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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의 제트 민항기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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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아메리칸 항공, 707-121, N708PA[1] 최초로 생산된 보잉 707[2] |
707-320의 조종석[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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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8년 7월[4]에 만들어진 팬 아메리칸 항공의 보잉 707 홍보영상 |
보잉에서 개발한 중, 장거리용 협동체 4발 엔진 여객기.[5] 보잉이 민항기 업계의 큰손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 기종이다.
보잉 707은 제트 엔진의 고출력을 살려 속도 향상은 물론, 기체 크기도 키워 총 100명이 넘는 승객들을 태울 수 있어 당시까지 존재했던 여객기들을 압도하는 수송력을 확립했고, 당시 프로펠러 여객기의 약 2배에 달하는 현대 여객기의 제트 속도도 확립시킨 것은 물론, 엔진들을 주익 아래의 포드에 고정시킨 것과 동시에 '캐빈 창'이라는 좌석을 어떠한 간격으로 배치해도 창 없는 좌석이 생기지 않도록 작게 다수 늘어놓은 형식을 도입하며 현대식 제트기의 시조격이 되는 기체로 평가받는다.
'보잉 707'이라는 이름은 보잉에서 제트 엔진 수송기에 700번대 형식번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6] 보잉의 영업부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앞이 7이니 뒤에도 7을 붙이자'는 생각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보잉 여객기의 7x7 네이밍 전통을 만들었다.
1957년부터 1979년까지 모든 707 버전을 합쳐 총 1,010기가 생산되었다.[7]
E-3 센트리 조기경보기, C-135 스트라토리프터(수송기), KC-135 스트라토탱커(공중급유기) 등의 다양한 군용버젼 및 VC-137(VIP용, 과거 에어포스원) 등으로 생산되어 현재도 여러 국가에서 현역으로 운용 중이다.
2. 제원
보잉 707 | ||||||
형식 | 367-80 | 707-120 | 707-120B | 707-320 | 707-320B | 720 |
운항승무원 | 3 | 4 | ||||
최대좌석수 | - | 179 | 189 | 219 | 149 | |
길이 | 39.97 m | 44.04 m | 44.22 m | 46.61 m | 41.25 m | |
폭 | 39.88 m | 39.90 m | 43.41 m | 44.42 m | 39.90 m | |
높이 | 11.59 m | 11.79 m | 12.93 m | 11.79 m | 12.93 m | 12.65 m |
동체폭 | 3.76 m | |||||
최대연료탑재량 | 47,700 L | 51,020 L[8] | 65,600 L | 80,000 L | 90,300 L | 60,900 L |
자체중량 | 41,870 kg | 49,760 kg | 55,580 kg | 54,432 kg | 66,406 kg | 46,785 kg |
최대이륙중량 | 86,360 | 112,037 kg | 116,570 kg | 142,881 kg | 151,320 kg | 100,800 kg |
항속거리 | 5,683 km | 6,940 km | 8,704 km | 9,110 km | 10,650 km[9] | 7,040 km |
순항속도 | 마하 0.72 882km/h | 마하 0.75 919km/h | 마하 0.79 968km/h | 마하 0.72 882km/h | 마하 0.82 1,005km/h | |
엔진 x4 | P&W JT3C (10,000 lb) | P&W JT3C-6 (11,200 lb)[10] | P&W JT3D-1 (17,000 lb) | P&W JT4A-3 (15,800 lb) | P&W JT3D-3 (18,000 lb) JT3D-7 (19,000 lb) | P&W JT3C-7 (12,000 lb) |
3. 역사
보잉 367-80의 롤아웃 현장 |
707은 1954년 제트 엔진 버전의 군용수송기 겸 민항기의 프로토타입으로 제안된 367-80을 모태로 하고 있다. 사실 그 이전까지 보잉은 군용기 시장에서 굵직한 계약을 따내면서 수익을 올리고 있었으나 민항기 시장에서는 별 재미를 못 보던 상황이었고, 707의 프로토타입인 367-80 역시 미국 공군의 발주를 노리고 제작한 기체였다. 요컨대 민항기 시장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밑밥을 한 번 뿌려본 것으로 먼저 노린 것은 군용 항공기였고, 결과적으로 367-80의 가치를 인정한 공군에서 C-135 스트라토리프터를 발주하면서 1차적인 목표는 달성하였다. 이후 파생형으로 나온 KC-135가 대박을 터뜨리게 되는데, 이건 조금 미래의 이야기이다. 여하튼 이 시제기인 367-80은 당시 기준으로만 1600만 달러(2022년 기준으로 1억 6100만 달러)의 거액을 들여 2년간의 개발을 거친 끝에 1954년 5월 14일에 롤아웃되었고, 동년 7월 15일에 첫 비행을 했다.
