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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선원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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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선원전 德壽宮 璿源殿 |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정동) | |
건축시기 | 1896년 (창건) / 1901년 (이전 중건) 1921년 (철훼) |
<colbgcolor=#e3ba62> 선원전 터 |
선원전 복원 조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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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수궁의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어진[1]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다. 쉽게 말해 종묘가 궁궐 밖에 있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었다.덕수궁 서북쪽, 지금의 구세군회관과 덕수초등학교 맞은 편에 있었다.
2. 이름
'선원(璿源)' 뜻은 '왕실의 유구한 뿌리'로, 《구당서》의 〈열전 - 공의태자 소〉에서 유래했다. 글자 뜻을 그대로 풀면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로, 왕실을 옥에 비유하여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같은 뿌리'란 의미로 사용한 듯 하다.#[2][3]3. 역사
1896년(건양 원년) 2월,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경복궁을 떠났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할 곳을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4]으로 정했다. 그런데 경운궁은 애초 임진왜란 때 선조가 머물 곳이 없어 월산대군[5]의 집과 그 주변 민가 몇 채를 아우른 임시 궁이었기에 인조 때 거의 대부분의 건물을 원 주인에게 돌려준 상태였다. 따라서 그런 경운궁에 머물려면 대공사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1896년부터 경운궁 공사를 시작했다.그러나 1년 뒤 1897년(건양 2년) 2월 고종이 환궁할 당시에도 공사는 계속 진행 중이었고, 특히 중요한 건물 중 하나인, 진전 선원전 역시 완공을 못했다. 어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당시 이미 경복궁 선원전에서 경운궁의 즉조당으로 옮겨와 모셨는데, 즉조당은 너무 좁은데다 다른 용도로 써야 해서 고종이 빨리 지으라고
<colbgcolor=#e3ba62> 선원전 영역의 정문이 된 영성문. 순명효황후(당시 황태자비)의 국장 때 촬영한 사진이다. |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이곳에서 꾸준히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가 1921년에 덕수궁(경운궁)의 선원전을 옮겨다 창덕궁 서북쪽 옛 대보단 자리에 짓고 새로운 선원전으로 사용하게 하면서 덕수궁의 선원전 영역은 비었다.
<colbgcolor=#e3ba62> 선원전 터에 들어선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
<colbgcolor=#e3ba62> 고종의 길 |
<colbgcolor=#e3ba62> 덕수궁 선원전 복원계획을 담은 그림 |
2022년 11월, 선원전 터의 기초 발굴조사가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2024년 7월, 흥덕전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흔적들이 발굴되었다. 왕실의 주요 장례 때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빈전으로 주로 사용했던 흥덕전의 대문에 해당하는 흠사문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돌 옆으로 나무 기둥이나 벽이 들어섰던 자리가 선명하게 발견했다. 대문 주변의 좁은 도랑의 물이 빠져나가도록 만든 배수로도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