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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레오폴드 고도프스키 Leopold Godowsky[1]i가 맞는다. 여담이지만 유성 자음들(/b/, /d/, /g/ 등)은 단어 끝에 오면 무성음(/p/, /t/, /k/)이 되기 때문에 폴란드어 표기법에 맞춰서 쓰면 '레오폴트 고도프스키'가 된다.][2] |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870년 2월 10일 |
러시아 제국 샤슬랴이(Жасляй) (現 [[리투아니아| ]][[틀:국기| ]][[틀:국기| ]] 자슬리아이(Žasliai)) | |
사망 | 1938년 11월 21일 (향년 68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직업 | 피아니스트, 작곡가 |
장르 | 클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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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도프스키가 연주한 쇼팽의 장송행진곡.
고도프스키가 편곡한 쇼팽 연습곡.(아믈랭 연주)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계 미국인[3]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별명은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The Pianist of Pianists)[4]
2. 생애
러시아 제국 샤슬랴이(현 리투아니아의 자슬리아이[5])에서 유대계 부모 마체이(Maciej)[6] 고도프스키(父)와 안나(Anna) 고도프스키(母)[7] 사이에서 태어났다. 의사였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8] 홀몸이 된 그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 파시노크(Pasynok)[9] 부부 셋 밑에서 자랐다. 남편 하임(Chaim)[10] 파시노크는 라이프치히 음악학교(현 펠릭스 멘델스존 음악대학)에서 상당 기간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11], 고도프스키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바이올린을 가르쳤으나[12], 사실 그는 바이올린보다는 피아노에 관심을 더 보였다.[13] 5살엔 이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했고 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며 9살 때 첫 연주회를 가지면서 연주 여행을 다녔다.[14] 이때까지 하임은 본인이 전문 음악 교육을 받았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고도프스키에게 피아노 레슨이나 정규 음악 교육의 기회를 별로 주지 않았다. 그 결과 고도프스키는 대부분[15][16] 독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공연으로 이름을 알리는 데에 성공했다.I would be very glad could I have stated with truth that I was a pupil of [Franz] Liszt or any other great man, but I was not. I have not had three months lessons in my life. I have been told I was playing the piano before I was two. I think, however, an imaginative family perpetrated this story. I cannot vouch for the truth one way or the other. I have had some extraordinary experience, and this may have happened. I do not remember whether anybody taught me the value and meaning of notes and the use of the fingers of the keyboard, or whether I acquired my knowledge in an autodidactic way, but I do remember that I had no help from my fifth year on.
내가 정말 리스트나 그 밖의 위대한 음악가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내 인생에 있었던 모든 레슨은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내가 만 2살이 되기 전부터 피아노를 쳤다는 얘기를 들어왔으나, 내 생각엔 상상력 풍부한 가족들이 지어낸 이야기인 것 같다. 그걸 어떻게든 증명할 방법이 없기도 하고.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이야기로 보일법한 기이한 경험을 몇 번 겪긴 했다. 나에겐 음표의 의미와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의 사용법을 가르쳐줬던 사람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것을 독학으로 터득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만 5살부터 주변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다는 점이다.
- 자서전 '회고(Retrospect)'에서 발췌
사실 연주 여행 도중 쾨니히스베르크의 은행가 파인베르크(Feinberg)의 눈에 들어 베를린의 왕립음악대학(Königliche Hochschule für Musik; 현 베를린 예술대학교) 입학 권유를 받았고 파인베르크로부터 학비를 지원 받으면서 다녔었는데 위 자서전에 언급된 3개월이 바로 이 시기이다. 여기서 고도프스키는 모리츠 모슈코프스키,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볼데마르 바길(Woldemar Bargiel) 등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에른스트 루도르프(Ernst Rudorff)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내가 정말 리스트나 그 밖의 위대한 음악가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내 인생에 있었던 모든 레슨은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내가 만 2살이 되기 전부터 피아노를 쳤다는 얘기를 들어왔으나, 내 생각엔 상상력 풍부한 가족들이 지어낸 이야기인 것 같다. 그걸 어떻게든 증명할 방법이 없기도 하고.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이야기로 보일법한 기이한 경험을 몇 번 겪긴 했다. 나에겐 음표의 의미와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의 사용법을 가르쳐줬던 사람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것을 독학으로 터득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만 5살부터 주변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다는 점이다.
