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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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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쓰촨성지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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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궁시 | Zigong City
시정부 소재지 쓰촨성 쯔궁시 쯔류징구
단구이다제443호
四川省自贡市自流井区丹桂大街443号
지역 시난
면적 4,372.6km²
하위 행정구역 4구 2현
시간대 UTC+8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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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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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 강과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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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파일:중국 쯔궁 3.jpg
염상들의 회관 중 하나였던 푸시강변의 왕야묘
파일:공룡 중국.jpg
공룡지향을 상징하는 아시아 최초의 공룡 박물관

1. 개요2. 역사
2.1. 염철업의 발달2.2. 당·송대의 번영2.3. 대몽 항전2.4. 명·청대의 부침2.5. 염도 (鹽都)2.6. 신해혁명의 기수2.7. 군벌 시대2.8. 대일 항전2.9. 전후 쇠퇴와 공업화2.10. 세기말 위기와 부흥 노력
3. 교통

[clearfix]

1. 개요

쓰촨성 중남부의 지급시. 충칭청두에서 각각 서쪽과 동남쪽으로 130km, 이빈시에서 북쪽으로 55km, 루저우에서 서북쪽으로 65km 떨어진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250만명으로, 그중 도시 자체에는 100만여명이 거주한다. 쯔궁을 대표하는 산물로 공룡 화석과 소금이 있는데, 각각을 차용하여 공룡지향 (恐龍之郷) 혹은 천년염도 (千年鹽都)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특히 후한대부터 생산된 소금인 정염 (井鹽)은 지금도 일대의 주요 특산물 중 하나다. 지명 자체도 일대의 양대 자연 염전인 쯔류징 (自流井)과 궁징 (贡井)의 앞글자를 합친 것으로, 둘은 지금도 구 이름으로 남아있다. 소금 생산 덕에 일대는 전통적으로 부유했고, 당·송·명에는 황자들이 분봉되거나 감 (监) 혹은 부 (府) 혹은 주 (州)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비록 몽골-남송 전쟁명청교체기에는 초토화되어 폐허로 변하고 인근의 러산이나 루저우에 병합되기도 하였으나 호광 이주민들로 복구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는 태평천국으로 혼란해진 회염을 대신하여 호광에 소금을 보급, 중국 자본주의의 맹아라 불릴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하였다. 동시에 외국인들도 자주 왕래하며 근대화의 물결이 일어 신해혁명 당시 쯔궁 출신 지식인들이 활약하였다. 쯔궁은 또한 중화민국 설립 후 최초로 설치된 20개 도시 중 하나였고, 중일 전쟁 당시 재차 강남 지방에 소금을 공급하며 쌓은 부를 바탕으로 중국 도시들 중 국민혁명군에 가장 많은 성금을 조달하였다.[1] 60년대에는 마오쩌둥의 삼선건설 (三线建设)의 일환으로 염화바륨과 천연가스에 기반한 화학 공업 도시로 변모하였다. 70-80년대에는 쥐라기 시대의 공룡 화석이 대거 발견되었다. 시가지는 쓰촨 4대 강 중 하나인 퉈장의 지류 푸시강의 양안에 형성되어 있다. 시내에는 소금 박물관, 동북쪽 외곽에는 공룡 박물관이 있다. 도시 동쪽에는 산업 단지가 있고, 서북쪽 7km 지점에는 쯔궁 펑밍 공항이 자리한다. 가수 탄웨이웨이의 고향이다.

2. 역사

파일:중국 쯔궁 9.jpg파일:중국 쯔궁 7.jpg
전통적인 소금 생산 시설인 염장의 시추탑과 소금물을 끓이는 솥

상고대에 일대는 현지 국가인 촉과 파의 경계였고, 남만 계열의 요인 (僚人)[2]들이 살았다. 한편 춘추시대후베이성 스옌 일대에는 인근 산지의 암염을 채굴해 소금을 생산하던 용 (庸) 나라가 있었는데, 기원전 611년 초장왕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소금 생산 기술을 가진 그 유민들이 장강을 따라 서남쪽으로 이주하여 현재의 쯔궁에서 소금 광산을 발견, 정착하였고 현지 요족들과 동화되었다. 기원전 285년 진나라가 파촉을 정벌하며 촉군 혹은 파군에 배속되었고, 남쪽으로는 야랑국과 접하였다. 촉군, 파군, 야랑국이 만나는 거점이었기에 진한대에 중원과 서남이 (쓰촨 남부와 윈난)를 잇는 오척도 (五尺道)가 이곳을 지나 건설되었다. 궁징구에서는 진한대에 조성된 요족 양식의 절벽 무덤이 발견되었다. 오척도는 후일 쓰촨의 소금과 토번의 말을 교환하는 차마고도의 일부가 되었고, 쯔궁 지역은 중원과 티베트를 잇는 무역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2.1. 염철업의 발달

전한 대에 광한군 (廣漢郡)에 속하였다가 기원전 135년 한무제의 서남이 (야랑국) 정벌 후 신설된 건위군 (犍爲郡)에 속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현재의 러산에 해당되는 남안현 (南安縣) 관할이었다. 동시에 일대에선 제철업이 발달하였고, 이러한 기술력을 배경으로 후한 장제 시기에 요족 족장 매택 (梅泽)이 사냥 도중 부순에서 소금물이 솟아나는 염정 (鹽井)을 발견하며 본격적인 정염 (井鹽)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후 매택은 현지 사당에서 신으로 추앙받았다. 정염 산업이 발달하며 213년 익주 유장은 쯔궁, 네이장, 루저우 일대를 건위군에서 분리시켜 강양군 (江陽郡)으로 편성하였다. 삼국시대에 정염은 비단과 함께 촉한의 주요 수입원이자 군대 양성의 재원 중 하나였고, 제갈량이 친히 방문하여 직접 소금 제조를 해보기도 하였다. 서진 대에 이르러 부순의 염정은 중국 최대의 소금 생산지로써 부세염정 (富世鹽井)이라 명명되었고, 당시 우물의 깊이는 무려 77.5m였다고 한다.

