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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 | |
출생 | 1782년 10월 27일 |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 |
사망 | 1840년 5월 27일 (향년 57세) |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니차 | |
직업 |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
악기 | 바이올린, 기타 |
서명 |
[clearfix]
1. 개요
카프리스 24번(Paganini Caprice No.24) 영화 '파가니니: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中[1] |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빈 공연 직후,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 연주에 관해 논평한 신문 기사 中
빈 공연 직후,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 연주에 관해 논평한 신문 기사 中
일명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린 인물로,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군림했던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비올라,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이다.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19세기 바이올리니스트의 상징이며, 낭만주의를 예고했으며 비르투오소의 시대를 연 최초의 연주가다. 몇몇 경우에 따라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 신(新) 고전주의 시대에 활동했다고 보기도 하며, 또는 초기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했다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파가니니는 음악의 낭만주의 시대를 연 선구자격 인물임에 분명하며, 후대 대표 낭만주의 작곡가들인 프란츠 리스트,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등도 파가니니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재능과 작품, 그에 반비례하는 수준의 막장 인생 때문에 이른바 악마의 재능의 원조로 꼽힌다.
2. 생애
제노바 공화국의 제노바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몇개월만에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유명해졌다. 바이올린 외에도 5세 때부터 만돌린을, 10대 때부터는 기타도 배웠다고 한다. 파가니니의 재능을 눈치챈 그의 아버지는 베토벤의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하루에 10시간씩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1799년 17세의 나이에 이미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바이올린의 거장으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연주회와 교습으로 젊은 나이에 명성과 부(富)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너무 빠른 성공에 도취된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들었으며 결국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자신이 아끼던 명품 바이올린 과르네리까지 팔아야 했다.
이후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연주회도 열지 않고 사람들과 만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기간에 건강을 회복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바이올린 주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누이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26세)때부터 1828년(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밀라노,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천재적 재능을 뽐내며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명성은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연방 각지를 순회한 끝에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을 끝내고 귀국하여 파르마 공국의 파르마에 정착하였다.
말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 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이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도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연주를 거절했고, "이탈리아의 해롤드"라는 곡명으로 다른 사람의 연주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에 대한 뒷 이야기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베를리오즈 항목 참조.
베를리오즈와 만날 무렵부터 파가니니는 건강이 악화돼서 연주 활동이 뜸해졌으며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카지노 사업을 펼쳤다가 쫄딱 망해버리고 만다. 생고생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1839년 성탄절에 파리를 떠났는데, 마르세유를 떠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니차[2]에 이르렀을 때 몸이 급격히 쇠약해진다. 니스의 주교가 ‘마지막 성찬’에 초대했지만, 파가니니는 고사했고 얼마 뒤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인한 내출혈로 피를 토하며 외아들 아킬레 파가니니 (1825년 ~ 1895년)의 곁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57세.
3. 아들 아킬레 파가니니
파가니니는 젊은 시절부터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렸지만 의외로 공식적인 자식은 단 한 명이었는데,[3] 지금 기준으로도 늦둥이인 43세 때 얻은 아킬레(Achille Ciro Alessandro Paganini)였다. 어머니는 1823년 파가니니와 처음 만나 교제한 소프라노 가수 안토니아 비앙키. 1825년 7월 25일 태어나 12세가 되던 1837년 1월 31일에야 정식으로 인지되어 아버지의 호적에 오른 아킬레는 5년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한 부모가 결국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헤어지면서 아버지 곁에서 자라게 되는데, 파가니니는 위자료를 지불하면서 아킬레를 자신이 양육하겠다고 했고 안토니아도 찬성했다고 한다. 아킬레를 극진히 아껴주었던 그는 10대 중반인 아들에게 마음껏 살라면서 좀 더 너에게 잘 대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아들을 직접 키우게 되면서 막장 인생을 좀 자제해서인지 250만 프랑이라는 제법 많은 재산을 남겨줬다. 아버지 사망 당시 아킬레는 15살의 어린 나이였는데,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것을 잘 알고있던 파가니니가 미리 아들을 맡아줄 사람이나 재산 상속 등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하면서 아킬레는 파가니니가 죽고 나서도 큰 고생없이 잘 자랐고,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비록 사생아지만 하나뿐인 아들인 아킬레를 파가니니는 굉장히 사랑했다. 에피소드가 여럿 있는데, 연주 여행에 아킬레를 꼭 데리고 다니면서 숙소로 호텔이 아닌 펜션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는 어린 아들에게 집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파가니니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아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내 사랑 아킬레는 정말 내 행복의 모든 것이라네. 너무나 멋지게 자라주었어. 독일어는 정말 잘하지. 내 통역도 멋지게 해준다네. 게다가 아빠인 나에게 잘해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네.”