- 자서전 '회고(Retrospect)'에서 발췌
1884년까지 베를린에 머물러 있다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공연을 계속했으며, 1886년 리스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바이마르로 향하나 프랑스에 도착하기 며칠 전 리스트가 사망하여 생상스로 방향을 바꾼다. 이후 카미유 생상스와 친하게 지내며 차이콥스키와의 교류를 시작으로 샤를 구노(Charles Gounod), 쥘 마스네(Jules Massenet), 앙브루아즈 토마(Ambroise Thomas), 가브리엘 포레 등 당대 유명한 프랑스 음악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와중 생상스는 갑자기 고도프스키에게 양자로 들어올 것을 권유[17]했는데 고도프스키가 이를 거절[18]하여 둘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1904년에서 1914년까지 비엔나의 음악예술대학교(Akademie der Tonkunst)의 교수로 재직했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미국에 정착했다. 1915년에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예술출판협회(Art Publication Society)에서 발행하는 피아노 관련 출판물의 편집장을 역임했는데, 페달링 설명, 프레이징, 교수법을 비롯하여 기본적인 연습법, 편곡법 등 교육과 관련된 출판물을 담당했다. 이러한 간행물들은 음악실기학교(conservatory)에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고도프스키 자신처럼 혼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목적을 띠고 있으며, 그 예로 핑거링이 매우 자세하게 표기[19]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1930년 런던에서 음반을 녹음하던 도중 뇌일혈로 쓰러졌으며, 이 후유증으로 오른손이 마비되어 쓸 수 없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2년 뒤인 1932년에 아들 고든 고도프스키(Gordon Godowsky)가 자살하였고, 그 후 1년 뒤 아내마저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그 충격으로 공식적인 공연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20] 이런 예상치 못한 악재가 겹치게 되면서 당시 추진 중이던 '음악 및 음악가의 세계 회의(World Synod of Music and Musicians)'와 '음악 및 음악가의 국제 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Music and Musicians)'의 건립이 모두 무산되었고, 1938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작곡가 및 연주자로서
20세기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전성기가 막 시작될 무렵의 젊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조차 “내가 고도프스키의 기교를 모방하려면 5백년이 걸려도 모자를 것이다”라고 고도프스키의 실력을 인정했다.[21]고도프스키의 작품들은 "다성부적"이라는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거의 모든 곡들이 너무나 복잡하고 자세하게 수식된데다가 내성부가 너무 많이 교차되어 있다. 연주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아도 생전부터 꾸준히 있었음에도, 이러한 난해함 때문에 당시 "고도프스키 말고는 아무도 그 곡을 연주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때문에 그의 음악의 대부분은 보편적인 레퍼토리에서 사라졌지만 테크닉이 굉장히 좋은 피아니스트들이 때때로 그 어렵다는 고도프스키의 곡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어려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예술가의 생애', ‘술과 여자와 노래’에 대한 패러프레이즈를 연주해 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미국의 평론가 해롤드 숀버그[22]는 “고도프스키가 미래 세대의 피아니스트들을 위한 작곡을 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아직 그 세대는 오지 않은 것이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기술했다. 21세기 초반에 들어선 현재, 그 세대는 기교가 매우 뛰어난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이 선두에 서서 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의 에튀드를 다른 에튀드와 결부시키는 다성음악적 재주, 피아노 테크닉이 전부 한결같이 독창적인 점, 다양한 음색을 활용할 수 있는 비범함이야 말로 고도프스키의 천재성의 증명이다.