4세기 성한 시기 현 도심에서도 요족들에 의해 대공정 (大公井)이 발견되었고, 이는 세염정과 함께 일대의 양대 염정으로 개발되었다. 제철 역시 발달하여 동진 시기인 414년 염철 산업 육성을 위해 현 러산-쯔궁의 경계점에 야관현 (冶官縣)이 설치되었고, 479년에는 유송남제의 정권 교체를 틈타 요족들이 한족 주민들을 납치해 염철 산업에 종사시키기도 하였다. (철산요, 铁山僚) 남제 시기인 501년 러산과 쯔궁 사이의 라이무진을 중심으로 한 남안군 (南安郡)에 소속되었고, 양나라 시기에는 노주 (瀘州) 강양현 (江陽縣)에 속하였다. 554년 서위가 쓰촨을 정복한 후 중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염정의 소금 생산이 늘며 시장의 확장 및 상주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따라서 북주 시기인 567년 마침내 남안군이 폐지되고 설치된 낙원군 (雒原郡) 하에 부세염정을 중심으로 한 부세현 (富世縣)이 세워졌고, 대공정에는 그에 귀속된 한단계 아래의 행정 구역인 공정진 (公井镇)이 설치되었다.

수문제 대인 582년 주현제의 실시로 낙원군이 폐지되자 부세현은 재차 노주에 소속되었다. 이듬해에는 현의 서북쪽에 군사 구역인 위원위 (威远衞)[3]가 세워져 소금 채굴에 필요한 철에 대한 요족들의 독점을 억제하였다. 607년 수양제의 군현제 실시로 노주는 노천군 (泸川郡)으로 개편되었고, 당나라 대인 618년 일대의 염철 자원에 대한 확고한 장악을 위해 러산과 룽현에 걸쳐있는 대뢰현 (大牢縣)과 위원현 (威远縣)을 합쳐 영주 (荣州)를 설치하며 공정진 (현 궁징구)에 그 치소를 두었다. 동시에 공정진은 공정현 (公井縣)으로 승격되며 노주 부세현과 분리되었다. 이로써 대공정과 부세염정은 각각 공정현과 부세현으로써 자립하였고, 한동안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626년 노주 부세현은 폐지된 동북쪽의 옛 내풍현 (현 룽창현)을 관할하게 되었고, 이듬해 영주 대뢰현에서 분리된 욱천현 (旭川縣)이 쯔궁 서부의 룽현을 치소로 설치되었다.

비슷한 시기 현 시가지 동쪽 선시고진 (仙市古镇)에 영주 화의현 (和義縣)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영주는 공정 (궁징구), 욱천 (룽현), 화의 (옌탄구), 위원 (네이장 웨이위안현), 응령 (러산 우룽차오구), 자관 (러산 천웨이현)의 6현으로 구성되었다.[4] 632년에는 영주의 치소가 공정현에서 욱천현으로 이전되었고, 이는 후일 욱천현이 영현 (룽현)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한편 노주의 부세현은 649년 당태종 이세민와의 피휘를 위해 부의현 (富義縣)으로 개칭되었다. 당대에 영주 일대는 정염 & 야철 산업이 상호 보완적으로 발달하고, 양대 필수품인 염철의 주요 생산지로써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724년 당현종의 6남 이완 (李琬)은 이황 (李滉)으로 개명한 후 초대 영왕 (荣王)으로 영주에 분봉되었을 정도였다. 742년 군현제 실시로 영주는 화의군 (和義郡)으로 개편되었으나 758년 다시 영주로 복귀하였고, 영왕 작위 역시 화의군왕에서 영왕으로 돌아갔다.

2.2. 당·송대의 번영

파일:중국 대불 9.jpg파일:중국 대불 6.jpg
중당 대인 817년 룽현에 조성된 영현대불의 외부와 내부 모습

영왕 작위에는 한세기 반동안 8명의 왕공들이 임명되었다. 862년에는 당의종이 숙부 이책 (李㥽)를 영왕에 봉하였다. 당대 영주, 부의산 소금은 후베이, 장시 등지로 수출되었다. 안사의 난 후에는 쓰촨절도사가 일종의 민병대장인 부의단련영감을 맡아 염정의 치안을 유지하였고, 이어진 5대 10국기의 전촉후촉 정권에서는 재상이 영주 자사를 역임하고 상서우복야[5]가 부의현의 치안과 발운 (조세 운반) 등을 맡을 정도였다. 북송 초엽 부의현은 부의감 (富義监)으로 승격되어 (기존에 속하던) 노주와 동급이 되었고, 함께 재주로 (梓州路)에 속하였다. 967년에는 영주와 화의현이 폐지되었고, 일부는 부의감에 배속되었다. (다만 영주는 1100년 전후로 재설치됨) 976년 부의감은 송태종 조광의의 피휘를 위해 부순감 (富顺监)으로 개칭되었고, 현 푸순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036년 조정은 태상박사[6] 주연준을 부순 지감 (知监)으로 봉하여 그곳에 문묘와 서원을 건립하게 하였다.

이로써 일대에 유교 문화가 확산되었고, 요족이 주를 이루던 주민들도 점차 문화적으로 한족에 동화되었다. 1064년에는 부순감 하에 부순현 (富顺縣)을 설치하였고, 1067년 욱천현은 송신종 조욱의 피휘를 위해 영덕현 (荣德縣)으로 개칭되었다. 1068년 부선현의 지감 (혹은 염감, 鹽监)이 폐지되었으나 부선감 자체는 유지되었고, 서남쪽 산지를 관할에 더하였다. 1071년에는 공정현이 폐지, 공전진으로 격하되어 서쪽의 영덕현에 귀속되었다. 당대에 이어 송대에도 전국적인 소금 거래가 활성화되며 일대의 염철업은 발전하였고, 수직으로 깊게 채굴하는 탁통정 (卓筒井)과 같은 새로운 공법의 발전과 함께 영덕-부순의 소금 생산은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경제 성장 덕에 남송 시기인 1205년 송영종이 위국공 조엄 (趙儼)[7]을 영왕에 봉하며 당말의 분봉왕 작위가 부활하였다. 그 왕부인 영왕구성 내의 현 룽현현중학애는 영왕포정비가 남아있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되었다.

