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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덴바움 왕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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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2.1. 건국2.2. 폭정과 선정2.3. 쇠락과 중흥의 반복
3. 중기4. 후기
4.1. 오토프리트의 시대4.2. 라그나로크를 향해가는 왕조
5. 말기
5.1. 동맹의 침공5.2. 제국의 내전5.3. 개혁과 황제 납치5.4. 골덴바움 왕조, 라그나로크를 맞이하다.
6. 골덴바움 가문의 운명

1. 개요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가공의 국가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초기

2.1. 건국

우주력 1년, 알데바란 성계 제2행성 테오리아를 수도로 은하연방이 건국되었다. 1세기 가까운 혼란기에서 벗어난 인류는 평화와 번영을 누렸으며 급격한 기술 발전을 바탕으로 은하계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사회에는 활력이 넘쳤으며 사람들은 우주 끝까지 갈 태세로 무한한 팽창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방 건국으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우주력 3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사회는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사회발전은 정체되었고 정치는 부패했으며 정의와 도덕은 모습을 감추었고 팽창과 기술 발전은 멈추었다. 마치 질식할 것만 같은 사회 분위기에 지쳐가던 사람들은 모든 사회문제를 통쾌하게 해결하고 자신들이 힘겹게 지고 있던 고통을 대신 떠안아줄 '영웅'의 등장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루돌프 폰 골덴바움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본래 어느 군인 가문 출신이었는데, 사관학교 수석에다 남을 압도하는 거구, 위풍당당한 풍채를 가지고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임지인 리겔 항로 경비부대의 엉망인 기강을 바로잡고, 설령 상관이 연루되어 있어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원칙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루돌프에게 시달린 상관들은 두손 두발 다 들고 루돌프를 중위로 승진시켜 우주해적이 창궐하는 베텔기우스 성역으로 보내버렸지만, 루돌프는 그곳에서 우주해적들을 무자비하게 소탕하여 명성을 얻었다. 숨막혀 죽을 것 같은 사회 분위기에 질린 연방 시민들은 빛나는 영웅을 환영하였고, 루돌프는 임관한 지 불과 8년만에 소장까지 승진할 정도로 출세했다.

우주력 296년, 정식으로 퇴역한 루돌프는 정계에 투신했다. 그는 선거에서 승리하여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국가혁신동맹'이라는 정당의 당수가 되어 젊은 정치가를 휘하로 끌어들여 세력을 확대했다. 루돌프는 몇 차례의 선거를 거쳐 강건한 정치 기반을 마련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수상에 취임했다. 하지만 루돌프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헌법에 국가원수와 수상을 겸직하는 걸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는 것을 이용해 의회의 추대를 받아 국가원수를 겸임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수상과 국가원수를 합친 '종신 집정관'이 되어 독재자가 되었다.

우주력 310년, 마침내 루돌프는 스스로를 '신성불가침한 은하제국 황제'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은하연방의 민주공화정은 자연스럽게 무너졌으며, 소수 공화파를 제외한 시민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류의 위에 선 전제군주를 추앙했다. 이렇게 되어 루돌프는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를 건국하고, 은하제국 초대 황제 루돌프 대제로 즉위했다.

2.2. 폭정과 선정

황제가 된 루돌프는 시민사회와 공직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 엄벌주의를 내세워 부패와 범죄를 일소했다. 하지만 루돌프는 민중의 생각과는 달리 우생학, 게르만 우월주의, 사회진화론에 찌든 반동적인 인물이었고, 재위 9년차에 빈곤층과 장애인을 대규모로 숙청하기 위해 열악유전자 배제법을 제정하여 폭군의 길을 걸었다. 의회에 남은 소수 공화파 인사들이 민중을 대표하여 황제의 폭정에 제동을 걸었지만, 루돌프는 즉시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이듬해 비밀경찰조직 사회질서유지국을 설립하여 대대적인 공화파 탄압에 나섰다. 무려 40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회질서유지국의 손에 사라졌고, 공화주의자들은 사회질서유지국의 수장 에른스트 팔스트롱 백작을 암살했지만 루돌프는 용의자 2만 명을 전원 처형하는 방식으로 보복했고 알브레히트 폰 클롭슈톡을 후임으로 임명하여 '피의 롤러'라고 불리는 공화파 숙청에 박차를 가했다.

루돌프는 공화파를 숙청하는 한편 우수하다고 여긴 백인들에게 특권과 게르만식 성을 하사하여 황실을 지탱할 문벌귀족 계급을 창설했다. 재위 42년동안 루돌프는 귀족, 군대, 관료를 양성하여 제국 체제를 굳건히 했지만 아들에게 제위를 넘겨주고 싶다는 소망은 이루지 못했다. 루돌프와 황후 엘리자베트 사이에는 딸 넷 밖에 없었고 총희 마크달레나 사이에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문제는 이 아들이 지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우생학을 신봉하는 루돌프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마크달레나와 그의 가족, 아들이 태어날 때 같이 있었던 의사와 간호사들은 루돌프의 손에 모두 죽고 말았다.

제국력 42년, 루돌프는 끝내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사망했다. 루돌프의 외손자 지기스문트가 은하제국 제2대 황제 지기스문트 1세로 즉위했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힘 폰 노이에 슈타우펜 공작이 제국재상이 되어 지기스문트 1세를 보좌했다. 루돌프가 죽자 각지에서 공화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노이에 슈타우펜 공작은 루돌프가 다져놓은 제국 체제를 지휘하여 반란군은 분쇄해버렸다. 반란에 참가한 5억 명은 처형당하고 그들의 가족 등 100억 명은[1] 시민권을 박탈당해 농노로 전락했다. 지기스문트 1세는 이렇게 공화주의자들을 찍어누르는 한편 제국에 충성하는 신민들에게는 선정을 펴 제국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지기스문트 1세가 죽자 장남 리하르트가 3대 황제 리하르트 1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정치보다는 미녀, 수렵,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황제의 책무를 내팽개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평생 기센 황후와 애첩 60여명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무난한 인생을 보냈다. 그리고 리하르트 1세가 죽자 장남 오토프리트가 4대 황제 오토프리트 1세로 즉위했다.

오토프리트 1세는 아버지 리하르트 1세보다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매우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하루하루 짜여진 스케줄대로 움직였으며 어떠한 취미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고 오로지 루돌프 대제의 회고록과 가정의학서만 읽었다. 오토프리트 1세는 모든 변화와 개혁을 싫어하는 보수주의자였으며 오로지 루돌프 대제의 전례에만 매달려 나라를 통치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오토프리트 1세는 스케줄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었지만 스케줄을 짜는 능력은 없었다. 따라서 스케줄은 황제 정무비서관 에크하르트 자작이 대신 짰는데, 자연스럽게 오토프리트 1세는 에크하르트 자작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에크하르트 자작은 몇몇 지위를 겸직하면서 제국의 권신으로 군림했다.