고도프스키의 패러프레이즈들은 피아노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그리고 낭만 다성음악의 치밀함이 갖고 있는 논리성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프란츠 리스트 이래로 피아노의 악기로서의 특색을 그렇게 잘 살려 쓴 곡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패러프레이즈 곡들이 끔찍하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묘기(기교)를 과시하는 곡으로 연주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23] 이 패러프레이즈 곡들은 20세기에 들어서자 '미학상의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이후에는 완전히 잊힐 상태'에 처해 있었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1980년대 후반 "슈퍼 비르투오소" 아믈랭의 등장으로 다행히 다시 고도프스키의 수많은 작품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 이상 해롤드 숀버그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에서 인용
3.1. 쇼팽의 에튀드에 대한 연습곡
자세한 내용은 쇼팽의 에튀드에 대한 연습곡 문서 참고하십시오.그가 가장 정교하게 쓴 곡의 시리즈 중 하나.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4. 교육자로서
그 자신이 독학가였던 만큼 피아노 앞에 앉아 혼자 연구하면서 터득한 것을 피아노 교육에 적극 도입했던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테레사 카레뇨(Teresa Carreño)와 더불어 타건 시에 단순한 근력을 이용하기보다는 중량-이완(frei Gewichtkeit, Gewichtsspiel und vollständige Freiheit[24]) 원리를 이용할 것을 최초로 널리 알렸는데, 오늘날 피아노 테크닉의 기본이 되는 릴랙스에 해당하는 개념이다.리흐테르, 길렐스 등을 가르쳤던 20세기 피아노 교사 네이가우스(Neuhaus)에 의하면, 고도프스키가 비엔나 음악예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당시 레슨비가 가장 비싼 걸로도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비르투오소 테크닉을 듣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들었는데, 중량-이완 원리를 제외하고 테크닉 그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를 않았으며 음악성 자체에 초점을 맞춰 손가락의 민첩함보다는 정확도를 중요시했다고 한다.
5. 작품 목록
5.1. 관현악곡
- 12개의 인상중 12곡 '빈' (12 Impressions no.12: Viennese)
- No. 11 옛 빈 - "트리아콘타메론" 중에서 (No. 11 Alt Wien - from Triakontameron)
5.2. 실내악곡
- 피아노연탄을 위한 미니어처 (Miniatures (46) for Piano 4 hands)
5.3. 독주곡
- "왈츠마스크" 모음곡 ("Walzermasken" suite)
- "트리아콘타메론" 모음곡 ("Triakontameron" suite)
- '박쥐'에 의한 연주회용 패러프레이즈 (Concert paraphrase on 'Die Fledermaus')
- 18세기의 아리아 (Airs of the Eighteenth Century)
- J. 슈트라우스 2세의 "술과 여자와 노래"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 (Symphonische Metamorphosen Johann Strauss’scher Themen "Wein, Weib und Gesang")
- J. 슈트라우스 2세의 "예술가의 생애"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 (Symphonische Metamorphosen Johann Strauss’scher Themen "Künstlerleben")
- R. 슈트라우스 세레나데 편곡 (R. Strauss Ständchen (No.2) from 6 Lieder, Op.17 — concert arrangement for solo piano (1922))
- 르네상스 2권 (Renaissance, book II)
- 마지막 왈츠 (Die letzte Walzer (with Oscar Straus))
- 박쥐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 (Symphonic Metamorphosis on Themes from Die Fledermaus)
- 비제 아를르의 여인 모음곡 1번 중 아다지에토 편곡 (Bizet Adagietto (No.3) from L'Arlésienne Suite No.1 — concert arrangement for solo piano (1927))
-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中 백조 (Le cygne (from Le carnaval des animaux))[25]
- 쇼팽의 에튀드에 대한 연습곡(Studies on Chopin's Études)
- 슈베르트 가곡에 대한 12개의 피아노 편곡 (Schubert Song Transcriptions (12) for Piano)
- 슈베르트의 로자문데 중 발레 음악 편곡 (Schubert Ballett (No.9) from Rosamunde, D.797 — concert arrangement for solo piano (1922))
- 왼손을 위한 엘레지 B단조 (Elegy in B minor, for the left hand (1929))
- 자바 모음곡 (1925) (Java Suite (1925))