1207년 영왕 조엄은 황태자로 책봉되어 임안부 (항저우시)의 동궁으로 처소를 옮겼고, 조순 (趙詢)으로 개명하였다. 다만 그는 영종이 생각보다 장수하여 15년간 태자로 지내다 1220년 요절하였고, 1224년 친척 조윤이 송이종으로 즉위하였다. 이종은 부친 조희로를 영왕으로 추존하였는데, 그는 이미 망자였기에 차남 조여예가 작위를 이었다. 한편 1233년에는 영종의 부친인 송광종이 한때 영주 자사를 역임했던 과거를 들어 영주가 '천자의 잠저'로써 광종의 연호인 '소희'를 따 소희부 (绍熙府)로 승격되었다. 남송 대에 영주는 황제의 친동생이자 황실의 어른인 조여예가 그곳에 봉해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 & 경제적으로 크게 중시되었고, 대도회 (大都会), 즉 대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몽골-남송 전쟁 중인 1236년 왕세현몽골 제국군에 점령되었고, 소희부는 호구 조사가 마비될 정도로 파괴되었다. 영왕 조여예 역시 소흥부 (사오싱)를 거쳐 임안부로 도주하였다.[이후]

2.3. 대몽 항전

1차 침공 후 소희부는 영덕현에서 공정진 옆 홍학진 (鸿鹤镇, 현 도심의 쯔류징구) 옮겨졌으나 1258년 몽케 칸이 친히 이끈 2차 침공 당시 소희부와 영왕구성 모두 버려졌고, 같은해 소희부는 폐지되었다. 한편 동쪽의 부순에서는 치소인 감부 (监府)와 주민들을 인근 호두산 (虎头山)으로 옮기고 산 위에 내성과 외성을 두른 새 도시를 세워 몽골에 결사 항전하였다. 호두산의 부순성은 동쪽의 합주 조어성과 함께 대표적인 항몽 도시로써 1265년부터 10여년간 몽골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으나 1275년 지감 왕종의 (王宗義)가 항복하였고, 조어성 역시 1279년 뒤따르며 사천은 원나라 령이 되었다.

몽골 치하에서 폐허가 된 영덕-공정 일대는 (전한대 이래 처음으로) 러산의 가정부 (嘉定府)에 편입되었고, 옛 시가지로 돌아온 후 현으로 격하되었던 부순에는 1275년 부순안무사 (富顺安撫司)가 설치되었다가 1283년 부순주 (富顺州)로 승격되었다. 다만 옛 소희부민들은 비밀 조직을 결성, 몽골 순찰병들이 지날 때에 염정의 수문을 열어 그들을 살해하는 등 반원 투쟁을 이어갔다. 이에 원조는 1338년 소희군민선무사 (绍熙軍民宣撫司) 겸 도총사사 (都总使司)를 설치하였다. 다만 이는 임시 방편에 불과하였고, 2년 후 선무사를 폐하고 재차 영주를 설치하며 재차 가정로 (嘉定路)에 소속시켰다.

2.4. 명·청대의 부침

파일:중국 쯔궁 1.jpg
1736-52년 산시 상인들이 세운 서진회관 (西秦会馆)을 개조한 염업역사박물관 (自贡市盐业历史博物馆)

원명교체기명하를 지나 1371년 사천은 명나라 령이 되었고, 기존의 부순주는 다시 현으로 격하되어 현 이빈시인 서주부 (叙州府)에 예속되었다. 1376년에는 영주 역시 영현 (荣縣)으로 격하되어 러산의 가정주 (嘉定州)에 예속되었고, 남쪽 산지는 의빈현과 남계현에 넘어갔다.[9] 영락제 연간 청산협 (青山峡) 이남 진들이 부순현에 귀속되었고, 그중 하나인 조화진에는 조화순검사 (趙化巡检司)가 설치되어 일대의 군정과 민정을 맡았다. 한편 원명교체기 당시의 인구 손실로 명대에 쓰촨 지방에는 호광 지방의 농민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그들이 전수한 선진 농법과 신작물 덕에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영현과 부순현 일대도 예외는 아니었고, 특히 부순현의 경우 인구가 크게 늘어 성화제 연간에는 12만 3천으로 파촉 분지의 현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다. 한편 영현 산하 공정진의 소금은 조정에 진상되어 명성을 얻었고, 1529년 영현이 공정현으로 개칭되기에 이른다.

한편 16세기 신라염정이 개발되어 신라염과사를 거쳐 신라진이 설립되었는데, 현 도심지인 자류정 및 공정진과 함께 영현에서 부순현으로 이관되었다. 그 무렵 부순의 부의염정에 담수가 유입되어 결국 버려졌기에 자류정염장 (自流井鹽场)과 공정진이 대신 일대의 주요 소금 산지로 부상하였다. 앞글자를 따 '쯔궁(자공)'이라 불리게 된 일대에서는 소금 생산 가구와 계약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여 가경제 연간에 이르면 중국 내지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나타났다고 분석될 정도로 경제가 융성하였다. 1567년 부순현의 동부가 융창현으로 분리되었지만 공정과 자류정을 품은 부순현의 위상은 여전하였고, 이는 1616년 주원장의 11남인 촉왕 주춘의 8대손인 촉공왕 주봉전의 3남 주지주 (朱至澍)가 부순왕 (富顺王)으로 책봉되며 나타났다. 명대에 번왕이 현에 분봉되는 것은 예외적인 일로, 공정과 자류정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주지주 역시 현에 불과한 영지에 부임하지 않고 조세만 취하였다.

15-16세기 소금 산업의 성장은 급융업과 상업의 성장을 수반하였고, 부순은 쓰촨 지방에서 가장 부유하며 가장 인구가 많은 현이 되었다. 동시에 문화와 학문적으로도 발달하여 경태십재자 (景泰十才子) 중 하나인 안탁 (晏鐸), 가경팔재자 (嘉靖八才子) 중 하나인 웅과 (熊過)[10] 등을 배출하였다. 명청교체기 이자성의 대순 정권 시절 공정진은 부의염장 (富義鹽场)이라 명명되었다. 하지만 이어진 장헌충의 대서 정권 시절 공정 일대는 전란으로 크게 파괴되어 호적이 거의 비어버리고 백리간 연기도 나지 않을 정도로 폐허로 변하였다. 부순왕을 거쳐 촉왕에 오른 주지주 역시 살해되었고, 일부 생존자들은 현 쭌이의 인파산 (蔺播山)으로 피신하였다. 1646년 청나라 군이 진주했으나 서주 (이빈)에서 반청 군대에 격퇴되어 일대는 남명 영력제 정권에 편입되었고, 한동안 쓰촨 북부와 남부는 각각 청조와 남명이 둘이서 나눠가졌다. 하지만 일대는 사실상 무인지대로 변한 후였다.

