) 公博) - 현재도 북한 거주 중. 일본인들을 북한으로 납치하는 북한 공작원 활동에도 관여하여 인터폴에서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칸사이대학 제적.
- 와카바야시 모리아키 (若林盛亮) - 북한 거주 중이다. 2010년 일본의 어느 사이트에 'ポン太さん'[20]이라는 드러머의 추모글을 올렸다. 부인은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인 납북 사건의 용의자로 국제 지명수배 중이다. 도시샤대학 졸업.
- 아카기 시로 (赤木志郎) - 북한 거주 중. 현재 인터폴에서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오사카시립대학 졸업.
- 요시다 킨타로 (吉田金太郎)†☆ - 직업배치 후 노동자로 일하다가 1985년에 병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지만 상세한 것은 불명이다.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고졸로 엘리트인 다른 멤버들과 달리 유일한 노동자 출신이다.
- 시바타 야스히로 (柴田泰弘)# - 사건 당시 16세(고2)로 나이가 제일 어린 멤버였으며[21] 1985년 타미야 타카마로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돈과 사람을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고 극비 귀국해 타인으로 변장하여 공작원 활동을 펼쳤으나 1985년 위조여권 혐의로 체포되었다. 복역 후 오사카에서 살았지만 2011년에 사망했다. 자녀들은 한참 후인 2004년경 일본으로 귀국했다. 재판에서 직업이 혁명가라고 즉답했으며 그의 위조여권은 납북자의 명의였다.
북한에서 낳은 범인들의 자녀들은 전부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4.1. 적군파 주범들의 근황
해당 트위터 계정
트위터 프로필 사진에서 공개된 모습.
적군파 범인들이 북한에서 트위터를 개설한 사실이 알려졌는데 북한에서 인터넷에 활발히 접속할 정도로 매우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트위터 글에 의하면 일본의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도 자유롭게 듣고 보고 있으며 미국 등의 외국 영화와 매체도 자유로이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직접 업로드가 아니라 그들의 지원자라는 인물에게 메일로 올릴 글을 보내고 다른 이들의 답글이나 질문도 메일을 통해 송신하는 방식으로 밝혀졌다. 지원자 시이노 레이닌(椎野礼仁)[22]는 2015년에 리더인 코니시 타카히로가 NHK 뉴스를 통해 아랍의 민주화 운동에 트위터가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을 보고 '트위터를 해 보고 싶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트위터 프로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970年赤軍派によるyodo号ハイジャック。「我々は明日のジョーである!」と北朝鮮に渡って40数年、体もyobo yobo[23]、拉致容疑でyobo yobo、でもyodoはyodo! 何でも聞いて&言ってください、何でも受け入れ&答えます。拉致疑惑と帰国、朝鮮での生活あれこれ、日本のこと、何でもありでいきます
1970년 적군파에 의한 yodo호 하이잭.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라며 북한에 건너간 지 40주년, 몸도 yobo yobo, 납치 혐의로 yobo yobo, 하지만 yodo는 yodo! 뭐든지 묻고&얘기해 주세요. 무엇이든 받아들이고&대답하겠습니다. 납치의혹과 귀국, 북한에서의 생활 이것저것, 일본 얘기든 뭐든 가능합니다."]
....이런 어이없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트위터에는 생존한 요도호 멤버들과 국제지명수배된 그들의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올리고 있고 글 마지막 문단엔 작성자 본인의 이름을 써넣는다.1970년 적군파에 의한 yodo호 하이잭.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라며 북한에 건너간 지 40주년, 몸도 yobo yobo, 납치 혐의로 yobo yobo, 하지만 yodo는 yodo! 뭐든지 묻고&얘기해 주세요. 무엇이든 받아들이고&대답하겠습니다. 납치의혹과 귀국, 북한에서의 생활 이것저것, 일본 얘기든 뭐든 가능합니다."]