그래도 민항기 시장에서는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원형기 367-80의 동체가 3,350mm로 너무 좁다는 점이 문제였다. 고작해야 좌석을 5개(2-3)밖에 배열 못 하는 보잉의 원형기를 쓸 바에야 6개까지 좌석배열이 가능한 더글라스사의 여객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보잉은 KC-135의 설계를 참고하여 좌석이 6개까지 배열 가능하도록 동체를 3,660mm로 넓히는 선택을 했는데, 더글라스에서 DC-8을 내놓으면서 동체 크기를 3,730mm로 더 넓히자 보잉은 경쟁심이 생기며 3,760mm로 넓히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이렇게 양사의 자존심 싸움으로 동체가 점점 확장된 결과 개발 및 연구비용이 더 증가하였으나 여러 항공사에서 707을 쓸 만한 여객기로 인식하고 관심을 보이면서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DH-106 코멧을 발주했으나 여러 사고들 때문에 포기한 적이 있던 당대 최대 항공사 팬 아메리칸 항공은 제트기의 조기 도입을 원했기 때문에 이미 1955년 10월 13일에 보잉 707 20대를 주문하며 보잉 707의 런치 커스터머가 되었다.[11] 이후 보잉 707은 1957년 10월 28일에 롤아웃되었고, 동년 12월 20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12]
팬암은 보잉 707 도입 후 새로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 회사 약칭과(PAA->Pan Am) 회사 로고도 변경할 정도로 보잉 707에 온 힘을 기울였는데, 1958년 10월 26일에 뉴욕 아이들와일드 국제공항[13]에서 이륙한 팬 아메리칸 항공 소속의 N711PA[14]가 프랑스 파리 르부르제 공항에 착륙함으로써 팬암과 미국 항공사 최초의 제트 여객기 운용은 물론이고, 본격적인 제트 여객기 시대가 시작된다. 첫 비행에 탑승한 사람은 122명이었는데,[15] 이 승객들 중에는 당대의 유명 여배우 그리어 가슨이 있었다.
1958년 10월 26일, 뉴욕 아이들와일드 국제공항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N711PA |
1958년 10월 27일, 파리 르 부르제 공항에 주기한 N711PA |
극초기 운항 당시 보잉 707은 미국 항공사들만 썼는데, 팬암 다음으로 707을 운항한 항공사는 내셔널 항공[16]으로, 팬암에게서 임대받은 707로 1958년 12월 10일에 최초로 미국 국내선을 제트기로 운항했다.[17] 이후 아메리칸 항공(1959년 1월 25일), 트랜스 월드 항공(1959년 3월 20일), 컨티넨탈 항공(1959년 6월 8일)도 707을 운항하기 시작했는데, 유나이티드 항공이나 델타 항공처럼 DC-8만 주문한 항공사는 동년 9월까지도 제트기를 운항하지 못해 국내선 항공편 시장 점유율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이후 호주의 항공사 콴타스의 요구에 따라 동체를 살짝 단축하여 비행 거리를 조금 늘린 707-138이 생산되었고, 콴타스는 이를 1959년 7월 29일에 시드니-나디-호놀룰루-샌프란시스코 국제선에 투입하며 비미국 항공사 중 최초로 보잉산 제트기 운항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959년 8월 26일에는 중간 급유지 경유 없이 대륙간 비행이 가능할 정도로 항속거리가 긴 707-320 기종의 여객 운항도 팬암의 런던-뉴욕 직항 노선으로 시작되어 707은 본격적으로 국제선 장거리용 여객기로 투입되기 시작하였다.
이 덕분에 당시까지 미국 국내 여행을 지배하던 철도 여행과 대양 횡단 항로를 지배하다시피 했던 대형 여객선은 여객수익이 극도로 악화되고, 선박 운항도 화물선 중심으로 변화하는 등 19세기부터 이어진 장거리 정기 여객선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18]
특히 팬 아메리칸 항공의 경우 707을 공격적으로 도입하여 국제선 노선에 마구 찍어바르는 기행을 보이면서 미국발 국제선을 사실상 독점했으며, 그 결과 민항기 제작 시장에서의 보잉과 항공여객 시장에서의 팬암의 성장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19]
한편 707이 너무 커서 활주로 길이가 짧은 중/소규모 공항에 취항시키기 힘들다는 불평이 들어오자[20] 1959년에는 707 초기 형식을 기준으로 탑승객 수도 줄이고 동체를 약간 개조하여 경량화시킨 보잉 720을 내놓았으나, 투자한 돈에 비해서는 잘 팔리지 않았다.[21] 하지만 이런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707은 아주 성공적인 기종이었고, 항공사에서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면서 꾸준히 생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들어설 무렵, 707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항공기 여행객들을 수용하기에 너무 작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잉 747을 시작으로 여러 광동체 여객기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707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1973년에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저소음+고연비 엔진이 선호되기 시작했으며, 1985년에 국제 소음 규정이 지정되면서 707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례로 팬암은 1981년 1월 3일에 모든 보잉 707을 퇴역시켰으며, 1983년 10월 30일에 트랜스 월드 항공의 여객용 707이 퇴역한 것을 끝으로 미국에서는 모든 707 여객기가 퇴역했고, 이후에도 707 여객기는 서서히 줄어들다가 1998년에 중동항공과 에어 짐바브웨가 마지막 707 여객기를 퇴역시킨 것을 끝으로 주요 항공사의 707 여객기 운용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707은 군소 항공사에서 화물기와 전용기 위주로 간간이 운용되었는데, 플래그 캐리어 중에서는 LAB 항공(2000)[22], 이집트 항공(2004)[23]과 수단 항공(2010)[24] 정도만이 2000년대에도 707을 운용했다.[25]