오랜 전란과 학살로 거주민은 없었고, 행정 체제 역시 부재했으며 소금 생산 역시 중단되었다. 그리고 1650년경 일대를 재차 점령한 청군은 그나마 남은 주민과 물자를 약탈하고 살해하였다. 폐허로 남은 부순에 대해 청조는 세금을 면해주었고, 이로써 새로이 유입된 호광 이주민들의 노력과 함께 복구가 진행되었다. 10여년이 흐른 순치제 말엽부터 소금에 대해 소표 (小票)라는 세금이 부분 부과되었다. 하지만 1670년대 삼번의 난을 겪으며 쓰촨은 다시 전장이 되었다. 그 결과 강희제 후반기인 1700년경 부순 지현으로 부임한 전소륭 (錢绍隆)은 '노상에 행인이 없고, 도로에는 가시가 돋아 있으며, 빈 성은 열려있고, 굴뚝엔 연기가 없다'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반세기 가량 유령도시로 남아있던 부순은 호광, 광둥, 장시, 푸젠 등 강남 전반부에서 쓰촨으로의 사민이 이루어지며 점차 인구를 회복하였다. 강건성세의 안정기가 이어지며 영현이나 위원현[11]으로 피신했던 이들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2.5. 염도 (鹽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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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연간에 세워져 1860년에 농민 반란으로 전소되고, 1865년 재건된 환후궁 (自贡桓侯宫)

강희 연간에는 1673년 가정주가 가정부 (嘉定府)로 승격된 것을 제외하면 특기 사항이 없었다. 옹정제 연간 조정은 소금에 대한 전매제인 인안제도 (引岸制度)를 선포, 정확한 호구 조사와 소금 정량제를 통해 소금 밀매를 막고 관에서 거래를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18-19세기 염상들은 당국에게서 소금 판매 허가증인 염인 (鹽引)을 구매하여 장사하였다. 쯔궁 염정의 번성에 관심을 보인 옹정제는 1729년 친히 조서를 내려 공정 관할에 있던 자류정을 현에 준하는 자류정승서 (自流井丞署)로 승격시켜 그대로 부순현에 소속시켰고, 공정 역시 공정현승서 (公井縣丞署)로 승격시켜 영현에 배속시켰다. 이러한 승서들은 오직 소금 관련 업무를 담당한 행정 기구였고, 승서의 설치와 함께 공정과 자류정은 각각 영현과 부순현으로 분리되었다. 점차 안정이 회복되며 일대는 명대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명성을 되찾아 재자지향 (才子之鄕) 혹은 부순재자내장관 (富顺才子内江官)이라 불리게 되었다.

건륭제 연간 쯔궁염정은 전국적으로 가장 중요한 소금 산지 중 하나로 번영하였고, 중국 최초의 주식이라 불리는 동성정약 (同盛井约)이 공정에서 출시될 정도였다. 다만 청조의 인안제도는 시장 경제의 통제로 자본주의의 성장을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몇몇 세습적인 염상 가문만이 지역간 장거리 교역에 종사하게 하고 나머지는 사염이라 하여 처벌하였기에 결국 공정 지역 염업 발전을 방해하였다. 한편 인접한 자류정과 공정을 아우른 명칭인 쯔궁은 19세기 가경제 & 도광제 연간 부영염장 (富荣盐场)을 중심으로 점차 지명으로 고착화되었다. 아편전쟁 후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내야했던 청조는 자류정의 염세로 일부를 충당하기로 하였고, 이로써 영프 양국은 자류정에 염세추취협리관아 (鹽稅抽取協理官员)와 협리공서 (協理公署)를 설치하였다. 이후 쯔궁에는 많은 서양 상인과 선교사들이 유입되어 천주당, 기독교당, 복음당, 복음의원 등이 세워졌다.

전통적으로 옛 형주에 해당하는 상악 (湘鄂) 지역은 후베이성 일부를 제외하고는 화이허 일대에서 생산되던 회염 (淮鹽)을 수입했는데, 특히 량장[12]총독 증국번이 쓰촨의 천염을 배척하고 회염을 적극 도입하였다. 하지만 1850년대 강남을 휩쓴 태평천국의 난으로 회염의 생산과 수운 교통이 마비되자 결국 조정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쓰촨의 소금을 상악에 들이니, 이를 천염제초 (川鹽濟楚)라 한다. 이로써 천염의 최대 생산지인 공정염정은 크게 발전하여 촉에서 제일 부유하다는 부서갑우촉중 (富庶甲于蜀中) 혹은 쓰촨에서 우수한 지역을 뜻하는 천성정화지지 (川省精华之地 )라 불렸고, 특히 자류정은 염도 (鹽都) 불릴 정도로 번성하였다. 이 시기 쯔궁에선 염상들이 우후죽순 늘어났고, 대량의 금을 축적한 상인만 1700가호를 넘었다 한다. 다만 전국이 혼란한 중에도 안정을 누리던 쓰촨 지방도 1856년 천경사변 후 익왕 석달개[13]충칭 방면으로 이동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혼란이 일었다.

1859년 가을 윈난에서 봉기한 이영화 (李永和)와 난조정 (蘭朝鼎)이 쓰촨 부순현에 진입하여 자류정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진 우불진 (牛佛镇)에 이르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충칭에서 부순으로 파견된 청군 통령 (統領) 장대동 (张大同) 역시 자류정 섬서묘 (현 염업역사박물관)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켰다. 자신감을 얻은 이영화는 태평천국을 모방하여 우불진을 수도로 삼고, 현지 천후궁[14]에서 순천왕 (顺天王)에 올랐다. 이에 현지 염상 세력은 자류정염신 (自流井鹽紳)을 조직하여 이란의군 (李蘭義軍)에 맞섰고, 성벽이 둘러지지 않은 자류정의 수비를 위해 동북쪽 14km 지점에 삼다새 (三多寨)란 성채를 세워 농민군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고자 하였다. 양측은 대안채전투 (大安寨之战)에서 격전을 벌였고, 수비에 성공하여 쯔궁은 약탈을 피하여 함풍제에 이어 동치제 연간에도 중국 최대의 공업 도시이자 서부 중국 최대의 경제 도시로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19세기 중반 쓰촨을 방문한 독일인 지질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자류정을 '세계 최고, 최대의 사업체'라 묘사하였고 1888년 자류정을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 버질 키텐든 하트는 '두말할 나위가 없이 중요한, 매우 번영한 언덕 도시'라 기록하였다. 후자가 집필한 자류정고찰기 (自流井考察记)에 의하면 당시 도시에는 수천의 산시 상인 (진상)과 수백의 장시 상인들이 왕래하였고, 그외에도 수천의 사업가 및 강력한 수비 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무렵 한세기 가량 이어지던 인안제도가 폐지되자 현지 염상들은 염업에 대한 현 & 성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1863년 부영염장 당국이 수리국을 세우자 소금 생산에 방해가 된다 여긴 대염상 왕여조 (王餘照)와 안효범 (顏曉帆)은 염공들을 시켜 파괴하게 하였다. 이에 부순 지현이 대노하여 왕여조를 잡아 가두었는데, 후자는 얼마후 전국적인 수해가 발생하자 조정에 은 7만냥을 기금으로 바쳤다.