여기서도 보이듯 아킬레는 7살 무렵에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만큼 총명했다고 한다.[4]#아킬레도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고 게다가 파가니니는 아킬레가 귀족이 될 수 있게끔 자신의 팬인 귀족들에게 부탁도 많이 했다. 심지어 아들을 귀족이 되게끔 해준다면 공연도 싸게 해주겠다고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아킬레는 커서 귀족이 되어 남작 작위와 더불어 영지도 하사받았다. 이랬기에 아킬레는 존경하던 아버지가 생전 원하던 대로 '죽으면 고향 성당 무덤에 묻어달라'는 부탁을 평생 동안 지키려 했다. 자신이 못 하면 후손들에게 대를 이어 이 유언을 지키고자 했다고 한다.
파가니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아킬레는 아버지를 고향에 있는 성당 무덤에 묻으려 했으나 "악마와 계약하여 안 된다."고 거부당하는 바람에 시신은 방부 처리된 상태로 수년간 한 후원자 소유의 섬 동굴에 숨겨질 수밖에 없었다. 사후 4년이 지난 후 그의 시신은 니스를 떠나 제노바에 도착했으나, 교회 측의 반대로 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채 납골당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결국 고향에 묻힐 수 있게 되기까지 수십년간 아킬레가 교황청에 탄원을 거듭하고 엄청 로비한 끝에 1876년, 무려 아버지 사후 36년이 지나서야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5] 아킬레가 70세에 죽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버지를 원하는 무덤에 묻어드리기 위해 글자 그대로 반평생을 바친 효자.
아킬레는 아버지의 여성편력을 물려받지는 않았고, 일찍 가정을 꾸려 한 여자에게 정착했다. 1843년 17살의 나이에 파올리나 피에노비(Paolina Pienovi)와 결혼해 무려 9남 1녀, 모두 10명 자녀를 두었다. 큰 아들 이름은 안드레아(1844~1918)이었으며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니콜로(1849~1923)라는 이름을 주었으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지는 못했다. 셋째 아들 루이지(1852~1906), 넷째 아틸라 (1857~1937), 다섯째 리카르도(1859~1925),여섯째 지오반니(1862~1951)를 비롯하여 생몰연도 기록이 없는 외동딸 콜롬바, 지안카를로, 로베르토, 피에를루지를 얻었으며 이후 사업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으며 자손이 많다보니 파가니니 후손들은 지금도 남아 대를 이어가고 있다.
4. 평가
리스트, 브람스, 망고레 등 여러 유명한 작곡가들이 이 사람한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가운데, 1832년 직접 파가니니의 연주를 라이브 공연으로 들어본 리스트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당시에 대하여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수십여년이 지나도, 난 그 때의 여운을 잊지 못한다. 그 때, 나는 파가니니 연주를 듣고 눈물이 계속 나왔고 나는 죽어도 저 사람의 연주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 누가 저 사람을 바이올린 연주로 앞선단 말이냐!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바이올린을 한다면 나는 피아노로써 파가니니가 되겠다! 아니면 미치광이가 되거나!
