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0:10:37

조범현/지도자 스타일

1. 개관2. 선수단 운영3. 인간적인 면

1. 개관

코치 시절에는 훌륭한 배터리 코치였다.[1] 조범현 밑에서 제대로 포수로 조련받은 선수가 박경완, 진갑용 등 현 한국프로야구 최정상의 포수. 특히 쌍방울 배터리 코치시절 박경완을 새벽 6시부터 저녁까지 지옥훈련으로 굴린 일화는 유명하다.[2]

그러나 삼성 배터리 코치 시절에는 LG의 주전 포수이자 당시 최고의 포수였던 김동수가 삼성으로 오자 김동수와는 궁합이 안 맞는다며 갈등을 빚었고[3] 결국 김동수는 SK로 트레이드되었으나 2002년 말 조범현이 SK의 감독으로 오자마자 가장 먼저 김동수의 골글 라이벌이었던 국가대표 포수 박경완을 영입한 뒤 김동수를 방출해 버렸다.[4] SK 재임시절 정상호는 결국 조범현 재임 시기에 재능을 터뜨리지 못했으며[5] KIA에서도 제대로 키운 포수 자원이 없어서[6] 정말 포수 육성 능력이 있기는 한 거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다만 포수라는 게 원래 프로에서 성장시키기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포지션이고, SK 시절부터 조범현은 감독으로 활동했기에 포수 육성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던 터라 전문적으로 배터리 코치로 활동하던 시절에 비해 성과물이 안 나온 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2013년 삼성 라이온즈 포수 인스트럭터로서 이흥련을 과거 박경완처럼 지옥훈련으로 조련해서 쓸만한 포수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7]

참고로 우승 경험이 선수(1982년 OB), 코치(2002년 삼성라이온즈 배터리 코치), 감독(2009년 KIA 타이거즈) 다 있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거기에 더불어서 국제대회(2010년도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우승하며, 한국프로야구에서 골든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유일한 사람이다!

김상엽처럼 홀수 해에는 좋은 성적을, 짝수 해에는 나쁜 성적을 거둔다는 징크스가 있다. 2003년 2위[8], 2004년 5위, 2005년 3위, 2006년 6위, 2007년 1경기 1패, 2008년 6위, 2009년 1위[9], 2010년 5위, 2011년 4위[10] 그러나 이 법칙은 2015년에 kt wiz가 KBO 사상 첫 10위를 찍으며 깨지고 말았다. 물론 신생팀이라서 꼴찌만 안해도 다행인 시즌이었고 그나마 4월의 부진을 뒤로 하고 댄 블랙 영입 이후로는 그럭저럭 선방했던 시즌이었다.

2. 선수단 운영

세밀한 작전 지시에서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이 많지만, 양현종, 곽정철을 비롯한 젊은 투수진의 수준을 끌어올려 리빌딩에 성공한 것은 조범현의 공으로 볼 수 있다. 팀 성적에 따라 별명도 조뱀에서 조백사, 조갈량으로 진화.

SK 감독 시절을 보면 여러모로 미숙한 점이 많았다. 전임 강병철 감독 시절의 열악한 투수진 때문에 데뷔 첫 해부터 모든 부담을 짊어지고 혹사 당해 반드시 쉬어야 했던 에이스 이승호는 혹사 여파로 인해 관리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굴려지며 결국 3년을 부상으로 날렸고 복귀 후에는 선발로 나오지 못하고 중간계투가 되었다. 이는 채병용도 마찬가지. 2004년 팔꿈치에 탈이 났고 결국 혹사 후유증으로 2004년 한 해를 팔꿈치 수술과 재활을 하느라 통째로 쉬었고, 이후에는 선발로 보직이 고정되어 어느 정도 꾸준함을 보여줬지만 지금까지도 2002년 ~ 2003년 만큼의 구속과 이닝 소화력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선수단 관리도 미숙해서 1차 지명 출신 송은범은 멘탈 케어가 안되어서 놀아버렸고[11] 제춘모는 2003년 한 해 반짝한 후 자기관리 실패로 인해 다시는 그 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신승현, 엄정욱 등은 부상의 늪에 빠졌다. 그나마 정우람윤길현에게 원 포인트부터 시작해서 1군 경험치 먹인게 유일한 장점인데 정우람은 조범현때 굴려져서 김성근 1년차에 안식년 들어갔다.[12] 야수 기용도 마찬가지라서 자질있는 젊은 야수들을 키우려는 시도는 했지만 정작 키우는 방식은 미숙해서 제대로 된 포지션 하나 못잡아주고 여기 박았다 저기 박았다 하면서 정처없이 떠돌게 만들었다.