사하 항공, 707-3J9C, EP-SHU 마지막으로 여객 운항을 한 보잉 707[26]보잉 707의 마지막 여객 비행 당시에 촬영된 실제 사진이다.] |
마지막으로 707을 여객기로 운용한 항공사는 이란 공군 산하 국내선 항공사였던 사하 항공으로,[27] 기체 노후 문제로 운항 정지 판정을 받기 전까지 707-320C 여객기 3대가 2013년 4월 9일까지 운항 중이었다. 그후 2017년에 다시 운항을 재개하긴 했는데, 2019년 1월 14일[28]에 이 항공사의 보잉 707-320C 화물기[29]가 활주로를 이탈하여 16명의 승무원 중 항공기관사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즉사하며, 보잉 707의 민항기로서의 수명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오메가 에어, 707-368C, N707MQ 최후의 현역 보잉 707 2대 중 하나[30] |
2023년 현재 (군용기 버전을 제외하면) 보잉 707은 단 오메가 에어 소속 2대[31]만이 현역으로 남아있다.[32]
4. 특징
초반 생산분인 707-120이나 707-320은 최고속력이 무려 1,000km/h 였다. 기체 크기는 작은데 착륙 속도는 220km/h로 웬만한 광동체기와 비슷해서. 착륙 시 조종난을 줄이기 위해 707-120B/-320B에서는 최대속력을 973km/h로 하향조정했다.[33]707의 수직꼬리날개 위에는 다소 독특한 침 같은 것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데, 이는 고주파 단파 안테나이다. 이러한 외부 돌출 안테나는 보잉 747 클래식(100~300)까지 장착되다가 수직미익으로 들어가면서 사라졌다.
초기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한 707 형식들은 엔진 꽁무니에 연꽃 모양으로 구멍 숭숭 뚫린 물건이 달려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소음 경감장치 허쉬-킷(Hush-Kit)이라 불리는 소음감소 장비인데, 터보제트 엔진소음이 가히 귀가 나가 버릴 수준인지라 장착했다고 한다.
707의 설계가 워낙 성공적이었던 까닭에 707 이후에는 보잉 737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707의 설계가 상당 부분이 반영이 되었으며, 보잉 727과 보잉 757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707의 설계가 참고가 되었을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에 707 이후에 개발이 되는 많은 보잉 사의 여객기에 영향을 끼쳤다. 그 예로 보잉 727과 보잉 737의 기수 모양은 서로 비슷하다.
미 공군은 운용 중인 707 계열기의 부품확보를 위해 중고 707 매물을 사들인다고 하는데, 전술한 것처럼 민항기 시장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것과 달리 군용기 시장에선 군용 형제기종인 C-135와 함께 아직도 사용중이다. 1965년까지 생산되어 현역으로 운용되는 공중급유기 KC-135와, 1992년까지 생산된 조기경보기 E-3, E-6, E-8 J-STARS 그리고 각국 공군에서 707 민항기를 개조하여 만든 공중급유기[34] 등이 그 예이다.
707의 중단거리 국내선 수요는 720의 실패 이후 보잉 727과 보잉 737이 물려받았고, 중/장거리 국제선 수요는 보잉 747이 물려받았다.
5. 형식
707은 보잉의 모든 기종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정식 파생형 명칭에 BCC가 적용되는 기종이다. 따라서 본래는 타 기종들과 동일하게 707-100/200/300 이런 식으로 정식 명칭이 정해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보잉 전용 BCC인 20이 붙어서 707-120/220/320 이런 식이 된 것.5.1. 367-80
보잉, N70700 |
보잉 707와 C-135 스트라토리프터의 프로토타입으로, 영어로는 Dash 80라고도 불린다. 최초에는 P&W에서 제조한 JT3C 터보 제트 엔진을 탑재했지만 이후 개량을 통해 P&W JT3D 터보팬 엔진으로 환장했다. 현재는 스미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며, 여전히 비행이 가능한 상태라고 한다. 이게 다 보잉이 저지른 과잉 설계의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한민국 공군이 진행한 KC-X에 응찰하려는 오메가 항공이 한 때 말하길, 기골이 90년은 버틸 수 있다고 한다. 1954년 7월 15일에 초도 비행을 했다.
초도 비행과 후술할 기예에 가까운 비행 후에는 시애틀에 있는 보잉 본사에 보존되어 있었지만, 2003년 8월 27일에 워싱턴 DC로 최후의 비행을 마친 후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 별관에 보존되게 되었다.
여담으로 보잉 777-300ER과 함께 비행한 적이 있다. 영상
5.2. 707-120
팬 아메리칸 항공, N711PA 최초로 상업 운항을 한 보잉 707[35] |
367-80을 기반으로 크기를 키운 최초의 양산형 모델이자, 보잉의 모든 제트 여객기의 원형격인 기종이다. 1957년 12월 20일에 초도비행이 이루어졌으며, 1958년 10월 26일에 팬 아메리칸 항공에 의해 운항이 성사되었다.