친구에게 보낸 리스트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2주 동안 내 마음과 손가락은 마치 길 잃은 영혼처럼 움직이고 있다네.
호메로스, 성서, 플라톤, 로크, 바이런, 위고, 라마르틴, 샤토브리앙, 베토벤, 바흐, 훔멜, 모차르트, 베버가 모두 내 곁에 있다네.
나는 이들을 공부하고, 이들에 대해 명상하며, 분노로 그들을 집어삼킨다네.
뿐만 아니라 나는 하루에 4시간에서 5시간 정도를 손가락 연습[6]에 쓰고 있다네.
아! 만약 내가 미치지 않는다면 자네는 내 안에서 예술가를 찾을 수 있을 걸세!
그래, 예술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지.
호메로스, 성서, 플라톤, 로크, 바이런, 위고, 라마르틴, 샤토브리앙, 베토벤, 바흐, 훔멜, 모차르트, 베버가 모두 내 곁에 있다네.
나는 이들을 공부하고, 이들에 대해 명상하며, 분노로 그들을 집어삼킨다네.
뿐만 아니라 나는 하루에 4시간에서 5시간 정도를 손가락 연습[6]에 쓰고 있다네.
아! 만약 내가 미치지 않는다면 자네는 내 안에서 예술가를 찾을 수 있을 걸세!
그래, 예술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지.
로시니는 일생에서 단 세 번 울었다고 고백하면서, “한번은 자신의 오페라가 실패했을 때, 두 번째는 소풍 가서 구운 칠면조를 강에 빠뜨렸을 때, 그리고 세 번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라고 말했다.
이처럼 수많은 거장들에게 영향을 줬을 뿐만 아니라 듣는 이를 거품 물고 쓰러지게 만들 만한, 기교로만 따지면 바이올린 분야에서 피에트로 로카텔리 이후 참 오랜만에 나타난 희대의 천재였다.
그의 연주는 기교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매력이 있어서 그를 좋지 않게 보던 사람들도 그의 연주를 듣고 난 후에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기절했다고 한다. 심지어 관객들이 집단으로 히스테리를 일으킨 적도 있다고 하니 파가니니가 말년에 루머에 시달린 데에는 기교도 기교지만 이 점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오죽하면 밤에만 나타나야 할 유령들도 그가 연주만 하면 나와서 감탄하고 춤추거나 울었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심지어 악마도 감격해 울거나 춤추었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였다.
파가니니의 외모도 흉흉한 소문을 배가시키는 원인이 됐다. 그는 키가 매우 컸지만 마치 젓가락처럼 깡말랐고 등 윗부분까지 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한 곱슬머리와 갸름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큰 매부리코와 도드라진 광대뼈 등 기괴한 외모였다고 한다. 이런 마성의 외모를 가진 사람이 카리스마 넘치게 연주를 하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쇼맨십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바이올린을 G현만으로 연주하거나 활 대신 나뭇가지를 써서 연주하고 개, 고양이, 당나귀[7]등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신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연주에 기교뿐이고 진지한 마음이 없다는 식의 혹평을 받기도 했다.
도박에 손을 댔다가 빚을 져서 가지고 있던 바이올린을 처분했는데 한 사람이 파가니니 이외의 사람이 연주하지 않게 한다는 조건으로 과르네리[8]를 넘겼고, 파가니니의 '내 바이올린, 내 영혼을 이제부터 영원히 제노바에 기증하노라' 라는 유언에 따라 이탈리아 제노바 시청에서 보관 중이다. 하지만 악기는 써 주어야 소리가 유지되기 때문에 Mario Trabucco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정기적으로 연주해주고 있으며 악기 제작자 등, 여러 관리 위원들이 관리해주고 있다. 또 5년 주기로[9] 10월 12일에 Premio Paganini라는 콩쿠르가 열리는데 이 콩쿠르 우승자에게 여러 부상, 또 녹음 기회와 함께 과르네리 캐논으로 연주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준다고 한다.[10]
클래식 기타 전곡. 루이지 아타데모(Luigi Attademo) 연주.[11]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 개의 악보도 남긴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타를 공식적으로 남들 앞에서 연주한 적은 없었는데, 바이올린처럼 압도적인 연주를 보여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그의 기타곡은 크게 자신을 후원해 줬던 귀부인들을 위한 중간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곡과 프로들을 위한 난곡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12] 바이올린 음악도 적극적으로 기타용으로 편곡되고 있다.
