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1:44:22

MBC 대학가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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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MBC 대학가요제
MBC CAMPUS SONG FESTIVAL|MBC 大學歌謠祭
파일:MBC 대학가요제 로고.svg
<colbgcolor=#000> 방영 국가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기획 파일:MBC 로고.svg 예능본부
채널 파일:MBC 로고.svg
방영 형식 생방송
방영 횟수 37회
방영 기간 1977년 ~ 2012년, 2019년[1]

1. 개요2. 역사3. 인기 하락과 폐지, 그리고 부활4. 여타 가요제와의 관계5. 역대 수상자6. 여담7. 함께 보기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MBC에서 매년 주최한 대학생 대상의 가요제로, 1977년에 첫 선을 보였고, 2012년까지 매년 개최되었다.

2. 역사

서막 1회 방영분.

1977년 9월 12일 문화방송의 주도로 1회가 개최되었고 샌드 페블즈나 어떡해가 초대 우승을 장식했던 스타트들 끊었다. 이면에는 많은 사연이 얽혀졌는데, 이 곡은 산울림김창훈이 작곡하고 대학 밴드에게 양도하던 곡이었지만, 정작 본인이 참여하던 밴드 무이(산울림의 전신)는 김창완의 졸업으로 예선 1위를 차지하고도 자격 미달로 낙방하는 아이러니를 겪고 말았다. 그래도 계기가 되어 눈도장을 받은 산울림은 산울림 1집으로 전국적 히트를 기록했으니 비록 입상은 아니지만 대학가요제는 첫선부터 전설적인 거물을 배출해내 쾌조의 스타트를 보였고 수많은 대학생들의 로망으로 우뚝서게 된다.

기성가요계와 대비되는 캠퍼스만의 신선함과 건전함[2][3]을 주된 콘셉트로 잡아 첫 단계에서부터 대중적인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수많은 가요제가 본격적으로 번성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생각하던 '건전함'이 무색하게도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상업주의나 퇴폐를 조장한다고 하여 대학가요제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이에 전대협-한총련은 1988년부터 2002년까지[4] '통일노래한마당'이란 대안 행사를 열었다.브런치 자료

1990년대 이전의 대학가요제는 그야말로 신규 음악인을 발견하는 ‘등용문’이었다. 당시에는 음반산업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고, 음악인들의 정규화된 성장 및 데뷔 과정이 없었다. 음악인들은 대학가나 일부 클럽 등에서 공연을 하며 명성을 쌓은 뒤 소수의 프로듀서에 의해 발탁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취약한 미디어 체계, 변화적인 시대상황 등으로 인해 예술에 대한 민중적 갈망은 컸고, MBC 대학가요제는 공영방송 주도의 프로그램으로 압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가요제로 자리매김해갔다.

대학생이란 조건만 맞추면 되기에 대학의 지역이나 서열 상관없는 탕평책스런 입상 목록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인서울 대학교부터 경상도나 전라도 소재 지방 대학교 까지 출신대학교가 다양하게 분포되어있으며 무한궤도의 사례같이 멤버들이 굳이 같은 대학교를 맞출 필요도 없이 타 대학교 출신끼리도 연합한 그룹도 참여가 가능하다. 게다가 미국, 일본 등 해외 주재 대학교에 재학하는 유학생이나 교포들도 참여 자격이 주어진다. 본선이 열리기 전 지역예선을 별도로 가졌으며 이 지역예선은 지역MBC가 별도로 주최하여 방송했다.[5]

제1회에서는 학생들의 창작곡 외에도 번안곡들도 많이 참가하였으나, 그 뒤 회를 거듭하면서 차츰 자작곡으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매 대회마다 LP판을 발행하였는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상술한 대로 건전가요라든지 다른 기성가수들의 곡이라든지 해당 가요제의 참가곡이 아닌 다른 회차의 참가곡들까지 어물쩡 삽입되었다. 1회 입상곡 및 참가곡이 음반으로 나왔을 때,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가 같이 들어간 것이 대표적인 사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함중아가 대학가요제 출신인 걸로 착각한다.