이러한 자작의 행태는 5대 황제 카스퍼 시기에 더 심해져, 에크하르트는 백작위를 수여받고 추종자들은 그를 "준 황제폐하"라고 부를 정도로 권세가 막강해졌다.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권력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려고 했지만 카스퍼는 동성 애인이 있는 동성애자이었기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에크하르트의 여식과 결혼하는 것은 결사반대했다. 그러자 에크하르트는 황제가 총애하는 카스트라토 플로리안을 살해하려고 사병을 이끌고 노이에 상수시로 쳐들어갔지만 황제의 뜻을 받들어 미리 대기하고 있던 리스너 남작에게 걸려들어 즉결 처분된다.[2] 간신이 제거되어 이제 제국이 좀 정상으로 돌아오려나 싶던 그 때, 황제 카스퍼가 퇴위 성명서를 남긴 채 플로리안과 함께 종적을 감추었고 제국은 140일 간 황제 없는 ‘공위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2.3. 쇠락과 중흥의 반복

그러다가 중신들이 오토프리트 황제의 동생 율리우스 대공을 6대 황제로 추대함으로서 ‘공위의 시기’는 마침내 끝났다. 사실 다들 율리우스의 능력보다는 그 아들 프란츠 오토 대공의 능력에 주목해서 그를 황제에 앉힌 것으로, 이미 칠순이 넘은 율리우스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프란츠 오토 대공이 제위를 계승하도록 계산한 것이었다. 중신들의 예상대로 프란츠 오토 황태자는 아버지 대신 국정을 이끌어 에크하르트 시대의 폐단을 시정하고 국가의 기강을 다잡으며, 평민들에게 감세 혜택을 주는 등 선정을 펼쳤다. 그런데 아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뒷방에서 적당히 여색이나 사치를 즐기던 율리우스 황제가 상상 이상으로 장수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노쇠한 황제는 80, 90을 넘어서도 정정함을 과시했으며[3] 전혀 죽을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옥좌를 차지했다. 그 때문에 프란츠 오토 대공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또한 이미 죽어 증손자인 칼 대공이 황태증손에 책봉되어 제위계승순위 1위가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신들은 장수하는 황제에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의 나이는 90을 넘어 100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제국력 144년 율리우스는 그만 96세의 나이로 급사하고 만다.

제국 역사상 첫 황제 시해의 범인은 바로 율리우스의 증손자 대공이었다. 그는 황태증손이었으므로 율리우스가 죽으면 옥좌의 주인이 될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보다 훨씬 오래 사는 증조할아버지의 정정함에 경악하여 이러다간 자신도 제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죽는 것 아니냐는 공포에 사로잡혀 일을 저지른 것. 하지만 칼 대공은 황제 암살을 도운 총희들을 입막음을 위해 죽이다가 그 중 한 명이 사건의 진실을 몰래 오빠에게 알렸고, 이를 보고 원한을 품은 총희의 오빠는 칼의 사촌형 지기스문트 폰 브로네 후작에게 사실을 고했다. 지기스문트는 칼 대공을 비밀리에 협박해 제위계승권을 포기하게 만들고 스스로 옥좌에 올라 7대 황제 지기스문트 2세가 된다.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은 의외의 인물이 제위에 오르자 깜짝 놀랐으며, 졸지에 제위를 빼앗긴 칼 대공은 평생 정신병원에 유폐되어 자신이 죽였던 증조할아버지보다 1년 더 살고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모두의 경악 속에 즉위한 지기스문트 2세는 선제를 보좌했던 명신들을 쫓아내고 자신의 심복들을 요직에 앉혔다. 그리고 은하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사치와 국정농단을 시작했다. 징세권을 귀족과 상인들에게 팔아치우고, 형사범의 죄를 돈으로 갚을 수 있도록 해주고, 미녀를 후궁으로 들일 때도 막대한 지참금을 요구했으며 신하에게 후궁을 하사할 때도 막대한 예물을 뜯어냈다. 황제가 임명한 측근들 역시 황제를 도와 돈을 뜯어내며 사욕을 채웠다. 지기스문트 2세는 그렇게 모은 부를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의 사치를 위해 사용했는데, 수영장 바닥에 에메랄드를 깔고, 백금다이아몬드로 자신이 들어갈 관을 짜고, 사후세계에서도 후궁을 가지려고 순금 미녀상 600개를 주조하는 등 사치의 끝을 보여주었다.

황제라는 작자가 사치에 미쳐 치부에만 관심을 기울이자 제국은 급속도로 무너져 갔다. 그의 눈에 든 소수의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며, 프란츠 오토가 채워넣었던 국고는 순식간에 고갈되어 파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지기스문트 2세는 정신차리지 못하고 무고한 거상 300명과 그 일족을 처형하여 재산을 몰수하려고 했다가 보다못한 황태자 오토프리트가 반란을 일으켜 지기스문트 2세를 폐위했다. 지기스문트 2세는 그대로 장원 한 곳에 감금당했으며, 지능에 딱히 문제가 있지는 않았지만 '치우제(바보 황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를 장원에 유폐하고 8대 황제 오토프리트 2세로 즉위한 오토프리트는 증조부 프란츠 오토 대공을 모범으로 삼아 아버지가 벌여놓은 일들을 수습했다. 아버지 밑에 들러붙어 부를 챙긴 자들을 모조리 숙청했으며, 마치 투우처럼 저돌적으로 정치개혁에 나서 아버지가 망쳐놓은 것들을 돌려놓았다. 덕분에 제국의 민생은 안정되고 민심도 제국으로 돌아왔지만 오토프리트 2세는 과로한 나머지 재위 6년만에 죽고 말았다. 오토프리트 2세의 뒤를 이어 9대 황제 아우구스트 1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를 좋아하는 이상한 취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사적으로 이런저런 사고를 치기도 했지만 군주로서는 나름 공정한 인물이었기에 '후궁의 범군,凡君,, 국정의 명군'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에리히 1세, 리하르트 2세, 오토 하인츠 1세를 지나 13대 리하르트 3세가 즉위했다. 그는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장남 아우구스트가 쾌락에 미친 작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온갖 쾌락을 맛본 끝에 몸이 망가져 스스로 걷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리하르트 3세는 이걸 보고 분노했지만 아우구스트에게 딱히 흠결도 없었고 다른 아들들도 아우구스트보다 뛰어나지 못해서 황태자에서 폐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국력 247년 아우구스트는 은하제국 14대 황제 아우구스트 2세로 즉위했다.

즉위한 아우구스트는 가장 먼저 관례를 무시하고 아버지의 후궁을 모조리 거두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모두 잔혹하게 살해한 뒤, 황태후 일레네에게 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우구스트는 그 뿐만 아니라 동생들이 제위찬탈을 모의했다며 살해했고, 어머니 일레네에게는 반역자를 낳았다는 책임을 지라며 자결을 강요했다. 즉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정부 각료들은 황제의 명에 모조리 죽어나가고, 제국 사람들은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고 황제의 명 한마디에 일족이 멸문당하고 재산을 빼앗겨버렸다. 그뿐이랴, 살인의 대상은 신분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아우구스트의 주사기'라는 고문살인기구를 만들었다. 그렇게 하여 죽어간 이들이 무려 600~2000만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아우구스트 2세는 '유혈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러한 황제의 행적은 당시 시대가 골덴바움 왕조 역사상 가장 평등한 시대라는 웃지못할 결과를 만들었는데, 이는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받고 능력을 인정받는것이 아닌 황족, 귀족, 평민 모두 황제 앞에서는 평등하게 도륙당하는 당시 제국의 사회상을 비꼰 것이다.