- 토카타 op 13 (Toccata for Piano, Op. 13)
- 파사칼리아: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개시부에 대한 44개 변주곡, 카덴차와 푸가 (Passacaglia "44 variations, cadenza and fugue on the opening of Schubert's 'Unfinished' Symphony'")[26]
- 폴로네이즈 C장조 (Polonaise for Piano in C major)
- 피아노 소나타 (Piano Sonata in E minor)[27]
- 피아노를 위한 2개의 왈츠 시 (Waltz Poems (2) for Piano)
-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소품 op 12 (Pieces (3) for Piano, Op. 12)
-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소품 op 14 (Pieces (3) for Piano, Op. 14)
-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소품 op 15 (Pieces (3) for Piano, Op. 15)
-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시 (Poems (4) for Piano)
- 피아노 독주를 위한 바흐 바이올린 소나타 1,2번 편곡
- 피아노 독주를 위한 바흐 바이올린 파르티타 편곡
- 피아노 독주를 위한 바흐 첼로 모음곡 1~5번 편곡
6. 사족
작품목록에서 느꼈겠지만 상당수의 작품이 편곡들이다.고도프스키의 곡들은 하나같이 대위법적인 화음 진행과 엄청난 도약들, 거기에 기가막힌 아름다우면서 복잡한 왼손 진행으로 아마추어 연주자에게는 한두 곡을 제외하고는 넘사벽이고, 프로 피아니스트들도 연주하기 힘들다. 하지만 테크닉만 너무 과해서 연주할 가치가 없는 건 전혀 아니다. 테크닉도 테크닉이지만 연주효과도 좋고 대위법적인 구성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지고 멜로디도 아름다워서 그만큼 공부하면 음악적인 면과 피아노에 대해 배울 점이 정말 많다.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고도프스키의 쇼팽 에튀드에 대한 연습곡집 중 일부를 연주했다. '10-4', '10-12' 왼손으로 편곡한 곡들을 주로 연주하였다.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은 고도프스키 음반을 발매한 피아니스트 중 가장 유명하며, 2023년 기준 쇼팽-고도프스키 연습곡집 전곡을 음반으로 낸 4인방 중 한 명이다.[28][29] 워낙에 넘사벽인 테크닉과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 덕분에 연주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 이 문서를 보고 있으며 피아노 실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면 쉬운 곡부터 찾아서 시작해보자.
7. 여담
고도프스키는 음악 외에도 영화, 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보였고 특히 찰리 채플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도 매우 친했다.[30](왼)[고도프스키] (중)[아인슈타인] (우)[쇤베르크]
유쾌한 성격이었던지 농담을 즐겼으며 발이 넓었다. 야샤 하이페츠의 카네기 홀 데뷔 연주를 듣고 피아니스트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와 나눈 대담이 유명하다.
한 때 호로비츠가 고도프스키의 '파사칼리아'를 보고 '희망이 없다, 손 6개가 필요하다.'[31] 라는 농담을 한 사례가 있다.[32] 그리고 이게 치프라 빠들이 호로비츠 빠들을 깔때 쓸 좋은 구실이 되었다. 같은 논리라면 요제프 호프만이 라흐마니노프의 3번 협주곡을[33] 정말 실력이 안돼서 시도안했다고 하는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파사칼리아가 고도프스키의 모든 곡들 중 테크닉적인 면으로나 음악적인 면으로나 연주하기 가장 어려운 곡이지만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파사칼리아를 녹음한 사례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20세기 손꼽히는 최정상 피아니스트가 귀찮아하면 귀찮아했지 정말로 능력밖이어서 안했다고 단정짓는 것은 호로비츠 항목에 서술 되어 있듯이 그저 무지의 산물이다.
이에 대해선 유튜브에 아믈랭이 쓴 말을 번역해 놓은 블로거가 있다. 일독을 추천. 링크
[1] 폴란드어를 쓰는 유대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폴란드어 정서법으론 Godows[2] 영문판 위키피디아에는 고도프스키의 미들 네임이 '모르드켈로비치(Mordkhelovich)'라고 되어있으나 고도프스키 본인의 자서전에도 언급된 바가 없다. 다만 저 미들 네임이 나오게 된 경위는 추론해볼 수는 있는데, 고도프스키가 태어난 지역이 당시 러시아 제국령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식의 작명법에 따른다면 아버지의 유대계 이름이 '모르드켈'이므로(후술) 미들 네임이 '모르드켈로비치'가 될 수는 있다. 다만 전술한 것처럼 자서전에도 언급된 바 없고 고도프스키의 부모는 유대계였기 때문에 러시아식 작명법에 따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3] 단, 모어는 폴란드어이다. 