대학생들의 무대라는 점에서 청춘과 낭만의 이미지가 강한 행사였고, 아예 대학가요제만을 목표로 대학에 진학하느라[6] 학업은 뒷전이었던 먹고대학생도 존재했을 지경이었다. 이처럼 80년대까지 젊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아마추어리즘 넘치는 투박하면서도 혁신적인 음악성들로 한국 가요계에 다양성을 부여했으며 세계 가요의 물결이었던 록 밴드의 한국내 공백 또한 대학가요제에서 메웠던 셈이었다. 송골매, 마그마 등이 이런 물결속에서 출범한 하드록/메탈 밴드였다.

촬영 장소도 문화체육관 또는 서울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 등 실내에서 펼쳐졌으나, 주철환 PD의 아이디어로 1994년 18회 때, 처음 캠퍼스(고려대)에서 펼쳐져 이후에는 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리는 것이 대학가요제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대학가요제는 오래된 역사에다 가수의 등용문으로도 큰 기능을 했기 때문에 많은 MC들과 새내기 가수들이 이 대회를 통해 유명세를 얻었고, 이들 중 오늘날까지 방송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도 많다. 1970~80년대의 수상자들은 대학가요제 n주년 특집 무대에 다시 초청되어 당시 수상곡들을 새롭게 선보이기도 하며, 열린음악회나는 가수다 등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에서 당시 수상곡이나 히트곡들을 간간이 리메이크되어 무대에 올라오기도 한다. 7080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컨셉트의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준 필수요소 급.
신해철(무한궤도)의 1988년 제12회 대학가요제 영상

대학가요제에서 배출해낸 뮤지션 면면만 보더라도 . 산울림, 심수봉, 송골매, 노사연, 김학래, 원미연, 유열, 이무송, 무한궤도, 주병선, 이정석, 김경호, 김동률 등등. 시대를 풍미하던 가수들의 이름들이 대학가요제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던 것이었다.

역대 MC들도 유명인사들로서 그 일부만 꼽아보면 현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인 이수만부터 시작해서 명현숙, 초대 뽀미언니 왕영은[7], 임예진, 이덕화, 김희애, 이문세 등. MBC 대학가요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2003~2011년까지는 남자는 바뀌어도 이효리는 바뀌지 않았다.

3. 인기 하락과 폐지, 그리고 부활

초기 대학가요제는 참신한 노래와 신인의 발굴로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고, 대학생의 상품화로 비판받았다.[8]

1990년대에 들어서는 지나친 상업화, 경쟁적인 가요제 개최로 수준 저하가 지적되기도 했다.[9] 이후에도 대중의 무관심이 지적되었는데, 그 주요 이유로 대학문화의 변화, 대학의 특수성 희석, 대중의 취향 변화, 가요계 진출 경로 다양화, 가요제의 권위 상실, 실험성이 강한 창작곡 부재 등이 제시되었다.[10][11]