수도의 황족들은 죄다 죽여버린 아우구스트 2세는 더 죽일 사람이 없자 지방으로 도망친 사촌동생 에리히 폰 린더호프 후작에게 출두를 명령했다. 그러나 단두대에 끌려갈 생각이 없던 린더호프 후작은 반란을 선언하며 인근 제국군 부대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반란을 선언할 때만 해도 린더호프 후작은 패배를 각오하여 독약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상황이 불리했지만, 콘라트 하인츠 폰 로엔그람 백작을 비롯한 세 제독이 충성을 맹세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제국군은 트라바흐 성역에서 반란군과 싸웠지만 이미 그들도 전의를 잃은 지 오래였기에 싸우는 시늉만 하다 항복해버렸다.[4] 황제의 곁에 빌붙어 온갖 악행을 저지른 근위여단장 샴버크 준장은 주군의 운명이 다했다고 판단하여 애완 유각견에게 먹이를 주던 황제의 등을 밀어 유각견의 먹이로 던져주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개선한 린더호프 후작은 가장 먼저 샴버크 준장을 숙청했고,[5] 15대 황제 에리히 2세로 즉위했다. 그는 딱히 독창적이거나 진보적인 통치를 펼치지는 않았지만, 선제의 폭정을 수습하고 민심을 안정시켰으며 그 덕분에 제국은 다시 한 번 멸망의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에리히 2세는 이 공적 덕분에 '지혈제'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선제가 워낙 지독한 폭군이었던 탓에 비교우위로 성군으로 칭송받았다.

3. 중기

3.1. 자유행성동맹과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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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프리드리히 1세, 레온하르트 1세, 프리드리히 2세를 거쳐 19대 황제 레온하르트 2세가 즉위했다. 그는 친아들이 없어 황후 크리스티네의 권유에 따라 조카 프리드리히를 양자로 맞았는데, 그 직후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황후와 프리드리히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프리드리히가 20대 황제 프리드리히 3세로 즉위했는데, 그의 치세에 은하제국은 강력한 군사적 위협을 맞게 된다.

프리드리히 3세의 치세로부터 대략 160여년 전 오토프리트 2세의 치세에 노예로 전락하여 알타이르 성계로 유배당한 공화주의자들은 제국령 탈출을 꾀했다. 탈출 방법을 생각해낸 알레 하이네센을 지도자로 한 공화주의자 40만 명은 거대한 드라이아이스로 간이 우주선을 만들어 유배지를 탈출하고, 제국군의 추격을 피해 민주주의의 횃불을 불태울 신천지를 찾았다. 반세기에 달하는 세월과 1만 광년에 달하는 대장정 끝에 공화주의자들은 바라트 성계에 정착, 제국력 218년에 자유행성동맹 수립을 선언했다. 이후 동맹은 1세기에 걸쳐 국력을 증강했지만 은하제국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제국력 331년 2월, 양측 변경에서 국경 초계 활동을 벌이던 양측 초계함대가 접촉하면서 동맹의 존재가 전 우주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동맹은 1세기 전부터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제국 초계함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멸당했다. 하지만 제국군은 섬멸당하기 직전 본국을 향해 통신을 날렸고, 제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조사한 결과 대략 1세기 전에 알타이르 성계를 탈출한 공화주의자들의 후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발칙한 반역자들이 우주 어딘가에서 객사하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제국은 대규모 토벌대를 보내 자유행성동맹, 아니 '반란군'을 토벌하려고 했다. 건국 초기부터 공화주의자나 반 제국 세력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면서 제국군은 강인해져 있었기에 군무상서 팔켄호른은 "이것은 대규모 수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라고 할 만큼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원정군 지휘부를 편성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프리드리히 3세가 허약한 황태자 구스타프 대신 삼남 헤르베르트 대공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3세는 새로운 황태자에게 '경력'을 달아주려고 했기 때문에 헤르베르트를 제국원수에 서임하고 반란세력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황제의 의중이 결졍되자 중신들은 태도를 바꿔 이번 원정을 '전무후무한 거사'라고 칭송하기 바빴다.

원정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반대파 중 한 명이었던 황제의 이복동생, 즉 황족인 슈테판 폰 바르트바펠 후작이 헤르베르트의 총사령관 선임을 막고자 꺼냈던 말 몇 마디에 황제의 진노를 사 처참하게 몰락하자[6] 찍소리도 못하게 되었고 마침내 제국군은 5만 척이 넘는 대규모 토벌군을 조직하여 자유행성동맹과의 첫번째 대규모 전투를 치르게 된다.

하지만 제국력 331년 7월에 벌어진 다곤 성역 회전에서 제국군은 9할이 넘는 장병이 전사하는 대참패를 겪게 된다. 헤르베르트 대공은 황족이라는 이유로 패전의 책임을 지지는 않았지만 별궁에 유폐되었고 프리드리히 3세는 '패군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이후 반 제국 세력들이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이들은 하나둘씩 자유행성동맹으로의 망명을 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헤르베르트의 몰락으로 제위계승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제국은 '검붉은 6년'이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한 성군의 등장으로 골덴바움 왕조는 극적으로 그 수명을 늘리게 된다.

프리드리히 3세 사후 황제의 이복 형 막시밀리안이 21대 황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1세로 즉위했고, 그 이후 프리드리히 3세의 장남 구스타프가 22대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백일제'라는 별명대로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헤르베르트 대공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직전 이복동생인 막시밀리안 요제프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었으니, 그가 바로 골덴바움 왕조의 23대 황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다.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는 골덴바움 왕조 최고의 성군이라 평가받는 황제로(그래서 별명이 청안제) 강한 신체, 뛰어난 머리, 능력, 인격 등을 갖춘 완벽한 황제감이었으나 모친의 신분이 하급귀족이라 문벌귀족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어 제위 계승에 관심이 없었다가 구스타프의 지명으로 황제가 되었다. 즉위 후 다곤 성역 회전의 패장이자 황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 고틀리프 폰 잉골슈타트 중장을 열렬히 변호했다는 이유로 그간 높으신 분들에게 단단히 찍혀서 유배당한 오스발트 폰 뮌처를 사법상서로 발탁해 여러 개혁정책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도 늘 있는 법.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는 황제가 근위대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부대를 해산시켰는데 지위를 잃은 이들이 제위계승경쟁 패배자들과 손잡고 황제를 타도하려고 했다. 황후 지클린데의 경호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는 독을 먹고 쓰러져버렸으며,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졌지만 후유증으로 실명했다. 하지만 황제는 황후인 지클린데[7]와 뮌처의 보좌 덕에 굴하지 않고 제국을 다스렸다.

