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6 16:54:16

조메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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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34대 천황
조메이 천황
舒明天皇
파일:external/a0.att.hudong.com/01200000026085136323893613868_s.jpg
출생 593년
사망 641년 11월 17일 (향년 49세)
능묘 일본국 나라현 사쿠라이시 오츠사카 오시사카노우치노미사사기(押坂内陵)
재위 629년 음력 1월 4일(2월 2일)~641년 음력 10월 9일(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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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풍 시호 조메이 덴노(舒明天皇, 서명 천황)
화풍 시호 오키나가노타라시히히로누카노스메라미코토(息長足日広額天皇)
타무라(田村)
부모 부친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 황자
모친 아라테노히메 황녀
형제 6남 1녀
배우자 타카라 황후
자녀 1남 카즈라키 황자(나카노오오에)
2남 오오아마 황자
1녀 하시히토 황녀
황거 아스카노오카모토노미야(飛鳥岡本宮)
십이지 소띠 (계축년) }}}}}}}}}
1. 소개2. 황위 계승 분쟁3. 즉위 이후
3.1. 백제와의 관계3.2. 즉위 전기의 문제점: 압도적인 장문의 기사
4. 가족관계

[clearfix]

1. 소개

일본의 제34대 천황.

소가씨의 피를 잇지 않은 비다쓰 덴노 계열의 황족 중에서 최초로 황위에 오른 천황이자 현 일본 황실의 직계 조상이다.[1]

비다쓰 덴노의 아들인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 황자(押坂彦人大兄皇子)와 그의 이복 여동생이자 아내인 누카데히메 황녀(糠手姬皇女) 사이에서 태어난 황자로, 부모가 모두 비다쓰 덴노의 자식인 강력한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오시사카 황자는 비다쓰 덴노 사후에 31대 요메이 덴노의 태자[2]로서 차기 황위 계승이 가장 유력했던 인물이었으나, 소가씨의 조정 내 영향력 확대와 황위 계승상의 우위를 확립하기 위한 대신 소가노 우마코의 공작으로 인해 결국 황위 계승이 좌절되었다.

아버지가 천황이 되지 못했고, 스이코 덴노 즉위 연간에는 쇼토쿠 태자가 차기 황위 계승자로 낙점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무라 황자는 사실상 황위 계승상에서 거리가 먼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622년 음력 2월 5일에 쇼토쿠 태자가 사망한 이후에도 무슨 연유인지 스이코 덴노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스이코 덴노 사후에 황위를 계승할 후보자를 정하는 것을 놓고 조정 내의 여러 씨족들 간에 알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가필이 의심되기는 하나, 《부상략기》나 《성덕태자전력》 등 후대에 저술된 사료에는 쇼토쿠 태자가 죽기 전부터 타무라 황자가 부각되기 시작하는 기사들이 보인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쇼토쿠 태자 말년 즈음에는 조정 내에서 타무라 황자가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쇼토쿠 태자 또한 혈통상으로 완벽하고, 현실적인 힘을 갖기 시작한 타무라 황자의 황위 계승 가능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인정했던 것으로 추정한다.[3]

2. 황위 계승 분쟁

7년이 지나 스이코 덴노가 붕어하기 이전인 628년 음력 3월 6일에 스이코 덴노가 두 황자를 불렀다. 한 명은 타무라 황자였고, 다른 한 명은 쇼토쿠 태자의 아들이자 소가노 에미시의 조카였던 야마시로노오오에(山背大兄) 황자[4]였다. 스이코 덴노는 두 황자에게 유언을 전했는데...문제는 이 유언 자체가 엄청나게 모호했다.
임자(6일)에 천황의 병이 심해져서 나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타무라 황자를 불러
“황위에 올라 나라의 기초를 닦고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원래 안이하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고 잘 살펴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
고 말하였다. 또 같은 날에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를 불러 “너는 아직 미숙하다. 마음에 바라는 것이 있어도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 반드시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따르도록 하라.”
고 타일렀다. - 《일본서기》 권 22 스이코 덴노 36년 3월 임자 조