2016년 4월 15일자 트윗으로 '분명히 하이잭 사건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소중한 건 교훈이다. (중략) 하지만 지금이니까 말할 수 있어. '낙원' 따윈 모르지만 북한에 온 것은 정답이었다.'라는 글을 올려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당신들이 북한에서 골칫거리 취급 받는 건 알고 있나요? 목숨이 남았을 때 귀국하는 게 어떨까요"라는 일본인의 질문에 '북한에 민폐만 끼쳐 죄송할 따름이다. 한국과 일본에게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한 요도호 사건의 재평가를 하루라도 빨리 실현하기 위해 귀국하고 싶다'고 답하거나 "북한에선 의료와 교육이 우리 망명 외국인에게도 모두 무료라 감사하다", "매스컴은 20년 전 비참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정보만 계속 내보내고 있다"는 등 북한에서의 생활을 찬양하는 트윗을 올리면서 일본인들에게 각종 어그로를 끌었다.
'안락한 망명객으로 (북한에서) 평생 살 생각은 없으며 귀국하는 게 목표'라는 글을 보아 일본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하다. 일본의 반응은 "돌아오지 말라"며 매우 싸늘하다. 살고 있는 곳은 평양의 '일본인 마을'이라고 적혀 있으며 납북 일본인들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사실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는 별개로 그들이 후회한다고 해도 "여기 온 것은 실수였다"나 "북한의 대우는 엉망이다"라고 제대로 발언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사는 곳이 다름 아닌 북한이라서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목숨이 날아갈 테니 말이다. 아니면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처럼 북한 당국 입장에서는 자국에 자발적으로 의거월북한 적성국 인사들이기 때문에 귀중한 선전감인지라 실제로 제법 호의호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24]
여담으로 와카바야시는 2011년 김일성경기장에서 일본과 북한의 축구경기를 관람했는데 무심코 일본을 응원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예 스가 정권에 탈원전을 요구하기도 했다.
2022년 8월 29일 「우리로서는, 일정한 역할을 완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중략) 그만두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고 밝히면서 트위터 계정 사용을 종료했다.
5. 기타
- 이 사건 이후 일본의 항공법은 굉장히 까다롭게 변했다. 그 미국조차 31년이나 지난 9.11 테러 이후에야 일본만큼 항공법이 빡세졌다.
- 이 사건에서 관제사를 맡아 요도호의 김포공항 착륙 유도를 도왔던 사람으로 공군 제7항로보안단 소속 관제사 채희석(당시 28세) 씨가 있는데 별안간 100여명의 승객의 목숨을 떠안게 된 상황에서 평양과 김포공항의 주파수를 바꿔치기 해 삼팔선까지 건너갔던 비행기를 김포공항으로 돌이켜 착륙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마땅히 영웅 대접을 받을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한동안 채 씨의 활약상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정부에서 "요도호 착륙은 기장의 자의로 인한 착륙 때문이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대한민국의 개입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사건 이후에도 채 씨에게 요도호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경고한 데다 채 씨의 흔적을 아예 없애기 위해 군적에서도 지우고 업무에서도 배제시켜 결국 1년여 만에 스스로 전역하고 말았다.
- 채씨는 월간조선 2003년 7월호를 통해 사건에 대해 증언했고 방송에는 최초로 2021년 3월 25일에 방영된 SBS의 교양 프로그램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3회에도 출연했다. 특히 이날 방송분에서는 사고를 해결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지만 외면받아야 했던 채희석 씨를 강조했다.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나머지 2명인 비행기 조종사와 야마무라 차관은 영웅 대접을 받았던 반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채희석 관제사는 철저하게 감춰져야만 했으니... 채 씨가 요도호 사건을 가족에게 이야기한 것은 한참이 지난 63세가 되어서였다고 한다.