이에 조정은 그를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안찰사 관직과 2품에 해당하는 의복까지 하사하였고, 성지가 다다른 즉시 왕여조는 홍정화령[15] 관모와 자색 관복을 착용한 채로 의기양양하게 감옥을 나섰다. (水廛事件, 수리사건) 1877년 이번에는 쓰촨 총독 정보전 (丁寶楨)이 밀수 감시를 명분으로 관운국 (官運局)을 설치하여 소금 운송을 통제하려 하자 큰 손해를 보게 된 염상들의 대표로 왕여조가 나서 조정의 인맥을 동원하여 호방 및 도찰원에 줄곧 상소하였다. 그가 또다시 공권력에 맞서는 것을 본 정보전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크게 혼을 내주기로 결심하여 왕여조의 잘못들을 낱낱이 적어 보고하였고, 이에 분노한 서태후는 우선 그를 면직하고 정보전에게 넘겨 면밀히 수사한 후 일벌백계토록 하였다. 따라서 한동안 염상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쯔궁 일대에서 위세를 떨쳤던 거상 왕여조는 몰락했다. 이후 상인들은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되 대체적으로 조정에 순응하는 태세를 취하였다.

경제적 번영과 함께 자류정에는 중국 각지의 상인과 이주민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출신에 따라 각각 고향 사당인 종묘 (种庙)를 세웠다. 종묘는 사실상 회관 (会馆)의 기능을 하였고, 동향 상인들끼리 모여 각종 문제를 논의하고 묘회와 같은 행사를 통해 결속력을 다지는 등 상호 협력하여 이익을 도모하였다. 유명한 종묘 / 회관으로는 서진회관, 천주묘, 호광묘, 강서묘, 남화궁, 천상(후)궁 등이 있었다. 다만 활발한 교통을 위해 성벽이 둘러지지 않았기에 염업 자본가들은 염경 (鹽警)이나 자경단을 꾸려 염정과 염선 등의 재산을 보호하고 은 운송을 호위 혹은 밀무역을 제한하였다. 한편 활발한 교류와 함께 근대적인 사상이 깊게 유입된 쯔궁 지역은 20세기 들어 개혁적 성향을 띠었고, 혁명사상가 우위장 (吴玉章)[영현출신]의 권유학서 (劝游学书)의 영향 하에 단마오신 (但懋辛)[영현출신]을 비롯한 15인의 쯔궁 청년이 와세다대학을 비롯한 일본 대학들로 유학하였다.

2.6. 신해혁명의 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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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쯔류정의 모습

쯔궁 유학생들은 점차 민주 혁명 이상을 품게 되었고, 흥중회나 동맹회 등에 가담하였다. 그중 대표적으로 우위장과 단마오신은 1906년 동맹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쑨원은 슝커우(熊克武)[18]와 셰펑치(谢奉琦)[영현출신] 등을 쓰촨으로 귀국시켜 무장 봉기를 준비하게 하였다. 그외에 자류정 출신 22인이 동맹회에 가입하였고, 우위장은 1907년 일본에서 잡지 <쓰촨>을 간행하여 민주 혁명론을 설파하였다. 1908년 셰펑치는 의빈 봉기를 일으켰으나 가혹히 진압되었고, 그는 후일 중화민국 육군 중장에 추서되었다. 같은해 룽밍젠(龙鸣剑)[영현출신]이 귀국하여 윈난과 쓰촨에서 동맹회를 조직하였고, 1910년 쓰촨을 중심으로 조정의 국유화에 반대하는 보로운동(保路运动)이 전개되었다.

1911년 봄 룽밍젠과 왕톈제(王天杰)[영현출신]는 영현과 공정 등지에서 대규모 민병대를 조직하여 봉기를 준비하였고, 그해 여름 부순과 영현에는 보로동지분회가 설립되었다. 9월 쓰촨 총독 조이풍이 성도에서 혁명 세력을 학살하자 동맹회는 '물 전보'[22]를 통해 봉기 개시를 알렸고, 25일 우위장과 왕톈제는 영현 감옥을 열어 수감된 동지들을 풀어준 후 관아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주민들을 모아 청조로부터의 독립과 군정부 수립을 선포하니, 무창봉기보다 한달 앞선 중국 최초의 민주 정부 설립이었다. 따라서 쯔궁 지역은 '혁명 실행의 선두'란 의미인 수의실선천하(首义实先天下)라고도 불린다. 며칠후에는 부순 지감이 도주하였고, 자류정에서 버티던 청군 통령 역시 11월 25일 반강제로 청조 이탈을 선포하였다.

4일 후 자류정에 입성한 동지회 사령관 저우홍쉰(周鸿勋)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푸시강의 염선에 있던 소금을 경매에 붙였고, 분노한 염상들은 왕위핑(王禹平)을 대표로 선출해 윈난의 전계군벌을 끌어들였다. 이에 전군(滇军)이 자류정을 장악하여 염세를 독점하였는데, 이는 쓰촨 지역 세수의 상당량을 차지했기에 성도 정부의 분노를 야기하였다. 결국 군대가 파견되는 등 내분이 발생할 지경에 이르자 충칭 촉군정부의 인창헝(尹昌衡)이 개입하여 협상을 통해 전군을 철수시켰고, 자류정에 주둔한 성도 군대는 염상들로부터 군비를 받아내었다. 한편 통상적으로 쯔궁으로 묶여 불리던 자류정과 공정은 그해 12월 30일 동맹회와 상인들의 주도로 쯔궁지방임시의사회(自贡地方临时议事会)가 설립되며 행정상 공식적으로 통합되었다.

의사회는 쯔궁을 소금 생산을 연간 4백만단 이상 유지하는 특구로 편성하였고, 12명의 상임위원을 포함한 60인의 위원을 선출하여 사당에 모여 정무를 논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삼권분립에 입각한 체제가 들어선 쯔궁지방의사회는 1912년 설립된 난징임시정부보다 앞선 중국 최초의 민주적인 지방 의회이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상인 정부였다. 1912년 중화민국 수립 후 쯔궁지방의사회는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자립을 꾀하기 위해 쯔궁을 중심으로 한 신화현(新和县) 수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졸지에 최대 수입원을 잃게 된 영현과 부순현은 크게 반대하여 이는 실패하였고, 의사회 위원 중에서 쯔궁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1914년에는 쯔궁을 다시 두개의 분현으로 분리시켰지만, 이미 쯔궁 지명은 고착화된 후였다.