위 내용을 보면 일방적으로 타무라 황자가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읽을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 전한 유언도 그가 황위 계승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스이코 덴노의 유언은 한 사람을 후보자로 확정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후보자로 지명한 것이기 때문에, 유언의 내용에 따라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를 놓고 군신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소아하이신이 대신이었다. 그는 혼자 후계를 정하려고 하였으나, 군신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안배마려신과 상의하여, 군신들을 대신의 집에 모이게 하여 향응을 베풀었다. 연회를 끝내고 산회하려고 할 때 대신이 안배신에게 명하여 군신에게 말하도록 하였다.
"지금 천황이 붕어하시고 후사가 없다. 만일 속히 결정하지 않으면 내란이 일어날까 걱정이다. 지금 어느 왕을 후계로 해야 하는가. 천황이 와병 중일 때 타무라 황자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대임이다.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 타무라 황자여, 신중하게 생각하라 태만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 ‘그대는 혼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 반드시 군신의 말에 따라 삼가며 그릇됨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이것이 천황의 유언이다. 지금 누구를 천황으로 할 것인가?"
그때 군신이 침묵하여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다시 물었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그때 대반경련이 나아가
"천황의 유언을 따라야 합니다. 군신의 말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고 말했다. 이에 안배신이
"무슨 말인가. 본심을 밝혀라"
라고 말했다. 이에 (대반경련이)
"천황이 어떤 생각에서 타무라 황자에 ‘천하의 통치를 위임하는 일은 대업이다. 태만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이에 따르면 황위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때 채녀신마례지, 고향신우마, 중신련미기, 난파길사신자 등 4명의 신하가
"대반련의 말에 전혀 다른 이의는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허세신대마려, 좌백련동인, 기신염수 3인이 나아가
"야마시로노오오에(山背大兄) 왕, 이분을 천황으로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소아창마려신만이 혼자
"신은 지금 당장에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생각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대신은 군신이 화합하지 못하여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물러났다.” -《일본서기》 권 23 조메이 덴노 즉위 전기 스이코 덴노 36년 9월 조