다만 항속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대서양 횡단비행 시에는 급유를 위해 아일랜드의 섀넌 등에서 급유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으며, 결국 첫 운항 2년도 안 된 1960년 5월에 생산을 중단했다. 총 56대 생산.
5.2.1. 707-120B
아메리칸 항공, N7583A[36] |
-120형의 P&W JT3C 터보제트 엔진을 P&W JT3D 터보팬 엔진으로 개량한 형식. 1961년 3월에 아메리칸 항공이 운항을 시작했다. 72대 생산.
5.3. 707-138[37]
콴타스, VH-EBF[38] |
콴타스의 요구로 동체를 약 10피트(약 3.05m) 단축,[39] 항속거리를 늘린 형식. 1959년 7월 29일에 콴타스가 운항을 시작했다. 7대 생산.
그 중 하나인 VH-EBM[40]은 존 트라볼타가 가지고 있었지만, 2017년 5월에 호주의 쉘하버 공항에 기증했다.
5.3.1. 707-138B
콩고민주공화국 정부, 9Q-CLK[]2012년 11월 25일에 마이애미 국제공항에서 촬영되었다. 참고로 이 사진 촬영 당시 이 기체의 기령은 무려 53년이었다. 당연하게도 현재는 퇴역한 상태이다.] |
-138형의 P&W JT3C 터보제트 엔진을 P&W JT3D 터보팬 엔진으로 개량한 형식. 6대 생산.
5.4. 707-220
브래니프 항공, N7073[42] |
높고 더운 공항에서 운용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hot and high) P&W JT4A-3 터보제트 엔진으로 파워업한 형식. 1959년 12월 19일에 브래니프 항공이 운항을 시작했지만, 엔진을 교체하면서 연비가 심각하게 나빠져서 브래니프 항공을 빼고는 주문한 항공사가 전무했기 때문에, 제트기 역사상 가장 적게 생산된 기종 중 하나가 되었다. 5대 생산.[43]
5.5. 707-320
에어 프랑스, F-BHSN[44] |
본격적인 장거리 여객기이자 707의 최종 형식. 동체를 더욱 확장하고 엔진을 교체, 최대 이륙중량이 증가하여 항속거리를 연장시킨 형식이다. 늘어난 항속거리를 과시하기 위해 '대륙간 비행'이라는 의미의 '인터컨티넨탈(Intercontinental)'이라는 별칭이 부여되었다. 초도비행은 1958년 1월 11일에 이루어졌으며, 첫 취항은 1959년 8월 26일에 팬 아메리칸 항공에 의해 성사되었다.[45] 덤으로 이 기종은 후술하듯 아시아 최초의 제트 여객기이기도 한다. 69대 생산.
참고로 한반도에 최초로 착륙한 제트 여객기가 바로 이 기종이다. 1960년 3월 30일[46] 팬 아메리칸 항공 소속 보잉 707-320[47]이 김포국제공항에 착륙한 후 초청받은 참관객 108명을 태운 채로 50분 동안 서울-부산을 비행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당시 기사
5.5.1. 707-320B
노스웨스트 항공, N380US[48] |
707-320형의 P&W JT4A 터보제트 엔진을 P&W JT3D 터보팬 엔진으로 개량한 형식. 1962년 6월에 팬 아메리칸 항공에 의해 운항이 시작되었다. 174대 생산.
대한항공은 3대를 운영했었다.
5.5.2. 707-320C
대한항공, HL7406 |
320B형의 환장형(Convertible) 모델. 필요에 따라 여객용, 화물용으로 전환하여 사용 가능하다. 좌측 전방동체의 커다란 카고 도어가 특징. 1963년 6월에 팬 아메리칸 항공에 의해 운항이 시작되었다. 335대 생산.
팬암이 이 기체를 승객을 안 태우는 순수한 화물기로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이 기체는 세계 최초의 100% 순화물기라는 기록도 세우게 되었다.
대한항공은 7대를 운영했으며 대한항공이 유일하게 직도입한 보잉 707이자[49]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사고기인 HL7406이 이 기종이다.
2013년 4월까지 이란의 사하 항공에서 여객용으로 쓰였다.
5.6. 707-420
영국항공, G-ARRA[50] |
영국해외항공[51]의 요구로 자국산 RR 콘웨이 508 터보팬 엔진을 장착한 형식. 다만 실제로 운항을 시작한 항공사는 루프트한자로, 1960년 3월 17일에 운항을 시작했다. 37대 생산.
5.7. 720(707-020)
에어로아메리카[52], N736T[53] |
707을 베이스로 최대 이륙중량을 줄여, 작은 변두리 공항에도 용이하게 운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중/단거리 노선에 특화시킨 축소형.[54] 1959년 11월 23일에 초도비행을 했으며, 첫 취항은 1960년 7월 5일에 유나이티드 항공에 의해 성사되었다. 다만 전술했듯 판매량은 적었지만, 개발비가 낮아 수익성이 좋았다고 한다. 65대 생산. 대한항공은 2대를 운영했었다.[55]
5.7.1. 720B(707-020B)
중동항공, OD-AFN[56] |
707-020형의 P&W JT3C 터보제트 엔진을 P&W JT3D 터보팬 엔진으로 개량한 형식. 89대 생산.