시즌 구상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2006년 시즌을 앞두고 어깨부상 당한 이승호와 인저리프론 엄정욱이 건강하게 돌아온다는 별 신빙성 없는 구상을 바탕으로 타자 용병만 2명 뽑았다가 6위로 실패하고 결국 본인은 재계약 불가 크리[13]로 물러나고 말았다.

리빌딩의 대가인 김응용, 강병철이나 화수분 야구의 김경문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야수 부문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리빌딩을 무난하게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병철의 양아들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조범현 역시 젊은 선수들 위주로 기용하며 양아들 키우냐는 비아냥을 많이 들은 편. SK 시절만 해도 정근우, 김강민, 박재상, 조동화, 최정 등 타자 유망주들을 어떻게든 쓰기 위해 제 포지션이 아닌 땜빵 포지션이라곤 해도[14] 꾸준히 1군에 등록하며 경험을 많이 제공했다. 뒤이은 KIA 시절에도 김선빈, 안치홍으로 이루어진 젊은 키스톤 라인을 구축했고, 나지완을 팀내 4번 타자로 성장시켰다. 트레이드로 데려온 채종범은 끝끝내 부활하지 못했지만... 부임 첫해에는 성적이 안 나온다고 욕먹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로 인해 2009년의 우승이 가능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다만 육성 관련해서는 이 선수가 이 포지션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그 능력을 키우는게 아니라 쓸만한 선수 여기 써보고 저기 써보고 하는 식으로 돌려쓰다 어디 한 군데 적응하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이라 한계가 있었다. 당장 최정은 조범현 시절 불안한 수비로 인해 1루와 3루를 떠도는 등 고정된 포지션이 없어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포수를 잘 키운다는 주장도 있으나 정작 감독이 되고나서 제대로 키운 포수가 단 한 명도 없어서 그냥 박경완, 진갑용이 얻어 걸린거라는 반론도 있다.

선수 보는 안목도 기묘해서 SK 시절에도, KT 시절에도 눈뜬 봉사가 아닌가 싶은 선택을 자주했다. SK에선 그 유명한 류현진 대신 (2라운더에서도 충분히 지명할 수 있는)이재원을 선택했고 FA로 한화에 간 김민재의 보상선수로 신체 건장한 양훈 대신 김인식의 혹사로 맛이 간 정병희를 선택했다. 기아 감독시절에는 김상현을 트레이드 해오려는걸 극렬히 반대했다.[15]
KT에서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신인지명을 자주 했는데 2015년 특별우선지명에서 황금사자기와 대통령배를 석권한 서울고 에이스 최원태를 즉전감 필요하다며 거르고 주권홍성무를 골랐다. 이듬해 2차 지명에선 당연히 뽑을 줄 알았던 김재영 대신 나이 많고 수비 안되는 남태혁을 골랐다.

두산의 김경문 감독과 같은 포지션에 같은 팀에서 뛰었지만 감독이 된 후의 성향은 상당히 차이가 많이 난다.[16] 둘 다 포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블로킹에 관한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 재미있다. 김경문이 포수는 막으라고 있는 포지션이라고 가르치는 반면 조범현은 선수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주자가 뛰는 길은 막지 말라고 가르친다.