- GTO에서는 오키나와 수학여행 당시 오니즈카 에이키치가 아마쿠사 시로의 보물을 찾는답시고 학생들을 태우고 달린 어선의 이름이 요도호(よど号)다.[25](97화) 이 사건에 연루된 비행기 이름의 패러디인 듯. 어느 정도 뜻이 통하는 게 자기 보물 찾겠다고 학생들을 이 배에 태우고 무인도로 납치하듯 데려가서 거의 반강제로 노역을 시키는 터라... 아이자와 미야비를 두고 가짜 인질극을 벌일 때 테러 집단으로 오인(?)받아 포위되자 진짜 비행기 들고 북한으로 날라야 하나며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 풀 메탈 패닉의 만화판에서는 실제로 수학여행을 가는 주인공 사가라 소스케가 다니는 진다이 고등학교 학생들이 탄 비행기가 실제로 북한 정부의 사주를 받은 공작원 가우룽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당한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중국 연변의 '한카 자치주'로 변경되었지만.
- 요도호가 김포공항에 착륙할 때 동양방송이 범인과 관제탑 간 무전연락을 잡아내 방송했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8년 8월 12일 방영분의 익스트림 서프라이즈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
- 범인들은 평양에 가는 것만이 목적이었고 인질들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 빨리 풀어주었다 보니 하이재킹 사건 치고는 비판이 덜한 편이다. 사실 같은 적군파 출신자가 일으킨 여러 사건들에 비하면 굉장히 무난하게 끝난 것이기도 하다.
- 일본 방송에서 이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캐스팅이 굉장히 화려한데 일본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이 다수 출연했다. 나카무라 토오루[26]가 적군파 멤버로 등장하고 한국측 고위관료로는 정래혁, 국방부장관 역으로 일본 유학파로 일본어에 능통한 김응수가 출연했다.
-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성 정무차관이 비행기 내 승객들을 대신해 인질이 되면서 인명피해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었고 그 공로로 일본에서 영웅이 되었지만 실제 대테러 협상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대응이라고 한다. 유 퀴즈 온 더 블럭 100회 출연자인 협상 전문가 이종화 대표의 발언에 따르면 일단 영화 등에서 나오는 것과는 달리 경찰관이 대신 인질이 되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는 경찰이라는 무기를 얻게 되고 둘째로는 협상가가 합리적인 판단하기가 힘들어서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테러리스트 측에서 금전 등을 요구할 때도 해당 협상에 정부가 관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게 하는데 테러리스트들의 입장에서는 '정부가 직접 나섰다!'며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해 요구 조건이 무한대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일본의 코미디언 에가시라 2:50은 실제로 납치범들인 와카바야시, 아베와 만난 적이 있는데 1999년 북한을 여행할 때 납치범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가볍게 이야기했던 건데 진짜로 와서 굉장히 어색했다고... 에가시라가 튀르키예에서 벌였던 기행[27]을 이야기하자 그제서야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고 한다.[28] 범인들은 해외에서 일본인 여성들을 있는 대로 헌팅(ナンパ)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하는데 2002년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실토하자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29]
증언 영상(시청 주의: 에가시라가 영상 내내 상의를 벗고 있다)
[1] 납치범을 포함한 값이다.[2] 실제로는 북한까지도 갈 수 있는 연료가 충분했다. 기장이 납치범들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3] 사실 평양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4] 정황상 수복지구 상공에 체공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21년 3월 25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서는 요도호가 실제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 영공을 동에서 서로 통과하여 김포로 돌아온 것으로 설명하였다.[5] 김포관제소 측은 기존의 항로를 무시하고 북쪽을 향해 나아가는 항공기의 정체를 처음엔 이상하게 여겼지만 곧바로 일본 교통성으로부터 당일 발신이 와 납치된 여객기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6] 사실 적군파들이 후쿠오카 공항에서 이륙하자마자 미국을 통해 요도호의 북한 도착을 저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이에 박정희 정권에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최고의 권력을 지닌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요도호를 서울 김포공항에 유도하는 작전 중에는 서울을 평양이라고 지칭해도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안전보장을 하였다. 