대학가요제가 융성하던 시기엔 동아기획과 더불어 언더그라운드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인재들이 가요계로 직행하는게 보통이었으나, 90년대가 되자 시대는 너무도 변해버렸다. 음반 산업이 기업화되었고 라인음향, 대학가요제 MC 장본인이던 이수만SM 엔터테인먼트 등이 이때부터 번영하기 시작하자 이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아이돌 가수들이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H.O.T.S.E.S. 등이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부터는 연습생이라는 이름으로 외모, 실력 등을 키워 갖추게 하는 시스템이 생겼고, 작곡과 편곡, 인재 육성이 보다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 전문 체계로서 음악계가 융성하게 된다. 하여금 경쟁력을 갖춘 회사는 대중을 단번에 사로잡아 짭짤한 수익을 남겼고, 비롯된 자금력과 기술력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반면, 대학가요제는 아직까지는 과거의 명성을 등에 업고 유지하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기업화된 기성음악에 밀리고, 가요제를 통해 일약 스타로 발탁되는 가수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지기 시작했다. 샘물같았던 신흥 체계에 크게 밀리며 실력 면에선 트레이닝을 받을리가 만무했던 대학생들은 아마추어리즘만으론 대중을 사로잡긴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이후의 대학가요제들은 산업적 논리보다는 대학 문화 다양화와 창작을 위한 예술인들의 열정으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여기에 대학가와 사회상의 분위기마저 저만치 멀리 동떨어져버린 상황이었다. 80년대까지만해도 대학교는 선택받은 지성인들의 모임이란 이미지가 강했던데다 깨어있는 학생들의 사회 참여와 집단주의 행동들은 90년대들어 소멸 상태에 들어서고만 것이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 재편 후 보다 안정적인 정치상에 운동권도 사양세에 접어들었고 대학생들은 사회 참여보다는 개인 성취와 연애 등등에 관심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노래방, 비디오방, 만화방, PC방 등 오락거리는 대학가요제를 문화에서 밀어내버린 상태였다.# 7080 당대만해도 10~30%대를 머물던 대학 진학률은 90년대들어 치솟기 시작했고 2008년엔 83%라는 정점까지 찍어버린터라 지성인이었던 대학생은 (서열 높은 대학 제외하자면) 그저 흔한 들러리로 전락했고 이는 위같은 대학 분위기를 송두리째 바꿔놓은데다 대학교라는 후광 효과까지 없애는 영향을 초래했다. 대학가요제의 위상은 대학 진햑률과 역비례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대학가요제를 위축시킨 것은 2010년대 이후 케이블 방송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히트를 치면서부터이다. 이들 오디션 프로그램은 창작곡이 아닌 가창만을 심사했으며 전국민을 대상으로 해서 참여의 폭을 넓혔는데, 작곡이 가능한 대학생이라는 극소수의 인원을 대상으로 하는 MBC 대학가요제보다도 큰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우승 특전도 대학가요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억소리가 나는 건 기본이고 다양한 혜택을 보여주어서 대학가요제의 인기는 점차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12]

새천년 들어서부턴 대학가 아마추어 음악들은 인디씬에 흡수되다시피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좋아서 하는 밴드의 전신인 어쿠스틱 브라더스(2007 금상)와 랄라스윗(2008 은상)은 대학가요제 입상 출신이었고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의 초대우승자 이승윤(가수)은 2011년 대학가요제 본선에 진출해 자작곡 '없을 걸'을 선보이며 처음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가요제와 접점은 없지만 깜악귀장기하도 대학가 출신의 인디 뮤지션들이었다.


2005년 29회 대상의 주인공이던 Ex로 실로 간만에 대학가요제는 스타를 배출해내었다. 당장 자우림의 뒤를 잇는 여성 보컬 밴드가 나왔다는 평도 있었고 <잘 부탁드립니다>의 재치있던 노랫말들도 새삼 화제가되어 수많은 러브콜을 받는 신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나 MBC 차원에서 이들을 너무 밀어준 나머지 넘어지고 만 게 패착이었다. 각종 cf까지 섭렵하고 MBC에서 데뷔도 안 한 그룹을 논스톱 시리즈에 카메오로 출연시키는 등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바람에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신선한 이미지만 실컷 소모하면서 정작 데뷔시에는 이렇다할 주목을 못 받고 소리 소문 없이 묻혀 버리면서 대표적인 원 히트 원더로 남게 되었다.