위 기사에서는 당시의 대신 소가노 에미시가 원래 독자적으로 후보를 선정하려 했으나, 군신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긴급히 회의를 소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황위 계승 자체는 황실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키나이(기내) 지역의 씨족들의 이해관계도 깊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후보자 중에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는 군신들 간에 큰 화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회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급작스러운데다 술자리가 파하고 돌아가려던 찰나에 갑자기 의견이 제시되었고, 군신들이 유조에 따라 두 후보자를 동시에 지지한 점에서 황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를 지지해야 했던 소가노 에미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이코 덴노의 붕어 전후로 줄곧 타무라 황자를 지지했는데, 군신회의에서도 처음부터 타무라 황자를 지지하게끔 유도하려 했으나 회의에 참가한 군신이 5대 3의 비율로 두 황자를 지지하자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언틋 보면 타무라가 앞선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야마시로노오오에를 지지하는 의견이 있었다는 점 자체가 군신회의의 실패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국 군신회의에서 의견 합의를 도출해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소가노 에미시는 회의를 파했는데, 며칠 후에 회의의 결과를 전해들은 야마시로노오오에는 회의에서 타무라 황자를 지지하는 군신의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숙부인 소가노 에미시에게 사자를 보내 그의 뜻을 듣고 싶다고 전했다.
이때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은 반구궁에 있으면서 의논한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삼국왕, 앵정신화자고 두 사람을 보내 몰래 대신에게
“전하여 듣건대, 숙부는 타무라 황자(田村皇子)를 천황으로 삼으려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서서 생각해도, 앉아서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바라건대 분명하게 숙부의 생각을 알고 싶다.”
라고 말했다. 대신은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전하는 말을 듣고 혼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배신, 중신련, 기신, 하변신, 고향신, 채녀신, 대반련 등을 불러 상세히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의 말을 전했다. 이윽고 또 대부들에게
“그대 대부들은 함께 반구궁에 가서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에게 ‘어찌 신하인 저 혼자서 후계를 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천황의 유언을 받들어 군신에게 말할 따름입니다. 군신들은 유언과 같이 타무라 황자(田村皇子)가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하며 다시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라고 모두 말합니다. 이것이 군신의 뜻입니다. 신의 혼자 생각이 아닙니다. 신에게 사사로운 뜻이 있더라도 삼가 두려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얼굴을 뵙는 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내가 말했다고 전하여라.”
라고 말했다. 이에 대부들은 대신의 말을 듣고 반구궁으로 갔다. 그리고 삼국왕과 앵정신에게 대신의 말을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에게 전하게 했다. 그때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은 여러 대부들에게
“천황의 유언은 어떠한 것인가?”
라고 물었다. (대부들은)
“신들은 깊은 것은 모릅니다. 오직 대신의 말에 따르면, 천황이 병석에 누워있던 날 타무라 황자에게 ‘경솔하게 장래의 국정을 말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그대 타무라 황자는 신중하게 말하고, 태만해서는 안된다.’라고 명을 내리고, 다음에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는 ‘그대는 아직 어리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반드시 군신의 말에 따르라.’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은 가깝게 모시고 있었던 여러 여왕 및 궁녀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또한 대왕이 분명히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또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은
“이 유언은 도대체 누가 들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것은 기밀이기 때문에 신들은 모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다시 대부들에게
“친애하는 숙부가 마음을 써서 사자 한 사람만 보내지 않고 중신들을 보내 깨우쳐 주셨다. 이것은 큰 은혜다. 그런데 지금 군경이 말하는 천황의 유언은 내가 들은 것과 조금 다르다. 나는 천황이 와병 중이라는 것을 듣고 달려가 궁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중신련미기가 궁 안에서 나와 ‘천황이 부르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아가 내전으로 향했다. 율외채녀흑녀가 뜰에서 맞이하여 대전으로 안내했다. 들어가 보니 근시인 율하녀왕을 위시하여 궁녀, 유녀 8인 등 모두 수십 인이 천황 옆에 있었다. 또 타무라 황자도 있었다. 천황은 병이 위중하셔서 나를 보지 못하셨다. 그래서 율하녀왕이 ‘부르신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천황이 몸을 일으켜 ‘짐은 덕이 없는 몸으로서 오랫동안 대업을 맡아왔다. 지금 명운이 다하여 병을 피할 수는 없다. 그대는 본래 짐의 심복이다. 총애하는 마음은 비할 데가 없다. 황위의 계승은 짐의 세대에 한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에 충실하여라. 그대는 어리더라도 삼가 말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일은 당시에 거기에 있던 측근들이 모두 알고 있다. 나는 이 대은을 입어 두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국가의 통치는 중대한 일이고, 나는 어리고 현명하지 못한데 어찌하여 대임을 맡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여 숙부 및 군경들에게 상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할 기회가 없어서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이전에 숙부의 병문안을 하려고 왕경에 가서 풍포사에 묵은 적이 있다. 이 날 천황께서는 팔구채녀유녀를 보내 ‘너의 숙부인 대신은 항상 너를 걱정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황위가 그대에게 갈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 그러니 삼가고 자중하라’고 명하셨다. 전에 틀림없이 이러한 일이 있었다.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내가 어찌 천하를 탐하겠는가. 오직 들은 것을 밝히는 것뿐이다. 천신지기가 함께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천황의 유칙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대신이 보낸 여러 경들은 원래 신성한 창의 가운데를 잡는 것처럼 공정하게 주상하는 사람들이니 숙부에게 잘 말씀하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가노 에미시는 회의에 따라, 군신의 의견은 타무라 황자의 옹립으로 통일되었으며, 이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스이코 덴노의 뜻이었음을 강조했다. 반대로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는 자신이 유조를 들었을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자신은 대왕(오오키미)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유언의 올바른 뜻을 알고 싶다고 전했으나,