고도프스키가 태어날 1870년 당시의 샤슬랴이 지역은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멸망 이후 러시아 제국이 통치하던 시절에도 폴란드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4] 흔히 '건반 위의~' 식의 흔해빠진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별명과는 달리(혹은 고도프스키의 다른 별명들인 '건반 위의 브라마', '왼손의 사도' 등과 같은 별명과는 달리) 이 별명은 다소 독특한 의미를 가졌는데, 고도프스키의 압도적인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의 그의 연주를 경청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의 연주회에는 일반 청중만큼이나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찾아왔다고. 즉, 일반 리스너들이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경외심 느끼며 감상하듯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연주를 감상했다는 것이다.[5] 폴란드어로는 '조실레'(Żośle), 유대인들이 쓰는 이디시어로는 '조슬레'(זאָסלע; Zosle)라고 불렸는데, 이 발음을 영어로 잘못 옮겨 적는 바람에 문헌에 따라서는 '소즐리'(Sozly) 혹은 '소실리'(Sošly; Soshly) 등으로 잘못 전해지기도 했다.[6] 영어의 매튜(Matthew), 마티아스(Matthias) 등에 대응되는 폴란드식 이름이며 따라서 영어권에서는 'Matthew Godowsky'라는 이름으로도 검색된다. 유대계 이름은 모르드켈 벤 레이바(Mordkhel ben Leyba)인데 '벤'은 아랍계 이름의 '빈'과 비슷한 의미로 '~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레이바의 아들 모르드켈'이라는 의미이다.[7] 유대계 이름은 카나 셰이나(Khana Sheyna)로 결혼 전 성은 레빈(Levin). 후에 고도프스키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 후 허만 로잔스키(Herman Rosahnsky)와 재혼하여 최종 호적은 '안나 로잔스키'로 되어있다.[8] 레오폴드가 태어난지 18개월이 됐을 때 유행성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9] 빌뉴스 거주 당시의 표기. 1893년에 미국으로 이주해서 Passinok으로 바꾼다. 세간에는 Passinock으로도 알려져있는 듯 하다. 참고로 pasynok은 러시아어로 '양아들'을 의미하는 пасынок를 로마자로 전사한 것과 같으며 전세계적으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주로 볼 수 있다.[10]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루이스(Louis)라는 이름을 썼고 하임은 미들네임으로 쓴 듯 하다.[11] 제레미 니콜라스(Jeremy Nicholas)의 저서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The Pianists' Pianist, 1989)에서는 그가 '빌뉴스에서 악기점을 운영하는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라고 기술되어있으나 고도프스키의 천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깎아내리듯이 서술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음악학교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다음의 두 논문 #1, #2과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생애를 망라하여 기록하고 있는 Polin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게다가 Polin의 기록에 따르면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뉴욕의 폴란드 음악 협회(Polish Music Society)에서 교향악단의 감독을 쭉 맡았다. 오히려 제레미의 저서에서 언급된 '악기점을 운영했다'는 사항은 다른 기록으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12] 제2의 파가니니가 되길 바랐다는 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의 바이올린 솔로 파트를 금방 마스터했을 정도였으니.[13] 세간에는 하임의 아내 미나(Minna)가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알았던 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져있다.[14] 물론 고도프스키가 대단한 피아니스트이긴 하지만 당시 시대를 살펴보면 그와 견줄만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고도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비르투오소였던 요제프 호프만 역시 9살에 데뷔해 10살에 이미 그 당시의 정상급 피아니스트들과 대등하다고 인정을 받은 음악적 창의성(프레이즈 구성력, 음영 처리 능력 등의 음악 구성력)과 테크닉을 지녔었고, 당장에 연주할 수 있는 협주곡만 6곡에 독주곡 수십 곡에 달했으며 레퍼토리 범위는 대략 모차르트부터 자신의 자작곡까지였다고 한다. 이외에 자신이 작곡한 미국 폴로네이즈란 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하고 직접 지휘할 정도였다고. 라울 폰 콕잘스키는 4살 때 데뷔해서 11살 때 이미 1000회째 기념 연주를 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 외에도 그 당시 활동했던 음악 신동들은 꽤 많았는데 그 중 한 명이었던 안톤 루빈스타인도 본인의 자서전에 '신동은 한창 유행중이었다…'는 말과 함께 그 당시에 활동했던 수많은 신동들을 기록한 것처럼, 신동 열풍은 피아니스트를 우상화하는(쉽게 말해서 아이돌 팬덤처럼 피아니스트를 떠받드는) 관례를 상당히 배제하는 시기였던 20세기(지휘계의 거장이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대표적인 예. 4살 때 피아노로 처음 데뷔했었다. 