5.7.2. 707-700
보잉, N707QT |
보잉 707에 당시 신형 엔진인 CFM56을 달고 나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신규 기체는 매리트가 없고, 원래 있던 기체에 장착하는 사업 또한 개발 중이었던 보잉 757을 팀킬할 수도 있다는 어른의 사정으로 취소되었다.
하지만 해당 엔진은 1980년대에 기령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KC-135A의 수명연장 프로그램에 의해서 장착되었다. 그 기체들은 지금의 KC-135R로 업그레이드된다.
여담으로 위 사진의 주인공인 N707QT는 기존의 JT3D로 환원된 후 모로코 정부를 거쳐 이스라엘 공군에서 2024년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6. 기타
- 최근까지만 해도 루프트한자 소속의 보잉 707[57]이 보존된 상태였다. 1960년 4월 24일에 인도된 기체로, 퇴역 후 한동안 정비 훈련용으로 쓰이다 1999년부터 함부르크 공항에서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지 보수 비용이 엄청났기 때문에 결국 2021년 6월 10일에 스크랩당했다.[스크랩영상] 2014년 9월에 찍은 사진
- 보잉 707을 일본에서 직접 운항해본 항공사는 전무하다.[59] 일본의 항공사들이 보잉 707을 구매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일본항공은 주로 DC-8과 CV-880을 투입해서 장거리, 단거리 포지션을 담당하였고, 전일본공수는 민항기 취항 초기 때부터 도입을 검토하다가 707보다 작은 보잉 727 구매를 결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60]
네덜란드 시장 광고 (한글자막) | INA 아카이브 영상 (한글자막) |
- 시트로엥이 약빨고 광고를 만들던 시절에 BX를 해당 기체 위에 매달고 비행한 적이 있었다. 해당 기체는 아일랜드 국적의 전세기로 프랑스 세르부르 모페르투스 공항에서 촬영을 진행하였다.
6.1. 대중 앞에서의 첫 비행
보잉 707의 배럴 롤[61] 비행 당시 실제 영상. 1:46~2:04 부분에 배럴 롤이 나온다. |
1955년 8월 6일에 보잉 707의 프로토타입인 367-80은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호수에 있는 수상기 경주장에서 열린 여름 축제서 대중들 앞에서의 첫 비행을 거쳤는데, 원래 이 비행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비행할 예정이었지만, 기행으로 유명했던 조종사 앨빈 "텍스" 존스턴[62]이 이 방침을 어기고 낮은 고도로 왕복비행하며[63] 많은 항공 관계자들을 포함한 25만 명의 에어쇼 관객들 앞에서 고속으로 배럴 롤을 2번이나 성공시켰다.
이 광경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이를 밑에서 지켜보던 보잉사 회장인 윌리엄 알렌(William Allen, 1900~1985)은 바로 다음 날에 존스턴을 자신의 사무실에 불러보내 혼낸 후 해고시키려 했지만, 존스턴이 비행기를 팔려고 그랬다.(I was selling airplanes.)는 말로 변명하고 그 뒤로 보잉의 매출이 30%나 늘었기 때문에 존스턴은 결국 별다른 처벌 없이 테스트 파일럿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64]
6.2. 아시아 최초의 제트 여객기
파키스탄 국제항공, N723PA 아시아 최초의 제트 여객기[65] |
1961년 7월 11~19일 아유브 칸 파키스탄 대통령의 방미 기록영상.[66] 조종석 밑에 N723PA라는 테일넘버가 보인다.[67] |
팬암은 1959년 10월 27일에 707-320인 N723PA를 인도받았는데, 이 기체는 1960년 2월 9일에 파키스탄 국제항공에 임대된 후 동년 3월 7일에 팬암 소속 조종사의 비행으로 카라치-런던 노선을 운항하며 파키스탄은 물론이고, 아시아에서의 제트기 운항을 시작했다. N723PA는 이 비행 이후 한동안 파키스탄 국제항공에서 날아다니다가[68][69] 1962년 12월 12일에 원 소유주였던 팬암으로 돌아왔고, 1967년경에 707-320C로 개수된 후 1970년 5월 24일에 야트 항공[70][71]에 넘겨진 것을 필두로 이후 여러 항공사들을 거쳐가다가 1981년 7월에 터키항공에 인도되어 운항한 것을 끝으로 1982~1983년경에 앙카라에서 스크랩되었다.
7. 참고 링크
8. 사건 사고
자세한 내용은 보잉 707/사건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9. 여담
아간다 에어 참사가 188명이 사망해서 보잉 707의 최악의 사고로 남지만 경쟁자인 DC-8은 나이지리아 항공 2120편 추락 사고를 겪으면서 약 1.4배 더 많은 사망자인 261명의 사망자[72]를 낸다.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모로코에 갈때 타고 간 항공기로 나온다.