야마시로노오오에는 삼국왕과 앵정신을 군경과 함께 대신에게 보내서
“대답을 듣고 싶다.”
고 말하도록 시켰다. 그러자 대신은 기신과 대반련을 보내 삼국왕과 앵정신에게
“전일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신은 감히 어느 왕을 가볍게 여기고 어느 왕을 중하게 여기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며칠 후에 야마시로노오오에는 또 앵정신을 보내 대신에게
“전일의 일은 내가 들은대로 말했을 뿐이다. 오히려 숙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겠는가?”
라고 말했다. 이 날 대신은 병이 나서 직접 앵정신을 만나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대신은 앵정신을 불러, 안배신·중신련·하변신·소간전신·대반련을 보내어 야마시로노오오에에게
“흠명(긴메이) 천황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군경은 모두 다 총명합니다. 오직 신만이 현명하지 못하지만, 때마침 인물이 없는 때를 만나서 어긋나게 군신의 윗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황위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중대합니다. 전언하여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노신이 힘들어도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유칙을 거스르지 말자는 것으로, 신의 사사로운 생각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소가노 에미시는 계속 스이코 덴노의 뜻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직접 말하기를 꺼리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야마시로노오오에는 자기는 그저 들은대로 말했을 뿐이라면서 어찌 숙부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냐며 태도를 유보했다. 이 시기에 야마시로노오오에가 황위 계승을 포기함에 따라 실질적으로 타무라 황자의 황위 계승이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 타무라 황자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의 지지자였던 사카이베노 오미 마리세가 소가노 에미시에게 반기를 들었다. 마리세는 전대 대신인 소가노 우마코의 동생으로 소가노 에미시의 숙부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이코 덴노 20년에 기타시히메[5]를 긴메이 덴노의 능에 합장하는 행사에서 "씨성의 본"[6]을 읊는 제관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의 일족으로 추정되는 대덕 사카이베노 오미 오마로의 존재로 볼 때, 스이코 조에서는 소가노 우마코 다음가는 중신이자 실력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신회의에 앞서 소가노 에미시는 숙부인 마리세를 찾아가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지를 물었는데, 이는 그가 소가씨 내부에서 장로격인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에 앞서 대신이 홀로 경부마리세신에게
“지금 천황이 붕어하시고, 후계자가 없다. 누구를 천황으로 세워야 하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야마시로노오오에(山背大兄)를 천황으로 하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의 황위 계승이 좌절되자 마리세는 형 소가노 우마코의 묘소를 조영하던 소가씨의 막사를 파괴하는 등, 대대적으로 깽판을 친 뒤에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의 이복형제인 하츠세베나카츠 왕의 궁으로 숨었다.
이미 대신은 안배신·중신련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경부신에게
“어느 왕을 천황으로 할 것인가?”
라고 물었다. 이에 경부신은
“일전에 대신이 친히 물으셨을 때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새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크게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갔다. 이때 소아씨의 일족이 모두 모여서 도대신을 위해 묘를 만들려고 묘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때 마리세신은 묘소의 막사를 부수고, 소아의 전가로 물러가서 출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은 분노하여 신협군승우와 금직수적저를 보내
“지금 나는 그대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친족의 의리로서 해칠 수는 없다. 다만 타인이 그르고 네가 옳다고 하면, 나는 반드시 타인에 거슬러도 너를 따르겠다. 만일 타인이 옳다고 하고 네가 그르다고 하면, 나는 당연히 너를 등지고 타인을 따를 것이다. 이 때문에 네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너와 틀어질 것이다. 나라도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러면 후세 사람들이 우리 둘이 나라 일을 망쳤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후대의 오명이 될 것이다. 너는 삼가 반역을 일으키지 말라.”
고 말했다. 그러나 따르지 않고 마침내 반구로 가서 박뢰왕의 궁에서 머물렀다. 대신은 더욱 노하여 군경을 보내 야마시로노오오에에게
“요새 마리세가 저를 배반하여 박뢰왕의 궁에 숨어 있습니다. 마리세를 내보내 주시면 그 이유를 추문코자 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마리세는 원래 성황이 좋아하셨다. 지금 잠시 와 있을 뿐이다. 어찌 숙부의 마음과 다를 것인가. 허물하지 말길 바란다.”
고 말했다. 그리고 마리세에게
“그대가 선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온 것은 몹시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대 하나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울 것이다. 또 선왕이 임종하실 때 여러 아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라. 좋은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을 받들어 길이 훈계로 삼고 있다. 그래서 사사로운 정이 있어도 참고 원망하지 않는다. 또 나는 숙부를 배반할 수 없다. 바라건대 앞으로는 꺼리지 말고 여러 경들의 의견을 따라 거역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고 말했다. 이때 대부들은 마리세에게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의 말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고 말했다. 그래서 마리세신은 의지할 바가 없어졌다. 이에 울면서 집에 돌아와 지낸 지 10여 일이 되던 날, 박뢰왕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이에 마리세신이
“나는 살아 있기는 하지만 의지할 사람이 없다.”
라고 말했다. 대신은 경부신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보냈다. 경부신은 군사들이 왔다는 것을 듣고, 차남 아야를 데리고 문을 나가 걸상에 앉아서 기다렸다. 곧 군사들이 와서 내목물부이구비에게 목 졸라 죽이도록 했다. 그리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이들을 같은 장소에 묻었다. 다만 장남인 모진만은 니사의 기와집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그는 거기서 비구승 한 두 명을 범했는데, 비구승 한 명이 질투하여 그 사실이 밝혀졌다. 절을 포위하여 붙잡으려고 했으나, 도망하여 무방산에 들어갔다. 그래서 산을 수색했다. 모진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결국 그는 목을 찔러 산중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노래했다.
"무방산은 들어선 나무가 적어도 거기에 의지하려고, 모진이라는 젊은 분은 여기에 숨어 있었던가."