그의 최대 업적이라 할 만한 건 열악유전자 배제법의 사문화. 은하제국 초대 황제 루돌프가 시행한 법이라는 이유로 그가 죽자마자 사문화만 시킨 채 폐지하지 못 한 상태였는데,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 법의 조항만 남기고 시행 자체를 막아버려 사실상 완전히 없애버렸다. 또 하나는 뮌처의 조언을 받아들여 약 20년의 재위 기간 동안 단 한번도 자유행성동맹과 싸우지 않았던 것.

훗날 리하르트 폰 그림멜스하우젠이 역대 황제들 중 사생아 논란이 없던 분이라고 평가한 데서 보이듯 사생활도 깨끗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황후 지클린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진 못했고, 사후 황위는 그의 육촌동생이었다가 양자로 입적된 코르넬리우스 1세에게 넘어간다. 코르넬리우스 1세도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에 뒤지지 않는 명군으로, 선제가 중용한 중신과 정책을 이어받아 제국의 안정기를 유지했다. 하지만 제국원수를 남발하는 기묘한 취미가 있어서 '원수양산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런데 코르넬리우스 1세는 개인적으로는 선제의 명성을 뛰어넘고, 국가적으로는 다곤 성역 회전의 패배를 설욕하고 다시 한 번 우주를 통일하기 위해 자유행성동맹 원정을 추진한다. 뮌처는 이번에도 원정을 반대했지만 황제의 뜻을 꺾지 못했고, 결국 제국원수에 서임하려는 황제의 손길을 뿌리치고 조용히 궁정에서 물러났다. 코르넬리우스 1세는 황제가 직접 원정군을 지휘하는 친정 형식으로, 다곤 성역 회전보다 더 많은 원정군을 편성했다. 원정 직전 코르넬리우스 1세는 세 번 사자를 보내 동맹에 복종을 요구했지만, 20여년 전의 승리에 취한 동맹의 위정자들은 사자들을 비웃으며 요구를 거부했다.

제국력 359년 5월, 코르넬리우스 1세는 대규모 원정군과 함께 동맹을 공격했다. '원수양산제' 답게 무려 58명에 달하는 제국원수가 원정군을 지휘했다. 정부와 마찬가지로 승리에 취해 있던 동맹군의 방어진은 제국군의 공격 두 번에 깨졌고, 제국군은 원수 20명을 잃었지만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동맹이 멸망하고 골덴바움 왕조가 우주를 통일하려는 순간 제도 오딘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코르넬리우스 1세는 울분을 터트리면서 회군해야 했다. 동맹은 철군하는 제국군을 추격해 원수 15명을 죽였고, 제국으로 돌아온 코르넬리우스 1세는 궁정 쿠데타를 진압했지만 재원정에 나설 여유는 사라졌다. 결국 은하계 통일이라는 거대한 목표는 그의 치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국력 373년, 지구교의 사주를 받은 지구 출신 거상 레오폴드 라프는 제국 정부에 페잔 행성에 내정자치권과 교역자주권을 가진 특수한 자치령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라프는 제국 정부를 설득했고, 지구교가 제공한 자금을 바탕으로 거액의 뇌물까지 바쳐 자치령 설립을 이끌어냈다. 레오폴드 라프는 신생 페잔 자치령의 초대 란데스헤르(자치령주)가 되었고, 페잔 자치령은 동맹과 제국을 잇는 유일한 항로를 독점하여 중개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국과 동맹이 함부로 볼 수 없는 강대한 세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쇠퇴하는 두 나라의 경제를 조금씩 잠식해갔다.

한편 제국에서는 25대 만프레트 1세와 26대 헬무트를 지나 27대 만프레트 2세가 제국력 398년에 즉위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어린 시절을 동맹에서 보낸 황제였다. 암살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유행성동맹으로 망명했다가 제국으로 돌아와 즉위한 사람이었는데, 그 덕분에 다른 황제들과 달리 열린 시야를 가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프레트 2세가 즉위하면 제국과 동맹이 대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제국 내부의 정치 개혁이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만프레트 2세의 개혁은 제국-동맹 전쟁을 최대한 길게 끌어 앙국을 기진맥진하게 만든다는 지구교의 계획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지구교단의 사주를 받은 반동파 귀족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사건의 배후는 드러나지 않았고 해빙기를 맞이하는 듯 했던 양국 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3.2. 가짜 알베르트 대공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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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프레트 2세 사후 28대 빌헬름 1세를 거쳐 29대 황제 빌헬름 2세가 즉위했다. 그는 황후 콘스탄체에게서 장남 코르넬리우스를, 총희 도르테아에게서 차남 알베르트 대공을 얻었다. 알베르트 대공은 15살 때 시종무관과 함께 노이에 상수시 지하미로를 탐험하러 떠났다가 그대로 실종되었는데, 황후 콘스탄체가 황제의 총애를 받은 도로테아를 증오했다는 점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다.

알베르트 대공이 사라지고 얼마 뒤 빌헬름 2세는 병사했고, 콘스탄체의 아들 코르넬리우스가 30대 황제 코르넬리우스 2세로 즉위했다. 그리고 다음 날 도로테아가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고, 한 달 뒤에는 콘스탄체마저 열병으로 미쳐 죽었다. 이러한 정황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사라진 알베르트 대공에 대한 목격담도 종종 나왔다.

그로부터 20년 뒤, 코르넬리우스 2세는 중병에 걸렸다. 그에게는 아이가 없었기에 귀족들은 누가 후계자가 될지를 두고 열심히 제위계승권을 가진 자들을 검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자신이 알베르트 대공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는 뛰어난 말재간과 그럴듯한 증언 및 증거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귀족들은 그가 사라진 알베르트 대공이라고 믿었다. 황제 코르넬리우스 2세도 내심 어머니 콘스탄체가 범인이라고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베르트 대공이 돌아왔다고 여기고 병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동생과 대면했다.

모든 이들이 알베르트 대공이 돌아왔다고 믿자 귀족들은 그가 31대 황제 '알베르트 1세'가 되리라 여기고, 앞다투어 알베르트 대공에게 금품을 제공하거나 아첨하면서 차기 황제와 연줄을 만들기에 바빴다. 몇몇 귀족가의 영애들은 황후 지위를 노리고 그와 하룻밤을 같이 하기도 했으며 그들 중 절반이 알베르트 대공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알베르트 대공은 시녀와 5천만 제국마르크에 달하는 보석을 챙겨, 오딘을 탈출한 뒤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제서야 자신들이 사기꾼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은 귀족과 영애들은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알베르트의 아이를 임신한 귀족 영애들은 불명예스러운 사생아를 낳을 수 밖에 없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알베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귀족들이 사기꾼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없다며 개명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어리석은 귀족들을 씹기 위한 술안줏거리 사건으로 끝났다.