10. 관련 문서
[1] 하지만 이후 착륙 중 산에 추락해 파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팬 아메리칸 항공 292편 추락 사고 문서 참고.[2] 보잉 707의 프로토타입은 보통 이 기체가 아니라 하술할 367-80으로 간주된다. 형제 기종인 C-135도 마찬가지다.[3] 해당 기체는 팬암 소속의 N714PA(707-321)로, 이 기체의 조종석은 코네티컷주의 뉴잉글랜드 항공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4] 후술할 정식 운항 시작으로부터 3개월 전이다.[5] 이 특성은 훗날 에어버스 A321neoXLR이 물려받았다. A321XLR이 쌍발기라는 것을 제외하면 항속거리부터 시작해서 협동체라는 특성까지 보잉 707과 A321XLR은 서로 닮았다.[6] 왜 700번대 형식번호를 부여했냐면, 300번대는 보잉 377 등 이전에 만든 프로펠러 항공기에 이미 쓰였으며, 400, 500, 600번대는 이미 미사일 및 기타 제품에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7] 다만 특수 변형된 군용 버전은 1991년까지 생산되었고, 미리 생산된 기체들은 1994년까지도 인도되었다고 한다.[8] 엔진 흡입구에 주입할 물 2,700 리터를 추가로 적재할 수 있다.[9] 우월한 항속거리로 출시 당시에는 '대륙간'이라는 뜻의 Intercontinental(인터콘티넨탈)이라는 별칭도 붙었었다. 이 별칭은 나중에 747-8의 여객형 모델에 정식으로 붙게된다.[10] 엔진 흡입구에 물을 뿌리면 13,500 파운드까지 출력이 늘어난다.[11] 참고로 팬암은 회사의 고문이었던 찰스 린드버그와 함께 보잉 707의 개발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팬암은 보잉 707의 개발이 실패로 끝날 것에 대비한 '보험' 격으로 DC-8 25대도 추가로 주문했다. 참고로 팬암이 '보험'을 든 이유는 보잉이 여객기 개발 경험이 적었고, 당시까지의 보잉산 여객기들의 이미지도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팬암은 이 당시 각 항공기 유형에 대한 '최초' 생산 라인 비행기를 운영하는 항공사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12] 이 기체는 이후 팬 아메리칸 항공에 N708PA로 인도되나, 1965년 9월 17일에 악천후 속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하다가 산에 충돌하여 30명이 전원 사망하는 팬 아메리칸 항공 292편 추락 사고와 함께 파괴되었다. 참고로 팬암에 처음으로 인도된 707인 N709PA는 1963년에 벼락을 맞고 파괴되었으며, 처음으로 여객 비행을 한 747인 N736PA는 항공 사상 최악의 참사로 파괴되었다.[13] 1963년 11월 22일에 암살당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1963년 12월 24일에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4] B707-121, Jet Clipper America. 팬 아메리칸 항공은 콜사인인 '클리퍼(Clipper)' 뒤에 기체의 애칭을 붙여주었다.[15] 1등석 승객 40명+일반석 승객 71명+승무원 11명[16] National Airlines, 1934년부터 1980년까지 플로리다 중심으로 운항한 미국의 국내선 항공사. 1980년 1월 7일에 국내선 경쟁력을 높이려 했던 팬암에 인수되었다.[17] 이 때문에 707을 자체적으로 운항한 비팬암 항공사는 후술할 아메리칸 항공이 최초이다.[18] 참고로 팬암은 아예 '보스턴 기준으로는 기차로 가는 필라델피아보다 제트기로 가는 파리가 더 가깝다'는 선전도 했다.[19] 정작 팬암은 이후 또 본인들이 개발에 관여하고 최초로 운항한 보잉 747을 운용할 때 항공기의 크기가 크면 탑승률도 증가할 것이라 믿고 방만 경영을 했다가 1991년에 파산하고 만다.[20] 참고로 오늘날에는 단거리용 기체로 취급받는 보잉 737의 최신형인 보잉 737 MAX 10과 보잉 707-120의 길이가 20cm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승객도 (좌석 간격을 좁혀가면서) 최대 230명이나 태울 수 있다. 물론 당시 기준으로는 대형 여객기였는데, 당장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DH-106 코멧의 최종형도 81명밖에 태우지 못하던 판이었다.[21] '기체 크기와 항속거리를 줄인다'는 설계 개념 자체는 극악의 비효율성으로 악명높은 CV-880/990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720은 베스트셀러를 기본 바탕으로 살짝 손만 봐준 물건인지라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적게 들어서 수익성은 좋았다고 한다.[22] Lloyd Aéreo Boliviano, 1925~2010년(운항은 2008년 중단)까지 존속한 볼리비아의 옛 플래그 캐리어. 2000년까지 707을 화물기로 운용했다.[23] 1970년 1월에 이집트항공[73]에 인도된 SU-APD(707-366C)를 화물기로 운용했고, 이후 이 기체는 2004년 5월에 트라이스타 에어(Tristar Air)라는 이집트의 화물 항공사 소유로 쓰이다가 퇴역했다. 