당시에는 한 씨족의 대표자가 죽었을 때, 일족 전체가 모여서 묘소를 조영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묘소 조영 뿐만이 아니라 차기 대표자의 족장권과 정치적 우위를 대대적으로 공인받는 관습이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마리세의 자충수가 되었는데, 형 소가노 우마코의 묘소를 조영하기 위해 모인 일족들을 공격했기 때문에 소가씨 전체의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소가씨 전체에서 소가노 에미시의 족장권 승계를 공인했다는 얘기가 되므로 마리세는 결국 에미시 좋은 일만 한 셈이 되었다.

숙부가 자기 아버지의 묘소를 공격했다는 사실에 분개한 소가노 에미시는 마리세에게 사자를 보내
"당신 때문에 우리가 후세에 역적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냐? 지금이라도 당신 말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면 살려주겠다."
라고 했지만 결국 이걸 거부하고 하츠세베나카츠 왕의 궁궐에 숨은 것이었다.

이에 소가노 에미시는 이 사태를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 고했고,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는 마리세에게
"그대는 우리 아버지가 총애하던 신하였고, 그 뜻에 따라준 것은 고맙다. 근데 지금 그대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워질 수도 있다. 그리고 난 숙부를 배반할 수 없다. 부탁하는데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라."
라고 말했다. 마리세는 조정 내에서 완전히 고립된데 더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 되었고, 결국에는 10여 일 후에 하츠세베나카츠 왕이 병으로 급사함과 동시에 조카인 소가노 에미시가 보낸 군대의 손에 두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629년 음력 1월 4일, 소가노 에미시를 중심으로 한 군신들은 타무라 황자에게 신새를 바치고 황위에 오를 것을 종용했다. 타무라 황자는 고사했으나 결국에는 군신의 뜻을 받아들여 즉위했다.