당시에는 반공주의가 강했기 때문에 북한 관련해서 잘못 입 놀렸다가 간첩으로 몰리던 시대라서 이런 특권을 줬는데도 "실패하면 넌 끝장이다" 에 가까운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7]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미리 연락을 받고 해당 기체는 안 보이는 곳으로 대피했다고 한다.[8]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교신 내용을 보면 '착륙하면서 미군 10여명을 보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9] 그 당시의 한국에서는 김일성의 사진이나 영상, 음성 등은 전부 검열된 상태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노인층이 아니면 김일성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기내 교신에서 이들이 요구한 것은 김일성 사진, 인공기였고 추가로 3월 31일자 로동신문도 요구했다. 한국 측에서는 처음에 '이곳은 군사기지라 김일성 사진이 없는데 곧 가져다주겠다' 라고 말하는 기지를 발휘했다.[10] 사실 707도 처음 창설되었을 때는 특전 사령관의 친위대 목적이었지 대테러 임무가 부여된 건 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 시기의 일이다. 대테러부대 자체도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로 인해 독일에서 겨우 창단됐을 정도로 대테러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11] 1975년 창설된 대테러 및 청와대 경호 부대다.[12] 1979년에 창설된 청와대 경호 부대다.[13] 비행기는 꼬리 부분에 있는 APU라는 보조엔진에게 전력과 압축공기를 받아야 주 엔진에 시동을 걸 수 있는데 이 APU를 켜려면 외부에서 전기를 공급해 줘야 한다. 즉, 비행기가 있는 김포공항, 그 김포공항을 통제하는 한국 정부가 거부하면 비행기는 절대로 이륙할 수 없는 것이다.[14] 이때 만약 대한민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했다면 사건이 해결됐을 거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애초에 테러리스트가 장난감 무기를 들고 있을 거라는 걸 예상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으며 당시 일본 정부가 무력 진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말마따나 무력진압하려고 했으면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했을 때 진압했을 것이다.[15] 안타깝게도 1972년 11월 28일 코펜하겐 국제공항을 출발해 도쿄 국제공항으로 가는 446편으로 운항 중 중간 경유지였던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이륙하다가 실속하여 추락해 탑승객 76명 중 62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내 파괴되었다.[16] 북한이 자기가 한 말도 번복하는 추태를 보임으로써 북송이 인도주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17] 일본어로는 '세이로카'(聖路加)로 표기한다.[18] 항간에는 이들 중 몇몇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기도 하는데 특시 오카모토 타케시의 경우 북한에 적응을 못 해서 나중에는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져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19] 이들은 전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들이었으며 북한까지 오게 된 경위는 불분명했다. 다만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등과 연계하여 일본 동해 연안에서 북한 공작원에 납치당한 일본인은 해마다 있었고 김일성 사후 북한 측의 일본 공작 활동은 급감했다.[20] 일본의 유명 스튜디오 뮤지션. # 추모글이 올라온 2010년에서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었으며 다양한 뮤지션들과 작업했고 2021년에 사망했다. 와카바야시 모리아키는 60년대 후반 '하다카노 라리즈(裸のラリーズ)'라는 사이키델릭 록, 노이즈 록 밴드의 베이스 주자였고 교토 출신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21] 고등학생 시절 주체연구동호회에 소속되었다.[22] 대학생 시절 신좌파 운동을 펼쳤으며 평양에 자주 드나들면서 요도호 멤버들과 자주 교류하는 편집자다.[23] よぼよぼ. 일본어로 늙어서 쇠약해진 모양, 비틀비틀 등을 뜻한다.[24] 북한은 자발적으로 북한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데 특히 주요 적대국 출신인 미국인과 일본인이면 더할 나위없는 최고의 선전감이다. 때문에 드레스녹에게 죽을 때까지 편안한 삶을 보장해 주었다.[25] 한국판에서는 파도호로 오역되었다.[26]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공동주연으로 유명하다.[27] 나체인 채로 개그를 하다가 체포된 적이 있다...[28] 이 기행을 혁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참고로 어색했던 이유 중 하나는 감시인원이 붙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던 것도 있다.[29] 다만 요도호 납치범의 납북 관여 여부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에가시라는 이들이 납치했다고 봤고 실제로 아베와 와카바야시는 이 혐의로 인터폴 수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