하지만 의문점도 있다. 당시 상황으로 보자면 알베르트 대공을 칭한 이는 정체가 진짜든 가짜든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 코르넬리우스 2세에게 인정까지 받았으니 신분은 사실상 보장된 거나 다름이 없었고, 이에 따라 수많은 귀족의 지지를 받았고 황위에 오르는 것에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알베르트 대공이 진짜 빌헬름 2세의 아들이 맞았지만 궁정암투 때문에 자신을 지하미로에서 실종되게 만들고, 어머니 도로테아마저 죽게 만든 제국에 환멸감을 느껴 복수하기 위해 일을 벌인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8] 그 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에게 몸까지 바치며 황후나 총희가 될 꿈에 젖어있던 대귀족의 영애들은 모두 농락한 반면, 자신을 모시던 시녀는 끝까지 챙겨 함께 도망쳤고 상당량의 보석까지 챙긴 사실이 근거가 되었다.

4. 후기

4.1. 오토프리트의 시대

아무튼 코르넬리우스 2세 사후 황태자 오토프리트가 31대 오토프리트 3세로 즉위했다. 그는 황태자 시절 제국군 3대 장관과 제국재상을 모두 겸임했는데, 이후 예우 차원에서 제국재상이 영구 결번이 되는 단초가 되었다. 아무튼 그걸 다 맡을 만큼 능력이 있던 그는 황제가 되자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 아무도 못 믿는 성격이 되었다. 이는 끊임없는 궁중 암투 때문이었고, 그로 인해 황후를 4번, 황태자를 5번 교체했으며 결국 40세에 식사를 거부하다 신경쇠약으로 사망했다.

이후 32대 에르빈 요제프 1세, 그 뒤에 33대 오토프리트 4세가 즉위했는데 이쪽은 엄청나게 여색을 밝혔고(그래서 별명이 ‘강정제’) 최후 또한 어느 후궁과의 잠자리에서 기력이 쇠해 복상사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자식이 수백에 달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이들을 대귀족과 결혼시키려 하며 이를 빌미로 막대한 지참금을 요구해 결국 가문이 망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후 34대 오토하인츠 2세를 거쳐 35대 오토프리트 5세가 즉위한다. 그는 검약을 내세워 쓸데없는 지출을 줄였으며, 그가 죽던 시기에는 거의 항상 적자이던 은하제국의 재정이 흑자로 돌아섰을 정도로 뛰어난 재정 운용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외정에서는 큰 패배를 겪었는데 그의 시대에 브루스 애쉬비를 수장으로 한 '730년 마피아'라는 동맹군의 명장 집단이 제국군을 도륙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연이은 패배에 군무상서까지 홧병으로 사망하자 분노한 제국군은 브루스 애쉬비를 잡기 위해 5만 척이 넘는 대함대를 꾸려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 임했다. 초기에는 비토리오 디 베르티니 제독을 죽이고 나머지 730년 마피아 멤버들과도 호각 이상으로 싸웠지만 전투 막바지에 브루스 애쉬비의 역습 한 방에 원정군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패배했다. 죽은 장성만 60명이 넘었고 함대는 모조리 붕괴하여 제국령으로 패주하기 바빴다. 그나마 브루스 애쉬비가 종전 직전 유탄에 맞아 숨졌기에 제국군은 대패를 겪고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패배한 은하제국은 평민 출신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하고 젊은 인재를 육성하는 등 무너진 고급장교단을 재건하는 데 집중했고, 10년이 지나서야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잃은 인적자원 손실을 복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국은 눈을 돌려 소규모 군사기지만 산재해 있는 이제르론 회랑에 이제까지 없던 초거대 요새를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제국력 454년 착공한 이제르론 요새는 4년 뒤인 458년에 완공되었지만, 건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오토프리트 5세는 몇 번이나 건설을 중단하려고 했다. 그래서 건설 책임자 세바스티안 폰 뤼데리츠 백작은 예정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든 책임을 지고 자살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이제르론 요새는 극강의 방어력과 최강의 공격력에 더해 식량은 물론 무기까지 자급자족까지 가능한 만능의 거점이었고 은하제국은 동맹의 제국령 침공 시도를 차단하고 일방적으로 동맹을 공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토프리트 5세는 후계자 문제 때문에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그에게는 리하르트, 프리드리히, 클레멘트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차남 프리드리히는 고급 술집을 전전하는 방탕한 삶을 살았고, 유흥비가 부족한 나머지 황재의 차남이라는 사람이 빚쟁이에게 쫓기고 평민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추태를 보여서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프리드리히는 제위계승 경쟁에서 탈락하고, 후계자 후보는 황태자 리하르트와 클레멘트로 좁혀졌다. 제국의 귀족들은 지지하는 사람으로 파벌을 갈라 앞으로 다가올 새 시대의 특권을 두고 분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제국력 452년, 황테자 리하라트가 오토프리트 5세 암살을 꾀했다가 발각되었다. 리하르트와 그를 지지하는 신하 60명이 처형되었고 황태자 자리는 프리드리히를 건너뛰어 클레멘트에게 넘어왔다. 그런데 3년 뒤 클레멘트 파벌이 리하르트에게 황제 살해 미수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웠다는 사실이 판명되었고 이번에는 클레멘트를 지지하는 신하 170명이 전원 처형되었다. 위기에 몰린 클레멘트는 자유행성동맹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우주선 사고로 인해 폭사했다.

제위계승권자들이 줄줄히 몰락하자 제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프리드리히 밖에 남지 않았다. 제국력 456년 오토프리트 5세가 심장병 때문에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대공이 은하제국 36대 황제 프리드리히 4세로 즉위했다.

4.2. 라그나로크를 향해가는 왕조

제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4세는 각종 건축사업을 벌여 아버지가 채워넣은 국고를 낭비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국정을 내팽개치고 황후도 멀리하면서 죽을 때까지 여자에 빠져 살았다. 자연스럽게 국정은 국무상서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후작이 도맡게 되었는데, 리히텐라데는 무능한 인물은 아니지만 보수적인 인물이라서 제국을 별 탈 없도록 통치하기만 할 뿐, 타성에 젖어가는 제국을 개혁하려는 시도는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4세가 재위할 때에는 거대한 위기가 닥치지는 않았지만 제국은 타성에 젖어 내부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제국 체제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사회의 불공정이 서서히 악화되어 부와 권력을 독점한 문벌귀족들이 발흥하게 되었고, 궁중암투와 지방반란은 연례행사처럼 일어났으며 제국의 재정은 악화되어 갔다. 이 기조가 이어진다면 봉건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골덴바움 왕조는 유력 귀족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소국으로 갈라지고 민중봉기가 분열을 촉진하여 수습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 문명이 퇴보할 것이라고 후세 역사가들이 평가할 정도였다.