3. 즉위 이후

조메이 덴노의 치세 기간 중 견당사가 파견되었으나, 정치적 실권은 여전히 소가노 에미시에게 있었다. 조메이 덴노가 즉위하든 말든 소가씨는 기세등등했고, 훗날 나카노오오에 황자가 궁에서 을사(잇시)의 변을 일으켜 소가씨를 몰락시키자 당시 천황이자 조메이 덴노의 아내였던 고교쿠 덴노는 격노해 퇴위하고, 다른 황자에게 황위를 넘기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소가씨의 힘은 강했으며, 조정에서 영향력이 컸다.

639년 조메이 덴노는 야마토의 중심부를 흐르는 강을 '백제천'이라 명명하고, 서쪽의 백성들에게는 궁을, 동쪽의 백성들에겐 절을 짓게 했으며, 640년 10월, 백제인 서직현이 조영을 책임졌던 백제궁이 완성되자 덴노는 거처를 옮기고 이듬해 겨울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궁 북쪽에 빈궁을 지어 죽음을 애도했는데, 사람들은 이 궁을 '백제의 대빈'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의 치세는 13년이었으며, 붕어했을 당시 나이는 49세였다. 백제에 대한 건 하단 후술.

그의 사후 황위는 그의 아내이자 조카인 타카라 황녀(후의 고교쿠 덴노, 사이메이 덴노)가 물려받았으며 그의 동생 고토쿠 덴노를 거쳐 그의 아들인 덴지 덴노덴무 덴노에게 상속되었다.

3.1. 백제와의 관계

조메이 덴노와 관련해서 눈여겨 볼 것은 《부상략기》(扶桑略記, 14세기 경 편찬. 11세기 경에 편찬되었다는 설도 있음)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와 《일본서기》에 기술된 조메이 덴노의 백제 관련 행적들이다.

《신찬성씨록》이라는 고대 기록에[7] "비다쓰의 손자 '백제왕'"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조메이 덴노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7세기 중엽 조메이 덴노는 스스로를 백제인으로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는
“조메이 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고 전한다. 14세기 초의 《부상략기》에도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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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事實)은, 《일본서기》가
“조메이 천황은 비다쓰 천황의 친손자로 백제강(百濟川) 강변에다 '백제궁'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9중탑(九重塔)도 세웠다”
고 기록한 일이다. 비다쓰 덴노의 친손자인 '조메이 덴노'가 '백제궁'을 세운 터전도 바로 친할아버지가 '백제대정궁'을 건설했던 곳과 똑같은 고장이었다.[8] 즉, 조메이 덴노가 나라 지방 백제강이 흐르는 터전에 일본 역사상 두 번째로 당당하게 백제 호칭을 붙인 왕궁과 사찰을 건설했다는 것은, 이 고장이 그 당시까지 엄연히 백제계 도래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1997년 3월 일본 고고학자들은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의 키비(吉備) 연못터에서 ‘백제대사’의 옛 터전을 발굴했다. 이로써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조메이 덴노 또한 639년에 '백제대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전형적인 백제양식인 판축기법에다 백제식 문양이 새겨진 기와가 쏟아졌다.

이 백제대사의 금당 기단 크기는 36미터와 27미터로(아스카 시대부터 내려오는 아스카지는 21미터와 17.5미터)로 아스카 시대에 세워진 절들 중 가장 규모가 거대하다고 한다. 또 9중탑은 남아있는 기단의 한 변의 길이 30m, 높이가 2m가 넘어가기 때문에, 초석 등이 제대로 남아 있지는 않으나 높이 80m 급의 거대한 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규모는 현대 남아있는 일본의 거대하다는 절들조차 우습게 넘어서는 규모다. 7세기 무렵은 유독 동서를 가리지 않고 궁궐 건축이든 절 건축이든 초거대 규모로 짓는 경향이 있었는데,[9] 백제대사 또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1998년에는 역시 같은 지역에서 조메이 덴노가 지은 9중탑 터도 발견되었고, 드디어 ‘백제궁’ 터도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나라현 일대의 이름이 6세기에는 ‘백제'(百濟, 구다라) 그 자체였던 것이다. 초기에는 단순히 아스카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이가 좋고 선진국인 나라의 이름을 따 지었다고 여겨졌지만, 최근 도래인들의 숫자와 영향력이 예상외로 거대했다는 점에서 차이나타운과 같은 부류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규모와 영향력은 정계 중진까지 간섭할 정도로 거대했다.