공연을 자주 나가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무리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되어서 죽을 날을 앞당기게 되었으며 거기에 젊어서 여자를 여럿 후리고 다닌 나머지 매독까지...이로 인해 수은, 아편을 치료제로 먹으며 부작용을 겪었다.
말년에는 실력이 하도 사기적인 나머지 악마와 계약했다느니 하는 루머에 시달렸다.[13]
그런데 "파가니니가 직접 그런 '악마' 소문을 퍼트렸다."는 말도 있는데, "바이올린에 무슨 수작을 했기에 그런 소리가 나느냐?"라며 시시콜콜 캐묻는 주교에게 짜증이 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대충 "내 바이올린엔 악마가 있고 내 활에도 악마가 있고 나도 악마니 알아서 하쇼!"라는 뉘양스의 말을 했다가 이런 참사가... 또 다른 설로는 당시에 기교가 만만찮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아서 크게 두각을 나타낼 수 없자 파우스트를 보고 악마를 컨셉으로 잡았다는 말이 있다. 또는 이미 주제페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기교를 얻었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을 보면 그런 스토리를 자신의 마케팅에 적절히 활용했을 수도 있다. 이런 뒷얘기로나 실력이나 생전의 행적을 놓고 보면, 능력에 비해 인성과 행적이 엉망인 예술가들에게 흔히 붙는 '악마의 재능'이란 꼬리표가 매우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연주기법을 비밀로 붙였으며, 자신의 음악을 악보로 남기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데다가 제자도 '시보리' 한 명뿐이라서 그의 기법 중 상당수가 소실되고 말았다. 녹음 기술이 발명되기 이전 시대의 사람이기도 하기에, 신기에 가까웠다는 그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당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한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14]
작곡의 경우, 연주 분야만큼의 수준을 인정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때문에 그가 남긴 작품은 음악적으로 연주 실력만큼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특유의 강렬한 비르투오소적인 인상으로 인해서 지금도 그의 음악은 작품성과 별도로 많이 연주되고 있다. 아울러 타 음악가들에 의해 바이올린 외의 악기로 편곡되거나, 이에 영감을 받은 작품들도 적지 않다.
리스트가 복잡한 기교를 요구하는 많은 곡을 남겨서 전공자들을 애먹였던 것처럼 그런 리스트의 비르투오소 성향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파가니니도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기교를 담아낸 음악들을 남겨서 전공자들에게 악명이 자자하다. 바이올린 혼자 반주와 연주를 동시에 소화하는 구성의 음악도 선보였으며 음의 이동도 어마어마하고, 손에 많은 부담을 주는 피치카토, 두 가지 음을 연주해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3도부터 10도까지 다양한 화음이 곡에 등장한다. 심지어 네 가지 음을 동시에 연주해야하는 쿼드로플 스톱까지 등장하는데 이런 기교들을 그저 단순히 할 줄 아는 수준이 아니라 곡에 방해가 되지 않게 '잘' 소화해야한다는 것부터가 연주자의 실력이 엄청나게 높은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부터 현대의 전공자들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받고 있다.
5. 미디어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캐릭터 셜록 홈즈가 왓슨과 파가니니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구절이 소포 상자 에피소드에 나온다.[15] 에놀라 홈즈 영화에서도 셜록 홈즈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라고 언급된다.#관련 영화가 여럿 있다.