30회 MBC 대학가요제는 2006년 9월 30일 토요일 경북대학교 대운동장에서 펼쳐졌다. 이 30회 대학가요제에서 '뮤즈그레인'은 네티즌 등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음에도 빈손으로 돌아가서 판정 논란이 있었다. 수상결과에 대해 네티즌들은 수상자와 심사위원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에 해당 프로그램 PD는 별 문제 없다고 일축했다.[13] 일부 네티즌이나 언론 등은 수상자들이 앨범 활동에 참여하는 등 이미 준 프로 상태로 대학가요제의 취지에 맞지 않다고도 주장하였으나, 2000년대 이후 대학가요제에 참여한 이들 중 상당수가 실용음악이나 관련분야 전공자들이며, 그들이 학생 때 앨범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2000년대 이후 수상자나 참여자들 중 현역 가수로 활동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근래와 같이 메이저 기획사 등도 없던 당시의 20대 초반의 학생들이 공중파의 주요 프로그램인 MBC 대학가요제의 수상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러므로 담당 PD나 심사위원 등의 관계자들은 논란에 대해 일축하거나 대응하지 않았다. 또 다른 당사자인 '뮤즈그레인' 멤버들은 이러한 논란이 부담스럽다는 뜻을 밝혔다.[14][15][16]

2007년에도 일부 판정 시비가 있었다. 일부 누리꾼들은 '어쿠스틱 브라더스'가 대상 대신 금상을 받은 것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것이 심사위원 박해미가 유독 그 팀에게만 점수를 짜게 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2006년 뮤즈그레인 파동과는 달리 기사화될 정도로 심각하게 문제화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사화된 부분은 대상팀이었던 B2의 노래 표절의혹이다.[17] 물론 당사자인 B2측은 표절이 아니라고 밝혔고, 또한 표절 대상이었던 팀 측에서 표절정도까진 아니라는 의견을 밝힘으로써 논란이 가라앉았다.[18][19]

2009년에도 논란이 있었는데, 인천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열린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이대 나온 여자의 〈군계무학〉이라는 곡이 힙합 듀오 리쌍의 〈광대〉와 드라마 소울메이트의 삽입곡인 누벨 바그의 〈This is not a love song〉과 도입부와 비슷하여 표절 논란이 있었다.[20]

결국 인기 하락으로 인해 2012년 11월 9일에 36회를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2014년 11월 8일에 역대 대학가요제 출신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대가회(대학 가요제회)가 직접 공연을 주최해 2년 만에 다시 세종문화회관부터 공연을 시작해 전국투어를 펼쳤다.

MBC 대학가요제의 맥은 완전히 끊겼지만, 다른 기관이나 단체가 주최하는 대학가요제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2015년 10월 말에 여주시가 주최하는 국제대학가요제가 그 중 하나였다.[21][22] 제1회 대회에서는 동국대학교 국제통상학과 동기생들로 결성된 5인조 밴드 '1/N'이 '피버'(fever)를 불러 대상을 받았다. 2016년 9월 말에 제2회 대회를 개최하였으나 결국 이 대회를 끝으로 여주국제대학가요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여주국제대학가요제가 진행되고 있을 때는 2016년 7월 말에 부천시가 주최하는 전국대학가요제가 진행되었다. 제1회 대회에서는 양남진 밴드가 '마스크 걸'을 불러 대상을 받았다.#

2019년 9월 21일MBC 대학가요제가 5년 9개월간의 공백을 깨고 부활했다. 단, 지상파 MBC가 아닌 케이블 MBC 플러스 계열 방송국에서 2019년 10월 5일에 일산 호수공원의 노래하는 분수대 야외 특설무대에서 열렸던 가요제 본선이 10월 17일에 방송되었다. 다만 이듬해부턴 주목을 못받은 탓인지 코로나 19 판데믹의 여파인건지 개최가 무산되었고 아직까지 재개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 중이다.

대학가요제라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보컬플레이 시즌 2가 대학가요제처럼 다양한 대학교의 학생들이 나와 경연을 치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2024년에 방송사는 다르지만, 대학가요제를 TV조선에서 개최했다.