실제로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는
“비다쓰 천황의 '백제대정궁'은 지금의 기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의 구다라손 구다라(百濟村 百濟) 땅에 있었다”
고 밝힌 바 있다. (井上正雄 《大阪村全志》 卷四 1922)

이에 대해서는 현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 교수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기 641년 10월에 조메이 천황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백제궁'은 소가씨(蘇我氏)의 본거지였던 소가(曾我) 땅의 북쪽인 구다라(百濟, 백제), 지금의 키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 廣陵町)에 있었다. 그 당시의 구다라 강(百濟川, 백제강)이 지금은 소가 강(曾我川)이고, 그 강변에는 옛날에 백제궁(百濟宮)이 있었다.”
《大化改新の 眞相》. 1967.

한편 조메이 덴노와 '백제'와의 밀접한 관계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641년 10월9일에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하시다.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百濟の 大殯)이라고 부른다.”(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西, 天皇崩于百濟宮. 內午, 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조메이 덴노의 장례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백제 본국 왕실의 3년상 '국장의례'를 가리킨다.[10] 어째서 조메이 덴노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건 아직 없지만 적어도 조메이 덴노 시절 백제계들의 영향력이 일본 조정 내에서 굉장히 컸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백제계 도래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했냐면 백제가 망하고 헤이안 시대 초기까지 백제계 도래인이 조정 내 실권 세력 중 하나였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를 연 간무 덴노만 하더라도 후지와라 씨족과 도래인들이 세운 천황이라서 외가인 백제계들을 대규모로 고용했다고 한다. 후지와라, 미나모토, 타이라, 타치바나 씨족에게 권력이 전부 넘어가 기록에서 사라지기는 하지만 나라가 멸망하고도 200년 이상이나 그랬다는 소리니 대단하기는 하다.

3.2. 즉위 전기의 문제점: 압도적인 장문의 기사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 상당수는 조메이 덴노의 즉위 전기 기사가 압도적인 장문으로 기술된 것에 대해 후대의 윤색 또는 가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편찬을 지시한 덴무 덴노가 아버지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장문의 기사를 편술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일부 대목에서 가필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처음에 열린 군신회의에서 의견이 합치되지 않았다는 점은 조메이 덴노의 즉위를 정당화하는데 오히려 역효과임을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

4. 가족관계

  • 아버지: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 황자(押坂彦人大兄皇子) - 제30대 비다쓰 덴노와 히로히메(広姫) 황후의 아들
  • 어머니: 누카데히메 황녀(糠手姫皇女) - 제30대 비다쓰 덴노와 우나코의 딸
  • 비: 타메 황녀(田眼皇女) - 제30대 비다쓰 덴노의 딸
  • 황후: 타카라 황녀(宝皇女, 후의 고교쿠 덴노, 사이메이 덴노)[11]
    • 아들: 아야 황자(漢皇子) - 전 남편 다카무코 왕(高向王) 生
    • 차남: 카즈라키 황자(葛城皇子) - 나카노오오에 황자(中大兄皇子), 일본 제38대 덴지 덴노
    • 딸: 하시히토 황녀(間人皇女, ?~665) - 제36대 고토쿠 덴노의 황후
    • 3남: 오오야마 황자(大海人皇子, 일본 제40대 덴무 덴노)
  • 부인: 호테노이라츠메(法提郎女) - 소가노 우마코의 딸이자 소가노 에미시의 여동생
    • 장남: 후루히토노오오에 황자(古人大兄皇子, 612?~645)
    • 아들: 후시키 황자(布敷皇子)
  • 부인: 이라츠메(手杯娘) - 소가노 에미시의 딸
    • 황녀: 야타 황녀(箭田皇女)
  • 부인: 가구시히메(粟田香櫛媛) - 아와타노 스즈코(粟田鈴子)의 딸
    • 황녀: 오시사카노와타무키 황녀(押坂錦向皇女)
  • 채녀: 카야노 우네메(蚊屋采女姉子)
    • 아들: 카야 황자(蚊屋皇子, 賀陽王)

