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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상원 | 4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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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reistaat Thüringen, 튀링겐 자유주 [2]독일 중부에 위치한 주. 주도는 에어푸르트이다.
독일어 발음으로는 "튀링엔"이 적절하다. 독일어의 ng는 영어와 달리 /g/가 덧나지 않기 때문. 그러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튀링겐이 올바른 표기이고 독일 관광청도 용어를 섞어서 쓴다.
현재 독일의 정중앙인 니더도얼라(Niederdorla)가 바로 이 주에 있다.[3]
2. 역사
지금의 튀링겐 지방은 고대부터 게르만족의 왕국 투링기(Thuringii)가 있던 곳이다. 투링기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헤르문두리(Hermunduri)의 후손들이란 뜻으로, 헤르문두리의 어미인 'duri'에서 시간이 지나 변형된 'thuri'와 후손을 뜻하는 '-ing'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추정된다. 투링기족은 훈족의 패권이 붕괴할 즈음부터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의 지역에서 강력한 패권 국가를 성립한 것으로 추정되나, 분할상속에 의한 내전 과정에서 6세기 초 프랑크 왕국에게 복속된 후 프랑크 왕국은 그 지방을 그대로 이어 튀링겐 변경백령을 만든다. 튀링겐 변경백은 동프랑크에 속하게 되면서 공작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공작의 대우를 받게 되었으나, 엄밀히 말해 온전한 공작령은 아니었기 때문에 독일의 5대 공국(부족 공국)(작센, 바이에른, 슈바벤, 프랑켄, 로트링겐)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908년 튀링겐의 마지막 공작이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죽으면서 작센 공작령으로 흡수된다. 이후 튀링겐은 변경백들의 분할 통치를 받게 되었다.이후 4백년간 수많은 후작과 다른 지역에서 옮겨운 귀족들에 의해 각축장을 벌였다. 11세기에 들어서면서 루도빙거(Ludowinger) 가문이 튀링겐 전역을 지배하였으나 1247년 하인리히 라스페(Heinrich Raspe)[4]가 후사 없이 사망하며 공백이 생겼고, 하인리히 라스페의 조카인 브라반트 공작부인 튀링겐의 조피(Sophie von Thüringen)[5]와 베틴 가문 출신의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Heinrich der Erlauchte)[6]의 17년간의 튀링겐 계승 전쟁 끝에 튀링겐은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가 상속하고, 튀링겐 동부의 일부를 헤센으로 분리하여 튀링겐의 조피의 아들 하인리히가 상속하며 헤센 방백국이 탄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면서 튀링겐은 베틴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베틴 가문은 마이센과 튀링겐을 분할상속했지만 1440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 1482년 작센 선제후 에른스트에 의해 베틴 가문의 모든 영지가 통합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의 둘째 아들이자 에른스트의 동생 알브레히트가 분할 상속을 요구하자 이를 못이긴 에른스트는 1485년 라이프치히 조약을 체결하여 본인은 작센 선제후 자리와 작센-비텐베르크 공작령, 남부 튀링겐을 가져갔고, 알브레히트에게는 작센 공작위와 마이센 변경백령, 북부 튀링겐을 나누어주면서 베틴 가문은 다시 분열되었다.
16세기 종교 개혁이 일어나며 에른스트 계열은 개신교로 개종하고 신교도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1547년 슈말칼덴 전쟁에서 신교도인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사로잡히자 폐위당해 베틴 가문 본가인 에른스트 계열의 선제후직은 방계인 알브레히트 계열로 이전되었고 1806년 작센 왕국이 된 후 지금의 작센 주가 된다.
에른스트가 상속받은 남부 튀링겐은 4대를 거친 1554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세 아들이 분할 상속하여 에른스트 대공국들(Ernestinische Herzogtümer) 또는 작센 공작령들의 시초가 되었다. 이들 영토의 경계는 1572년에 에어푸르트 분할로 재조정되었고, 그 이후의 변화상은 한 공작령의 제후의 대가 끊기면 그 영토를 다른 공작령들이 나눠먹는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영토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는고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826년에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령의 대가 끊기면서 영토 재조정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1개 대공국, 3개 공국으로 확정되었다.