2.7. 군벌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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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식으로 세워진 장백경공관 (张伯卿公馆)

1911년 혁명 후 1935년 장제스의 쓰촨 장악 때까지 일대는 군벌 할거의 혼란을 맞았고, 특히 경제적으로 중요한 쯔궁 지역은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13년 북양정부의 위안스카이선후대차관 사건으로 영,프,독,러,일 5개국에 차관을 대가로 중국의 염세를 양도하자 자류정에는 외세의 염정 수탈을 위한 염무계해소 (盐务稽核所)가 세워졌다. 외국인들은 원활한 수탈을 위해 인근 부태산 (富台山)에 협리공관 (协理公馆)이란 별장을 세워 중국인 관료나 군벌들과 친목을 다지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이러한 추태는 북양정부에 대항하는 계축전쟁으로 이어졌고, 1913년 9월 중순 자류정에서도 왕톈지의 주도 하에 봉기가 일어났지만 한달도 안되어 진압되었다. 홍헌제제로 촉발된 호국전쟁 중인 1916년 전계군벌의 차이어가 북양군벌 세력을 축출하고 자류정에 진주하였고, 더나아가 정염의 수출 통로인 충칭까지 점령하여 염세 외에도 쯔궁-충칭간 운송 보험료까지 추가 징수하였다.

이로써 염상들의 불만이 증폭되었고, 차이어 사후 호법전쟁으로 쓰촨 북부를 장악한 슝커우는 1920년 여름 쓰촨 남부의 윈난 / 구이저우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토벌에 나서 자류정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1924년 슝커우는 천계군벌 류춘후와 류샹에게 축출되었고, 그후 자류정-이빈 지휘관 출신의 류원후이와 북양정부에서 임명한 쓰촨군독 량센 (杨森) 간의 내전이 터졌다. 량센은 류원휘의 거점인 자류정을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쓰촨을 떠나게 된다. 전후 류원후이와 류샹를 중심으로 류쳥쉰, 톈송야오, 덩시후, 위안주밍 등의 군벌들이 자류정에 모여 선후회의 (善后会议)를 열고 염세 분배를 논의하였다. 1926년 국민혁명 (국민당의 1차 북벌 시에 국민혁명군이 창사에 이르자 쓰촨 군벌들은 일제히 중국국민당에 복속하였다. 쯔궁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을 주목한 국민당 정부는 1927년 4월 (민국 16년) 기존 쯔궁상회를 쯔궁시상민협회 (自贡市商民协会)로 개칭하였다.

동시에 국민당 쯔궁시당부가 설립되었고, 이는 1914년 이후 처음으로 쯔궁 지명이 공식적으로 활용된 사례였다. 따라서 재차 쯔궁시 설립 여론이 일었으나 쓰촨성 정부 수립 무렵 쯔궁에 재해가 덮쳤기에 쯔궁시 설립은 연기되었다. 다만 자체적인 도시 설립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쯔궁시상민협회는 '쯔궁시' 명패를 내걸고 쯔궁 지역의 실무를 처리하였기에 실질적으로는 도시가 설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국민당 쯔궁시 당부는 국민당 좌파가 주를 이루고 있었으나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축출되고 국민당 우파로 대체되었다. 다만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복속한 후에도 쓰촨 군벌들의 세력은 여전하였고, 1932년 상하이 사변으로 국민정부가 혼란에 빠진 틈에 류샹이 자류정을 노리고 류원후이를 공격하며 내분이 벌어졌다. 두 인물의 성을 딴 '이류'전쟁 (二刘之战)에서 류샹이 승리하여 쯔궁염장을 장악하였고, 그는 군비 조달을 위해 염상들로부터 80만 위안을 갈취하였다.

이러한 군벌들의 지속된 수탈로 쯔궁 지역의 염업과 도시 성장을 저해하였다. 그나마 직접적인 전장이 된 적은 없었다기에 도시 자체가 파괴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1934년 류샹은 이듬해의 염세를 636만 위안으로 올렸다. 염상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던 1935년 4월, 장제스가 쓰촨을 정복하며 군벌들의 수탈은 종식되었다. 그후 중국국민당 중앙당부는 일대의 현들을 당무구 (党务区) 체제로 개편하였고, 쯔궁에는 쯔궁구 (自贡区)가 설치되었다. 쯔궁구 산하에는 5개의 현이 귀속되었고, 이로써 오랜 숙원이었던 '쯔궁시'의 설립이 기정 사실화되었다. 동시에 쓰촨염무분해소 (四川盐务稽核分所), 쓰촨염운사서 (四川盐运使署) 등 염업에 관한 관청들이 충칭에서 자류정으로 이전되었다. 1937년 1월에는 현지 조사를 통해 정식으로 시정부를 설립하기로 결정되었으나 같은해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재차 연기되었다.

2.8. 대일 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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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류정 염정의 옛 모습과 당시 염전 노동자의 모습

개전 1년도 안되어 중국 동해안은 대부분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해안의 염전들을 장악한 일본군은 내륙으로 천도하여 항전을 이어가던 중화민국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생산한 소금의 중국 내륙 운송을 막는 염차단 (盐遮断)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전국적인 소금 부족 현상인 염황 (盐荒)이 덮치자 국민당 정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청대의 '천염제초'를 본떠 쓰촨 소금을 호광에 보급하였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쯔궁 지역의 염업은 황금시대라 불리는 호황을 맞았다. 염업을 중심으로 각종 부가 산업들이 발달하며 쯔궁의 경제는 크게 발전하였고, 중일 전쟁기 국민당 정부의 자금줄 중 하나가 되었다. 1938년 4월 쯔궁을 찾은 쑨밍징 (孙明经) 감독은 영화 쯔궁정염 (自贡井盐)을 촬영하여 신흥 공업 도시의 성장을 렌즈에 담았다. 이는 중국 내륙에도 거대한 산업 거점이 있다는 점을 알려 대내외적으로 항일 투쟁의 사기를 진작하는데 활용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 9월, 장제스의 승인 하에 쯔궁시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쯔궁은 중화민국 시절 설립된 초창기 20개 도시 중 하나였다. 다만 시정부의 설립 과정에서 기존에 실권을 쥐고 있던 염상들과 국민당 관리들 간의 대립이 있었는데, 천강염무국 국장 마오치우제 (缪秋杰)가 숙청되고 CC단계의 차오렌위안 (曹任远)이 시장에 부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8년간의 중일전쟁 도중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에도 쯔궁은 중화민국 전체 수요의 1/3에 해당하는 190만 톤의 소금을 생산하였고, 육군 27개 사단[23]을 연간 유지할 수 있는 210억 위안의 세금을 창출하여 중화민국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따라서 쯔궁은 일본군의 공격 대상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1939년 10월 10일 쌍십절을 맞아 방어 태세가 느슨해진 틈에 27대의 제로기가 부계공원에서 국경절을 축하하는 민중을 폭격하였다.