==# 천황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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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메이 덴노의 차남인 38대 덴지 덴노 사후에 진신(임신)의 난으로 39대 고분 덴노가 실각하면서, 조메이 덴노의 3남인 40대 덴무 덴노 계열로 약 100여년 간 이어지다가 덴지 덴노의 손자였던 46대 고닌 덴노를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즉, 오늘날의 일본 황실은 모두 조메이 덴노의 직계 후손이다.[2] 단, 오시사카 황자가 요메이 덴노의 태자였다는 기술은 일본서기》에만 보인다. 그리고 《고사기》에서는 천황으로 즉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시사카 황자의 혼인 및 가족관계가 대단히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거의 천황에 준하는 위치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8세기 《일본서기》가 편찬되는 과정에서 당시 천황 가문의 직계 조상이었던 오시사카 황자를 높임으로서 조메이 덴노 계열의 집권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기술을 집어넣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3] 쇼토쿠 태자와 타무라 황자는 촌수로 따지면 5촌 당숙-조카 사이로, 타무라의 아버지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 황자와 쇼토쿠 태자는 이복형제인 비다쓰 덴노와 요메이 덴노의 자식이었므로 4촌 지간이었다.[4] 이 당시 쇼토쿠 태자의 가계인 상궁왕가의 대표자였다. 《일본서기》에서는 명확한 관계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쇼토쿠 태자에 관련된 기록인 《성덕태자전력》, 《상궁성덕태자전보궐기》와 헤이안 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상략기》에서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생년은 불명이나, 고교쿠 2년(643) 음력 11월 11일에 조메이 덴노의 또 다른 아들이자 소가씨의 피를 이은 후루히토노오오에(古人大兄)를 세우려고 한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의 공격을 받아 자결했다.[5] 29대 긴메이 덴노의 비로 31대 요메이 덴노, 33대 스이코 덴노의 어머니였으며, 소가노 우마코와 사카이베노 오미의 남매였다.[6] 쉽게 말하면, 당시 대왕권의 중앙부에 위치하던 여러 씨족들의 연원에 대한 내용이다.[7] 고대 천황가의 혈통에 관해 써진 책으로, 원본이 유실되고 복사본들만 남아있다.[8] 일본 천황 중에 왕도에 ‘백제궁'(百濟宮)이라고 호칭하는 왕궁(王宮)을 지은 이는 비다쓰 덴노가 최초였다. 당연히 조메이 덴노는 두 번째로 '백제궁'을 지은 것이었다.[9] 역사상 단일 궁궐로 가장 거대했던 당나라 장안의 정궁 대명궁과 신라에서 만들어진 황룡사 및 9중탑만 해도 어떻게 만들었나 싶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10]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이 왕도(王都)였던 곰나루(웅진, 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을 치렀다는 사실이 1971년 출토된 무령왕의 <묘지명>을 통해 입증되었다. 백제 왕실의 성대한 장례 의식을 에서도 똑같이 거행했다는 것은 당시 나라현 땅에 거주하던 백제계 세력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추정케 한다.[11] 조메이 덴노의 이복형제인 치누 왕(茅渟王)의 딸이다. 치누 왕의 아들이자 타카라 황녀의 남동생이 카루 황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