1946년에 나온 영국 영화 <마법의 악궁(The Magic Bow)>에선 스튜어트 그레인저가 연기했는데, 거의 시체에 가까운 당대 삽화 속 묘사와 달리 건장하고 산뜻하게 나온다. 그레인저는 이 영화를 위해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는데, 덕분에 연주 모습이 그럴싸하다. 근접 촬영에서 보이는 그레인저의 손은 전문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대역했다. 다름 아닌 예후디 메뉴인이 바이올린 독주 소리를 녹음해, 재생시간 내내 수준 높은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도박, 결투, 프랑스 귀족과의 파란만장한 연애담을 다룬다. 실존인물인 변호사 친구 루이지 굴리엘모 제르미(Luigi Guglielmo Germi)가 매니저 역을 했던 걸로 묘사된다.
1989년에 나온 이탈리아 영화 <악령 파가니니(Paganini Horror)>에선 파가니니가 악령으로 되살아나 사람을 죽인다. 추억의 영화 <라스트 콘서트>(1977)를 연출한 루이지 코지가 감독했고 할로윈 시리즈 단골 배우 도널드 플레젠스가 나왔다. 영화 수준은 그냥 그런 졸작. 파가니니가 사탄을 찬양하는 곡을 남겼다는 고인모독급 소재가 나온다.
1989년에 나온 이탈리아, 프랑스 합작 영화 <파가니니(Kinski Paganini)>는 클라우스 킨스키가 감독 겸 주연을 맡았다. 킨스키의 유작이기도 하다. 그럭저럭 볼만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제작 중에 킨스키가 엄청 말썽을 부려 출연 배우인 토스카 다퀴노가 킨스키는 미친 것 같았고 멍이 들 정도로 패서 촬영을 중단했으며 고소하려고 했지만 제작자 아우구스토 카미니토가 죽어라 애원하고 여러 모로 고생하여 참았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2013년 독일, 이탈리아 합작 영화 <파가니니: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Der Teufelsgeiger)>가 개봉했다. 이탈리아 제목은 Il violinista del diavolo. 감독은 호러영화 <캔디맨>(1992), 베토벤을 다룬 <불멸의 연인>(1994)으로 알려진 버너드 로즈다. 주연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한 데이비드 가렛이 담당했다. 연기력은 꽤 아쉽지만 전문 배우가 아니므로 어쩔 수 없고 바이올린 연주만은 파가니니의 실력을 제대로 재연하여 영화에서 밥값은 충분히 했다. # 한 줄로 연주했던 일화를 재연해냈다! 한 줄로 연주한 곡은 모세환상곡이라는 곡으로 아예 G선만 쓰도록 되어 있다.
2018년 HJ컬쳐에서 뮤지컬 <파가니니>를 제작, 대전에서 첫 공연을 올렸으며 2019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정식 초연을 올렸다. 극 내용은 아들 아킬레의 파가니니 시신 매장 허가 재판을 배경으로 니콜로 파가니니의 생애를 돌아보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액자식 구성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액터뮤지션인 KoN(콘)이 주연으로 출연하여 무대 위에서 실제 바이올린 연주를 선보이는 연출로 호평을 받아 2022년 지방투어, 2024년 재연을 상연 중이다.[16]
6. 작품 목록
파가니니의 작품 번호는 MS를 사용한다. Maria R. Moretti와 Anna Sorrento가 연구했다고 한다. MS 작품번호가 붙지 않은 것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위키백과나 IMSLP 를 참고하길 바란다.- 바이올린 소나타
- 바이올린 협주곡 1~6번
- Op. 1, MS 25, 24개의 카프리스(caprice) 1~24[17]
- MS 19, 레스트레게(Le Streghe) - 발레음악을 모티브로 한 변주곡
- MS 23, 모세환상곡 - 정확히는 로시니 오페라 모세의 아리아에 의한 G선상의 변주곡이다. 줄여서 모세환상곡으로 불리며, G현만으로 연주했다는 곡이 바로 이 곡이다.