4. 여타 가요제와의 관계

MBC 대학가요제의 최대 라이벌은 좀 당황스럽게도 같은 방송사가 주관하는 MBC 강변가요제였다.[23] 이 둘은 강변가요제가 7~8월 사이에 열리고, 대학가요제가 9~12월 사이에 열린다는 것 외에는 차이가 별로 없었다.[24]

그나마 늦게 시작한 강변가요제가 1999년대학생 외에도 참여가능이라는 식으로 학력제한을 없애면서 차별화를 시작했지만, 그 뒤 인기가 떨어지면서 강변가요제는 2001년 대회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7080 세대의 레퍼런스 넘버들은 현재도 대학가요제보다는 이 강변가요제, 그리고 밑에서 얘기할 TBC 해변가요제에서 더 많이 배출되었다.

타 방송사에서도 MBC 대학가요제가 인기를 끌자 유사한 가요제를 만들었으며, 그 중 대표적인 곳이 TBC였다. MBC 대학가요제 바로 다음해인 1978년에 개최된 TBC의 가요제 명은 TBC 해변가요제였다. 사실 1회 대학가요제는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몰라서 참가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한 해 늦게 출발한 해변가요제에는 캠퍼스의 숨은 강자들이 대거 출연하였다.

대상한양대 혼성그룹 징검다리가 '여름'이라는 곡으로 수상했는데, 이 그룹 멤버 중 한 명이 뽀미언니로 알려진 왕영은이었다. 실력보다는 대학생다운 신선함과 곡 제목이 가요제의 취지와 부합되어 대상을 수상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진짜 실력자들은 금상부터인데, 블랙테트라에는 이후 송골매에서 활동하는 구창모가 소속되어 있었고, 본명 이용균으로 참여한 벗님들의 이치현은 이후 짚시여인이라는 곡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2회 대학가요제에도 참여하게 되는 활주로에는 역시 송골매에 참여하게 되는 배철수가 있었다. 그외 1990년대 회상으로 유명해지는 김성호가 속한 블루 드래곤, 이명훈이 속한 휘버스 등 실력파 팀들이 대거 배출되었으며, 주병진 또한 누나 주선숙과 듀오로 참가하였다.

다음해에 해변가요제TBC 젊은이의 가요제로 이름을 바꾸었고[25], 2회가 진행되었다. 이 때 유명해진 곡은 금상수상곡인 불놀이야를 부른 옥슨80인데, 이 그룹의 보컬이 홍서범이다. 그리고 1981년 방송통폐합의 영향으로 '젊은이의 가요제'는 TBC 방송국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 억지로 말하자면 1981년 '젊은이의 가요제'도 존재는 했지만, 이건 TBC가 주관한 것이 아니고 국풍81에서 벌어진 가요제가 '젊은이의 가요제'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것이다. 한편 1981년KBS해변가요제의 포맷을 본 딴 행사를 주최했는데, 라디오로 녹음하여 방송된 '사랑의 듀엣 가요제'다.