작센 공작령들 말고도 튀링겐 지역에는 슈바르츠부르크 가문의 영토들, 로이스 가문의 영토들이 분립해 있었다. 슈바르츠부르크 가문의 영토들은 1599년에 2개로 나뉘어진 영토가 20세기까지 이어졌고, 로이스 후작령들은 1678년경에는 9개로 분립되다가, 1806년에 2개로 정리되었다.
이상의 튀링겐 제국(諸國)이라는 이들 소공국들은 1826년에 8개로 정리되었다. 북독일 연방을 거쳐 1871년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1910년 당시 총면적 12,325 km2에 159만 명의 인구가 있었다.
- 1개 대공국: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1903년 이후 작센 대공국)
- 3개 공국: 작센-코부르크-고타, 작센-마이닝겐, 작센-알텐부르크
- 4개 후국: 로이스게라 후국,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
20세기 초 튀링겐의 분할도. |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8년에 발생한 킬 군항의 반란의 영향으로 일어난 혁명으로 일곱 제후[8]들이 모두 퇴위하면서 각 소국들은 자유주로 개편되었다가[9], 1920년에 이들 자유주를 모두 통합해(단, 코부르크 자유주는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바이에른으로 편입되었다) 현재의 명칭인 튀링겐 자유주로 바꾸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끌날때까지 유지한다.
1945년 미군이 점령했으나 종전 이후 소련군 관할 지역이 되었고, 오늘날의 주도인 에어푸르트[10]를 비롯한 노르트하우젠, 뮐하우젠 근교 지방을 흡수하면서 튀링겐 주의 경계가 이때 대략 확정되었다. 1952년에 이르러 동독 중앙정부가 주정부들을 해체하자, 에어푸르트 관구와 게라 관구와 줄 관구로 나뉘어졌으나, 1990년에 이르러 동서독 양국의 평화통일을 실행하기 직전에 주정부가 부활하였다.
3. 사회
3.1. 인구
통일 직전이었던 1987년의 인구수가 270만명에 달했었다. 통일 이후 경제적으로 부유한 서독 지역으로의 이주가 급증하여 인구수가 빠르게 감소했다. 2022년에 210만이 되어 30년 사이에 무려 60만이 줄었다.[11] 출산율도 1.42명 수준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12] 고령화+인구이탈 콤보로 골치를 앓는 다른 구 동독지역에 비하면 한 시름 놓은 상황. 그러다가 2023년에 212만명으로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삶의 질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농촌 지역의 인구감소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3.2. 종교
작센과 함께 중세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루터회의 본산과 같은 곳이었지만 공산정권을 거치면서 많이 세속화되었다. 인구의 70%가 무교인 상황. 그나마 개신교가 25% 정도를 차지하는 것이 한 때 나마 이 곳이 루터회의 성지였음을 알려주고 있기는 하다.3.3. 정치
튀링겐 주의회의 원내 구성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 연립여당 | ||||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기독교민주연합 23석 ]] |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 15석 ]] | [[독일 사회민주당| 사회민주당 6석 ]] | |||
야당 | |||||
[[독일을 위한 대안| 독일을 위한 대안 32석 ]] | [[좌파당(독일)| 좌파당 12석 ]] | ||||
재적 88석 | }}}}}}}}} |
1990년 재통일 이후부터 2014년까지 튀링겐 주정부는 줄곧 기독교민주연합 주도로 구성되어왔다. 하지만 2014년에는 통일의 부작용으로 인한 구 동독 주민의 소외감과 불만을 바탕으로 좌파당이 처음으로 집권하였고, 좌파당 주도로 사회민주당, 녹색당이 결합하는 적적록 연정이 튀링겐에서 독일 최초로 구성되었다. 2014년 튀링겐 이전까지 독일에서 좌파당을 포함하는 연정은 단 한 차례도 없었기에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격이었다.[13]
2019년 선거에서는 기존 적적록 연정 연립여당의 의석이 과반에 미달하였지만, 기독교민주연합의 각외협력, 사실상의 신임 공급을 통해 적적록 연정이 소수정부로서 유지되었다.