- MS 59, 베니스의 카니발 - 변주곡의 형태이다. 영화에서 연주하다가 현이 3개 끊어진 곡이 바로 이 곡.[18]
- MS 84, 기타를 위한 37개의 소나타
- MS 109,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칸타빌레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 |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No.24 |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No.5 |
무궁동[19]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6번 |
신이시여 여왕 폐하를 지켜주소서 주제에 의한 변주곡 |
조반니 파이지엘로의 '허무한 마음'[20] 주제에 의한 변주곡 |
7. 일화
- 8살 때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써놓고 자기도 어려워서 연주를 못했다고 한다.
- 어느 날 파가니니의 연주 솜씨를 보고 반해 결혼을 원한 가수가 있었다. 이 소식이 파가니니의 친구들을 통해 파가니니의 귀에 들자, "아니 결혼? 바이올린 연주를 공짜로 들으려고 하다니... 이런 얌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하루는 어느 걸인이 바이올린 연주를 할 때, 파가니니가 걸인을 대신해서 연주를 했더니 그 소리에 매혹되어 사람들이 걸인에게 많은 돈을 주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곳이 템스강변이라는 문서도 있고, 발표하기 전이었던 카프리스 24번을 처음으로 연주한 장소가 그 곳이라는 풍문도 있다.
8. 기타
* 러시아의 헤비메탈 밴드 '아리야(Ария)'의 1989년 곡인 '불꽃연주곡(Игра с огнём)'[21]이 파가니니에 관한 곡이다. 황제부터 거지까지 모든 사람들의 사악한 욕망을 까발리며 그 분노에 시달리고, 자신은 악마 따위에게 영혼을 팔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는 것에 괴로워하는 파가니니와 그런 파가니니를 비웃으며 지옥으로 오라고 유혹하는 악마의 대사가 일품. 들어보면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 24 일부를 편곡해 집어넣은 걸 찾아볼 수 있다.
-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장미가 있는데,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 1831년에 발간된 파가니니의 주치의 베나티의 회고록에 의하면, 파가니니의 손이 일반적인 손의 크기보다 월등히 크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손의 각 부위가 상당히 유연해서 왼손의 포지션을 바꾸지 않은 채로 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를 구부릴 수 있었고, 거의 두 배 가까운 길이로 손을 뻗을 수 있었다고 한다. 베타니는 파가니니의 음악이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마르판 증후군(Marfan syndrome)’ 또는 ‘엘러스 단로스 증후군(Ehlers–Danlos syndrome)’ 환자로 추정되는데, 둘 다 결합조직에 문제가 생기는 유전병이다. 전자는 얼굴, 팔다리와 손가락이 가늘고 길고, 후자는 유전적으로 콜라겐이 적게 분비돼 관절 운동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지고 탈구가 잘 일어난다. 둘 다 생명을 위협하지만, 파가니니가 엄청난 기교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두 병 탓에 긴 손가락으로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 피아노 전공생들이 프란츠 리스트를 가장 어렵고 힘든 작곡자로 많이 뽑는다면, 현악 전공생들은 파가니니를 많이 뽑는다. 그중 카프리스 24곡은 입시곡으로도 연주되는데, 전공 수준에서도 꽤나 힘들 만큼 어렵다는 것. 의외로 첼로를 위한 곡도 있는데, 그것마저도 한 개의 줄만 이용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파가니니는 다른 작곡가들의 편곡까지 포함해 바이올린 외 전공 연주자들에게도 악명(?)을 떨치고 있다.
- 파가니니가 죽은 지 170년 후에 브러쉬 원 스트링이 한 개의 줄이 달린 클래식 기타로 반주를 넣은 영상으로 유명해졌다.