한편 제국은 여전히 동맹과 전쟁을 이어갔지만 어떠한 진전도 얻지 못했다. 제국의 공격은 오로지 동맹의 변경 항성계에만 미쳤으며 동맹 역시 제국의 침공을 격퇴하고 간간히 이제르론 요새를 공격하기만 할 뿐 제국령을 침공할 능력이 없었다. 당시 제국은 어떠한 전략적 목표 없이 출병하는 일이 잦았는데, 심지어 황제에게 업적이 없으니 무훈을 달아드려야 한다고 출병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제국이 타성에 젖어가며 몰락하는데도 프리드리히 4세는 여자에 푹 빠져 살았다. 40대가 들어 여성취향이 꽃다운 소녀로 바뀐 프리드리히 4세는 어느 자작가의 규수 주산나 폰 베네뮌데를 황궁으로 데려와 후작부인 칭호를 내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베네뮌데 후작부인에게 질려버렸다. 덕분에 궁내성 직원들은 황제가 만족할 소녀를 찾아다니기 위해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직원 중 한 명 이었던 콜비츠는 어느 거리에서 안네로제 폰 뮈젤을 발견했고 아버지 세바스티안 폰 뮈젤의 동의를 얻어 그녀를 황궁으로 데려왔다.

안네로제를 본 프리드리히는 그녀에 만족했으며, 총희로 삼고 그뤼네발트 백작부인 칭호를 내려 사실상 아내로 여겼다. 또한 그녀의 동생 역시 총애했으며 군대에 입대한 동생이 승진할 수 있도록 힘을 써 주고 오래 전에 대가 끊긴 로엔그람 백작가를 잇게 하도록 하여 제국기사에 불과한 자를 문벌귀족에 편입시켰는데, 그가 바로 골덴바움 왕조를 무너뜨리고 로엔그람 왕조를 건국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다.

5. 말기

골덴바움 왕조/역사/말기의 상황도 참조

5.1. 동맹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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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력 487년, 자유행성동맹군의 명장 양 웬리 소장이 '반쪽짜리 함대'로 이제르론 요새를 아군 피해 없이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전쟁의 주도권이 처음으로 자유행성동맹에게 넘어가고, 동맹은 축제 분위기가 된 반면 제국 정부 및 군부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어이없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개전 이후 처음으로 제국령에 침공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한 동맹 내부에서는 내친김에 대대적으로 제국을 공격하자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동맹 최고평의회는 지지율 부진을 만회할 생각으로 군부에서 제출한 침공안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동맹은 전 병력의 60%, 함정 20만 척에 장병 3천만 명을 동원하여 제국령을 침공한다. 그러나 제국과 동맹의 세력 균형을 중요시하는 페잔 자치령은 제국에 동맹의 침공 계획을 흘리고, 국무상서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후작은 우주함대 부사령장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원수에게 요격을 명령했다. 라인하르트는 이번 기회에 동맹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청야전술을 계획한다.

제국력 487년 8월 22일을 기해 제국령을 침공한 동맹군은 제국군이 포기한 변경 항성계와 주민들을 대거 접수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굶주리는 민중들에게 물자를 제공하느라 물자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고평의회에서 뒤늦게 수송선단을 파견했지만 이들은 전선에 가기도 전에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 중장이 지휘하는 제국군 별동대에 의해 전멸했다. 그리고 제국군은 모든 전선에서 굶주리고 지친 동맹군을 향해 대규모 총반공에 나서 동맹군을 패퇴시켰다.

패주한 동맹군은 암릿처 항성계에 집결해서 반격을 노렸지만 제국군은 신병기 지향성 제플 입자를 사용하여 동맹군을 다시 한 번 박살냈다. 전투 막판 예상치 못한 사태로[9] 동맹군 포위섬멸은 실패했지만 동맹군은 2천만 명에 달하는 전사 및 실종자를 내고 동맹령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동맹은 이 막대한 피해를 복구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무수히 많은 정규함대들이 해체되었으며 양 함대이제르론 요새에 주둔하여 철저히 방어에만 집중했다.

5.2. 제국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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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동맹과 전투가 벌어지던 제국력 487년, 프리드리히 4세는 급성 심장질환 때문에 사망했다.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으며, 각 세력들은 자신들이 미는 후보를 새 황제로 내세우기 위해 암투를 벌였다.

당시 프리드리히 4세의 뒤를 이어 은하제국 황제가 될 후보로는 크게 세 명이 있었다. 첫 번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가에서 태어난 황제의 외손녀 엘리자베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두 번째는 리텐하임 후작가에서 태어난 황제의 외손녀 자비네 폰 리텐하임, 세 번째는 오래전에 죽은 황태자 루트비히의 아들 에르빈 요제프였다. 제국 굴지의 대귀족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자신의 딸 엘리자베트를 차기 황제로 밀었고 빌헬름 폰 리텐하임 후작은 딸 자비네를 차기 황제로 밀며 귀족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반면 에르빈 요제프는 5살 밖에 안 된 아이였고 모친이 문벌귀족 출신이 아니라서 자연스럽게 제위계승경쟁에서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국무상서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후작은 자신의 권력과 제국의 미래를 위해 외척이 국정을 농단하는 꼴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강력한 반대파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도 강력한 '경비견'이 필요했고, 고심 끝에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백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인하르트도 리히텐라데가 가진 권위와 궁정 내 영향력이 필요했으므로 흔쾌히 동맹 제의에 응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의 동맹, 일명 '추축파'에 의해 에르빈 요제프가 은하제국 37대 황제 에르빈 요제프 2세로 즉위했다. 리히텐라데 후작은 스스로 작위를 공작으로 높이며 섭정 겸 제국재상에 취임했고, 라인하르트는 우주함대 사령장관에 취임하며 작위도 후작으로 승격되었다. 궁정 및 정부는 추축파에 장악되었으며 문벌귀족은 신 정권에서 배재되었다.

자신들이 소외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문벌귀족들은 그간의 감정을 접어두고 연합을 꾸리기 시작했다. 제위계승을 두고 오랫동안 반목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가와 리텐하임 후작가가 손을 잡았으며, 여기에 무수한 귀족들이 동참하여 '립슈타트 맹약'을 맺었다. 맹약에 따라 립슈타트 귀족연합이라는 군사조직이 탄생했으며 그 규모는 각 귀족의 사병과 귀족연합에 동참한 장군들의 정규군을 합하여 장병 2,560만 명에 달해 제국 중앙군을 상회했다. 이들은 리히텐라데와 라인하르트가 국정을 농단했다며 정식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 브라운슈바이크 가문의 가신 안톤 페르너 대령이 어설프게 라인하르트가 있는 슈바르첸 관저를 습격했다가 도리어 추축파의 역습을 받아 패퇴했고, 추축파는 한발 더 나아가 쿠데타를 일으켜 비 라인하르트파인 통수본부총장 슈타인호프 원수와 군무상서 에렌베르크 원수를 구금하고 수도 오딘을 탈출하려는 연합파 귀족들을 잇따라 체포하며 수도를 완전장악했다. 그리고 에르빈 요제프 2세는 라인하르트를 제국군 3대 장관을 겸직하는 '제국군 최고사령관'에 임명하고 문벌귀족들을 국적으로 규정하며 토벌을 명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비롯해 수도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 귀족들은 이제르론 요새 다음가는 제국 최대의 군사거점지 가이에스부르크 요새를 근거지로 삼아 라인하르트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무능한 귀족들은 싸우기만 하면 패배하여 세력을 날려먹고 요충지를 헌납했다. 거기에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베스터란트의 영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조카 샤이트 남작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핵폭격을 가해 200만 주민들을 몰살시키면서 제국 전토에 반 귀족 여론이 확대되어 귀족연합군은 가이에스부르크 요새에 고립된다. 플레겔 남작 등 최고 강경파가 제안한 최후의 함대결전도 문벌귀족연합군의 패배로 돌아가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가신 안스바흐 준장에게 살해당하면서 립슈타트 귀족연합은 무너지고 내전은 끝난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안스바흐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가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으며,[10]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내린 마지막 명령에[11] 따라 라인하르트를 암살할 계획을 짠 뒤였다. 그는 주군을 죽이고 항복하는 척 하면서 주군의 시신에 핸드 캐논을 숨겨두었고 전승기념식에서 은닉한 무기를 꺼내 라인하르트 암살을 시도했다. 시도 자체는 우주함대 부사령장관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 상급대장의 방해로 실패했지만 키르히아이스는 안스바흐가 은닉한 레이저총에 맞아 사망한다.