염차단굉작 (盐遮断轰炸)이라 불리는 쯔궁에 대한 폭격은 1941년까지 7차례 벌어졌고, 1544개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그 결과 622명의 사망자와 365명의 부상자가 나왔고, 2785채의 건물이 파괴되어 1억 2400만 프랑의 재산 손해가 발생하는 등 쯔궁시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민국 정부는 충칭에 있던 신식 대공포 일부를 쯔궁에 배치하였고, 1941년 8월에는 일본군 폭격기를 격추하여 결국 일본 군부가 쯔궁 폭격을 철회하게 만들었다. 연이은 폭격에도 불구하고 쯔궁의 항일 정신은 더욱 고취되었다. 1942년 현지 염상들이 모금하여 전투기 '염상호'를 구매해 중화민국 공군에 기증하였고, 뒤이어 노동자들도 모금을 통해 '염공호'와 '염선호'를 마련하였다. 창더 전투가 한창이던 1943년 11월, 펑위샹 장군이 쯔궁을 방문하여 헌금 운동 (献金运动)을 벌이자 시민들은 활발히 참여하였다. 이듬해 6월 펑위샹은 재차 쯔궁을 방문하였고, 두차례의 헌금 시에 쯔궁은 1억 2천만 위안을 조달하였다.

이는 중국 도시들 중 가장 많은 양의 헌금이었고, 그중 염상 유슈하이는 (余述怀)는 홀로 1000만 위안을 모금하여 헌금 운동의 개인 최대 기부자가 되었다. 쯔궁의 애국심에 감격한 펑위샹은 강변에 '아직 우리 강산' (还我河山)이란 명문을 새겼고, 장제스 역시 '쯔궁이 국방 경제에 있어 1등의 위치에 있다!'며 고마워했다. 이러한 경제적 중요성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는 쯔궁에 무려 성급 단위인 행정원 직할의 쯔궁조통실 (自贡调统室)을 설치하였다. 물적 지원 뿐만 아니라 인적 지원에서도 쯔궁은 두각을 드러내었다. 1943년 연합군의 일원으로 중국이 파병한 인도·미얀마 (인면) 원정군에 쯔궁 청년 137명이 지원하고, 1944년에는 570명이 청년원정군에 자원하였다. 이런식으로 쯔궁에선 3만명이 자원 입대하여 대일전선에 향하였는데, 당시 쯔궁 인구가 22만에 불과했던 것을 살펴보면 청년 남성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중 1942명이 창사, 우한, 인면 전선 등에서 전사했다고 한다.[24]

2.9. 전후 쇠퇴와 공업화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소식이 당도하자 쯔궁에선 풍악이 울리고 폭죽이 매진되는 등 축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당시 쯔궁시는 중국에서 19번째로 큰 도시였고, 이는 도시 역사상 전례 없는 정치·경제적 위상이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쯔궁을 쓰촨 서남부의 32개 시현을 관할하는 공업지구로 삼아 쓰촨 최대의 공업 도시로 개발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다만 전후 충칭에서 난징으로 돌아간 국민당이 회염을 호광에 들이며 천염제초를 철회하자 10여년간 이어졌던 쯔궁의 전성 시대는 막을 내렸고, 공업지구 계획 역시 이듬해 국공내전이 터지며 뒷전으로 밀렸다. 또한 1946년 말엽 법폐 (위안화)의 가치가 폭락하며 쓰촨염공사 등 현금을 쟁여두고 있던 현지 기업들이 큰 손해를 입었다. 이는 중화민국의 경제 위기 및 국민당의 부회억천 (扶淮抑川) 정책과 맞물려 지역 경제의 파탄으로 이어졌고, 쯔궁 염상들은 졸지에 채권자에서 채무자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시장 간지피 (甘绩丕)는 중국 공산당에 협력하였고, 1949년 12월 6일 인민해방군이 쯔궁에 무혈 입성하였다. '화평해방' 후 쯔궁군관위 (自贡军管委)가 수립되었다. 1950년 1월, 쓰촨성의 4방 분할 시에 남부인 촨난 (川南)의 치소는 쯔궁에 설치됐으나 얼마후 루저우로 이전되었다. 1952년 쓰촨성이 재수립되며 쯔궁시는 성직할시가 되었고, 제1~5 구를 관장하였다. 이듬해 제1,2,3 구는 각각 쯔류징 (自流井), 궁징 (贡井), 다펀바오 (大坟堡) 구로 명명되었고 나머지 둘은 교외 지역으로 개편되었다. 1955년 다펀바오구는 다안구 (大安区)로 개칭되었다. 1958년 쓰촨성 당대회에서 쯔궁의 화학 공업 기지화가 결의되었고, 쯔궁시는 '천리를 도약하여 화공성으로 나아가자' 혹은 건설 화공성 (建设化工城) 구호를 걸어 공업화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소금에서 염화바륨을 추출하는 부문은 기술적으로 미국을 능가할 정도의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외에 천연가스와 소금 생산 역시 활성화되었고, 이러한 성과에 고무된 성정부는 1959년 푸순과 이빈 등지의 13개 인민공사를 쯔궁시 관할로 편입시켰다. 이어진 공업화의 결과 1956년 불과 8종에 불과하던 화학 공업 제품은 1960년 60종으로 늘어났고, 1957년 염업 수익의 22.5% 규모에 불과하던 화학 공업 역시 1960년 염업 대비 83.9%까지 성장하여 쯔궁의 양대 산업으로 발돋움하였다. 1965년 쯔궁의 화학 공업 생산액은 1952년 당시의 31배에 해당하는 3600만 위안에 이르렀고, 염화바륨은 영국에까지 수출되었다. 대약진운동의 몇 안되는 성공 사례로 꼽히는 쯔궁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 류사오치, 덩샤오핑, 녜룽전, 허룽, 천이, 둥비우 등의 유력 인사들이 시찰차 방문할 정도였다. 이어진 내륙 공업화 정책인 삼선건설 시에는 북중국의 21개 사업체를 쯔궁에 이전시켜 산업 다변화가 이루어졌고, 1975년에는 총생산량에 있어 2차산업이 1차산업을 능가하게 되었다.