[1] 해당 영상속 파가니니를 연기한 배우는 데이비드 가렛. 1분 51초와 2분 20초 경, 악보를 받아적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 프란츠 리스트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2] 오늘날 프랑스 제5의 도시이나 1860년 토리노 조약 이전에는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작은 해안가 마을이었다.[3] 모자 직공인 안젤리나 카반나라는 여성이 사생아를 낳았다고 하는데 신생아 때 요절했고, 파가니니도 자신이 임신시킨 아이가 아니라며 인정하지 않았다.[4] 그런데 당시의 여행이란 환경이 많이 열악하던지라, 어린아이가 큰 병에 걸리거나 죽지 않은 것은 매우 운 좋은 일이었다.[5] 주교가 "사탄의 도움으로 벌어들인 재산 일체를 교회에 헌납한다면, 이를 참회의 표시로 인정하고 장례를 허락하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결국 아킬레는 아버지가 연주로 벌어들인 그 막대한 돈을 교회에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다른 신자들의 감정을 고려하여 밤중에 조용히 장례를 치르라는 조건이었다.[6] 3도, 6도, 옥타브, 트레몰로, 연타, 카덴차 등[7] 이 소리를 흉내냈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당나귀 소리를 선보인 마을이 하필이면 주변 마을로부터 '멍청한 당나귀'라는 식의 지역드립을 수십 년간 들어온 곳인지라 파가니니를 린치하러 달려들었고 파가니니는 친구가 구해줄 때까지 높은 곳에서 반나절을 있어야 했다고.[8] 소리가 매우 커서 '대포(Cannone)'라 불린다. 파가니니의 연주는 음색은 아름다웠지만 음량이 작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악기의 큰 음량은 파가니니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9] 원래는 격년제로 열렸는데 2010년부터 5년 주기로 열리게 된 듯.[10] 쇼팽 콩쿠르 같은 다른 콩쿠르에서도 흔히 하는 관행이지만, 순위에 적합한 참가자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 순위는 아예 시상하지 않고 그냥 비워버린다.[11] 기타줄 제조사 사바레즈의 후원을 받으며 520B, 510MRP 제품을 사용한다. [12] 기타 솔로나 바이올린 + 기타의 구성이 많다.[13] 웃긴 건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프란츠 리스트마저도 루머를 퍼트리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14] 파블로 데 사라사테가 SP 음반 상용화 후에도 생존했기에 은퇴 무렵에나마 여러 장의 녹음을 남길 수 있던 것과는 대조적.[15] 원문은 이렇다. "This led him to Paganini, and we sat for an hour over a bottle of claret while he told me anecdote after anecdote of that extraordinary man." 그 비범한 파가니니에 대한 일화를 한 시간 이상 늘어놓았다는 모양.[16] 원래 2020년에 재연이 올라오기로 예정돼있었으나 코로나19 판데믹으로 무산되어 무려 5년 만에 올라왔다.[17] 당시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입을 모아서 이런 어려운 곡을 어떻게 연주하냐고 했을 정도. 지금도 콩쿨이나 입시곡으로도 많이 쓰이는데 24번이 제일 유명하다. 그 외 5번도 들으면 알 정도로 나름 유명하다. 후대 작곡가들이 카프리스 전부 또는 일부를 편곡한 작품이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프란츠 리스트가 이를 바탕으로 '파가니니에 의한 초절기교 연습곡' 및 이를 개정한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을 출판했다.[18] 프레데리크 쇼팽이 이 곡을 가지고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제목은 파가니니의 추억(Souvenir de Paganini) 또한 리스트도 이 곡을 가지고 작곡하였다. S700a.[19] 자세한 내용은 무궁동 참조[20] Nel cor più non mi sento. 1788년 파이지엘로가 발표한 오페라 '방앗간 여자'에 나오는 소프라노와 테너/바리톤의 2중창으로, 오페라 2막에 두 번 나온다. 당시에는 베토벤도 해당 주제를 바탕으로 변주곡을 쓸 정도로 인기 많은 곡이었으며, 현재는 독창으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다.[21] 동명의 앨범 수록. 직역하면 '불장난'이지만 노래 가사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번역하는 게 더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