튀링겐은 AfD의 당세가 강한 지역 중 하나이다. 2023년 7월에는 튀링겐에서 AfD가 창당 10년만에 처음으로 기초지자체 시장을 당선시켰다.[14] 2024년 튀링겐 주의회 선거에서는 30% 초반의 득표율을 얻으며 AfD가 제1당으로 올라서면서 기존 연립여당을 무너트렸다.
3.3.1. 2019년 주총리 선출투표 파문
2019년 튀링겐 주의회 선거 결과 선출의석: 90석 / 과반의석: 46석 | |||||
좌파 | 사민 | 녹색 | 자민 | 기민 | 대안 |
29 | 8 | 5 | 5 | 21 | 22 |
이러한 의석 구도 속에서는 안정적인 다수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극우와의 연립정부는 독일 정치에서 이여 여하 불문 금기인데다가[15], 중도우파 기민련과 자민당은 당내 결의를 통해 극좌 좌파당과의 연립정부 또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적적록 연정은 물론, 중도좌우 제도권을 대연합하는 짐바브웨 연정도 과반에 미달하였다.
<rowcolor=#707070> 연립정부 조합 | 의석 | ||||
적적록 | 좌파 | 사민 | 녹색 | 42 / 90 | |
짐바브웨 | 기민 | 사민 | 녹색 | 자민 | 39 / 90 |
결국 좌파당, 사민당, 녹색당은 의석이 부족한 소수정부로라도 기존 적적록 연정을 연장하기로 합의하였다. 기민련과 자민당이 비록 보수 성향이긴 하지만, 엄연히 중도우파를 자청하며 그들도 극우파와는 손잡지 않는다는 명확한 방침을 고수해왔기 때문. 따라서 두 당이 독일을 위한 대안과 연합하여 적극적으로 방해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으므로, 적적록 소수정부를 출범시킬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2월 5일 튀링겐 주총리 선출 결과 | ||||||
<rowcolor=#707070> 후보 | 1차 | 2차 | 최종 | |||
보도 라멜로프 좌파당 | 43 | X | 44 | X | 44 | X |
크리스토프 킨더발터 독일을 위한 대안 | 25 | X | 22 | X | 0 | X |
토마스 켐머리히 자유민주당 | 불출마 | 불출마 | 45 | 당선 | ||
기권 | 22 | 24 | 1 | |||
1~2차 투표: 재적 의원 과반 / 최종 투표: 단순다수 |
결과적으로 제도권 중도우파 정당들(자민당, 기민련)이 극우파 정당(대안)에게 결정적 도움을 받아 권력을 창출한 셈이었기 때문에, 나치즘에 대한 반성으로 그동안 극우 민족주의를 철저히 경계, 배격해오던 독일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18]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유지되어온 기민련의 가치가 훼손된 날"이라며 "용서될 수 없는 사건"이고 "기민련의 현재 노선은 물론 기민련이 역사적으로 밟아온 행적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며 튀링겐 주의회에서의 사태를 강하게 비판했고, 독일 정치권에서는 좌우정당을 가리지 않고 토마스 켐머리히에 대한 사임 요구가 쏟아졌다. 한편, 튀링겐의 주도인 에어푸르트를 중심으로 독일 전국 각지에서 이번 사태를 규탄하는 격렬한 항의 시위가 진행되었다.
튀링겐 주 기민련과 자민당은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독일을 위한 대안의 단독행동"이라는 입장을 내놓으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주총리로 선출된 토마스 켐머리히가 자진사퇴를 거부하고, 기민련과 자민당 내 일각에서 "켐머리히의 주총리 선출을 인정하며 환영한다"는 의견[19]이 공개적으로 나오며 여론의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급기야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연방내각 차원에서 이번 사태 수습을 의제로 연립여당 CDU/CSU와 사민당 사이의 공식적인 협의까지 진행되었다. 연방제 국가인 독일에서 연방내각이 주의회 차원 문제에 개입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2월 8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기민련, 기사련, 사민당 3당 대표 공동성명으로 이번 사태를 규탄하고, 새로운 주의회 선거를 촉구하며, 'AfD를 연정에서 배제한다'는 독일 정치의 대원칙을 재확인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같은 날,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거센 비판과 압력 속에 토마스 켐머리히 주총리는 결국 사퇴하였다.