MBC 대학가요제가 인기를 얻자, KBS 라디오국이 1987년부터 KBS 대학가요축제를 만들었다. 제1회 KBS 대학가요축제 대상은 '물안개'의 석미경이며, 이 때 인기상을 받은 블랙세인트의 보컬이 유숙이다. 이후 김준선, 이정봉, 박경서(미스미스터), 정시로(뱅크) 등의 가수들이 KBS 대학가요축제를 통해 등장했으나 MBC 대학가요제에 비해서 크게 흥행하지 못했고, 1993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5. 역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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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 대학 내에서 한번 만들어진 밴드나 팀이 기수별로 이어지다 보니 같은 팀의 후배들이 선배들의 뒤를 이어 다시 수상명단에 오르는 경우도 보인다. 샌드페블즈, 징검다리, 활주로, 샐러맨더스, 쌍투스, 소리느낌 등이 대표적.
  • 제1회 참가곡 '당신은 모르실거야'는 혜은이의 원곡을 합창 풍으로 리메이크한 것으로 핑클2001년도 3.5집에 해당곡을 리메이크한 바 있다. 3곡을 연달아 들어보면 갭이 장난 아니다. 제1회에는 당시 가요계의 흔한 풍조였던 번안곡도 많았는데, 그 원곡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폴 모리아(Paul Mauriat)'의 'Mother of Mine',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Boxer', 그리고 '디즈니랜드' 내부의 테마곡인 'It's a Small World'까지 상당히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 [27] 심민경이라는 본명으로 출장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임백천과 고영선이 불렀던 '한마음'[28], 노사연의 금상곡 '돌고돌아 가는 길', 배철수가 소속된 그룹 활주로의 은상곡 '탈춤'은 대상곡이었던 부산대 중창단팀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를 압도하는 인기를 누렸다. 특히, 심수봉의 '그 때 그 사람'은 이 대회에선 무관이었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가장 히트한 노래가 되었다. 애초에 떨어진 이유가 황당하게도 너무 '프로 같아서'였으니... 예전에 1983년 프로야구에서 장효조가 신인상을 타지 못한 이유인 '참신성이 부족해서'보다 더 기막힌 이유가 되겠다.
  • 이 대회가 컬러로 첫 방영된 것은 1981년 제5회부터였지만,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당시 영상은 1977년 제1회 MBC 대회부터 일부 컬러 영상을 볼 수 있다. 1회 때에는 카메라 1대에 해당하는 영상, 2회부터는 거의 대부분의 영상이 컬러였다. 1980년 제4회 대회가 되면 야외 촬영용 카메라[29]를 제외하면 모든 방송장비가 컬러 장비로 바뀌었다. 컬러방송이 시작될 것을 염두에 두고 컬러방송용 방송 장비를 꾸준히 들여온 과정을 볼 수 있는 셈.
  • 참가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노래사랑회'가 있어서 친분을 쭉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노사연•이성미쇼에서 2013년 8월에 대학가요제 폐지를 맞이하여 역대 가요제 입상자들을 초대하는 코너를 마련한 적이 있는데, 심지어 같은 기수가 아님에도 서로의 신상을 꿰차고 있는 참가자들이 많았다. 반면에 강변가요제는 비슷한 시스템이 없어서 개별적으로 연락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인맥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않았다.
  • 2010년대 초반까지는 iMBC에서 자사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 과거 대학가요제 영상을 서비스했다. 하지만 MBC 홈페이지 개편의 영향인지, 다시보기 서비스가 없어지면서 다시 보고 싶다면 MBC C&I에 DVD를 주문해야 하거나 MBC 아카이브를 써야 한다. 2017년 8월 12일부터 MBC 유튜브 채널의 과거 방송 영상을 국내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나, 대학가요제 영상은 한동안 풀리지 않다가 2020년 5월 10일부터 일부 영상이 풀렸고, 8월달부터 거의 모든 영상이 풀렸다.