분신과도 같던 친구가 자신의 실책으로 죽자 라인하르트는 폐인으로 전락했다. 제독들은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가 언제나 뒤통수칠 기회를 노리던 리히텐라데 공작에게 숙청당하는 것 아니냐고 불안해했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그때 참모장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중장이 나서 "안스바흐는 사실 리히텐라데 공작의 사주를 받아 라인하르트를 암살하려 했다"는 시나리오를 꾸며 리히텐라데 공작을 먼저 치자고 주장했고, 다른 제독들은 이에 수긍했다. 곧 2만 척에 달하는 고속순양함대가 낙오자들을 내버려둔 채로 질주했고 불과 2주 뒤 오딘 상공은 회군한 제국군 함대에 장악당했다. 리히텐라데 공작은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오스카 폰 로이엔탈 대장에게 체포당했으며 그가 가지던 국새도 볼프강 미터마이어 대장이 접수했다.

이후 재기한 라인하르트는 리히텐라데 일족에 대해 10살을 넘은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는 변경으로 유배를 보내는 가혹한 처분을 내린다. 그리고 제국군 최고사령관을 유지한 채로 제국재상에 취임하여 국정을 장악했으며 작위를 공작으로 높였다. 라인하르트의 부하들도 1계급씩 승진하면서 정치와 군사는 모두 라인하르트 원수부가 장악한다.

5.3. 개혁과 황제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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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을 장악한 라인하르트는 '공평한 재판과 공평한 세금 제도'라는 모토에 따라 제국을 뜯어고치는 대개혁을 추진했다. 불공정했던 형법과 민법이 공정하게 개정되었으며 문벌귀족들이 누리던 면세 특권을 폐지했다. 또한 반란을 일으킨 구 대귀족들의 재산을 모조리 압류하여 제국을 괴롭히던 재정적자를 단번에 해결했으며 귀족들이 소유하던 저택들을 평민을 위한 병원과 복지시설로 사용했고 귀족들이 쌓아놓았던 예술품들은 모조리 공공 미술관으로 보내버렸다. 또한 귀족들이 소유한 장원도 모조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농노 역시 해방시켰다. 귀족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특수 금융기관이 폐지되고 농민들에게 저금리로 영농자금을 대출해주는 농민금고가 신설되었다.

라인하르트는 행정조직 역시 개혁했다. 과거 왕조의 반역자, 공화주의자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민중을 탄압하고 언론을 검열했던 사회질서유지국은 일시 폐지되었다가 내국안전보장국으로 개편되었고, 사상범과 정치범도 급진 공화주의자와 테러리스트를 제외하면 모두 석방되었다.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던 몇몇 신문과 잡지도 재간이 허가되었다. 이 개혁에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은 평민들은 라인하르를 '해방자', '개혁자'라고 칭송하며 그를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현실에 분통을 터뜨리는 문벌귀족들을 자발적으로 감시했다.

그러나 이 시기 골덴바움 왕조는 국력 면에서는 이전보다 더 강해졌을지는 몰라도 왕조의 존속 면에서 보자면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문벌귀족과 리히텐라데 후작이 연달아 숙청되며 왕조를 수호할 사람이 사라졌고,[12] 궁정에는 제위를 찬탈할 기회를 노리는 라인하르트 일파가 가득 차게 되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에르빈 요제프 2세를 폐할 명분이 없어서 찬탈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한편 페잔 자치령은 제국과 동맹의 대립에서 어부지리를 챙긴다는 기존 계획이 제국령 침공작전의 실패로 무너졌음을 깨닫고 차라리 제국에 붙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한다는 새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국이 동맹을 침공할 명분을 제공해야 했고, 자치정부는 페잔으로 망명한 문벌귀족 잔당과 접촉하여 은하제국 정통정부 수립과 황제 납치를 계획했다. 라인하르트도 골칫거리인 황제를 남의 손으로 제거할 수 있었기에 흔쾌히 페잔의 은밀한 제의를 받아들였다.

계획대로 페잔이 파견한 구출납치조는 오딘에 주재하는 페잔 판무관 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황궁 노이에 상수시에 잠입하여 에르빈 요제프 2세를 납치했다. 귀족들은 황제와 함께 동맹에 망명하여 욥 트뤼니히트 최고평의회 의장의 도움을 받아 은하제국 정통정부를 설립하고, 동맹과 페잔의 지원을 받아 라인하르트를 타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어떠한 외교교섭을 거부하고, 전쟁을 선포하여 동맹 정부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납치당한 에르빈 요제프 2세를 폐하고 선선제 오토프리트 5세의 피를 이은[13] 페크니츠 자작가의 갓난아기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은하제국 38대 황제이자 유일한 여제 카타린 케트헨 1세였다.

5.4. 골덴바움 왕조, 라그나로크를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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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황제가 즉위함에 따라 카타린 여제의 아버지 위르겐 오퍼 폰 페크니츠 자작이 공작으로 승격되었지만 이미 궁정은 라인하르트 일파로 장악된 뒤였다. 이제 황제는 라인하르트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자리로 전락했으며, 골덴바움 가문의 운명은 오직 라인하르트의 의지에 달렸다.

대 동맹 선전포고를 한 라인하르트는 로이엔탈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이제르론 회랑 방면군으로 이제르론 요새를 공격하는 척 하면서 미터마이어 원수와 자신이 지휘하는 제국군 본대로 페잔 자치령을 기습 공격하여 병합한다. 그리고 페잔 회랑을 통해 동맹을 침공하고 제1차 란테마리오 성역 회전에서 동맹군 주력부대를 와해시켰지만 양 웬리 원수가 지휘하는 양 함대가 미쳐날뛰면서 제국군 제독들을 연달아 패퇴시켰고, 버밀리온 성역 회전에서는 두 번이나 라인하르트를 죽일 뻔했다. 하지만 제국군 침공 이후 숨어있던 동맹 국가원수 욥 트뤼니히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를 감금하고 제국에 항복해버리는 바람에 동맹을 정복할 수 있었다.