다만 이 기체는 2000년 이후 이집트항공에서의 운항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2000년부터 보관 상태로 접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24] 1974년 6월 17일에 수단 항공에 인도된 콤비기 ST-AFA(707-3J8C)를 1990년대 후반에 화물기로 전환하고는 그대로 운용하다가 2010년 8월경에 퇴역시켰다. 이쪽도 2008년 이후 운항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2008년 즈음부터 보관 상태로 접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 기체만 운항을 멈춘 것이지, 아자 항공 운송(Azza Air Transport)이라는 자국 화물 항공사 소속 707[74]을 임대해 운용하다가 2009년 10월 21일에 4번 엔진 덮개 분리+조종사 과실로 수단 항공 2241편 추락 사고를 내 탑승객 6명 전원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고를 내기도 했다.[25] 이란항공은 2000년에 마지막 남은 707을 퇴역시켰으나, 정황상 1997~1998년부터 운항을 멈추고 보관 상태로 접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26] 2013년 4월 9일에 테헤란 이맘 호메이니 국제공항에서 촬영되었다. 참고로 이 사진이[27] 2007년에 아르헨티나 공군이 운영하는 LADE(Líneas Aéreas del Estado, 영어로는 State Air Lines를 의미함.)이 보잉 707-320B 2대를 정기 운항에서 제외한 후부터는 6년간 보잉 707을 여객용으로 운항한 유일한 항공사였다.[28] 여담으로 이 사고가 일어나기 하루 전에 같은 나라의 아세만 항공에 의한 보잉 727의 최후의 여객용 비행이 있었다.[29] 이 화물기가 민간에서 운항하던 최후의 보잉 707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기체는 원래 이란 공군 소속 공중급유기였던 것이 여객기로 개조되어 사하 항공이 운용하다가 2009년 8월 3일에 엔진 고장으로 회항하는 사고를 겪은 후 화물기로 개조되어 다시 이란 공군이 쓰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사하 항공에게 임대되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기체였다.[30] 원래에는 1977년 6월 27일 사우디아 항공에 HZ-ACK라는 테일넘버로 인도되었으나 1979년 7월부터 2003년 5월 7일까지 HZ-HM3라는 테일넘버로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전용기로 운용되다가 2005년 오메가 에어로 넘어가 공중급유기로 개조된 기체이다.[31] 원래는 N707MQ만 계속 운항 중이었지만 2023년 N707GF도 운항을 재개했다. 참고로 N707GF는 1974년 6월 3일 YR-ABB라는 테일넘버로 타롬항공에 인도된 후 1976년 6월 30일부터 루마니아 정부 전용기로 바뀌었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 후 테일넘버는 바뀌지 않은 채 여러 항공사들을 거치다 2012년 9월 11일 현행 테일넘버로 오메가 항공에 인도되었다.[32] 라이벌 기체였던 DC-8도 2024년 4월 현재 3대만 민간에서 현역이다.[33] 실제로 유튜브에서 보잉 707 착륙영상을 보면 매우 빨라 보이고 감속에 활주로 거의 전체를 쓰기도 한다.[34] 미국, 프랑스 등에서 운용 중인 KC-135는 처음부터 군용기로 제작한 것이지만, 이스라엘이나 이란 등이 운용하는 707 Tanker는 민항기로 운용된 기체를 개장한 것이다.[35] 1959년 5월 16일에 히스로 공항에서 촬영되었다.[36] 1979년 1월에 샌디에이고 국제공항에서 촬영되었다.[37] 38은 콴타스의 커스터머 코드이다.[38] 1959년 11월에 밴쿠버 국제공항에서 촬영되었다.[39] 총 6개의 동체 프레임을 제거했는데, 정확히는 날개 앞쪽으로 3개, 후방의 3개의 동체 프레임을 제거했다고 한다.[40] 후술할 138B형으로 개수되었다.[] [42] 1961년 8월에 샌안토니오 국제공항에서 촬영되었다.[43] 심지어 그중 1대는 시험 비행 중에 조종사 훈련생의 실수로 엔진 4개 중 3개가 분해되어 강에 추락하는 사고로 소실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운항된 707-220은 겨우 4대밖에 없었다.[44] 1961년 8월에 하네다 공항에서 촬영되었다.[45] 팬암의 707-320은 그로부터 10일 뒤인 1959년 9월 5일에 있던 세계 최초의 제트기 태평양 횡단 노선에 투입되었다.[46] 팬암의 DC-8 운항 시작 3일 후이자 이승만의 하야로부터 약 1개월 전이다.[47] 따로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당시 기장의 기체 스펙 언급으로 보아 보잉 707-320으로 추정된다. 당시 기체 가격은 700만 달러(2024년 가치로는 7462만 달러)였는데, 당시 한국의 GDP가 39.6억 달러(심지어 이것도 실질환율보다 2배나 고평가된 공정환율로 환산한 것이었다)였으니 무려 한국 GDP의 0.18% 값어치나 됐던 셈. 달리 말하자면 제트 여객기 3~6대 값이 국가 GDP의 1% 가치나 되었을 정도로 한국이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지만.[48] 1974년 8월에 스톡홀름 알란다 국제공항에서 촬영되었다.