7. 함께 보기

8. 관련 문서



[1] 단, 2019년 MBC 대학가요제는 MBC 본사에서 직접 개최한 건 아니고, MBC 본사의 자회사인 MBC 플러스에서 개최했다.[2] 이 무렵 한국은 여전히 연예계의 대마초 파동이나 금지곡 지정이 횡행했고, 건전가요도 앨범마다 삽입되었다. 제3회 대학가요제 앨범에도 건전가요 '나의 조국'이 삽입되어 있다.[3] 80년대 대학 진학률은 30%대에 머무는 정도였고 그만큼 부유하거나 명석한 선택받은 인재들만이 갈 수 있는 시설이었다. 장차 나라의 미래가 될 인재들에겐 대중들은 호의적인 시선들이었고 속칭 딴따라로 위시되는 뮤지션(연예인) 무시 풍조로부터도 자유로운 편이었다.[4] 1991년 4회까지 정기적으로 개최됨.[5] 예를 들면 대학가요제 대전충남대회는 대전MBC가 주최했고 광주전남대회는 광주MBC가 주최했다.[6] 영화 택시운전사 중 대학생 캐릭터 구재식(류준열 扮)의 대사, "저는 대학가요제 갈라고 대학갔는데요".[7] 비록 대학가요제는 아니지만, 왕영은은 TBC 해변가요제 출신이기도 하다.[8] 大學歌謠祭 바람직한가…《동아일보》, 1980.11.12[9] MBC 대학가요제 「기성」흉내 경쟁무대 전락, 《경향신문》, 1992.12.15.[10] 가요제 출신 가수들은 어디로 갔나, 《스타뉴스》, 2009.5.1.[11] MBC 대학가요제, 존재 이유 전혀 없다, 《뉴시스》, 2009.9.27.[12] 다만 오디션 프로그램도 대학가요제와 비슷한 이유로 2015년을 기점으로 하락세를 타다가 2019년 프로듀스 101 시리즈 투표 조작 사건, 아이돌학교 순위 조작 사건 등의 사건으로 인해 바닥을 치고 있다.[13] 창작곡으로 참여하는 가요제의 특성 상 대중적 기호와 수상기준이 다를 수 있으며, 당시 심사위원 자질논란으로 언급되던 이수만은 MBC 10대 가수상, 신인가수상, SBS 가요대전 프로듀서상을 수상하는 등 가수와 제작자로써 이미 상당한 경력을 인정받은 상태였다.[14] “대학가요제 수상결과 논란”. 한국일보. 2006년 10월 2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7일에 확인함.[15] “'무관의제왕' 뮤즈그레인, "출연제의 와도 못나간다"”. 뉴시스. 2006년 10월 2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7일에 확인함.[16] “대학가요제 대상팀 'JJMP', 악플과 악성문자메시지에 시달려”. 헤럴드 생생뉴스. 2006년 10월 2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7일에 확인함.[17] “2007 대학가요제 대상곡 표절의혹 논란”. YTN STAR. 2007년 10월 9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11일에 확인함.[18] “대학가요제 대상받은 b2, 표절 의혹 부인!”. 스포츠서울. 2007년 10월 8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11일에 확인함.[19] “대학가요제 대상 B2 표절논란? "표절은 아니다"”. 마이데일리. 2007년 10월 8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11일에 확인함.[20] “대학가요제 대상곡 '군계무학', 리쌍 '광대'를 표절?”.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2009년 9월 26일. 2009년 9월 26일에 확인함.[21] MBC1978년부터 1988년까지 MBC 서울국제가요제라는 이름의 가요제를 매년 개최해서 외국의 가수를 초청한 적도 있다.[22] 다만, 1987년~1988년전야제 형식으로 진행됐다.[23] 강변가요제가 배출한 가수들로는 주현미, 손현희, 이선희, 권진원, 박미경, 바다새의 김혜정, 유미리, 이상우, 이상은, 박선주, 박영미, 진시몬, 권성연, 육각수, 빅마마의 신연아, 박혜경, 김현성, 장윤정 등이 있다.[24] 단지 강변가요제는 MBC 라디오국에서 주최했다는 것의 차이다. 그래서 그런지 초창기에는 'MBC FM 강변축제'였다.[25] 이 때, 제 2회 젊은이의 가요제라는 명칭을 썼는데, 제 1회 젊은이의 가요제는 존재하지 않는다.[26] 반면 블랙테트라는 대학가요제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초창기 대학가요제는 팀 참가 시에 단일 대학 소속임을 엄격히 규정했는데, 김정선홍익대 소속이 아닌 것이 걸렸기 때문.[27]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는 큰 히트를 기록했으며 썰물은 이듬해 1979년 1집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래에 '뒹굴며 노래해'라는 가수가 남녀상열지사를 의미한다고 해서 방송금지처분 됐다. 이후 멤버들이 흩어지면서 잊혀졌다. 반면 노사연, 배철수, 임백천, 심수봉은 훗날 연예계에 남았고 이들의 데뷔 무대인 78대학가요제를 회상하다보니 자연스레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가 밀리게 됐다.[28] 내 마음은 하나요 내 뜻도 하나요 어젯밤의 꿈도 하나요'로 시작하는 노래. 임백천의 초기 대표곡이다.[29] 당시의 방송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