또 다른 문제는 KIA의 감독을 맡은 뒤 2007년이후 수술을 해야하는 한기주에게 갑자기 마무리 투수가 빠지면 안 된다면서 한기주의 수술을 반대했고 그렇게 수술을 하지 못하고 2009시즌까지 뛰게 만들고 한기주가 부진하자 수술을 허락해줬다. 그리고 한기주는 다시는 2006~2008년도 모습을 보여주지못하고 혹사의 피해자가 되었다. 6선발 체제의 선발 중심 야구를 하는건 좋은데 불펜 운용에 취약한 면을 드러냈다는 것. 한 템포 느린 터프한 상황에서 교체, 손영민, 김희걸 등의 잦은 등판으로 인한 혹사 논란 등을 들 수가 있겠다. 이점은 kt에서도 변하지 않아 2016 시즌에 신인 투수들이 선발을 소화할 상태가 못되는데도 무리하게 6선발을 고집했고 그 결과 한화 버금가는 불펜 혹사를 기록하고 있다.

3. 인간적인 면

전 소속 팀의 팬들에게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못 받는데,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송은범을 할아버지의 발인식[17]에 보내지 않음으로 인해 상당히 비난이 많았다.[18] 이에 대해 송은범이 엇나간 것이 조범현의 책임이라는 비난은 옳지 않고, 그가 학창 시절부터 이미 잘 노는 선수로 유명하여 구단 차원의 관리 대상이었다는 반박도 있다# 하지만 저 사건이 송은범에게 크나큰 정신적 데미지를 주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며, 관리 대상이라 하더라도 직계 존속의 발인에 참석하지 말라고 지시한 감독과 구단의 행태는 당연히 비난감이다. 조범현은 이미 인간적으로 배려도 없이 한참 모자란 것이다.