한편 1972년 지질부 조사에서 다샨푸사우루스 (앙구스티나립테루스)가 발견된 후 시당국은 관광 도시로의 진전을 모색하였다. 그 일환으로 설립된 공룡박물관은 아시아 최초의 공룡 전문 박물관이었다. 1979년에는 한때 네이장에 귀속되었던 룽현 (영현)이 쯔궁시 관할에 놓였고, 1983년에는 푸순현 (부순현)이 이빈시에서 이관되며 역사상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세 지역이 재회하게 되었다. 동시에 과거 제4,5구였던 교외 지역이 옌탄구로 편성되었다. 80년대 당시 쯔궁은 충칭, 청두에 이어 쓰촨성 제3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였다. 또한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1986년 11월 쯔궁은 대외 개방 도시로 선정되었고, 이듬달에는 전국역사문화명성으로 지정되었다. 1987년부터 쯔궁은 기존의 연등회를 확대한 '쯔궁국제공룡등회경무교역회' (自贡国际恐龙灯会经贸交易会)를 개최하며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기간 산업인 염업이 쇠퇴하며 쯔궁 경제는 위기를 맞았다.

2.10. 세기말 위기와 부흥 노력

특히 1995 ~ 1999년에는 중국의 다른 지역들과 정반대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등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쯔궁은 경제 규모에 있어 쓰촨 성내 3위에서 8위까지 추락하였다.[25] 따라서 쯔궁시 각료들도 경제 발전에 치중하는 쓰촨성 위상위에서 배제되었다. 설상가상 1997년 6월에는 15시간 동안 300mm가 내리는 '백년만의' 폭우로 인한 홍수로 도심부가 31시간동안 침수되고, 건물 1만 9천채가 무너지는 등 쯔궁시는 사망자 19명과 손실 금액 11억 위안에 이르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지역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98년 쯔궁에선 316개의 사업체가 휴업 혹은 폐업 상태였고, 137개 사업체가 총액 2억 4천만 위안에 이르는 적자였으며, 8만명의 노동자들이 실직 상태였다.

삶의 여건이 악화된 시민들이 종종 시위를 벌이는 등 민심은 흉흉해져 갔고, 혁명의 기운으로 시작된 쯔궁의 20세기는 두 차례의 황금기를 거쳐 암담한 끝을 맞았다. 21세기 들어서도 환경 오염과 후이둥 그룹의 토지 점거, 노동자 쟁의 등의 혼란은 이어졌다. 2009년에는 1천의 직물공들이 시정부 앞에서 데모를 벌였고, 2011년 3월에는 일기 게이트 (日记门) 사건이 터져 시정부의 부패가 폭로되기도 하였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쯔궁시는 경공업 부문의 대외 협력 등을 통해 재차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있다. 2011년 국가하이테크 산업개발구가 설치되었고, 2016년에는 동부에 신도시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2019년 2월, 룽현에서 규모 4.9의 지진이 벌어져 2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다치는 비극이 있었다. 2024년, 쯔궁시 주딩백화점 화재로 16명이 사망했다.

3. 교통

관내에 쯔궁 펑밍 통용공항(自贡凤鸣通用机场)과 쯔궁 란톈 공항(自贡兰田机场)의 총 2개의 공항이 존재한다. 철도역의 경우 다음과 같다. 쯔궁역(自貢站)에서는 몐루고속철도(绵泸高速铁路), 쯔궁난역(自贡南站)에서는 네이류철도(内六铁路)가 지난다.

[1] 중일전쟁 등의 혼란기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기에 쯔궁 일대를 중심으로한 쓰촨 지방의 소금, 즉 천염 (川盐)은 중국 강남 지방에 보급되어 부족한 소금을 보완하였다.[2] 요이 (僚夷) 혹은 토요 (土僚)라고도 함[3] 추후 현으로 개편됨[4] 위원현은 곧 파일 (婆日), 지여 (至如) 현으로 분할된다. 이는 쯔궁 뿐만 아니라 러산, 네이장 일대에도 철과 소금이 다량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파일은 요족 언어로 철산, 지여는 소금을 뜻하는 것을 음차한 것이라 한다. 다만 634년 다시 위원현으로 합쳐지고, 별명 파성 (婆城)만이 5년간의 분리를 상기하고 있다[5] 6부의 장관급 지위[6] 한림원에서 의례를 책임지는 학문대신[7] 송태조 조광윤의 장남 조덕소의 10세손[이후] 새 영지로 복왕에 봉해진 조여예는 1264년 이종의 사후 아들 송도종, 1274년 손자 송공종이 차례로 즉위하며 권세를 유지했으나 1276년 임안부가 함락되며 대도로 압송되어 명목상의 벼슬을 받고 살다 죽었다.[9] 그 이듬해에는 위원현이 폐지되어 영현에 흡수되었다가 1380년 복구되었다.[10]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06009&cid=62063&categoryId=62063[11] 1667년과 1681년 위원현이 폐지되어 영현에 흡수되었으나 각각 1674년과 1728년 원상복구 되었다.[12] 장쑤성, 장시성[13] 이후 석달개는 1859년 4월 윈난 북동부로 이동했다가, 1861년 4월 다시 쓰촨 중남부로 이동한 후 1862년 초엽 청두를 노렸으나 실패하고 4월 의빈으로 피신하였다. 청군의 추격을 받으며 성도로 향하던 석달개는 1863년 6월 투항하여 처형되었다.[14] 天后宫. 바다의 신인 천후를 모시는 사당[15] 청대에 관리들이 쓰던, 꽃 모양 깃대가 달린 붉은 삿갓형 모자[영현출신] [영현출신] [18] 러산 징옌현 출신[영현출신] [영현출신] [영현출신] [22] 나무 판에 검은 기름으로 '각지의 동지들은 살길을 모색하라'라 써서 강물에 띄워보냄[23] 중일전쟁기 국민혁명군은 300 ~ 400사단 규모를 유지함[24] 출처 : 중화민국충렬장사성명록 (中华民国忠烈将士姓名录)[25] 이는 충칭이 따로 분리되었음에도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