동맹의 항복을 받은 라인하르트는 곧바로 바라트 화약을 맺어 동맹을 사실상 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몇몇 부대만 남겨둔 채 제국으로 귀환하여 논공행상과 제도 정비에 나섰다. 라인하르트를 따르던 제독들은 다시 한번 1계급 승진했으며 프란츠 폰 마린도르프 백작이 국무상서, 오이겐 리히터가 재무상서, 칼 브라케가 신설된 민정상서에 임명되었다.

남은 과제를 끝마친 라인하르트는 오베르슈타인을 통해 6월 20일 페크니츠 공작을 제국재상부로 불러 여제의 퇴위선언서와 양위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페크니츠 공작이 양위를 하는 조건으로 페크니츠 가문의 작위와 재산과 안전을 보장하며 여제가 죽을 때까지 매년 150만 제국마르크를 연금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상아세공에 빠져 정치와 군사에 관심이 없던 페크니츠 공작은 벌벌 떨다가 라인하르트의 서명이 적혀있는 쪽지를 보고서야 안심하며 순순히 선언서에 서명했다.

6월 22일, 라인하르트는 황궁 노이에 상수시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열고 황제로 즉위하여 로엔그람 왕조를 건국했다. 무수한 신하들이 새 왕조 창건을 환영했으며 골덴바움 왕조는 38대 490년의 역사를 마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골덴바움 왕조가 멸망하고 1년 뒤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가 실종된 에르빈 요제프 2세를 옹립하여 골덴바움 왕조의 부흥을 명분으로 거병할 것이라는 뜬소문과 추측이 무성했다. 그러나 로이엔탈은 로엔그람 왕조 이전 제국과 동맹이 우주를 반씩 통치하던 양강체제로 돌아가려고 했지만[14] 골덴바움 왕조의 부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반란 명분도 구왕조의 부흥이 아니라 황제가 병환을 앓는 틈을 노려 국정을 농단한 간신을 배제하겠다는 것이었다.

6. 골덴바움 가문의 운명

멸망 이후 골덴바움 가문의 운명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우선 프리드리히 4세의 직계인 에르빈 요제프 2세은하제국 정통정부의 황제로 옹립되었지만 정통정부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행방이 묘연해졌고, 황제를 보좌하던 알프레트 폰 란즈베르크 백작이 우주력 800년 11월 체포되면서 황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란즈베르크 백작의 수기를 분석한 결과 황제는 우주력 800년 3월에 거식증에 걸려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황제의 시신은 하이네센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신분증 위조로 체포당한 레오폴트 슈마허의 증언으로 그 시신은 시신안치소에서 훔친 가짜이며 진짜 황제는 란즈베르크 백작의 손을 뿌리치고 어디론가 도망쳐버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황제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결국 공식 기록에 행방불명으로 기록되었다.

프리드리히 4세의 방계인 자비네 폰 리텐하임엘리자베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는 처음 언급된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측컨대 립슈타트 전역으로 두 대귀족 가문이 망했기 때문에 이들도 몰락했으리라 추정된다.[15]

마지막 황제 카타린 케트헨 1세와 그 아버지 위르겐 오퍼 폰 페크니츠는 본래 보잘것없는 방계 황족이었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라인하르트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내쫓을 때도 안전을 보장하고 거액의 연금을 지급하는 등 섭섭지 않게 대우해주었기 때문에 라인하르트에게 이용당함으로서 팔자가 핀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그 외의 방계황족들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문벌귀족들에 대한 처분과 비슷한 처분을 받았을 것이다.

[1] OVA에서는 8억 명.[2] 애초에 플로리안을 살해하기 위해 황궁 노이에 상수시에 사병을 끌고온 순간부터 반역이나 다름없는 짓을 벌인 셈이니 어차피 처형 대상이었다.[3] 장수만 했을 뿐 아니라 100세 가까운 나이임에도 5명의 총희를 거느렸으며 사슴갈비를 뜯어먹는 모습이 마치 성장기 청소년같았다고 할 정도로 식욕도 왕성했다. 추측하건대 진짜로 독살당하지 않았다면 100세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4] 그래서 패전인데도 사상자가 크지 않았다. 투항병이 전사자의 20배가 넘었다.[5] 폭군을 처단한 공을 인정하여 그 자리에서 대장으로 특진시켰지만 그 직후 폭군의 앞잪이로서 무수한 악행을 저지른 죄로 총살형에 처했다.[6] 작위가 오등작 중 최하위인 남작으로 강등되었고 영지의 8할을 몰수당했다. 여기에 제도 오딘으로의 출입을 엄금당한건 덤. 결국 그는 여생을 남은 영지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죽었다.[7] 이 사람 인생도 참 드라마틱한데, 본디 막시밀리안의 시녀였고 결혼해 황후가 된 뒤에도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가 정치적으로 온갖 위협을 받자 옆에서 직접 권총을 차고 호위를 서기까지 했다. 다곤 성역 회전 전까지 헤르베르트가 인생 전체를 통틀어 겪었던 고작 두 가지 고난 중 하나를 당하게 만든 여인이기도 한데, 헤르베르트가 이 여인에게 추파를 던졌다가 퇴짜를 맞았던 일이(...) 바로 그것.[8] 한편 은영전 팬들 사이에서는 진짜가 아닌 가짜였는데 시녀와 사랑에 빠져 사랑의 도피를 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9] 제국군이 포위섬멸을 위해 기동하자 그 인근에 있던 동맹군 군함들이 패닉에 빠져 항로계산도 안하고 워프해버렸다. 이 때문에 시공진동이 발생하여 제국군을 혼란에 빠뜨렸다.[10]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죽인 이유도 어차피 라인하르트에게 잡혀도 죽을 텐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가의 마지막 당주로 깨끗하게 자결하라는 의미였다. 처음에는 공작도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자결하려고 했지만 정작 독주를 보자 살고 싶다고 징징대서 안스바흐가 죽인 것.[11] 반드시 라인하르트를 암살하라는 것.[12] 빌리바르트 요아힘 폰 메르카츠, 아달베르트 폰 파렌하이트처럼 왕조에 충성심을 가진 이들은 내전에서 패해 망명길에 오르거나 라인하르트파로 전향했다.[13] 원작에서는 '루트비히 3세'의 증손녀라고 나오지만 외전 2권에서 나온 황제 리스트를 보면 오토프리트 5세가 맞다. OVA에서도 오토프리트 5세의 증손녀라고 수정했다.[14] 실제로 반란에 협조하면 구 동맹령의 지배권을 넘기겠다고 이제르론 공화정부에 제안하기도 했다.[15] 후지사키 류 코믹스에서는 두 사람 모두 립슈타트 전역 중 사망한 것으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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