한국 야구계 자체가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이 사건과 비슷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후에 이종운 감독과 손아섭 관련 사건으로 다시 불거지지만, 그전의 김성근 당시 SK 감독만해도 2군 코치가 부친 기일에 잠깐 다녀와도 되느냐고 당시 이만수 2군 감독에게 허가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만수 2군 감독은 야구가 없는 휴일이라 괜찮겠지 하면서 김성근 감독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OK를 했는데, 2군 훈련과 재활까지 모두 챙기는 김성근 감독이 어딜 감히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냐라고 화를 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9] 이와 정반대되는 일화를 전하는 가장 확실한 인물은 제리 로이스터 감독,[20]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다.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지 4일 만에 수석코치인 김종모를 경질하고, 타격코치 황병일을 수석코치에 앉혔고 kt wiz에 와서도 황병일을 불렀다.[21] 김종모에겐 부임할 때 끝까지 같이 가자고 말해 놓고 우승하고 나니 껄끄럽다고 경질해 버린 것. 김종모가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스타였음던지라 배타적이던 기아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조범현이 김종모를 경질한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조범현이 부임할 당시 프런트에서는 조범현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차기 감독을 염두에 두고 이순철, 김종모 중에서 수석코치를 임명하라고 조범현에게 요구했고 결국 조범현은 김종모를 선택했지만 이는 감독의 의중과 상관없이 KIA 구단에서 수석코치로 임명된 것이었다. 즉 '김성근 감독 - 이만수 수석코치'와 비슷한 예. 우승 직후 축하연 자리에서 본인이 수석코치라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살짝 밀친 뒤 김종모가 아닌 황병일을 옆에 앉혔는데 김종모는 이 장면을 보고 "곧 나가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우승 이후 이방인으로 지역색이 강한 선수단을 장악하기 위해 잠재적인 라이벌을 내치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거기다가 시즌 중에 김상현, 박기남 ↔ 강철민 트레이드 때도 김종모는 찬성, 조범현을 반대 의견을 내는 등 서로 선수단 운영에 대한 이견이 커서 시즌 중에도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에도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덕아웃에서 조범현과 본인 라인의 코치들하고만 포옹하는 등 여러모로 좋지 않은 관계였다고 한다. 코치 관련 문제는 누굴 내보냈냐가 아니라 그래서 누굴 무슨 명분으로 데려왔냐에 있었다. 물론 사전에 해임을 할 거면 언질을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상태에서 언질도 안 주고 바로 잘라버렸으니 모양새가 상당히 나쁜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팀 프랜차이즈 스타인 장성호를 찬밥 취급하여 결국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하게 만들었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조범현 감독의 부임기간 동안 장성호의 성적은 하락세였고 2009년에 1루수 경쟁자 최희섭은 골든 글러브를 받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1루를 빼더라도 좌익수에도 타점 생산능력이 좋은 유망주 나지완의 육성을 위해 주전 좌익수로 기용했기에 장성호는 백업 좌익수로 밀리고 만다. 그래서 장성호는 주전 보장이 되던 한화로 가고 싶어했고[22] 2010시즌 중 장성호가 원하는 대로 팀을 옮겨준 것이 조범현이다. 2014년 11월 장성호의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의 훈련 태만으로 인해 화가 난 조범현 감독에게 오히려 대들며 트레이드 요청을 했다고 하며, 이는 4년간 서로 간의 앙금으로 남아 있다가 2014년 5월 조성환의 중재로 인하여 풀어지게 되었다.[23] 여기에서 조범현 감독의 대인배적인 모습이 드러나는데, 훈련 태만과 관련된 다툼이 있었다고 언론에 언급했다면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겠지만 조범현은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고 그 모든 비난들을 참아넘겼다.[24] 그리고 장성호가 2014 시즌을 마치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후, kt wiz 감독으로 부임했던 조범현 감독은 장성호를 다시 받아들여 현역 생활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감독으로 부임한 후 조경환을 방출한 것을 두고도 뒷말이 많았었다. 조경환은 조범현에게 밉보였는지 SK 와이번스에서 2006년 6월 26일에 웨이버 공시됐고, KIA 타이거즈가 계약 양도를 신청하여 이적했다. 그런데 조범현이 KIA의 감독으로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조경환을 내친 것이었다. 비슷한 경우로는 김동수가 있었다. 조범현이 삼성 라이온즈의 배터리코치 시절 진갑용을 밀어주는 등 조범현과 김동수는 사이가 나빴고, 결국 김동수는 진갑용에게 밀려 2002년 SK로 트레이드되었지만 2003년 시즌을 앞두고 조범현이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김동수부터 SK에서 제거해 버렸다. 그리고 FA 자격을 얻은 애제자 박경완을 영입했다.[25]

이재주의 경우는 방출 당하기 직전이던 2009년 말 딸의 출산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어서 아무리 프로라도 이것은 좀 아니지 않냐는 말도 나왔지만 사실 이것은 이재주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이재주는 말년에 2군 훈련 시간에 늦게 나오는 데다가 좀 더 훈련하라는 코치들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자신의 벤츠를 몰고 가 버렸다. 이렇게 팀의 질서를 해치는데 연봉은 많이 받고, 성적까지 좋지 않았으니 방출하는 건 당연했다. 2008년까지는 KIA의 거포가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장타율이 높던 이재주가 계속해서 나올 수 있었지만[26] 거포 외야수인 나지완이 성장하고, 최희섭이 각성, 김상현의 복귀가 이뤄지면서 자연스럽게 중심타선이 새롭게 갖춰졌다. 따라서 이들에 비해 실력도 떨어지고 나이는 많으면서 분위기를 해치는 이재주를 안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친정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선수를 팔아먹기도 했던 넥센 히어로즈[27]에서 영입하려고 했으나 계약하기 직전에 본인이 연락을 끊어 없던 일이 되었다.

부임 내내 팬들에 의해 저평가되고 안 좋은 모양으로 사실상 경질당했음에도 2012년 언론기고에서도 KIA 타이거즈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고, 선동열 신임 감독을 격려하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팀 성적도 부침이 심했고 가는 곳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잡음이 심했던 건 사실이라, 일각에선 '정치력'이 부족한 것 아니냔 평도 있다.