[49] 다른 것들은 다른 항공사로부터 중고로 구매하거나, 임대한 것들이었다.[50] 1976년 2월 1일에 JFK 국제공항에서 촬영되었다.[51] British Overseas Airways Corporation(BOAC), 옛 영국의 플래그 캐리어로, 1974년 3월 31일에 영국의 다른 항공사들과 합쳐져 지금의 영국항공으로 바뀌었다.[52] Aeroamerica,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워싱턴 주 시애틀과 테겔 국제공항을 기반으로 운항한 미국의 항공사이다.[53] 1978년 6월에 베를린 테겔 국제공항에서 촬영되었다.[54] 동체 길이는 41.2m 정도로 자사의 737-900 기종과 비슷한 길이다.[55] 참고로 이 기체들은 둘 다 원래 이스턴 항공 소속이었다.[56] 1985년 5월에 취리히 국제공항에서 촬영되었다.[57] D-ABOD, B707-430[스크랩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kujRTigI1t0[59] 다만 일본항공 한정으로는 1960년대 초반에 에어 프랑스와 함께 도쿄 하네다 공항-파리 오를리 공항 사이 공동운항편을 운항했는데, 이 비행 당시에는 에어 프랑스 소속 보잉 707에 일본항공 로고를 첨가한 뒤, 일본항공 소속 스튜어디스도 투입했다고 한다. 1960년 9월에 하네다 공항에서 촬영된 당시 사진[60] 재미있게도 보잉 707을 정식으로 운영해본 항공사가 아예 없는 일본과 정반대로 한국은 DC-8을 정식으로 운영해본 항공사가 없다. 대한항공이 그나마 DC-8을 6대 운용해본 적은 있긴 하지만 모두 임차였으며, 아시아나항공은 DC-8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할 무렵에 생긴 항공사였기 때문.[61] Barrel Roll, 조종석의 스틱을 당기는 것과 동시에 롤을 주어 기동하여 비행 경로를 지그재그 모양으로 만드는 기법. 대략 이렇게 생겼다.[62] Alvin "Tex" Johnston, 1914~1998, 제2차 세계 대전 때 에어라코브라, 이후로 벨 X-1 등의 기체를 테스트 비행했다. 참고로 이 사람은 이 비행 3년 전인 1952년 4월 15일에는 B-52의 초도비행을, 그로부터 2년 뒤인 1957년 12월 20일에는 보잉 707의 초도 기체인 N708PA의 초도 비행을 하기도 했다.[63] 존스턴의 말로는 기동이 개시될 시의 고도는 400피트(약 121.9m), 기동이 끝날 시의 고도는 1600피트(약 487.7m)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64] 참고로 이 사건의 영향으로 후대인 1994년에 보잉 777의 초도 비행을 맡은 보잉의 테스트 파일럿 존 캐시먼(John E. Cashman)은 당시 보잉의 사장이던 필립 콘딧(Philip M. Condit)에게 돌지 마시오.(No Rolls.)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65] 1962년 6월 23일에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촬영되었다.[66]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F. 케네디였다.[67] 4:28~4:32에 보이는 팬암 기체는 최초로 생산된 보잉 707인 N708PA다. 항공 역사에 있어서 역사적 기체 둘이 함께 담긴 셈.[68] 상술한 영상처럼 파키스탄 대통령의 전용기로 임차된 적이 있다.[69] 당시 카라치-런던-뉴욕 노선은 일주일에 한 번만 운항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 파키스탄은 전성기였다고는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당시 매우 빈곤했던 한국보다도 1인당 GDP가 낮은 최빈국이었으니 그리 이상한 모습은 아니다.[70] Jat Airways, Jugoslovenski Aerotransport. 1927년에 설립된 세르비아(구 유고슬라비아)의 플래그 캐리어. 2013년 10월 26일에 에어 세르비아로 개칭했다.[71] 참고로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공산권 국가였는데, 공산권 국가에서 미국에서 생산되고 미국 항공사에서 운용한 여객기를, 그것도 냉전이 종결되기도 훨씬 전에 도입했다는 것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유고슬라비아는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서방권 국가들에게도 개방적인 편이었던 것을 넘어 제3세계의 중추였던 국가였기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비슷하게 서방권에게 개방적이었던 1970년대 루마니아의 타롬항공도 1974년에 보잉 707을 도입한 바가 있고, 덤으로 야트 항공은 이 기세를 이어가 1978년에는 공산권 국가 최초로 광동체 여객기(DC-10)을 도입하기까지 했다. 참고로 중국민항은 1973년에 보잉 707을 도입했고, 에티오피아 항공은 에티오피아가 공산화되기 훨씬 전인 1963년부터 보잉 720을 운용해왔다.[72] 이는 역대 최악의 항공 사고 15위에 해당한다. 또한 DC-8 기종이 이론적으로 낼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사고에 가깝기도 하다(전좌석 단일 클래스+만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