그것도 고작 반년정도 배운 실력으로)까지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15] 후술하겠지만 그를 가르쳤던 사람이나 가르쳤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몇 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거쳐간 선생님이 많고 기간이 짧아 교육 방식의 일관성이 낮았을 점을 감안하면 굉장한 성취긴 하다.[16]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읽어보면 부조니도 비슷한 맥락에 있기는 하지만 부조니의 독학 성공은 기록상 여러가지로 엇갈리는 면이 있어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고 부조니가 고도프스키보다 절때 실력이 후달리진 않는다. 그가 남긴 음반이 적긴 하지만 그의 연주력을 평가하기에 모자를 정도까진 아니고 기록 등까지 종합해서 따져보면 부조니와 고도프스키는 업적,실력 등 모든 면에서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던 당대의 라이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7] 사실 사연은 있었다. 고도프스키를 만나기 약 8년 전인 1878년에 마리 로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자녀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남은 당시 살던 아파트 창문에서 실족사했는데 생상스가 이를 두고 아내에게 큰 회의감을 느껴 사고가 있은지 3년 후 관계를 끊었다.[18] 생상스가 성씨 개명을 조건으로 걸어서 거절했다.[19] 사실 이건 고도프스키 본인이 편/작곡한 곡 악보에 공통적인 현상이다. 특히 쇼팽의 에튀드에 대한 연습곡집은 애초에 테크닉 교육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악보마다 3개국어(독일어-영어-프랑스어)로 된 자잘한 주석과 핑거링이 독보가 어려울 만큼 세세히 박혀있다.[20] 하지만 피아노 연주 자체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21] 루빈스타인이 딱히 기교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다 해도 대가로 평가될 정도이니 일단 아주 좋은 기교를 가지긴 했고, 워낙 입담이 좋은 사람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그의 자서전에 대한 비판 중 하나가 '자기 자신의 실력과 커리어를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니 (Harvey Sachs의 Rubinstein: A Life 참조) 적당히 가려 듣자.[22] Harold Schonberg. 해롤드 쇤베르크라고 읽는 경우가 있는데, 본인이 영어식인 숀버그로 읽히기를 원했다.[23] 쉽게 말해서 고도프스키는 테크닉은 단순하게 음악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도구로서 여겨지는 것을 원했으며, 자기과시로 여겨지는 것을 꺼렸다.[24] 중량 연주와 완전한 이완[25] 고도프스키의 몇 안되는 자비로운 난이도(...)를 가진 곡으로, 실제로 고도프스키가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전부터 자주 연주되곤 하던 소품이다. 참고로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주걸륜이 졸업식장에서 연주한 "백조"가 바로 고도프스키 버전.[26]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인트로에서 주제를 따왔다. 고도프스키의 곡들 중 테크닉적으로나 음악적으로 가장 연주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고도프스키 소나타와 파사칼리아 두 곡을 고도프스키의 곡들 중 가장 어렵다고 뽑기도 한다. 평소에도 장난식의 과장을 자주 했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이 곡을 연주하는 데 손 여섯 개가 필요할 거라 장난식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이 곡이 얼마나 어려운지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그런데 아믈랭은 그 두 곡을 음반에 같이 실었다.[27] 총 5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악장은 또 중간부터 끝까지 B-A-C-H 주제에 의한 푸가 진행으로 이어진다.[28] 아믈랭은 이 음반으로 그래미 어워드 수상 후보가 되었다.[29] 그런데 정작 리사이틀에서 쇼팽 에튀드에 대한 연습곡집 전곡 연주에 성공한 카를로나 리베타는 아믈랭보다 그다지 유명하지가 않은 듯. 하긴 아믈랭의 음악관이 좀 변태스러워야지[30] 채플린은 딸인 다그마 고도프스키(Dagmar Godowsky)가 헐리우드에 데뷔하면서 친해졌고, 아인슈타인은 생전에 고도프스키의 팬이었다.[31] 손가락 6개라고 국내에 알려져있지만 손 6개다. https://www.thepiano.sg/piano/read/introduction-leopold-godowsky-his-53-studies-chopins-etudes-and-passacaglia[32] 그는 매우 장난끼가 많은 사람이였다. 그의 다큐를 봐도 옛날의 기억을 짚어가며 피아노를 치다가 "에라, 모르겠어!"하고 그만두고 깔깔거리는 장면이 나와 시청자들을 당혹스럽게 한다.[33] 호프만에게 헌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