2015년 장성우 사생활 폭로 사건에서 조감독도 장성우가 뒷담화를 한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이 일은 큰 화제가 됐고 장성우는 프로야구 팬 전체에게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었다. 조범현 감독 본인도 큰 데미지를 받았지만 성우가 내게는 이미 고개를 못 들 정도로 사과를 했다. 부모가 자식한테 어찌 모질게 하겠느냐. 선수단 전체에게 새로 교육을 해야겠고 성우가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살았으면 한다. 명포수로는 못키우더라도 인간은 만들어 놓겠다.라고 조감독 본인은 장성우를 용서하였다. 여기에 박동희의 기사로 화제가 되었던 폐지 위기의 모가중 야구부를 kt 코치진들과 함께 지도하고, 2015년에는 홈경기에 초청하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려지며 점점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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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터넷방송 라디오볼 2014년 4월 28일 방송에서 정철우 야구전문 기자는 "대한민국에 조범현, 김경문 이후에 배터리 코치라고 불릴만한 배터리 코치가 나오고 있지 않다" 라고 언급하였다.[2] 특히 홈경기가 끝나면 집 근처 놀이터에서 훈련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3] 특히 김응용이 삼성감독으로 있었을때는 진갑용 주전기용을 대놓고 주장했다는 썰도 있다.[4] 그리고 김동수는 박경완의 이적 후 포수 자리에 공백이 생긴 현대로 이적, 2003년 생애 첫 3할을 기록하고 골든글러브를 한 번 더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현대의 우승에 기여한 것은 덤.[5] 그나마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상무에 입대시켜 군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고 제대 후 20대 중반의 군필 포수가 되었다. 실제로 후임 감독 김성근이 군 문제가 해결된 20대 포수라는 정상호의 장점을 살려 트레이드 카드로 사용하려고 하였던 바 있다.[6] 조범현이 온 이후 두각을 보여준 포수가 차일목인데 사실 2008년 주전 포수 김상훈의 장기 부상으로 백업포수 차일목을 무조건 기용할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도 기용만 한다고 다 크는건 아니니 조범현의 공이라 보는 사람도 있긴 한데 감독이 포수에게 붙어서 훈련을 같이 하는 자리는 아니니 가려서 듣자.[7] 진갑용, 이지영이 줄부상으로 쓰러지면서 시즌 초 꼴찌후보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좌절하던 2014 시즌 삼성팬들에게 이흥련이 지금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 걸 보면... 거기다 이흥련은 실질적인 데뷔 첫 해부터 홈런도 쳤고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했다.[8] SK 감독이었는데,정규시즌 4위였으나 2003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KIA를 연달아 꺾었으나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대혈투 끝에 당시 왕조를 구축했던 현대 유니콘스에게 왕좌를 넘겨준다.[9] 2009년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서 2009년 페넌트레이스 우승 및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도 7차전 혈투 끝에 SK 와이번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10] 이마저도 전반기에는 52승 35패 1위로 마감했으나 후반기에 18승 28패로 DTD를 찍어버려 이렇게 된 것이다. 다만 201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이번에는 SK 와이번스에게 패권을 1승 뒤 3연패로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넘겨주고 KIA 타이거즈 감독에서도 사실상 경질되었다.[11] 다만 이 쪽은 송은범이 고교 재학 시절부터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12] 즉 SK 시절 조범현은 투수진에 있어서는 정우람과 윤길현을 제외하면 투수진 발전에는 남긴 게 없다. 