2월 21일, 정국 타개를 위해 좌파당, 사민당, 녹색당, 기민련 4당은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하였다.
- 좌파당의 보도 라멜로프를 주총리로 함께 선출하여 기민련이 외곽에서 지원하는 적적록 소수연정을 수립
- 2021년 4월 25일에 조기 주의회 선거 실시
자민당이 향후 표결에서 기권할 것이 확실시되자, 쌍방 합의 하에 기민련은 1~3차 투표에서 모두 기권하기로 했다. 최종 3차 투표가 단순다수결이기 때문에 기민련이 기권표만 확실히 던져줘도 적적록 소수연정이 수립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20]
한편 독일을 위한 대안은 비요른 회케를 자당의 주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이때 당내 일각에서는 "이번에는 고의로 좌파당 보도 라멜로프에게 투표하여 또다시 우리의 지지표로 선출된 주총리를 만들어보자. 그땐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막가파식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해당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다.[21]
3월 4일, 주의회는 다시 한번 주총리 선출 투표를 진행했다.
3월 4일 튀링겐 주총리 선출 결과 | ||||||
<rowcolor=#707070> 후보 | 1차 | 2차 | 최종 | |||
보도 라멜로프 좌파당 | 42 | X | 42 | X | 42 반대 23[22] | 당선 |
비요른 회케 독일을 위한 대안 | 22 | X | 22 | X | 불출마 | X |
기권 | 26 | 26 | 20 | |||
불참 | 0 | 0 | 5[23] | |||
1~2차 투표: 재적 의원 과반 / 최종 투표: 단순다수 |
다만, 또다른 합의 사항인 조기 주의회 선거는 결국 이행되지 못했다.
2021년 1월, 코로나19로 선거 진행이 어려워지자, 좌파당, 사민당, 녹색당, 기민련 4당은 2021년 9월 26일로 선거를 다섯 달 연기해 연방의회 선거와 동시에 진행하기로 재합의하였다.
재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의회해산안은 2021년 7월 19일 상정되어 통과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작 표결이 임박하자 좌파당과 기민련에서 반란표가 확인되면서 주의회 2/3 동의가 필요한 의회해산안 처리가 어려워졌다. 결국 7월 16일, 통과가 불투명해진 의회해산안이 철회되면서 조기 주의회 선거는 결국 무산되었다.
4. 행정구역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 #0094CB;" {{{#!wiki style="margin: -8px" | <tablebordercolor=#0094CB><tablealign=center><tablewidth=300><tablebgcolor=#0094CB>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2px -12px" | 군 Landkreise | ||||||
알텐부르거란트 Altenburger Land | 아이히스펠트 Eichsfeld | 고타 Gotha | 그라이츠 Greiz | 힐트부르크하우젠 Hildburghausen | |||
일름 Ilm | 키프호이저 Kyffhäuser | 노르트하우젠 Nordhausen | 잘레홀츠란트 Saale-Holzland | 잘레오를라 Saale-Orla | |||
잘펠트루돌슈타트 Saalfeld-Rudolstadt | 슈말칼덴마이닝겐 Schmalkalden-Meiningen | 죄메르다 Sömmerda | 조네베르크 Sonneberg | 운슈트루트하이니히 Unstrut-Hainich | |||
바르트부르크 Wartburg | 바이마러란트 Weimarer Land | ||||||
군급시 Kreisfreie Städte | |||||||
아이제나흐 Eisenach | 에어푸르트 Erfurt | 게라 Gera | 줄 Suhl | 바이마르 Weimar | |||
예나 Jena | |||||||
독일의 행정 구역 |
현이 없고 바로 군으로 이루어져있다.
군급시
5. 출신 인물
신기하리만치 이 지역에서는 독일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이 등장했다.- 막스 베버
- 프리드리히 니체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카를 차이스
- 요하네스 브람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고틀로프 프레게
- 바실리 칸딘스키[24]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발터 그로피우스 - 바우하우스로 유명한 건축가.
- 요한 파헬벨
- 작센마이닝겐의 아델라이드 - 영국 윌리엄 4세의 왕비
- 프리드리히 폰 작센마이닝겐
- 게오르크 2세
- 베른하르트 3세
6. 여담
주기가 폴란드 국기처럼 생겼다. 그래서 혼동을 막으려 주기 가운데에 주장을 그려넣은 깃발을 쓰는 사례가 많다.이 지역의 소도시인 베드하임 시의 상징동물이 릴리엔스테르누스인데 베드하임 시의 문장에 새겨질 정도로 해당지역의 상징동물이다.
이 지역의 릴리엔스테르누스 문장은 이후 공룡 판타지 작품 속 문장들의 중요자료로 활용중이다.
7. 관련 문서
[1] Mario Voigt[2] 영어로는 Free State of Thuringia.[3] 1945년까지 독일의 정중앙은 현 브란덴부르크 주 슈프렘베르크(Spremberg)였다.[4] 콘라트 4세의 대립 독일왕이기도 했다.[5] 하인리히 라스페의 형 루트비히 4세의 딸.[6] 하인리히 라스페의 누나 유타의 아들.[7] 거기다가 작센 왕국이 나폴레옹 전쟁 패배 후에 프로이센 왕국에게 영토를 할양하는 바람에 튀링겐 지역엔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도 있었다.[8] 1909년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의 대가 끊기면서,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9] 이들 중 작센코부르크고타는 1919년에 코부르크 자유주와 고타 자유주로 분할되었고, 로이스게라 자유주와 로이스그라이츠 자유주는 같은 해에 로이스 인민주로 통합되었다.[10]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 자유주의 작센주에 속함[11] 여담으로 1910년에 인구수가 210만이었다. 80년 걸려서 60만 늘렸더니 30년만에 원상복귀...[12] 그나마 90년대 중반 통일 부작용으로 경제상황이 최악이었을 시기에는 0.8명 선까지도 떨어졌었다.[13] 이후 좌파당이 포함된 연정은 다른 주에서도 속속 등장했지만, 좌파당이 주도하는 연정은 여전히 튀링겐이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14] 심지어 결선투표제를 뚫고 당선되었다.[15] 독일 정치권에서는 극우 나치당의 집권 당시 만행에 대해 철저히 기억하고 반성하며, 그 재발방지를 위해 정치적 극단주의, 특히 극우 민족주의의 부상을 극도로 경계한다.[16] 특히, 독일을 위한 대안 주의원들은 제3차 투표에 자당의 크리스토프 킨더발터 후보가 있었음에도 토마스 켐머리히에 투표하였는데, 독일을 위한 대안 측은 이후 이 행동이 자유민주당 켐머리히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전략적, 조직적 투표였음을 인정했다.[17] 또한 충격적인 최종 결과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은 덜 받았지만 1차 투표에서 이미 독일을 위한 대안 후보가 자당 의원수보다 3표를 더 많이 받은 상황이었다. 이 3표는 매우 높은 확률로 기민련 또는 자민당에서 온 것이었다.[18] 극우정당이 연정에 참여하거나 주총리에 당선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극우정당의 표를 받아 선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국적 파문이 일어난 것을 보면 독일이 얼마나 극우 민족주의에 민감한지를 알 수 있다. 그야말로 독일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다.[19] 부연하자면, "AfD의 지지표 없이 선출되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AfD와 사전에 협의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적법절차로 선출된 건데, 사퇴까지 해야하는가?"라는 입장이었다.[20] 기민련이 내각에 직접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공식적인 신임 공급 협정을 체결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표결에서 기권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차원도 있었다.[21] 일단 두 상황의 경우가 다르다. 토마스 켐머리히는 AfD의 표 없이는 절대 당선될 수 없었지만, 보도 라멜로프는 4당 간 약속만 지켜진다면 AfD의 표가 그에게 향하든 향하지 않든 선출될 수 있었다.[22] 기민련 내에서 최소 1명의 주의원이 당의 합의를 무시하고 기어이 반대표를 행사하였다.[23] 자유민주당 소속 주의원 5명 전원[24] 물론 러시아 출신이다. 독일 국적을 얻었을 시기 튀링겐에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