당시 19세의 신인이었던 송은범이 (부모님과 다름없는)조부의 발인식에 가는 걸 못가게 해서(발인식은 아침에 하니 경기 전까지 돌아오는 것도 가능했고 결정적으로 이날은 우천취소가 되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건 덤, 실제로 이 두가지가 SK 와이번스 창단후 4년만에, 자신이 감독으로 부임한 해 바로 코시에 진출했음에도 SK 와이번스 팬덤들로부터 저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다.[13] 우승을 걸고 이미 재계약을 한번 해주었는데 상승하는 전력에도 불구, 최종 성적이 오히려 더 내려갔다.[14] 정근우는 좌익, 2루, 3루, 유격을 오가다가 2년차인 2006년부터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차고 그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김강민, 박재상, 조동화는 이진영과 박재홍이 외야 주전 두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 나머지 한 자리에 돌려가며 꾸준히 기용되었고 최정 역시 장타 부문에서는 김재현-이승엽-김태균에 이어 10대 나이에 두 자릿 수 홈런을 치는 등 괜찮은 모습을 보였으나 1, 3루를 번갈아가면서 보았다. 물론 포지션 문제가 있었고 전임자만큼 타격 코칭을 해주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1군 경험은 충분히 쌓아주었다.[15] 프런트진이 강제로 데려오긴 했다.[16] 김성근 감독의 말에 따르면 선수 시절 김경문 감독은 '여기서 맞아도 괜찮다'는 식으로 전체적으로 큰 틀을 그리고 게임을 할 정도로 대범한 성격이었던 반면에 조범현 감독은 상황 하나하나를 노트에 빼곡히 적고 밤새 분석했을 정도로 치밀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이 감독이 된 후의 철학에서도 나타나는 듯.[17] 장례식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불타는 그라운드에서도 송은범이 "할아버지 발인하는 날 있잖아요. 묘로 가는 날. 비가 진짜 많이 왔어요. 게임이 취소 된 거예요."라고 장례식이 아니라 고인을 장지로 모시는 "발인식"에 가지 마라는 지시를 했다고 인터뷰했다. 이게 와전돼서 장례식 자체를 못 가게 한것으로 팬들이 오해한 것. 이후 기사에서도 장례식에는 단 하루지만 다녀왔다고 밝히고 있다.[18] OBS에서 SK 선수들의 일상을 방영해주었던 불타는 그라운드라는 방송을 통해 송은범의 눈물과 함께 그 사연이 소개되어 송은범은 긍정적으로 이미지가 좋아졌고 조범현 전 감독에 대한 비난은 더 거셌다. 방송 캡쳐는 이쪽[19] 물론 그래놓고 김성근은 6년 후 자기가 급해지니 경기 중 자리를 비워 병원으로 가버리는 등 졸렬하기 그지 없었다. 자세한 건 2016년 송창식 혹사 사건 참조.[20] 제리 로이스터는 "가족과 관계된 일"이라면 무조건 가족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한 일화를 들자면 송승준의 경우에는 4강 싸움을 하고 있던 와중에도 아내의 출산일에 맞춰서 선발도 무기한 연기시켜줬었다.[21] 그래서 황병일 수석코치도 kt와 조범현 감독의 재계약이 불발되자, 두산에서 함께한 적이 있는 김진욱이 왔음에도 조범현 감독 보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22] 특히 장성호와 비슷한 타입이던 이영우가 은퇴를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한화에는 자리가 있었다. 정작 한화에 가서 김경언에게 밀리는 신세가 되어서 문제지.[23] 여담으로 조범현, 조성환, 장성호는 모두 충암고등학교 선후배 지간이다.[24] 또한 장성호가 트레이드 될때 사석에서 성호 덕분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었고 한화에서 잘하라는 말을 기자에게 남기기도 했다.[25] 그리고 김동수는 박경완의 이적으로 포수진에 공백이 생긴 현대 유니콘스에 이적해 생애 첫 3할을 치는 등 완벽히 부활하며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한다.[26] 2군 포수인 송산이 4번 타자를 맡았을 정도로 답이 없었다.[27] 이재주는 태평양-현대에서 뛰다가 2002년 KIA 타이거즈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넥센은 공식적으로는 현대 유니콘스와 별개의 구단이지만 삼청태현의 선수단과 일부 코치진을 승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